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이호철 - 독특한 세계의 구축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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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독특한 세계의 구축
金  治  洙

  

 

이호철(李浩哲)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1955년 《문학예술》 7월호에 단편<탈향(脫鄕)>이 발표되면서 시작된다. 이 작가에 대한 글을 발표한 바 있는 (民音社刊 《現代韓國文學의 理論》참조) 필자는, 그 후 이 작가의 주목할만한 작품 활동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어 왔다. 실제로  이 작가만큼 자신의 문학적 세계를 꾸준히 천착해 온 작가가 드물다는 의미에서 작가 이호철의 중요성은 널리 인식이 되고 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이 작가가 1961년 현대 문학 신인상(現代文學新人償)을 수상했다거나 1962년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라든가 행운이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작가가 발표한 작품들이 그 양에 있어서나 그 질에 있어서 괄목할 만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우선 이 작가가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해 왔다는 사실로서 이야기 될 수 있다. 1955년 <탈향>의 발표에 이어, 1956년 《문학예술》 1 월호에 <나상(裸橡)>이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그는, 1959년 <만조(滿潮)>, 1961년 <판문점>, 1962년 <닳아지는 살들>, 1965년 <부시장 부임지로 안 가다>, 1970년 <큰산>, 1971년에서 1974년까지 <이단자 1 . 2 . 3 . 4 . 5>, 1976년 <문(門)> 등 해마다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단편집 《나상(裸橡)》을 1961년에, 신구문화사의《현대한국문학전집》에 <이호철 권(卷)>을 1965년에 장편 《서울은 만원이다》를 1966년에, 장편 《공복사회(公僕社會)》를 1968년에, 장편 《4 월과 빙원(氷原)》을 1971년에, 단편집《큰산》을 1972년에, 단편집 《닳아지는 살들》을 1975년에, 태극출판사 간 《한국문학대전집》의 <이호철 권>과 민중서관 간 《한국문학전집》의 <이호철 권>과 문리사 간 《한국신문학전집》의 <이호철 권>, 그리고 단편집 《이단자》를 1976년에, 장편 《남풍북풍》과 《1970년의 죽음》을 1977년, 장편 《역려(逆旅)》와 《그 겨울의 긴 계곡》을 1978년에 출간하였다. 이처럼 많은 작품들과 소설집 등을 내놓고 있고 중요한 문학 전집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은 우선 이 작가의 작품이 상당한 독자를 갖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의 소설에서 이 작가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실제로 전후(戰後) 문학을 다룬 비평에서 이 작가는 끊임없이 문제 작가로 다루어지고 있고 상당히 많은 비평가들이 이 작가론 혹은 그의 작품론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가의 중요성은, 이처럼 많은 작품들이 대부분 이 작가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  하는 데 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작가의 문학적 관심의 변모 과정을 보여 주고 있는 데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작가 나름의 독특한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육성(肉聲)을 갖고 있다는 작가의 개성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이야기를 만드는’소설가와는 다른 의미를 띠는 것이며, 작가의 문학적 관심의 변화는 그것이 작가의 세계의 확대 및 심화와 관련되어 있을 때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야기를 만드는’소설가는 자신의 관점과는 상관없이 어느 이야기나 그 이야기 자체로서 이야기가 되게끔 꾸미며, 따라서 작품에 따라서는 관점 자체의 모순 현상을 일으킨다. 이 경우 작품 하나를 읽으면 그런 대로 어떤 특성이 드러나는 것 같지만 여러 작품을 한꺼번에 읽으면 일반적인 소설이 갖는 속성만이 나타날 뿐 그 작가의 일관된 세계나 개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호철에게 있어서 육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작가 나름의 일관된 세계 혹은 개성이 비교적 뚜렷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가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탈향> <나상> <만조> 읽으면 이호철의 초기의 문학적인 동기가 6·25를 전후로 한 작가 자신의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전쟁으로 고향을 떠났거나, 고향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 가운데 <탈향> 은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서 부산에 피난을 온 네 사람의 10대와 20대의 인물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고, <나상>은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형제 가운데형이 먼저 죽어 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만조>는 공산치하에 들어갔던 마을이 다시 국군의 진주로 인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세 편의 단편뿐만 아니라 이 무렵에 발표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비슷한 주인공의 비슷한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가의 관심이 전쟁을 전후로 한 청소년들의 삶에 집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자체가 그러한 것처럼 초기의 이 작가가 다루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러한 낭만적인 세계가 아니라 천형(天刑)을 받은 듯한, 인간의 삶에 값하지 못할 만한 비참하고 잔혹한 현실이다. 고향을 떠나온 청소년들로서 가정도 빼앗긴 채, 화차(貨車)에서 추위에 떨고, 매일 부두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야박한 인심과 싸워야 하고, 유일한 연대감을 갖고 있고 있는 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고, 어젠가 배반하게 될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탈향>의 네 주인공의 삶은‘뿌리뽑힌 자들’의 절망적 생활 그것이다.

