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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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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曺植, 1501-1572, 남명·南溟)

 

· 명종 때 성리학자. 명종의 간곡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고 산야에 은거하 며 학문에만 열중함.

· 저서 : [남명집], [파한잡기] 등

· 작품 :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남명가> 등이 있었으나 부전, 시조 3수만이 전한다.

--- 󰃫 시조 <두류산 양단수를 녜 듣고 이제보니,>

 

󰏐 벼슬 끊고 후학(後學) 밝힌 삶

- 퇴계와 쌍벽 이룬 ‘영남 거유(巨儒)’ 조식

 

···············[이달의 문화인물] 계기 재조명··················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남명 조식 선생이 문화체육부에 의해 2월의 문화인물(95년)로 선정됐다. 남명 선생은 실천 유학을 역설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써 퇴계와 함께 영남 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인물로 그의 문하에서는 특히 명유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절의지사가 많이 배출됐다.

 

부친에게 어릴 적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스무 살에 생원·진사 양과에 급제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죽고 숙부의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자 시국을 한탄하며 벼슬을 단념했다. 이후 그는 산사를 떠돌며 학문을 연마하다 30세 때 처가인 김해로 가서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당시 내노라하는 명유들과 교유하며 학자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48세 되던 해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온 그는 벼슬과는 인연을 끊은 처사로 일관하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등 선비의 고고한 자세를 꺾지 않았다. 61세 때 다시 진주로 이사해 많은 영재들을 가르쳤는데 이들 중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등은 선생의 고매한 가르침에 따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 서기도 했다.

 

남명이 72세로 영면(永眠)하자 조정에서는 제물과 제관을 보내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했고 사람은 모두 곡하여 만장과 제문을 올렸다. 또 조정에서는 후일 그의 학문을 기려 영의정에 추증하기도 했다. 진주 덕천서원, 김해 신산서원, 합천 용암서원에 배향됐으며, 저서로는 [남명집(南溟集)], [남명학기], [파한잡기]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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