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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희생 / 후안 발레라(Juan Valera)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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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희생 /  후안 발레라(Juan Valera)

 

 

구테레스 신부로부터 돈 페피트에의 편지

 

-말라가에서 1842년 4월 4일

 

그리운 제자에게

누이동생으로부터 그 일을 듣고는 몹시 괴로워하고 있네. 20여 년을 그 곳에서 보내고 미망인이 된 누이동생은 아이도 없는 몸으로 이 2년 간 쭉 나와 함께 이 곳에서 살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그 곳 분들과의 접촉이 많아 때때로 오는 편지에는 그 곳 소식도 자세히 내 귀에 전해지는 형편이네.

 

전에는 내 강의를 들으러도 오고, 나 또한 열심히 철학 윤리를 가르친, 성실하고도 신앙심 두터운 청년이 오늘날 그렇게까지 죄 많은 생활을 하며 살고 있으리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죄송스럽게도 샛길로 빠져 노체(老體)의 백발을 더럽히고 그 여생을 괴롭히며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동기가 되는 위험한 다리를 건너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끼칠 뿐이네.

 

부농(富農) 돈 그레고리오 부인, 도냐 푸와나에게 미쳐서 부인을 따라다니며, 자네를 피하려고 하는 부인의 굳은 지조를 자네는 유린하려고 하고 있네. 그 곳에서 자네는 농업 가사를 가장하고 포도주 제조 및 포도의 품종 개량의 접목을 지도하고 있다는데 그렇다면 자네의 접목은 비난받아야 할 행위 그것이며, 자네가 술을 만드는 것은 한 사람의 노인에게 비탄과 굴욕의 원천과 다름이 없을 것이네.

 

노인은 훌륭한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유일한 과실을 말한다면 아름답고 어느 정도 남자를 좋아하는 젊은 부인을 맞이했다는 것 뿐일세. 자네는 곤란한 일을 하고 있네. 제발 자네에게 부탁하네. 좋지 않은 생각은 버리고 말라가로 돌아와 주었으면 하네. 자네에 대한 내 마음을 얼마만이라도 통찰하고 더욱 그것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바라건대 나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 주길 바라네.

 

 

[제1신]

 

돈 페피트로부터 구테레스 신부에게

 

비랴레그레에서 4월 7일

 

존경하는 스승에게

그 곳에 술과 기름을 운반하는 파코 할아범으로부터 4일자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서둘러 회답을 쓰오니 안심하시길 바라오며, 또한 저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도냐 푸와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도 않으며, 더구나 쫓아다니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 쪽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말씀드려 둡니다만 도냐 푸와나에게는 좀 색다른 면이 있으며, 어느 편이냐 하면 위험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년 전입니다만, 얼마 안 있어 30살이 될 때에 돈 그레고리오와 결혼했습니다. 그 여자를 부정한 여자라고까지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남편을 입으로 구슬리며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어쩌지도 못하게 해 놓는다고 하는 것에는 누구 하나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만심이 강하다고 할까, 품위가 있다고 하는 것일까, 자기에게 반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어떤 남자도 자기를 노리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남편에게도 그렇게 생각케 하려고 할 정도입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해서 도냐 푸와나는 못난 여자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미인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키가 크다든지 작다든가 말랐다든가 살집이 좋다든가 따위로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의 움직임, 몸가짐 등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그 여자 스스로는 알지 못하고 있는 일이겠습니다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볼 연지를 바르고 얼굴과 목덜미에 분을 바르고 아이 섀도로 검은 눈에 윤을 내려고 하며, 더구나 그 눈을 쉴 새 없이 깜박이며 마치 바람난 마음이 그 곳에서 독을 뿜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게 합니다.

 

아무튼 도냐 푸와나에 대해 특별히 세상에서 떠들어 댈 필요는 없습니다만, 산보할 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 또는 교회 안에서 남자들은 아무 일도 없이 그녀에게 끌려다니게 되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쉽게 몇 사람의 남자를 사로잡고 마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남자들이, 특히 다른 나라의 사람으로서 처음 만나는 남자들이 제멋대로 상상해서 그녀의 비위를 맞추는 말도 하며, 끝내는 있을 수 없는 소망을 안고 괘씸한 신청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녀는 그것을 멋지게 이용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곳 저곳 동성(同性)의 친구들에게는, 어디를 보나 몸둘 곳을 모르겠다든가, 불행히도 자기는 사람을 끄는 점이 많아서 만나는 남자들은 이내 자기를 따르며 사랑을 요구하고, 귀찮게 굴어서 몹시 난처하며 그래서 주인인 돈 그레고리오를 안심시켜 주지 못한다고 자랑스럽게 불평을 늘어 놓습니다.

