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옹패설에서
by 송화은율역옹패설에서
사간(司諫) 정지상은 이런 시를 지었다.
비 개인 긴 둑에 풀빛이 진한데,
남포에 임 보내니 노랫가락 구슬퍼라.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 건가?
해마다 이별의 눈물만 푸른 물결 더하거니.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하수진고)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연남 사람 양재가 일찍이 이 시를 베끼기를, '別淚年年漲綠波(별루년년창록파) '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 '작(作)'과 '창(漲)' 두 자는 모두 그 뜻이 원만하지 않다. 마땅히 이것은 '첨록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지상은 또 이런 시를 지었다.
땅이 푸른 하늘과 닿은 곳 멀지 않은데,
사람과 흰 구름이 한가롭게 마주 대하네.
뜬구름 흐르는 물 같은 나그네 절에 이르니,
빨간 잎 푸른 이끼 낀 절의 중은 문을 닫는다.
푸른 버들 아래 문 닫은 집 여덟 아홉 채,
밝은 달 가운데 발(簾)을 걷은 서너 사람.
위로 북두에 닿을 듯 삼각형 지붕,
허공에 높이 솟은 한 칸의 누대.
돌 위의 늙은 소나무에 한조각 달이 걸렸고,
하늘 끝 낮은 구름 밑에 천 점 산이 있네.
이 시인은 이 같은 시를 즐겨 썼다.
상서(尙書) 김신윤이 의종 경인년(1170) 9월 9일에 이런 시를 지었다.
임금의 수레 아래서 풍운이 일어나,
사람 죽인 것이 흩어져 있는 삼 베듯했네.
그러나 좋은 때를 저 버릴 수 없어,
흰 술에 국화를 띄우네.
이 시를 통해 당시의 일이 어찌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늙은이의 마음은 크고, 구애됨이 없어 범상하지 않다. (이하 생략)
옛 사람의 시는 눈앞에 보이는 경치를 그리고 있지만 뜻은 말 밖에 있으니, 말은 사라질 수 있으나 그 맛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령 도팽택이 말한,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송이 꺾어 들고,
우두커니 남산만 바라보네.
採菊東籬下 채국동리화
悠然見南山 유연견남산
라는 구절이나, 진간재의,
문을 여니 비가 왔다네,
늙은 나무도 반이나 젖었으니.
開門知有雨 개문지유우
老樹半身濕 노수반신습
라는 구절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나는 유독 '못 근처 언덕에 봄풀이 돋았네(池塘生春草)' 라는 글귀를 사랑한다. 거기에는 말로 전할 수 없는 묘미가 있다. 예전에 일찍이 여항 땅의 나그네로 있을 때에, 蘭草를 화분에 심어 선물로 준 사람이 있었다. 책상 위에 두고 손님을 응대하고 다른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것에게 향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밤이 깊어 고요히 앉았는데 밝은 달빛이 창가에 가득할 때 향기가 코를 찌르는 듯 풍겼다. 그 향기는 맑고 그윽하여 사랑할 만했지만 말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마음이 흔연해져 혼자 말하기를 "혜련(惠連)의 봄풀에 관한 시구와 같구나."라고 하였다.
(이하 생략)
요점 정리
작자 : 이제현
갈래 : 비평, 수필
주제 : 시평
내용 연구
현화, 자석: 눈동자.
금방 : 과거 급제자의 성명을 게시하는 금으로 만든 판.
혜련 : 사혜련의 형 사영운이 하루종일 시를 구상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사혜련이 나타나 ' 지당생춘초'라는 구절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해와 감상
이제현의 잡록집 '역옹패설' 중에서 시에 관해 언급한 부분 중 일부를 옮긴 것으로 현대적인 장르 의식이 없었던 옛날에는 수필과 비평의 구분이 없었고, 이 작품 대부분은 일종의 시비평서라고 할 수 있다.
심화 자료
이제현(李齊賢/1287~1367)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본관 경주(慶州).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역옹(翁)·실재(實齋). 초명 지공(之公). 시호 문충(文忠).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으며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등을 지냈다.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역임했다. 이듬해 사헌규정(司憲糾正), 10년(충선왕 2) 선부산랑(選部散郞), 이듬해 전교시승(典校寺丞)·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거쳐 12년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고 성균악정(成均樂正)·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儲監斗斛)을 거쳐 14년 원나라에 가서 조맹부(趙孟) 등과 고전을 연구하였다.
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이 되고, 20년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23년 풀려나게 하였다. 이듬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48년(충목왕 4) 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했고, 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翁稗說)》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역옹패설
고려 말기에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시화·잡록집. 4권 1책. 목판본. 1342년(충혜왕 복위 3) 56세에 환로(宦路)에서 은퇴하여 자기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한 책이다.
