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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과 다프네 / 미상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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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과 다프네 / 미상



 

다프네는 아폴론의 최초의 애인이었다. 그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연애가 아니고, 에로스의 장난으로 이루어졌다. 어느날 아폴론은 이 소년이 활과 화살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피톤을 정복하고 득의양양하여 있던 때였다.

"얘야, 전쟁 때나 쓰는 그런 무기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거니? 그것은 그것을 쓸 만한 사람에게 줘라. 자, 봐! 내가 그 무기를 가지고 넓은 들 위에 유독(有毒)한 몸뚱이를 펼치고 있던 거대한 뱀과 싸워 거둔 승리를! 너 같은 어린애는 횃불을 가지고 불장난이나 하거라. 너희들이 늘 말하는 그 불장난 말이다. 그러나 건방지게 나의 무기에 손을 대지는 말아라."

이 말을 듣자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대답하였다.

"아폴론 어른, 당신의 화살은 다른 모든 것을 맞출지 모르나 내 화살은 당신을 맞출 걸요!"

이렇게 말하며 에로스는 파르나소스 산의 바위 위에 서서 서로 다른 사람이 만든 두 개의 화살을 전통에서 끄집어 냈는데, 하나는 애정을 일으키는 화살이고 하나는 그것을 거부하는 화살이었다. 전자는 금으로 되고 끝이 뾰족하였고 후자는 무디고 끝이 납으로 되어 있었다.

에로스는 납화살로 물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인 요정 다프네의 가슴에 쏘고 금화살은 아폴론의 가슴에 쏘았다. 그러자 바로 아폴론은 이 소녀를 열애하게 되었지만 다프네는 연애라는 것은 생각조차 싫어하게 되었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숲속을 쏘다니며 사냥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연애를 거는 남자가 많았으나, 그녀는 여전히 숲속을 쏘다니며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그들을 다 거절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종종 그녀에게 말하였다.

"사위도 보고 손자도 봐야 할 것이 아니냐?"

다프네에게 있어 결혼은 죄악이나 범하는 것같이 생각되었으므로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붉히면서 아버지의 목에 팔을 감고 말하였다.

"아버지, 제발 저도 아르테미스와 같이 결혼하지 않고 언제나 처녀로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승낙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말하였다.

"너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는 놓아 두지 않을 것이다."

아폴론은 그녀를 사랑하였고 수중에 넣으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전 세계에 신탁을 주는 그도 자기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다프네의 양 어깨에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늘어진 것을 보고 말하였다.

"빗질을 하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다우니 곱게 빗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는 별과 같이 빛나는 그녀의 눈과 가느다란 그녀의 입술을 보았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과 어깨까지 노출된 팔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노출되지 않은 부분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하고 상상하였다. 그는 다프네의 뒤를 쫓아다녔다. 바람보다도 빨리 달아나는 다프네는 아무리 그가 간청하여도 잠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말하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나는 원수가 아니오. 당신은 양이 늑대를 피하고 비둘기가 매를 피하듯이 나를 피하고 있으나, 제발 그러지 마시오. 내가 당신을 쫓아다니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오. 나 때문에 그렇게 달아나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서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오. 제발 좀 천천히 가시오. 나도 천천히 따를 것이니. 나는 시골뜨기도 아니고 무식한 농사꾼도 아니오. 나는 델포이와 테네도스의 왕이며 제우스가 나의 아버지오. 그리고 현재나 미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소. 나는 노래와 리라의 신이오. 나의 화살은 표적을 정확히 맞히오. 그러나 아, 나의 화살보다도 더 치명적인 화살이 나의 가슴을 뚫었군요. 나는 약의 신이고, 모든 약초의 효능을 알고 있소. 그러나 아, 지금 내가 앓고 있는 병은 어떠한 약으로도 고칠 수 없소."

다프네는 계속 달아났다. 그래서 아폴론은 할 말을 다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달아나는 그녀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돛이 바람에 나부끼듯 뒤로 늘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은 흐르는 물과 같았다. 아폴론은 자기의 구애가 거절되자 불타는 가슴에 더욱 걸음을 빨리하여 다프네를 뒤쫓았다. 그것은 마치 사냥개가 토끼를 추격하여 입을 벌리고 잡으려고 하는데 약한 토끼는 몸을 돌이켜 달아나는 것과도 같았다. 이렇게 아폴론과 다프네는 달렸다. 그는 사랑의 날개를 타고 그녀는 공포의 날개를 타고. 그러나 추격하는 아폴론이 더 빨라 그녀를 붙잡고, 헐떡이는 숨길을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내쉬었다. 힘이 빠진 다프네는 쓰러지면서 아버지에게 호소하였다.

