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록 2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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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해서 못살겠다, 내 청춘을 돌려다오... / 이용수

 

나는 19281213일 지금의 대구직할시 북구 고성동에서 가난한 집안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와 위로 오빠 하나, 그리고 남동생이 넷으로 모두 아홉 식구였다. 나는 달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집안이 어려워 1년도 못 다니고 그만둬야 했다. 그리고는 열세살 때 야학에 조금 다녔다. 야학에 다닐 때는 야스하라 리리이슈(安原李容洙)’라는 이름을 썼다. 풍금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고, 일본말도 배웠다. 나는 공부는 잘 못했지만, 노래부르는 것은 좋아했다. 야학에서 가르치는 일본인 남자 선생님도 나에게 노래를 잘한다고 했다. 1년 가량 다녔지만 공장에 다녀와서 밤에 나가야 하니까 빠지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수정보통학교 앞에 사는 부잣집에 유모로 가 있었다. 그래서 동생들은 내가 키웠다. 우리가 살던 집과 부치는 논밭은 모두 어머니가 유모로 가 있는 부잣집의 것이었는데, 나중에 그 집에서 논을 조금 떼어줘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아홉살부터 열세살까지는 칠성동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조면공장에 다니기도 했다. 조면기에 목화를 넣어 실을 뽑는데 먼지가 아주 많이 났다. 나는 목화에서 씨 빼는 일을 했다. 어느 날은 기계에 사람이 딸려들어가 머리가 깨지는 것을 봤는데, 그걸 보고는 무서워서 공장에 가기가 싫어졌었다. 그러나 공장에 가지 않고는 살 길이 없었다.

만 열다섯살 때에는 동네에 있는 칠성국민학교에서 대이신따이 훈련을 받기도 했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줄을 서서 체조도 하고, ‘뒤로 돌아 앞으로 가등을 했다. 집으로 올 때도 줄을 서서 돌아왔다.

 

1944, 내가 만 열여섯살 때 가을의 일이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미창(米倉)에 나가서 쌀을 져나르는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동갑나기 친구 중에 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집에 놀러가니까 그 어머니가 너 신발 하나 옳게 못 신고 이게 뭐냐, 얘야, 너 우리 분순이하고 저기 어디로 가거라. 거기 가면 오만 거 다 있단다. 밥도 많이 먹을거고, 너희집도 잘 살게 해준단다.” 했다. 당시 내 옷차림새는 헐벗고 말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난 후 분순이랑 강가에 가서 고동을 잡고 있었는데, 저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웬 노인네와 일본 남자가 보였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니까 남자가 우리쪽으로 내려왔다. 노인은 곧 가버리고 남자가 우리에게 손짓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무서워서 분순이가 어떻게 되는 줄도 모르고 반대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 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근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 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5명이었다.

 

그 길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갔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탔다. 경주에 가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 앞 개울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산비탈에 보라색 꽃이 한송이 피어 있어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꽃이어서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까 도라지꽃이라고 했다. 거기서 이틀밤인가를 지냈는데 또 여자 2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자가 모두 7명이 되었다.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지나가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의 깨진 유리 차창 저편에 우리집이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집생각이 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난 우리 엄마에게 가야 한다고 하면서 막 울었다. 옷보퉁이를 밀치며 이거 안 가질테니 집에 보내달라고 하며 계속 울었다. 울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졌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여러날을 간 것 같다.

 

평안도의 안주라는 곳에 내려 어느 민가에 들어갔다. 안채와 아랫채, 곳간이 있고 방이 넷인 초가집이었다. 그 집에는 노파 한 사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 노파는 항상 몸뻬와 긴 적삼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었다. 거기도 먹을 게 별로 없어서 밥을 안 주고 감자와 수수를 삶아서 줬다. 하도 배가 고파서 허기를 달래려고 사과를 훔쳐먹기도 했었다.

 

대구에서부터 우리를 인솔해간 일본인 남자는 처녀들 중 누구라도 조금만 잘못을 하면 모두 벌을 세웠다. 됫병짜리 병에다 물을 가득 넣어가지고 양손에 들고 방망이를 딛고 서는 벌을 세우거나, 다듬이 방망이로 손바닥 발바닥을 때렸다. 물을 떠오라고 할 때 조금이라도 늦게 가져가면 두드려 맞았다. 걸핏하면 때렸기 때문에 맞는 게 얼마나 무서웠는지 나는 안 맞으려고 눈치껏 움직였다.

