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청학동(靑鶴洞)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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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동(靑鶴洞)

지리산은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북쪽 백두산으로부터 일어나서 꽃봉오리처럼 그 봉우리와 골짜기가 이어져 대방군(帶方郡)에 이르러서야 수천 리를 서리고 얽혀서 그 테두리는 무려 십여 고을에 뻗치었기에 달포를 돌아다녀야 대강 살필 수 있다. 옛 노인들의 전하는 바로는 "그 속에 청학동(靑鶴洞)이 있는데 길이 매우 협착하여 겨우 사람이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수십 리를 가서야 허광(虛曠)한 경지가 전개된다. 거기엔 모두 양전(良田) 옥토(沃土)가 널려 있어 곡식을 심기에 알맞으나, 거기엔 청학만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고, 대개 여기엔 옛날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들이 살았기에 무너진 담과 구덩이가 가시덤불에 싸여 남아 있다."고 한다.

연전에 나는 당형(堂兄) 최상국(崔相國)과 같이 옷깃을 떨치고 이 속된 세상과는 등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우리는 서로 이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대고리짝에 소지품을 넣어 소 두서너 마리에다 싣고 들어가 이 세속과는 담을 쌓기로 했다. 드디어 화엄사(華嚴寺)로부터 출발하여 화개현(花開懸)에 이르러 신흥사(新興寺)에 투숙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모두가 선경이었다.

천암(千巖)은 경수(競秀)하고 만학(萬壑)이 쟁류(爭流)하며 대울타리에 초가들이 복숭아꽃 살구꽃 핀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니 거의 인간 세상이 아닌 듯하나 찾고자 하는 청학동은 마침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시만 바윗돌에 남기고 돌아왔다.

 

두류산은 드높이 구름 위에 솟고

만학 천암(萬壑千巖) 둘러보니 회계(會稽)와 방불하네

지팡이에 의지하여 청학동 찾으려 했으나

속절없는 원숭이 울음소리만 숲 속에서 들리네

누대(樓臺)는 표묘(  )한데 삼산(三山)은 안 보이고

써 있는 넉 자가 이끼 끼어 희미하네

묻노니 선원(仙源)은 어데인가

낙화 유수(落花流水)만이 가물가물

 

어제 서루(書樓)에서 우연히 오류 선생집 (五柳先生集)을 훑어 보다가 도원기(桃源記)가 있기에 이것을 반복해 보니, 대개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처자를 거느리고 그윽하고 깊어 궁벽진 곳을 찾아 산이 둘렸고 시내가 거듭 흘러 초동(樵童)도 갈 수 없는 험한 곳을 찾아 여기에 살았던 것이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에 어떤 어부가 다행히 한 번 그 곳을 찾았으나 그 다음엔 길을 잃어 그 곳을 다시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세에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와 시로 전하여 도원(桃源)으로써 선계(仙界)라고 하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하였으나 아마도 그 기록을 잘못 읽었기 때문일 것이니 사실은 저 청학동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유자기(劉子驥)와 같은 고상한 선비를 만나서 나도 그 곳을 한 번 찾아가 볼 것인가.

파한집(破閑集)'에서

요점 정리

작자 : 이인로(李仁老)

갈래 : 수필, 기행 수필

성격 : 기행문적, 서정적, 체험적, 예시적

구성 : 체험과 인용의 교차로 구성

기 : 청학동의 지형과 유래

승 : 청학동으로의 출발

전 : 선경에 대한 감상

결 : 청학동 전설과 지향성[어떤 목표로 뜻이 쏠리어 향함. 또는 그 방향이나 그쪽으로 쏠리는 의지를 말하는 것으로 지양(止揚)과는 다르다. 지양은 ①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함. '피함', '하지 않음'으로 순화. ② 철학에서는 변증법의 중요한 개념으로, 어떤 것을 그 자체로는 부정하면서 오히려 한층 더 높은 단계에서 이것을 긍정하는 일. 모순 대립하는 것을 고차적으로 통일하여 해결하면서 현재의 상태보다 더욱 진보하는 것이다. '벗어남', '삼감'으로 순화.]

