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이청준 - 당신들의 천국

by 송화은율
반응형

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자유(自由)와 사랑의 실천적(實踐的) 화해
김 현

  

 

 

이 글은 이청준(李淸俊)의 「당신들의 천국(天國)」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은 그 소설이 나에게는 근년에 발간된 가장 좋은 소설 중의 하나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청준의 소설에 대해서 하나의 평문을 초한다는 것은, 문학 비평가로서의 내가 소설가로서의 그에게 빚지고 있는 상당량의 부채를 갚고 싶다는 의욕의 한 표현이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여러 복합적 이유 때문에, 몇 사람의 동세대 작가들이 글을 쓰지 못하고(혹은 글을 안 쓰고)있는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정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면, 거의 순교자적인 태도로 작품에 달려들고 잇는 데서 연유하는, 그에 대한 존경심을 나는 어떤 형태로든지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존경심을 나는 이청준에게 뿐만이 아니라, 박 경리(朴景利)의 「토지(土地)」에 대해서도 느끼고 있다. 그 작가들의 제작 태도를 보고 있으면, 상업주의에 어떻게 영합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내 책을 사 줄 독자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에만 신경을 쓰는 듯이 보이는 작가들에게 이런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크게 알려 주고 싶다. 박경리 「토지」는 그러나 아직 완결되지 아니한 작품이다. 거기에 대해서 짤막한 단평(短評) 한두 개로 자제하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완결된 작품이고, 그런 의미에서 해석자의 분석을 기다리는 작품이다.

  한 작가가 시대적인 제약에 의해서 그가 드러내 보이고 싶은 작품의 주제를 직선적으로 내보이지 못하고, 그것을 우회적으로,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게 표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 문학사를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그런 우회적 수단을 발견한 작가들은 몇 되지 않는다. 카프 작가들의 예에서 극명히 보듯이, 대체적으로 작가를 억압하는 상황에서 도피해 버린 자신의 태도를 정황의 제약이라는 편리한 이유로 변명해 버리는 것이 통례이다. 일상적인 삶이라는 것을 경멸하는 체하면서도 거기에 안주해 가지고 이렇게 된 것은 정황 때문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정황의 의미를 따지고, 거기에 새로운 축구를 마련하려는 힘든 노력을, 자신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일로 뒤바꾸는 정신적 곡예 ! 거기에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문학이라는 것이 이런 어려운 시대에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라는 문학 포기론으로 귀착한다. 문학이라는 것이 별것인가. 중요한 것은 살아 남는 일이다. 그럴 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태도야말로 문학을 매명의 도구로 만들고 문학을 문학에서 소외시키는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인간을 자신의 생존 욕망 속에만 갇혀 있는 포유 동물과 구별하게 만드는 변별적(辨別的) 장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살아 남는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그것을 제약하는 상황 그 자체의 기호가 됨으로써, 그것을 초월하는, 인간만이 가진 장치이다. 문학이 없어지는 날, 감히 말하거니와, 인간다운 삶도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문학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가장 강렬한 응답인 것이다. 내가 박경리나 이청준에게 존경심을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포유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변별적 장치로서의 문학의 쓰임새를 그 누구보다도 투철하게 깨닫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복합적 시선의 소산이다. 그의 상당수의 소설이 취하고 있는 격자 소설적(格子小說的) 양식을 그것은 취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격자 소설의 기본 구조인 복합적 시선,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는 격자 소설적 시선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그의 격자 소설이 시간적으로 고정된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는 것이라면, 「당신들의 천국」은 시간적인 변모를 감수하는 한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표면적인 개요만을 따라가자면, 그곳의 나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켜 주기 위해 애를 쓰는 얘기이다. 그 얘기는 3부로 나뉘어져 서술된다. 1부는 현역 대령인 조백헌이 소록도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그곳 환자들에게 새로운 천국을 만들어 주기 위해 득량만 매몰 공사에 착수하여, 그것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21개월 동안의 나환자와의 싸움을 그리고 있으며, 2부는 매립 공사를 둘러싼 9개월간의 조 원장의 정신적 방황을 그리고, 소설의 대단원을 이루게 될 3부는 조 원장이 섬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후의 삼월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 소록도에 되돌아와 2년 후 사월달에 미감아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되는 것을 그리고 있다. 「당신들의 천국」의 표면상의 주인공은 그러니까 조백헌이다. 조백헌과 맞서는 인상적인 인물이 2부에서 크게 제시되는 황 장로이다. 표면적인 구조만으로는 「당신들의 천국」은 조백헌이라는 야심 많고 정열적인 한 인물의 무용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진정한 의도는 그 조백헌의 단순한 제시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한 복합적 비판에 있다. 그 비판을 가능케 하는 인물이 이상욱과 이정태이다. 1부와 2부의 기술은 조백헌에 관한 한, 이상욱의 시선에 의지해 있다. 그의 시선은 조백헌이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록도에 천국을 세운다는 미명하에 그가 실제로 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명예욕이나 과시욕을 충족시키자는 것이 아닌가. 그 이상욱의 비판적 시선은 「당신들의 천국」의 1부를 단순한 기인의 기행 기록이 아니라, 비판되어야 할 권력인의 힘의 과시 기록으로 느껴지게 한다. 2부에서도 기술은 이상욱의 시선에 의지해 있지만, 2부의 특성은 이상욱의 조백헌 비판이 나환자 비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백헌과 황장로로 대표되는 나환자에게도 비판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한 증거이다. 3부의 서술은 이정태의 시선에 의거해 있다. 신문 기자라는 직업 때문이겠지만, 그의 시선은 이상욱처럼 본질적인(급진적인) 비판적 시선이 아닌, 사태를 마무리짓고, 의심나는 점을 조백헌으로 하여금 해명시키는, 종합적인 해결적 시선이다. 조 원장이 복합적 시선의 포로라는 점에서, 「당신들의 천국」도 격자 소설의 기본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인물이 그 시선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폭넓게 감싼다는 점에서, 그 소설은 조백헌 개인의 성장을 그린 교양 소설적인 측면을 또한 갖고 있다.

