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
by 송화은율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
(전략)
그는 고민 속에 줄곧 이 문제를 자신에게 던져 보았으나, 이미 그 때 강가에 섰을 때 자기 자신 속에, 그리고 자기의 확신 속에, 깊은 허위를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또 그 예감이 그의 생애에 있어서의 미래의 전환, 미래의 부활, 미래의 새로운 인생관의 선구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거기서 무거운 본능의 중압(重壓)만을 인정하려 했다. 그는 그것을 물리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밟고 넘어갈 힘도 없었던 것이다(즉 무력하고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이다). 그는 옥중의 동료들을 보고, 그들 모두가 인생을 사랑하고 또 존중하고 있는 데 놀랐다. 사실 그들은 자유로울 때보다 옥중에 갇혀 있는 지금, 훨씬 더 인생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들 중의 어떤 죄수, 예를 들면 부랑자 같은 자는 얼마나 가혹한 고통과 고문을 맛보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 햇살이나, 울창한 산림이나, 어딘지 모르는 깊은 숲 속에서 어쩌다 발견한 얼음같이 찬 옹달샘이 어째서 그들에게 그토록 커다란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 옹달샘을 발견한 것은 재작년이었는데, 그 부랑자는 그것을 다시 만나는 것을 마치 애인과 밀회(密會)라도 하는 양 공상하고, 그 샘물과, 샘물을 둘러싼 파란 풀과 수풀 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을 꿈에서까지 본다는 것이다. 가만히 주위의 현상을 관찰하면 할수록 그는 이처럼 설명할 수 없는 실례들을 수없이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별로 눈을 돌리지 않았고, 처음부터 그런 것들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테면 눈을 내리깔고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혐오를 느끼게 되고 화가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차츰 여러 가지가 그를 놀라게 했다. 그는 어느덧 전에는 꿈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뭣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와 다른 모든 죄수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그 깊고 깊은 심연(深淵)이었다. 그와 그들은 전혀 다른 인종 같았다. 그와 그들은 서로 불신과 적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심연의 일반적인 원인을 알고 있었고, 또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에는 한 번도 그 원인이 이토록 뿌리 깊고 강력한 것인 줄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옥 안에는 요즘 흔히 있는 폴란드인 정치범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른 죄수들을 다만 무식한 노예처럼 생각하며 덮어놓고 멸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렇게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이들 무교육자들이 많은 점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보다 훨씬 현명하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던 것이다. 감옥 안에는 또한 이들 무교육자들을 멸시하고 있는 러시아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한 명의 장교 출신과 두 명의 고등 학생이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들의 오류도 명백히 인정했다.
다른 모든 죄수들은 그를 싫어했고, 되도록 그를 피하려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그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왜 그럴까? 그는 그것을 몰랐다. 모두들 그를 경멸하고 그를 비웃었다. 그보다 훨씬 죄가 무거운 범인이 그의 범죄를 조소하는 것이었다.
"너는 양반이 아니냐!"
그들은 말했다.
"너 같은 건 도끼를 가지고 다닐 위인이 아니야. 그런 건 양반이 할 짓이 못돼."
대재기(大齋期)의 제이주일째에, 그는 감방의 죄수들과 함께 재계(齋戒)하는 차례가 왔다. 그는 교회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기도를 올렸다. 어느 날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으나, 싸움이 벌어졌다. 모두들 무서운 기세로 그에게 대들었다.
"이 불신자 놈아! 너는 하나님을 안 믿지!"
하고 그들은 외쳤다.
"너 같은 놈은 때려 죽여 버려야 해."
그는 한 번도 하나님이나 신앙 문제를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는데도, 그들은 그를 무신론자로 규정하고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는 침묵을 지킨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중의 한 죄수는 정말 미친 듯이 격분하여 그에게 달려 들려 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침착하게 잠자코 기다렸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얼굴의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때마침 간수가 그와 도전자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피를 보지 않고는 끝나지 않을 뻔 했다.
그에게는 또 하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왜 그들이 모두 하나같이 소냐를 좋아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별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도 않았고, 또 그들도 어쩌다 간혹 그녀를 볼 뿐이었다. 그녀는 이따금 작업장으로 그를 만나러 잠깐씩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도 모두들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뒤를 쫓아왔다는 것도,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소냐는 그들에게 돈을 준 일도 없거니와 별로 돌봐 준 것도 없었다. 다만 한 번 크리스마스 때, 죄수 전원에게 고기 만두와 둥근 빵을 선사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소냐 사이에는 차츰 일종의 가까운 관계가 이루어져 갔다. 그녀는 그들을 대신해서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주기도 하고, 그것을 우편으로 부쳐 주기도 했다. 이 도시를 찾아오는 그들의 가족은, 그들 자신의 지정에 따라서 그들에게 차입할 물품이나 돈까지도 소냐에게 맡겨 두고 갔다. 그들의 아내와 애인들도 그녀를 알고, 우선 그녀한테로 찾아오곤 했다. 그녀가 라스콜리니코프를 찾아 작업장에 나타나거나, 노역에 가는 죄수 일행과 길에서 만났을 때에는 모두들 모자를 벗고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아아, 소피야 세묘노브나, 당신은 우리들의 어머니나 다름없소. 착하고 친절한 어머니란 말이오!"
이들 난폭한, 낙인 찍힌 죄수들이 이 작달막한 여윈 여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녀는 상긋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모두 그녀의 웃는 얼굴을 좋아했다. 그들은 그녀의 걷는 모습까지도 좋아했다. 모두들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되돌아보고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몸집이 그렇게 작은 것까지 칭찬했고, 나중에는 무엇을 칭찬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개중에는 그녀한테 병 치료를 간청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는 대재기가 끝날 무렵과 부활제 전후 일 주일 동안을 쭉 병원에 누워서 보냈다. 차츰 회복기에 들어서게 되자 그는 아직 열에 떠서 헛소리를 하고 있던 때의 꿈을 상기했다. 그는 병 중에 이런 꿈을 꾸었던 것이다. 아시아 내륙에서 유럽을 향해 퍼져 오는 어떤 절대 미문의 가공할 전염병 때문에 전세계가 희생될 지경에 이르렀다. 몇 명의 극히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인류는 죄다 멸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에 파고드는 일종의 새로운 미생물인 섬모충(纖毛蟲)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생물은 이성과 의지가 부여된 정령(精靈)이었다. 그래서 그것에 걸린 사람들은 이내 귀신에 홀린 듯이 발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여태껏 이것에 전염된 환자들만큼 자기 자신을 확고 부동한 진리를 파악한 현인(賢人)처럼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들만큼 자기의 판단이나, 학술상의 결론이나, 도덕상의 확신과 신앙 등을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인 양 생각한 사람은 전무후무했던 것이다. 온 마을, 온 도시가, 그리고 온 국민이 모조리 그것에 전염되어 미치고 말았다. 모두가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혀, 서로 이해하려 하지는 않고 저마다 자기 한 사람만이 진리를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남을 보고는 번민하고, 자기 가슴을 두드리고 손을 비비면서 울어대는 것이었다. 누구를 어떻게 재판해야 할지도 모르고, 무엇을 악으로 삼고 무엇을 선으로 삼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또 누구를 유죄로 하고, 누구를 무죄로 할 것인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아무 까닭도 없는 증오에 사로잡혀서 서로 죽이고 또 죽였다. 서로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대군(大軍)을 이루고 모였으나, 그 군대는 벌써 행군 도중에 별안간 자기 살육을 시작했다. 대열은 무너지고 병사들은 서로 덤벼들어 서로 찌르고, 자르고, 물어뜯고, 잡아먹었다. 마을마다 온종일 경종을 울려서 사람을 모았으나 누가 뭣 때문에 불렀는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불안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일상적인 일들은 모두 내던져 버렸다. 저마다 제멋대로 의견과 선후책을 내세우지만, 일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농사일도 집어치웠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한 무리씩 모여서는 무슨 결의를 하고, 절대로 헤어지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방금 자기네들이 예정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짓을 곧 하기 시작했고,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주먹을 내두르고 칼부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화재가 일어나고, 식량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모든 것, 온갖 것이 멸망해 갔다. 질병은 더욱 창궐(猖獗)하여 점점 만연되어 갔다. 세상에서 이 재앙을 모면한 사람은 불과 몇 명밖엔 없었다. 그것은 새로운 종족과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조하고, 이 지상을 갱신하고 정화할 사명을 띤, 선택된 순결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어디서도 그러한 사람을 보지도 못했거니와, 그들의 말이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의 이 무의미한 헛소리가 그의 기억 속에서 그토록 서글프고 그토록 괴롭게 메아리치는 것이, 이 열에 뜬 꿈의 인상이 그토록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것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부활제 후의 제이주 일째였다. 따뜻하고 밝은 봄 날씨가 계속되었다. 감옥 병원에서도 창문이 열려졌다(그것은 창살로 돼 있었으며, 창 밑에는 보초가 거닐고 있었다). 소냐는 그가 입원하고 있는 동안 두 번밖엔 문병을 오지 못했다. 그 때마다 허가를 얻어야만 하는 데다가, 그것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주(특히 저녁녘에) 병원 뜰에 와서, 병실 창 밑에 섰다. 또 때로는 멀리서라도 잠시 병실 창문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녘에, 이미 거의 완쾌된 라스콜리니코프는 한잠 자고 나서 무심코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멀리 병원 정문 옆에 소냐를 발견했다. 그녀는 거기 서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 순간 무엇인지가 그의 심장을 푹 찌르는 것 같았다. 그는 움찔해서 황급히 창가에서 물러났다 이튿날 소냐는 오지 않았다. 또 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그는 불안에 사로잡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윽고 그는 퇴원했다. 감옥으로 돌아가서 동료 죄수한테 들으니, 소피야 세묘노브나는 병이 나서 집에 누운 채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몹시 걱정이 되어 그녀의 병세를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냈다. 곧 그는 그녀의 병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소냐는 소냐대로 그가 그토록 자기를 그리워하고 걱정하고 있음을 알자, 연필로 간단히 편지를 써 보냈다. 이제 몸은 퍽 좋아졌으며, 병은 가벼운 감기이므로 곧 작업장으로 만나러 가겠노라고 알려 왔다. 이 편지를 읽었을 때 그의 심장은 아프도록 뛰었다. 맑게 갠 포근한 날이었다. 이른 아침 여섯 시경에 그는 강변에 있는 작업장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오두막집이 한 채 있고, 석고(石膏)를 굽는 가마가 있어서, 거기서 구운 돌을 빻는 일이었다. 모두 세 사람의 죄수가 그리로 갔다. 죄수 중의 한 사람은 간수를 따라 무슨 연장을 가지러 요새(要塞)로 갔다. 또 한 사람은 장작을 패서 그것을 가마 속에 쌓기 시작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오두막집에서 강기슭으로 나가서 집 옆에 쌓여 있는 통나무에 걸터앉아 황량한 넓은 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높은 강기슭이라 주위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건너편 강 언덕으로부터 노랫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거기에는 햇빛이 퍼붓는 끝없는 초원 위에, 유목민의 천막들이 조그만 점을 이루며 까맣게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곳 사람과는 판이한 전혀 다른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시간조차 걸음을 멈추고, 흡사 아브라함과 그의 가축의 시대가 아직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앉은 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상념은 꿈 같은 공상과 깊은 명상(瞑想)으로 옮겨 갔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정체 모를 우수가 그를 흥분시키고 괴롭히는 것이었다.
