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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와 사림파의 개혁 정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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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와 사림파의 개혁 정치 / 장원정

14세기 말에 이르러 고려 사회에 신흥 사대부라는 정치 세력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들은 당시 부패한 지배층인 권문 세족을 물리치고, 여러 개혁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얼마 후 신흥사대부들은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주장하는 급진파와 고려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파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결국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면서 1392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웠고, 이후 건국에 참여한 급진파들은 조선의 핵심 관료층이 되었다.


그러나 권력과 막대한 부를 한 손에 쥐게 된 이들은 곧 전에 자신들이 그토록 비판했던 고려의 지배 세력과 같은 모습으로 타락해 갔다. 이에 15세기 말, 16세기 초에 '사림'이라 불리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나타나 부패한 기득권 세력, 즉 훈구세력과 대립하며 개혁을 시작했다. 이때 사림파를 이끌며 개혁을 단행한 사람이 바로 조광조였다.

       1. 조광조라는 사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개혁 정치가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부패한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 했던 조광조는 자신이 주도한 개혁이 좌절되면서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렸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흔히 '광인(狂人)' 또는 '화태(禍胎, 화를 낳는 근원)' 라고 불렀다. 아마도 앞 뒤 가리지 않는 그의 저돌적인 행동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광조는 우리 나라 성리학 발전에 한 획을 그은 뛰어난 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치적으로 실패했을지 몰라도 학문적인 면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광조가 처음 본격적인 성리학을 접하게 된 것은 열 일곱 살 때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만나면서였다. 김굉필은 조선 성리학의 문을 열었다고 하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수제자였다. 그런 김굉필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게 된 조광조는 얼마 후 소과(小科, 과거 시험의 하나로, 생원과 진사를 뽑던 시험. 여기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생겼다.)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천거제(薦擧制)가 확대되면서 학생 천거제가 마련되었는데, 이 때 함께 공부하던 성균관 유생들이 조광조를 적극 추천했다.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로 조광조는 1515년 서른 네살에 종6품의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같은 해 다시 대과(大科, 문과「文科」시험으로, 원칙적으로 소과에 합격해 생원, 진사가 된 사람에게만 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여기 합격해야 문관(文官)이 될 수 있었다.)시험을 치렀다. 천거로는 중요한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과에 당당히 합격한 그는 곧 사간원(司諫院, 조선시대 왕에게 옳은 말을 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언관(言官, 조선시대에 사간원·사헌부의 벼슬아치를 통틀어 일컫는 말. 이들은 왕에게 옳은 말을 하는 일을 맡았다.)직에 임명되었다. 신진 관료로서 패기와 재능을 갖추고 있던 조광조는 왕인 중종(中宗, 조선 제 11대 임금, 재위기간 1506∼1544)의 눈에 띄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승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벼슬길에 나선 지 3년만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대사헌은 요즘 검찰 총장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이제 조광조는 자신이 평소 꿈꾸어 온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개혁의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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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 : 성리학은 남송(南宋) 시대 주자(朱子)에 의해 집대성된 유학의 하나로, 주자학이라고도 불린다.
성리학은 심성의 수양을 중시하며, 정치적인 도덕으로서 임금과 신하의 의(義)를 강조하고, 인 간과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 천거제 : 고려와 조선에 있던, 천거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 천거제는 개인의 덕행이나 정치적 능력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천거제는 15세기 말 성종대에 중앙에 진    출한 사람들의 주장으로 실시되었는데, 지방 사대부들이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통로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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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훈구파와 사림파                                