 조백헌은 이 청준의 서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긍정적 인물이다. 그때의 긍정적이라는 말의 뜻은 <자아와 세계(혹은 他人) 사이의 간극이 불화적(不和的)인 것이 아니라 화해적인 것이라고 이해하는>이라는 뜻이다. 조백헌은 자아와 세계가 한 치의 간극도 없이 합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의 그러한 신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해 작가는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고 있다. 소설 속에서의 그의 삶은 정확하게 그가 소록도 병원장으로 취임한 8월 하순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신념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세계와 자아 사이의 합일을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를 나는 「당신들의 천국」의 여기저기에서 찾아 낼 수 있다. 3부의 마지막에 나오는 조 원장의 <흙과 돌멩이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이어져야 합니다>라는 경구적 진술은 그의 화해적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그 긍정적 성격은 기본적으로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행동을 표현하는 데에 그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의 목숨까지를 내놓는다. 원생들이 득량만 매몰 공사에 지쳐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의 그의 대답은 이렇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당신들에게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자, 오늘 밤 내 한 사람의 피가 진실로 당신들의 피를 아끼는 길이라 믿는다면 주저하지 말고 어서 이 총으로 나를 쏘시오.> 이 같은 그의 대답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단호한 태도이다. 그것이 그를 <만만하게>보지 못하게 하는 큰 요소이다. 그의 그 화해적 인간관은 그러나 「당신들의 천국」에서 상당한 수정을 받는다. 인간은 화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사랑과 자유를 소유하고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지, 하나는 힘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지배자로서, 하나는 그 힘의 일방적인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로서 둘이 만날 때는 불가능하다는 수정이 그것이다. 그의 천국론은 이상욱과 황 장로에 의해 섬세한 수정을 받는 것이다. 그 수정에 있어서, 황 장로는 굴종의 의미를, 이상욱은 감시와 비판의 의미를, 각각 조백헌에게 알려 준다. 피지배자의 화해적 굴종은 지배자가 <일신을 위해서는 물 한 모금 사사로이 취하지 않을 것임을>, <일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공훈이나 명예도 좇지 않을 것이며,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우상도 만들지 않을 것임을> 선언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감시와 비판은 그것이 정말로 행해지고 있는가 않는가를 따지는 것이라는 것을, 조백헌은 이상욱과 황장로에게서 배운다. 그때 화해적 굴종은 사랑이 되고 감시와 비판은 자유가 된다. <자유와 사랑의 화해적 결합>을 통해, 조백헌의 개인적 신념은 사회적 신념으로 확산해 간다.

