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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술을 행한 정희태(丁希泰)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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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술을 행한 정희태(丁希泰)

정 직 필 지음

성 백 효 번역

정희태(鄭希泰)는 예산(禮山) 사람인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부모의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넣어 드리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일생동안 몸이 수척하였으며 또 예교(禮敎)를 좋아하였다.

 

의술(醫術)을 배울 적에 사람의 기혈(氣血)에 근원하여 경락(經絡)과 골수(骨髓), 음양(陰陽)과 표리(表裏)의 진리를 연구하여 모든 질병의 발생 원인과 환자가 소생할 것인가의 여부를 잘 알았다. 특히 진맥(診脈)하는 묘리를 터득하였으며 여러 가지 약을 조제하여 왕왕 사람들의 질병을 신기하게 치료하곤 하였다.

또한 지조와 기개가 드높아 비록 권력가들이 맞이하여 초청하더라도 일체 아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환자의 병을 논하는 것 이외에는 대관(大官)들과 한 마디도 수작하지 않았다.

그는 내의원(內醫院)의 의원으로 뽑혔는데, 수의(首醫)인 강명길(姜命吉)의 인품을 비루하게 여겨 예우하지 않았다. 강명길이 내의원의 옛 준례를 내세워 꾸짖자, 그는 "옛 준례가 어찌 다 옳겠는가." 하고 응수하였다.

정희태는 성상(聖上)의 안후를 진찰하고 약물(藥物)을 논하여 여러번 큰 효험을 올리니, 정조(正祖)는 그가 의술에 정통함을 익히 알고 여러번 상을 내리려 하였으나 강명길이 번번이 그의 단점을 헐뜯어 그의 재주를 다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뜻을 낮추지 않았으며 원망하고 탓하는 말을 일체 입밖에 내지 않았다.

밑에 있는 동료들이 모두 높은 품계에 올라 군수(郡守)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벼슬을 보기를 더러운 물건처럼 여겼으며 당대의 이름난 선비와 훌륭한 관리들이 친구로 대하고 우대하였으나 또한 교만하거나 자랑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술원(李述源)이 일찍이 염병에 걸려 위급한 지경에 빠졌는데, 정희태는 이때 내의원에서 숙직중이었다. 그는 동료에게 휴가를 바꾸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동료가 승낙하지 않자, 달려가 이술원을 구원하기 위해 상관에게 해직을 요청하였다. 내의원 제조(提調)는 그의 의로움에 탄복하여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마음대로 가서 치료하게 하였다. 이에 그는 즉시 이술원의 처소로 달려가서 정성을 다하여 병을 치료하여 다시 회생하게 하였다.

동시대에 순암(醇菴) 오재순(吳載純)과 그의 아들인 영재(寧齋) 윤상(允常), 노주(老洲) 희상(熙常) 등 여러 명현들은 모두 그를 지극히 사랑하고 아꼈다. 정희태는 인물을 잘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일찍이 영재를 평하여 당대의 제일가는 인물이라 칭찬하였다.

그는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역학(易學)에 더욱 심오하였다. 찌그러진 오막살이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나 그는 이 안에서 오똑히 앉아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읽곤 하였는데, 글읽는 소리가 금석(金石)처럼 낭랑하였다.

역설(易說)을 지었는 바, 마음속으로 진리를 터득하여 구차히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과 주자(朱子)의《본의(本義)》를 따르지 않았다. 노주(老洲) 오공(吳公)이 그에게 먼저 사서(四書)를 읽은 다음 《주역(周易)》을 연구할 것을 권하자, 이 말을 독실히 믿었으나 늙어서 사서의 진리를 깊이 탐구하지 못하는 것을 크게 한하였다.