별안간 그의 곁에 소냐가 나타났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다가와서 그와 나란히 앉았다. 아직 이른 시각이어서, 아침 냉기가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초라한 낡은 외투를 걸치고, 녹색 수건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그 얼굴엔 아직 병색이 남아 있고, 여위고 창백하고 핼쓱했다. 그녀는 기쁜 얼굴로 상냥하게 방긋 웃어 보였으나, 여느 때의 버릇대로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언제나 머뭇거리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뿌리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이, 아예 손을 내밀지 않는 수도 있었다. 언제나 그는 마지못해 잡는 듯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고, 왜 그런지 못마땅한 태도로 그녀를 맞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녀가 옆에 있는 동안 끝까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기도 했다. 그러던 그녀는 그의 눈치만 살피다가 깊은 슬픔에 잠겨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사람이 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흘긋 그녀를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들은 단 둘이서만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간수는 이 때 돌아앉아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으나, 갑자기 무언가가 그를 휘어잡고 그녀의 발 밑에 내던진 것 같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무릎을 껴안았다. 처음 한 순간 그녀는 무섭게 겁을 집어먹고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후다닥 일어나서 오들오들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끝없는 행복이 반짝였다. 그녀는 깨달았다. 그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 끝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침내 이 순간이 온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으나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들은 둘이 다 창백하게 여위어 있었다. 그러나 그 병들어 지친 창백한 얼굴에는 새 생활을 향하는 가까운 미래의 갱생, 완전한 부활의 서광이 벌써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킨 것이다.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 상대방의 삶을 위한 마를 줄 모르는 샘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참고 기다리자고 다짐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칠 년이란 세월이 남아 있었다. 그 때까지는 참기 어려운 무수한 고통이 있을 것이며, 또한 한없는 행복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활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갱생한 자기의 온 존재로서 그것을 완전히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로 말하면 그녀는 그 전부터도 오직 그의 생활만으로 살아온 여자였던 것이다! 그 날 저녁 이미 감방문도 닫혔을 때 라스콜리니코프는 판자 침상 위에 누워서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날은 여태까지 그의 적이었던 죄수들까지도 벌써 다른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진해서 그들에게 말을 건네기까지 했다. 그러자 저 쪽에서도 상냥하게 대꾸해 주었다. 그는 지금 누워서 그것을 상기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당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지금 모든 것이 일변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는 그녀를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줄곧 그녀를 괴롭히고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해 준 일을 상기했다. 그녀의 창백하게 여윈 얼굴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것을 상기해도 그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부터 얼마나 크고 깊은 사랑으로 그녀의 모든 고통을 보상할 것인지를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모든 과거의 고통이 지금 과연 문제가 될 것인가! 이제는 모든 것이, 자기의 범죄, 선고, 유형조차도, 이 감격의 돌발에 휩쓸려서, 어쩐지 외면적인 괴상한 일처럼, 마치 남에게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날 밤, 무슨 일이건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하거나, 생각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지금의 그는 무슨 일이건 그것을 의식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다만 느꼈을 뿐이다. 변증 대신에 생활이 온 것이다. 따라서 의식 속에도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할 것이었다.
그의 베개 밑에는 복음서가 있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그녀의 것인데 전에 그에게 나자로의 부활을 읽어 준 바로 그 책이었다. 그는 유형 생활이 시작될 때 그녀가 종교 얘기로 자기를 괴롭히고 귀찮게 복음을 전하려 애쓰면서 책을 읽도록 강요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을 뿐더러 복음서를 전하려 하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는 병이 들기 조금 전에 자진해서 그녀에게 복음서를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아무 말 않고 책을 가져왔다. 그러나 여태까지 그는 그것을 펼쳐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날도 그는 그것을 펼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득 한 가지 상념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이제 와서는 이미 그녀의 신념은 동시에 나의 신념이 아닌가? 그렇다면 적어도 그녀의 감정, 그녀의 의욕쯤은…….'
그녀도 역시 이 날 온종일 흥분 상태에 있었으나, 밤에는 다시 병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행복했다. 너무나 뜻하지 않은 행복이어서 오히려 자기 행복에 겁이 날 지경이었다. 칠 년, 겨우 칠 년! 이 행복의 초기에, 그들은 어쩌다 순간적으로 이 칠 년을 칠 일로 간주할 만한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되었다. 그는 이 새 생활이 무보수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사들여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앞으로 크나큰 고행으로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조차 미처 생각지 못할 지경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새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나의 인간이 서서히 갱신되어 가는 이야기, 서서히 갱생하여, 하나의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옮겨가면서, 여태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은 충분히 새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소설은 일단 이것으로 끝났다.
요점 정리
지은이 :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
갈래 : 장편 소설. 심리 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6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록분은 에필로그- (epilogue) 시가, 소설, 연극 따위의 끝나는 부분 - 의 첨가로 후일담에 속하는 것이지만, 정신적으로 갱생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성격 : 종교적, 신비적
배경 : 시간(19세기). 공간(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시베리아 유형소)
표현 : 1인칭에 의한 주인공의 독백, 법정에서의 진술 형식, 살인 후 8년만에 출옥하여 회상하는 형식 등 전편(全篇)에서 여러 소설 형식을 동원하여 서술하고 있다.
제재 : 라스콜리니코프의 죄(罪)
주제 : 인간의 양심(良心)과 구원(救援)
인물 : 라스콜리니코프 : 애칭을 로쟈 또는 로치까라고 부르는 스물 세 살의 전 대학생으로 시베리아로 유형 가는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로 "가령 뉴턴과 같은 비범한 천재가 전 인류에 공헌할 커다란 발견을 했을 때 만일 수십 명 혹은 수천 명의 사람이 이를 방해한다면, 뉴톤에겐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이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지 않을까?" 예심 판사 포르피와의 논쟁 중에서 밝혀진 주인공의 인생관으로 이는 한 마디로 시대의 새로운 이념을 추구해 가는 한 지식인의 독선적 천재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초인(超人)사상을 갖고 있다.
소냐 : 마르멜라도프의 딸로 환경 탓으로 창녀가 된 순정의 처녀로 신앙심이 깊은 여주인공
알료나 이브노브나 : 라스콜리코프의 범죄 대상이 된 악랄하고 욕심 많은 60세 가량의 전당포 노인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 노파 살해 사건을 담당한 예심 판사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적이지만, 직무 이외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동정심을 갖는다.
줄거리 : 법과 대학의 학생인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웃의 고리 대금업자인 노파를 살해한다. 살해의 배경에는 인류를 구원하도록 선택된 비범한 인간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추악한 인간을 죽여도 괜찮다는 초인 사상(超人思想)이 자리잡고 있다. 즉, 나폴레옹은 수십 만의 인간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살인 이후 깊어지는 고립감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인 어머니, 누이와의 인간적 단절의 고통을 맛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번민과 고뇌 속을 방황하다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부가 된 소냐를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대상으로 소냐를 택한다. 그는 소냐의 발 밑에 엎드려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면서, "나는 당신 앞에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고통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꺼져 가는 촛불 아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가 읽어 주는 성경구절, '나자로의 부활'을 듣는다. 그는 소냐에게 자기 죄를 고백한다. 자수를 한 그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고 소냐도 그녀의 자유 의사로 그를 따라가 함께 고통의 십자가를 진다.
내용 연구
그는 고민 속에 - 던져 보았으나 : 견디어 내지 못하고 자수하게 되었다는 그 점에서만 자기 범죄를 인정했을 뿐 진정한 인생의 자각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무거운 본능의 중압 : 내면의 죄의식
그는 오히려 - 인정하려 했다 : 이성적으로는 자기 사상이 잘못된 점이 없다고 하더라도 양심의 문제가 무겁게 누르고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꿈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 : 무지몽매(無知蒙昧)
그와 다른 - 심연이었다 : 죄수들 사이에 서로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뿌리 깊은 불신에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심연 :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구렁'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깊은 못을 말함.
대재기 : 단식(斷食)하는 기간
재계(齋戒) : 제를 지낼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음식과 언행을 삼가며 부정을 멀리하는 일.
정령(精靈) : 죽은 사람의 넋. 원시 종교에서 산천, 초목, 무생물 따위에 붙어 있다고 믿던 신령
창궐(猖獗) : 좋지 못한 병이나 세력이 자꾸 퍼져서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남.
그런데 이 생물은 이성과 의지가 부여된 정령(精靈)이었다 : 이 '생물'은 이웃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이해를 동반하지 않은 차가운 이성을 상징한다.
이 책은 그녀의 것인데 전에 그에게 나자로의 부활을 읽어 준 바로 그 책이었다 : 소녀가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을 갱생시킨 것은 죽은 나자로를 예수가 부활시킨 것과 흡사하다.
남에게 일어났던 : 생소한
변증 대신에 - 온 것이다 : 사랑을 알지 못하고 이념을 추구하면서 사는 삶 대신에 진실 속에 살아가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칠 년, 겨울 칠 년! :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보낸 기간을 말한다. 사랑을 얻기 전에는 긴 시간으로 여겨졌겠지만, 이제는 행복하여 그 기간이 짦게 느껴진다는 표현이다.
기계적으로 : 의식하지 못한 채
너무나 뜻하지 않은 ; 예상하지 못했던
이해와 감상
'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처음으로 쓴 장편 소설로, 그가 가정 불화, 경제적 궁핍 등 극심한 고난을 겪는 시기에 쓰여졌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초인은 세속적인 도덕을 부수고 새로운 윤리를 정립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한다. 소개된 본문은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이러한 라스콜리니코프를 갱생하게 하는 소냐의 헌신적 사랑을 다루고 있는 대목이다. 매춘부인 소냐가 그에게 꺼져 가는 촛불 아래서 성경 구절 '나자로의 부활'을 읽어 주고, 시베리아의 유형지까지 따라와 마침내 그의 정신적 부활을 도왔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기독교적 색채가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 성서 요한 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자로의 부활'은 종국에 이르러 구원의 모티브가 된다. 예수의 사랑을 받던 나자로가 병을 앓다 죽어서 돌무덤에 나흘 간 묻혔을 때, 예수가 와서 살려 내는 기적을 보여 주는 메시지이다. 즉 가장 불가능한 죽음에서의 부활을 제시함으로써 이 지상에서는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으며 갱생의 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한다. (출처 : 김열규 신동욱 공저 동아출판사 문학)
이해와 감상1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정 불화, 경제적 궁핍 등 극심한 고난을 겪는 시기에 씌어졌다.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인물이 소냐에게 정신적으로 감화되면서, 그리스도적인 사랑과 인종의 사상을 지니게 되는 사상의 과정을 설파하고 서구적 합리주의를 단죄하려고 했으나, 작품은 작자의 이 의도를 넘어 당시 폐쇄된 사회 상황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호소하는 휴머니즘적인 작품으로 평가 상승된 작품이다. 인간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식과 이런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인간들에게 도전장을 보낸 것이다.
이 작품을 단순한 추리 소설이 아닌 이유는 인간 양심의 문제, 당대의 사회악과 싸우는 인간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첫 장편이기도 한 이 작품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은 세속적인 도덕을 부수고 새로운 윤리를 정립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의 살인을 정당화한다. 소개된 본문은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이러한 라스콜리니코프를 갱생하게 하는 소냐의 헌신적 사랑을 다루고 있는 대목이다. 매춘부인 소냐가 그에게 꺼져 가는 촛불 아래서 성경 구절 '나자로의 부활'을 읽어 주고, 시베리아의 유형지까지 따라와 마침내 그의 정신적 부활을 도왔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기독교적 색채가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 성서 요한 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자로의 부활'은 종국에 이르러 구원의 모티브가 된다. 예수의 사랑을 받던 나자로가 병을 앓다 죽어서 돌무덤에 나흘 간 묻혔을 때, 예수가 와서 살려 내는 기적을 보여 주는 메시지이다. 즉 가장 불가능한 죽음에서의 부활을 제시함으로써 이 지상에서는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으며 갱생의 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한다.
