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무정’ - 해설
by 송화은율이광수의 ‘무정’ - 해설
작가 : 이광수(1892 -1950)
호는 춘원(春園). 평북 정주에서 출생. 일본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를 졸업하고 1915년 와세다[早稻田]대학에 입학함. 1917년 <청춘>에 「소년의 비애」, 「어린벗에게」 등 단편을 발표함. 1917년 <매일신보>에 현대적 장편 「무정」을 발표하여 한국문학사에 신기원을 이룩함. 1924 <조선문단>을 주재하고 <독립신문> 편집국장,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함. 친일 문학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장을 역임함. 1940년 일본명 가야마 미쓰오(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하는 등 친일 행위를 함. 그의 작품 세계는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계몽적 민족 의식을 표현하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쪽으로 나타남. 6.25때 납북되어 생사 불명이었으나 최근 1950년 북한 남포병원에서 벽초 홍명희의 배려로 입원 중 사망했음이 알려짐. 대표작으로 「무정」(1917), 「유정」(1933), 「사랑」(1939), 「흙」(1932), 「단종애사」(1929) 등이 있음.
등장인물
이형식 : 근대적 인간형. 과도기의 전형적인 지식인.
김선형 : 김장로의 딸. 형식과 결혼.
박영채 : 박 진사의 딸. 구봉건 세대의 인습에 희생당함.
김병욱 : 자유 분방한 생활 태도를 가진 전형적인 신여성
줄거리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시 사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리쬐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 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 장로의 딸 선형이가 명년에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오늘 오후 세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다.
이야기의 서두는 경성 영어 학교 교사 이형식(李亨植)이 장안의 부호 김장로의 고명딸인 선형(善馨)의 영어 개인 지도를 부탁 받고 첫번 방문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본래 형식은 동경 유학을 마친 당대 일류 지식인이나 일찍이 고아가 되어 역경을 겪은 데다 내성적 성격이라 여성 교제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뛰어난 미모인 선형에게 반한다. 그리고 그 날 밤 하숙집에 돌아와서 형식은 뜻밖의 손님인 박영채(朴英彩)를 만나게 된다. 영채는 이형식이 어릴 때 고아일 적에 형식을 데려다 기르고 자식처럼 대하여 준 은사 박 진사의 딸인데 장차 형식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 정혼했었다.
그러나 박 진사의 개화 운동이 세상 사람들의 개화 문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실패하고 집안이 망하자 형식이는 영채와 이별하게 되었는데, 7년만에 해후하여 그 뒤 영채가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도우려 기생이 되고 형식을 사모하며 수절해 왔다는 전말을 듣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형식은 눈물을 흘리는 한편, 그녀가 기생이라는 혐오감과 미인이라는 유혹의 갈등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에 형식은 선형에 대한 연정과 은사의 딸이자 지난 날 아내로 암시되었던 영채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을 겪게 된다. 또, 기생인 영채를 구해낼 돈 천 원이 없음을 한탄하는 사이에 영채는 지금까지 형식을 위해 지켜 오던 정조를 배학감(명식), 경성학교 교주의 아들인 김현수 일당에게 유린당하고 만다. 그리고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하러 평양행 기차에 오른다.
그녀의 유서를 쥐고 눈물을 뿌리며 영채를 만나려 뒤따라 평양에 간 이형식은 소득없이 돌아와서 오히려 학생들에게 기생을 따라갔다는 오해만 사고 이에 분격하여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기에 이른다. 이는 김현수가 거짓소문을 낸 까닭이었다. 이런 형식에게 뜻밖에 김장로댁 선형과의 결혼 신청이 들어오고 형식은 이를 받아 들여 약혼식을 치른 후에 함께 미국에 유학을 할 준비를 하게 된다.
한편, 자살길에 오른 영채는 차 안에서 소위 신여성인 병욱을 만나 그녀의 황주집에 한 달간 머무는 동안 봉건적 사고 방식에서 근대적 합리주의로 정신적인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병욱의 호의로 함께 동경 유학길에 오르던 중, 기차 안에서 미국 유학을 떠나는 형식과 선형을 만나게 된다. 이리하여 형식은 새삼 애정과 의리 간에 갈등에 빠지게 되고 선형과 영채 사이에는 삼각 관계의 불협 화음이 생긴다. 기차는 삼랑진 수재 현장에 이르러 연착하게 되고 여기에서 네 젊은이는 고통을 당하는 수재민을 위해 자선 음악회등 함께 봉사활동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간의 개인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그 대신 토론을 통해 허물어진 민족의 장래를 담당할 역군으로서 사명을 다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 인물들의 근황이 소개되고 작가의 계몽 의식이 서술된다.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도 아니요, 무정할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하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弔喪)하는 ‘무정(無情)’을 마치자.
