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석보(月印釋譜)
by 송화은율월인석보(月印釋譜)
옛, 헤아릴 수 없이 먼 전 세상 시절에 한 보살이 왕이 되어 계시어, 나라를 아우에게 맡기시고, (부처의) 도리를 배우러 밖으로 나아가시어 구담 바라문을 만나시어 자기의 옷(왕복)을 벗고, 구담의 옷을 입으시어 깊은 산에 들어가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고요히 앉아 참선하시다가, (자기가 다스리던)나라에 빌 먹으로 오시니, (예전 왕인 줄을) 모두 몰라보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소구담이라 (그담의 제자이므로) 하더라. - 보살의 출가-
보살이 성 밖의 사탕수수 밭에 불도를 닦는 깨끗한 집을 만들고 혼자 앉아 계셨는데, 도둑 오백명이 관청 재물을 훔쳐 정사 곁으로 지나가니 그 도둑이 보살의 전 세상 원수이더라. 이튿날 나라에서 도둑의 발자취를 밟아가서 그 보살을 (도둑을 오인하여) 잡아 나무에 몸을 꿰어 두었더니, 대구담 (보살의 선생)이 신통한 눈으로 보고 허공에서 날아와 묻되, 그대 자식 없더니, (이렇게 죽는 것은)무슨 죄이요? 보살이 대답하시되, 멀쟎아 죽을 나인데 자손을 의론하리요? 그 왕(보살의 아우)이 사람을 시켜 활로 쏘아 죽이니라. - 수도하던 보살의 죽음-
대구담이 슬퍼하여, (시체를) 염습하여 관에 넣고 피가 묻은 흙을 파 가지고 정사에 돌아와, 왼쪽 피를 따로 담고, 오른쪽 피를 따로 담아 두고 말하되, 이 도사가 정성이 지극하던 것이면 하늘이 마땅히 이피를 사람이 되게 하시리라. 열달 만에 왼쪽 피는 남자가 되고, 오른쪽 피는 여자가 되거늘, 성을 구담씨라 했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이으시니, 구담씨가 다시 일어나시니라. - 구담씨 탄생-
요점 정리
작자 : 세조, 수양대군(뒤에 세조)
연대 : 세조 4년(1458)
형식 : 운문과 산문 ('용비어천가'의 편찬 방식을 따라 한 줄거리의 '월인천강지곡' 몇 수를 먼저 싣고, 주석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을 뒤에 붙여 실었다.)
판본 : 초간본[후쇄본]으로는 권 1,2,9,10,13,14,17,18 중간본으로는 선조때 것으로 권1,2,7,8, 들이 남아 있다.
표기 : 1. 이 책의 편찬 때 '월인천강지곡'의 한자 배열을 국문과 한자의 위치를 바꾸었으며, 받침 없는 한자음에 'ㅇ'종성을 사용하였다.
2. '석보상절'은 대폭적인 첨삭, 문장의 수정, 권차의 변개등 거의 새로운 문헌으로 되어 있다.
내용 : 세종이 지은 '월천인강지곡'과 수양대군(뒤에 세조)이 지은 '석보장설'을 합하여 간행한 책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적은 글이다.
의의 : 1. 권 1 첫머리에 수록된 '훈민정음 언해'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함께 국어 연구에 쌍벽을 이룬다.
2'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직접 지은 것이고 '석보상절'은 국문으로 된 최초의 산문으로서,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동기 : 세조가 부왕인 세종과 소헌왕후 및 일찍 죽은 세자[뒤에 덕종으로 추존]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본한 것이다.
내용 연구
겁 : 헤아릴 수없을 만큼 긴 세월, 어떤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한 때에서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이라는 뜻이다.
옛 헤아릴 수 없이 먼 전 세상 시절에 한 보살이 왕이 되어 계시어, 전 세상 석가모니 부처의 모습
구담 바라문을 만나시어 자기의 옷을 벗고, 구담의 옷을 입으시어. 수도하기 위하여 속세의 인연을 끊었다는 뜻
이해와 감상
'월인 석보'는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세종의 '월인천강지곡'과 수양 대문(뒤에 세조)의 '석보상절'을 합본 한 것이다. 전자는 '용비어천가'와 더불어 악장의 쌍벽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며, 후자는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최초의 산문이며 대표적인 번역문학에 속하는 작품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석보상절'과 부합되는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를 악장체 형식으로 읊는 찬불가이며, '석보상절'은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를 산문체로 번역한 전기 문학인 것이다.
