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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 분열과 화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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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화해
 이재선

 

 

이효석의 문학 세계에 나타나고 있는 정신 구조를 분석할 경우, 분열과 화해란 두 개의 의식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이를  문학 지지적(地誌的)으로 볼 경우, 전자의 의식이 바로 인위적 환경으로서의 도시 생활의 생태와 결부된 것이라면, 후자의 의식은 자연과 밀접해 있다.

이효석을 일러서 흔히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 또는 '위장된 순응주의'의 작가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지적 내용의 가부간에 그의 문학 세계는 종국으로는 반도시적이고 반산문적이다. 그는 그만큼 초기의 이른바 '동반자 작가'로서의 문학적인 실패와 파탄을 자연 회귀의 문학으로 전환시킴으로서 비로소 성공할 수 있었던 작가였던 것이다. 도시는 그에게 있어서 곧 분열과 공포와 갈등 및 배신.데카당스의 대명사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도시적 분열과 자연적 화해의 문제에 귀착된다.

도시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파괴력에 대한 그의 비탄은 이미 그의 단편 <도시와 유령>(1928)에서부터 비롯된다. 도시의 뜨내기 미장이로서 노동자인 '나'가 노숙하는 동묘에서 도깨비에 놀라서 그 도깨비의 정체를 밝혀 가는 이야기다.

효석의 초기 소설은 도시의 빈민층과 상류 사회와의 격화된 갈등과 대비를, 사회적 모순의 고발을 또는 '도회의 배반 받은 모든 불행한 사람들'인 노동자(<행진곡>1929)와 전락과 파멸에 빠져들어 가는 기생(<기우(奇遇),1929 <깨뜨려지는 홍등>,1930)들의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불행의 원인이 되고 있고 대상에 대한 감정적인 폭력과 반항의 행동화를 조장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동반 작가로서의 면모가 분명해지게 되거니와 요컨대, 이는 도시 사회에 현저하게 내재하는 문제들인 빈부 차의 격화 현상, 부의 불균형의 증대에 대한 예민한 인식을 갖고 이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의 이념을 행동의 역학으로 몰고 가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도시의 전형을 해독과 혼란의 모습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가 도시에 대해서 얼마나 강한 부정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는가는 다음과 같은 문맥만으로도 잘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도회란 속으로 비밀을 갖추고 있는 음침한 굴속이다. <계절>

산 너머 저편은 바로 도회에서 생활과 싸움으로 들복닥거리건만 산 건너 이편은 그와는 별세상인 양 웃음과 노래와 흥이 지천으로 물 위를 흘렀다. <장미 병들다>

그의 3부작 <상륙> <북국사신>(1930) <노령근해>(1931)와 <깨뜨려지는 홍등>(1930)은 경향파 문학에서 비롯되는 이념 문제를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인신 매매에 의해 창녀가 된 학대받고 억울한 여인들의 이야기다. 주요섭의 <살인>(1925)과 같은 계열의 이 작품은 도시의 창가로 팔려 온 창녀들이 그들이 처한 억압의 대상인 '놈과 세상'에 대한 항거의 접전을 시도하는 행동의 과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이 자기 방어적인 항거에는 살인과는 달리 폭력의 극치로서의 살인이 극단적인 보복 행위보다도 개선을 위한 집단적인 시위와 이념적인 선동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의 한 극단은 도시의 노동자나 빈민을 주인공으로 한 30년대의 좌경문학이다.