이해와 감상2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1866년 잡지 《러시아 통보(通報)》에 발표된 세계 문학 걸작의 하나로 한국에서도 애독되는 작품이다. 근대 도시의 양상을 배경으로, 작중의 하급 관리 마르멜라도프의 말대로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사람들로 가득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뒷거리가 무대이다.
가난한 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병적인 사색 속에서, 나폴레옹적인 선택된 강자는 인류를 위하여 사회의 도덕률을 딛고 넘어설 권리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이(蝨)'와 같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여버림으로써 이 사상을 실천에 옮긴다. 그런데 이 행위는 뜻밖에도 그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고, '인류와의 단절감'에 괴로워하는 비참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민감한 예심판사 포르필리가 대는 혐의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맞서나가면서도 죄의식의 중압에 견딜 수 없게 된 그의 심정은 자기 희생과 고뇌를 견디며 살아가는 '거룩한 창부' 소냐를 찾아 고백한다.
또 정욕을 절대화하는 배덕자(背德者) 스비드리가이로프의 수수께끼 같은 삶과 죽음에 자기 이론의 추악한 투영을 보고 마침내 자수하여 시베리아로 유형된다. 작자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입장에서 서구의 합리주의·혁명사상을 단죄하려고 한 것같이 보이지만 작품은 그러한 의도를 뛰어넘어 폐색적(閉塞的)인 시대상황 속에서 인간 회복에의 원망(願望)을 호소하는 휴머니즘을 표출하였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세속적인 도덕을 무시한 채 새로운 윤리를 수립하려는 라스콜리니코프를 통해 인간 정신의 부조리와 선악의 분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소냐의 희생으로 부활하는 그의 영혼을 통해서 이 세계의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으며, 갱생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신약 성서의 '나자로의 부활'에서 영향 받은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죄와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고, 동시에 그 해답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촉구함으로써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심화 자료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ylovich) Dostoyevsky/ Dostoevsky라고도 씀.
1821. 11. 11(구력 10. 30) 러시아 모스크바~1881. 2. 9(구력 1. 28)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소설가·언론인으로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심리적 통찰력으로, 특히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죄와 벌 Prestupleniye i nakazaniye〉·〈백치 Idiot〉·〈악령 Besy〉·〈카라마조프의 형제 Bratya Karamazovy〉 등 그의 장편소설들은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데 예술이 매체로 이용된 뛰어난 본보기이며, 그에게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의 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젊은 시절과 문학수업
아버지는 퇴역한 군의관으로 가정문제에 엄격하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는 불안정한 중산계층 출신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일컬어 "지적인 프롤레타리아"라 했다. 그의 문학적 관심을 일깨운 환경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젠트리 출신의 이반 투르게네프 및 레프 톨스토이의 환경과는 전혀 달랐다. 모스크바의 기숙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그는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육군 공병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종종 군사훈련과 축성술 수업을 몰래 빠져나가 러시아 문학을 비롯한 유럽문학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때 읽은 감상적인 통속소설은 폭력과 범죄를 다루는 그의 취향을 부추겼다. 이 형성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그는 밤이 되면 동료 사관생도들과 함께 밖에 나가 맛있는 음식과 술, 재미있는 대화 및 음악과 연극을 즐기고 여자들을 사귀었던 것 같다. 그는 또한 명성과 자기희생적인 행위 및 이상주의적인 우정을 열렬히 꿈꾸었다.
공병학교를 졸업한 얼마 뒤 오로지 글 쓰는 일에 몰두하기 위해 과감히 전역했으나 생계를 꾸려나갈 수단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농노들에게 살해당한 아버지는 유산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 Bednyye lyudi〉(1846)의 원고를 완성해놓았던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친구를 통해 유명한 문학평론가인 비사리온 벨린스키에게 이 원고를 보냈다. 벨린스키는 이 무명의 청년 작가를 불러 주인공의 숨겨진 본성을 밝히는 예술적 재능을 칭찬해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기쁨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이렇게 회상했다. "진실은 예술가인 당신한테 고지되고 선언되었소. 그것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주어진 것이라오. 그 재능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충실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오!" 〈가난한 사람들〉은 별로 노력을 기울인 작품도 아니고 초심자의 기술적 결함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었지만, 벨린스키의 칭찬은 예언적인 통찰이었다. 벨린스키는 이 작품에서 러시아 최초의 사회 소설을 읽어낸 것이었다. 이 작품은 고아 소녀에 대한 사랑을 아버지다운 애정으로 감추고, 그 애정을 감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면서 존경을 얻으려고 애쓰는 가난하고 늙은 관리의 절망적인 노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 당시의 처참한 사회 상황에 희생된 사람들의 희망과 노력이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주제를 다루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솜씨는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그는 종래의 방식에 새로운 차원(주인공의 갈등을 내면에서 관찰하는 심리분석적 관심)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 미하일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접근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종합이 아니라 분석으로 글을 써나갑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깊숙한 곳으로 뚫고 들어가며, 모든 원자를 분석하면서 전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는 러시아 사실주의 소설의 독자적인 전통을 수립한 것이다.
반면에 그는 문단과 사교계에서는 인상적인 이미지를 창조하지 못했다. 그가 첫번째 성공을 거둔 이후, 문단과 사교계는 그를 명사로 대접하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키가 작달막하고 금발에 작은 회색 눈, 병색이 완연한 얼굴, 신경질적으로 실룩거리는 입술을 가진 그는 그런 사교 무대에서는 침착성을 잃고 어색한 몸짓을 보였다. 그는 창작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2번째 중편소설인 〈이중인격 Dvoynik〉(1846)을 발표했다. '분열된 자아'(주인공인 하급 관리 골랴트킨은 날로 심해지는 피해 망상으로 고통을 받다가, 그를 없애려는 음모자이며 그와 똑같은 모습을 가진 인물을 만나게 됨)를 탐구한 이 작품은 독자들을 지루하게 했고, 그는 벨린스키의 비평적 지지마저 잃어버렸다. 그러나 덜 분석적인 측면에서 보면, 분열된 자아를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이중인격자'는 그후 발표된 그의 여러 걸작 장편소설의 주인공들 속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1846~49년에 그는 몇몇 소품과 단편소설 및 중편소설을 잇달아 발표했지만,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가 야심적으로 쓰기 시작한 장편소설 〈네토치카 네즈바노바 Netochka Nezvanova〉(1849)가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독자들의 관심을 되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편협하고 변덕스러운 의붓아버지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다룬 이 소설은 그의 후기작품에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개념과 이미지 및 장치들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다. 그러나 그가 국가 전복 혐의로 체포되는 바람에 이 소설은 3편의 긴 삽화만 발표된 채 중단되었고, 그의 문학 제1기도 막을 내렸다. 처음에 발표된 이 3편의 이야기들은 그가 받은 문학적 영향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생활에 대한 그의 관찰을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해부하는 진지한 분석은 자신의 심리와 정신을 들여다보는 자기성찰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흥적인 방식이기는 했지만, 이 문학 제1기는 그의 창조적 발전이 앞으로 나아가게 될 주요 방향을 암시해 준다.
시베리아 유형
당시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억압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적·사회적 개혁운동에 가담하여, 이상주의자인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금요일마다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는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이 토론되었다. 그는 이 토론회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소책자를 불법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소규모 비밀결사에도 참석했다. 서유럽을 휩쓴 혁명운동이 러시아에 미칠 영향을 염려한 정부는 1849년 4월에 페트라셰프스키 서클 회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같은 해 9월, 오랜 수사가 끝난 뒤 체포당한 218명의 정치범들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21명이 총살형을 선고받았는데 그해 말 극적인 해결이 이루어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상황을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12월 22일, 우리는 모두 세묘노프 광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사형수의로 갈아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3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저는 앞에서 6번째였고, 우리는 3명씩 끌려갔으므로, 저는 2번째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1분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옆에서 나팔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기둥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풀리고, 황제 폐하의 사면을 알리는 칙령이 낭독된 것입니다." 황제의 사면령이 발표되기 직전에 죽음을 각오하고 처형에 대비했던 무시무시한 경험은 그의 기억에 깊이 새겨져, 후기소설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사형선고는 시베리아의 옴스크 유형지에서 4년 동안 중노동을 하고 다시 4년 동안 군대에서 병졸로 복무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중죄를 범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처벌을 당연한 죄값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중노동을 하면서, 가벼운 죄를 지은 일반 죄수들을 '특별한 사람들'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정신적 고통에 짓눌렸고, 이 무렵에 첫번째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간질병은 그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유형지에서 그에게 허용된 책은 〈신약성서〉뿐이었는데, 이 책은 1825년 12월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이른바 데카브리스트의 부인 한 사람이 기증한 것이었다. 그는 이 책을 거듭 읽었다. 〈신약성서〉는 유형지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신앙을 배웠다. 죄인을 일으켜 주고,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었다. 감옥생활은 그가 장차 작가이자 사상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젊은시절의 급진주의 사상은 기존 질서에 대한 존중과 민중의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고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러시아 정교회의 영성주의가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감옥은 굴욕당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더 깊이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는 1854년에 석방된 뒤 시베리아의 세미팔라틴스크라는 도시에서 병졸로 복무하게 되었지만, 군인생활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형생활보다 더 지루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여 결국 하급 장교가 되었고, 친구도 몇 명 사귀었으며, 유형생활 동안 책을 읽지 못해 생긴 공백을 벌충하기 위해 책과 정기간행물을 보내 달라고 형에게 거듭 간청하곤 했다. 이 무렵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1857년에 아들 하나가 딸린 과부와 결혼한 일이다. 결핵 환자인 이 과부와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결혼으로 경제적 부담까지 짊어지게 되자, 지난 몇 년 동안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했던 침묵에서 벗어나 다시금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더욱 강해졌다. 그는 유형생활중에 생각해둔 다양한 구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익살스러운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숙부의 꿈 Dyadyushkin Son〉(1859)은 세미팔라틴스크를 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한 한 지방도시의 위선적인 사회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그보다 앞서 활동한 러시아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리의 창작 방법을 따르고 있다. 뒤이어 좀더 야심적인 중편소설 〈스테판치코보 마을과 주민들 Selo Stepanchikovo i ego obitateli〉(1859)이 발표되었는데, 비록 예술적으로는 균형이 잡혀 있지 않지만, 이중인격자인 주인공 오피스킨에 대한 묘사 덕분에 이 작품은 졸작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2편의 작품은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2편의 작품을 발표한 직후, 그는 쇠사슬에 묶여 유형을 떠난 지 만 10년 만에 자유의 몸으로 그가 사랑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문학적 부활
러시아 수도의 급진주의자들은 그를 정치범으로 찬미하고 싶어했지만, 그는 그들과 그들의 사상, 특히 종교를 비웃는 그들의 태도를 경멸했다. 그는 새로운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옹호하는 사회개혁에 공감했다. 그의 첫번째 작품집은 1860년에 나왔고, 이듬해 그는 형의 협력을 얻어 〈브레먀 Vremya〉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이 잡지가 주창한 입장은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양대 지식인 그룹의 이념적 화해였으며, 러시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두 파벌이 대중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논설과 소설을 통하여 인텔리겐치아와 민중의 참된 접근방식을 모색했으며, 그 덕분에 잡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시인인 아폴론 마이코프와 비평가인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및 니콜라이 스트라호프 등 그의 견해에 동조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모여들었고, 그의 정치적·사회적·예술적 견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죽음의 집의 기록 Zapiski iz myortvogo doma〉(1861~62)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찍이 누렸던 문학적 명성을 되살려 주었다. 투르게네프가 갈채를 보냈고,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최고 걸작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소설은 아내를 죽인 혐의로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은 한 남자의 회고록 형식으로 표현되었지만, 사실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유형지에서 겪은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면서, 유형생활을 묘사하고 특별한 죄수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통찰하는 한편, 감동적인 삽화를 통하여 이 버림받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자유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거의 같은 무렵, 그는 〈브레먀〉에 〈학대받는 사람들 Unizhennye i oskorblyonnye〉(1861)이라는 장편소설을 연재했다. 가족과 인습을 무시하고 남자에게 사랑을 바친 여자의 권리를 다룬 이 소설은 비평가들을 괴롭혔지만, 독자 대중은 무척 기뻐했다. 적어도 몇 개의 초상들, 예를 들면 그가 처음으로 완전히 묘사한 전형적인 이중 정서의 여성인 주인공 나타샤, 어린이의 심리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반영하는 어린 넬리, 그리고 고집불통인 악당 발코프스키 등은 그의 주요 소설에 등장할 더욱 인상적인 등장인물의 선구자이다.