해설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첫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대표작이자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이다. 「무정」은 민족주의적 이상과 계몽주의적 정열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따라서 무정은 공리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그러한 공리성과 목적성 앞에 모든 개인의 고민과 갈등은 의미를 잃고 만다. 그런 결과로 「무정」에는 ‘우리’만 있고 ‘나’는 없다. 봉건 도덕 의식을 가진 박영채와 근대적 인간형인 이형식을 비롯한 여러 유형의 과도기적 인물을 설정하여 상호 갈등을 전개시킴으로서 전환기의 시대상과 가치관을 집약적으로 표현하였다. 직유의 표현 기교와 화자(話者)의 격앙된 영탄이 드러나고 일부 문어체(文語體)적인 문투와 극적인 필연성이 다소 미흡하긴하지만 참신한 문체와 치밀한 구성도 부분적으로 존재한다.
신소설과 비교하여 인물들의 내면 공간 확대를 통한 심리 묘사, 생생하고 개성적인 인물의 창조 등이 발전된 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제를 이루는 큰 기둥은 민족주의 이념과 자유 연애 사상인데 이는 이광수의 다른 작품에도 계속 드러나게 된다. 물론, 예술의 효용성면에서는 사회적 공리성(功利性)에 지나친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이 결점으로 지적될 수 있지만 그 당시의 문단 상황으로서는 분에 넘친 것이었다.
또한, 「무정」은 기본적으로 사제 관계를 축으로 인물이 맺어 진다. 박 진사와 형식, 형식과 선형, 그리고 삼랑진에서의 형식과 세 여자는 사제 관계로 볼 수 있다. 이런 구조는 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살리려는 안창호의 준비론 사상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무정의 대부분이 민족의 장래에 대한 고민보다는 사사로운 사랑의 문제로 인한 갈등인 점은 준비론의 낭만적 적용이라는 비판을 면하기가 어렵다.
(주제) 자유 연애와 민족의식의 고취, 세속적 사랑의 계몽적 민족주의로의 승화.
(의의)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장편 소설
(문체) 구어체(언문 일치), 산문적 묘사체
(성격) 민족적, 계몽적, 설득적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 작가 개입이 많다.
(배경) 계몽주의, 민족주의, 인도주의
(갈래) 장편소설, 현대소설, 계몽소설, 126회의 연장체(連章體) 소설.
참고
윤병로 외(1988), 현대소설론, 한국방송통신대학
《무정의 문학사적 의의》
Ⅰ. 서 론
<무정>은 우리 근대소설의 문을 연 것이기에 문학사적인 의미에서 기념비적이며, 작자 춘원이 그때까지 살아온 전 생애의 투영이기에 춘원의 모든 문자행위 중에서도 기념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무정>은 시대를 그린 허구적 소설이지만 동시에 고아로 자라 교사에까지 이른 춘원의 빈틈없고 정직한 자서전이기도 하다. 그 자서전은 그대로가 당시 지식인 청년들의 자서전에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작가가 의식했건 안 했건, 의도적이든 아니든간에 그가 생산한 문학작품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적 삶의 조건을 기본적인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이 삶의 조건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는 진술은 그것이 삶의 물질적 조건을 그대로 재현․반영하고 있다는 뜻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삶의 물질적 개선에 그것이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II . 문학사적 의의
1.시대적 진취성
춘원의 「무정」은 갑자기 불쑥 솟아난 작품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 쓴 많은 논설의 연속선상에 놓이는, 이른바 춘원의 문자행위의 일환일 따름이다. 「개척자」도 그 사정은 같다. 「무정」은 「문학이란 하오」,「농촌개발」에 이어져 씌어졌고 또한 「오도답파기」등의 앞에 놓이는 저술이다. 「무정」을 이와 같은 문자행위의 총체성에서 검토하는 일은 춘원이 자기가 소속된 여러 작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즉 유학생으로서, 신문관멤버로서 또 총독부 기관지의 유력한 기고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나름의 집단적인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작품 「무정」이 과연 기념비적 작품이라면 무엇보다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생명적 진취성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소속된 계층의식이 상승계층의 세계관임을 의미할 것이다.
