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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白鹿潭) - 한라산 소묘 / 정지용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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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白鹿潭) - 한라산 소묘

- 정지용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렇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는 별들이 켜 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 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어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윈 송아지는 움매 - 움매 -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風蘭)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 -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덩쿨 기어간 흰돌배기 꼬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이(石栮)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을 색이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어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祈禱)조차 잊었더니라.

(문장 3, 1939.4)


< 감상의 길잡이 >

한때 정지용은 잊혀진 시인이었다. 1930년대 한국 현대시의 성취를 대표하는 이 시인은 우리 역사의 험한 물결에 묻혀 한동안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로운 세월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우리 말을 다루는 재주에서, 그리고 그것을 시적 직관과 함께 용해하는 데서 그는 우뚝한 봉우리를 점했다. 그의 시는 오늘 다시 읽어보아도 세련됨의 빛이 퇴색하지 않는다.

 

제주도는 시인의 손길에 의해 다채롭고 풍요로운 기록을 얻고 있다. 시인은 여행객이 되어서 제주도의 풍광을 그리는데, 그것이 간단한 기행에 그치지 않고 높은 시적 성취를 얻고 있는 것은 축약과 배치의 묘에서 말미암는다. 적절히 생략하고 배제하여, 뻐꾹채꽃, 암고란, 백화, 도체비꽃, , 소 풍란, 꾀꼬리, 휘파람새,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그리고 수많은 고산식물들이 제각기 의연한 자리를 지키게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객관적 외경을 시인의 특이한 시선으로 정돈하는 데서 벗어나, 간혹 새 행에 삽입된 시인의 주관적 내면의 토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1에서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는 없어도 무방할 것 같지만, 자칫 잊어버릴 위험이 있었던 화자의 존재를 재미있게 환기하고 있다. 3에서의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라는 오만함, 6에서의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의 애상, 9에서의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의 익살 등이 그러하다. [해설: 이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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