"아버지 살려주십시오. 땅을 열어 저를 숨겨 주시든지, 아니면 이와 같은 위험을 가져온 저의 모습을 변하게 해 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사지는 굳어지고 가슴은 보들보들한 나무껍질로 뒤덮였다. 머리카락은 잎이 되고 팔은 가지가 되었으며 그녀의 발은 뿌리가 되어 땅 속을 파고들었다. 얼굴은 가지 끝이 되어 모습은 달라졌으나 아름다움만은 여전하였다. 아폴론은 깜짝 놀라 머뭇거렸다. 줄기를 만져 보니 새로운 껍질밑에서 살이 떠는 것 같았다. 가지를 포옹하고 나무에 키스를 퍼부었다. 가지들은 그의 키스를 받지 않으려는 듯 움츠렸다. 아폴론은 말하였다.

"그대는 이제 나의 아내가 될 수 없지만 나의 나무가 되게 하지. 나는 나의 왕관으로서 그대를 쓰려고 하오. 나는 그대를 가지고 나의 리라와 화살통을 장식하리라. 그리고 위대한 정복자들이 카피톨리움 언덕으로 개선 행진을 할 때 나는 그들의 이마에 그대의 잎으로 엮은 관을 씌우리라. 그리고 나는 영원의 청년이므로 그대도 또한 상록수일 것이며 그대의 잎은 시들어 떨어짐을 모를 것이오."

이미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는 감사의 뜻으로 머리를 숙였다. (출처 : 민문고 문학 교과서)

아폴론과 다프네

아폴론과 다프네

 홍수로 인해 지상은 진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그 덕분에 대지는 더 할 수 없이 매우 비옥해졌다. 그러자 그 흙 속에서 좋은 것, 나쁜 것 할 것 없이 온갖 종류의 수많은 산물이 산출되었다. 그중에서도 인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피톤이라고 불리는 큰 뱀이 파르나소스산의 동굴속에 잠입했다. 그런데 아폴론은 자기의 화살로 이 큰 뱀을 쏘아 죽였다. 아폴론은 전에 토끼나 산양처럼 약한 동물을 사냥할 때에만 이 화살을 사용했었다.

  이런 혁혁한 전과를 기념하기 위해 아폴론은 피톤 경기를 창설했다. 그리고 역기나 빨리 달리기, 도는 이륜차 경주에서 우승한 자에게는 너도밤나무 잎으로 만든 관을 씌워주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월계수는 아직 아폴론이 그의 나무로 채택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벨베데레라고 불리는 유명한 아폴론의 상은 피톤을 퇴치한 후의 이신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바이런은 《해롤드경의 순유》제4편 161절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보라, 표적을 놓치지 않는 화살의 신을,

생명과 시와 빛의 신을,

인간의 모습을 한 태양신을, 그리고

전투의 승리에 빛나는 그 이마를 ,

화살은 막 활을 떠났다, 신의 복수에 번쩍이는 화살이.

그의 눈에도 콧구멍에도,

적을 겁내지 않는 아름다움과 힘과 위엄이

전광처럼 반짝이고, 그것을 한번 언뜻 보는 것만으로도

천제를 현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폴론의 최초의 연인은 다프네였다. 그 사람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에로스의 심술 때문에 싹튼 것이었다.

  어느 날, 아폴론은 활과 화살을 가지고 놀고 있는 이 소년을 발견했다. 아폴론은 마침 피톤을 물리치고 의기양양해 있던 때였으므로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이 장난꾸러기야, 전쟁 때나 쓰는 그런 무기를 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냐? 그런 것은 그것을 쓸 만한 사람에게 줘라. 나는 이 무기로 저 큰 뱀을 해치웠어. 독을 품은 몸뚱이를 넓은 들판에 펼치고 있던 저 뱀을 말이다.! 너 같은 어린애는 횃불로 만족하기만 하면 돼. 이 꼬마야, 그리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소위 사랑의 불장난이나 하라구. 그러나 건방지게 나의 무기엔 손대지 말아라.'

  이 말을 듣고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폴론, 당신의 화살은 다른 모든 것을 명중했겠지만, 내 화살은 당신을 맞힐 겁니다. "

  그리고 에로스는 파르나소스산의 바위 위에 서서 화살통에서 서로 다른 공인이 만든 두 개의 화살을 끄집어냈다. 그중 하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화살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거부하는 화살이었다. 전자는 금으로 되어 있고 끝이 뾰족하며 후자는 무디고 끝이 납으로 되어 있었다.

  에로스는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 다프네라는 님프에게는 납화살을 쏘고 금화살로는 아폴론의 가슴을 쏘았다. 그러자 아폴론은 이 처녀를 열애하게 되었으나 다프네는 연애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어했다.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숲속을 뛰어다니며 사냥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남성이 그녀에게 구애를 했으나, 여전히 그녀는 숲속을 뛰어다니며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모두 거절해 버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위도 보고 손자도 봐야 할게 아니냐?"

