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록 1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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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품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 김윤심

 

나라 잃은 설움 아직도 엄마 품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가 되어 말 한마디 못한 체 끌려 다녀야 했던 나의 어린 시절 1943. 그때 내 나이 14. 남보다 어린 나이에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느 날 아버지의 눈을 피해 대문 밖을 나왔다. 나는 아이들과 고무줄넘기를 하고 놀았다. 갑자기 트럭 한대가 왔다.  

 

우리 고향은 너무 깊은 시골 트럭 하나만 보여도 큰 구경거리다. 나는 고무줄넘기를 그만두고 트럭에 매달렸다. 그리고 여기저기 만져도 보았다. 트럭 안에는 순경 한사람과 군인 한사람 그리고 우리 한국말을 잘한 아저씨 합해서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나에게 말했다. 트럭 태워줄 테니까 타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너무 좋아 탔다.

 

웬일인가! 나를 실은 차는 숨쉴 틈도 없이 우리 마을 앞 고갯길을 넘어갔다. 나는 발을 동동 그르며 내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들은 척도 안한 체 울면은 보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나는 그날 밤 울면서 어느 곳인지 차에 실려갔다. 나를 데려다 놓은 곳은 나보다 더 큰언니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 언니들이 말했다. 울지 말라고 했다. 이곳에서 울면 저 사람들이 밥도 주지 않고 두들겨 맞기만 한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그 언니들과 하룻밤을 지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 그 기차는 짐을 싣고 다니는 기차였다. 너무나 더러워 옷을 다 버렸다.

 

우리는 밤새 기차를 타고 갔다. 날이 밝았을 때는 어느 선창가였다. 그곳에 우리는 내렸다. 음식을 파는 어느 집이다. 음침한 방 한 칸에 들어갔다. 너무나 배가 고팠다. 쓰레기국에 밥한솥씩 그것은 꿀맛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엄마가 보고 싶고 집에 가고 싶어 눈물이 끊일 줄 몰랐다. 너무나 무서워 도망가려는 생각도 못했다. 우리 곁에는 순경이 보고 있었다.

 

화장실에도 말하면 데려다 줬다. 우리는 꿈쩍도 못한 체 꿈에도 보지 못했던 배를 탔다. 같이 탄 언니들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가 보고 싶고 생각났다. 그리고 엄마 곁에 가고 싶었다. 나는 배 안에서도 울고 또 울었다. 우리를 데리고 간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집에 보내준다고 나오라고 했다. 깜짝 놀라 나는 배 밖으로 따라나왔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각반 끈을 가지고 내 손발을 묶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너는 울기만 하고 시끄러우니까 이 바닷물에 넣어버리겠다고 말했다. 나는 눈이 둥글해졌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말했다. “아저씨 이제는 안 울테니까 나 좀 살려주세요.” 하고 빌었다.

 

그 아저씨는 말했다. 한 번만 더 울고 시끄러우면 정말 바닷물에 던져버리겠다고 하며 배 안에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밤인지 낮인지 모른 체 배 안에 갇혀 있었다. 어느 날 배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언니들과 나는 배 밖을 나왔다. 캄캄한 배 안에서 갑자기 나오니까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동안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눈을 비비며 떠보니 그곳은 어느 부둣가였다. 그리고 군인 차가 몇 대 와 있었다. 그 군인 트럭에 우리들 몇 사람씩 군인이 타고 있는 트럭에 나누어 실었다. 그리고 그 트럭은 사정없이 달려갔다.

 

우리를 데려다 놓은 곳은 허허벌판, 보이는 것은 군인들 그리고 군인들이 자고 있는 곳은 임시로 만든 집 여기저기 보이는 게 반공굴 뿐이다. 가정집은 하나도 없다. 내가 들어간 집은 같이 간 언니들 네 사람, 나하고 합해서 다섯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준 것은 소금물 뿌린 주먹밥 한 덩이. 나는 너무 배가 고파 주먹밥 한 덩이만 주면 그들이 시키는 대로 다 해주었다. 내가 간 그곳은 하루빈이라고 한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중국의 나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한 말들. 나는 벙어리처럼 살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어려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밤이면 군인들이 무작정 달려들었다. 인정도 사정도 없다. 영문도 모르는 나에게 옷을 빨리 벗으라고 했다. 나는 너무 놀랐고 아팠다. 방광이 다 헤어지고 피가 났다. 그러나 그 군인들은 빨리 옷을 벗지 않으면 팬티를 두 손으로 찢어 버리는게 일수다. 나는 그 악날한 일본군에게 못이겨 아예 밤이면 속옷을 입지 않고 치마만 입고 있었다. 나는 너무 시달려 몰래 숨어있다 들키면 두들겨 맞고 밥도 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나는 어느 날 너무나 심한 군인에게 못이겨 방광이 확 뒤집혀 걷지도 못했고 화장실에도 갈 수 없었다. 나는 그래도 울면서 기어다니며 살았다. 그 후부터 나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허리도 꾸부러지고 살아야했다.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보고 싶고 그리워도 소용이 없는 이곳. 중국의 땅 이곳은 하루빈이다.

