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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溫達)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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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溫達)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얼굴은 울퉁불퉁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아름다웠다. 집이 가난하여, 항상 밥을 구걸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다 떨어진 옷과 해어진 신으로 시정(時井)을 오가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했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 하니, 왕이 농담삼아 늘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항상 울어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는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 보내야겠다.”

 

공주가 16살이 되어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자, 공주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내야겠다.’고 하시더니,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려 하십니까? 평민들도 거짓말을 안 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지존(至尊)하신 분께서 거짓말을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임금은 장난삼아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하심은 잘못되었으니, 저는 감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크게 노하여 말했다.

“네가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니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느냐?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라.”

 

공주는 금팔찌 수십 개를 차고 궁궐을 나와서 홀로 걸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으로 갔다. 집에는 눈멀고 늙은 온달의 어머니가 혼자 있었다. 공주는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묻자 온달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누추하니, 귀한 분이 가까이할 바가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남다르고,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마치 솜과 같습니다. 반드시 귀한 사람일 텐데 누구에게 속아서 이 곳에 왔습니까? 내 아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공주가 그를 찾아 산 밑에 이르렀을 때,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온달을 만났다. 공주가 그에게 마음 속의 생각을 말하자, 온달은 발끈 성을 냈다.

 

“이 곳은 어린 여자가 다니는 곳이 아니니 너는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고 귀신일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렸다. 공주는 혼자 뒤따라와서 사립문 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온달과 온달의 어머니에게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말했다. 온달은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나, 어머니가 말렸다.

 

“내 아들은 몹시 누추하여 귀한 분의 배필이 될 수 없으며, 우리 집은 몹시 가난하여 귀한 분이 거처할 곳이 못 됩니다.”

그러자 공주는 이렇게 말했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만 있어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만 있어도 바느질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마음만 맞으면 되지 부귀한 뒤에라야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공주는 금팔찌를 팔아서 밭과 집, 노비, 말과 소, 각종 그릇을 사들여 일상 생활의 용구를 모두 갖추었다.

 

“절대로 시정 사람이 파는 말은 사지 말고, 임금이 타던 말 가운데 병들고 여위어 내 버린 것을 가려 사오십시오.”

 

온달은 그 말대로 하였다.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으므로 말은 날로 살찌고 건강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멧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 지냈다. 그 날이 되어 왕이 사냥하러 나가자,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 때에 온달도 그 동안 기르던 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는 항상 남보다 빨리 달렸고, 짐승도 많이 잡았으므로, 따를 자가 없었다. 왕이 그를 불러서 이름을 들어 알고 놀라며 특별히 칭찬을 하였다.

 

그 때, 후주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으로 쳐들어 왔으므로,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쌔게 싸워 적군 수십 명을 베어 죽이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분격(奮擊)하여 크게 이겼다. 전쟁에서 세운 공을 논함에 모두 온달을 제일이라 했다. 왕은 가상히 여겨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맞아들이고 벼슬을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왕의 총애가 더욱 깊어지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양강왕이 왕위에 오르자 온달이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강 북쪽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백성들이 원통하게 여기며 늘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저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군사를 내 주신다면, 한 번 나가 싸워서 반드시 우리의 땅을 되찾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떠날 때 온달은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그런데 온달은 신라 군사와 아단성(峨旦城) 밑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중도에서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마음놓고 돌아가소서.”

 

그러자 드디어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요점 정리

작자 : 미상

갈래 : 설화(서사), 전(傳)의 형식의 설화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성격 : 역사적, 영웅적

문체 : 역어체, 설화체

구성 :

바보 온달 소개와 평강 공주의 혼인 결심

온달과 평강 공주의 혼인

온달의 입신 출세

온달의 전사와 후일담

주제 :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공주의 주체 의식과 온달의 입신양명

내용 : 고귀(高貴)한 신분의 공주와 미천(微賤)한 신분의 바보 청년의 감동적 만남

특징 : 설화를 인물 중심의 전기 형식으로 그려냈고, 여성 주체 의식과 신분 상승 욕구라는 민중 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음.