장편 「무정」이 힘 있는 소설이며 독자를 감동케 했음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며, 그 이유중의 하나가 이 작품 전체를 진취적으로 이끌어나가는 힘일 터이다. 그것은 시류적인 풍속적․표층적 구조에서가 아니라, 이 시대의 중심 내지 밑바닥을 흐르고 장차 상승계층으로 되고자 하는 역사적․사회적 방향성에 관련된 힘이다. 그가 예외적 개인이며, 상승계층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다음 장면에서도 그 면모가 여실하다.
남들이 기생집에 가는 동안에, 술을 먹고 바둑을 두는 동안에, 그는 새로 사온 책을 읽기로 유일한 벗을 삼았다. 그래서 그는 동배간에도 독서가라는 칭찬을 들었고 학생들이 그를 존경하 는 또한 이유도 그의 책장에 자기네가 알지 못하는 영문, 독문의 금자 박힌 것이 있음에서였 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우리 조선 사람의 살아날 유일의 길은, 우리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 에 가장 문명한 모든 민족 즉 일본 민족만한 문명 정도에 달함에 있다 하고 이러함에는 우리 나라에 크게 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야 한다 하였다.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은 작가 춘원모양 예외적 개인이다. 경성학교의 10여명 교사 중, 인격파탄자이며, 영채를 강간하는 데 한몫 낀, 악명높은 배학감도 동경유학생이며, 더구나 동경고등사범 출신이었다. 형식이 상승계층의식을 대표한다면 배학감은 몰락계층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한쪽은 조금이라도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이를 전달하고자 했고 한쪽은 기생집을 찾아다니기에 정신이 없다. 이형식과 학생과의 관계는 시대의 방향성에 직결된 진취성이다.
고상한 직업은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그 다음의 사무적인 일이나 얻어 고분고분 자기 실력을 쌓아가는 쪽을 상승적 계층이라 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두고 상승적 계층의식이라 한다면 과연 그것을 말의 바른 의미에서 진취성이라 해도 될 것인가. 이천만 동포와 더불어 이 땅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점에 선다면 타협론이야말로 시대적 진취성이 아니면 안 된다.
2. 사제관계의 견고성
「무정」은 상승적 계층의 가능한 최대치의 이데올로기를 문학적 장치, 즉 감각적 명징성으로 드러내고, 이를 계몽적 의식 또는 교사․생도간의 문제라 불러도 될 것이다. 작품 「무정」을 이루는 첫번째 구조층, 곧 표층적 구조가 시대적 진취성이라면 그것은 논설문 레벨의 구조에 해당된다. 그 중간적 구조, 다시 말해 두 번째 구조층은 바로 이 교사․생도의 관계라 할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작품만이 갖는 독자적 감응의 영역이다. 「무정」의 독특한 힘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두번째 구조층은 몇 가지 유형으로 「무정」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하나로 묶으면 교사․학생의 관계구조가 된다.
(1) 형식과 선형의 관계 ‥‥ 형식은 소설 첫장면부터 선형의 영어 가정교사로 부임한다. “A, B, C……” 부터 가르치는 것이다. 이들의 사제관계가 매우 피상적이고 지속되지 못한 것은 이 형식을 가정교사로 초빙한 것이 아니라 사위감으로 고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이 해결되는 것은 삼랑진 여관방에서이다. 부부가 될 약혼자 사이의 갈등조차도 사제관계의 회복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무정」의 특이성이자 이 시대의 가능성인 셈이다.
(2) 형식과 하숙집 노파의 관계 ‥‥ 하숙집 노파는 그야말로 무식한 구세대의 여인인데, 소실에서 쫒겨난 그런 여인이다. 사고무친인 고아출신의 이형식가 같은 처지의 노파 사이를 잇는 끈은 사제관계인 것이다. 즉 지식이 그 매게로 되어 있다.