  다프네는 결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여기고 질색하였으므로 아름다운 얼굴을 붉히면서 아버지의 목에 팔을 갈고 말했다.

  "아버지, 제발 저도 아르테미스처럼 결혼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처녀로 있게 해주세요." 하는 수 없이 승낙하면서 그녀의 아버지는 덧붙여 말했다.

  "너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다프네를 죽도록 사랑하게 된 아폴론은 어떻게든 그녀를 자신의 손에 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세계에 신탁을 주는 그도 자기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그는 다프네의 두 어깨에 아무렇게나 늘어뜨려진 머리칼을 보고 말했다.

  "빗질을 하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다우니, 곱게 빗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는 다프네의 눈이 별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 또 아름다운 입술도 보았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아폴론은 그녀의 손과 어깨까지 드러난 팔을 보고 감탄했다. 그러면서 드러나지 않은 부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그는 다프네의 뒤를 쫓았다. 다프네는 바람보다 더 빨리 달아나며 아폴론이 아무리 간청해도 잠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폴론이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오, 페네이오스의 따님이여, 나는 적이 아니오. 당신은 양이 늑대를 피하고 비둘기가 매를 피하듯이 나를 피하고 있으나, 제발 그러지 말아주오. 내가 당신을 쫓아가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오. 나 때문에 그렇게 달아나다가 혹시 돌에 걸려 넘어져서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되오. 제발 좀 천천히 가오. 나도 천천히 따라갈 것이니, 나는 시골뜨기도 아니고 무식한 농사꾼도 아니오. 제우스가 나의 아버지이고, 또한 나는 델포이와 테네도스의 왕이오. 그리고 현재나 미래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소. 나는 노래와 리라의 신이오. 나의 화살은 틀림없이 표적을 맞힌다오. 그러나 아……지금 나는 내 화살보다 더 치명적인 화살에 가슴이 꿰뚫렸소. 나는 의술의 신이어서 모든 약초의 효능을 알고 있소. 그러나 아! 지금 나는 어떤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려 괴로워하고 있소!"

  그러나 다프네는 계속 달아났다. 그녀는 아폴론의 말을 절반밖에 듣지 못했다. 달아나는 모습까지도 아폴론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모습은 바람에 돛이 나부끼는 듯했고, 뒤로 늘어뜨린 머리칼은 흐르는 물과 같았다. 구애를 거절당하자 더 이상 아폴론은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연정을 품고 속도를 내어 그녀를 바싹 뒤쫓았다. 그것은 마치 토끼를 쫓는 사냥개의 모습과 비슷했다. 아폴론이 입을 벌려 당장이라도 물려고 하면 이 약한 동물은 죽을 힘을 다해 그렇게 가까스로 그 이빨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신과 처녀는 계속 달렸다. 아폴론은 사랑의 날개를 타고, 다프네는 공포의 날개를 타고서, 그러나 추격하는 아폴론이 더 빨랐기 때문에 점점 다프네에게 근접하게 되었고, 헐떡이는 숨결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다프네의 힘은 점점 약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쓰러지게 되자 그녀는 아버지인 가의 신에게 호소했다.

  "아버지, 살려줘요. 땅을 열어 나를 숨겨줘요. 아니면 제 모습을 바꾸어 주세요. 이 모습 때문에 제가 이런 무서운 일을 당하고 있으니……."

  다프네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의 팔다리가 굳어지고 가슴은 부드러운 나무껍질로 뒤덮였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나뭇잎으로 변했고, 팔은 가지가 되었으며, 그녀의 다리는 뿌리가 되어 땅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가지 끝이 되어 형상은 달라졌으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깜짝 놀란 아폴론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줄기를 만져보니 새로운 나무껍질 밑에서 그녀의 몸이 떨고 있었다. 그는 가지를 포옹하고 힘껏 키스를 하려고 했으나 상대는 그의 입술을 피해버렸다. 아폴론은 말했다.

  "그대는 이제 나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나의 나무가 되게 하리라. 나는 그대를 나의 왕관으로 쓸 것이다. 나는 그대를 가지고 나의 리라와 화살통을 장식하리라. 그리고 위대한 로마의 장군들이 카피톨리움 언덕으로 개선행진을 할 때 그들의 이마에 나는 그대의 잎으로 엮은 화관을 씌우리라. 또한 영원한 청춘이야말로 내가 주재하는 것이므로 그대는 항상 푸를 것이며, 그 잎은 시들 줄 모르게 하리라."

  이미 월계수로 그 모습이 변해버린 다프네는 가지 끝을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아폴론이 음악과 시가의 신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어서 이상할 게 없지만, 의술 역시 이 신의 적능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점에 대해서 시인이자 의사였던 존 암스트롱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음악은 온갖 기쁨을 높이고, 온갖 슬픔을 가라앉히며,

모든 병을 몰아내고, 온갖 괴로움을 어루만져 준다.