의의 : 역사적 사실의 문학적 형상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페미니스트(feminist)적인 냄새가 풍기는 작품이다.

출전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5 열전.

내용 연구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고구려 제 25대 왕. 평원왕(재위 599∼590)을 말함] 때 사람이다. 얼굴은 울퉁불퉁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아름다웠다[온달의 외모와 성격 직접 제시 / 인물 성격의 직접적 제시로 '우온달'이라고 불리는 원인에 해당]. 집이 가난하여, 항상 밥을 구걸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고[온달의 착한 심성을 알 수 있음], 다 떨어진 옷과 해어진 신으로 시정(時井)[인가가 많이 모인 곳]을 오가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우온달(愚溫達) :우리말 '바보 온달'을 그대로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했다[외양으로 인물을 평가하는 사람들]. - 인물의 제시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 하니, 왕이 농담삼아 늘 이렇게 말했다.[미래에 왕의 농언이 공주와 임금의 갈등 계기가 됨]

“네가 항상 울어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는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 보내야겠다.”[평강왕이 온달을 바라보는 시선도 세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 - 평강왕이 우는 공주에게 농담함

공주가 16살이 되어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자[공주와 왕의 갈등 계기가 됨], 공주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내야겠다.’고 하시더니,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려 하십니까? 평민들도 거짓말을 안 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지존(至尊)하신 분께서 거짓말을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임금은 장난삼아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하심은 잘못되었으니, 저는 감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대왕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직언하는 공주의 모습에서 고집있고, 신의를 중시하는 성격적 특성과 페미니스트적인 면모가 보이고, 인물들의 대화를 통한 성격의 간접적 제시]

 

하였다.

왕은 크게 노하여 말했다.

“네가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니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느냐?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라.” - 결혼을 둘러싸고 평강왕과 평강 공주가 갈등함 / 평강공주를 내쫓음

 

공주는 금팔찌 수십 개를 차고 궁궐을 나와서 홀로 걸었다[주체적 삶을 살려는 의지를 보임].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으로 갔다. 집에는 눈멀고 늙은 온달의 어머니가 혼자 있었다. 공주는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묻자 온달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누추하니, 귀한 분이 가까이할 바가 못 됩니다.[신분의 차이를 의식한 말]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남다르고,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마치 솜과 같습니다. 반드시 귀한 사람일 텐데 누구에게 속아서 이 곳에 왔습니까? 내 아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노모(老母)가 찾아온 공주에게 의구심을 가졌음을 보이는 대목]” - 평강공주가 궁궐을 빠져 나와 온달의 집을 찾아감

 

공주가 그를 찾아 산 밑에 이르렀을 때,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온달을 만났다. 공주가 그에게 마음 속의 생각을 말하자, 온달은 발끈 성을 냈다.

 

“이 곳은 어린 여자가 다니는 곳이 아니니 너는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고 귀신일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렸다. 공주는 혼자 뒤따라와서 사립문 밑에서 자고[공주의 주체적 의지를 드러냄],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온달과 온달의 어머니에게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말했다. 온달은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나, 어머니가 말렸다.

 

“내 아들은 몹시 누추하여 귀한 분의 배필이 될 수 없으며[신분의 차이를 들어 공주의 뜻을 거절함], 우리 집은 몹시 가난하여 귀한 분이 거처할 곳이 못 됩니다.” - 평강공주가 온달과 결혼하기 위해온달의 모친과 온달을 설득함

 

그러자 공주는 이렇게 말했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만 있어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만 있어도 바느질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마음만 맞으면 되지 부귀한 뒤에라야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사기(史記)에서 온 말. 본 뜻은 형제끼리 사이가 좋아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가난해도 마음이 맞으면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공주의 비범한 면모가 드러난 부분이다]

공주는 금팔찌를 팔아서 밭과 집[(田宅)], 노비, 말과 소, 각종 그릇을 사들여 일상 생활의 용구를 모두 갖추었다.