 

날씨가 추워져 땅이 얼고 매운 칼바람이 불었다. 우리는 밭에서 무를 뽑아 가마니에 담아 들고 오는 일을 거의 매일 했다. 얇은 홑옷을 입고 일을 하려니 얼마나 춥고 손이 시렸는지 모른다. 우리가 춥다고 하면 그 남자는 또 때렸다. 그래서 우리는 남자 몰래 언 손을 녹이며 오들오들 떨곤 했다.

 

안주에서는 나중에 온 여자 2명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버려 처음의 5명만 남았다. 거기에서 1달쯤 지내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대련까지 갔다.

 

대련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아침 찐빵과 국물을 주었다. 배도 고팠고,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어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대련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함께 뜨는 배가 11채라고 했다. 아주 커다란 배였다. 우리는 맨 마지막 배에 태워졌다. 배에는 일본 해군들이 아주 많이 탔다. 그 배에 탄 여자는 우리들뿐이었다.

 

뱃속에서 1945년 양력 설을 맞이하였다. 상해에서 배가 쉬어 갔는데 군인들은 내리기도 했지만 우리 여자들은 내리지 못하게 했다. 나에게 군인들이 모여 있는 갑판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니, 장교가 찹쌀떡 2개를 주었다. 나는 그 찹쌀떡을 받아 가지고 내려와 동료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배가 다시 출발했는데 폭격이 심해서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했다.

 

그러다 어느날 밤에 폭격을 맞았다. 다른 배는 다 부서지게 되고 우리 배도 앞쪽이 폭격을 당해서 아수라장이었다. 밖에서도 죽는다고 야단이었다. 배가 몹시 출렁거려서 나는 배멀미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속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구토를 하면서 기다시피하여 화장실에 갔는데 한 군인이 어디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나는 뿌리치며 그의 팔뚝을 물어 뜯고 빠져 나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후려치며 우격다짐으로 집어쳐넣는 데에는 어린 나로서 너무 힘에 부쳤다. 그렇게 끌려가 그에게 강간을 당하고 말았다.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남자에게 그런 일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처음엔 그런 일을 당하고도 뭐가 뭔지도 몰랐다. 저 남자가 이럴려고 데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을 뿐이었다.

 

배가 부서져서 다 죽게 되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구명복을 입고 누워 있으라고 했다. 이제 죽는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배는 용케도 항해를 계속했다. 그 일은 나만 당한 것이 아니었다. 분순이나 다른 여자들도 나처럼 군인들에게 당했다고 했다. 그후로 그 배 안에서 우리는 수시로 군인들에게 그런 식으로 당해야만 했다. 나는 늘상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때는 어려서인지 겁을 먹고 덜덜 떨기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분하고 가슴이 떨리지만 그때는 그걸 몰랐다. 무섭고 겁이 나서 군인들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느 날은 바다에 빠져죽으려고 배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뛰어내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시퍼런 물이 거칠게 파도치는 것을 내려다보니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차마 몸을 던질 수가 없었다.

 

대만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걸을려고 하니까 아랫도리가 내 몸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사타구니에 가래톳이 생기고 피가 엉켜붙었다. 그렇게 밑이 많이 부어서 다리를 오무릴 수가 없어 어기적거리며 걸어갔다.

 

대구에서 우리를 데려간 남자가 위안소의 주인이었다. 우리들은 그를 오야지라고 불렀다. 여자들 중에서 내가 제일 어렸다. 분순이는 나보다 한살 더 많았고, 다른 여자들도 열여덟, 열아홉, 스무살 정도 되었다.