표현 : 인용법, 설의법(고사 성어와 문장을 예시하면서,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간 체험과 찾지 못한 안타까움을 교차시키고 있으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乖離)를 관조적으로 서술하고 있다)을 사용하고 고사성어와 문장을 예시하면서,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간 체험과 그 청학동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을 교차시키고 있음

제재 : 지리산 청학동

주제 : 이상향(理想鄕)에 대한 동경(憧憬)

출전 : 파한집

 

 

내용 연구

 

지리산은 두류산(頭留山 :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북쪽 백두산으로부터 일어나서 꽃봉오리처럼 그 봉우리와 골짜기가 이어져 대방군(帶方郡)에 이르러서야 수천 리를 서리고 얽혀서[북쪽 백두산으로부터∼얽혀서 : 지리산의 웅대한 규모와 수려한 봉우리의 자태가 묘사되어 있다] 그 테두리는 무려 십여 고을에 뻗치었기에 달포(한 달 이상이 되는 동안)를 돌아다녀야 대강 살필 수 있다. 옛 노인들의 전하는 바로는 "그 속에 청학동(靑鶴洞)이 있는데 길이 매우 협착[(狹窄) : 몹시 좁음.]하여 겨우 사람이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수십 리를 가서야 허광(虛曠 : 텅 비어있음. 탁 트여 넓게 펼쳐짐)한 경지가 전개된다. 거기엔 모두 양전(良田) 옥토(沃土)[(良田沃土) : 농사를 짓기에 매우 비옥한 땅.]가 널려 있어 곡식을 심기에 알맞으나, 거기엔 청학만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고, 대개 여기엔 옛날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들이 살았기에 무너진 담과 구덩이가 가시덤불에 싸여 남아 있다."고 한다. - 청학동의 지형과 유래

연전[몇 해 전]에 나는 당형[(堂兄) : 사촌, 종형제지간을 말함.] 최상국(崔相國)과 같이 옷깃을 떨치고 이 속된 세상과는 등지고[은둔] 싶은 마음이 있어 우리는 서로 이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대고리짝[대오리 따위로 엮어서 상자같이 만든 물건 주로 옷을 넣어 두는 데 쓴다]에 소지품을 넣어 소 두서너 마리에다 싣고 들어가 이 세속과는 담을 쌓기로 했다. 드디어 화엄사(華嚴寺 : 전남 구례군 지리산 노고단 서쪽에 있는 사찰)로부터 출발하여 화개현(花開懸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지방의 통일 신라 때 행정 구역)에 이르러 신흥사(新興寺)에 투숙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모두가 선경이었다. - 청학동으로의 출발

천암(千巖)은 경수(競秀 : 빼어남을 다툼)하고 만학(萬壑 : 첩첩이 겹쳐진 깊고 큰 골짜기)이 쟁류(爭流 : 다투어 물이 흐름)하며 대울타리에 초가들이 복숭아꽃 살구꽃 핀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니 거의 인간 세상이 아닌 듯하나[천암(千巖)은∼아닌 듯하나 : 수많은 바위가 서로의 빼어남을 다투고 수많은 골짜기의 물이 흘러 내리며, 산과 계곡의 웅장함과 평온한 인가를 감싸는 꽃의 기운이 황홀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구절로 선경과 다름없는 지리산의 경치를 이상적으로 묘사한 부분] 찾고자 하는 청학동은 마침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천암은 경수하고 ~ 찾지 못하고 말았다 : 바위와 산, 계곡이 아름답게 펼쳐진 곳은 다 보았으나 청학동은 결국 못 보았다는 뜻이다. 청학동의 현실적 부재(不在)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하는 수 없이 시만 바윗돌에 남기고 돌아왔다.

두류산은 드높이 구름 위에 솟고

만학 천암(萬壑千巖) 둘러보니 회계(會稽 : 중국의 지명)와 방불[거의 비슷]하네

지팡이에 의지하여 청학동 찾으려 했으나[지팡이에 의지하여∼했으나 : 사람 발길이 드문 험한 곳이라는 것이 '지팡이에 의지하여'라는 표현에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청학동'은 청학이 서식하는 이상향을 가리킨다.]