 

“절대로 시정 사람이 파는 말은 사지 말고, 임금이 타던 말[국마(國馬)[나라에서 기르는 말]] 가운데 병들고 여위어 내 버린 것을 가려 사오십시오.” [온달을 입신양명(立身揚名)하게 하려는 방안을 마련하려는 공주의 지혜로움이 나타나 있다. / 이 작품은 고귀한 신분의 공주가 미천한 신분의 바보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하고, 그를 영웅으로 성장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왜 '평강공주전'이 아니라 '온달전'이라고 한 이유는 현실적으로 이루기 힘든 신분 상승에 대한 민중들의 소망을 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평강 공주의 도움을 받아 장군이 되고 왕의 사위가 되어,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온달의 입신양명은 당대 민중들의 꿈이었을 것이다.]

 

온달은 그 말대로 하였다[바보 온달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련이 공주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음].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으므로 말은 날로 살찌고 건강해졌다. - 평강공주가 온달로 하여금 준마를 사서 기르게 함

 

고구려에서는 항상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멧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 지냈다. 그 날이 되어 왕이 사냥하러 나가자,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 때에 온달도 그 동안 기르던 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는 항상 남보다 빨리 달렸고, 짐승도 많이 잡았으므로, 따를 자가 없었다[온달의 잠재력이 말을 통해 드러남 / 온달에게 부정적이었던 왕의 인식이 바뀌는 계기]. 왕이 그를 불러서 이름을 들어 알고 놀라며 특별히 칭찬을 하였다. - 임금의 눈에 띄게 된 온달의 실력

 

그 때, 후주의 무제(武帝)[북주의 왕]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으로 쳐들어 왔으므로,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 들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쌔게 싸워 적군 수십 명을 베어 죽이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분격(奮擊)[세차게 힘을 떨치고 일어나 적을 공격함]하여 크게 이겼다. 전쟁에서 세운 공을 논함에 모두 온달을 제일이라 했다[온달의 입신양명]. 왕은 가상히 여겨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 사위다.”[온달을 사위로 인정하고 평강공주를 다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도 내포됨 / 왕과 공주의 부녀간의 갈등 해소]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맞아들이고[온달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함] 벼슬을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왕의 총애가 더욱 깊어지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 온달이 무공을 세워 황제게에 인정을 받음

양강왕이 왕위에 오르자 온달이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강 북쪽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백성들이 원통하게 여기며 늘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저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군사를 내 주신다면, 한 번 나가 싸워서 반드시 우리의 땅을 되찾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떠날 때 온달은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문경 새재 동북쪽의 고개]과 죽령(竹嶺)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그런데 온달은 신라 군사와 아단성(峨旦城)[현재의 아차산성] 밑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화살[(流矢 유시) : 목표에 빗나간 화살 또는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 여기서는 후자의 뜻]]에 맞아 중도에서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영구[시체를 넣은 관]가 움직이지 않았다[바보라고 놀림 받았던 온달이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조국에 대한 사랑과 강인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온달의 숭고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음. 비장미] 공주가 와서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마음놓고 돌아가소서.”[삶과 죽음에 대한 당대인의 의식이 담김]

 

그러자 드디어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공주의 위무(慰撫)에 의해 관이 움직였다는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의 깊이를 짐작하게 해 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 평강공주가 신라군과 싸움에서 전사한 온달의 혼을 위로함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얼굴은 웃음직하게 못났으나 마음씨는 고왔다[인물 성격의 직접적 제시로 '우온달'이라고 불리는 원인에 해당]. 집이 매우 가난하여 노상 밥을 빌어 모친을 봉양하며 해진 적삼에 헐어빠진 신발로 시정(市井)[인가가 많이 모인 곳] 사이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지목하여 '우온달(愚溫達)[우리말 '바보 온달'을 그대로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 인물의 제시

 

평강왕이 어린 딸아이가 울기를 좋아하니 농담으로,

"네가 노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란 다음에도 반드시 사대부(士大夫)의 아내 노릇은 못할 것이니 우온달에게 시집보내야 마땅하겠다."