 조백헌이라는 긍정적 인물을 통해 이청준이 제시하고 있는 문제는 사회 구조에 관한 근본적, 급진적 문제이다. 그 문제 제시야말로 이청준이 가장 공들이고 있는 것이고, 사실상 이청준의 정치학의 핵심 문제이기도하다. 어떻게 하면 인간 사회는 천국이 될 수 있는가? 권력의 행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점에 대해서 이 청준이 제시하고 있는 주장은 대체로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힘의 행사는 사랑과 자유 위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천국이 다른 인간의 천국과 대립되는 개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힘의 행사는 사랑과 자유 위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자유 없는 힘의 행사나, 사랑 없는 행사는 힘의 남용이나,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힘이 아니라는 생각 위에 기초해 있다. 자유 없는 힘은 끊임없는 배반만을, 사랑 없는 힘은 강요된 의무만을 낳을 뿐이다. 자유나 사랑에 기초한 실천적 힘이야말로 인간 사회를 천국으로 만드는 기본 여건인 것이다. 그는 동시에 자유만 있는 사회, 자유뿐인 사회의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황 장로의 다음 진술은 그것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자유라는 거 그거 말대로만 된다면 그보다도 더 좋은 것도 없지. 제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가고, 제 살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고, 제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것보다 우리 같은 문둥이들에게 더 소망스런 바램이 있겠나. 하지만 원장도 알다시피 우리한테 언제 한번 그 자유라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되어 본 적이 있었나. 아웅다웅 언제나 싸움질만 되풀이 되어 왔지. 핍박과 원망과 의심의 버릇만을 길들여 왔지.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르는 일이야. 자유라는 게 원래가 그런 것이었거든. 자유라는 거 누가 가만 앉아 있어도 우리 문둥이들한테 가져다 바쳐주는 건 아닐 터에, 어차피 그건 제 힘으로 빼앗아 가져야 하는 거 아니던가 이 말씀야. 빼앗아 가지려니 싸움질을 해야하고, 싸움질을 하다 보니 그 사이에 자연 의심과 원망과 미움을 익히게 마련이지.> 황 장로의 의견으로는 자유에 앞서는 사랑이 천국의 기본 여건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사랑으로 행할 때, 사회는 천국스러워진다(그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이 애매해질 것이다). 자유와 사랑, 아니 자유를 배태하고 있는 사랑의 정치학은 이청준의 그것이 도덕적 정결주의에 기초했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베푸는 사랑은 도덕적 결단, 믿음에 기초한 결단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천국이 다른 인간의 천국에 대립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다른 주장은 앞의 주장에서 자연히 도출되는 주장이다. 그룹과 그룹과의 대립 역시 사랑에 의해서 해소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예를 들자면, 문둥이들의 천국은 그것이 밖의 인간의 천국과 대립될 때, 이미 천국이 아니라, 문둥이들의 수용소이다. 대립되어 있을 때에는, 어느 한편을 버릴 수 있는 자유와, 다른 편을 수락하는 사랑이 다같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천국이란 형식만 있을 뿐 선택이 불가능한 천국이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천국이란, <그것의 설계나 내용이 얼마나 행복스러워 보이느냐보다는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택 행위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이상욱에 의해 표현되는 그 천국은 제도적 천국이 아니라. 변화가 가능한 발전적 천국이다. 이상욱이 대변하고 있는 이청준의 천국―유토피아는 헉슬리나 오웰과 마찬가지로 멋진 신세계도, 닫힌 동물농장도 아니다. 그것은 변모할 수 있는 열린 천국이다. 그 천국에서 나는 이 청준의 열린 개인주의의 흔적을 찾아낸다.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이 없는 천국은, 그 천국을 버릴 수 있는 선택이 가능하지 못하는 천국은 이미 천국이 아닌 것이다.