속절없는[어찌할 도리가 없는] 원숭이 울음소리만 숲 속에서 들리네[원숭이 울음 소리는 산이 깊다는 말로 일종의 관용어임]

누대(樓臺 : 누각과 대사)는 표묘(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모양. 아득하고 어렴풋함)한데 삼산(三山 :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세 개의 산)은 안 보이고[삼산(三山)은 안 보이고 :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세 개의 산으로써,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이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신선의 지경이 보이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인적은 보이나 신선의 지경은 보이지 않고]

써 있는 넉 자가 이끼 끼어 희미하네

묻노니 선원(仙源 : 신선 세계, 곧 청학동)은 어데인가[결국 갈 수 없는 곳이 선원이라는 뜻이다]

낙화 유수(落花流水 :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여기서는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뜻함)만이 가물가물 - 선경에 대한 감상

어제 서루(書樓 : 책을 넣어 두거나 서재로 쓰는 다락)에서 우연히 오류 선생집 (五柳先生集)을 훑어 보다가 도원기(桃源記)가 있기에 이것을 반복해 보니, 대개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처자를 거느리고 그윽하고 깊어 궁벽진 곳을 찾아 산이 둘렸고 시내가 거듭 흘러 초동(樵童 : 땔감을 하는 어린 나무꾼)도 갈 수 없는 험한 곳을 찾아 여기에 살았던 것이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에 어떤 어부가 다행히 한 번 그 곳을 찾았으나 그 다음엔 길을 잃어 그 곳을 다시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무릉도원의 고사]

후세에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와 시로 전하여 도원(桃源)으로써 선계(仙界)라고 하고 장생불사(長生不死 : 오래도록 살고 죽지 아니함)하는 신선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하였으나 아마도 그 기록을 잘못 읽었기 때문일 것이니 사실은 저 청학동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유자기(劉子驥 : 진(晋)나라 남양 사람. 물욕을 떠나 산수를 즐기며 은일한 생활을 함)와 같은 고상한 선비를 만나서 나도 그 곳을 한 번 찾아가 볼 것인가.[유자기(劉子驥)와∼볼 것인가 : 나도 한번 이상향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한 구절로 산수를 즐기며 은일한 생활을 한 유자기처럼 살고자 하는 심경을 노래하고 있으며, 이것은 찾지 못한 이상향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큼을 나타내 줌과 동시에 결국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체념이 섞여 있다.] - 청학동 전설과 지향성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이상향인 지리산 청학동을 찾으려 한 작자가 결국 찾지 못하고 바윗돌에 시만 남기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을 담은 기행 수필이다. 어원상 유토피아(utopia)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땅'을 의미한다. 인간의 현실 세계를 살면서도 유토피아를 꿈꾼다. 존재하지 않지만 그곳에 대한 열망은 간절한데, 그 간절함은 유토피아를 지극히 이상(理想)적인 공간으로 해석하게 마련이다. 성서에 묘사된 '에덴 동산'이나 서구 신화상의 '아르카디아(Arcadia)', 동양의 고전에 묘사된 요순 시대의 공간은 모두 이러한 유토피아를 향한 동경의 표현이다.

인간은 현실 세계에 살면서 이상적인 세계를 늘 꿈꾸는 존재이다. 그 이상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 까닭에 유토피아일 수 있다. 이 작품은 이상 세계가 현실에 존재할 때 그것은 이미 이상 세계가 아니며, 이상 세계로서의 청학동은 그대로 남겨 놓아야 한다는 작자의 고집과 믿음이 어우러져 있는 한문 수필이다. 결국 이상향이란 현실과 대립적 성격을 가지면서 현실 속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이 글 안에 담겨 있으면서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상향이 되는 것이다.