1862년 여름에 이르자, 도스토예프스키는 〈브레먀〉로 벌어들인 돈으로 오래 전부터 꿈꾸었던 외국 여행을 처음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 여행에 자극받아 〈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기 Zimniye zametki o letnikh vpechatleniyakh〉(1863)이라는 유명한 기사를 통해 여행에서 관찰한 유럽 문명의 악덕 때문에 러시아의 고귀한 운명에 대한 그의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해에 정부는 〈브레먀〉에 실린 어떤 기사를 스트라호프가 쓴 비애국적인 기사라고 생각하여 〈브레먀〉를 폐간했다. 이 위기가 닥치자,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을 빌려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 지병인 간질 치료가 겉으로 내세운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독일 비스바덴의 도박장에서 행운을 시험하고, 〈브레먀〉의 기고자이자 이미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폴리나 수슬로바와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도박과 밀회에서 그의 운은 형편없었지만, 수슬로바와의 관계에서 체험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게 될 이른바 '악마 같은 여인들'을 구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국으로 돌아온 뒤, 약간의 유산을 받아 형과 함께 〈에포하 Epokha〉라는 잡지를 다시 창간했으며, 이 잡지 창간호에 〈지하 생활자의 수기 Zapiski iz podpolya〉(1864) 제1부를 발표했다. 이 작품의 이름없는 주인공은 합리적인 이기주의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을 풍자한 것이기도 하지만, 절대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선은 상대적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소외된 개인이기도 하다. 그의 이중성은 의지와 이성의 근본적인 갈등에서 비롯된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자기성찰을 강조하고, 이 자기성찰은 참고 견딜 만한 현실 세계에서 혼란에 빠진 인간의 정신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성격 묘사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접근방식이 달라진 것을 보여 준다. 본질적으로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앞으로 그가 쓸 걸작들에 대한 철학적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종교적·정치적·사회적 사상과 관련된 걸작 장편소설들의 중심 개념이 이 작품에 거의 모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걸작 장편소설 창작기
1864~65년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불행이 잇따른 시기였다. 아내와 형이 죽었으며, 잡지는 빚더미에 짓눌려 도산했다. 채무자 감옥에 갇힐 위기에 놓이자 그는 수상쩍은 출판업자한테 소설 고료를 선불받아 외국으로 도망쳤다. 이미 상습적인 도박꾼이 되어버린 그는 이번에도 역시 도박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몇몇 여자와 연애를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외국에서 폴리나 수슬로바를 다시 만났는데 아마 수슬로바와 결혼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수슬로바는 비스바덴에서 그를 버리고 떠났고, 그는 룰렛에서 가진 돈을 몽땅 잃고 옷을 저당잡힐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밀린 숙박비와 모국으로 돌아갈 경비를 빌려 달라고 친구들에게 애원했다. 한 잡지 편집장한테는 〈죄와 벌〉이라는 또 다른 소설을 써줄 테니 선금을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결국 돈이 도착했고, 그는 1865년 10월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가 〈죄와 벌〉(1866)을 처음 구상한 것은 아마 유형지에 갇혀 있을 때였을 것이다. 이 소설의 구상을 적어 놓은 수많은 작가 노트(그는 그후에도 소설을 쓸 때면 노트에 구상을 적어두곤 했는데, 이 작가 노트들은 그의 창작방법 및 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에는 그가 이 작품의 예술적 세부에 기울인 끝없는 관심이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는 돈을 기본 문제로 삼고 있는 사회소설이다. 이 작품의 가난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비롯한 급진적 젊은이들의 유물론 사상이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에 반항하는 지식인 허무주의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데, 그에게는 이성이 삶의 과정을 대신한다. 인도주의적 목적은 사악한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의 파괴주의적 이론은 결국 그를 살인으로 몰고간다. 감옥에 갇히자 그는 도덕률을 위반하도록 자신을 충동질한 지적 오만을 버리고, 행복은 이성에 바탕을 둔 실존 계획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고통을 통해 얻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마르멜라도프와 그의 아내, 창녀 소냐,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 같은 보조 등장인물들도 뛰어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살인을 다룬 흔해빠진 추리소설 속에 주목할 만한 철학적·종교적·사회적 요소들을 집어넣음으로써 평범한 추리소설적 긴장감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주었으며, 발표되자마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소설의 혁신적 기법과 강렬한 문체, 그리고 범죄자와 도덕적 불구자들의 가장 어두운 내면을 밝혀주는 영적 광휘가 독자와 비평가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완성하기 전에 악덕 출판업자와 이미 맺은 계약을 1개월 안으로 이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계약을 어겼을 경우에는 가혹한 벌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에 쫓긴 나머지 안나 스니트키나라는 젊은 여자 속기사를 고용하여 중편소설 1편을 기일 안에 끝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도박사 Igrok〉(1866)는 거의 힘들이지 않고 쓴 작품이지만, 도박에 대한 열정과 폴리나 수슬로바와의 애증관계에서 영감을 얻은 힘찬 장면들이 몇 군데 들어 있다. 이듬해 그는 이 속기사와 결혼했고, 빚쟁이와 돈을 요구하는 인척들을 피해 아내와 외국으로 가 4년 동안 머물렀다. 두 사람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살았고, 때로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는 경우도 많았다. 젊은 아내는 이 모든 고난과 남편의 간질 발작, 끊임없는 노름, 그리고 첫 아이의 죽음을 꿋꿋이 견뎌냈으며 남편과 남편의 천재성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 2번째 결혼은 진정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2번째 걸작 〈백치〉(1868~69)는 이처럼 불우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이 소설의 출발점은 러시아 신문에 보도된 어떤 형사재판 사건 기사였다. 이런 사건들을 그는 '환상적인 사실주의'라고 불렀지만 이것을 소설에 이용할 때는 외부세계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그는 평범한 러시아인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지만 '인간 내부의 인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런 문제들을 한 차원 끌어올려 보편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나를 심리학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단지 더 높은 의미에서 사실주의자일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인간 영혼의 모든 심연을 묘사한다." 그는 조카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치〉의 주요의도는 "절대로 아름다운 인간(즉 도덕적인 의미에서)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절대로 아름다운 인간은 오직 한사람뿐이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은 주인공 미슈킨의 순수한 도덕적 성정을 손상시키고, 예판친 집안과 이볼긴 집안, 로고진 그리고 미슈킨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다투는 유별난 경쟁자 아글라야 및 나스타샤와 그의 관계를 좌우한다. 이 작품에서 이들을 비롯하여 관능·탐욕·범죄에 굴복하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미슈킨의 도덕적 신념을 시험하는 장면은 특히 뛰어나다. 이들은 그의 신념과 밝은 성격에 이끌리지만 봉사와 동정심 및 우애를 외치는 그의 계시는 그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그의 체험은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 틈에서 겪었던 체험을 상징한다. 결국 그가 자신의 선량함으로 감동시킨 죄인들은 불행해지고 그 자신은 백치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직 한 자도 쓰지 않은 장편소설 원고료를 선불받아 이미 다 써 버렸기 때문에 단편소설을 중편소설로 개작하여 다른 출판업자한테서 현금을 받았다. 이 중편소설이 바로 아내를 유혹한 남자에게 복수를 꿈꾸는 배신당한 남편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영원한 남편 Vechny muzh〉(1870)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창조적 예술에서는 특별히 발전한 면모를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그는 〈위대한 죄인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5편의 장편 연작을 쓰겠다는 방대한 계획에 몰두해 있었다. 이 연작의 초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소설은 신과 인간에게 몹쓸 죄를 저질렀으나 정신적 순례를 끝낸 뒤 죄를 씻고 구원을 얻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이 연작은 끝내 씌어지지 않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으로 쓴 3편의 장편소설은 이 작품의 개요에서 사상과 장면 및 등장인물을 빌려온 것이다. 그는 이 3편 가운데 첫번째인 〈악령〉을 1869년 쓰기 시작해 1872년에 끝냈다.