 

방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안들어가려고 하니까 주인이 내 머리끄댕이를 잡아끌고 어느 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에서 전기 고문을 당했다. 주인은 지독하게 독한 놈이었다. 그는 전화 코드를 잡아 빼서 그 줄로 나의 손목, 발목에 감았다. 그리고는 고노야로하며 손잡이를 마구 돌렸다. 나는 눈에 불이 번쩍 나면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울부짖으며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그리고 또 한번 전화기를 돌릴 때 나는 견디지 못해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보니 물을 끼얹었는지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위안소는 일본식으로 지은 2층집이었는데 방이 20개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이미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여자들이 10명쯤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일본 여자도 있었는데, 그 여자는 주인의 부인이었고 첩은 조선 여자였다. 주인은 부인이나 첩도 걸핏하면 두들겨 패었다. 우리들은 먼저 온 여자들이 건네주는 원피스를 입었다. 주인은 먼저 온 여자들을 언니(네상)라고 부르라고 했고, 언니들 말을 잘 들으라고 했다. 언니들의 빨래와 밥도 우리가 돌아가며 해주었다. 거기도 먹을 게 별로 없었다. 차조죽이나 흰죽을 주로 먹었다.

 

나는 지금도 겁이 많다. 그때는 더했는데 주인에게 맞을까봐 항상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군인들에게 맞은 적은 없는데 주인에게는 많이 맞았다. 겁이 나서 도망은 생각도 못했다.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가 사방천지가 어딘지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도망갈 생각을 했겠는가.

 

위안소의 방은 아주 작았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의 크기였다. 문에는 포장을 쳐놓았다. 벽은 판자이고, 바닥은 나무판인데 아무 것도 깔지 않았다. 군용 담요 한장을 가지고 맨바닥에서 지냈다.

 

어느 날 위안소에 들어온 군인이 나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까지도 겁에 질려 있을 때라 나는 그냥 구석에서 고개만 저으며 몸을 움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군인은 내가 네 이름을 지어주지.”하며 도시코라고 불렀다. 그때부터 나는 그곳에서 도시코라고 불렸다.

 

우리들은 주로 독코다이(독전대?)를 상대했다. 그들은 우리 사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봐주지 않았다. 군인들은 군복을 입고 왔지만 해군인지 공군인지를 구별할 수는 없었다.

 

하루 평균 네다섯명의 군인을 받았다. 군인들이 들어오면 금방금방 하고 갔다. 자고 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월경을 할 때는 헌 옷을 빨아서 사용했다. 월경을 해도 군인들을 받아야 했다. 돈은 구경도 못했다. 공습이 심해서 하루에도 몇번씩 피난을 가야 할 때도 있었다. 폭격이 있으면 산에도 숨고 굴속에도 숨었다. 그러다가 잠시 잠잠해지면 밭이고 논이고 아무데나 포장을 쳐놓고 군인을 받기도 했다. 바람이 불어 포장친 것이 후닥닥 넘어져도 군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다 마쳐야 돌아갔다. , 돼지만도 못했다. 밖에 나가서 진단을 받아본 기억은 없다. 콘돔(사꾸)이라는 것도 몰랐다.

 

어느 날 지하 방공호에 내려가 있었는데 폭격을 당해 집이 내려앉았다. 방공호 위로 흙이 무너져 내렸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땅을 팠다. 한참 팠더니 조그만 구멍이 나왔다. 너무나 반가와 아이고 밖이 보인다.”하고 내다보다가 무슨 연기를 맡았다. 그랬더니 입으로 코로 피가 쏟아졌다. 그리고 나니 정신이 없었다.

 

그 폭격으로 주인의 첩과 위안부로 있던 키가 크고 얼굴이 길쭉한 박씨가 죽었다. 집이 무너졌으니 산 밑 방공호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또 군인을 받았다. 그러다가 얼기설기 다시 집을 지었다. 집을 다시 짓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서 계속 군인을 받았다. 그러다가 성병에 걸렸다. 주인이 붉으스름한 빛이 나는 독한 606호 주사를 놔주었다. 다 낫지 않았는데도 남자를 받아야 하니 잘 낫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주사를 맞아가며 군인들을 받았다. 근처에 병원 같은 곳도 없고 보건소도 없었다.

 

폭격으로 방공호에 가는 것말고는 감시가 심해서 나갈 수가 없었다. 위안소 밖으로 나가면 때린다고도 하고 죽인다고도 해서 겁이 나서 나가지도 못했다. 독코다이들은 전부 젊었다. 나이는 대개 열아홉, 스무살 정도였다.