 

그것이 심해져서 도냐 푸와나는 자기에게 단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은 남자들까지도 자기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인 것입니다.

 

작년 여름, 카라트라카의 온천에서 도냐 푸와나를 처음 만났고 가까워졌습니다. 그러한 내가 이 곳으로 왔기 때문에 마치 자기를 따라서 이 곳으로 온 것같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된다면 적지 않게 곤란합니다만 생각을 고쳐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이 곳을 떠나 말라가로 돌아갈 수도 없으며, 또한 돌아가려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습니다. 사실은 어떤 중요한 일 때문에 이 곳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다음 편지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으며 오늘은 이만 적겠습니다.

 

 

[제2신]

 

―4월 10일

 

존경하는 스승에게

사실을 말씀드리면 저는 사랑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도냐 푸와 나가 아니고 이름은 이사베리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얌전하고 순진하고 교양도 있는 흔하지 않은 여성입니다. 볼품 없는 뚱보 돈 그레고리오와 같은 사람에게서 어떻게 그렇게도 얌전하고 아름다운 딸이 생겼는가 이상할 정도입니다. 돈 그레고리오의 첫 번째 부인의 딸이므로 계모인 도냐 푸와나는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그녀에게 심하게 굴었으며, 제멋대로 억누르고 자기 동생인 돈 안부로시오와 결혼시키려고 야단입니다. 이사베리타에게는 죽은 어머니의 유산이 있으므로 대단한 도락자(道樂者)인 돈 안부로시오에게는 알맞은 혼담인 것입니다. 게다가 이 마을에서는 그만한 상대도 얻기 어려웠습니다. 도냐 푸와나는 제멋대로의 생각들, 즉 피를 나눈 형제 돈 안부로시오와 결혼시키려고, 이사베리타가 돈 안부로시오에게 애정을 갖고 있으며, 결혼까지 하고 싶어한다고 결정하고 돈 그레고리오에게도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사베리타는 두려워서 반박도 못 하고 더구나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분명히 의사 표시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냐 푸와나는 하루 종일 끈덕지게 전실 딸을 감시하는 눈을 번득이고 있어서 나는 이사베리타를 만나는 것도 편지를 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써 보내도 그녀에게 읽혀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작년 여름의 카라트라카 이래, 나는 이사베리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시선, 그녀를 볼 때의 더할 수 없는 뜨거운 나의 시선을, 그녀는 감사와 애정이 가득 찬, 그러면서도 천진난만하게 나에게 돌려 주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뻔히 아실 구실을 만들어 이 곳에 온 것도 그저 이 사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한 사람의 유력한 조력자가 일을 잘 진행시켜 주지 않았다면 나는 얼토당토않은 어릿광대의 역을 연출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 보는 노녀(老女) 라몬시카로서, 그녀는 돈 그레고리오의 먼 친척이 되며, 가정부로 들어가서 자기가 기른 이사베리타를 진심으로 귀여워해 온 여자입니다. 그녀는 도냐 푸와나가 딸에게 못되게 구는 한편, 더욱 지금까지 자기가 돌봐 주던 일까지 못 하게 했기 때문에 그녀는 도냐 푸와나를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우연히 라몬시카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 그녀의 입에서 이사베리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얌전하고 지나치게 수줍은 이사베리타에게는 분명히 애인으로서 내게 편지를 쓴다든가, 만나려고 하면 할 수 있다 해도 아버지나 계모의 동의 없이 창 밖과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도 애써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나는 이사베리타와 어떻게 창을 사이에 두고라도 둘이 만날 수 없을까 하고 라몬시카에게 부탁해 보았습니다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베리타는 구석진 방에 있기 때문에 그 곳을 나오려면 아무래도 도냐 푸와나의 침실을 지나지 않으면 안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열쇠를 얻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 열쇠는 침실의 문을 잠그고 나서 도냐 푸와나가 제 손으로 간직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만 저는 단념하지 않습니다. 희망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라몬시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며 아무튼 도냐푸와나를 한 번 되게 혼내 주려고 작심한 여자입니다. 저는 라몬시카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제3신]

 

―4월 15일

 

존경하는 스승에게

라몬시카는 확실히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는 고마운 동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손을 썼는지 내일 밤 열 시에 이사베리타와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라몬시카가 문을 열고 나를 집 안으로 들여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도냐 푸와나에게는 들키지 않게 그녀를 어디로 가게 할 것입니다. 만반의 준비는 갖추어졌고 조금도 위태로운 점은 없으니 안심하라는 라몬시카의 수완과 지혜에 모든 것을 맡기려고 합니다.