여하튼 동반 작가로서의 사회적인 시점에 근거하고 있는 그의 초기 작품은 도시적인 삶의 파괴력에 대한 비판과 재판성에 대한 목적론적인 의도성에 현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1931년 6월 카프의 제 1차 검거 사건과 중학교 시절의 은사인 경무국 사무관인 일인 구사후카의 주선으로 검열계에 취직한 사실과 그로 인한 친지의 지탄을 고비로 전향하게 된 뒤의 몇몇 작품에서도 그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삶의 양식을 제시하고 있다. <천사와 산문시> <인간 산문> <장미 병들다>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사회주의의 목적성과는 달리, 도시의 데카당스와 도덕적 혼란과 잡담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전향의 구체적인 한 예라 하겠지만 어느 경우나 작가의 의식은 도시에 대해서 적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장미 병들다>는 표제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첩첩한 시대의 구름'이란 비정한 시대의 상황적 억압 때문에 '떠도는 부평초'처럼 생활의 뿌리를 잃은 사람들의 고향 상실성 및 도시악에 의한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인 타락과 붕괴를 다루고 있다. '진보적 서적'을 읽고 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남죽'의 철저한 전락과 그로 인해 '현보'가 받는 정신적 환멸과 성병의 곤혹을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은, 결국 자유가 없고 물질적 쾌락주의의 생활이 만연한 사회의 병든 속악성에 대한 한 축도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의 장편 <화분(花粉)>(1933)에서도 도시 생활의 성의 이상성으로서의 동성애 또는 레즈비어니즘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 변태적인 성에 대한 대담한 구사 역시 그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고 있는 술의 알콜성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쾌락적인 불건강성과 밀접화되어 있는 것이다. 다 같은 성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효석은 전향 이후의 자연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와는 달리 도시적인 것의 경우는 건강성을 잃은 병독성과 변태성을 갖고 있다. <장미 병들다>는 그가 그처럼 '삼분의 거리'로서 매도하던 병든 도시의 분열 현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이같이 도시적인 질서에 대해서 늘 반발하고 또 거기서 오는 고립과 분열을 절감한 그는 끝내 이 병든 장미와 같은 병적이고 위화감을 주는 도시 문화를 버리고 목가적인 자연으로 귀의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과 자연과의 어떤 통일적인 화해를 모색코자 하는 의식의 발로다. 효석은 효석 나름대로 현대 사회의 비자연적인 비틀림이 인간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 같이 허약하고 병들게 하고 있다고 믿고 이에 대한 회복과 구원이 바로 자연과의 화합성에 있음을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공포의 도시는 물론 모든 인간으로부터도 훨씬 격리된 들판과 산으로 잠입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 벗하게 됨은 생활에서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일까. 식물적 애정은 반드시 동물적 열정이 진한 곳에 오는 것일까. 학교를 쫓기 우고 서울을 물러오게 된 까닭으로 자연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동무들과 골방에서 만나고 눈을 기어 거리를 돌아 치다 붙들리고 뛰다 잡히우고 쫓기우고--하였을 때의 열정이나 지금에 들을 사랑하는 열정이나 일반이다. 지금의 이 기쁨은 그때의 그 기쁨과도 흡사한 것이다. 신념에 목숨을 바치는 영웅이라고 인간 이상이 아닐 것과 같이 들을 사랑하는 졸부라고 인간 이하는 아닐 것이다. <들>

이러한 들판과 산으로의 자연에 대한 귀의는 단순한 낭만적인 동경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니고, 늘 정치적 악행이나 인간 관계의 마찰에서 오는 '쫓김'의 절박한 상태로부터의 잠입이란 사실에 있음을 유의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도시적인 분열과 공포로부터 이를 치유하고 또 은신하기 위해서 도달하거나 잠입하게 된 자연은 어쨌거나 도시나, 거리의 속성인 '쫓김'의 긴박 상태란 고통과는 대립된 공간을 뜻한다. 그리고 이 자연은 또한 이중의 속성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자연이다. 일찍이 김동리는 효석을 평가한 <산문과 비산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효석에 관한 탁월한 비평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가 귀의한 자연의 범주 속엔 초목과 함께 금수도 거주했을 뿐이며 그리고 금수를 통하여 그는 야성과 성욕을 연역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논급의 단순화를 포함하고는 있다고 할지라도 매우 예리한 관찰이다. 효석의 작품 전반에는 확실히 강한 'animal faith'가 그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동물적인 발상이 이 작가처럼 넘쳐나는 작가는 더 없을 것이다. 그의 전향 이후의 작품은 약간의 예외적인 사실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거의 짐승들이 등장하여 인간과 공존하는 화합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짐승이 인간과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우화성이나 또는 단순한 소도구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 짐승은 다 상징의 필연성을 갖고 있거나 등장하는 인물의 운명과의 2인 3각적인 공동 운명체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가령 <메밀꽃 필 무렵>의 나귀는 단순히 떠돌이 장사꾼의 상품 운송 수단으로서의 구실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인 허생원의 분신적인 역할을 해 줄 뿐만 아니라 부자가 기구한 숙명론적이 상봉을 하게 되는 모티브의 상징적인 예시성이나 에피소드로서의 긴요한 상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 <돼지>나 <분녀> 및 <들>에서의 돼지와 개는 야성과 성욕의 본능적인 충동성을 상징하면서 주인공의 의식과 결부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animal faith'에 입각한 효석의 각별한 동물화는 어디에서 연유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성을 금수화시켜 버리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약하고 거추장스러운 도덕적인 수치감에 잡히고 또 공포로부터 위축된 인간에게 원시적인 건강미와 자연스러움에로 복원시켜 보려는 의도에서 연유되는 것이다. 때문에 효석의 작품에서의 자연 속의 인간은 이성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순전히 본능적이고 관능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며 또 성에 대한 대담한 묘사가 현저한 것이다. <들>에서는 개의 자웅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맹랑한 것이 눈에 띈 까닭이다. 껄껄 웃고 싶은 것을 참고 풀 위에 주저앉았다. 그 웃고 싶은 마음은 노래라도 부르고 싶던 마음의 연장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그 맹랑한 풍경이 나의 마음을 결코 노엽히거나 모욕한 것이 아니요 도리어 아까와 똑같은 기쁨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일반으로 창조의 기쁨을 보여 준 것이다. 개울녘 풀밭에서 한 자웅의 개가 장난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겁내지 않고 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람의 눈을 꺼리는 법 없이 자웅은 터놓고 마음의 자유를 표현할 뿐이다. 부끄러운 것은 도리어 이쪽이다.