 

그래서 우리는 몸 건강하게 있다가 그리운 내 고향에 가자고 했다. 그래서 부모형제도 만나면 재미있게 살자고 했다. 나는 울면서 이를 악물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한 내 몸 죽을 힘을 다해 내게 주어진 일을 다했고 그때의 희망이라면 주먹밥 한 덩이에 큰 낙이었다. 나는 또 다짐했다. 살아야 해 하고. 그래서 우리 나라에 가 내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을 했다.

 

그곳에는 임신한 언니가 있었다. 어느 날 임신한 그 언니는 어린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는 간호원이 와서 탯줄도 자르지 않고 봉지에 넣어 어디론지 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 낳은 여자는 미역국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 체 다시 또 그 악랄한 일본군에게 시달려야 했다. 얼굴이 붓고 다리가 부어서 걸음도 잘 못 걸어도 낮이면 반공굴에, 밤이면 악랄한 군인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물이 귀했다. 우리는 그 더러운 일본놈의 군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삭구를 우리 손으로 빨아서 다시 사용하고 했다.

 

어느 날 몹시도 추웠다. 그날도 그 더러운 놈의 삭구를 빨기 위해 산모퉁이 개울가를 찾아가던 중 산언덕 웅덩이에 사람 손이 흙 속에서 보였다. 깜짝 놀라 그곳에 가보았다. 그것은 여자의 손이었다. 묻어놓은 흙 속에서 뛰쳐나왔다. 우리는 너무나 무서웠다. 그래도 궁금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파보았다. 웬일입니까? 그 여자는 며칠 전에 우리들과 함께 있던 여자, 병들어 먹지도 못한 체 누워만 있던 그 여자.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간호도 안 해준 그 언니. 자기가 덥고 있던 그 담요 한장 둘둘 말아 그곳에 생매장한 것이다. 우리는 또 알게됐다. 악랄한 일본놈이라고.

 

우리는 또 다짐했다. 몸 건강히 살다가 고향에 가자고. 병에 시달린 사람은 저렇게 생매장해서 죽여 없애는구나하고 더욱 무서웠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었다. 사는 날까지 그 악랄한 일본군인놈들이 하라는 대로 다해 주어야했다. 그후 나는 돈 50전이 생겼다. 나는 그 돈 50전을 가지고 그곳을 탈출할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밤비가 왔다. 나는 그 돈 50전을 가지고 신도 안 신은 체 밤에 그 집을 빠져 나왔다. 내 고향, 내 엄마 곁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비가 와서 땅이 질퍽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지만 땅은 아직 녹기도 덜했고 바람은 몹시도 불었다. 밤은 깊었다. 도살장 같은 내가 살던 집을 뛰쳐나왔다. 신을 벗어 손에 들고. 질퍽거리는 흙이 발등에까지 묻었다. 얼마나 갔는지 나는 힘이 다 빠졌다. 발에 흙이 너무 많이 묻었다. 나는 발을 좀 닦으려고 어느 집을 찾아 들어갔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 집도 일본놈의 군인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나는 너무나 당황했다. 그곳에 있는 군인들도 나를 보고 누구냐 손들어!” 했다. 나는 너무 놀라 울어버렸다. 그 일본군은 큰 벼슬이나 한 것처럼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어디서 온 간첩이냐 하고 다그쳤다.

 

