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역사발전이란 무엇인가
by 송화은율진정한 역사발전이란 무엇인가
유럽의 계몽주의는 인간의 합리적 특성에 의해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그로 인해 인간의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었다.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던 계몽주의 운동이 견지하고 있었던 역사 발전에 관한 낙관적인 견해는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주의 과학자 콩도르세가 『인간 발전의 역사』라는 그의 저술에서 잘 피력하고 있다. 그는 과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의 축적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발전되어 왔다고 믿고 그 발전이 계속되어 앞으로 행복한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예언을 했다. 그리고 이 행복한 시대의 도래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 「미국독립선언서」와 프랑스 혁명 구호에 나타난 자유와 평등 사상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근간으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며, 그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는다. 또 많은 역사학자들도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역사는 발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회주의 이론의 창시자였던 마르크스 또한 계몽주의의 역사 발전 사상을 이어받아 역사 발전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역사는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 법칙에 의해 안정된 상태에서 불안정한 상태로 변화되며, 그 불안정한 상태에서 다시 새로운 발전적인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도 그 자체 모순에 의해 불안정한 상태로 되고, 그 이후에 안정적인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한다는 이론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의 예언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나 동구권 여러 나라의 붕괴에 따라 틀렸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그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의해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는 점에서 그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과 같이 계몽주의의 후예인 셈이다.
확실히 과학과 기술은 혁혁한 발달을 계속해왔다. 특히 산업 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은 이런 낙관적인 견해를 부추기기도 한다. 이제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게 되어 자연으로부터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인간 자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계몽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가 굳게 믿었던 대로 인간의 궁극적인 해방, 즉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킨 것이 아니라, 일부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더욱 강화하여 소수에 의한 다수의 자유와 평등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군사적 이용 가치에 의해 주도되고, 군사적인 목적에 우선적으로 응용되며, 그런 첨단의 과학․기술이 응용된 장비를 갖춘 군대가 많은 경우 지배층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은 이 점을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역사가 발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지배와 피지배를 반복할 뿐이거나, 아니면 더 심하게 볼 때는 전체주의 사회로 퇴행하고 있다는 비관적인 견해를 표명하기까지 한다. 특히 유명한 논자인 토인비나 슈펭글러 같은 문화사가들은 인류의 역사가 그런 반복의 역사라고 서술한다. 그리고 자미아틴, 헉슬리, 오웰 같은 문학사가들은 현대사회가 사회 안정을 보장해 준다는 구실로 첨단 과학 기술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무시무시한 전체주의 사회를 그들의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다.
또 니체와 그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지배욕 때문에 인류는 어쩔 수 없이 지배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사회학자인 베버는 마르크스와는 정반대로 사회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안정된 상태로 나아간다고 보고, 관료조직을 비롯한 모든 사회의 지배조직이 그 자체를 유지하는 쪽으로 발전하여 결국 인류는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 지배조직의 철창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계몽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은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같은 비판 이론가들도 계몽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의 낙관적인 역사 발전론이 오류였음을 지적하고, "문명의 기록은 또한 야만의 기록"이라는 월터 벤야민의 역설적인 명제를 받아들인다.
이런 지적들처럼, 어떤 면에서 문명의 기록은 또한 야만의 기록일 수도 있다. 역사에서 주인공으로 기록되는 승자나 지배자의 화려하고 영웅적인 행적 속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피땀과 신음이 간과되고 있기 때문이다. 승자들의 무참한 살육 행위를 보면, 그들이 승자로 남아 있는 한에서는 그들의 살육 행위가 영웅적인 행위로 미화되거나 정당한 행위로 합리화됨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경우 역사는 분명 승자의 편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자로 남았던 제국주의 국가들은 여전히 선진국으로서의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남아 있고, 만약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자로 남았더라면 오늘날 나치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지금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일제에 대항해 독립 운동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을 토벌하는 데 앞장을 섰던 일제의 앞잡이들이 승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적은 미화되거나 조작되고 있다. 이런 역사는 분명 역사가 승자의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들이다.
이렇듯 역사는 승자와 지배자를 미화하는 측면을 가진다. 역사에 발전이 있다면, 역사가 다수의 편에 확고히 설 때, 즉 소수 자배자의 압제를 미화하는 조작의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증언하는 진실과 정의의 역사일 때, 바로 그때이다. 그런 역사만이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진정으로 갈구하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수반하지 않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 그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이 역사의 발전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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