(3) 월화와 영채의 관계 ‥‥ 월화는 지조있는 평양기생의 전형으로서 사나이다운 사나이가 없음을 탄식한다. 월화가 사나이다운 사나이로 존경하는 인물은 평양 대성학교 교장 함상모(사실은 안도산)뿐이다. 월화는 영채를 동반하고 함교장의 연설을 들으러 다닌다. 함교장의 감화를 받은 월화는 그 감화를 영채에게 이어주었다. 영채의 스승은 월화였다. 영채가 기생생활 7년동안 수절하며 형식을 기다린 것도 월화가 준 가르침의 힘에 의해서였다.
(4) 병욱과 영채의 관계 ‥‥ 「무정」의 사제관계가 작품 구성의 큰 전환점으로 작용되는 것은 병욱의 등장에서이다. 병욱의 등장으로 말미압아 「무정」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크게 가라진다. 「무정」의 전반부는 불과 4일간이다. 형식이 김장로 집에 가정교사로 부임한 첫날부터 영채가 죽고 선형과 약혼을 한다. 작자는 이 소설 후반부를 이으려면 영채 얘기를 계속해야 된다.어떻게 해야 새로운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큰 모험을 한 것이다. 근대소설답지 않게, 즉 전형적 고대소설의 방식인 “각설……”하는 전환방식을 도입하였다.
영채는 평양행 기차에서 동경유학생이며 음악을 전공하는 김병욱을 만난다. 영채의 신세타령을 들은 병욱은 대번에 그녀의 남성다운 성품으로 또 동정심으로 영채를 교육하기 시작하는데, 「무정」에서 매우 중요한 영채의 구제방식이 사제관계로의 전환에서 가능했음은 분명한 일이다. 영채의 타인과의 만남은 계속 하강적 상태였으나 병욱을 만나자 비로소 상승적인 것으로 되어, 구원의 빛으로 되었다. 구원은 새로운 지식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5) 형식과 모든 등장인물과의 관계 ‥‥ 이 대목은 삼랑진의 수해장면으 보고 다섯 사람의 결심으 모으는 곳이다. 삼랑진 수해로 기차가 불통되어 승객은 여관으로 들게 되고, 네 사람은 수재민구호에 나서, 의연금을 거두고 수해 취재차 내려온 기자 신우선도 합석한다. 수해의 원인을 따지고, 민족의 앞길을 밝히기 위해 외국에 가서 공부하여 돌아오자는 이야기가 전개됨에 이르러 개인의 사소한 오해나 감정은 초극된다. 여기서 이형식을 중심으로 하여 선형․영채․병욱이 모두 사제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대단치도 않아 보이던 이형식이 대단한 인격자로 우람하게 세 처녀위로 군림함으로써 비로소 네 사람의 감정은 하나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3.정결성 : 누이 콤플렉스의 구조
「무정」의 세 번째 구조층은 순진성 혹은 정결성이다. 작가 자신의 말대로 민족주의라든가 자유주의를 내세웠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런 주의는 극히 막연한 것이다. 「무정」속에 엄밀하게 배어 있는 이 순진성이 휘황하게 작품을 빛내고 있음은 이 작가가 참으로 당시 상승계층의 ‘있을 수 있는 의식의 최대치’를 포착한 드물게 보는 예외적 개인임을 입증한 것이다. 순진성, 소년적 단순성이야말로 당시의 젊은 계층의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이형식이 선형을 만나 선형을 자기의 누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제3장)과 어긴 기생 계향을 내 누이입니다에서 이 누이라는 이미지와 순결성은 동일한 것이면서 또한 생명의식 그것과 같이 정신을 앙양케 하고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형식에게 있어 콤플렉스는 순결성의 상징이다. 어린 기생 계향을 “내 누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더욱 이 사실이 고조된다. 그리고 이 누이 콤플렉스는 고아로 자란 작가 춘원의 전기적 사실에 깊이 뿌리내려진 것이어서 그 어느 감정보다 감정의 추가 깊이 내려간 것이다. 누이의 존재가 정결함과 순수함의 상징인 것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하나는 영채의 구도덕으로 대표되는, 절을 지킨다는, 유교적인 것의 으뜸 덕목에 연결되는 것이며, 기독교, 특히 한국이나 일본 등 후진국에 들어온 기독교의 청교도주의적 덕목인 순결성과 연결됨이 그 다른 하나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교의 으뜸 덕목인 절개와 기독교의 으뜸 덕목인 청교도주의적인 것을 은밀히 연결시켜 놓았던 것이며 그것이 바로 「 무정」의 모랄 감각이다. 「무정」의 심층구조에 깔린 이 두 덕목의 자연스런 결합이야말로 이른바 순결성․정결성의 정체이다. 그것은 작가 춘원의 소년적 혹은 청년적 순진성이자 배움의 길에 있는 일반 독자들의 그것이기도 하다.
