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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덕송(牛德頌) / 본문 및 해설 / 이광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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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덕송(牛德頌) / 이광수

 

 본문

금년은 을축년(乙丑年)이다. 소의 해라고 한다. 만물에는 각각 다소의 덕(德)이 있다. 쥐 같은 놈까지도 밤새도록 반자위에서 바스락거려서 사람에게,

 

"바쁘다!"

하는 교훈을 주는 덕이 있다. 하물며 소는 짐승 중에 군자다. 그에게서 어찌해 배울 것이 없을까. 사람들아! 소해의 첫날에 소의 덕을 생각하여, 금년 삼백육십오 일은 소의 덕을 배우기에 힘써 볼까나.

 

특별히 우리 조선 민족과 소와는 큰 관계가 있다. 우리 창조신화(創造神話)에는 하늘에서 검은 암소가 내려와서 사람의 조상을 낳았다 하며, 또 꿈에서 소가 보이면 조상이 보인 것이라 하고 또 콩쥐팥쥐 이야기에도 콩쥐가 밭을 갈다가 호미를 분지르고 울 때에 하늘에서 검은 암소가 내려와서 밭을 갈아주었다. 이 모양으로 우리 민족은 소를 사랑하였고, 특별히 또 검은 소를 사랑하였다.

 

검은 소를 한문으로 쓰면, '청우(靑牛)' 즉 푸른 소라고 한다. 검은빛은 북방 빛이요, 겨울 빛이요, 죽음의 빛이라 하여 그것을 꺼리고 동방 빛이요, 봄빛이요, 생명 빛인 푸른빛을 끌어다 붙인 것이다. 동방은 푸른빛, 남방은 붉은 빛, 서방은 흰 빛, 북방은 검은 빛, 중앙은 누른빛이라 하거니와, 이것은 한족들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요, 기실은 우리 조상들이 생각해 낸 것이라고 우리 역사가(歷史家) 육당(六堂)이 말하였다고 믿는다. 어쨌거나 금년은 을축년이니까, 푸른 소 즉 검은 소의 해일시 분명하다. 육갑(六甲)으로 보건대, 을축년은 우리 민족에게 퍽 인연이 깊은 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검은 빛 말이 났으니 말이거니와, 검은 빛은 서양 사람도 싫어한다. 그들은 사람이 죽은 때에 검은 빛을 쓴다. 심리학자의 말을 듣건대, 검은 빛은 어두움의 빛이요 어두움은 무서운 것의 근원이기 때문에 모든 동물이 다 이 빛을 싫어한다고 한다. 아이들도 어두운 것이나 꺼먼 것을 무서워한다.

 

어른도 그렇다. 캄캄한 밤에 무서워 아니하는 사람은 도둑질하는 양반밖에는 없다. 검은 구름은 농부와 뱃사공이 무서워하고, 검은 까마귀는 염병 앓는 사람이 무서워하고, 검은 돼지, 검은 벌레, 모두 좋은 것이 아니다. 검은 마음이 무서운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요, 요새 활동 사진에는 검은 손이 가끔 구경꾼의 가슴을 서늘케 한다. 더욱이 우리 조선 사람들을 수십 년 이래로 검은 옷을 퍽 무서워했다.

 

그러나 검은 것이라고 다 흉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검어야만 하고, 검을수록 좋은 것이 있다. 처녀의 머리채가 까매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추운 때에 빨간 불이 피는 숯도 까매야 좋다. 까만 숯이 한 끝만 빨갛게 타는 것은 심히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처녀들의 까만 머리채에 불같은 빨간 댕기를 드린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아름답거니와,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와 하얀 얼굴에 까만 눈과 눈썹도 어지간히 아름다운 것이다.

 

