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자살의 정신의학적 측면에 대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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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는 매일 하루에 10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신의 의지에 의해 목숨을 끊는 사연들도 하루에 1000가지가 된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니체의 자살, 헤밍웨이의 엽총 자살, 일본 무사들의 할복 자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이라 노래했던 김광석의 의문의 자살까지 그 사연들을 많고 다양하고 또 기구하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은 그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고 시행했다는 것이다.

 

영어로 자살을 뜻하는 suicide는 라틴어의 sui(self)와 caedo(kill)의 합성어로 스스로 죽인다는 우리말과 같은 뜻을 갖고 있는 단어이다. 또한 우리말의 자살이라는 명사와 '범했다,' '저지른다'는 동사가 잘 어울리듯이 영어에도 commit라는 동사가 suicide와 함께 온다. 다시 말해서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살은 범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자살을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경향은 특히 천주교에서 심하며 세계적으로도 다른 종교인보다 천주교에서 자살자가 적다는 일관된 보고가 있다.

 

또한 자살은 백인에 많으며 이민 인구에 흔하다고 한다. 직업별로 보면 전문직에 자살이 많아서 의사, 음악가, 치과의사, 수사관, 법조인, 보험대리인에 많다고 한다. 흥미 있는 것은 의사 중에도 정신과 의사가 가장 자살율이 높고 그 다음에 안과, 마취과의 순이라고 한다.

 

자살은 여자가 남자에 비해 많다고 하며 청소년에서 젊은 성년층과 노년층에서 자살이 많고, 봄과 가을에 자살이 많다고 한다. 기혼자보다는 이혼한 사람에게서, 전쟁보다는 평화시에 자살이 많은데 이는 자살의 환경적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된 이후 수 십년간 서유럽의 청년들 사이에서 권총 자살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미숙한 청년들이 잘 알려진 자살을 모방하는 것을 Werther syndrome이라고 하는데 이 당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법전이 제정된 시기로 이전에 자살을 죄악시하던 법률에서 자살이 많이 관대해진 시기와도 일치하고 있다.

 

이런 사회적인 조류 속에서 E. Durkheim이 최초로 자살에 대한 고찰을 시행한 『자살론』이라는 책에서 그는 자살을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환경적인 측면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자살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시도를 했는데, 첫째가 이기적 자살로 현실과 타협하지 못한 사람들이 시도하는 자살이며 대부분의 정신 질환자에서 보이는 자살이 여기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이타적 자살로 이기적 자살과는 반대로 현실 혹은 자신의 사회에 너무 밀착되어 발생하는 자살이다. 예를 들어 2차 세계 대전시의 가미가제 특공대의 행동이나 1980년 학생 운동에서 보였던 분신 자살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세 번째는 무통제적 자살로 사회에 적응 혹은 융화되는 것이 차단되거나 와해됨으로써 행동의 일상적인 기준을 상실한 경우를 말하며 예를 들어 파산 후, 혹은 복권 당첨으로 벼락 부자가 된 뒤에 발생하는 자살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사회적 환경이 자살을 결정한다는 식의 논조를 유지했는데, 따라서 빈민층에서 부유층보다 자살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후에 진행된 여러 가지 연구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자살에 대한 최초의 심리적 해석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드에 의해 시행되었다. 그는 자살은 자기 자신에게 향한 공격성이라고 파악하였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한 상실이 발생하는 경우 그 대상에게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있기 마련인데, 사랑의 감정은 상실된 대상과 함께 애도와 추모의 심정으로 해결되지만 증오의 감정은 상실 대상에 같이 붙어 해결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의식적인 가학성을 갖게 하며 자살을 시행하게 한다고 하였다.

 

미국 UCLA 대학의 정신과 교수였던 Wahl은 자살이란 동일시상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하였다. 대개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부모와 동일시함으로써 유아기의 거세 불안을 극복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게 된다. 이러한 동일시가 일어나는 시기에 부모의 결손이나 학대, 나약성이나 변덕성을 보이게 되면 아이는 제대로 동일시를 하지 못하며 '부모가 죽어버렸으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욕구는 표현되지 못하고 죄책감을 낳으며 억압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 부모에게 죄책감을 갖게 하거나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버리려는 의도로 자살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자살 이론가들은 특정한 정신 역동적 혹은 성격적 구조가 자살과 연관되어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자살하는 이들의 환상을 관찰함으로써 자살의 정신 역동과 결과를 어느 정도 제시할 수 있다고 보는데 다음의 환상의 내용들이 자살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배신이나 힘, 조절, 징계에 대한 갈망이나 속죄, 희생, 배상에 대한 갈망, 도피나 잠에 대한 욕구나 구조, 재생, 재합, 새로운 인생에 대한 갈망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환상은 자살로 실행하는 이들은 사랑하는 대상의 손실이나 자기애의 손상, 분노나 죄책감 등의 기분이나 자살자를 동일시함으로써 고통받는 사람들이며 5대양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집단 정신 역동이 집단 자살을 유발할 수도 있다.