〈악령〉의 주요 줄거리는 모스크바의 한 대학생이 배신자로 의심받아 동료 혁명가들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선정적인 신문 기사를 계기로 구상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줄거리에 당시 구상하고 있던 〈위대한 죄인의 생애〉의 특징과 인물을 집어넣었는데, 특히 〈악령〉의 중심인물인 스타브로긴의 면모에 그런 특징이 잘 스며들어 있다. 행동과 극적인 사건으로 가득 찬 이 소설에서 그는 혁명 음모가들을 바보와 악당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들이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는 개심한 샤토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혁명사상을 반영한다. 이런 반혁명적 태도는 제정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그의 민족주의적 신념을 표현하며, 이 신념은 러시아 정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악령〉을 지배하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 스타브로긴이다. 그의 매력적인 성격은 반역적 급진주의자인 샤토프와 키릴로프뿐만 아니라 흥미있는 자유주의자 스테판 베르호벤스키 노인과 혁명가인 그의 아들 표트르에게도 영향을 주며, 주요한 여자 등장인물인 리자베타와 다리야 및 마리야는 그에게 운명적인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신에 대한 믿음을 잃자 그의 본성인 타고난 선량함은 위축되어버린다. 그가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것은 그가 악에 완전히 굴복한 것을 상징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훈적인 의도로 이 작품을 썼지만 이 작품이 과장된 목적소설이 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의 예술이 갖고 있는 힘 덕분이다. 그는 선정적인 요소와 이념적인 요소를 결합시키기 좋아하지만, 이 작품만큼 뛰어난 예술기법으로 이 요소들을 결합시킨 작품은 드물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을 끝내기 오래 전에 병에 걸렸고 돈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지만, 외국에서는 소설을 끝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걱정이 된 출판업자는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돈을 보내주었다. 이 작품이 예상보다 더 크게 성공한 것은 인상적인 그의 작품 선집 덕분이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시 사교모임에 초대받기 시작했다. 1873년 그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보수적 주간지 〈그라주다닌 Grazhdanin〉의 편집장이 될 수 있었다. 1년 뒤, 그는 맡은 일이 너무 제한되어 있고 발행인이 지나치게 반동적이라는 이유로 사표를 냈다. 이무렵에는 이미 유능한 아내가 그의 저작을 출판하기 시작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1876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라주다닌〉지에 기고했던 〈작가일기 Dnevnik pisatelya〉라는 칼럼을 별개의 월간지로 분리했다. 그는 이 간행물을 1년 이상이나 발간했고 1880년과 1881년에도 몇 권을 추가로 발간했다. 이 잡지는 주로 당시의 주요사건에 대한 그의 견해와 문학적 회고담 및 비평으로 채워져 있었으며 소품과 단편소설도 이따금 실었는데, 이 가운데 〈온화한 정신 Krotkaya〉(1876)·〈우스운 인간의 꿈 Son smeshnogo cheloveka〉(1877)은 그의 최고 걸작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이 잡지를 광범위한 사회·정치·종교 문제에 대한 그의 놀라운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언론과 문학은 그의 마음속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술과 현실의 상호관계는 일상적인 실존을 관찰한 결과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작가일기〉는 수많은 독자를 끌어모았고 그의 생활과 철학 및 소설, 특히 마지막 2편의 장편소설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작가일기〉에서 그는 〈미성년 Podrostok〉(1875)의 주제를 밝히고 있다. 〈미성년〉은 사생아로 태어난 아르카디 돌고루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버지 베르실로프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쓰면서 겪은 모험을 고백한 소설이다. 베르실로프는 한 사람의 이중인격자로서 러시아인은 독특한 민족이고 완전한 세계주의자이며, 유럽 지식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혁명적 유물론을 신봉하기 때문에 이제 곧 파멸할 운명에 있다는 작가의 확신을 대변해준다. 그는 베르실로프의 이중성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이 주제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이중성을 성찰하여 이중성을 결정하는 심리적 요인들을 관찰하고, 그가 상상력으로 창조해낸 남녀의 생각과 감정 및 행동에 이 심리적 요인들을 반영했다. 그는 몇 개의 곁가지 줄거리 때문에 중심 줄거리가 묻혀 버린 것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 나머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성년〉 속에는 4편의 장편소설이 있소." 비평가들은 대개 이 소설을 그의 다른 작품보다 낮게 평가한다.
〈카라마조프의 형제〉(1879~80)를 집필하기 시작했을 무렵,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성은 러시아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저명인사들이 그를 방문했고 그는 저명한 편집자이자 작가인 네크라소프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과학 아카데미는 그를 문학부 준회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880년에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 추모제에서 행한 연설은 러시아의 세계적 소명을 힘차고 분명하게 예언함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얼마간 떨어진 작은 휴양지 스타라야루사에서 아내와 두 아이 표도르와 류보프와 함께 조용히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곳에서 그는 규칙적으로 산책하고 글을 쓰는 엄격한 요양법을 지켰으며, 헌신적인 아내는 그가 구술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속기로 받아썼다. 그가 창작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준비하다시피 한 이 작품은 한마디로 말하면 아버지 살해에 대한 이야기로 심오한 심리적·정신적 암시로 애증의 갈등을 도입하면서 아버지 살해과정을 냉혹하게 전개해간다. 소설 전체를 통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은 믿음과 신에 대한 추구이며,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중심 사상이다. 형제들 가운데 막내인 알료샤는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구현한 존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삶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삶 자체를 사랑한다. 드미트리 역시 삶을 사랑하지만 그 의미는 찾지 못한다. 삶 자체보다 삶의 의미에 더 관심이 많은 이반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며, 창조자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이 형상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반의 이중성은 인간과 신의 끝없는 투쟁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반역행위로 시작하여 신의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반란으로 끝을 맺는다. 이반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신앙을 추구하게 된 동기였던 이른바 저주받은 문제들, 죄와 고통 그리고 이것들과 신의 존재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이반이 신의 세계를 거부하는 것은 유명한 〈대심문관의 전설〉에 밀도있게 극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소설의 다음 장에서 우주의 조화라는 비밀은 머리가 아닌 가슴과 감정 그리고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 속에 제시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의 속편에서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을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끝낸 지 몇 달 뒤인 1881년 2월 9일(구력 1. 28)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장 널리 읽히는 19세기 소설가로 손꼽히는데, 그 까닭은 아마 그가 소설 속에서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세대 및 전후세대를 괴롭힌 도덕적·종교적·정치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극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시인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고, 나치 지배 이전의 한 독일 비평가는 마르틴 루터 다음으로 독일에 가장 큰 정신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라고 말했다. 20세기 프랑스의 경우,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 세대의 지성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으며,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철학은 이성의 횡포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난에서 영감을 얻었노라고 말했다. 레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대해 "나는 그런 쓰레기를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소련에서도 널리 읽혔으며 유명한 소련 작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이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독자들의 체험을 변형시키는 능력이 작가의 위대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20세기 미국 소설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 소설에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회의라는 질병에 허덕이며 신음하는 인물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반영웅적 주인공들로부터 창조된 형상이기 때문이다. E. J. Simmons 글 | 金碩禧 옮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초인(超人) superman/(독)ubermensch.
인류의 존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뛰어난 인간으로 '초인'이란 말은 괴테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사용했지만, 프리드리히 니체가 특별히 그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85)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한 용어이다. 이 뛰어난 인간은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초인은 우수한 잠재력을 지닌 어떤 사람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인습적인 그리스도교의 '대중도덕'을 말소하고 자기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할 때 나타난다. 이 가치는 내세가 아닌 현세의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니체는 결코 '독일 나치스'라는 잔인한 초인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니체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영혼을 가진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조지 버나드 쇼는 '초인'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희곡 〈인간과 초인 Man and Superman〉(1903)을 통해 대중 속에 널리 퍼뜨렸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다성적 Polyphonic 소설과 단성적 Monologic 소설
바흐찐에 의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세계를 분석한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란 책에서, 특히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세계를 구별짓는 특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용어이다. 이 용어는 바흐찐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음악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빌어온 것이다. 바흐찐에 의하면 모든 문학장르 중에서 가장 비순수하고 잡종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소설만이 다성성이 가장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유일한 문학형태이다. 바흐찐이 다른 어느 문학 형태보다도 소설을 가장 위대한 장르로 간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성적 소설의 작중인물들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움직여지는 자동인형들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비판하거나 배반하기도 하는, 한 시대의 다양한 욕망의 목소리들을 들려주는 살아 있는 주체들로 등장한다. 그러나 단성적 문학의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는 톨스토이의 세계는 독백적이다. 즉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주인공의 말은 그에 관한 작가의 말이라고는 견고한 테두리 안에 갇혀 있어 다만 그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뿐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인식 주체만이 있을 뿐이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만 그것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prologue and epilogue)
문학작품, 특히 운문으로 된 희곡에 덧붙여지는 서문과 부기(附記)로 고대 그리스의 '프롤로고스'(prologos)는 실제로는 해설적 기능을 하는 1막을 대신했기 때문에 현대의 프롤로그보다 더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한 등장인물(흔히 神)이 빈 무대에 나와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설명했는데, 연극의 줄거리는 흔히 하나의 파국으로 이루어졌다. 라틴 연극에서 프롤로그는 일반적으로 더 정교하게 씌어졌는데, 예를 들면 플라우토스의 연극 〈루덴스 Rudens〉의 프롤로그에는 그의 가장 훌륭한 시가 몇 편 실려 있다. 영국에서는 신비극과 기적극이 설교와 함께 시작되었다. 토머스 색빌은 최초의 영국 비극인 〈고버덕 Gorboduc〉(1561 상연)의 프롤로그로 무언극을 사용했다. 셰익스피어는 〈헨리 4세 Henry Ⅳ〉의 장면을 설정하기 위해 루머(Rumour)라는 의인화된 인물의 묘사로 극을 시작했으며, 〈헨리 5세 Henry Ⅴ〉는 합창으로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17세기에 몰리에르가 플라우토스식 프롤로그를 부활시켰다.
가장 바람직한 에필로그는 관객을 유쾌한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재치있는 글이었다. 영국 극에서 에필로그의 형태는 벤 존슨의 〈신시아의 술잔치 Cynthia's Revels〉(1600경)에 의해 정착되었다. 존슨의 에필로그들은 보통 극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앞으로 예상되는 극에 대한 비평에 대비해 극을 변호하는 구실을 했다. 영국 극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전성기는 왕정복고시대였다. 1660년부터 앤 여왕 치하의 연극 쇠퇴기까지 런던에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없는 연극은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 극작가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적합한 시를 써달라고 동료 시인들에게 부탁했다. 평판이 자자한 작가가 쓴 시는 신예 작가들의 희곡에 명성을 부여했다.
18세기 이후에는 에필로그가 씌어진 일이 거의 없지만 프롤로그는 20세기의 극에서도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면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모든 사람 Jedermann〉(1911),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 Our Town〉(1938),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Glass Menagerie〉(1944),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 Antigone〉(1944) 등이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문학과 사상(思想)
문학은 도덕이나 종교와 접촉을 맺어 작품의 외적(外的) 조건(條件)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여러 가지 관념(觀念)이나 사상(思想)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곧 철학이요 사상으로서 이것은 작은 사물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하여 인생관이나 사회적인 이데올로기까지 포함된다. 실제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이건 관념과 사상이 들어 있지 않은 작품(作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 사상이나 관념의 폭과 깊이가 천차만별이어서 어느 것에는 생활 철학이 나타나고 사회적인 이데올로기가 표현되는가 하면, 어느 작품에는 정신적(精神的) 편력(遍歷)이나 구제(救濟) 의식(意識)이 나타나는 등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상의 고취와 생활의 예지와 문명(文明)비평(批評)과 인생관(人生觀), 우주관(宇宙觀), 사회관(社會觀) 등 작가의 사상이 작품에 반영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문학(文學)의 요소에서 살핀 대로 요는 이러한 관념과 사상이 얼마나 작품 속에 예술적으로 형상화되었느냐가 문제이다. (중략)
즉, 문학 작품은 언어적인 구조라는 그 본질적(本質的) 조건(條件)에 의해서 평가되어야지 그 작품을 형성한 이데올로기나 사상과 관념으로 평가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말이다. 물론 이 말에 대해서는 문학관에 따라서 이의가 있을 수 있다. 특히 문학사회학자들에 있어서 사상은 만하임이 말하는 학문적 이론의 사회적(社會的) 기능(機能)성, 즉 사회적 합목적(合目的)성에도 불구하고 진실일 수 있다는 논리적인 뒷받침 아래 강한 목적성을 띠고 나타난다. 그래서, 문학 작품은 '독자(讀者)'들에게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주입(注入)시키는'데 필요한 도구가 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관념과 사상일지라도 작품 내에서 예술적인 형상화가 되지 않으면, 어떤 특정한 사상의 한낱 주입 및 선전 도구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출처 구인환, 구창환 공저 신고 문학개론)
문학의 사상성(思想性)
문학의 요소 중에서 정서와 상상이 문학의 독창성을 만들어 준다면, 사상은 그에게 위대성을 결정해 주는 요소다. 문학의 사상은 작자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에 의해서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 내용이다. 따라서, 작품의 사상이 뛰어나고 독창적이면 그 문학은 위대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죄의식에서 오는 심리적 고뇌와 무한한 사랑만이 인간을 속죄하여 준다는 주제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에는 니체주의도 있고 기독교 사상과 민간 신앙도 있지만 이런 것이 생경하게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서나 캐릭터나 스토리 속에 융합되어 있어서 관념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말하자면 '죄와 벌'이라는 예술 작품 속에 사상은 구상화되고 형상화된 것이다. 요컨대, 문학에서의 사상성은 그의 작품을 위대하게 해 주는 주요 요소가 되는 것으로서, 생경하고 철학적인 관념으로 나타날 것이 아니라 과일 속의 영양소처럼 용해되어 있어야 한다.