그 때문에 고대의 현자들은

의약과 음악과 시가의 불가분의 힘을 숭앙했다.

  아폴론과 다프네의 이야기는 많은 시인들에 의해서 가끔 인용되고 있다. 에드먼드 윌러도 이것을 연가 '포이보스와 다프네에 이야기'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 연애시는 상대방 여성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이 시인의 명성을 널리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그가 저 불멸의 시 속에서 노래했던 것은

이를테면 성공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다만 장난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의 잘못을 고쳐주는 님프 이외에는 누구나

그의 정열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노래를 훌륭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구하지도 않은 칭찬을 획득한 포이보스처럼

그도 연인에게 덤벼들어 월계수를 끌어안았다.

 셸 리가 '아도네이스'에서 인용한 다음의 1절은 바이런이 비평가들과 처음 논쟁했을 때의 광경을 노래하고 있다.

사람의 뒤를 쫓을 때에만 대담한 늑대들아,

시체 위에 몰려들어 울어대는 비천한 까마귀들아,

지배자의 기치에는 충실한 독수리들아,

 

'황폐'가 먹고 남긴 것을 쪼아먹고는

깃에서 병독의 비를 뿌리는 자들아―이 무슨 꼴이냐,

현대의 피티오스가 저 아폴론처럼 금빛 활에서 화살 하나를 소고 미소지었을 때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던 저놈들의 꼴은!

이 약탈자들은 두 번째 화살을 유혹하지 않고,

자기들을 경멸하고

무릎 끓게 한 승리자의 발 밑에서 아양을 떨고 있다.



요점 정리

작자 : 미상/ 정성호 옮김

갈래 : 신화

성격 : 신화적, 낭만적,

제재 : 신들의 사랑

주제 : 아폴론과 다프네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줄거리 : 어느 날 아폴론은 에로스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놀린다. 이에 기분이 상한 에로스는 아폴론의 가슴에 사랑을 일으키는 화살을 쏘고, 이에 아폴로는 다프네라는 여성에게 사랑에 빠진다. 다프네를 사랑하게 된 아폴론은 그녀에게 끝없이 구애를 하지만 결혼을 죄악시하는 다프네는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달아난다. 아폴론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한 다프네는 신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간청하고 신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 그녀를 월계수로 만들어 준다.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는 감사의 뜻으로 머리를 숙인다.

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다프네 : Daphne는 그리스 신화에서 월계수(그리스어로 'daphn')를 의인화한 것으로 화관을 만들 때 쓰는 월계수 잎은 특히 아폴론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옛날부터 월계수를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펠로폰네소스의 테살리아 혹은 시리아의 전원에서 살았던 강의 신(라돈)의 아름다운 딸 다프네에 대한 아폴론의 사랑과 관련이 있다. 다프네는 아폴론을 포함하여 모든 애인을 거부했다. 아폴론 신이 계속 쫓아다니자 다프네는 대지의 여신과 아버지인 강(江)의 신에게 자기를 구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이 기도가 받아들여져 그녀는 한 그루의 월계수로 변했다. 아폴론은 시인들에게, 로마에서는 승리자에게 월계관을 주었다. 레우키포스도 다프네를 사랑했는데 아폴론의 질투로 죽임을 당했다.

아폴론 : Apollon은 (영)Apollo. 별칭은 Poibos(영어로는 Phoebus)으로 불려 지고 있고, 그리스 종교에서 다양한 기능과 의미를 지니는 신으로, 그리스의 모든 신들 중 가장 널리 숭상되고 영향력 있는 신으로 그의 본래 성질은 분명하지 않지만, 호메로스 시대 이래로 그는 신적인 거리를 지닌 신으로, 멀리서 메시지를 보내거나 위험을 경고해주고, 인간에게 그들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정화시켜 주며, 종교적인 법과 도시의 법령들을 주재하고, 예언과 신탁을 통해 인간에게 미래의 일과 그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뜻을 전달해 주었다. 신들조차 그를 두려워했으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레토만이 그의 존재를 견디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거리감·죽음·공포·두려움은 그를 상징하는 활에 집약되어 있다. 반면 그의 보다 부드러운 성격은 그의 또다른 상징물인 리라에서 보이는데 이는, 음악·시·춤을 통해 올림포스(신들의 거주지)와의 교류의 기쁨을 나타낸다. 또한 민간에서는 그의 별칭인 알렉시카코스('악을 막아주는 사람')가 시사하듯이 야생동물과 잔병에 대한 신성한 수호자로서 농작물과 가축의 신이기도 했다. 그의 별칭인 포이보스는 '밝다' 또는 '순수하다'는 의미로, 그가 태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견해가 널리 퍼졌다. 아폴론의 또다른 별칭은 노미오스('목동')였는데, 그는 제우스의 무기를 만들던 키클롭스들을 죽인 데 대한 벌로 페라이 왕 아드메토스의 마부와 목동이라는 천한 신분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리케이오스라고도 불렸는데, 이 별칭은 아마 그가 늑대들(lykoi)로부터 양떼를 보호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목동들과 양치기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음악을 즐겼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이 아폴론의 원래 역할이었다고도 주장했다.