 해방 후 월남했다가 사변이 터지자 군인이 되었지만,‘놈들의 포로로 잡혀, 놈들의 후방으로 인계돼 가다가’만난 <나상>의 형제들의 이야기는 우리와 같은 전쟁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이다. 해방 후 공산주의 사회를 경험하고 전쟁 중에 남쪽 사회를 경험한 마을의 비극 가운데서 마을 외무위원 보좌가된‘광석’이와 마을 대한 청년단 감찰부장으로 있는‘두찬’이, 그리고 마을을 떠났다가 수복 후 되돌아온‘이환’ 등의 젊은이의 세계는 우리에게 전쟁이 가져다 준 혼란의 시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냉엄하고 잔혹한 현실 속에서 이들 주인공들이 비록 현실의 여러‘놀이’에 놀아나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인간 자체에 대해서 화자(話者)는 끊임없이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비록 그들이 친구를 배반하거나 형의 바보스러움을 바라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그들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밖에서 주어진 것이 되고, 그들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따뜻한 인간의 입김은 끊임없이 화자(話者)에 의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고달픈 생활을 살면서도 ‘좋은 반찬은 서로 양보들을 했다. 어두운 화찻간 속에서나마 막걸리 사발이나 받아다 마시면, 넷이 끌어안고 법석대곤 했던’것은 그들의 본성 속에 자리잡은‘사랑’의 입김이 남아 있기 때문이며, 언제나 좀 모자란 때문에 남들의 빈축을 사 왔던 형이지만‘결국 형의 그 둔감이란 어떤 표준에 의한 의례적인 몸짓이라든가, 상냥스러움, 소위 상대편에 눈치껏 적응하고 또는 냉연(冷然)하고 할 수 있는 능력의 결핍,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느냐.……아버지라는 사람도 이런 표준에 의해서 큰아들을 단념했었고 어머니는 큰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고 함으로써 동생은‘결국 그 일정한 표준의 울타리 속에서 민감하다던가 우아하다던가 교양이 높다던가, 앞날이 촉망된다든가 이럴 소릴 들을 수 있었다’고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작가 자신이 삶의 요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그 평가의 기준 자체를 제도화(制度化)된 눈에 두지 않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이란, 가령 청소년의 경우일 때 공부를 잘한다든가 부모의 잘 듣는다든가, 뛰어난 머리를 소유했다던가, 남다른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면 이러한 기준들은 말하자면 제도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제도화는 사람의 능력 혹은 사람다움을 눈에 보이는 현상에서 찾고자 하며 모든 사람에게 제복을 입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본질적으로 이러한 제복을 입히는 것을 반대하고 그 제복 밑에 감추어진 개개의 개성과 특성을 통해서 삶의 보편적인 의미를 발굴하는 것이라면, 이호철의 주인공에 대한 태도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입김은 제도화된 인간에서라기보다는 제도화되지 않은 인간에서 더 많은 설명을 얻고 있다. 물론 이때의 주인공들이 제도화되지 않은 이유가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대부분 상황 자체의 불합리성에서 야기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제도화된 눈으로 보면 부랑아에 지나지 않을 이들 주인공들의 상황은 주인공 자신에 의해서 선택된 상황이 아니라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밖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이 주인공들이 부랑아에 지나지 않을 것이겠지만, 작가가 이들을 단순한 부랑아로 파악하지 않는 것은 바로 제도화된 눈으로 보지 않는 문학 본래의 기능을 인식한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제도화되지 않은 눈을 갖고 있는 이 작가의 독특성은, 이들 주인공에게 있어서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냄으로써 구체적인 실체를 얻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삶의 아름다움이란 가령‘나만 제외하고는 다 망해도 좋다’는 이기적인 태평(太平) 의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이라든가 삶의 영원을 추구하는 철학적인 사유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자기 도취에서 얻어진 현실 인식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들 주인공들이 순간순간에 경험하게 되는‘사람다움’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호철에게 있어서는 이른바 ‘서정(抒情)’적 묘사로 등장하게 되는 이러한 경지는 상황의 피해자들인 주인공들로 하여금 삶의 찌든 모습을 안고 시름하며 괴로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사람다움의 순간들을 경험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어두운 화차간 속에서도 막걸리 사발이라도 얻어 마시면 끌어안고 법석을 떨거나, 포로로 이끌려 가면서 내리는 눈을 보며 환성을 지르거나, 많은 사람들이 붙들려 있는 상황에서도 친구의 아내의 미모를 선망하는 이들의 태도는 전쟁이 아닌 평화 시대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삶의 긍정적 측면을 이들이 잃지 않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에 대한 태도는 이 작가 자신이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왜야하면 이 초기의 소설들 외에도, 가령 <소시민(小市民)>의 수많은 인물들, <판문점> <부시장 부임지로 안 가다> <큰산> 등의 인물들에 대한 태도도 같은 각도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가장 