읽기 자료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
혼의 리얼리즘의 극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에프 톨스토이와 쌍벽을 이루는 19세기 러시아문학의 거성으로, 세계적인 문호의 한 사람으로 칭송 받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의 문제성과 독특한 그의 문학세계는 날이 갈수록 더욱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의 예술적 통찰력과 실존주의적인 발상, 그리고 그의 기구한 생애와 사상적 격동기에 처해 있었던 러시아의 사회적 현실의 와중에서, 천재적인 독창력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는 고질인 간질(癎疾)과 병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도박벽, 낭비와 무절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또한 시베리아 유형의 고난과 시련, 사형 대에서 느꼈던 공포와 죽음의 심연, 그러한 체험을 통한 그의 특유한 예술성은 그의 독자적인 수법에 의하여 작품 속에 깊고 울창한 숲과 웅대한 준봉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또 가까이에서 새롭고 신비한 그의 문학세계를 조금씩 맛보고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0월 30일(러시아력) 모스크바의 마린스끼 빈민병원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미하일은 군의관 출신으로, 이 병원 의사였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생활은 보잘것없는 서민적인 것이었다. 그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성품을 가졌으며, 곧잘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야는 모스크바 상인의 딸로 상냥한 분이었으며 남달리 신앙심이 두터웠다. 작가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교회나 수도원을 다니던 기억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뚤라 현에 조그마한 영지를 사서, 매년 여름을 교외의 자연 속에서 지내게 됐다. 이것은 우울한 병원의 어두운 구석에서만 살던 그에게 그의 생애를 통하여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을 남겼으며, 농민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이 작가의 전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의 만년에 잡지 〈작가의 일기〉속에 실린 여러 편의 소품들은 그 당시의 기억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열세 살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의 체르마크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많은 고전들을 읽었고, 그 중에서도 스코트, 주꼬프스끼, 푸슈킨의 작품들을 주로 탐독했다.
열 여섯 살 때, 그는 처음으로 인생의 슬픔을 처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 해에 그는 어머니를 잃었고, 존경하던 러시아 시인 푸슈킨이 결투로 죽은 사실이 그를 미칠 듯한 슬픔에 잠기게 했다.
이듬해 그는 아버지의 강요로 뻬쩨르부르그 육군 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문학에 열중하고 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통적으로 엄격한 군대 규율에 싫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가 않아서 별로 부자간의 서신 연락도 없었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혼자 방에 들어앉아서 푸슈킨, 고골리, 쉴러, 스코트, 발자크, 조르즈 상두 등을 읽으며 문학세계에 탐닉하는 일밖엔 없었던 것이다.
고골리를 제외한 러시아 문학에서 도스토예프스키만큼 리얼리즘에 짙은 로맨티시즘의 그림자를 남긴 작가도 없을 것이며,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별세 후 그의 아버지는 영지에 은거하면서 농노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그들에게 참살되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은 감수성이 강한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으며, 그의 만년의 대작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살인 소재가 되었다. 자기 영지의 사랑하던 농노들이 이러한 잔학한 범죄를 저질렀던 사실은 도스토예프스키로 하여금 그의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작중 인물의 이중적 성격, 즉 인간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신과 악마 (선과 악)의 대립되는 모순을 파헤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창작의 주제로 삼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학교를 마친 뒤 장교로 임관되어 공병학교에 남게 되었으나, 근무에는 취미와 의욕이 별로 없었고, 문학에 대한 열망이 더해갈 뿐이었다. 결국 그는 가난과 불안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군에서 제대를 한 뒤 창작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지병인 간질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약간의 발작을 일으켜, 우울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다음해 그의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의 학교시절의 동창이며 일찍 문단에 데뷔했던 그리고로비치가 읽고 감동하여 발표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시인 네끄라쏘프는 이 원고를 읽고, 너무나 감동되어 “새로운 고골리가 나타났다!”고 외치면서, 당시 문단을 주도하던 비평가 벨린스끼에게로 전하게 되었다. 그도 작가의 재능을 극찬하면서 “자기의 재능을 귀중하게 간직하고 꾸준히 재능에 충실하면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삼십 년 뒤, 이때를 회상하면서 “내 생애에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이 중편소설은 다음해 1월에 네끄라쏘프가 주간 하는 <뻬제르부르그 문집>에 수록되어 독서계의 일대 선풍을 일으켰으며, 도스토예프스키의 화려한 데뷔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성공으로 그는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투르게네프와 같은 저명한 작가들과 교우를 가지며, 또한 계속 신작을 발표함으로써 활기찬 전도 유망한 문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갑작스러운 성공은, 경륜이 얕고 신경질이 심한 청년작가에게 좋은 결과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자만과 자부심을 가지게 했고, 그것은 자연히 동료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벨린스끼와의 사이도 나빠지고, 잡지사에서 빌린 돈으로 도박과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뒤 4년 동안에 그는 《분신》《쁘로하르찐 씨》 《주부》《백야》와 같은 수십 편의 중·장편소설을 발표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했고, 도리어 처녀작 이후에 나타난 병적 심리에 대한 흥미나 신비주의에 만족은 고사하고, 심한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러시아 인테리 청년들 사이에는 서구의 공상적 사회주의의 새로운 사조가 스며들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뻬뜨라셉스끼가 중심이 되어있는 서클에 참가하게 됐다. 당시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자유사상가에 대한 탄압은 극심하였으며,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서클의 동료들이 체포되어 뻬뜨로 빠블롭스끄 요새 감옥에 8개월간 감금됐다가, 그해 12월에 21명의 동료와 함께 사형이 선고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것은 황제가 꾸민 참혹한 연극이었다는 것이 뒤에 알려졌다. 처음 세 사람이 기둥에 묶여 사형집행 병사들이 총을 들어올린 순간, 황제의 칙사가 달려와 사형을 사면하고, 유형으로 감형한다는 새로운 선고가 내려졌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겪은 몸서리칠 만한 작가의 체험은 뒤에 《작가의 일기》나 《백치》에 묘사되고 있다.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을 옴스끄 감옥에서 보내면서, 얼굴에 낙인이 찍힌 죄수나 살인범들과 함께 어울린 고통스러웠던 생활을《죽음의 집의 기록》에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제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참다운 인간적인 가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 신경의 질환과 간질병이 심해지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는 성서를 읽으며 종교적인 구원을 기다렸으며, 형기를 끝마친 그는 다시 병졸로 시베리아 국경 수비대에서 또 4년을 복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학교 교사였던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 이사예바와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아이가 있는 기혼녀였으며, 결혼 전까지의 그들의 열애는 많은 고난을 겪게 했다. 그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기 희생적 행동의 연유를 이런 곳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그후 십 년만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무렵 수도 뻬쩨르부르그에는 개혁에 부푼 기대가 팽배하여 문단에 복귀한 그는 맹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형 미하일과 공동으로 잡지 <시대>지를 창간하고, 《아저씨의 꿈》《학대받는 사람들》《죽음의 집의 기록》등 병역 근무 중에 집필하거나 구상했던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여 문단에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죽음의 집의 기록》은 시베리아 옥중의 체험을 서술한 것으로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사생활은 암담했었다. 아내 마리야의 지병인 폐병은 날로 심해졌으며, 그들의 불화는 더욱 심해만 갔다. 작가 자신도 지나친 과로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서, 1862년과 다음해 두 번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의 서구여행을 떠나게 되며, <시대>에 게재된 스뜨라호프의 폴란드 문제에 관한 논문 <운명적인 문제>가 말썽이 되어 당국의 발행정지 처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그는 지성적인 신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뽈리나야 수슬로바를 사랑하고 있었고, 외국 여행중인 그녀를 찾아 떠나게 되며, 여행 중 그는 여자와 도박에 열중한 나머지 경제적인 곤경에 처하게 된다. 뒤에 소설 《도박자》는 이 때의 체험이 소재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서구 여행 중에 어려서부터 동경하던 서구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오히려 환멸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구의 문화도, 파리의 이채롭고 상쾌한 분위기도, 독일의 음악이나, 알프스의 장관, 스웨덴의 미소짓는 듯한 아름다운 호수, 피렌체의 미술품도 그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다. 그는 서구문화를 부르주아적이며 퇴폐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오래지 않아 무너질 것이라고 확언하기도 했다. 그가 밀라노에서 보낸 편지에는 "나는 여기서 둔해지고 편협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의 접촉도 끊겨져 갑니다. 나에게는 러시아의 공기와 러시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는 점차 슬라브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면서 러시아인의 뛰어난 독창성에 대한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여행에서 귀국하여, 발행이 금지됐던 <시대>지 대신으로 <세기>지를 발행하면서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년)를 지상에 연재했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활동에 있어서의 하나의 커다란 전기가 되는 아주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경계로 해서 그 전기의 작품에서 보여주던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그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인간성의 발견이라는 인도주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다 폭넓은 사회·윤리·도덕·철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독자적인 사색의 경지로 확대해 나갔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인간의 의식이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높은 곳으로부터 깊은 심연 속에 이르기까지 깊이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제 2의 우주를 창조해 갔으며, 《죄와 벌》에서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에 이르는 일련의 위대한 사색소설을 창작하기에 이른다.
작가의 생애에서 가장 우울한 시기는 아내 마리야의 죽음과 형 미하일의 급사, 그리고 오랜 문우이며 잡지의 유력한 동인이었던 그리고로비치의 이따른 죽음이 있었던 때이다. 잡지의 폐간은 불가피했으며 그로 인한 막대한 부채와 형이 남기고 떠난 많은 가족의 부양책임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이러한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저작의 판권을 출판인 스쩰롭스끼에게 3천 루우불에 팔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일정 기한부로 신작 장편을 쓸 것을 아울러 약속하게 되었다. 만일 이러한 약속이 지켜지지 못할 경우, 장래의 모든 그의 저작권까지도 넘겨주어야 하는 가혹한 강요를 감수해야 했다. 그는 부득이 여자 속기사를 고용하여 구술 필기하는 비상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젊은 속기사 안나 스니뜨끼나를 다음해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녀의 속기로 《도박자》를 기한 내에 완성할 수 있었고, 이 해에 《죄와 벌》이 발표되었다.