심화 자료

고대의 수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 수필은 신라 승려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려의 설화 문학에서 본격적인 수필의 모습이 발견되는데, 박인량(朴仁亮)의 '수이전(殊異傳)', 이규보(李奎報)의 '백운 소설(白雲小說)',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閒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 翁稗設)' 등에 수록된 글이 그 좋은 예이다. 조선 시대에도 수필 형식의 글이 문집속에 잡설(雜說), 만필(漫筆) 등의 이름으로 많이 들어 있다. 문헌상 수필이라는 용어가 보이는 것은 박지원(朴趾源)이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일신수필(馹 隨筆)'을 쓴 경우가 최초이다. 이러한 고대 수필은 17세기 경부터는 한글의 광범위한 보급과 함께 일상적 경험을 기술하는 데 있어 국어 문장이 발휘하는 섬세하고도 구체적인 표현력에 대한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많은 작품이 출현하게 된다.

 

한문 수필의 양식

 

한문 수필로서 본격적 가치를 지니는 것들에는 그 한문학적 양식에 있어 설(說), 기, 잠, 서에 해당하는 것들이 많다. 설이라 함은 간략한 단편으로 콩트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한 모습을 띤다. 이는 사실에 대한 논의적 해설의 성격이 강한 양식이다. 기는 사실의 객관적 기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와 설이 서로 함께 뒤섞여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잠은 깨우쳐 경계하는 뜻을 담고 있는 글이며, 서는 서간문과 같은 형식의 글이다. 그 밖에 제문 같은 것에서도 수필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유토피아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 :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작품으로 동진 태원연간(太元年間 : 376~395)에 무릉(武陵 : 지금의 후난 성[湖南省] 타오위안 현[桃源縣])에 살던 어느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사꽃이 피어 있는 수풀 속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숲의 끝에 이르러 강물의 수원이 되는 깊은 동굴을 발견했다. 그 동굴을 빠져나오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곳의 사람들은 진대(秦代)의 전란을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때 이후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에 기초하여 고대의 자연주의적 유토피아를 묘사한 것으로, 당대(唐代)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원조가 되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 티베트의 샹그리라 계곡에서 낙원을 발견하는 한 영국 남자의 이야기로 머나먼 낙원을 뜻하는 샹그리라란 말은 이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힐턴<Hilton, James>(1900.9.9~1954.12.20)

 

영국의 소설가. 잉글랜드 랭커셔주 레이 출생. 케임브리지대학 재학 중에 이미 처녀작을 발표하였던 조숙 다재한 작가였다. 1933년 히말라야 산중의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비경(境)인 ‘샹그리라’를 무대로 한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으로 호손덴상(賞)을 받았고, 다시 노교사의 반생을 그린 《굿바이 미스터 칩스:Goodbye, Mr.Chips》(34)의 성공으로 일약 유명작가가 되었다. 감상적인 휴머니즘과 모험에 찬 소설은 널리 대중을 매료하여 《갑옷 없는 기사:Knight Without Armour》(33) 《우리는 외롭지 않다:We Are Not Alone》(37)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41) 《시간은 또다시:Time and Time Again》(53) 등 영화화된 작품도 많이 있다. 37년 이후 미국에 정주하였으며, 그 후 귀화하였다.