빛 타령은 그만 하자, 어쨌거나 검은 것이라고 반드시 흉한 것이 아니다. 먹은 검을수록 좋고, 칠판도 검을수록 하얀 분필 글씨와 어울려 건조 무미한 학교 교실을 아름답게 꾸민다. 까만 솥에 하얀 밥이 갓 ?아 구멍이 송송 뚫어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하얀 간지에 사랑하는 이의 솜씨로 까만 글씨가 꿈틀거린 것은 누구나 알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구태여 검은 소라고 부르기를 꺼려서 푸른 소라고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푸른 하늘, 푸른 풀 할 때에는, 또는 이팔 청춘이라 하여 젊은것을 푸르다고 할 때에는 푸른 것이 물론 좋고, 풋고추의 푸른 것, 오이지에 오이 푸른 것도 다 좋지마는, 모처럼 사온 귤 궤를 떼고 본즉, 겉은 누르고 큰 것이나 한 갈피만 떼면 파란 놈들이 올망졸망한 것이라든지, 할멈이 놀림 빨래를 망하게 하여 퍼렇게 만든 것이며, 남편과 싸운 아씨의 파랗고 뾰족하게 된 것은 물론이요, 점잖은 사람이 순사한테 얻어맞아서 뺨따귀가 퍼렇게 된 것 같은 것은 그리 좋은 퍼렁이는 못 되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태여 검은 소를 푸른 소로 고칠 필요는 없다. 검은 소는 소대로 두고 우리는 소의 덕이나 찾아보자.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마라 하였으나, 대개는 속마음이 외모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도 쥐를 보고 후덕스럽다고 생각은 아니할 것이요, 할미새를 보고 진중하다고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돼지를 소담한 친구라고는 아니할 것이다. 토끼를 보면 방정맞아는 보이지만 고양이처럼 표독스럽게는 아무리 해도 아니 보이고, 수탉을 보면 걸걸은 하지마는, 지혜롭게는 아니 보이며, 뱀은 그리만 보아도 간특하고 독살스러워 구약(舊約) 작자의 저주를 받은 것이 과연이다 ― 해 보이고, 개는 얼른 보기에 험상스럽지마는 간교한 모양은 조금도 없다. 그는 충직하게 생겼다.

 

말은 깨끗하고 날래지마는 좀 믿음성이 적고, 당나귀나 노새는 아무리 보아도 경망꾸러기다. 족제비가 살랑살랑 지나갈 때에 아무라도 그 요망스러움을 느낄 것이요, 두꺼비가 입을 넓적넓적하고 쭈그리고 앉은 것을 보면, 아무가 보아도 능청스럽다. 이 모양으로 우리는 동물의 외모를 보면 대개 그의 성질을 짐작한다. 벼룩의 얄미움이나 모기의 도심질이나 다 그의 외모가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소는 어떠한다. 그는 말의 못 믿음성도 없고, 여우의 간교함, 사자의 교만함, 호랑이의 엉큼스럼, 곰이 우직하기는 하지마는 무지한 것, 코끼리의 추하고 능글능글함, 기린의 오입쟁이 같음, 하마의 못 생기고 제 몸 잘 못 거둠, 이런 것이 다 없고, 어디로 보더라도 덕성스럽고 복성스럽다. '음매'하고 송아지를 부르는 모양도 좋고, 우두커니 서서 시름없이 꼬리를 휘휘 둘러,

 

"파리야, 달아나거라, 내 꼬리에 맞아 죽지는 말아라."

 

하는 모양도 인자하고, 외양간에 홀로 누워서 밤새도록 슬근슬근 새김질을 하는 야은 성인이 천하사(天下事)를 근심하는 듯하여 좋고, 장난꾼이 아이놈의 손에 고삐를 끌리어서 순순히 걸어가는 모양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 같아서 거룩하고, 그가 한 번 성을 낼 때에 '으앙'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릅뜨고 뿔이 불거지는지 머리가 바수어지는지 모르는 양은 영웅이 천하를 취하여 대로(大怒)하는 듯하고 좋고, 풀밭에 나무 그늘에 등을 꾸부리고 누워서 한가히 낮잠을 자는 양은 천하를 다스리기에 피곤한 대인(大人)이 쉬는 것 같아서 좋고, 그가 사람을 위하여 무거운 멍에를 메고 밭을 갈아 넘기는 것이나 짐을 지고 가는 양이 거룩한 애국자나 종교가가 창생(蒼生)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바치는 것과 같아서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상을 위하여 일하기에 등이 벗어지고 기운이 지칠 때에, 마침내 푸줏간으로 끌려 들어가 피를 쏟고 목숨을 버려 내가 사랑하던 자에게 내 살과 피를 먹이는 것은 더욱 성인(聖人)의 극치인 듯하여 기쁘다. 그의 머리에 쇠메가 떨어질 때, 또 그의 목에 백정의 마지막 칼이 푹 들어갈 때, 그가 '으앙'하고 큰 소리를 지르거니와, 사람들아! 이것이 무슨 뜻인 줄을 아는가,

 

"아아!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이다.