중요한 장편 가운데 하나인 <소시민>에는 이북에서 피난을 나와 처음에는 부두 노동을 하다가 우연히 제면소(製麵所)에서 일하게 된‘나’, 단순하고 무식하면서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한 원조 밀가루로 국수를 팔아 소자본을 이룩한 주인, 소자본가로서 먹을 것 걱정을 안 하면서도 복잡한 가정 관계에 신경질을 부리고 성적 불만을 적당히 해결하고 있는 주인 여자, 일제 시대에 지원병으로 미얀마 전선에까지 끌려갔다 온 일이 있고 지금도 일본군을 절대 절명의 것으로 생각하며 전락의 소용돌이를 피안의 불로 바라보고 주인에게 순종만을 하는 신씨, 고등 교육도 받고 징용경험도 있고 남로당에 가담간 적이 있으면서 이제는 제면소에서 찌들고있는 정씨, 옛날 정씨의 부하로서 제면소 시절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마침내는 정전 지지의 테러 행위에 가담하는 김씨, 지식인 출신으로 제면소에서 기식하다가 자살한 강 영감, 지주의 아들 출신으로 소시민적 허세가 심한 곽씨, 전쟁에 남편을 잃고 제면소 식모에서 양공주로 변한 천안색시 등 온갖 계층의 인물들이 제면 소를 중심으로 그 혼란의 시대를 살게 되는데, 이 인물들 하나하나에게서 삶의 밑바닥에 감추어진 어떤 진실들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의 입김을 느끼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의 삶은 그들 자신의 책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어차피 사회 전체의 격동 속에서 종래의 형태로 있던 사회 각 계층의 단위는 그 단위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모든 계층이 한 수렁 속에 잠겨서 격한 소용돌이 속에 휘어들어 탁류를 이루게 마련이었다’고 하는 표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 작가의 또 하나의 주인공‘길녀’에게서도 나타나며, <판문점>에서 주인공‘진수’가 이북의 여기자와 자신의 형을 묘사하는 장면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큰산>에서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어머니 젖가슴 다음으로 익숙해진‘큰산’이 없는 쓸쓸함 때문에 온갖 불안을 겪게 되는 주인공은 액(厄)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누라의 노력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활의 적응도를 반성하고 있다. 마음의 고향, 혹은 신화적(神話的)표현을 쓰면 모태(母胎)의 부재에 대한 이‘쓸쓸함’이 갖는 의미는 이호철의 소설이 인간 관계의 따뜻함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이야기해준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소설에서는 끊임없이‘분위기’에 관한 묘사가 빛을 발하고 있고 그러한 분위기로서의 묘사가 가장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 <닳아지는 살들>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묘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표현은 이 작가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이 판’이라든가 하는 무슨‘판, 즉 자리가‘상황’개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데서 찾아질 수 있다. 주의 깊은 독자들이라면 어느 경우에 이 작가가‘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비교적 최근의 작품인 <문(門)>에서도 주인공이 마지막 부분에서 옆방과의 대화의 통로를 발견하면서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작가가 주인공들에 대해 화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사실작가 자신이 인간에 대한 적대 관계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해 관계를 근간으로 삼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작가는 어떤 인물이 어느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며, 어느 시간에 어떤 장소에 처해 있는 인간은 외형적으로는 그 상황에 의해 결정되지만, 내면적으로는 사랑의 대상이 아닐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말을 바꾸면 이 작가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이 작가의 관심의 변화 과정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초기의 이 작가의 관심은 전쟁이라는 엄청난 상황 아래서의 청소년의 개인적인 삶과 인간성에 집약되어 있다. 예를 들면 <탈향> <나상> <만조> <소묘(素描)> <짙은 노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판문점>을 계기로 한 60년대의 작품들, <소시민> <부시장 부임지로 안 가다> 등에서는‘사회적’인 문제로의 관심의 확대를 가져오고 있으며, 그것이 <문>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큰산>을 계기로 해서 나타나는 관심은 삶 자체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 혹은 의미 추구가 개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이 땅에서의 인생에 대한 그 나름의 내면적인 법칙을, 혹은‘사람다움’에 대한 내면적인 의미를 직가 자신이 확신하게 된 데서 연유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의 확대가 <소시민> 이후의 작품에서 삶의 희극적인 요소를 소설의 표현에 보다 많이 제시하는 계기를 마련했는지도 모른다. 이때 희극적인 요소들이란 그 자체의 내면적 비극성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상황과의 관련 아래서의 삶의 연극 적인 성질의 인식에서 나온 것이며, 인간의 본성에 대산 긍정적인 파악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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