(1) 훈구와 사림의 형성

조광조가 활동한 16세기 초는 사림(士林)과 훈구(勳舊, 훈척(勳戚)이라고도 하는데, 훈척은 공훈이 있으면서 높은 관직에 오른 훈신(勳臣), 왕과 인척 관계에 있는 척신(戚臣)들을 합쳐 이르는 말이다.)의 대립이 극에 다다른 때였다. 정계에 새롭게 떠오른 사림 세력과 이미 여러 대에 걸쳐 조선 사회의 부와 권력을 독점해 온 훈구세력, 이 두 세력의 갈등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훈구와 사림의 뿌리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훈구와 사림, 이 두 세력은 모두 고려 말 신흥 사대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려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부르짖었던 신흥 사대부들은 점차 고려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는 온건파 사대부들과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급진파 사대부로 나누어졌다. 결국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세력을 장악하면서 조선이 세워졌다. 정도전이나 권근 같이 조선의 건국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급진파 사대부들은 건국 후 조선의 핵심 관료층이 되었다. 반면에 길재(吉再, 1353∼1419, 고려 말·조선 초의 학자)같이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파 사대부들은 향촌 사회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했다. 앞과 뒤를 각각 훈구, 사림의 뿌리로 볼 수 있다.

조선 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핵심 관료층이 된 공신(公信)들은 과전(科田, 국가에서 벼슬아치에게 내리던 토지로, 그 벼슬아치가 살아 있을 때만 권리를 인정)을 지급받아 부를 누렸다. 또 여러 차례 정치적인 격변을 거치면서 왕을 도운 사람들이 공신이 되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기도 했다. 그 중에는 공신이 다시 공신으로 책봉된 경우도 꽤 많았다. 또한 이렇게 공신 목록에 오른 사람들 중에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권력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단 공신에 책봉만 되면 대를 이어 부유하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공신을 책봉하는 데 특히 신중하였다. 그런데 세조(世祖, 조선 제7대 임금, 재위 기간 1455∼1468)때 이르러 상황이 달라졌다. 세조는 나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 조선 제6대 임금, 재위 기간 1452∼1455)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도덕적으로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었기에 세조는 많은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돕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대가를 약속했는데, 그 대가가 바로 공신 책봉이었다.

그리하여 세조 때 공신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무분별한 공신 책봉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으니, 조광조가 활동한 종종 대에도 새롭게 책봉된 공신들이 상당히 많았다. 종종 대의 공신들은 중종 반정*을 통해 공신 명단에 오른 경우였다. 이들 공신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을 이루었는데 바로 이 세력을 훈구, 훈척이라고 부른다.

  한편 사림은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으로, 성리학적 소양을 갖추고 향촌 사회를 이끈 지방 사대부들을 말한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대부'라 부르기보다 '사림'이라 불러 훈구파와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훈구와 사림은 처음부터 추구하는 항문의 방향도 달랐다. 조선의 관료가 된 급진파들은 학문을 할 때도 나라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사장(詞章, 시가「詩歌」와 문장, 즉 짓는 능력을 뜻함)을 중시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문서 작성이나 각종 편찬 사업 그리고 외교 문서의 작성에 필요한 능력을 보는 것이었다. 반면에 지방에 은거한 온건파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면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경학(經學, 사서삼경 같은 유교 경전의 뜻을 깊이 연구하는 학문)을 강조했다. 또한 이들은 인간의 도리나 도덕적 규범을 중시했다.

  (2)훈구파의 경제 독점과 사림파의 정계 진출

  훈구와 사림, 두 세력은 건국 후 한동안 따로 떨어진 세계에서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이르러 두 세력은 심각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당시 훈구파의 지나친 경제 독점이 사림파를 자극했던 것이다.