 

소를 느리다고 하는가. 재빠르기야 벼룩 같은 짐승이 또 있으랴. 고양이는 그 다음으로나 갈까. 소를 어리석다고 마라. 약빠르고 꾀잇기로야 여우같은 놈이 또 있나. 쥐도 그 다음은 가고, 뱀도 그만은 하다고 한다.

 

"아아! 어리석과저. 끝없이 어리석과저. 어린애에게라도 속과저. 병신 하나라도 속이지는 말과저."

 

소더러 모양 없다고 말지어다. 모양내기로야 다람쥐 같은 놈이 또 있으랴. 평생에 하는 일이 도둑질하기와 첩얻기 밖에는 없다고 한다. 소더라 못났다고 말지어다. 걸핏하면 발끈하고 쌕쌕 소리를 지르며 이를 악물고 대드는 것이 고양이, 족제비, 삵 같은 놈이 있으랴. 당나귀도 그 다음은 가고, 노새도 그 다음은 간다. 그러나 소는 인욕(忍辱)의 아름다움을 안다.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기와, '원수를 사랑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 할 줄을 안다.

 

소! 소는 동물 중에 인도주의자(人道主義者)다. 동물 중에 부처요, 성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만물이 점점 고등하게 진화되어 가다가 소가 된 것이니, 소 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거니와, 아마 소는 사람이 동물성을 잃어버리는 신성(神性)에 달하기 위하여 가장 본받을 선생이다.

 

 요점 정리

 작자 : 이광수

 형식 : 경수필

 특징 : 비유와 열거법

 성격 : 예찬적, 교훈적

 주제 : 소의 덕성 예찬

 내용 연구

 반자 : 방이나 마루의 천정을 평평하게 받드는 시설.

 간지 : 두껍고 질긴 종이로, 편지지로 사용하던 것.

 창생(蒼生) : 세상의 모든 사람.

 쇠메 : 쇠로 만든 무거운 방망이.

 간교(奸巧) : 간사하고 교활함.

 인욕(忍辱) : 욕되는 것을 참음.

 진화 : 생물이 외계(外界)의 영향과 내부의 발전에 의하여 간단한 구조에서 복잡한 구조로, 하등(下等)한 것에서 고등(高等)한 것으로 발전하는 일

 인도주의자 : 모든 인간의 인격적 평등을 인정하며 인류 전체의 행복을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사람으로 휴머니스트를 말함.

 신성(神性) : 신의 성격. 또는 신과 같은 성격.

 이해와 감상

  이광수(李光洙)가 지은 수필. 1925년 1월 ≪ 조선문단 ≫ 에 발표되었다. 을축년을 맞이하여 서두에 “ 소는 짐승 중에 군자다. ” 라면서 소의 덕을 기린 신년 수필이다. 작자는 소와 관련된 우리 민족의 전래 설화와 꿈풀이 등을 예로 들면서, 우리 민족은 여러 짐승 중에서 특히 검은 소를 전통적으로 사랑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한자로는 ‘ 청우(靑牛) ’ 라고 표기하는 검은 소는 곧 푸른 소로써 그 색깔의 상징은 동방, 봄, 생명을 뜻하는 것으로 밝혀놓았다. 한편으로는 색깔이 갖는 이중적인 성격을 우리 민족의 생활과 밀접한 사례를 들어 말하고 있는데 작자의 예리한 관찰력이 적절한 묘사를 통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요컨대 검은빛은 동서양이 모두 흉한 것이라고 하지만, 처녀의 머리채 · 눈과 눈썹 · 숯 · 칠판 · 솥 등과 같은 것은 검은빛을 띠어야 오히려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필에서 작자의 재치가 가장 번뜩이는 곳은 외양을 통하여 각종 동물의 성질을 유추해낸 대목이다.

 