 

저로서는 라몬시카가 꾸민 일이 잘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가 싫지만 아무튼 좋건 나쁘건 간에 수단은 목적의 여하에 따라 명분이 서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목적에 손톱만큼도 부끄러운 점이 없습니다만 일은 어떻게 진행되려는지요.

 

 

[제4신]

 

―4월 18일

 

존경하는 스승에게

저는 그 시각에 약속한 장소에 갔었습니다. 라몬시카는 약속대로 준비를 갖추고 주의 깊게 문을 열었고, 저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손을 잡히고는 캄캄한 가운데서 층계를 올라가 긴 복도를 지나 두 개의 객실을 지났습니다. 이윽고 우리는 두 개의 남포가 켜진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방에서는 옆에 있는 넓은 침실이 들여다보였습니다. 라몬시카는 대단한 술책을 쓴 것입니다. 저는 그녀의 계획을 믿기는 했습니다만, 그 실행에는 동의하지 않은 셈이었습니다. 실은 그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선생님은 상상도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날 밤, 돈 그레고리오는 농장에 묵고 있었습니다만 라몬시카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여자였습니다. 나를 속여서 도냐 푸와나의 방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도냐푸와나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던 저는 그만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녀도 비명을 올리며 분노와 괴로움을 표시하는 일방, 내가 그녀를 사랑하며 더구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노예라 생각하고는 동정도 보였습니다. 저는 그 어처구니없는 태도에 아연할 뿐 대답할 말도, 설명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이 장면을 구질구질하게 보고한다는 것은 삼가고 싶습니다. 최악의 사태는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라몬시카의 못된 장난은 이것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온화하긴 했으나 체면 문제라면 남달리 신경을 쓰는 돈 그레고리오에게 이름을 남긴 편지를 보낸 자가 있어서, 부인이 밤 열 시에 나와 밀회를 하고 있다고 써 보냈던 것입니다. 돈 그레고리오는 부인이 잘못을 저지를 여자는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중상 모략이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일을 분명히 하려고 돈 안부로시오와 함께 달려왔습니다. 말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자 처남을 뒤에 거느리고는 소리도 없이 계단을 올라왔습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렇지 않으면 만사를 빈틈없이 꾸민 라몬시카의 계획에서인지 어둠 속에서 돈 그레고리오는 통로를 막고 있던 의자에 부딪혀 넘어지면서 큰 소리를 냈고 또한 고함을 질렀습니다.

 

상처는 없었으므로 곧 일어나서는 돈 그레고리오는 급히 아내의 방으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그 고함 소리와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죄를 짓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망연자실할 뿐이었습니다.

"아이, 어쩌면 좋아요!"

 

도냐 푸와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를 살리는 셈 치고 이 방에서 나가 주세요. 남편이 옵니다."

 

방을 나가면 돈 그레고리오와 부딪칠 것입니다. 이 방 안에서 숨든가 옆방의 이사베리타에게로 도망치는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라몬시카는 제 팔을 붙들어 이사베리타의 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저로서는 기쁘기도 하고 가슴이 철렁, 하는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돈 그레고리오는 어쩔 줄 모르는 부인을 보자 의심이 더해지면서 사태를 구명(究明)하려고 했습니다. 옆에는 아까부터 쭉 처남이 서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드디어 이사베리타의 방으로 왔습니다.

이사베리타와 저를 연인들로서, 라몬시카는 중매역으로 황송하다는 듯이 무릎을 꿇고 이 쪽의 잘못은 잘못대로 사과하고, 이렇게 된 이상 결혼이라는 방법으로 일체의 보상을 하겠노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저의 가정과 가지고 있는 재산 등을 물어 보더니 돈 그레고리오는 고개를 끄덕일 뿐만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면 어떠냐고 말했습니다. 도냐 푸와나는 자기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하는 수 없이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도냐 푸와나는 제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희생되었다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아니라 이사베리타도 돈 안부로시오를 사랑하면서도 자기를 위해 희생해 주었다고 이사베리타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했던 것입니다.