  이청준 정치학의 기본 구조는 도덕적 정결주의에 뿌리를 박은 열린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내세운 신앙의 정치학에 또한 다름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야말로 믿음·소망·사랑을 가장 중요한 사람의 요소로 내세운 이론가인 것이다. 그의 개인주의가 사회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은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에 의해서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윤해원과 서미연이라는 두 미감아의 결혼이 「당신들의 천국」의 대단원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랑을 전제로 한 미감아들의 결혼은, 열린 개인주의가 사회화하는 제일 좋은 전범(典範)이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을 화해롭게 모으고, 그것을 통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울타리를 열어 버린다. 그 결혼식에 대한 조백헌의 다음과 같은 축사는 위의 진술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두 분은 기왕에 남다른 사랑과 용기로 이 일을 이룩하였으니 앞으로도 계속 자신들의 방둑을 허물어뜨리지 말고 누구보다도 굳세게 그를 지키고 살찌워 나가 달라는 것입니다. 절벽을 허물어뜨리고 그 절벽 대신 따뜻한 인정이 넘나들 다리가 놓여져야 할 곳은 많습니다. 다리의 이쪽과 저쪽이 한동네 한마을로 섞이고 화목해야 할 자리는 많습니다. 제가 두 분의 신접살림을 직원지대와 병사지대의 중간에 마련하자고 했던 것도 사실은 그런 뜻이 있어서였습니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을 통해 따뜻한 인정이 넘나들 다리가 놓일 수 있다. 그 관점을 더 밀고 나가면, 이상욱의 회의·불안의 자유주의는 그가 실패한 가정의 아이라는 데서 그 뿌리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힘의 생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조백헌은 1·2부와 3부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1부와 2부에서 힘의 행사자이지만, 3부에서는 힘의 행사자를 보조하는 역할 이상의 것을 맡지 못하고 있다. 1·2부에서 그는 병원장으로서의 막강한 힘을 자유롭게 행사하지만 3부에서는 일개 시민으로서, 새 병원장에서 조언을 하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당신들의 천국」에는 세 사람의 원장 보조수들이 등장한다. 1·2부의 의료부장과 보건과장, 3부의 조백헌이 그렇다. 그리고 그 셋의 성격은 극히 대조적이다. 의료부장 김정일은 피부과 전문의인데, 기능인답게 <말썽이라면 도대체 견디지를>못하는 인간형이다. 그는 무사 안일주의의 한 표본이다. 그러나 자기의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열성적인 데가>있다. 그는 그러니까 자신의 기능에 갇혀 있다. 보건과장 이상욱은 문제 제기적인 인물이지만, 문제 해결에는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인물이다. 조백헌과의 관계에 있어, 그는 그에게 소록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핵심적으로 제시하나 그 문제의 해결에는 회의적이다. 문제를 제시하여 상대방을 보고 싶어하면서도 그 문제와 관련된 일에서 그는 회의적이고 미온적이다. 소록도 병원에서는 새 원장이 취임해 올 때마다 병원을 탈출하는 환자가 생긴다. 일종의 부임 선물이다. 이상욱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병원장에 대한 원생들의 상징적 배반극이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를 확인시키려는 행동이다. 그 탈출극은 조백헌이 새로 원장으로 취임했을 때도 일어난다. 그때 그는 그것을 덮어두려는 의료부장의 제안에 반대하여 원장에게 부임 첫날 그것을 꼭 알리려고 한다. 그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이다. <탈출 사고는 원장이 새로 부임해 올 때마다 환자들 가운데서 잊지 않고 꼭꼭 마련해 바치는 첫 부임 선물이었다. 흐지부지 뭉개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 첫 번 부임 선물을 대하는 원장의 반응이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가 제기한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을 제기하려는 원장의 노력에 미온적이다. 이상욱의 입가에 자주 피어오르는 희미한 미소나, 원장의 표정이나 말에 <아예 상관 안> 하려는 태도 등은 그런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힘의 보조자로서의 조백헌은 그의 긍정적인 성격처럼 행동적이다. 그는 이상욱처럼 회의하지 않고 그가 옳다고 생각한 해결책을 원장에게 조언하고 그것의 실천에 애를 쓴다. 그러나 그 실천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언제나 원장의 <양해 밑에서> 일을 추진해야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조백헌의 정치학의 뿌리를 이룰 <자생적 운명에 근거한 힘의 행사>에 대한 자각이 생각난다. 조백헌은 소록도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거기에서 <자유와 사랑을 행사>하려고 민간인으로 소록도로 다시 온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기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행사자가 아니라 보조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록도에서 자생적으로, 같은 운명을 감수하고 있는 자들의 선택에 의해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자유와 사랑에 의거한 힘의 행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장님께서는 결국 원장으로 다시 이 섬에 들어오지 못하셨기 때문에, 원장의 권능으로 섬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그 자유와 사랑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