쥐 · 할미새 · 돼지 · 토끼 · 고양이 · 수탉 · 뱀 · 개 · 말 · 당나귀 · 노새 · 족제비 · 다람쥐 · 여우 · 사자 · 호랑이 · 곰 · 코끼리 · 기린 · 하마 · 두꺼비 · 벼룩 · 모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짐승과 곤충의 외양 혹은 몸짓에서 작자가 기발하게 포착해낸 부정적인 성질은 소의 덕성스러움과 대조되어 한층 생동감과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작자는 소가 가진 덕성을 소의 울음소리, 파리를 쫓으면서 휘두르는 꼬리짓, 외양간에서의 느긋한 새김질, 걸음걸이, 성냄, 한가로운 낮잠, 짐지고 가는 모양, 밭갈기, 그리고 도살되어 피와 살을 인간에게 모두 바치는 소의 운명에서 찾고 있는데, “ 소는 인욕 ( 忍辱 )의 아름다움을 안다. ‘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 ’ 하기와, ‘ 원수를 사랑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 ’ 할 줄을 안다. ” 고 말하면서 신성에 근접한 동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작자는 소를 성인 · 예수 · 영웅 · 애국자 · 종교가 등에 비유하여 사람들이 동물에서 신성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소의 덕을 생각하고 배우도록 힘써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수필의 말미에 “ 소! 소는 동물 중에 인도주의자다. 동물 중에 부처요 성자다. ” 라고 하여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이 간직해야 할 성품을 암시하고 있다. 이 수필은 작자 특유의 계몽적 이성과 종교적 인생관을 엿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글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이광수(李光洙)  

  1892 ∼ 1950. 시인 · 소설가 · 평론가 · 언론인.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 · 장백산인(長白山人) · 고주(孤舟) · 외배 · 올보리 등. 익명은 노아자 · 닷뫼 · 당백 · 경서학인(京西學人) 등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 아버지는 종원(鍾元)이며, 어머니는 충주 김씨(忠州金氏)이다. 5세에 한글을 비롯하여 천자문을 깨우치고 외할머니에게 〈 덜걱전 〉 · 〈 소대성전 〉 · 〈 장풍운전 〉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8세 때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 사략 ≫ · ≪ 대학 ≫ · ≪ 중용 ≫ · ≪ 맹자 ≫ · ≪ 고문진보 ≫ 등을 읽고,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근 동리에서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끼다가 11세 때인 1902년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었다.

 

이듬해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박찬명 대령 집에 기숙하며 서기일을 맡아보았다. 1905년에 일진회 ( 一進會 )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 대성중학(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안창호 ( 安昌浩 )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는 중 동경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메이지학원의 분위기에 따라 청교도적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 선교사들의 성경 시간에서 익힌 기독교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홍명희 ( 洪命熹 ) · 문일평 ( 文一平 ) 등과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 소년 ≫ 을 발행하면서 시 · 소설 · 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09년 11월 7일에 〈 노예 奴隷 〉 , 18일에 일문 〈 사랑인가 〉 , 24일에 〈 호 虎 〉 를 쓸 정도로 습작에 열중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 정육론 情育論 〉 을 ≪ 황성신문 ≫ 에 발표하였다. 1910년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 해에 언문일치의 새 문장으로 된 단편 〈 무정 〉 을 ≪ 대한흥학보 ≫ 에 발표하였다.

 

그 해 7월에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혼인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였다. 오산학교 재직 때에는 톨스토이를 애호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가르쳤다고 하여 교계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13년 스토(Stowe,H.E.B.) 부인의 〈 검둥이의 설움 〉 을 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 말 듣거라 〉 를 ≪ 새별 ≫ 에 발표하였다. 그 해 11월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상해에 들렀다가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 신한민보 新韓民報 ≫ 의 주필로 내정되어 도미하려고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하였다.

 

김병로 ( 金炳魯 ) · 전영택 ( 田榮澤 ) · 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며 사상가 내지 교육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1915년 9월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한 뒤 이듬해 1916년 9월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계몽적 논설을 ≪ 매일신보 ≫ 에 연재하여 문명(文名)을 높이고, 이듬해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신문학사상 획기적인 장편 〈 무정 〉 을 연재하였다. 이어서 〈 소년의 비애 〉 · 〈 윤광호 〉 · 〈 방황 〉 을 탈고하고 ≪ 청춘 ≫ 에 발표하였다. 격심한 과로 끝에 폐환에 걸려 1917년 귀국, ≪ 매일신보 ≫ 특파원으로 남한 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떠났다.

1917년 두 번째 장편 〈 개척자 〉 를 ≪ 매일신보 ≫ 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 폐환이 재발하였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 간호로 위기에서 소생하였다. 전통적인 부조 중심의 가족제도와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 신생활론 〉 · 〈 자녀중심론 〉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북경으로 애정 도피를 떠났다. 그러나 11월 중순경 윌슨 미국 대통령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 · 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 독립신문 ≫ 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 ( 朱耀翰 ) · 박현환 등과 독서 · 정좌 · 기도를 함으로써 수양 생활에 힘썼다.