내용면에서는 억불 숭유라는 국시에도 불구하고 죽은 아내와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독실한 불심에 담아 낸 그들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몇 십만 겁전, 한 보살이 수도하기 위하여 왕위를 버리고 바라문교에 출가한 내용으로 '월인천강지곡' 제3장의 내용과 일치한다.(출처 : 오태현, 변재호, 유준기 공저 '고전문학' 동아출판사간)
심화 자료
월인석보 권20 초간본 발견
조선초 세조 5년(1459)에 한글로 간행된 찬불가집 <월인석보> 가운데 지금까지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던 권20 초간본이 새로 발견됐다. 이에 따라 전체 25권으로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월인석보'는 이제 권3, 5, 6, 16, 24 등 5권만 제외하고 모두 20권을 갖추게 됐으며 이 가운데 17권은 원본이고 3권은 번각본이다.
540여년만에 빛을 보게 된 <월인석보> 권20의 내용 가운데 첫 부분(오른쪽)과 불경 <태자수대나경>을 한글로 옮긴 한 대목.
한성대 문헌정보학과 강순애(54)교수는 “최근 민간인 소장자로부터 <월인석보>권20을 입수했으며 지난 28일 한성대에서 열린 서지학회 봄 학술발표회를 통해 이런 사실을 공개했다”고 2일 밝혔다.
보물 745호로 일괄지정된 <월인석보>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직후 나온 한글간행본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찬불가사들을 합쳐 다시 엮은 책이다. 특히 17번째 초간본으로 발견된 권20은 `월인천강지곡'의 노래들 가운데 여지껏 발견되지 않았던 제341곡부터 411곡까지 71곡의 가사가 실려있어 국문학사와 서지학 분야 등에서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에 따르면 권20은 석가모니가 수제자인 가섭에게 정법을 전수하는 대목을 시작으로 다른 제자 아난에게 효도의 도리를 설법하고, 석가가 전생에 부모에게 효도를 실천했다는 것을 밝힌 부분 등으로 짜여져 있다.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악장체 노래들을 중심으로 엮었으나 <석씨계고록><태자수대나경> 등 관련 불교경전들의 일부 내용도 번역해 덧붙였다.
(자료 출처 :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1/05/009000000200105022120023.html)
월인석보
1459년(세조 5)에 세조가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 釋譜詳節≫을 설명부분으로 하여 합편한 책. 목판본. 초간본 10권(권1·2·7·8·9·10·13·14·17·18) 8책과 중간본 4권(권21·22·23·25) 4책이 보물 제745호로 지정되었으며, 초간본 2권(권11·12)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합편을 함에 있어서 조권(調卷)도 다르고 내용에도 많은 첨삭을 가하는 등 상당한 변개를 행하였다.
먼저 조권을 보면 ≪석보상절≫ 권11과 권19의 내용이 각각 ≪월인석보≫ 권21과 권18에 나타나는가 하면, 같은 권13이 ≪석보상절≫은 ≪법화경≫ 권1, ≪월인석보≫는 ≪법화경≫ 권2,3의 내용을 담고 있는 등, 권11부터 권차(卷次)가 달라져 있다. 문장과 표기법을 보면 〈월인천강지곡〉은 한자와 독음 표기의 위치, 한자음 종성 ‘窮’과 협주(夾註)의 추가, 어구의 수정 등 부분적인 손질이 있었으나, ≪석보상절≫은 대폭적인 수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월인석보≫는 전혀 새로운 문헌이 되었다.
편찬동기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한다고 되어 있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 회한과 무상(無常)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석보상절≫로 미루어서 모두 24권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중간본까지 합쳐도 완질이 되지 못한다. 전하는 간본의 종류와 소장자, 영인사항은 다음과 같다.
(1) 권1·권2 2권1책. 초간본이 서강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2년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중간본으로는 1568년(선조 1) 희방사(喜方寺 : 경상북도 풍기)의 것이 전하는데, 책판(冊版)이 6·25 이전까지 보존되었다. 이 간본의 권1은 1960년 국어학회(國語學會) 고전총서로 영인되었다.
(2) 권7·권8 2권2책. 초간본(낙장 있음)이 동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으며, 1981년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1572년 비로사(毘盧寺 : 경상북도 풍기)의 것이 전하는데, 1957년 청사진본(靑寫眞本)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東方學硏究所)에서 축소 영인하였고, 권7을 1978년 동국대학교 동악어문학회(東岳語文學會)에서 영인하였다. 한편, 16세기 중엽의 복각(覆刻)으로 보이는 권8의 중간본이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육당문고(六堂文庫)에 있다.
(3) 권9·권10 2권2책. 초간본(낙장있음)이 양주동가(梁柱東家)의 구장(舊藏)으로 전하는데, 1957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하였다. 서울의 김민영이 소장하고 있다.