  "운명을 같이하지 않는 한에서의 어떤 힘의 질서는 무서운 힘의 우상을 낳을 뿐이겠지요, 하지만 운명을 같이하려는 작정이 있는 다음에는 내게 그 원장의 권능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그 허심탄회한 힘의 질서 속에서 섬의 자유와 사랑이 행해져 나가야만 했었어요. 하지만 난 이미 이 섬 병원의 원장이 아니었어요."

  조백헌에 의하면 <운명은 자생적인> 것이며, 자생적 운명은 자생적인 힘의 행사를 요구하는데, 조백헌이나 새 원장은 그 자생적 운명에 끼어 있지 않은 <자생적 운명>에의 작가의 어투를 빌면, 타생적 끼어듦에 불과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허심탄회한 힘의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의 진술에서 나는 긍정적 인간의 운명적 실패를 느끼게 된다. 긍정적 인간은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가능한 것으로 상정한다. 그것은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하듯 시(=神話)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산문(=現實)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실패는 운명적인 것이다. 그 운명적 실패는 그러나 그 화해의 가능성에 대한 부단한 암시를 이룬다. 그 암시는 당위성의 강조를 오히려 뜻한다. 이 정태 기자의, 자생적 운명에 근거한 힘의 행사가 이루어질 때가 과연 올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조백헌의 대답이 그렇다.

 "이 섬에서 과연 그럴 때가 올 수 있을까요? "

 "그럴 때가 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섬이 끝끝내 실패만 하고 있지 않으려면 그 때는 결국 와야겠지요. 그게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도 ......"

 조백헌이 힘의 행사자를 돕는 보조자의 위치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이끌어내지 못했을 그 결론은 이청준 정치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힘의 행사는 자유와 사랑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그 힘은 동시에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의 자생적 운명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다. 그 진술은 이 청준이 획일적으로 밖에서 주어지는 천국을 천국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에 또한 다름 아니다.