아폴론은 모든 신들 중 가장 그리스적인 신이었지만, 그 기원은 분명 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 북부나 아시아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아폴론과 쌍둥이 누이인 아르테미스는 델로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아폴론은 피토(델포이)로 가서 그 지역을 수호하던 암룡 피톤을 죽였다. 그는 돌고래로 가장하여 크레타인의 배 위로 뛰어올라 선원들을 그에게 복종시킴으로써 그의 신탁소를 세웠다. 그리하여 피토는 돌고래(delphis) 사건 이후 델포이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예전에 그곳에서 숭상되던 땅의 여신인 가이아 대신 아폴론 델피니오스가 숭상되었다. 초기 그리스 시대(BC 8~6세기)에 델포이 신탁의 명성은 멀리 아나톨리아의 리디아까지 퍼져나가 그리스 전역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했다. 아폴론의 중개인 피티아는 50세가 넘는 그 고장의 여자로서 아폴론의 영감을 받아 아폴론의 주(主)신전에서 신탁을 전했다. 그러면 성직자들이 그 신탁들을 해석하고 운문으로 만들었다. 그리스 본토와 델로스 및 아나톨리아에도 아폴론의 다른 신탁소들이 있었지만, 델포이의 신탁소 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

아폴론을 기리는 그리스의 축제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8년마다 열리는 델포이 스텝테리온으로, 이 축제 동안에 소년이 피톤의 살해 장면을 재연하고 일시적으로 템페 계곡으로 추방되었다. 아폴론과 관련된 연애 사건들은 많지만 대부분 불행하게 끝난다. 다프네는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애쓰다가 월계수로 변했으며(그후 월계수는 그를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음), 코로니스(아스클레피오스의 어머니)는 부정한 행위가 드러나 아폴론의 쌍둥이 누이 아르테미스의 화살을 맞아 죽었으며, 카산드라(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딸)는 그의 구애를 거절한 끝에 진실한 예언들을 해도 아무도 믿지 않게 되는 벌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아폴론이 일찍부터 알려졌으며, 그리스에서처럼 주로 치료 및 예언과 연관되었다. 그의 신전 가까이에서 악티움 전투(BC 31)가 벌어졌기 때문에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크게 숭배했다. 미술품에서 아폴론은 수염이 없는 젊은이로 묘사되는데, 옷은 입고 있기도 하고 벗고 있기도 하며, 활이나 리라를 들고 있는 경우도 많다.

에로스 : Ero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으로 헤시오도스(BC 700년경에 활동)가 쓴 〈신통기(神統記) Theogony〉에 따르면, 에로스는 우주의 태초적 공허인 카오스의 아들로서 초기에 생긴 신이었다. 그러나 그후의 전설은 그를 성애(性愛)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우스이거나 아레스(전쟁의 신) 또는 헤르메스(신들의 전령)로 되어 있다. 에로스는 정열의 신일 뿐 아니라 풍요의 신이기도 했다. 에로스의 동생 안테로스는 상호적인 사랑을 관장하는 신인데, 이따금 에로스의 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에로스의 주요동료는 포토스와 히메로스(동경과 욕망)였다. 후세 작가들은 수많은 에로스가 존재한다고 가정했다(로마 신화의 아모르가 여러 개의 변형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임). 알렉산드리아의 시에서 에로스는 짓궂은 개구쟁이로 타락했다. 고대미술에서의 에로스는등에 날개가 달려 있고,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니는 미남 청년으로 묘사되었지만, 갈수록 점점 어려지는 경향을 보여 헬레니즘 시대에는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었다. 에로스 숭배의 중심지는 에로티디아가 열리던 보이오티아의 테스피아이에 있었다. 에로스는 또한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북쪽 벽에 있는 신전을 공유하기도 했다. 로마 신화의 큐피드(Cupid)에 해당한다.