 

자살의 정신 역동적인 유형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첫째는 역습적 유기로서의 자살이다. 예를 들어 실연당한 뒤 자살하는 경우, 상대가 나를 찼으니 이번에는 자살해 버림으로써 나도 상대를 똑같이 차고 저버리고 싶다는 심정이 커서일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이 적발된 후 부모가 학교를 강제로 그만두게 하자 자살을 시도한 학생이 있다. 아무런 힘도 없이 부모가 학교를 강제로 그만두게 하자 자살을 시도한 학생이 있다. 아무런 힘도 없이 부모의 의견에 따라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 자살자는 그 동안 심하게 자신의 일상을 간섭해 온 부모에 대한 마지막 치명적인 반격을 시도한 것이다. 자살로써 부모로부터 사랑하는 자신을 빼앗아 버리자는 의도에는 복수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반전 살인으로서의 자살이 있다. 상대방을 살인한다는 의미의 자살이다. <패왕별희>에서 보이는 자살이 여기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샬루(장풍의 분)의 아내인 주샨(공리 분)이 목을 매어 자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화 혁명의 격랑 속에서 군중에 의해 끌려 나온 샬루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동료 경극 배우인 데이(장국영 분)가 동성애자라고 폭로한다. 이에 화가 난 데이는 샬루의 아내인 주샨이 창녀였다고 말한다. 그러자 샬루는 아내인 주샨마저 배신하여 그것은 사실이며 자신은 그녀를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노라고 소리친다. 이에 주샨은 자살로써 남편의 배신에 답을 한다. 과거에는 사랑하였으나 이제는 증오하게 된 그 상대를 자기 자신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이제는 자신을 살해함으로써 바로 그 상대를 죽이는 목적달성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복수의 의미가 담겨있다.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사람들을 평생 죄책감 속에 가둬버리자는 것이다.

 

세 번째 자살의 유형으로 재합을 기약하는 자살이 있다. 현실 생활의 좌절과 불행에 지친 나머지 먼저 간 가족을 저 세상에서 만나 행복하게 살자는 환상에서 감행하는 자살이다. 안데르센 동화의 성냥팔이 소녀, 로미오와 줄리엣의 자살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현실 도피의 의미로 감행하는 자살도 있을 수 있다. 델마와 루이스에서는 남성 위주의 현실 사회에 대한 탈출구로 두 여성은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또한 <사의 찬미>에서는 예술의 몰이해와 윤리의 멍에로 숨통을 조여오는 사회에 대한 도피로 윤심덕과 김우진은 현해탄에 몸을 던진다.

 

또 다른 유형으로 재생을 기약하는 자살이 있다. 분석심리학자 융은 자살이란 인생에서 모든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강한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영적 재생을 바라는 무의식적 소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는데 위의 두 가지 유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응징으로서의 자살도 있다. 인생의 어느 중대한 사항을 성취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자신을 처벌하는 뜻으로 자살하는 것이며 남자에 많다. 대학 입시 삼수생이 자살하는 경우가 이것인데 성적부진으로 자살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오히려 위의 유형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외에도 자기는 이미 죽은 것으로 치는데서 오는 자살도 있다. 육체가 죽었다는 망상은 아니고 단지 감정적 차원에서 자기는 죽었다고 보는 경우로 정신과에 입원한 중환자 중에 더러 이런 심경에 처한 사람이 있다.

 

자살에 대한 중요한 오해라는 내용의 명제는 정신과 영역에서 잘 알려진 명제인데, 이것을 정신과 의사인 김상준은 『프로이드와 영화를 본다면』이라는 저서에서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흔히 진짜로 자살을 할 사람은 남에게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자살할 의향이 있는 사람은 주위에 이를 미리 알린다. 주변 사람들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의사를 비추거나, 더러는 대놓고 명확히 경고를 하기도 한다. 프랭크도 자신이 자살하기 전 여러 차례 속마음을 내비치고 있다. 호텔에 투숙한 후 나눈 프랭크와 찰리의 대화이다.

 

"형을 만나고 여자와 즐길 것이다. 그 다음엔 호텔의 멋진 침대에 누워 머리에 총을 쏘지."

 

"자살을 할 거라고 했나요?"

 

"아니, 머리에 총을 쏜다고 했어."

 

둘째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자살하는 사람들은 꼭 죽고 말겠다는 확고한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그들의 대부분은 삶과 죽음, 두 가지 중 하나를 확실히 정하지 못한 채 혹시 누군가에 의해, 또는 어떤 상황 변화로 인해 구원 받고 구조되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애타게 기다린다.

 

프랭크도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지만 찰리의 끈질긴 설득에 자살을 포기하고 만다. 프랭크는 찰리에게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한 가지만 대보라고 한다. 여기서도 알 수 있지만 자신의 결심이 확고한 것은 아니고 살아야 할 명분, 아니 희망을 제공해 주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다.

 

"당신은 탱고를 잘 추고 페라리를 잘 몬다."

 

찰리가 한 대답이다. 삶을 선택하기 위한 명분은 큰 것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른 오해들로 한번 자살을 기도한 사람은 영원히 위험하다는 말이나 한번 자살 기도를 해 본 사람들이 또는 자살 위기를 넘긴 사람들이 그것으로 자살 위험성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말 모두 잘못된 말이다.

 

또한 자살은 유전적이거나 정신병이라는 것도 오해다. 자살은 애써 감추거나 단순히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혹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늉만 하는 자살이라고 생각된다고 해서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자체로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주변에서 누군가 심각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살의 가능성은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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