고려시대에 이 책이 간행되었을 것이나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현재 온전한 모습으로 열람할 수 있는 것으로는 1814년(순조 14) 경주에 거주하는 후손들에 의하여 간행된 ≪익재난고 益齋亂藁≫에 붙어 있는 것이 있다.
이 책을 ‘낙옹비설’이라 읽는 것이 저자의 뜻을 좇는 것이라 하는 학자도 있으나, ‘역옹패설’로 읽는 것이 현재는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 책의 체재는 전집·후집으로 나누어 각 집이 다시 1·2권으로 되어 있어, 모두 합하면 4권이 되는 셈이다.
전집에는 저자 자신의 서문이 있고, 권1에 17조, 권2에 43조의 역사·인물일화(人物逸話)·골계(滑稽) 등이 있다. 후집에는 저자 자신의 서문과 권1에 28조, 권2에 25조의 시화와 세태담(世態談)이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이제현은 고려가 몽고, 즉 원나라로부터 치욕을 당한 것에 대해 반성하는 한 방법으로 부당한 사대주의에 저항하고 있다.
전집 권1에서 그는 조정의 중신이 몽고어를 능숙히 구사할 줄 아는 역관 출신이라 해도 공식석상인 합좌소(合坐所)에서 역관의 통역도 없이 직접 몽고어로 원나라의 사신과 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민족 자존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그의 주체적인 자세를 반영한 것이다.
② 그는 전통성, 즉 민심의 기반이 없는 위조(僞朝)의 영화로운 생활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이 책에서 삼별초 정권을 부정적 입장으로 보아 위조라고 생각한 것에 기인한다.
즉 삼별초가 고려의 백성들을 협박하고 부녀를 강제로 이끌어 진도에서 비상 정부를 구축하였으므로 민심을 거역한 위조라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문감(鄭文鑑)이 삼별초 정권에서 승선이 되어 국정을 맡게 되자, 위조에서의 부귀보다 죽음으로써 몸을 깨끗이 지키고자 하였던 행위를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③ 무신정권의 전횡을 폭로하고 그 폐단을 고발하고 있다. 이제현은 오언절구의 시를 인용하여 주먹바람〔拳風〕, 즉 무신의 완력이 의정부를 장악하는 공포정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실인식 태도는 무인정권의 폐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 같다.
그는 예전에는 우리 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필적할 만큼 융성하였으나, 근래에 산중에 가서 장구(章句)나 익히는 조충전각(雕蟲篆刻:수식을 일삼는 것)의 무리가 많은 반면 경명행수(經明行修:경전공부와 심신수련)를 하는 사람의 수효가 적게 된 이유를 바로 무신의 난에서 찾고 있다.
곧, 학자들이 거의 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생명 보존을 위하여 깊은 산으로 찾아들어 중이 되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문풍(文風)이 진작되는 시점이 되어도 학생들이 글을 배울 만한 스승이 없어 도피한 학자였던 중들을 찾아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무신집권기가 초래한 반문화적 폐해를 단적으로 밝혀준 좋은 예일 것이다.
④ 이 책에는 고려 말기 문학론에 있어서, 용사론(用事論)과 신의론(新意論)의 현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현은 한유(韓愈)·이백(李白) 등의 당대(唐代) 시인들을 비롯한 유명한 중국 문인들의 시를 거론하기도 하고, 정지상(鄭知常)을 비롯한 우리 나라 시인들도 거의 망라해서 그들의 시에 대한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배척이나 악평은 삼갔다.
용사에 있어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단어의 사용은 권장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명의 사용도 실제정황과 일치하지 못할 경우에는 호된 비판을 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평태도는 시어의 현실성을 강조하였다는 측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역옹패설≫은 저자가 스스로 뒤섞여 어수선한 글로 열매 없는 피 같은 잡문이라 말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후대인들에게 작자 당대의 현실과 문학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남겨 준 요긴한 책이다.
또한, ≪파한집≫이나 ≪보한집≫의 성격을 계승하였으면서도, 이 책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양한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은 목판본 외에 1911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활자·양장본으로 출판된 바 있고, 1913년 일본 동경에서 영인되기도 하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益齋亂藁(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高麗名賢集 2, 1973), 韓國古典詩學史(全鎣大 外, 弘盛社, 1979), 낙옹비설과 비평문학(鄭炳昱, 한국고전의 재인식, 弘盛社, 1979), 饑翁稗說의 장르문제(崔信浩, 진단학보 51, 198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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