 

어느 날 저녁 한 군인이 왔다. 그는 자기가 오늘 가면 죽는다고 했다. 나는 독코다이는 뭐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비행기 1대에 2명씩 타고 가서 적의 배나 기지를 육탄으로 공격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자기의 사진과 쓰던 비누와 수건 등 세면도구를 나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는 전에 두어번 나에게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내게서 성병을 옮았다고 했다. 그 병을 내가 주는 선물로 가져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래 하나를 가르쳐주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곳이 대만의 어디라는 것만 알았지 확실히 어딘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 노래를 가르쳐줘서 거기가 대만의 신죽(新竹)’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피난을 가면 사탕수수를 훔쳐먹었다. 워낙 배가 고팠으니까. 그러다 들키면 또 매를 맞았다.

거기에서는 조선말을 쓸 수가 없었다. 조선말을 썼다가는 주인에게 얻어맞았다. 그런데 어느 날, 생전 말도 안 하던 먼저 온 여자 하나가 나도 조선 여자다.”하며 조선말로 전쟁이 끝났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다. 그 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꼭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가거라.”하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밖에서도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녔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줄을 알게 되었다. 정신을 수습하고보니 주인과 먼저 온 여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부둣가에 있는 창고같이 생긴 수용소로 갔다. 주먹밥을 줬는데 바구미가 시커멓게 들어 있었다. 수용소에 있으면서 배를 기다렸다. 거기에서 나는 또 누가 와서 붙잡아갈까봐 담요를 뒤집어쓰고 구석에서 떨고 있었다. 그때도 노상 울어서 눈이 부어 가뜩이나 작은 눈이 들러붙어 있었다.

 

배가 부산에 닿았을 때는 보리가 파랗게 올라올 무렵이었다. 부산에 내리니까 우리에게 DDT를 뿌렸다. 그리고 돈 300원을 주었다. 그때 귀국한 사람은 분순이와 뚱뚱한 여자, 또 하나, 나 이렇게 모두 넷이었는데 부산에서 헤어졌다.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갔다. 기차 안에서도 누가 또 잡아갈까봐 눈에 안 띄게 몸을 웅크리고 구석에 숨어 내내 울면서 갔다. 우리집은 다 찌그러진 초가집 그대로 있었다. 집에 들어가니까 어머니는 네가 사람이냐, 귀신이냐?”하면서 실신했다.

 

나는 시집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무슨 양심으로 시집을 가겠는가. 성병 때문에 최근까지도 고생을 많이 했다. 가족들은 내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당하고 왔는지 몰랐다. 아버지는 딸 하나 있는 게 시집도 못 간다고 한탄을 하셨다. 어머니,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하나 있는 딸을 시집도 못 보내고 눈을 감는다고 애통해하셨다.

 

대구 향촌동의 오뎅 파는 술집에 종업원으로 오래 있었다. 울산의 해수욕장에서 3년쯤 장사를 하기도 했다. 또 포장마차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몇년 전부터는 보험판매원으로 일하다가 요즘은 나이도 많아서 그만두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사실을 모르는 동생들은 나이든 누나가 혼자 사는 것을 딱해했다. 주위에서도 혼자 사는 것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성가시기도 하고 내가 여자로 태어나서 면사포 한번 못 써보고 죽는구나 싶어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환갑이 되던 19891월에 일흔다섯살의 할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남자가 싫어 일부러 나이 많은 노인네를 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의처증과 구박이 하도 심해 그것도 실패를 하고 말았다. 올해 2월에 이혼을 하고, 지금은 대구에서 혼자 살고 있다. 보증금없이 10개월에 90만원인 단칸방에서 산다. 2평 반 정도의 방에 부엌이 달려 있다. 현재 생계는 동생들이 매달 15만원씩을 줘서 그걸 가지고 살고 있다.

 

이야기를 다하니 이제는 마음이 편안하다.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이렇게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요새 나는 카츄사라는 곡목에 가사를 바꿔서 부르기도 한다.

원통해서 못살겠다. 내 청춘을 돌려다오. 사죄하고 배상을 하라. 마음대로 끌고가서 마음대로 짓밟아놓은 일본은 사죄하고 배상해라. 어머니, 아버지 들리시는지요. 이 딸들의 울음소리. 이제는 우리 대한의 형제 자매가 이 한을 풀어줍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 아버지 산소에 가서 이렇게 빌었다.

 

울어봐도 불러봐도 못 오실 우리 어머니, 이제는 우리 대한의 형제 자매가 한을 풀어줍니다. 어머니, 아버지 눈을 감으시고 고이고이 극락에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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