 

선생님, 라몬시카가 꾸민 계획은 결코 훌륭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동시에 대단히 좋은 일도 해 준 셈입니다. 제가 도냐 푸와나를 사랑하고 이사베리타 또한 돈 안부로시오를 사랑하는데도 저와 약혼녀인 이사베리타가 함께 이 곳에 머문다는 것은 네 사람 다 심한 타격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식이 끝나는 대로 이 마을을 떠나렵니다. 도냐 푸와나와 같은 불쾌한 남매의 곁을 떠나려는 생각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냐 푸와나로부터 구테레스 신부의 누이동생 도냐 미카엘라에의 편지

 

―5월 4일

 

친애하는 벗에게

이번에는 모든 것을 털어놓아서 가슴이 후련해지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나 조심성 있는 여자로서 살아왔습니다. 내가 예쁘다든가, 매력이 있다든가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일까요. 저도 모르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의 두 눈에서는 남성을 미칠 듯한 기분이 되게 하는 악마의 불이 뿜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당신에게도 말한 바와 같이 카라트라카에서 내게 홀딱 반한 돈 페피트에게 구애를 받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저를 뒤쫓아서 이 곳에 오셨습니다. 말씀드려 둡니다만 내가 저 한결같은 마음의 청년을 밀어내어 전날과 같은, 사건이라기보다는 그와 같은 절박(切迫)한 경우로 몰아 넣은 것은 아닙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제멋대로 주인이 없는 집의 내 방에 들어와서 내게 덤비려고 했던 것입니다. 정말 나는 위태로웠습니다. 마침 이 때에 내게 있어서나 그분에게 있어서나 생각지도 않았을 때 남편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의자에 부딪혀 넘어지면서 늘 하는 입버릇으로 크게 떠들어 댄 덕분에, 만약에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남편에게 들키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라몬시카의 약삭빠른 솜씨로 아무 시끄러움도 없이, 피비린내나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끝났습니다만, 몹시 둔한 몸으로 결투라도 하게 되었다면 남편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때마침 라몬시카가 돈 페피트를 이사베리타의 방으로 안내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아무 일도 없게 되어 정말 라몬시카에게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도 고마운 것은 그 격정의 돈 페피트가 나를 괴롭게 만들지 않으려고 이사베리타의 애인으로 가장해 주신 것과 또 하나는 전실 딸이 돈 안부로시오에의 사랑을 단념하고 자기는 돈 페피트를 사랑한다고 말해 준 것입니다.

내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같이, 또한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신뢰에 보답할 수 있는 여자로 있게 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이중의 희생을 참아 준 것입니다.

 

어저께 결혼식을 마쳤고, 얼마 안 있어 그 곳으로 갈 것입니다. 동생과 나를 위해서 서로가 괴로웠던 일들이 많았던 이곳을 멀리 떠나서 두 사람 모두 빨리 잊어주었으면 합니다. 불같이 사랑하는 연정은 없다고 해도 조용하고 평온한 애정으로 언제까지나 두 사람이 감싸며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또한 부부사이에 있어서 가장 어울리는, 그리고 오래 계속될 애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마음의 동요를 완전히 지워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눈으로부터의, 때때로 생각지도 않게 뿜어지는 뜨거운 불과도 같은 것을 두려워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사람들의 얼굴은 보지 않고 언제나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살아갈 작정입니다.

 

아무쪼록 몸조심하시기를. 그 일 이래 잃어버린 마음의 평화를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들을 위해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주십시오.

 

(하략)


 요점 정리

 지은이 : 후안 발레라(Juan Valera)/최금숙 옮김

 갈래 : 서간체 소설

 성격 : 고백적

 주제 : 삶에 대한 감사함

 줄거리 : 구테레스 신부는 신앙심이 두터운 돈 페피트의 소식을 누이동생으로부터 듣고 깜짝 놀라 돈 페피트에게 편지를 보낸다.

 

20여 년 동안 미망인이 되어 신부와 같이 살고 있는 누이, 도나 미카엘라는 말라가의 소식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돈 페피트가 그 곳의 부농(富農)인 그레고리오 부인인 도냐 푸와나를 연모하여 그 뒤를 좇는다는 누이의 말을 듣고 편지를 쓴 것이다.

 

스승인 구테레스 신부의 편지를 받고 돈 페피트는 깜짝 놀라 도냐 푸와나가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기는 해도 자기는 그 여인을 좋아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뒤에 돈 페피트는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이사베리타이고 도냐푸와나의 감시로 만나기가 힘들다고 한다.