하며 마냥 그렇게 말했다.- 평강왕의 농담

 

그녀의 나이 16세가 되자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출가시키려고 하니 공주는 아뢰되,

"대왕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고 하셨는데 이제 와서 무슨 까닭으로 말씀을 고치십니까? 필부도 식언(食言)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至尊)이시옵니까. 그러므로 왕자(王者)는 농담이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그릇된 것이니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대왕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직언하는 공주의 모습에서 고집있고, 신의를 중시하는 성격적 특성과 페미니스트적인 면모가 보이고, 인물들의 대화를 통한 성격의 간접적 제시]

하였다. 왕은 노하며,

 

"네가 나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으면 단연코 내 딸이 될 수 없다. 같이 살아서 무엇하느냐. 네 갈대로 가라."

고 하였다. - 평강왕이 공주를 내쫓음

 

이에 공주는 값진 패물 수십 개를 팔목에 차고 궁중을 나와 혼자 가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바로 그 집에 당도하여 앞 못 보는 늙은 어머니를 보고 앞에 가까이 가서 절하며 그 아들의 행방을 물으니 노모(老母)는 대답하되,

 

"우리 아들이 가난하고 또 배운 것이 없어 귀인과 가까이 할 자격이 못 되는데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아 보니 향취가 이상하고 그대의 손목을 잡아보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소. 반드시 천하의 귀인일 터인데 누구의 꼬임을 입어 여기에 왔소? 우리 아들은 주림을 참지 못하고 산으로 느티나무 껍질을 벗기러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오."[노모(老母)가 찾아온 공주에게 의구심을 가졌음을 보이는 대목]

하였다.- 온달의 집으로 감

 

공주는 나가 산 아래에 당도하여 온달이 느티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그와 더불어 속사정을 말하니 온달은 성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일 것이니 나를 박해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돌아보지 않으며 바로 갔다. 공주는 홀로 돌아와 그 집 사립문 밖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 모자(母子)와 더불어 자세히 말을 하니 온달은 의아하여 결정을 못 하고, 그 모친은,

"우리 아들이 지극히 천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우리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살 곳이 못 되오."

하였다. 공주는 대답하되,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재봉할 수 있다.'[<사기(史記)에서 온 말. 본 뜻은 형제끼리 사이가 좋아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가난해도 마음이 맞으면 함께 살수 있다는 뜻이다./ 공주의 비범한 면모가 드러난 부분이다]고 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부귀한 뒤에야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가졌던 패물을 팔아 전택(田宅)[논밭과 집]·노비(奴婢)·우마(牛馬)·기물(器物)[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그릇]을 사들여 살림을 두루 갖췄다. 처음 말을 사들일 적에 공주는 온달에게,

 

"아무쪼록 상인의 말은 사지 말고 국마(國馬)[나라에서 기르는 말]가 병들고 여위어 버림을 당한 것만을 가려서 사오세요."[온달을 입신양명(立身揚名)하게 하려는 방안을 마련하려는 공주의 지혜로움이 나타나 있다]

 

