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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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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鄭澈, 중종 31-선조 26)

 

· 본관 연일. 한양 생

· 10세 때 <을사사화(1545)>로 맏형은 죽고, 아버지는 유배

· 16세 때 귀양에서 풀려나오자 조부 산소가 있는 담양 창평면 성산으로 내려가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에게 수학함. 또한 이이, 성혼, 송익필과 같은 선비와 교유함

· 26세 때 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 (벼슬은 지평, 전적, 함경도 암행어사, 수찬, 교리, 집의, 직제학, 승지 등 역임)

· 40세 때 西人이 됨

· 45세 때 처음으로 외직인 강원도 관찰사가 됨 (관동별곡, 훈민가)

· 48세 때 예조참판, 형조, 예조판서

· 50세 때 동인의 논척을 받아 퇴임. 창평으로 내려감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유적지

1) 시비(삼척의 ‘죽서루’)

2) 묘·송강사(松江祠)(지방문화재 제9호,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은골)

3) 송강정철선생시비(송강사 입구소재) : ‘사미인곡’ 일절 새김

4) 송강 3대 유적지(환벽당, 식영정, 송강정)(전남 담양)

---  시조 <소나기 한 줄기미 연잎에 솟드로개>,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오늘도 다 새거다 호미 메고 가쟈스랴>, <장진주사(將進酒辭)>, <이고 진 뎌 늘그니 짐 프러 나를 주오> 갓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 송강 3대 유적지 탐방

어느 날, 김윤제가 환벽당(環碧堂)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조대 앞 물에서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내용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급히 조대로 내려가자 그곳에서 한 소년이 미역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의 용모에 반해서 외손녀를 그 소년에게 시집 보냈는데 바로 그 소년이 정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비가 환벽당 마당에 있지 않고 조대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시비에는 <성산별곡> 중에서 조대와 소(沼), 그리고 환벽당이 나오는 부분을 새겨 놓고 있다. 지금은 수량이 풍부하지 않지만 송강이 살았던 시절에는 배를 띄워 낚시도 하고 미역을 감을 정도로 물이 깊었으며, 갈대가 우거져 강호의 풍경이 아기자기했을 듯싶다. 환벽당은 담양군과 광주 광역시 접경 지역에 있는데 엄밀하게는 광주시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식영정(息影亭)은 환벽당의 맞은 편 300미터쯤 떨어진 성산에 있다. 식영정은 담양군 남편 지곡리 성산이다. ‘식영’을 직역하면 ‘그림자도 쉰다’는 말이지만, 원래의 뜻은 ‘숲에서는 그림자가 없다.’라는 뜻이다. 말하자만 세속을 떠나 자연에 묻혀 사는 삶을 뜻하는 낱말일 것이다. 어쨌든 식영정은 임억령을 위해 김성원이 1560년에 지은 정자인데, 송강은 여기서 머무는 동안 주변의 경관을 관조하면서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한다. 정자 주변에는 목백일홍 꽃이 한창이고 검은 오석의 시비에는 성주본 <성산별곡>이 새겨져 있다. 주위에는 부용당과 송강의 가사가 양각된 목판 일부를 보관하고 있는 각(閣)도 있다. 소쇄원(瀟灑園)은 식영정에서 승용차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보길도의 부용동 원림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원림인 이 정원은 사적 제304호로서 양산보가 은사인 조광조가 남곤 등의 훈구파에 몰리어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자, 자신도 입신 양명의 길을 버리고 하양, 은거했던 곳이다.

 

여기서 다시 송강정으로 가려면 담양군 봉산면 쌍교까지 가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왼쪽으로 꺽으들면 된다. 송강정은 정철이 동인(東人)들에게 몰려 대사헌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하향하여 머물렀던 정자다. 당시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여 ‘죽록정’이라고 불렀으나 후손들이 1770년에 증축을 하면서 송강정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송강은 이곳에서 <사미인곡>을 지었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이곳의 시비에는 <사미인곡>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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