 

1921년 4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귀국, 선천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되자 이 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 개벽 ≫ 에 〈 소년에게 〉 를 게재한 것이 출판법 위반 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어서 ≪ 개벽 ≫ 에 〈 민족개조론 〉 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게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이 무렵 ≪ 원각경 圓覺經 ≫ 을 탐독하면서 단편 〈 할멈 〉 · 〈 가실 嘉實 〉 을 집필하였고, 김성수 · 송진우 ( 宋鎭禹 )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의 객원이 되어 논설과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 선도자 先導者 〉 를 ≪ 동아일보 ≫ 에 연재하다가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편완(中篇完, 111회)에서 중단되었다.

 

이 무렵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월하노사(月河老師)의 인도로 뒷날 ≪ 법화경 法華經 ≫ 에 심취하는 인연을 맺게 된다. ≪ 동아일보 ≫ 사설 〈 민족적 경륜 〉 (1923)이 물의를 일으켜 일시 퇴사하게 되었는데, 이 글은 이전에 물의를 일으켰던 〈 민족개조론 〉 과 함께 나라 잃은 원인을 국민성 자체의 약점으로 돌리는 한편, 문화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자치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의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 동아일보 ≫ 에 〈 허생전 〉 · 〈 재생 〉 (1924) · 〈 마의태자 〉 (1927) · 〈 단종애사 〉 (1928) · 〈 혁명가의 아내 〉 (1930) · 〈 이순신 〉 (1931) · 〈 흙 〉 (1932) 등을 연재하였다. 1940년 창씨개명 이후 이광수는 〈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 〉 를 비롯한 많은 논설과 〈 조선의 학도여 〉 등의 시, 〈 그들의 사랑 〉 등의 소설, 〈 성전 3주년 〉 등의 수필을 썼다.

또한 〈 반도민중의 애국운동 〉 등의 평론, 〈 자원병훈련소 〉 등의 방문기 등 모든 문학 장르에서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1943년부터 학병 권유의 글과 연설을 번갈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광수의 문학관은 “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 ” 는 작자의 말을 참고하더라도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그는 〈 무정 〉 을 ‘ 노일전쟁에 눈뜬 조선 ’ , 〈 개척자 〉 를 ‘ 한일합방으로부터 대전(大戰) 전까지의 조선 ’ , 〈 재생 〉 을 ‘ 만세운동 이후 1925년경의 조선 ’ , 〈 군상 群像 〉 을 ‘ 1930년대의 조선의 기록 ’ 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실주의문학을 지향하려 하였다. 이광수는 가운이 기울어짐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면서 청일전쟁을 겪었고, 부모를 잃은 뒤 동학당 일을 본 탓으로 일본 헌병에 쫓겨 고향을 떠났을 때가 노일전쟁 중이었다. 그는 오산학교 교원 시절에는 경술국치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 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3 · 1만세운동의 소식을 상해에서 들었는가 하면, 중일전쟁 발발시에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옥에 갇혔고, 광복 후에는 일제 말엽 훼절로 친일파라는 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였다. 6 · 25 중에는 젊은 시절부터 고생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생사불명, 거처불명의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는 민족근대사의 수난을 순교자처럼 받았고, 그것을 민감하게 소설 · 논설문 · 시가 · 수필류 · 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그의 원고매수는 8만매로 추량할 정도로 방대함.). 그의 직업은 교육자 · 언론인 · 민족운동가 등 다양하였으나 시종일관한 것은 작가이다. 흔히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 · 민족주의 · 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시대 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대체로 이광수의 초기 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연애를 고취하고,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 무정 〉 에서는 신교육문제를, 〈 개척자 〉 에서는 과학사상을, 〈 흙 〉 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그러나 이광수 연구자들은 그가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로 힘을 무산시켰다는 부정적 측면도 검토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인 면에서 그의 친일 행위는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 참고문헌 ≫ 春園硏究(金東仁, 新丘文化社, 1956), 春園李光洙(朴啓周 · 郭鶴松, 三中堂, 1962), 李光洙全集 1-20(李光洙, 三中堂, 1964), 韓國人과 文學思想(金鵬九 外, 一潮閣, 1964), 韓國近代文學硏究(金允植, 一志社, 1973), 現代韓國硏究-李光洙論-(李善榮, 民音社, 1976), 李光洙(김현 編, 文學과 知性社, 1977), 韓國近代小說硏究-李光洙-(尹弘老, 一潮閣, 1980), 崔南善과 李光洙의 文學(申東旭 編, 새문社, 1981), 李光洙小說硏究(丘仁煥, 三英社, 1983).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에 관한 우리 민족의 관념〕

소는 생구(生口)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말에서 식구는 가족을 뜻하고 생구는 한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말하는데, 소를 생구라 함은 사람대접을 할 만큼 소를 존중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소가 힘드는 일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며 소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소값이 비싸서 재산으로서도 큰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월 들어 첫번째 맞은 축일 ( 丑日 )을 소날이라 하여, 이 날은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쇠죽에 콩을 많이 넣어 소를 잘 먹였다.