라고 부탁하므로 온달은 그의 말대로 하니 공주는 착실히 사육하여 그 말이 날로 살찌고 장대하여졌다. - 온달을 만남

고구려가 항상 봄 3월 3일 낙랑벌에 모여 사냥하고 잡힌 그 돼지·사슴으로 하늘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하므로 그 날이 되면 왕이 사냥 나오고 여러 신하 및 5부의 병정이 다 따르게 된다. 이 때 온달은 자기가 기른 말을 타고 수행하는데 그 말의 달림이 항상 다른 말보다 앞서고 잡은 것도 많아 다른 사람은 그와 같이 하는 자가 없으므로 왕은 불러 오라하여 성명을 묻고 놀라며 특이하게 여겼다. 때마침 후주 무제(後周武帝)[북주의 왕]가 군사를 출동하여 요동(妖東)을 치니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에서 마주쳐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랜 격투로 적군 수십여 명을 베니 모든 군사가 승세[이길 기세]를 타서 들이쳐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적에 온달로써 제일이라 하지 않는 자 없으므로 왕은 감탄하며,

 

"너는 내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아들인 다음 벼슬을 내려 대형(大兄)으로 삼으니 이로 인해 은총과 영화가 더욱 거룩하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 온달의 입신양명(立身揚名)

 

양강왕(陽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은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짜개서 저희들의 군·현을 만들었으므로 백성이 원통히 여겨 항상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니 원컨대 대왕은 저더러 어리석다 마시고 군사를 내주시면 한번 걸음에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

고 하니 왕은 허락하였다. 온달은 출전할 적에 맹세하되,

 

"계립현(鷄立峴)[문경 새재 동북쪽의 고개], 축령(竹嶺)의 서편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길을 떠나 신라군과 아차성(阿且城)[서울 동쪽의 산성] 아래서 싸우다가 유시(流矢)[목표에 빗나간 화살 또는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 여기서는 후자의 뜻]에 맞아 길에서 죽었다. 그를 장사하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으므로[바보라고 놀림 받았던 온달이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조국에 대한 사랑과 강인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공주의 위무(慰撫)에 의해 관이 움직였다는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의 깊이를 짐작하게 해 준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삶이 결정났으니 아! 돌아갈지어다."

하니 드디어 관이 들려서 장사하였다. 대왕은 듣고 애통하였다.- 온달의 죽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호열 옮김


이해와 감상

이 글은 『삼국사기』<열전(列傳)>에 수록된 작품이다. 신분이 고귀한 공주가 스스로 미천한 바보 총각을 찾아가 결혼을 하고, 남편을 영웅으로 성장시켜 공을 세우게 하는 과정이 실감과 짜임새를 갖추어 그려지고 있다. 공주는 과단성이 있을 뿐 아니라, 상상치 못한 제의를 납득하지 못하는 온달과 그 모친을 지성으로 설득하고 또 좋은 말을 고르게 하여 온달이 영웅으로 입신케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비범한 안목을 가진 여성이다. 아울러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자, "죽고 삶이 결정났으니 돌아가자."고 하여, 초탈한 모습까지 보여 이인(異人) 같기도 하다. 반면 공주의 도움이긴 하나 세상이 바보라 했던 온달에게 영웅적 능력이 잠재해 있었음이 밝혀져 사람을 신분이나 겉모습으로 판단할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자료출처 : 김윤식·김종철 공저 문학(상) 한샘출판사간)

 

이처럼 온달 설화는 신분이 고귀한 공주가 스스로 미천한 바보 총각을 찾아가 결혼을 하고 남편을 영웅으로 성장시켜 공을 세우게 하는 과정이 실감나고 짜임새 있게 그려지고 있다. 공주는 과단성과 비범성이 있는 인물이다. 공주의 신분으로서 과감히 궁궐을 버리고 온달을 찾아 나섰을 뿐만 아니라, 온달과 그의 모친이 신분의 차이를 들어 혼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들을 지성으로 설득하였고, 명마(名馬)를 고르게 하여 온들을 영웅으로 입신(立身)케 하는 등 특출한 지혜와 안목을 지녔다.