  14세기 이후로 시작된 농업 발달은 국가 경제 전반에 걸친 발전을 가져왔다. 농업 기술의 발달이 생산력을 높였고, 먹고 남는 곡식이 생기면서 이를 팔기 위한 장시(場市)가 발달했다. 그리고 상업과 유통의 발달이 곧 경제 전반의 발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5세기 말 훈구파들은 당시의 경제적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권력을 이용한 치부(致富)에 나셨다. 이때 훈구파가 백성을 강제로 동원해 땅을 개간하거나,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렇게 땅을 빼앗긴 농민들 중에는 거지가 되어 떠돌거나 산에 들어가 도적이 되는 사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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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반정 : 반정(反正)이란 '옳은 것으로 되돌린다'는 뜻으로, 신하들이 나서서 나쁜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대신 세우는 것을 말한다. 중종 반정은 연산군 12년(1506)에 성희안, 박원종 등이 폭군인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 즉 중종을 왕으로 세운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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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향촌의 중소 지주였던 사람들에게 향촌 사회와 농민들이 황폐해지는 것은 곧 자신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반을 보호하기 위해 15세기 말 성종(成宗, 조선 제9대 임금, 재위 기간 1469∼1494)대부터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사림파는 일찍이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의 성리학적 윤리를 내세워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파 사대부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었다. 같은 이유로 세조의 왕위 찬탈에도 참여하지 않아 훈구 세력에 비해 도덕적인 면에서 떳떳한 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사람들은 훈구 세력의 부패상을 강하게 비판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사창제(社倉制, 농민들이 관(官)에서 곡식을 꾼 후 이자를 갚지 못해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자 가난한 농민들에게 싼 이자로 곡식을 꾸어 주는 제도) 실시나 유향소 복립 운동(留鄕所復立運動)  등을 통해 향촌에서 세력을 확보하려 했다. 이런 사림의 행동이 훈구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고, 사림과 훈구의 충돌은 결국 연산군(燕山君, 조선 제10대 임금, 재위기간 1494∼1506)대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로 폭발하였다. 사림 세력은 두 차례의 사화를 겪으며 큰 타격을 입었다.

       3. 조광조의 개혁 정치                                  

  사화로 잠시 주춤했던 사림 세력은 향촌 사회에서 쌓은 기반을 바탕으로 종종 대에 다시 중앙 정계에 자리를 잡았다. 조광조의 빠른 승진이나 급진적 개혁이 가능했던 것도 모두 이런 사림파의 세력 확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사림파의 성장에는 종종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종종은 즉위 후 계속 공신 세력(훈구 세력)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에 공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람들을 적극 등용했던 것이다.

  종종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상 정치인 왕도 정치(王道政治, 임금이 인(仁)과 덕(德)을 근본으로 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를 실현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사림들은 이러한 왕도 정치가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도덕적 실천과 함께 백성에 대한 도덕적 교화(敎化, 가르쳐 감화시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먼저 왕에게 왕 스스로 철인(哲人,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 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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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향소 복립 운동 : 유향소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의 시기에 만들어진 기구로, 지방에 부과되는 세금을 농민에게 배당하고 거두는 과정에 관여하고 감독했다. 또 그 지역의 인사권을 장악해 향리와 농민을 통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사림들은 일찍부터 유향소를 통해 향촌 사회를 지배하고 이끌어 나갔다. 세조 때 폐지되었는데, 15세기 말 훈구파의 향촌 침투가 심해지자 사림들은 유향소를 다시 세워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자치 기반을 굳히려 했다.

* 무오사화, 갑자사화 : 사화(士禍)란,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사림 세력이 훈구 세력에 밀려 참혹한 화를 입은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사회는 모두 네 번 일어났는데, 연산군대에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가 일어났고, 종종 때 기묘사화(1519, 그리고 명종 때 마지막 을사사화(1545)가 일어났다.

* 소학 : 중국 송나라의 유자징(劉子澄)이 주희의 가르침을 받아 지은 책, 충(忠)과 효(孝)가 중심이 되는 성리학적 윤리 규범을 담고 있으며,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 할 예법을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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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온갖 특권을 누리며 비리를 저지르는 훈구 세력을 비판하면서 능력 중심의 합리적인 관료 체제를 만들려 했다. 또 「소학」(小學) 실천 운동과 향약(鄕約,조선 시대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규약) 보급 운동 등을 펼쳐 방탕하고 사치해진 사회풍속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부터 도쿄 행사를 주관해 온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한 것은 미신 타파를 위해 조광조가 실시한 여러 조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조광조는 새로운 관리 등용 제도로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했다. 현량과란 천거제의 하나로, 학행과 덕행, 성리학적 소양 등을 기준으로 관리를 뽑는 제도였다. 단, 천거를 통해서도 중요한 관직에 임명될 수 있다는 점이 기존의 천거제와 달랐다. 1519년 처음 현량과가 실시되었을 때, 이를 통해 관직에 등용된 28명은 모두 사람이나 사림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었다. 즉 현량과는 처음부터 사림들의 관계(官界) 진출 통로로 마련되었던 것이다.