피톤 : Pytho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뱀으로 스스로 신탁을 내리는 데 익숙해져 있던 피톤은 아폴론이 델포이에 자신의 신탁소를 세우는 것을 방해했거나 아폴론을 잉태한 레토를 괴롭혔기 때문에, 델포이에서 아폴론 신에게 죽음을 당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에는 이 뱀이 이름도 없고 암컷으로 나오지만, 나중에 피톤(피토는 델포이의 옛 이름이었음)이라는 이름의 수컷으로 나온다. 전설에 따르면 피톤은 가이아(대지)의 아들로서, 아폴론이 오기 전에 델포이에 신탁소를 갖고 있었다. 델포이에서 열린 피티아 제전은 아폴론이 피톤을 이긴 것을 자축하기 위해 시작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프로디테 : Aphrodite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으로 성애(性愛)와 미의 여신으로, 로마인들에게는 베누스가 된다. 그리스어로 아프로스(aphros)는 '거품'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프로디테는 우라노스(하늘)의 아들 크로노스가 아버지의 생식기(生殖器)를 잘라 바다에 던진 데서 생겨난 하얀 거품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사실 아프로디테는 바다와 항해의 안전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널리 숭배되었으며, 스파르타·테베·키프로스 등지에서는 전쟁의 여신으로도 숭배되었다. 그러나 사랑과 다산(多産)의 여신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결혼을 관장하기도 했다. 매춘부들은 아프로디테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생각했지만 그녀에 대한 공적인 숭배의식은 대체로 경건했고 엄격하기까지 했다.

많은 학자들은 아프로디테 숭배가 동양에서 전래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녀의 특징 중 많은 부분이 셈족에게서 유래한 것은 분명하다. 호메로스는 키프로스 섬이 아프로디테 숭배로 유명했다는 점에서 그녀를 키프로스인이라고 했지만, 호메로스 시대에 아프로디테는 이미 그리스화되어 있었으며 그 또한 아프로디테가 제우스와 그의 여자인 도도나의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여겼다. 〈오디세이아 Odyssey〉에서 아프로디테는 절름발이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와 어울리지 않는 결혼을 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미남인 전쟁의 신인 아레스와 연애하는 데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이들 사이에서 하르모니아가 태어났음). 인간들과도 여러 번 사랑에 빠졌는데, 그중 중요한 인물로는 트로이의 목동이었던 안키세스(그와의 사이에 아이네아스를 낳았음)와 미남 청년 아도니스(원래는 셈족의 자연신으로 이슈타르-아스타르테의 남편인 이슈타르)가 있다. 아도니스는 사냥중에 멧돼지에게 죽음을 당했으며, 아도니아 축제 때는 여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도니스 숭배는 저승세계의 특징을 보이며, 델포이에서는 아프로디테 역시 죽은 자들과 결부되었다.

아프로디테 숭배의 중심지는 키프로스 섬에 있는 파포스와 아마투스, 미노아의 식민지 키테라 섬이었는데, 키테라에서는 아프로디테 숭배가 선사시대부터 행해진 것 같다. 그리스 본토에서 아프로디테 숭배의 중심지는 코린트였다. 그녀는 에로스, 그레이스(자비), 호라(계절)와 밀접히 연관됨으로써 풍요의 촉진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그녀는 세상의 창조적 요소인 게네트릭스(Genetrix:산모)로서 널리 숭배되었다. 그녀를 수식하는 말인 우라니아(Urania:천상의 거주자)와 판데모스(Pandemos:모든 사람의)를 플라톤이 부정확하게 받아들여 지적이고 일반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실상 우라니아라는 명칭은 특정한 동양의 신들에게 쓰였던 경칭이며, 판데모스라는 명칭은 도시국가 내에서의 그녀의 지위를 나타낼 뿐이다. 비둘기·석류·백조 그리고 도금양(桃金孃)이 그녀의 상징이었다.

초기 그리스의 예술에서 아프로디테는 동양의 나체 여신상 또는 다른 여신들과 마찬가지로 입상·좌상으로 표현되었다. 아프로디테가 처음으로 독자적인 모습을 갖게 된 것은 BC 5세기의 조각가들에 의해서였다. 가장 유명한 조각은 프락시텔레스가 크니디아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으로, 그것은 뒤에 밀로의 비너스 같은 헬레니즘 걸작품들의 전형이 되었다

 

파르나소스 산 : Parnassus는 그리스 신화의 시의 신(神)인 아폴로와 뮤즈(Museu)의 영지인 산 이름.