또 온달이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죽었을 때, 그의 관이 움직이지 않자, "죽고 삶이 결정이 났으니 돌아가자."고 하여, 초탈한 모습까지 보여줌으로써 이인(異人)의 풍모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반면 세상에서 바보라고 했던 온달이 공주의 도움을 받아 영웅적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사람을 신분이나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부분이다.

'온달'은 역사서인 '삼국사기' 열전의 하나이므로 그 내용은 객관적 사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유(類)이야기 자체는 설화로 민간에 전승(傳承)되었다 예컨대 숯을 구워 살아가던 총각이 우연히 찾아온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 살면서 부자가 되고 출세도 했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승되어 왔다.

심화 자료

온달 설화의 유형적 성격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조는 민간 전승을 통해서 형성된 설화가 편찬자에 의하여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구전되는 '바보 온달 전설' 은 문헌에서 전하는 것과 거의 같으나, 공주가 온달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고소설 '온달전'의 줄거리도 이와 같으나 문학적 형상성이 좋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열전에서 보다 민중 의식이 한층 두드러져 있다. 갈등 구조상 동일 유형인 민담에서는 세 딸을 둔 아버지와 자기 복에 먹고산다고 하여서 쫓겨난 셋째 딸과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숯구이 총각이 등장하므로, 인물과 배경은 다르나 그 구조와 주제는 전설과 다름없다. 화소들이 '무왕 설화(武王說話)'와 유사하여 동일 유형으로 간주되기도 하나, 이 설화가 남녀간의 신분적 갈등을 다룬 것이라면 '온달 설화'는 부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다.- 임재해, '온달 설화의 유형적 성격과 부녀갈등'에서

'온달전'과 '서동 설화'의 비교

공통점

남자 주인공은 신분이 낮고 여자 주인공은 공주임

공주가 궁을 떠나옴으로써 남자와 만남

공주의 지혜로 남자가 능력을 발휘하고 신분 상승을 이룸

차이점

남자의 영웅적 면모를 드러내는 신이한 탄생과 관련한 내용이 '온달전'에는 없고 '서동설화'에는 있음

'온달전'의 평강공주는 주체적으로 궁을 떠나 온달을 선택한 반면, '서동 설화'의 '선화공주'는 서동이 지은 동요 때문에 오해를 사서 궁에서 쫓겨난 후 서동을 만나게 됨

열전(列傳)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에서 확립된 문학의 한 양식이다. 인물의 행적을 서술하는 전(傳)의 한 형식으로, 특히 역사적으로 후세에 거울이 될 만한 특출한 인물들을 서술의 대상으로 하였다. 열전(列傳)은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正史)의 한 체계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문학과 역사의 중간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온달설화의 주제 의식

이 설화의 주된 주제는 부녀간의 갈등을 통해서 부권 중심의 전통적인 도덕률을 비판하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의 주체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여성 자체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성취와 아버지의 인정에 의한 것이므로, 일정한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그리고 온달설화는 유기적 대립구조로 형상화(形象化)되었을 뿐 아니라, 바보 온달과 울보 공주에 대한 표면적 인식의 한계가 온달 장군과 주체적 삶을 실현한 공주에 의하여 극복됨으로써 기존 질서의 허위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민중의식과 여성 의식을 드러내고 있어, 당대의 설화문학이 가지는 민중적 미의식과 역사를 개척하려는 민중적 역사 의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민중의 힘

평민이 왕족과 혼인하고 영웅이 됨

여성의 주체성

자신의 배필을 스스로 선택함

온달 이야기의 구비 문학적 특징

온달은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열전'의 하나이므로 그 내용은 객관적 사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 자체는 설화로 민간에 전승되었다. 예컨대 숯을 구워 살아가던 총각이 우연히 찾아온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 살면서 부자가 되고 출세도 했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승되어 왔다. 온달의 입장에서 보면 우연히 찾아온 공주로 해서 출세한 것이다. 반면에 공주쪽에서 보면 궁중에서 쫓겨나 미천한 총각을 만나 행복하게 살게 된 이야기이기도 하므로 '서동설화'에서의 선화공주의 사연과 비슷하다. (자료출처 : 김윤식·김종철 공저 문학(상) 한샘출판사간)