그는 평소 생활이 곤궁하여 채소와 좁쌀밥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언제나 공청(公廳)에 모일 때면 동료들이 좋은 음식을 날라다 주며 먹을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한 번도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최생(崔生)이란 자가 호조(戶曹)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공원(貢員)과 다투어 송사하였으나 호조의 장관이 타인의 사주(使嗾)를 받아 돌릴 수가 없었다. 최생이 억울한 사연을 말하자, 정희태는 즉시 호조에 가서 장관에게 말하기를 "대감의 지혜가 어찌 옛날 자산(子産)만 하겠습니까? 자산도 그럴듯한 속임수에 넘어갔으니, 대감인들 어찌 그의 교묘한 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호조의 장관은 놀라 사과하고 즉시 판결을 번복하였다. 이에 최생이 많은 돈을 가지고 가서 사례하였으나 그는 웃으며 퇴각하고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하여 주선한 것은 그대가 정직하면서도 억울하게 패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장자(長者)를 이처럼 대해서는 안된다.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말라." 하였다. 이에 최생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때 정희태는 온집안 식구들이 굶주림에 쓰러져 누워 있었으나 지조를 바꾸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이는 이른바 '지사(志士)는 죽어서 시신이 도랑에 버려짐을 잊지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나는 김공 종선(金公宗善)과 정희태의 인품을 논평하여 "그는 의원들 가운데에 선비이다." 하였더니, 김공은 "어떤 선비가 이 사람을 따를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나는 일찍이 정희태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별세한 뒤에 나는 그대의 전(傳)을 지어 주겠다." 하였더니, 그는 웃으며 말하기를 "돌아보건대 전할 만한 사실이 없으며 또한 후세에 이름이 전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였다.

 

정희태는 뒤에 등창이 났으나 약을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내가 찾아가 문병하니, 그는 나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인간의 일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고는 죽는 것을 서글퍼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나는 약을 먹어 병을 치료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고 죽으니, 당시 나이가 70여세였다. 장안의 사대부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겼으며 다투어 부의(賻儀)를 올려 상례를 도왔다.

매산거사(梅山居士 : 홍직필 자신)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여항(閭巷)의 사람으로 훌륭한 행실을 하여 명성을 세우고자 하는 자들은 목적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와왕 천리(天理)에 순수하지 못하다. 정희태는 독서할 적에 홀로 선을 행하는 군자의 의리를 생각하고 세상에 구차히 영합하지 아니하여, 종신토록 삼베옷과 채식도 실컷 입고 먹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는 진실로 계차(季次)와 원헌(原憲)에게 부끄러움이 없다 하겠다. 계차와 원헌 두 사람은 모두 공자(孔子)를 직접 사사하였으니, 항상 빈천(貧賤)하면서도 자신의 지조를 변치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정희태는 타고난 천품이 매우 고결하여 굳이 선행을 하려고 분발하지 않고도 저절로 법도에 맞았으며 훌륭한 명성이 온 세상에 퍼져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하지만 그는 명예를 얻는데에 마음이 없었으니, 이는 참으로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가 만약 군자의 대도(大道)를 들었다면 단지 훌륭한 의원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니, 애석하다! 그러나 옛사람의 말에 "의원 중에 인자한 자가 아니면 환자를 맡길 수 없고, 총명하고 이치를 통달한 자가 아니면 환자를 맡길 수 없고, 청렴결백하고 양순한 자가 아니면 믿을 수 없다. 의원은 이치를 꿰뚫고 사리를 통달하여 매우 하찮은 것도 빠뜨리지 않아야 하니, 이와 같아야 비로소 훌륭한 의원이라 할 수 있다." 하였는데, 정희태야말로 이러한 도리를 구비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홍직필(洪直弼)

 

1776~1852. 조선 철종 때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응(伯應), 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 판서 이간(履簡)의 아들로 뛰어난 재질이 있어 7세 때 한자로 문장을 지었다. 사마시에 실패한 후 학문에 정진하여 대학자가 되었다. 순조 14년(1814)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익위사 세마에 제수되었고, 1822년 장흥고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철종 2년(1851)에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 저서로는 <매산집(梅山集)> 52권이 있으며, 위의 글은 51권 전(傳)에 실려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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