이러한 원색적인 장면에 대한 감동은 이에 반응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곧 자기 인식과 동화의 수단이나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또 하나의 목격자인 '옥분이'와 똑같은 장면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효석은 이 성의 자연스런 융합 관계를 인간과 자연의 융합 관계로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돼지>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종묘장의 돼지들의 원색적이고 다이내믹한 애욕의 생태와 야성의 소리를 그대로 '분이'에 대한 '식이'의 애욕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짐승을 인간에게 종속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동물들의 본능적인 충동과 생태와 인간을 친근하게 매어 놓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자연에서의 성의 화해 관계는 결코 도시적인 것과는 동체에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분녀>는 순결의 손실과 여성의 성충동을 적나라하게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편, 효석의 자연은 이런 동물적인 자연과 대등할 만큼 식물적인 자연의 세계다. 그는 인간의 용역이 아니고 자연의 질서만 있는 산과 들의 초목들과의 동화를 시도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인간으로 무리가 지어지는 사회라기보다는 시각적이거나 후각적인 감각으로 이루어진 초목의 세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식물 사전이 무색할 만큼 나무 이름과 풀 이름이 총동원되고 있다.

 ……바람결도 없는데, 쉴 새 없이 파르르 나부끼는 사시나무 잎새는 산의 숨소리다. 첫눈에 띄는 하아얗게 분장한 자작나무는 산속의 일색.

……산오리나무, 물오리나무, 가락나무, 참나무, 졸참나무, 박달나무, 사수래나무, 떡갈나무, 피나무, 물가리나무, 싸리나무, 고루쇠나무, 골짜기에는 산사나무, 아그배나무, 갈매나무, 개웃나무, 엄나무, 산등에 간간이 섞여 여느 때나 푸르고 향기로운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향나무, 노가지나무--걱정없이 무럭무럭 잘들 자라는--산속은 고요하나 웅성한 아름다운 세상이다. 과실같이 싱싱한 기운과 향기, 나무 향기, 흙냄새, 하늘 향기,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향기다. <산>

이렇게 산과 들이란 순수 자연 공간과 초목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오게 함으로써 그는 결국 인간을 식물적인 신진 대사의 존재로서 또는 식물에 완전히 동화되는 존재로서의 사물을 만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주체는 오히려 자연이 되어 버린다.

……두 발은 뿌리요 두 팔은 가지다. 살을 베이면 피 대신에 나무진이 흐를 듯하다. 잠자코 섰는 나무들의 주고받는 은근한 말을, 나뭇가지의 고갯짓하는 뜻을, 나뭇잎의 소곤거리는 속심을, 총중의 한 포기로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해가 쪼일 때에 즐겨하고 바람 불 때 농탕치고 날 흐릴 때 얼굴을 찡그리는 나무들의 풍속과 비밀을 역력히 번역해 낼 수 있다. 몸은 한 포기의 나무다. <산>

뿐만 아니라, 효석이 돌아온 자연의 세계에는 이러한 자연의 세계에 동화되는 인간의 단순한 삶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계절의 순환 문제에 있어서 그의 문학 세계--자연 세계--에서 한 가지 배제되어 있는 것은 겨울이다. 색채의 다양성과 후각의 강도가 없는 그리고 대사의 활동이 정지된 겨울의 마비성은 제외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대결하려는 태도보다는 은신의 안주만을 꾀하려는 그의 태도의 일면이 반영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연과 정신의 합일보다는 순조롭고 정서적인 자연만에 대한 구원적인 화해를 요청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문학이 산문보다는 얼마나 시의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은 인간의 삶 자체보다도 달빛과 꽃향기에 지나치게 매료되고 있는가에서 짐작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길은 지금 산허리에 결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리며……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메밀꽃 필 무렵>

이렇듯 그는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자연의 속에 인간을 동화시키고 또 화해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이 길은 삶의 줄기찬 길이 아니라 배가본드의 낭만적인 길이다.

한편 이효석의 작품은 워낙 경험론적인 수필성을 노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실은 그가 남다른 수필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낙엽을 태우면서> <청포도의 사상> 등으로 대변되는 그의 수필의 세계는 단순히 그의 수필의 양식이 소설과 어떤 밀접된 상관성을 갖고 있는지를 해명할 수 있는 자료로서 뿐만이 아니고 그의 인생관이 지닌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색 그리고 삶의 멋진 댄디즘을 접하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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