신혼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채권자들의 성화나 부양해야 할 친척들의 무거운 짐을 피하고 창작활동에 주력키 위하여 아내와 같이 다시 서구 여행의 길에 올랐다. 그들은 그 뒤 4년간을 각지로 전전하면서 장편 《백치》《악령》그리고 중편 《영원한 남편》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여행 중에도 그의 도박벽과 간질의 발작, 궁핍한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그의 영리하고 성실한 아내의 조력에 의하려 점차 가정의 경제 생활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외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아내가 계획했던 자비 출판의 저작 집을 간행하고, 그 것이 적중됨으로써 부채의 청산은 물론 별장까지 가지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성격상의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는 작가였으며, 자신도 자기 결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허영심과 시기심이 많았고, 이기적이며 남을 곧잘 의심하는 편협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그의 작품에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알렉쎄이 카라마조프나 성인과 같은 조씨마 신부를 창조해냈다. 또한 그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거지나 친구가 돈을 달라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고, 자신이 곤궁에 처하고 있을 때에도 돈을 긁어모아 형의 가족과 주위의 매달린 친척에게 화도 내지 않고 주기도 했다. 그의 공식 전기를 썼던 친구인 스뜨라호프는 이렇게 썼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착한 사람이나 행복한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는 질이 좋지 못하고 타락하고 시기에 가득 찬 인간이었습니다. 일생을 두고 정욕의 불길에 농락되었으나. 만일 그가 지성이 부족하거나 그처럼 심술궂지 못했다면,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1876년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개인잡지 <작가의 일기>를 간행하기 시작했다. 이 잡지는 예상외로 독자의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재판, 삼판의 증판 사태까지 일어났다. 잡지에는 주로 사회비평을 써왔으며 많은 소품과 수상을 발표했다. 그의 사상적 전환은 1861년 농노해방 이후 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이 점차 퇴조되어 우경화하였으며, 새로운 급진적인 청년층이 형성되기에 이르렀으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전자에 속하고 있었다. 그는 급진주의자들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그들이 제시하는 러시아의 갱생의 길과 처참한 국민에 대한 구제책에 대하여 "고난을 이상화하고 그 속에서 살길을 찾아야 하며, 개혁 대신에 종교적인 위안, 신비로운 위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작가의 일기>를 통하여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서신을 받고 그들의 질의에 해답을 줌으로써 그는 차츰 인생의 교사로서 또 지성인의 지도자로서 추앙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18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푸슈킨 동상 제막식에서 푸슈킨을 찬미하고, 러시아 문화와 역사적 운명에 대해 논술한 그의 연설은 만장의 청중들에게 열광적인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위한 축제가 되어 버렸다.
그 해 가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대작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을 완성하였으며, 다음해 1881년 60세기를 일기로 영면하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은 문학자로서는 거의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성대한 것이었으며, 수만의 군중들이 거리를 뒤덮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는 일종의 독특한 세계라 말할 수 있겠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인 삶의 모습을 외면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특유한 프리즘에 의하여 분광하여 재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리얼한 현실과 추상적인 내면세계가 교착되는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고 있으며,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하고 있는 무한한 관념을 그의 독특한 수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초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살인을 범하게 했으며, 《악령》의 끼릴 로프는 자살에 의하여 자기를 극복할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에서 그를 자살케 한다. 이러한 작중인물은 그의 독특한 관념의 구상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이 반 카라마조프는 이지와 합리주의의 구상이며, 스비드리가일로프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육욕주의를, 《백치》의 무이쉬낀과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의 알렉세이는 그리스도적인 사랑으로 구상화되고 있다. 이러한 인물들 사이에 일어나는 증오와 사랑의 이합, 갈등들은 바꾸어 말해서 관념이나 감정의 움직임이라 하겠다.
그는 작품의 작중 인물들을 발자크나 디킨즈와 같이 다양한 인물들을 창조하지는 못했고, 소수의 유사한 인물을 여러 작품에서 되풀이하여 등장시켰다는 비난도 받고 있기는 하다. 물론 그의 작품들의 등장 인물을 몇 개의 갈래로 나누어 볼 수도 있으며, 실존의 모델에 결부시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의 작중 인물들이 단순한 객관적인 존재로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은 깊은 내면세계, 잠재된 다양한 인간성의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작중 인물들이 성격의 다면성을 지니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그것은 오히려 변화무쌍한 인간심리의 묘사에 충실한 나머지 독자로 하여금 금방 친숙할 수 있는 인물로 느껴지지 않고 혼란한 감을 주기도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심리 탓으로 보아야 하겠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솔직한 심리묘사의 탁월한 점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문학이 추구한 그의 독창성의 가장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또 그의 소설에서 전개되는 사건이 소설적인 심리 묘사에 의하지 않고, 극적인 대화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서 대화가 장황하게 길어지는 것은 복잡한 심리 묘사나 심오한 감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움직이는 사건을 대화를 통하여 독자의 마음속으로 유인하여 감동을 휘몰아 일으키는 독자적 수법이라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푸슈킨,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같은 귀족적 문학 수법과 다른 특징의 하나는 그의 작품의 도시성에 있다. 그들의 문학 속에 묘사된 인물과 성격, 자연 묘사와 시화된 목가적인 풍경을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는 찾지 못한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 묘사나 세련된 인물의 용모나 외관의 묘사 따위는 없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살던 어두운 도시, 찢긴 생활, 소용돌이치는 사건처럼 그의 소재도 역시 숨막히는 생활과 흥분·신음·초조의 어두운 도시의 뒷골목으로 끌고 돌아간다. 그리고 이런 도시 환경 속에서 짓누르고 있는 중압에서 벗어나려는 공상의 세계로 나래를 펼친다. 다시 말하면 현실 생활에서 실컷 학대받는 그들이 환상의 세계에서 비로소 자아와 자유를 찾기 위하여 몸부림치게 된다. 이러한 도시인의 심리적 경향은 그이 심리주의의 근본이 되어 그의 문학의 독특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창작의 주제와 수법은 작품 구성에서도 천부의 재능을 보였다. 그의 일생을 통해 단 한 편의 희곡도 없지만, 작품 구성에 극적 다이너미즘이 유효적절하게 활용됨으로써 긴장감을 고취하고 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살해하는 장면의 묘사나, 이반 까라마조프가 자기의 고민하는 하는 양심과 대면하는 장면은 어느 작품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독자를 감동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보통 그의 작품에는 몇 개의 병행하는 줄거리가 있으며, 그것들이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또 그 하나하나에 각각 사건이나 논쟁, 생각이나 대화가 배치되고, 클라이맥스가 있으며, 한 줄거리의 긴장된 장면에 또 다른 줄거리가 그것을 이어가는 드릴을 느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그가 살던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낡은 봉건 질서의 몰락과 서구의 새로운 자유 사조의 물결이 러시아로 물밀 듯이 밀려와 소용돌이치는 와중에서 성장했으며, 선척적으로 괴팍한 성격과 사형과 유형이 엇갈리던 체험, 생지옥과 같은 유형지의 생활, 가난과 역경에 시달리는 생활 속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퇴비를 듬뿍 준 나무의 과일이 더 단맛이 있듯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에 성숙과 향기를 불어넣었으며, 그를 세계적 문호의 한 사람으로 만든 독창성의 원천은 그가 처했던 여건과 그가 지닌 좋은 소양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쁜 소양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뿌리박은 대지에는 역시 그가 굳건히 설 수 있는 러시아 문학의 유산이 있었다. 그의 예술적 온상은 고골리였다. 고골리는 레르몬또프와 푸슈킨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의 독자적 문학의 영역을 이룩했다. 푸슈킨의 아포리즘적 주류에서 벗어나 고골리의 반역적 고민의 예술이 형성되었으며, 이 지류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러 암석을 부수려는 격류가 되어, 소용돌이치는 깊은 심연으로 된 것이다. 고골리는 만년에 예술과 종교의 일치를 시도하여 고민과 고행을 감수했으며, 이 자기분열과 이중성이 곧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을 뒷받침하였으나, 그는 선배들이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영역까지 깊이 파 내려갔다. 이렇게 도스토예프스키의 독창적인 문학세계가 형성되면서 그의 모습이 거대한 산맥고도 같이 우뚝 솟아올랐던 것이다.
오늘도 그의 작품 속에는 아직도 다 파헤치지 못한,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은 매장량이 추정되는 무진장한 광맥이 남아 있다. 그 광맥 속에서 메레즈곱스끼는 종교를 찾았고, 셰스또프는 불합리를, 프로이트는 상호병존심리를, 앙드레 지드는 무상참여를, 헤세는 아시아적 철학을, 카뮈는 부조리를 파내어 자기 문학의 초석으로 삼게 되었다.
《죄와 벌》에 대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중의 하나며, 그의 최초의 장편소설인 《죄와 벌》은 1865년에 집필되었고, 다음해 1월부터 12월까지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한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그의 후기작품 중의 대표작의 하나가 된다. 그는 이 작품의 구상을 이미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시작했으며, 그것을 집필하게 된 시기는 작가의 생애에서 가장 곤궁에 빠져 있던 때였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소설 창작도 시의 창작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여기엔 우선 정신적인 안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감옥에 처넣겠다는 협박을 받으며 채권자의 시달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여러 가지 소설 형식을 시도했다. 일인칭에 의한 주인공의 고백, 법정에서의 진술 형식, 살인 후 8년만에 출옥하여 회상하는 형식으로 된 것, 그리고 끝으로 실현된 방법이 삼인칭의 현재의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의 작품 《백치》《악령》《카라마조프네 형제들》과 함께 살인사건을 다룬 범죄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서, 때는 1860년대의 경제공황의 시기이며, 장소는 대도시 뻬쩨르부르그의 빈민가로 하고 있다. 거기 오층 집 지붕 밑 방에는 가정교사 자리를 잃고, 대학에도 다니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 라스꼴리니꼬프가 살았다. 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그의 고향에는 노모가 망부의 보잘것없는 연금과 푼돈벌이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여동생은 어느 지주집 가정교사로 있었으나 그 집주인이 그녀를 좋아해서, 그 집을 쫓겨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러한 자기 가족을 구하고, 자기 자신도 이 지겨운 가난을 면하여, 대학도 마치고 출세의 길을 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돈이 필요했고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돈을 강탈했다. 그러나 의외로 노파의 여동생까지 순간적으로 살해하게 된다. 이 뜻밖의 제 2의 살인은 그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했고, 악몽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기서 복잡한 자기 내면의 싸움과 함께, 예심 판사와 경찰을 상대로 하는 외적, 심리적 싸움이 시작된다. 예심판사는 증거가 거의 없는 완전범죄의 이 사건의 범인에 대하여 심리전을 시도하면서 최후의 대면에서 범인의 자수를 권유한다. 한편 순결한 마음씨의 창녀 쏘냐로부터 그가 자수할 것을 또 권유받게 된다. 그는 드디어 예심판사의 논리적 영향과 쏘냐의 도덕적 감화에 굴복하여,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고, 그 죄값을 치를 것을 결심하면서 시베리아 유형 길로 떠난다. 그를 뒤쫓아 간 쏘냐는 감옥 가까이에 살면서 그의 갱생의 길을 돕는다.
이러한 통속적인 소재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서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에 의하여 불후의 명작으로 승화된 것은 그의 문학의 독특한 창의성과 깊은 예술적 통찰력에 있다고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처음 이 작품에서 사건의 유도를 한 인텔리 청년의 범죄적 동기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시작했다. 라스꼴리꼬프는 사회적으로 무익한 존재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그의 재물을 탈취하여 그것으로 사회적으로 유망한 청년이 그의 재능을 발휘하여 사회에 기여한다면, 그의 이러한 범죄행위는 오히려 사회나 인류를 위하여 공헌하는 선행이 될 것이라는 공리주의적인 설정(設定)을 하게 된다.
