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by 송화은율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작가 ; 기형도(1960-1989) 경기도 연평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 당선.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시를 통하여 구체적 이미지들의 관념화, 추상적 관념들의 이미지화를 통해 사물과 현상의 법칙성을 규명하고자 애썼다.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이 있다.
< 감상의 길잡이 >
기형도의 시들은 유년시절의 가난, 사랑의 상실, 부조리한 현실의 폭력,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物化)된 인간의 모습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대체로 절망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의 절망은 절망의 끝까지 가 본 자의 도저한 절망으로,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풍경에 속한다. 이 시는 폭력적인 현실과 그로 인한 죽음, 공포의 삶을 고도의 상징적 표현 속에 담아내고 있다. 이 시는 분명히 알 수 없는 어떤 사건을 시적 동기로 삼고 있다. 그 해 여름, 화자가 신문에서 한번 본 적이 있는 `그'가 `그 일'이 터진 지 얼마 후 죽었다. 거센 비바람 속에 거행된 `그'의 장례식 행렬에 사람들은 악착같이 매달렸고,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다가 나타났으며, 망자의 혀가 거리에 넘쳐흘렀다. 그리고 또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 사건은 80년대 중․후반의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정치적인 억압과 사회적 통제가 알게 모르게 강화되었던 당시, 권력에 반대하는 비판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시 속의 `그'와 없어졌다가 나타난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 세력들을 뜻한다. 그들은 저항의 결과 혹독한 고통을 당해야 했는데, 죽음과 일시적인 사라짐―투옥―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침묵을 지킨다. 세계의 폭력에 그들은 굴복해 버린 것이다. `안개'와 `흰 연기'는 진실을 은폐하는 부정적인 현실을, `책'과 `검은 잎'은 관념적인 지식과 죽음의 징후들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 역시 방관자의 한 사람이며, 먼지 낀 책을 읽는 무력한 지식인이었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고,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먼 지방'과 `먼지의 방'의 발음―띄어쓰기의 차이만이 있는―과 의미―현실과 괴리된 공간으로서의―의 양면에 있어서의 유사성이 흥미롭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후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으며,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놀란 자의 침묵 앞에' 용기 있게 실천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비판하며, 죽은 `그 때문에'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한다.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나약한 방관자들은 부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중의 억압을 느끼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사람들은 죽음과 폭력을 비굴한 침묵으로 방어하는 대신,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고 파편화되며 방향성을 상실한다. 택시 운전사와 그를 믿지 못하는 `나',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와 나는 서로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다. 이제 나는 그가 누구인지,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대답해야만 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모르지만, 예전의 `먼 지방/먼지의 방'이 아닌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가서 현실에 직접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다.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으로 암시되는 낯설고 황량하며 어두운 현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뜻하는 죽음과 굴복, 타협의 징후들이 끝없이 나를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해설: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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