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시인의 생애
by 송화은율김억 시인의 생애
김 억 (金 億) 1896.11.30 ~ ?(납북). 시인. 본명 희권(熙權). 호 안서(岸瑞)
평북 정주 곽산 출생. 오산학교 졸업/일본 케이오의 숙문 중퇴.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원,동아일보 기자,경성중앙 방송국 직원으로 재직했고,8.15 후에는 출판사 수선사 주간. 6.25 사변때 북으로 납치되어 북한에 의하여 출판사 교정원(52) .신병으로 요양소에 입소(54.4) 북한의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강제 임명 되었으나 (56.7) 곧 평북 철산 지방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시켰다(58). 그의 그 후 생사는 알 길이 없다.
그가 유학때인 1914년(19세)에 <학지광>에 시 ‘이별’‘미련’ 등을 발표했으며.1918년부터 문예주간지 <태서문예신보>에 투르게네프 ,보들레르,베르레느, 등의 번역시를 소개 우리나라 최초로 서가시 도입을 시도하면서 동지에 그의 창작 시 ‘동지’‘오히려’‘봄’‘겨울의 황혼’를 발표함으로 써 문단에 등단,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지 <창조>후기 동인. 1920년 7월 25일 창간한 순수문예 동인지 폐허에 염상섭 오상순 등과 핵심 동인으로 참가 주로 프랑스 문학을 소개했고 최초의 서구시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는 이땅의 상징적,퇴폐적 시풍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1923년 6월 근대최초의 개인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간행하고, 계속하여 시집 <봄의 노래> <금모래> < 안서시집> <지세는 밤> <안서시초> <민요시집> <먼동이 뜰 때 > 등을 펴내어 7.5조 4.4조 등의 민요조에 입각한 초기 서정시 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다. 또한 한시 번역에도 주력하기도 하였다.
김소월의 스승으로 그를 문인으로 길러낸 공적도 크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에스페란토를 수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무상과 비애를 담담한 민요조로 노래한 초기 서정시는 이 땅의 자유시 서정시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시인의 성격은 약간 소심증이 있어 친구들 사이에 절교장을 써 놓고도 금방 사과를 했고,김동인이 염상섭을 모델로 단편 ‘발가락을 닮았다’를 쓰자 김동인을 힐책하고 절교장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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