 

그리고 도마질이나 방아질을 하지 않고 쇠붙이연장을 다루지도 않았다. 도마질을 하지 않는 것은 쇠고기로 요리를 할 때에는 으레 도마에 놓고 썰어야 하는데 소의 명절날이므로 이와 같은 잔인한 짓을 삼간다는 뜻이다.

 

방아는 연자방아를 의미하는데, 연자방아는 소가 멍에에 매고 돌리는 것이므로 자연히 소에 일을 시키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방아질을 하지 않는 것은 연자방아를 찧지 않던 풍속이 그 밖의 방아에까지 번진 것이다. 쇠붙이연장을 다루지 않는 것도 소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풍속이다.

 

한편, 우리 민속에는 기형이나 이상한 털색의 새끼가 태어나면 음양오행과 관련시켜 길흉을 예측하는 습속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84년 고타군주가 신라 사파왕에게 청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청우는 털색이 검은 소로 추정되는데, 중국 문헌에 의하면 늙은 소나무의 정이 청우로 된다고 한다. 따라서 청우는 선인·도인·성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소에 관한 일화·전설〕

우리는 소를 한 집안의 가족처럼 여겼기에 소를 인격화한 일화가 많다. 인의 사상에 따라 소를 인격화한 이야기로는 황희 ( 黃喜 )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황희가 길을 가다가 두 마리의 소가 밭을 가는 것을 보고 농부에게 묻기를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가느냐?” 하니 농부는 황희 옆으로 다가와서 귓속말로 “이쪽 소가 더 잘 갑니다.”라고 하였다. 황희가 이상히 여겨 “어찌하여 그것을 귓속말로 대답하느냐.”고 물으니, 농부는 “비록 미물일지라도 그 마음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니 한 쪽이 이것을 질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는 것이다.

 

또, 김시습 ( 金時習 )이 소의 꼴 먹는 것과 불자(佛子)가 설법을 듣는 것을 비교한 것 등도 있다. 또 소의 우직하고 인내력 있고 충직한 성품을 나타내는 전설이 있다.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에는 권씨라는 농부의 생명을 구하고자 호랑이와 격투 끝에 죽은 소의 무덤과 관련된 전설이 있고, 개성에는 눈먼 고아에게 꼬리를 잡혀 이끌고 다니면서 구걸을 시켜 살린 전설이 전해지는 우답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나경의 습속〕

우리 나라의 관동·관북지방에는 예로부터 나경(裸耕)의 습속이 있었다.나경이라 함은 정월 보름날 숫총각으로 성기(性器) 큰 남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어 목우(木牛)나 토우(土牛)라 하는 의우(義牛)를 몰고 밭을 갈며 풍년을 비는 민속이었다.

 

땅은 풍요의 여신이요 쟁기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다산력을 지닌 대지 위에 남자의 성기를 노출시킴은 풍성한 수확을 비는 뜻이었다.

 

이와 같은 풍습이 관동지방에만 있고 남쪽에 없었다는 것은 토질이 척박하여 곡식의 결실이 잘 되지 않는 데서 풍년을 비는 마음이 절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소싸움〕

두 소를 마주세워 싸우게 하고 이를 보며 즐기는 놀이로서, 보통 추석날에 벌인다. 싸움날 아침이 되면 소 주인은 소를 깨끗이 씻어준 뒤에 여러 가지 천으로 꼰 고삐를 메우고, 소머리에는 각색의 아름다운 헝겊으로 장식하며 목에 큰 방울을 달아준다.

 

순서에 따라 도감이 호명하면 주인이 소를 끌고 들어온다. 이때 소와 소 사이에는 포장을 쳐서 가려두어 미리 싸우지 않도록 한다.

 

승패는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거나 밀리는 소가 패하는 것으로 한다. 주로 경상남도지방에서 성행하였으며, 강원도·황해도·경기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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