아르테미스 : Artemi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야생동물·사냥·식물·순결·출산의 여신으로, 로마 신화의 디아나와 동일하다. 시골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던 여신이며, 지방에 따라 성격과 역할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님프들과 함께 산·숲·늪지를 춤추며 돌아다니던 야생적인 성격을 가진 여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테미스 숭배는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는 크레타 섬이나 그리스 본토에서 유행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방의 아르테미스 의식에 다른 신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지방 사람들이 아르테미스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기들의 자연신들과 동일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도 크레타 문명과는 다른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사냥꾼의 이상(理想)을 구현하는 그녀는 사냥감을 죽이기도 했지만 보호하기도 했다. 특히 어린 새끼들을 보호했으며, 그때문에 호메로스는 그녀를 '동물의 여주인'이라고 지칭했다. 항상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부드러운 화살'(gentle darts)로 여인들을 갑자기 죽게 하기도 했다. 이것은 오빠인 궁술가 아폴론이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남자들을 갑자기 죽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올림포스 산의 다른 신들의 역할이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전개되는 반면, 아르테미스는 주로 제사의식을 통해 전승되었다. 드리아스(나무의 요정)를 상징하는 처녀들이 춤을 추는 것은 아르테미스를 나무의 여신으로 숭배하는 제사의식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역할은 크레타의 종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에서 특히 유행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림나이아와 림나티스(호수의 여신)로 불리면서 물과 야생 채소를 감독하고 우물·샘물의 요정들인 나이아스들을 데리고 다녔다. 반도의 일부 지역에서 추는 아르테미스의 춤은 거칠고 음탕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밖의 지역에서 가장 일반적인 아르테미스의 모습은 동물의 여주인이다. 시인·예술가들은 보통 그녀가 수사슴과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제사의식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아티카에 있는 할라이 아라페니데스에서 벌어지는 타우로폴리아 축제에서는 남자의 목을 칼로 그어 떨어지는 피를 바치며 아르테미스 타우로폴로스(황소의 여신)를 숭배했다.

여러 학자들은 아르테미스가 원래 아시아의 대모신(大母神)과 비슷한 크레타 산맥의 어머니에서 비롯된 모신(母神)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예술로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반드시 원래 모습에 대한 종교적 해석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또한 그러한 단순화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아르테미스는 출산의 여신으로서 에일레이티이아와 자주 동일시되기도 하고 때로는 쿠로트로포스('간호사')로 불리기도 했지만, 산파와 간호사는 어머니와는 다른 것이다. 연애 및 임신은 아프로디테가 관장하는 분야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테미스의 님프들과 관련된 사랑 이야기들은 본래 모신이었을 여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호메로스 이후의 시들은 아르테미스의 순결을 강조했다. 호메로스의 송가 제5편에 따르면, 아프로디테와는 달리 그녀는 사냥, 춤, 음악, 그늘진 숲, 정의로운 사람들의 도시들에 기쁨을 느꼈다고 노래하고 있다. 도시생활에 관한 언급은 예외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정복되지 않는 야생성의 여신인 아르테미스가 성적 욕망, 길들이고 정복하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웠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르테미스의 분노는 잘 알려진 것인데, 이것은 신화가 인간에 대한 자연의 적대감을 그녀의 속성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조각가들은 아르테미스의 무자비한 분노를 주제로 삼기를 꺼렸으며, 비교적 부드러운 BC 4세기경의 정신이 만연할 때까지 아르테미스는 위대한 조각가들의 주제로는 인기가 없었다.

제우스 : Zeus는 고대 그리스 종교에서 최고신으로 하늘·기후 신으로 로마 신의 주피터에 해당한다. 천둥·번개·비·바람을 보내는 신으로 간주되었고 그의 전통적인 무기는 벼락이었다. 신과 인간의 아버지(지배자이자 수호자)라고 불렸다. 후에 그리스 신화로 흡수된 크레타 신화에 따르면, 티탄족 왕인 크로노스는 자식 중의 1명이 그를 권좌에서 밀어낼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잡아먹었다. 그러나 아내 레아는 제우스가 태어나자 배내옷에 돌을 싸서 대신 삼키게 하고 제우스를 크레타의 한 동굴에 숨겨놓았다. 그 동굴에서 제우스는 요정(또는 암염소) 아말테이아의 손에 키워졌으며 쿠레테(젊은 전사)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쿠레테들은 창검을 부딪치는 소리를 내어 제우스의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어른이 되자 제우스는 형제들인 하데스와 포세이돈의 도움을 받아 티탄족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크로노스를 권좌에서 몰아냈으며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형제들과 나누어가졌다.

하늘의 지배자인 제우스는 신들을 이끌고 기간테스족(가이아와 타르타로스의 후손)을 격퇴했으며, 동료 신들의 도움을 받아 그에 대항하는 여러 반란자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따라서 기후의 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 생각되었던 올림포스 산의 최정상에 하늘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른 신들도 그곳에서 제우스와 함께 살았으며 제우스의 뜻에 복종했다. 제우스는 올림포스 산 꼭대기에 앉아 전지(全知)의 힘으로 인간의 모든 일을 관찰하고 모든 것을 통치하며 선행은 상주고 악은 벌한다고 생각되었다. 제우스는 정의를 실행할 뿐 아니라 도시·가정·재산·여행자·손님·탄원자 등의 수호자였다.