일련의 개혁 조치를 통해 세력을 강화한 사람들은 마침내 훈구파를 정면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위훈삭제(僞勳削除,'거짓된 공훈을 없앤다'는 뜻)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증종 반정때 공신으로서 누리는 각종 혜택 즉 관직과 물질적 부를 잃게 된다는 뜻이었다. 조광조는 진실을 명백히 밝히고 나아가 그로 인해 잘못 형성된 재산까지 모두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조광조는  자신의 뜻을 이루었으나, 이 과정에서 훈구들은 물론이고, 중종의 불만까지 사고 말았다. 왕까지 몰아붙이며 위훈삭제 문제를 강행하는 조광조를 보며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또한 훈구 세력은 끊임없이 조광조에 대한 비방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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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조와 주조위왕 사건
어느 날, 궁녀 한 명이 중종에게 이상한 잎사귀 하나를 바쳤다. 그 나뭇잎은 궁궐의 정원에서 나온 것이라 했는데, 거기에는 '주초위왕(走肖僞王)'이란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그것은 벌레가 글자 모양대로 갉아먹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훈구파들은 이 나뭇잎이야말로 조광조가 역모를 꾸민 증거라고 왕에게 말하고, 계속해서 조광조를 비방했다. '주초위왕'을 풀이하면 조씨가 왕위에 오른다는 참으로 해괴한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走)와 (肖)를 합하면 (趙), 즉 조광조의 성씨가 된다. 그렇지 않아도 위훈삭제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조광조의 독단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던 중종은 이 사건으로 조광조를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사림파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사실 나뭇잎에 새겨진 글자는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가 궁녀를 시켜 나뭇잎에 글자 모양대로 꿀물을 발라 벌레가 파먹게 한 것이었다. 조광조의 개혁에 위기를 느낀 심정과 남곤, 홍경주 등 훈구 세력이 중종의 후궁이자 홍경주의 딸인 희빈 홍씨와 함께 모략을 꾸몄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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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중종은 위훈삭제 조치가 이루어지고 3일 만에 조광조와 사림파에게 '당파를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혔다.'며 죄를 물었다. 죄인이 된 조광조는 결국 사약을 받았으며, 사림의 핵심인물들은 유배나 파직을 당하였다.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이로써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한 평가                

16세기 중반의 대학자이자 관료인 율곡 이이(李理, 1536∼1584)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 이론을 실천하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지는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대부분 젊어서 정치 경력이 짧은 데다가 스스로를 과대 평가한 나머지 지나치게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여 실패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이와 비슷한 시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李, 1501∼1570, 조선 중종·명종 때의 대학자)은 조광조에 대해 이이와 비슷한 평가를 내리면서도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조광조)로 말미암아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할 바를 알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나라의 근본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유학의 가르침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나라의 장래가 부강하게 되었다. 한때 사림의 화(禍)는 애석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선생이 도를 높이고 진정한 학문의 뜻을 높인 공로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훈구 세력의 강력한 반발로 그 당장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조광조가 주도한 사림의 개혁이 결과적으로는 나라가 부강해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길게 볼 때 조광조의 개혁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향촌 사회에 굳은 기반을 갖고 있던 사림들은 기묘사화와 같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선조(宣祖, 조선 제14대 임금, 재위기간 1567∼1608)대에 이르러 정치의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바야흐로 사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때 이르러 조광조는 역사에 새롭게 자리 매김 되었다. 결국 올바른 방향과 목적을 가진 개혁이라면, 한때 좌절했더라도 실패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독서평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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