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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시인의 생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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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시인의 생애


이육사 李陸史 1904-1944 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원록(源綠) ,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가호의 둘째 아들로 출생.배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修學).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띄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때 그의 수인번호가 64번이어서 호를 육사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 출옥,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군정부,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노신을 알게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3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조광사.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논문.평론.번역.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에 재능을 나타났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와 시 <실제>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교목><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작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신작 활동 못지않게 독립투쟁에도 헌신,전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보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의 의지를 나타내고,꺼지지 않는 민족의 의지를 장엄하게 노래한 점이 특징이다. 1941년 폐를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기검,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북경감옥에서 옥사했다. 유해는 고향 뒷산에 안장되었고 1964년 안동시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가 문학활동을 한 때는 문학사적으로 보아 문단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에 많은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문학으로 타락했으나,그는 끝까지 민족적 신념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저항했다. 서정적이고 목가적 시풍을 보이면서도 <절정> <광야> <꽃>에서 보듯 서정을 잃지 않은 저항시를 썼으며, 상징적이면서도 화려한 수법으로 암흑 속에서도 민족의 신념과 의지를 노래했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1935년을 전후해서 씌어졌는데, 이때는 그가 중국과 만주 등지를 전전하던 때인만큼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 침울한 북방의 정조와 함께 전통적인 민족정서가 작품에 깃들어 있다. 

 

생전의 유작 20여편은 신석조 등의 문우들에 의해 1946년 <육사시집>으로 꾸며졌다. 이 중에는 <청포도><황혼>등 향토적 정경과 그의 의지를 융합한 서정적 작품 <광야> <절정> 과 같이 강인한 신념과 지조로 일관했던 독립에의 절규를 노래한 시가 있다. 1956년에 재간본을 내었고 1964년에는 작품년보에서 밝히지 못한 연대를 밝혀냈고, 종전의 시집에 수록되지 않았던 작품을 추가하여 <광야>란 제목의 시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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