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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야우중(秋夜雨中)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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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야우중(秋夜雨中)

秋風唯苦吟 (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세상에 알아 주는 이 없네.

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요점 정리

 

지은이 : 최치원(崔致遠)

형식 : 오언 절구

어조 : 번뇌적, 고뇌적, 서정적

성격 : 번민과 외로움

표현 : 대구법

특징 : 신분적 한계로 좌절을 겪은 화자의 심정이 표현됨, 대구의 구조로 이루어짐,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감정의 형상화

주제 : 가을 비오는 날 밤의 외로움 또는 고국(고향)에 대한 그리움, 뜻을 펴지 못한 지식인의 고뇌

제재 : 가을비가 내리는 밤

출전 : <동문선> 권 19

구성

깊어 가는 가을밤에 괴롭게 시를 읊조림.

기(起)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탄식함.

승(承)

창밖에 밤늦도록 비가 내리고 잠을 이루지 못함.

전(轉)

세상 일에 초연할 수 없는 시적 화자의 번민.

결(結)

내용 연구

 

고음 : 괴로이 시를 읊조림

세로 : 세상 살아가는 길. 처세의 방법

지음(知音) : ①음악의 곡조를 잘 앎. ②새나 짐승의 울음을 가려 잘 알아들음. ③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거문고의 명인 백아가 자기의 소리를 잘 이해해 준 벗 종자기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말이다. 유사한 말로 지음인. 평생 동안에 한 명의 지음이라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는 자기의 속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의 의미로 쓰였다.

삼경 : 한 밤중,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자시, 병야

만리심 : 먼 고향을 그리는 마음. 향수, 사향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세상에 알아 주는 이 없네. : 세상을 등지고 고뇌하는 작가의 심정이 드러난 부분으로 힘들게 시를 읊고 있지만 더 힘든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지식과 포부를 펼 수 없게 된 데 대한 좌절감이 토로되어 있다.

창 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 가을이라는 계절과 밤이라는 시간, 비가 오는 날씨는 화자의 고뇌와 어울리는 배경을 이루며, '밤비'는 화자의 고뇌를 자연물을 통해 나타내는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배경은 시적 화자의 고뇌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차단되어 버린 처지를 암시하고 있다.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일에 초연할 수 없는 화자의 번민이 드러나 있고, '만리'는 화자와 세상 사이의 심정적 거리를 말하며, 이렇게 거리가 많다는 것은 화자가 세상 일과 인연을 끊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속 마음은 여전히 세상일에 미련을 끊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해와 감상

 

'추야우중(秋夜雨中)'은 5언 절구(五言絶句)이다. 깊어가는 가을 밤의 비바람 속에서 서정적 자아는 괴롭게 시를 읊는다. 시를 짓는 일도 괴롭지만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정적 자아는 밤늦도록 잠 못 들고[전전반측(輾轉反側)], 등잔을 마주했으나 마음은 만리 길을 떠돈다. 이 작품은 '가을 바람/세상', '삼경(三更)/만리(萬里)'의 대구로 짜임새를 잘 갖추어져 있고, 4구는 수구초심(首丘初心)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 ≒수구(首丘). 수구초심이랍니다. 짐승도 죽을 때면 따뜻한 곳을 찾아 눕는다는데 하물며 사람이 고향 생각을 해야지.'한수산, 부초'호마의 북풍.호사수구.)

이해와 감상2

 

이 시는 5언 절구의 한시로, 깊어 가는 가을밤의 비바람 속에서 괴롭게 시를 읊는 시적 화자가 등장하고 있다. 이 시의 제작 시기는 당나라에 유학한 최치원의 귀국 이전 작품이라고도 하고, 또 귀국 후의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는 그의 시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시 경향과 내용으로 보아 귀국 후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구(結句)의 '만리심(萬里心)'도 만리 타국에 있는 작자의 심경이기보다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나서 이 세상과는 이미 멀리 떨어져 있는 작자의 심회를 호소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적 화자에게는 시를 짓는 일도 괴롭지만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정적 자아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불 앞에 마음은 만 리 밖을 내닫는다고 읊조리고 있다. '가을 바람(秋風)' 와 '세상(世上)', '삼경(三更)'과 '만리(萬里)'가 대구를 이루어 짜임새가 갖추어져 있으며 시적 화자의 서정이 비가 내리는 가을밤의 서경과 조화를 이루어 시상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지만 난세를 만나 마음껏 뜻을 펼치지 못한 것에 대해 고민하였으며, 이 시는 그러한 지식인의 고뇌를 잘 담아낸 작품이다.