나는 말했다. 길을 잃고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그러나 그 말을 믿을 리 없다. 군따이는 말했다. 조센징은 죽어도 좋다고 하며 바른대로 말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피곤하고 졸렸다. 나는 마루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한참 뒤 헌병이라는 군인 두 사람이 왔다.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조선에서 언제 왔냐고 하며 무슨 연락을 가지고 왔냐는 둥 별별 소리를 다 묻는다. 그리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지고 내 얼굴에 붓는다. 나는 숨도 못 쉬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50전 누가 주었는지 간첩 활동 자금이 아니냐하며 욕질을 했다. 펜대를 손가락사이에 끼어 구둣발로 밟기도 하고 펜침으로 아무데나 쿡쿡 찌르기도 했다. 나는 온 몸에 피가 났다.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하나님 죽이지만 않게 해주세요. 나는 꼭 살아서 내 고향 우리 어머니한테 가서 만나야 합니다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 헌병들에게 말했다. 나는 군인들과 같이 살고 있는 데 너무나 힘들고 고향의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에 몰래 나왔다고 말했다. 그제야 그 헌병들은 나를 그곳에 보내주었다. 눈물을 머금고 나는 그곳에 다시 돌아갔다. 쓰라린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또 우리를 군인 트럭에 태웠다. 언니 넷, 나 합해서 다섯 사람. 밤새 트럭에 군인들과 합께 타고 갔다. 우리를 어느 곳인지 내려놓았다. 우리는 그곳에서도 변함없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곳 지까다비시는 노무자들이 많이 눈에 띠었다. 가끔 우리에게 말도 했다. 그 노무자 속에는 조선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는 우리 조선말을 하지 못해서 누구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어느 날 한 노무자 아저씨가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아가씨들, 이곳은 간동군이예요.” 그 아저씨는 가네모도상이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간동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행기 소리만 나면 반공굴속에 들어가야 했다. 여기 저기 살펴봐도 반공굴 아니면 일본놈의 군인뿐이다. 내가 하나의 낙이라면 주먹 밥 한 덩이. 나의 희망이라면 내가 살아서 우리 고향에 내 부모를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느 날 그 날은 유난히 비행기 소리가 요란했다. 우리는 반공굴속에서 나올 줄 몰랐다. 낮이면 반공굴에 들어가고 밤이면 그놈의 군인놈들 상대하는게 우리들의 변함없는 생활.

 

어느 날 일본놈의 군인 눈을 피해 노무자 아저씨가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아가씨들 이곳에 있으면 집에 다시는 가지 못하고 죽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루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집에 가지 못하면 영원히 부모형제를 만나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날부터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겠구나하고 다짐을 했다. 그렇게 인정사정 없이 괴롭히던 군인들도 적어뒀다. 나는 생각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어느 날 밤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나는 그 무서운 집을 빠져 나왔다. 밤새 걸어갔다. 어느 곳인지에 도착했을 때 날이 밝았다. 그곳은 선창가 부두였다. 배가 여러척,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나는 어느 배에 탔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포장 한쪽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 숨었다. 나는 너무나 피곤했는지 냄새가 나는 줄도 모른 체 잠이 들었다. 그 배가 바다 한가운데 와서야 나는 선원들에게 발견되었다. 그 사람들은 깜짝 놀라 나를 깨웠다. “아가씨 당신은 누구요?” 했다. 나는 말했다. “아저씨, 나 좀 살려주세요. 나는 돈도 없고, 여기저기 살다가 갈곳이 없어서 이 배에 탔어요.”하고 말했다. “아저씨들이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나만 좀 살려주세요.”하고 사정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 사람들의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가끔 콧노래가 나왔다. 그리고 혼잣말로 이제는 살았구나 그 악독한 일본놈들한테서 빠져 나왔다는 생각. 그리고 이제는 우리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 어느덧 그 배에 탄지도 한 달이 넘었다. 손발이 다 터지고 밤이면 그 뱃사공들에게 시달리고 하였지만 그래도 우리 고향에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나는 굳게 다짐했다.

 

어느 날 선장 아저씨에게 말했다. “나는 조선사람이예요. 나는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다 내 고향에 가고 싶어 아저씨 배에 탔어요. 우리 부모가 보고싶어요.” 하고 애원을 했다. 아저씨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는 어느 남자 한 분과 같이 왔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아가씨 이 사람을 따라가요.” 했다. 그 아저씨는 나에게 조선말로 말했다. “아가씨 조선 사람이오?” 했다. 나는 너무 반가워 아무말도 못하고 아저씨 다리를 붙들고 울면서 놓아 줄줄 몰랐다. 엄마보다 더 반가웠다. 아저씨는 말했다. “걱정 말고 나를 따라와요.” 나는 그 아저씨를 따라갔다. 그 배 역시 멸치잡이 배였다. 나는 너무 기뻤다. 밥을 먹지 않아도 마냥 좋았다.

 

그 배를 타고나서 한 달이 지났을까. 어느 날 밤 어느 바닷가 바위만 있는 곳에 내려주고 갔다. 그리고 말했다. “아가씨 날이 새면 찾아가세요. 여기는 우리 나라 조선이예요.”하며 한마디 남기고 떠났다. 그곳에서 날이 밝았다. 우리 부모 형제라도 금방 만날 것만 같아 뛰어갔다. 한참 산모퉁이를 돌아갔다.