온달

?∼590(영양왕 1). 고구려시대의 장군.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몹시 가난해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거리를 다니며 걸식을 하였다. 그런데 용모가 파리하고 우스꽝스러워 사람들로부터 ‘바보 온달’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울기를 잘해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던 평강왕(일명 평원왕)의 놀림을 진실로 믿고 온달과의 결합을 고집하다 쫓겨난 평강왕의 공주를 처로 맞아들이면서 가세가 펴지게 되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에는 매년 3월 3일 군신(君臣) 및 5부의 병사 등이 낙랑(樂浪)의 언덕에서 사냥한 노획물로 천신(天神)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하는 국가적인 대제전이 있었다. 온달은 여기에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여해 뛰어난 사냥 솜씨를 발휘해 왕의 감탄을 샀다.

그 뒤, 북주(北周) 무제(武帝)군대의 요동 침입 때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북주군을 격퇴하는 대공을 세워 비로소 국왕의 사위임을 공인받고 대형(大兄)이라는 관위를 받음으로써 점차 고구려 지배세력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에 자원해서 참전했으나 아단성(阿旦城 : 지금의 峨嵯山城)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온달의 일대기는 설화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닌다.

그러나 벽화고분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자체의 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 6세기단계의 고구려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의 검토가 요청된다. 그의 출신은 고구려 최고지배세력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어 왕족과의 통혼권 밖에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평강왕의 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고, 나아가 국왕의 측근세력으로서의 자기위치를 신장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고구려 귀족세력간의 다툼으로 인해 고구려 지배질서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온달설화〉는 한낱 평민에서 부마에 오르고 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온달장군의 인물설화이며, 역사상 실존인물을 다룬 역사설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웅전설의 일반적인 구조처럼 온달의 죽음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다.

바보온달로 구전되는 인물전설은 강화도 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주로 전승된다. 그리고 갈등구조상 동일유형으로 파악되는 쫓겨난 딸과 숯구이 총각에 얽힌 민담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주제는 부녀간의 갈등을 통해서 부권중심의 전통적인 도덕률을 비판하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주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여성 자체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성취와 아버지의 인정에 의한 것이므로, 일정한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삼국사기≫의 온달열전은 민간전승을 통해서 형성된 설화가 편찬자에 의해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전되는 〈바보온달전설〉은 문헌에서 전하는 것과 거의 같으나, 공주가 온달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고소설 〈온달전〉의 줄거리도 이와 같으나 문학적 형상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열전에서보다 민중의식이 한층 두드러져 있다. 갈등구조상 동일 유형인 민담에서는 세 딸을 둔 아버지와 자기 복에 먹고 산다고 해서 쫓겨난 셋째 딸과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숯구이 총각이 등장한다. 인물과 배경은 다르나 유형구조와 유형적 차원의 주제는 전설과 다름없다.

화소들이 〈무왕설화 武王說話〉와 유사해 동일 유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설화가 남녀간의 신분적 갈등을 다룬 것이라면, 〈온달설화〉는 부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다. 사기와 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King Lear〉의 줄거리가 이와 비슷한 것을 보면, 서구에도 이와 같은 유형의 설화가 전승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설화는 유기적인 대립구조로 형상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보온달과 울보공주에 대한 표면적 인식의 한계가 온달장군과 주체적 삶을 실현한 공주에 의해 극복됨으로써 기존질서의 허위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민중의식과 여성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당대의 설화문학이 가지는 민중적 미의식과 역사를 개척하려는 민중적 역사의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1980∼1988), 溫達傳의 檢討(李基白, 白山學報 3, 1967), 온달설화의 유형적 성격과 부녀갈등(임재해, 女性問題硏究 11,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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