심화 자료

후대 문학 속의 최치원

 

최치원은 가야산에 은둔한 뒤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을 남겼는데, 부산 해운대 등 전국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수이전'과 '최고운전' 등 후대의 작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여 역사적 인물이 상상적 인물로 변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수이전(殊異傳)'은 고려 초기 문종(文宗)때 문장가 박인량(朴寅亮)이 지은 설화집인데 최치원은 이 작품에서 전기(傳奇)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최고운전(崔孤雲傳)'은 조선 시대 작자 . 연대 미상의 고대소설로 최치원의 파란 많은 생애를 설화적인 허구적 구성으로 영웅화한 작품이다. 그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주인공 최고운이 태어나자 그의 부모는 금돼지의 새끼로 잘못 알고 내다 버리지만, 선녀와 연꽃 및 백조들이 아기를 돌보는 기적이 나타나자, 다시 데려다가 키워 최고운은 학문과 문장으로 크게 떨치게 된다. 하루는 중국 황제가 들으니 시 읊는 소리가 하도 낭랑하여 알아보게 한 즉, 그것은 신라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즉시 신하를 신라로 보내어 알아 보았더니, 신라에는 재사(才士)가 수백 명이나 된다는 보고에 황제는 신라 석함(石函)에 달걀을 넣고 초로 밀봉한 다음 다시 신하를 시켜 석함 속의 물건을 시로 지어 보내지 않으면 대국(大國)을 가볍게 본 죄로 다스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최고운은 시를 지어 이미 그 내용물인 달걀이 병아리가 되었다고 답하였다. 이에 탄복한 황제는 최고운을 중국에 초빙한다. 중국에서 장원급제한 그는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적장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마침내 난을 다스리니 황제는 더욱 감탄한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중국인 신하들의 모함으로 외딴 섬에 유배되어 몇 차례의 위기를 도술로 모면한 뒤 무사히 신라로 돌아온다. 왕은 그에게 벼슬을 주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가야산(枷倻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최고운의 삶과 문학

 

고운은 그 이전까지의 우리 문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신 분, 우리나라 문학을 중흥시킨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은 후대 문인들로부터 많은 동경을 받고 있다. 이는 그가 약자의 편에 섰으며, 또 약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중국에 있을 때는 중국인에 비해 입지가 약했고, 환국한 뒤에도 그는 진골들에 비하면 기반이 약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이 그에 관한 많은 설화의 생성을 유도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인간의 보편적 심리는 강자 편에 서기보다는 약자 편에 섰기 때문이다. 그는 또 서민층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고운의 불우했던 삶이 서민들의 정서와 부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고운은 우리나라 방외 문학(方外文學)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최자(崔滋)가 말하고 있듯이 고려 시대에는 이능봉·오세제·안순지 등이 바로 고운의 삶을 동경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와서는 김일손·박제가 등이 고운의 행적을 동경하는 글을 남기도 했다. [출처 : 이구의, <최고운의 삶과 문학> (새문사, 1981) ]

 

최치원의 현실적 고민이 담긴 '진정상태위시(陳情上太慰詩)'

 

海內誰憐海外人 (해내수련해외인) 뉘라서 외국 사람 가엾게 여겨 보살펴 주리.

問津何處是通津 (문진하처시통진) 묻노라, 어디메가 내가 갈 나루로 통하는지.

本求食祿非求利 (본구식록비구리) 애초에 食祿만 구했고 利를 구하지 않았으며

只爲榮親不爲身 (지위영친불위신) 어버이의 영광을 위했고 내 몸 위하지 않았네.

客路離愁江上雨 (객로리수강상우) 떠도는 나그네의 시름, 강 위의 비처럼 내리고

故苑歸夢日邊春 (고원귀몽일변춘) 고향 가고 싶은 꿈은 봄 햇살처럼 떠오른다.

濟川幸遇恩波廣 (제천행우은파광) 은덕 입어 다행히 국난극복에도 참여했으니

願濯凡纓十載塵 (원탁범영십재진) 이제 갓 끈의 십 년 먼지 씻으려오.

 

해내(海內, 당나라)의 누가 해외 사람(외국인)을 가엾게 여기리.

묻노라 어디 길이 내가 갈 나루로 통하는가?

애초에 식록(食祿)을 구했고, 이(利)를 구하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려 하고 내 몸 위하지 않았다.

나그네 길 이별의 시름은 강 위의 빗소리요,

고원(古園)에 돌아가는 꿈은 햇가의 봄이라.

냇물 건너다 요행히 은혜로운 물결 듬뿍 만나서,

속된 갓끈의 십 년 먼지를 다 씻어 버렸으면,

 

그러나 중국인은 비록 해외 사람에게도 벼슬을 주었지만 그것은 세계 지배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고, 그들에게 벼슬을 주었지만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이를 기화로 신라로 왔지만 신라 역시 그를 받아 줄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제한이 되어 있었다. 성골, 진골이라는 신분 사회에서는 육두품 출신인 최치원은 중국과 다를 바 없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일생을 보낸다.