유토피아<Utopia>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조건 아래 있는 이상사회로 '이상가'(utopian)와 '유토피아적 이상주의'(utopianism)는 대체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이 이상적인 개혁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토머스 모어경이 〈국가의 최선 정체(政體)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 Libellus …… de optimo rei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1516)라는 라틴어 제목으로 출판한 〈유토피아 Utopia〉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의 '아니다'(ou)와 '장소'(topos)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아무 데도 없는'(nowhere)이라는 의미였다. 모어는 1515년 플랑드르에서 대사로 지내는 동안 이성에 의해 정책과 제도가 전적으로 지배받는 이교도의 공산주의 도시국가를 그린 〈유토피아〉 제2권을 썼다. 이 책에 묘사된 국가의 질서와 위엄은 자기이익과 권력 및 부에 대한 탐욕으로 분열된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비이성적인 정책과는 눈에 띄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관해서는 1516년 영국에서 쓴 제1권에 묘사되어 있다. 유토피아에 대해서는 신비에 싸인 여행가 라파엘 하이슬러디가 공산주의만이 사적·공적 생활에 만연해 있는 이기심을 없애는 유일한 치유책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토피아를 언급함으로써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모어는 인간이란 본디 잘못을 저지르기 쉬우므로 악을 치유하기보다는 누그러뜨리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폈다. 따라서 재치가 넘치는 익살의 어느 부분이 진지하게 의도된 것인지 어디가 역설에 불과한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글로 씌어진 유토피아는 사변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일 수도, 풍자적일 수도 있다. 유토피아는 이름이 붙여지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플라톤의 〈국가 Politeia〉는 모어에서 H. G. 웰스에 이르는 많은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유토피아의 모델이다. BC 300년경에 활동한 에우헤메로스의 〈신성한 역사 Sacred History〉에는 이상적인 섬이 나오며, 플루타르코스가 쓴 리쿠르고스 전기는 스파르타를 이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틀란티스 전설은 많은 유토피아 신화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와 탐험이 이루어지면서 유토피아는 좀더 현실적인 배경을 갖게 되었고, 모어는 〈유토피아〉를 아메리고 베스푸치와 연결지어 생각했다. 모어의 유토피아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 주제를 다룬 그밖의 유토피아에는 안토니오 프란체스코 도니의 〈여러 사회들 I mondi〉(1552)과 프란체스코 파트리치의 〈행복의 나라 La città felice〉(1553)가 있다. 현실적인 유토피아의 선구는 톰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La città del sole〉(1602경 집필)이다. 1627년 출판된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섬 New Atlantis〉은 과학적인 계획안을 지닌 점에서 실용적이지만 철학과 종교에 관해서는 사변적이다. 그리스도교의 유토피아적 공동사회는 요한 발렌틴 안드라에의 〈크리스티아노폴리스교 도시 Christianopolis〉 (1619), 'I. D. M.'의 〈Antangil〉(1616), 새뮤얼 고트의 〈Novae Solymae libri sex〉(1648)에 나타나 있다. 청교도주의는 문학을 통해 수많은 종교적·세속적 유토피아를 낳았다. 그중에서도 〈자유의 법 The Law of Freedom……〉(1652)에서 제러드 윈스턴리는 '디거스'(Diggers)의 원칙을 지지했다. 제임스 헤링턴이 쓴 〈The Common-Wealth of Oceana〉(1656)는 토지분배를 일반대중의 자립조건으로 내세웠다.

프랑스에서는 가브리엘 드 푸아니의 〈미지의 남쪽세계 Terre australe connue〉(1676) 같은 작품들이 자유를 외쳤다. 프랑수아 페늘롱의 〈텔레마크 Télémaque〉(1699)는 순박한 생활을 찬양하는 유토피아적 일화를 그리고 있으며,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가 쓴 〈2440년 L'An 2440〉(1770)은 프랑스 혁명의 원칙을 예견했다. G.A.엘리스의 〈새로운 영국 New Britain〉(1820)과 에티엔 카베트의 〈이카리아 여행 Voyage en Icarie〉(1840)은 순전히 경제계획만으로 시작한 미국의 실험적인 공동체의 한계를 다루었다. 불워 리턴은 〈다가오는 경주 The Comming Race〉(1871)에서 경제를 철저하게 배제한 본질적 요소를 고안해냈고, 윌리엄 모리스는 〈출처 없는 뉴스 News from Nowhere〉(1890)에서 경제를 경멸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있는 2개의 유토피아, 즉 에드워드 벨러미의 〈과거를 돌아보다 Looking Backward, 2000~1887〉(1888)와 테오도어 헤르츠카의 〈자유국가 Freiland〉(1890)는 경제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H. G. 웰스는 〈현대의 유토피아 A Modern Utopia〉(1905)에서 사변으로 되돌아갔다.

대개의 유토피아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기보다 그것을 비웃는 풍자에 불과하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1726)와 새뮤얼 버틀러의 〈에러원 Erewhon〉(1872)이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20세기에는 계획사회의 실현이 임박해지자 반(反)유토피아적인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잭 런던의 〈강철군화 The Iron Heel〉(1907), 예브게니 자미아틴의 〈나의 My〉(192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1932), 조지 오웰의 〈1984년 Nineteen Eighty-four〉(1949)이 대표작이다.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 The Story of Utopias〉(1922)는 뛰어난 개관서이다.