  이청준이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백헌을 이상욱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의 소설적 분위기에 젖어 있는 독자들에게 야릇한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그의 중요한 중·장편소설은 대개 지식인을 그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때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회의나 불안을 통해 그가 비평하고자 하는 사회는 모순을 드러내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순 그 자체가 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도 그런 그의 지식인 유형에 꼭 일치되는 한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이상욱이라는 병원 보건과장이다. 작가는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백헌과 이 정태를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 인물의 과거를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 주고 있는데, 이상욱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상욱의 시선에 의해 소설의 1부는 진행되는 것이므로 그의 과거를 작자는 한민이라는 소설 지망생의 습작 소설을 통해 대충 독자들에게 알려 주고 있는데, 그 습작 소설을 읽는 것은 물론 이상욱 자신이다. 그 과거는 그가 한민에게 암시해 준 것을, 그가 더욱 정확하게 정리한 것이므로, 이상욱에게 있어서 그 습작 소설이란 감추고 싶으면서도 드러내고 싶은 그의 과거의 명백한 노출을 의미한다. 그 자신이 조백헌의 행위를 감시하듯 그의 과거 역시 다른 사람에 의해 감시되고 있음을 그는 깨닫는 것이다. 그의 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독신으로 원생이 된 환자들인데 서로 사랑하여 병원에서 금기로 되어있는 아이를 배고 그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는 전 원생의 자유와 사랑의 상징이 되어 비밀리에 자라지만,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일본 식민지 치하의 병원장에게 결사적인 충성심을 보여, 그의 사랑을 숨겨 준 원생들에게 배반감을 안겨 준다. 그 아이는 후에 몰래 육지에 보내지는데, 그 아이는 성장 과정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아이는 성장해서 다시 소록도에 돌아와 환자를 위해 봉사한다. 그 아이가 바로 이상욱이다. 이상욱 자신은 그러니까 한때 원생들에게 자유와 사랑의 상징으로 비친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 자유와 사랑을 배신한 배신자의 혈육이다. 그의 과거는 영광과 오욕의 덩어리인 것이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그 배반자가 식민지 시대의 한 작가를 염두에 두고 작가가 구성한 인물이 아닌가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원생들의 배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 원장의 입장에서 환자를 대하지 않기 위해, 그는 부단히 원장의 힘의 행사를 감시하고, 소록도 삶의 구조적 모순을 원장에게 문제로서 제기한다. 그러한 감시 역할에 지칠 때면 그는 황 장로에게서 원생들의 어려운 삶을 확인하고, 자기 아버지의 비극적 말로를 이야기 들음으로써 그 감시를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그 감시는 어디까지나 감시에 지나지 않을 뿐, 그가 원장에게 어떤 의견을 개진하거나,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는 않는다. 협력은 곧 감시의 배반이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 중에서 흥미를 이끄는 것은 그가 언제나 자기를 노려보는 사람들의 까만 눈동자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부모들이 그를 비밀리에 키우기 위해 언제나 방 속에만 그를 가둬놨기 때문에 생겨난 심리적 외상이다. <소년의 첫 번 기억은 그가 자란 방에 관한 것이었다. 방문은 언제나 꼭꼭 걸어 잠겨져 있었다. 소년은 허구한 날 그 문이 잠긴 방에서만 숨어 지냈다. 손가락 하나 문 밖으로 내밀어 본 일이 없었다.〔……〕소년도 결국 그의 어미처럼 사람이 무서웠다.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누군가가 집 문앞을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와도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제 겁에 제가 질려 머리끝까지 이불자락을 뒤집어쓰며 숨을 죽이게 되곤 했다. 소년은 그 이불자락까지 뒤집어쓰고도 마음이 놓일 때가 없었다. 어디선가 벌써 자기를 까맣게 노려보고 있는 눈동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때가 많았다.> 문학 작품의 경우 상당수는 방 속에 있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소위 요나 콤플렉스라는 것으로 방 속에 있다는 것은 그때 어머니의 자궁 속과 같이 편안한 곳으로의 도피를 의미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행복스러운 도피이다. 그러나 이상욱의 방 경험은 안락이라든가 행복과 결부되어 있지 아니하고, 죄의식과 결부되어 있어, 인간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방해물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방 속에서까지도 그는 편안하지를 못하고,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방이 편안한 것은 그곳이 누구에 의해서도 침범을 받지 않는 닫힌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청준의 방에는 항상 새까만 눈동자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소문의 벽」의 박준을 미치게 만든 전짓불과 같은 상징적 감시자이다. 그 감시자가 있는 한, 방도 편안할 수 없다. 이상욱의 회의와 불안은 바로 그 심리적 외상에 의거하고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니고 생겨난 인물인 것이다. 그 죄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 죄의식이 그의 아버지의 배반과 결부되어 힘과의 결탁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나는 다시 이청준의 도덕적 정결주의를 만나게 된다. 과거에 지은 죄는 비록 그것이 그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씻기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더 이상의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이상욱에게 있어서의 본질적인 죄란 무엇일까? 그것은 힘의 횡포가 빚어낸 규제를 범한 것이 아닌가. 그 규제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깨뜨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배반은 비합법적인 그의 출생을 은폐하려는 절망적인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는 왜 그의 아버지의 배반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이상욱이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그 방 체험 이후에 전연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과 아마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의식은 언제나 명료하다. 그는 퇴행에 대해서 본능적인 저항감을 내보인다. 서미연의 사랑을 거절하여 가족주의에의 경사를 막고, 자신의 행동을 가능한 한 의식화하려한다. 소위 의식하는 의식의 병을 앓고 있다고나 할까! 그는 그 자신의 알리바이에만 신경을 쓰는 소시민적 감시자이다. 그 독신주의자의 자기 감시가 혹시 광태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나는 조 원장과 황 장로의 인상깊은 대결의 밤에 외친 그의 절규에서 받게 된다. 황 장로의 이상욱 비판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이상욱 과장이란 사람 모든 일을 그 자유로만 행하고 싶어했고, 또 오로지 자유로만 행할 줄은 알았어도 거기서 익혀진 몹쓸 버릇들, 일테면 덮어놓고 남을 의심하고 미워하는 따위의 심성에 대해서까지는 미처 눈을 뜨지 못했던 게야. 남을 용서할 줄 몰랐지 ……