이러한 논리에는 또 〈초인사상〉이 뒷받침을 하고 있었다. 그는 초인(비 범인)에게는 평범한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법률·도덕·윤리 따위―을 짓밟고 넘어서서 인류의 진보를 위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낼 권리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뉴턴과 같은 비범한 천재가 인류를 위하여 공헌할 수 있는 위대한 발견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방해했다면, 뉴턴은 감히 인류의 복리를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이 무신론자이며 전형적인 니힐리스트인 주인공의 주장이다. 나폴레옹과 같은 거인은 수없이 인간을 살육했지만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아무런 기여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 문화를 파괴했는데도 불구하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범한 인간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요구 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단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하여, 또 자기의 인간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무런 존재 가치도 없는 노파를 죽이게 된다. 그런데 선량한 그녀의 여동생까지 살해하는 이중살인의 결과로, 그의 이념과 그것을 실현했던 현실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생긴다. 그는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와 불안과 공포, 그리고 밀어닥치는 고독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무엇보다도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현실과 자아, 특히 사랑하는 가족이나 주위의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단절을 초래한 사실이었다. 그가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환상하면서 첫발을 내디딘 순간에 이미 초인이 되기는커녕 자신도 노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냉혹한 이성과 인간성과의 갈등에 찢기며 번 민과 오뇌 속을 방황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 작품의 가장 심각한 문제성을 던져주는 부분이 전개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러한 사상적 파탄의 구원이 의외로 창부 쏘냐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족의 호구지책으로 치욕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더럽히지 않은 마음의 순결함을 지녔으며, 그리스도적 사랑의 화신으로 묘사됐다. 한편 라스꼴리니꼬프의 〈제 2의 자아〉인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기존사회의 제약을 무시하는 데는 주인공과 같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그가 천성적인 악인이며, 자기 범행에 대한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를 통해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자기 자신 속에 숨겨진 추악하고 비열한 일면을 찾음으로써 자수하게 된다. 그는〈거룩한 창부〉의 감화와 자기 내면의 갈등으로 인해서 마침내 자수하게 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지는 않았다. 영웅, 권력자 또는 초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기 이론의 오류는 인정치 않고, 단지 자기가 나폴레옹이 될 수가 없다는 것만 단정을 내린다.
이 소설은 결국 추상적인 이론이 인간에 가한 학대와 그것에 대한 인간성의 엄격한 보복의 과정을 형상화했으며, 이성을 초월한 인간성과 종교적 심리의 소중함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성을 흐리게 하는 이러한 극단적인 자아의 주장을 부정하고, 결국 양심과 신의 섭리(攝理)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죄와 벌》은 이성과 이념에 대한 신성과 양심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래서 강렬한 자아의식을 가진 주인공이 철저한 개인주의와 권력의지의 사상은 논리적으로 완벽했지만, 그 반면에 신과 양심에는 이론적 뒷받침이 거의 없었고, 주인공의 사상이 용두사미로 끝나게 된 점을 비난하는 평론가도 많았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심리적인 압박이나 양심의 가책이외에 더 정확한 반론과 부정을 찾으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는 자기 결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무신론적 개인주의에 의한 합리주의 사상을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내고 만다. 결국 주인공의 패배와 파멸의 필요성을 묘사해 냄으로써 그 사상의 근본적인 오류를 설파했던 것이다.
《죄와 벌》이 잡지에 처음 연재되자 독서 계에는 폭발적인 선풍이 일게 되었으며, 특히 노파가 살해되는 장면이 게재될 무렵, 모스크바의 한 대학생이 이와 유사한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어, 항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깊은 예술적 통찰력에 감명을 크게 받기도 했다.
《죄와 벌》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경탄하리만큼 정확한 심리 묘사에 뛰어난 심리적 관념소설의 극치를 이룬 작품이며, 이만큼 극적인 스릴과 서스펜스가 깃들여 있는 작품도 다시없을 것이다.
작가는 1860년대의 러시아 사회의 사상적 혼란기에 청년층 속에 번진 사상적인 갈등과 도덕적 기준의 동요 가운데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고 어두운 현실에서 방황하는 데 착안하여 청년 라스꼴리니꼬프의 인간형을 창조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문학의 대명사와도 같은 상징적 인물의 하나로서 우리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고 하겠다.[글쓴이 : 오재국(吳在國)]
'죄와 벌'의 아우트 라인
가난하기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젊은 이 라스콜리니코프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작은 방 안에 틀어 박혀 기묘한 이론을 생각해 낸다. 인류는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의 두 계층으로 대별된다. 범인은 법률에 따르는 대중이고, 비범인은 법률을 만들게끔 선택된 소수자로서, 개혁을 위하여서는 장애물(障碍物)을 집고 넘어 설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에 따라서, 그는 경제적으로 인류의 행복에 공헌한다면, 빈대와 같은 노파를 죽이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기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론만으로 살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우연(偶然)의 요소들이 가미된다. 강도(强度)의 노이로제, 생활의 어려움과 누이동생의 약혼(오빠를 위한 희생)을 알리는 어머니의 편지, 주정뱅이 마르메라도프와의 만남, 세상의 부정(不正)에 박해받는 가엾은 민중의 상징과도 같은 그의 가족의 이야기, 주점에서 엿들은 학생과 사관의 대화(이것은 그의 생각과 아주 똑같은 내용의 것이었다), 길가에서 우연히 엿들은 노파의 여동생과 상인과의 대화(그는 내일 밤 7시에 노파가 혼자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은 우연의 중첩(重疊)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이 그를 결행(決行)의 길로 재촉 질 하는 것 같았다.
이것도 우연의 도움으로, 그는 성공적으로 범행을 결행하고, 얼마 되지 않는 금품을 훔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이미 그의 이론에는 파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의 싸움이 지주(支柱)가 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예심 판사 뽀르필리와의 지적 대결(知的對決)이다. 긴박감이 넘치는 대경이 세 번 벌어진다. 뽀르필리는 여러 가지 심리적 증거를 통하여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물증(物證)이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전적 태도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탐색한다. 뽀르필리는 체포를 암시하고 자수를 권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개혁자의 현행 질서에 대한 항복, 자기의 사상의 파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적 대결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신념에는 동요가 일기 시작한다. 그것을 더욱 재촉하는 것이 스비드리가이로프이다. 자기의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도덕(道德)을 무시하는 이 절망적인 니힐리스트의 모습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의 이론의 추악한 투영(投影)을 본 것이다.
다른 하나의 지주(支柱)는, 소냐와의 대결이다. 범행 직후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는 이제는 완전히 고독하다고 느낀다. 완전한 고독 속에서는 인간은 살지를 못한다. 이것이 그를 괴롭힌다. 촛불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자로의 부활」을 읽고 있는 창녀와, 그것을 듣고 있는 살인자, 이것이 이 작품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 발에 키스를 한다. 그리고 이 키스는 너에게 한 것이 아니고 , 인류의 고뇌에 대한 키스라고 한다. 소냐는 사랑과 자기 희생에 의하여,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하고, 자기의 신앙의 세계로 그를 인도하려고 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의 신념은 버릴 수 없으나, 소냐에게 기부된다는 것은 영원한 고독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리하여 그는 드디어 소냐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자수를 한다.
그리고, 유형지 시베리아에서 그는 죄수들에게 소외되고, 그 같은 죄수들이 소냐를 사모하고, 존경마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중에, 결국은 자기의 사상의 패배를 인정하고, 소냐의 진실에 굴복한다.
주인공 하이라이트
창작 노우트에는, 소냐의 말로서 「나는 죽은 나자로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나를 재생시켜 주셨습니다.」라고 써 넣은 주석이 있다. 이것은 소냐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한번은 죽었지만, 즉 자기의 의지로 자신을 죽였으나, 그리스도에 의하여 새 생명이 주어지고, 사랑에 의하여 널리 구원을 베풀어 가는 것이, 소냐의 사는 길, 즉 사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적극적으로는 부와 권력이 없는, 사랑과 형제애의 이상 사회로 연결되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에 의하여 부와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도 부와 권력이 목적은 아니고 그것은 새로운 예루살렘, 지상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나자로의 부활」을 낭독할 때의 소냐의 태도에서, 그 비밀을 간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향하고 있는 방향은 각각 따로 따로이지만, 귀결점은 한 가지,즉 목적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사람의 사랑이, 두 개의 진실의 대결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작자의 생애
피오돌 미하이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러시아작가, 1821년 모스크바에 있는 빈민 병원의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름만의 귀족이고, 어머니는 상인 집안 출신으로, 오히려 가부장제(家父長制)의 엄격한 상인 계급의 생활 환경에서 자랐다. 16살 때에 페테르부르크의 공병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에는 육균 중위로서 공병국(工兵局)에 근무하였으나, 1년 못가서 퇴적하고, 그 후 부터는 문필 활동에 전념하였다. 1846년에,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로 문단에 데뷔하였는데, 그 작품은 보기 드물게 대성공을 거두어, 자연파의 총수인 비평가 벨린스키는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의 걸작이라고 격한하였고, 일약 인기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에 『분신(分身)』등 10수편의 단편은 낭만주의의 경향을 띄움에, 벨란스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고, 그는 자연파의 그루우프에서 떨어져,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서어클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1849년 봄, 혁명 사상가 페트라세프스키 사건에 연좌되어 체포되어, 이후 10년 동안을, 산채 시베리아에 매장되는 신세가 되었다.
시베리아의 감옥에서, 그는 죄수들의 증오와 적의(敵意) 속에 감싸 인 채, 서서히 심적 전환(心的轉換)을 하였다. 즉, 민중으로부터 유리된 공상적 사회주의로부터 민중과의 결부를 기반으로 하는 토양주의(土壤主義)에로, 사상적인 이행이 향하여졌던 것이다. 그는 군대 근무시, 최초의 아내 마리아와 결혼하였으나, 출옥 후에도 이 병약한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은 괴로움과 부담이 된 의붓 자식 뿐이었다. 1859년 말에,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돌아갔다. 농노 해방을 눈앞에 둔 사회적 분위기가 앙양된 시기로서, 그는 형과 잡지를 창간하고, 시베리아 감옥의 실정과 죄수들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장편『학대 받는 사람들』을 발표함으로써, 10년간의 공백을 훌륭히 극복하였다.
1864년은 아내의 죽음, 형의 죽음, 잡지경영의 실패와 불행이 겹친 해로서, 이후 수년 동안 막대한 빛을 지고, 채권자들의 위협, 도박의 실패, 해외 도피 등, 파란 많은 생활이 계속 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동안에, 그는 『죄와 벌』『백치』『악령』의 3대 장편을 썼다. 궁핍 속에 있음으로 해서 걸작을 쓰게 된 것이다.
마지막 10년 간은, 비교적 행복한 시기로서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고, 속기자였던 두 번째의 아내의 협력도 있어서,『미성년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두 장편을 비롯하여, 시사 평론, 문예 평론, 회상 등을 포함하는 개인 수기 등을 발표하고 있다. 그의 만년을 장식한 것은 모스크바의 푸시킨 동상 제막식의 제건으로서, 그의 강연은 많은 청중들의 압도적인 대환영을 받았다. 그 후 반년이 지난 1881년에, 그는 인후염이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명문구 낙수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주의(主義)를 죽인 것이다!」(라스콜리니코프의 자조(自嘲) 어린 독백)
심화 자료
『죄와 벌』의 집필 기간 중에, 도스토예프스키의 편지는 거의가 돈을 꾸어 달라는 부탁, 빛의 변제연기의 거절, 비존하기까지 한 전차(前借) 부탁의 편지뿐이다. 세계의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이처럼 처참한 곤궁과 정신적 압박 속에서 쓰여진 것이 또 있을까?
작품의 무대가 된 센나야 광장(지금의 평화의 광장)이며, 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길은 모두 사실(寫實)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걸은 길을 비롯하여, 그가 살던 집, 소냐의 집 등이, 오늘날에는 문학 산책의 코스가 되어 있다.[출처 : 세계문학의 명작과 주인공 총해설에서 - 소봉파편- (일신사간)]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