문학과 함께 종교집단과 정치개혁가들도 이상적인 공동체 건설을 꾀했는데, 이는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졌다. 1663년 네덜란드 메노파 교도들이 현재의 델라웨어 주 루이스에 공산주의적 공동사회 거주지를 처음으로 건설했으며 이때부터 1858년 사이의 2세기 동안 약 138개의 공동사회가 북아메리카에 세워졌다. 건설자가 죽은 뒤에도 유지된 최초의 것은 독일의 경건파 교도들이 1732년 펜실베이니아 주에 세운 에프러타 공동체였다. 그밖에도 게오르게 라프가 펜실베이니아와 인디애나 주에 하모니 공동체, 펜실베이니아에 이코너미 공동체를 세웠으며, 아이오와 주의 아마나 그룹은 아이오와, 셰이커교도들은 8개 주에 18개의 마을을 세웠다. 그들 중 일부는 금욕을 추구했으며, 몇몇 공동사회의 종파는 아직까지도 활약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집단은 허터파이며, 미국과 캐나다에 주로 살지만 영국과 파라과이에도 정착촌을 이루고 있다.

비종교적 공동체로서 처음 세워진 것은 영국의 실업가 로버트 오언이 1825년 인디애나 주의 하모니를 라프파로부터 사들여 건설한 뉴하모니였다. 공산사회라기보다 협동체 사회였는데 비록 실패했지만 미국에서 최초로 유치원·상업학교·공립도서관·공립학교를 후원했다. 프랑스의 사회개혁가 샤를 푸리에는 1840년대 미국개혁가들, 특히 매사추세츠 주 브룩 농장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841~59년 약 28개의 푸리에 방식의 거주지가 미국에 세워졌다. 카베트의 추종자인 이카리아인들은 일리노이·미주리·아이오와·캘리포니아 주에 공동사회를 세웠으나 실패로 끝났다. 존 험프리 노이스가 1841년 버몬트 주 푸트니에 세웠다가 1848년 뉴욕의 오나이다로 옮긴 오나이다 공동체는 독창적인 시도였다. 이 집단은 모든 남편과 아내를 서로 공유하는 '복합결혼'을 실행했다. 노이스는 오나이다가 브룩 농장의 시행착오를 시정해 계승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 없이는 사회주의 실현이 불가능하며, 이 '대가족' 제도가 이기주의를 없애는 동시에 이같은 생활방식의 실용성을 입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린이들은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그뒤에는 공동탁아소에 맡겨졌다.

남북전쟁 뒤 비종교적 유토피아 실험의 열기는 수그러들었다. 로런스 그론런드의 〈협동사회 The Cooperative Commonwealth〉(1884)와 벨러미의 〈회고 Looking Backward〉 같은 이상주의 책자가 발표된 뒤 1890년대에도 새로운 공동체가 몇 개 더 생겨났으나, 지속되지 못한 채 곧 정치적 사회주의에 흡수되었다. 이상주의적 종교공동체 건설은 20세기에도 계속되었으나, 대개 오래가지 못했다. 종교공동체는 거의 모든 경우 신봉자들이 예언의 능력과 지혜를 가졌다고 받드는 단 1명의 강력한 인물에 의해 건설·유지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의 대부분은 원래의 지도자가 살아 있을 동안은 번창했다가 지도자가 죽고 난 뒤에는 서서히 쇠퇴해갔다.

참고문헌

유토피아 : T. 모어, 황문수 역, 범우사, 1987

르네상스의 유토피아 사상 : 김영한, 탐구당, 1983

문학과 유토피아 - 김현 평론집 : 김현, 문학과 지성사, 1980

낭만주의 시대의 유토피아관 〈전주대인문과학 문리논총〉1 : 조은영, 전주대학교 출판부, 1983

스위프트의 유토피아 〈Taegu Review〉 32 : 김영대, 한국영어영문학회 대구지부, 1982

The English Utopia, rev. ed. : A. L. Morton, Lawrence & Wishart, 1969

Ideal Commonwealth : Henry Morley (ed.), Kennikat Press, 1968

Utopias and Utopian Thought : Frank E. Manuel (ed.), Beacon Press, 1967

The Story of Utopias : Lewis Mumford, Viking Press, 1962(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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