 

그곳에는 마을이 있고 어느 집에는 불이 켜 있다. 그리고 닭 우는소리,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어느 집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 집 대문을 두들겼다. 그 집은 컸다. 누구세요 하며 아저씨 한 분이 나오셨다. 그분의 얼굴을 본 순간 눈도, 입도 틀어지고 손도 구부러졌다. 나는 또 놀랐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임은 틀림없다. 나는 따라 들어갔다. 그곳에는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한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그 사람들은 두 부부가 한가족이었다. 참 친절했다. 초면이지만 옷을 주며 갈아입으라고 했고, 먹을 것도 주고 했다. 그리고 그분들은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나는 말했다. 일본군인에게 끌려갔다가 몰래 배에 숨어서 이곳까지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주인 아저씨는 내 고향 주소를 물었다. 나는 가르쳐 드렸다. 그분은 내 고향 어머니에게 편지를 했다. 내가 있는 그 곳은 전라남도 소록도라고 하는 나병 환자만 살고있는 섬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한민족이었기에 다정했고 친절했다. 그리고 그리웠던 우리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만약 또 일본놈들이 붙들어 갈지도 모른다고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그립고 그리웠던 집에도 가지 못했다. 내 어머니는 내가 일본놈에게 끌려간 뒤부터 화병으로 코 안에 혹이 나서 숨도 잘 쉬지 못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친척집으로 갔다.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동방예의지국. 여자가 집을 나가면 다시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며 집에 갈 수가 없다고 하신다.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혔다. 생사를 무릅쓰고 사랑하고 보고 싶은 내 고향, 내 부모를 만나면 더 이상 바랄게 없겠다는 내 생각. 너무나도 서러웠다. 열네살 어린 나이에 그 악랄한 일본놈에게 끌려가 온갖 고통을 다 받고 죽기 아니면 살기 하는 생각에 내 고향을 찾아 왔지만 내가 살던 집에는 가보지도 못한 체 남의 집에서 울면서 살아야 했다.

 

나라 잃은 설움. 철도 안든 어린 나이. 악랄하고 잔인한 일본놈에게 끌려가 성노예가 되어 살아야했고, 지금도 몸부림치며 갈기갈기 찢어진 체 나의 육신. 지금도 밤이면 꿈에 나타나는 과거.

 

소름끼치며 줄다름하고 있다. 자민련 김종필씨는 일본과 무슨 조약이 있었기에 그리고 우리 나라 대통령께서는 이 늙은이들이 한국여성의 수치라고 생각하시는지 군위안부 문제는 거론하지도 않고 뒷전으로 넘겨버렸다. 도대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실 수는 없는지요.

 

남의 눈이 창피해 평생을 그늘 속에 나 혼자만이 가슴속에 숨겨둔 체 살아왔고 또 살아야 할이 늙은이들의 인생. 피눈물 흘리며 학대받고 나라 잃은 설움 속에 소리한번 외치지 못한 체 뼈가 으스러지고 병에 묻혀 자궁이 다 녹아 자식도 못 낳고 평생을 실낱같은 목숨하나 붙어 지내온 이 여인네. 그렇지만 분명히 우리들도 한국의 여성에는 틀림없는 사실.

 

우리 한국의 남성들이여. 만약에 당신의 아들딸들 그리고 어머니, 할머니가 이러한 고통을 당했다고 하면 꽃 같은 어린 나이 아니, 일생을 망쳤다고 하면 그 원수를 어떻게 하시겠어요? 당장 총칼을 들고 달려 갈 것입니다. 여러분 저희들도 한국에서 태어났고 예절바르고 얌전한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는 틀림없습니다. , 나라 잃은 설움 속에 악랄한 일본놈에게 붙들려가 성노예가 되어 짐승처럼 끌려 다녀야했던 어린 시절, 평생을 가슴속에 묻어둔 체 살아온 이 늙은이들의 한을 누가 풀어주겠습니까?

 

당장 지금 이 눈앞에서 어린 자식들이 손발을 꽁꽁 묶여 간다면 무슨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우리 한국 국민여러분, 나는 내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일본정부는 들어라! 당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일에 책임지고 정신대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사죄하고 전쟁범죄 책임자는 처벌하고 국가는 배상을 해야 할 것이다. 당신들의 딸들이 이러한 일을 당했다고 했을 때의 심정을 생각해라. 우리 이 늙은이들 일본정신대위안부로 끌려 다녔던 어린 소녀들. 백발이 하얀 70대 고령. 하지만 정신은 총총하다. 너희들의 발뺌은 못할 만큼 우리는 죽지 않고 증인대에 올라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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