  이상욱의 경련적인 자기 감시, 그 어느것에도 완전히 편들지 못하는 중립주의(그것은 동양의 중용주의와 완전히 다른, 극단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지키려는 중립주의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독선주의는 그 나름의 기능을 갖고 있다. 하나는 현상에 만족하여 무의식적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하나의 경종을 우리는 각성자의 기능이며, 또 하나는 현실 개조 의사가 감추고 있는 영웅주의, 유토피아를 상정하여 모든 사람을 그곳으로 이끌어 가려는 힘의 행사 속에 감추어져 있을지 모르는 힘의 횡포를 감시하는 감시자의 기능이다. 그 기능이야말로 사실은 진보적 예술이 맡고 있는 기능 중의 하나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현대 예술이 보여 주어야 할 인간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 청준이 이상욱을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조백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목을 「당신들의 천국」이라고 붙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당신들의 천국의 당신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때의 당신들은 소록도에 천국을 세우겠다는 의욕을 가진 원장들을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이상욱이 소록도를 탈출하면서 쓴, 조백헌이 오년 후에 받게 된 편지 속에 교묘하게 암시되어 있다. 그 편지에 의하면 조백헌은 <인간의 천국을 지어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문둥이의 천국을 지으려>하고 있다. 섬을 문둥이의 천국으로 만든다는 것은, 환자를 더욱 환자답게 만든다는 것을 뜻하며, 그런 의미에서 <원장님의 천국의 윤리에 섬사람들의 생각이나 욕망이 스스로 한정당하고 익숙해지기 시작하는>것을 뜻한다. 소록도에 진정으로 세워져야 하는 천국은 환자들의 자생적 운명에 근거한 힘의 행사, 자유와 사랑에 기초한 힘의 행사에 의한 천국이다. 그 천국은 이상욱까지를 포함한 환자들 모두의, 일인칭 복수 우리들의 천국이다. 그러나 그 자생적 운명에 의거하지 아니한, 원장의 윤리에 기초한 천국이란, 환자를 환자답게 만드는 이인칭 복수 당신들의 천국이다. 그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이 조백헌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구성이다. 이상욱이 주인공으로 되었을 때의 「당신들의 천국」의 결말을 나는 환히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서는, 「소문의 벽」에서의 박준의 운명처럼 영원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천국에의 꿈 때문에 광태에 이르르는 한 지식인의 심리적 과정이 처절하게 그려질 것이다. 이 청준은 이미 그 얘기를 썼다. 그는 이제 다른 얘기를 써야 할 상황에 처한 것이고, 그 상황에서 훌륭하게 한 편의 소설을 써냈다. 그것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황 장로가 조백헌 앞에서 자기의 과거를 털어놓는 대목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번 이 소설을 다시 읽었지만, 그 대목만은 언제나 그냥 넘기고 싶은 곳이었다. 그의 비문화적인 삶은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을 내가 나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동시에 그런 삶을 살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행복하게 살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하게 그의 삶을 영위하는 자는 정말 드물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행하게 살게 만들어졌단 말인가? 천국에 대한 환상은 거기에서 싹트며, 거기에서 또한 천국을 그들의 천국으로 만들려는 원장들의 시도에 대한 배반이 싹트는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뛰어난 소설이다. 이 글을 끝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은 그것뿐이다. 한 가지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 청준의 소설에서는 극히 희귀한,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되어 있는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 후일담을 술자리에서나마 듣고 싶은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