이형식은 학문에, 명예에, 성공에, 교사노릇에 열중하여 자주 순진성을 잃었다가 영채로 말미암아 그 순진성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이 누이 콤플렉스는 평양에서 계향을 만났을 때에 더욱 고조된다. 계향을 만나고, 은인인 박진사의 무덤을 보는 일을 통해 이형식의 마음은 순진성을 회복하기에 이른다. 그 순진성을 회복하자, 그의 마음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이형식의 생명감이자 작품 「무정」의 생명감이기도 하다.
또한 평양서 돌아오는 밤차 속에서 전개된 우주관은 기독교적 사상을 포기함으로써 획득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청교도주의 혹은 정결사상을 포기함으로써 쟁취된 해방감 같은 것이었다. 그러기에 누이 콤플렉스라는 정결성에의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과 그것을 초극하여 자기 나름의 청정한 우주관을 만들어 내는데서 솟아나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은 둘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바로 생명력, 생명의 감각 그것이었다.
4.한의 구조
「무정」을 「무정」이게끔 하는 네 번째 구조층은 한이라 규정된다. 그것은 이 소설의 비중이 영채에 크게 놓여 있음을 새삼 일깨워주는 일이기도 하다. 「무정」의 애당초 구성은 영채와 형식만을 주축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정」전편을 통해 가장 기괴하고, 불쾌하고 또 우습고 참기 어려운 대목은 영채가 두 사람의 사나이에 의해 강간당하는 대목이다. 아들인 김현수와 파렴치한 교육자 배학감에 의해 강간당하게 하는 일은 사무치는 한이 아니면 안 된다.
작가는 청량사의 겁탈장면을 여러 모양으로 되풀이 상기시켜 놓았다. 이 사무치는 한은 다음 두 가지 사실로 더욱 고조된다. 배학감이나 김현수는 양심상 조금도 잘못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이형식의 무력함이다. 당장 나가서 “두 사람의 살을 뜯어먹고 뼈를 갈아마시고 싶었다”고 이형식은 생각했지만, 기껏해야 이형식이 할 수 있는 것은, 배학감을 향해서는 “여보, 배형. 이게 무슨 짓이요, 교육가로 강간이란 말이 웬말이요” 하며, 김현수를 향해서는 “여보, 당신은 귀족이요! 귀족이란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칭호는 아니지요.”
여기서 우리는 구시대의 가치관과 새시대의 가치관의 보이지 않는 대립과 그 대립의 자기모순을 똑똑히 볼 수 있다. 배학감과 김현수로 대표되는 새시대의 가치관은 물을 것도 없이 훼손된 가치관이며, 한편 박진사로 대표되는 훼손되지 않은 가치의 세계는 영채의 겁탈모양 새시대의 가치관에 의해 능욕된다. 기독교를 맹렬히 공격한 춘원이지만, 근대자본주의 문명을 일으킨 개신교의 청교도주의적 졍결성의 영향을 형식으로 하여금, 영채의 찢어진 치마와 피묻은 내의를 견디지 못하게 하였고, 박진사의 무덤의 흙과, 대동강에 시체가 되어 떠내려가는 영채의 시체의 이미지에 가슴을 쥐어 뜯게 했다. 그것은 구세대의 깊은 원한이자 망국 백성의 원한 그것이기도 했다.
III. 결 론
무정이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는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무정」이 생명적 진취도의 계층이 상승계층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이것은 시류적인 표층적 구조라 하며, 역사적 요구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는 「무정」은 상층적 계층의 가능한 문학적 장치중의 하나인 사제관계를 견고히 함으로서 오해나 갈등도 초극시켰다.
셋째는 누이 콤플렉스가 주는 순진성, 순결성, 신생성 등을 회복하여 자기 나름의 청정한 우주관을 창조하였다.
마지막으로 훼손된 시대이지만 정신적인 순결함인 정조가 능욕을 당한데 대한 비애나 원한을 개별적인 것에서 망국적으로 비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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