(4) 권11·권12 2권2책.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5) 권13·권14 2권2책. 초간본(낙장 있음)이 있으며, 1982년 홍문각(弘文閣)에서 영인하였다. 연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6) 권17·권18 2권1책. 초간본(낙장 있음)이 수타사(壽陀寺 : 강원도 홍천)에 소장되어 있는데, 1957년에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초간본으로 보림사(寶林寺 : 전라남도 장흥)에 권17만 소장되어 있는데, 수타사본의 낙장부분만 1972년 ≪한글≫ 150호에 영인되었다.
(7) 권21 1권2책. 중간본만 전하며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542년(중종 37) 광흥사(光興寺 : 경상북도 안동), 1562년(명종 17) 무량굴(無量戈 : 전라북도 순창), 1569년(선조 2) 쌍계사(雙溪寺 : 충청남도 은진)에서 복각하였다. 권21의 광흥사판을 1983년 홍문각에서 영인하였다.
(8) 권22 1권1책. 서울의 김종규소장으로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6세기 중엽 한 사찰에서 복각하였다.
(9) 권23 1권1책. 서울의 김종규소장으로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책은 〈월인천강지곡〉 기(其)497∼524까지 28수가 실려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내용을 해설처럼 싣고 있는데 ≪석보상절≫ 권23의 내용과는 다르다. 1559년 무량굴에서 복각한 것이다. 1963년 ≪동방학지 東方學志≫ 6집에 영인되었다. 〈李東林〉
(9) 권25 1권 1책.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에 소장되어 있다. ≪월인석보≫의 전체 권수가 몇 권으로 구성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는데, 보림사 사천왕상 복장에서 새로 제25권이 발견되어 ≪월인석보≫가 전체 25권으로 편찬된 것임이 밝혀졌다. 권 머리 부분에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탈락되어 있다.
이 〈월인천강지곡〉에 해당되는 ≪석보상절≫은 권24의 내용인데, 이 ≪석보상절≫의 내용을 ≪석가보≫ 권5와 ≪경덕전등록≫ 등에서 수정 보완하여 싣고 있다. 이어서 나오는 주석 부분에는 사분률(四分律)·현우경(賢愚經)·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다론(多論)·계단경(戒壇經)·대품(大品)·지론(智論)·갈마소(鞨磨疏)·십송률(十誦律) 등에서 인용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실린 〈월인천강지곡〉은 권 머리 부분과 마지막에 탈락되었기 때문에 몇 수가 실렸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 기 577부터 583까지 7수가 실려 있다. 이 책의 권말에는 〈월인천강지곡〉 기 582와 583을 싣고 여기에 대한 주석(註釋)이 한 장 분량만 남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탈락되었다.
제일 끝에 실린 〈월인천강지곡〉 기 583은 내용상 결론 부분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고, 이 부분의 설명이 ≪석가보≫ 권5의 내용 가운데 아육왕조팔만사천탑기(阿育王造八萬四千塔記)까지만 실려 있고 석가획팔만사천탑숙연기(釋迦獲八萬四千塔宿緣記)·석가법멸진연기(釋迦法滅塵緣記)·석가법멸진상기(釋迦法滅塵相記)의 내용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전체 내용 구성상 뒷부분에 월인천강지곡 4∼5곡을 포함하여 상당량의 내용이 탈락된 것(약 30여 장)으로 추정된다. 〈朴相國〉이 ≪월인석보≫는 한글 창제 직후에 간행된 산문 자료로서 국어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권1 앞에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이 실려 있어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이 책은 세종과 세조의 2대에 걸쳐 임금이 짓고 편찬한 것으로, 현존본에 나타난 판각기법이나 인출(印出) 솜씨 등을 보면 조선 초기 불교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당시에 편찬, 간행되었던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세조 때 다시 편집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한글 변천을 살피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조선 초기에 유통된 중요경전이 취합된 것이므로 당시 불교 경전의 수용태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月印釋譜와 關係佛經의 考察(李東林, 白性郁博士頌壽記念佛敎學論文集, 1959), 月印釋譜解題(閔永珪, 韓國의 名著, 玄岩社, 1969), 月印釋譜 第一·二 解題(鄭然粲, 影印 月印釋譜 第一·二, 西江大學校人文科學硏究所, 1972), 월인석보목판고(朴相國, 文化財 11, 1977), 中世語의 한글資料에 대한 綜合的考察(安秉禧, 奎章閣 3, 서울大學校圖書館, 1979), 月印釋譜 第七·八 解題(千惠鳳, 影印 月印釋譜 第七·八, 東國大學校出版部, 1981), 月印釋譜 第二十二에 대하여(金英培, 韓國文學硏究 8, 1985).(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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