 

계원필경

 

통일신라시대의 학자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857~?)의 시문집으로 활자본. 20권 4책. 저자는 일찍이 당(唐)나라에서 벼슬하였는데, 879년(신라 헌강왕 5) 당의 황소(黃巢)의 난 때에는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高폿)의 종사관으로, 표장(表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 많은 명문(名文)을 지었으며, 885년 귀국하였다. 그 뒤, 재당시(在唐時)에 저작한 《계원필경》 《중산복궤집(中山覆섣集)》 《시부집(詩賦集)》 등 28권을 찬성(撰成)하여 헌강왕(憲康王)에게 진헌(進獻)하였는데, 그 중 《중산복궤집》과 《시부집》 등 8권은 전하지 않고 《계원필경》 20권만이 전한다.

내용은 권1에 <하개연호표(賀改年號表)> 등 표(表) 10편, 권2에 <사가태위표(謝加太尉表)> 등 표 10편, 권3∼4에 <사조장(謝詔狀)> 등 장(狀) 20편, 권5에 <주유황소(奏誘黃巢) 등 주장(奏狀) 10편, 권6에 <하입만사회장(賀入蠻使廻狀)> 등 10편, 권7∼10에 <활주도통왕령공(滑州都統王令公)> 등 별지(別紙) 80편, 권11에 <격황소서(檄黃巢書)> 등 격문(檄文) 4편과 <답절서주사공서(答浙西周司空書)> 등 서(書) 6편, 권12에 <제주허칙위곡(趙州許勅委曲)> 등 위곡(委曲) 20편, 권13에 거첩(擧牒) 25편과 <내행묵칙첩사(內行墨勅牒詞)> 5편, 권14에 거첩 25편, 권15에 <응천절재사(應天節齋詞)> 등 15편, 권16에 제문(祭文)·서(書)·기(記)·소(疏) 등 10편, 권17에 <초투헌태위계(初投獻太尉啓)> 등 10편과 7절기덕시(七絶記德詩) 30수, 권18에 서장(書狀)·서계(書啓) 등 25편, 권19에 <상좌주상서별지(上座主尙書別紙)> 등 별지 ·장계(狀啓)·잡서(雜書) 등 20편, 권20에 장계 ·별지 ·제문 등 10편과 <진정상태위시(陣情上太尉詩)> 등 시 30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저자의 명문만을 가려 넣은 동방 최고(最古)의 문집으로, 특히 권11에 수록된 <격황소서>는 황소(黃巢)가 이것을 읽고 상 앞에 엎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또, <헌생일물장(獻生日物狀)>은 인삼(人蔘)연구에,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는 월남사(越南史)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며, 또한 당대전란사(唐代戰亂史), 한족(漢族)과 남만(南蠻)의 교섭관계, 신라와 당과의 교통 및 문화교류 등의 연구에 문헌적 가치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영향에 불과하다. 이 책에 수록된 표(表)·장(狀)·계(啓)·격(檄)·서(書) 등 온갖 체(體)의 글은 모두 사륙변려체(四六폿儷體)의 명문으로 되어 있어, 그 능숙한 형식미와 대장법(對仗法)의 묘는 독보적인 것으로서 한시문(漢詩文)에 끼친 문학적 가치는 물론, 후세의 한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불후의 명저이다.

초간본(初刊本)과 여대본(麗代本)이 있었다 하나 전하지 않으며, 또 과거 1000여 년 사이에 몇 번이나 출간되었는지 이 또한 문헌이 인멸되어 알 길이 없다. 다만, 현존하는 각본을 소개하면, ① 구각본(舊刻本):조선 초기 판본 혹은 고려판(高麗版). ② 일본 아리야마로본[在山樓本:前間恭作의 장서각]:숭정(崇禎) 이전의 각판본. 20권 4책. ③ 제국도서관본(帝國圖書館本):각본. 20권 3책. ④ 박물관본(博物館本):목판본. 20권 4책. ⑤ 서서서목초본본(西序書目草本本):목판본. 20권 4책. ⑥ 규장각본(奎章閣本):각판. 20권 4책. 서거정(徐居正)의 서문이 있다. ⑦ 도광갑자본(道光甲子本):20권 4책. 홍연천(洪淵泉)의 서문이 있다. 기타 남만주철도본, 파리 동양어학교본, 가나자와본[金澤本] 등 15∼16종을 헤아릴 수 있다.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 때 사람으로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5두품이나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 中山覆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격황소서 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 四山碑銘〉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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