 

이사베리타의 방은 도냐 푸와나의 방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도저히 접근을 할 수 없으나, 라몬시카의 호의로 몰래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는 편지를 신부에게 보낸다. 그레고리오가 농장에서 잔다는 어느 날, 돈 페피트는 라몬시카의 안내로 이사베리타를 만나기 위해 라몬시카가 열어 주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라몬시카의 안내로 집 안에 들어간 돈 페피트는 라몬시카의 꾀에 넘어가 도냐 푸와나의 방으로 안내된다. 기겁해서 놀란 것은 도냐 푸와나만이 아니요, 돈 페피트도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었다. 그 때, 농장에서 잔다던 그레고리오가 갑자기 돌아와 무엇에 부딪혀 넘어지는 소리가 나서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기겁을 한다. 도냐 푸와나는 어서 이 방에서 나가 달라고 애원한다. 돈 페피트는 당황한다. 이 때, 라몬시카가 돈 페피트의 손을 잡고 이사베리타의 방으로 들어간다.

방 안에 들어온 그레고리오는 이상한 예감에 도냐 푸와나의 변명을 듣지도 않고 이사베리타의 방으로 들어왔다. 라몬시카가 이들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변명을 한다.

 

그레고리오는 결혼을 승낙하여, 돈 페피트는 결혼을 하고 이곳을 떠나 이사베리타와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 이사베리타도 사랑하던 돈 안부로시오를 단념하고 돈 페피트와의 결혼날을 기다린다. 도냐 푸와나는 신부의 누이동생 도냐 미카엘라에게 돈 페피트가 자기를 구해 주고 별로 마음에도 없는 이사베리타와 결혼하는 '이중의 희생자'라고 편지를 보내면서 돈 페피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이 소설은 서간체 독백 형식의 소설로서, 그 기법이나 담화의 방법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글은 사건을 전개하면서 인물의 성격, 배경의 묘사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끄는 일반 소설과 달리, 편지로써 사건이나 인물의 성격, 그리고 배경이나 심리를 그려야 하기 때문에 쉬운 방법이 아니다.

 

 돈 페피트는 사랑하는 이사베리타와 결혼하게 되어 행운을 잡았는데도, 도냐 푸와나는 자기를 구해 주고, 마음에도 없는 이사베리타와 결혼하게 되어 '이중의 희생자'라고 편지를 보내고 있다. 라몬시카의 기지와 돈 페피트의 자신에 넘치는 행동, 그리고 도냐 푸와나의 남자를 끄는 매력적인 면이 함께 조화되어, 사건을 기지 속에서 평화롭게 진행시키고 있다. 오늘날 소설의 형식이 다양해지면서 이러한 서간체와 함께, 주인공이 혼자 얘기하는 독백체 소설이 있고, "안네의 일기"같이 일기체 등 다양한 서술 기법을 보이고 있다.

 심화 자료

 후안 발레라(Juan Valera 1824∼1905)

 수개 국어에 정통하여 외교관으로서 각국에 주재하였으며, 여러 나라의 문학과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 그리고 고전에 관한 해박한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자연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강조하였다. 절도 있고 균형잡힌 이성, 인간에 대한 선의, 섬세한 정신에 가득찬 그의 단아한 문체는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처녀작 《시에 관한 수상(隨想)》(1884)으로 시인 ·비평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나, 얼마 후 소설에 전념하였다.

 

 서간체 소설 '페피타 히메네스 '(1874)에서, 한 신학생이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될 때까지의 미묘한 심리를 그려 성공을 거두었다. 반대로 육체적인 사랑에 대한 정신적 사랑의 승리를 다룬 '도냐 루스'(1879)에서는 전작(前作)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철학적 논의가 전개된다. 그 밖에 '화니타 라 라르가 Juanita la larga'(1895) 등이 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19세기 에스파냐의 대표적인 시인이며 소설가. 비평가. 귀족 출신으로 우아하고 섬세한 문체를 추구하여 자연주의에 반발했다. 박력 있는 온후한 내용의 작품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서간체 소설 "페피타 히메네스"(1874)가 있다. 이 작품은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을 사랑하게 된 신학생이 고뇌 끝에 세속적인 사랑으로 향하는 심리적 갈등을 그렸다. 이 외에도 "도냐루스"(1879) 등의 작품이 있다.

 

작품 경향 : 그는 초기부터 심리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썼으며 자연주의 경향에 반발하여 예술미를 추구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

 

대표작품 : 스페인의 근대적 심리 소설의 원조가 된 '페피타 히메네스'와 '이중의 희생', 그리고 만년에 장님이 되어 쓴 '기질과 풍자'를 단편집으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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