제우스는 바람둥이로 유명했고 이때문에 아내 헤라와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여신이나 여인들과 수많은 정사를 가졌으며,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물의 모습을 취하곤 했는데, 예를 들면 헤라를 범할 때에는 뻐꾸기로, 레다를 범할 때는 백조로, 그리고 에우로파를 범할 때에는 황소로 변신했다. 자녀로는 티탄족 여신 레토와의 사이에 쌍둥이 남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스파르타의 레다와의 사이에 헬레네와 디오스쿠오리, 여신 데메테르와의 사이에 페르세포네가 각각 태어났고, 티탄족의 메티스를 삼킨 제우스의 머리에서 아테나가 태어났다. 또한 아내 헤라와의 사이에 헤파이스토스·헤베·아레스·에일레이티이아, 여신 세멜레와의 사이에 디오니소스가 태어났으며, 그밖에도 여러 아들과 딸이 있다.

그리스의 종교학자들은 제우스를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으로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아테나나 헤라 등의 강력한 지방신들과 비교할 때 제우스의 보편성은 오히려 그를 덜 중요한 신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제우스 헤르케이오스(집의 수호자) 상과 제우스 크세니오스(손님 접대자)의 제단이 각 집의 앞마당을 장식하고 있고 산꼭대기에 위치한 그의 제단에 순례자들이 참배하기는 했지만, BC 6세기말까지 아테네에는 제우스의 신전이 없었으며 올림피아에 있는 그의 신전도 헤라의 신전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예술작품에서는 턱수염이 나고 위엄 있는 키 큰 남자로 표현되며, 그의 가장 뚜렷한 상징물은 벼락과 독수리이다.

리라 : lira는 현악기로 배[梨] 모양이며 3~5개의 현이 있다. 리라는 중세 피들(fiddle)의 전신인 레베크(rebec)처럼 발칸 반도의 민속악기(예를 들면 불가리아의 가둘카, 에게 해의 리라, 유고슬라비아의 구슬라 등) 중 하나이며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조율법과 음역도 다양하다.

리라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말기 리르(lyre)의 한 형태(뜯는 현악기)인 리라(lyra)로 잘못 쓰였다. 그러나 피크(플렉트럼)로 뜯어 연주하는 그리스 리라와는 대조적으로 리라는 켜는 현악기에 해당하며, 9세기경 모든 유럽의 켜는 현악기의 기원이 된 아랍의 라바브(rabb)의 비잔틴형으로 나타났다. 이 비잔틴형 리라가 어떻게 서유럽으로 전해졌고, 변형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1~12세기 학자들은 종종 피들과 리라라는 말을 혼용했다. 리라는 평평한 줄감개판에 붙어 있는 줄감개가 악기의 뒤쪽에 있다는 점에서 중세 피들과는 비슷하지만 라바브나 레베크와는 다르다. 이탈리아 바이올린의 전신인 리라 다 브라초(lira da braccio)는 3~5개 선율현과 지판 밖에 2개의 드론(지속음 현)이 있는 15세기 피들이다. 리라 다 브라초의 저음악기는 리라 다 감바(lira da gamba) 또는 리로네(lirone)라 부른다.

나는 약의 신이고 - 고칠 수 없소 : 약의 신인 나도 다프네를 향한 불 같은 사랑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말이다.

카피톨리움 : Capitolium은 주신 제우스의 신전이 있음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이해와 감상

 그리스 신화의 특징은 신들도 사랑하고 질투하며, 동정심과 시기심을 지닐 뿐 아니라, 아이를 낳고, 자기 혈육을 극진히 사랑하는 등, 인간과 같은 감성,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과 인간이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인간이 신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인본주의 사상이 깔려 있다. 아폴론과 다프네는 신성성, 위엄성보다는 사랑을 바탕으로 흥미 있게 내용을 구성한 그리스 신화 중의 한 부분으로 신들도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며 질투하고 시기하는 인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우주 창조와 건국 등에 대한 서사적 내용이 아니라 신들도 인간처럼 인간의 사랑과 미움, 그리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심화 자료

헬레니즘(Hellenism)

('말하다',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hellenizein에서 유래)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사상·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대계.

헤브라이즘과 함께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헬레니즘은 19세기초 인도의 역사가 J. G. 드로이젠에 의해 정의되었다. 세계사 속에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서 연원된 독자성을 지닌 역사적 개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 정신에서 '그리스화한' 문화까지 포함한다.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죽음에서 로마 제국에 의한 이집트 합병(BC 323~30)까지의 대략 3세기에 걸친 기간이며, 지역적으로는 주로 고대 그리스 본토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뒤를 이은 여러 왕들에 의해 점령되고 지배되어 새로이 헬레니즘화한 땅에까지 이른다.

헬레니즘 문화는 한때 에게 해 주변의 전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카르타고 등의 다른 나라에까지 확산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서쪽은 영국, 동쪽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까지 뻗어갔다.

헬레니즘의 여러 국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는 달리 군주정체(君主政體)가 전형적인 정치형태였다. 헬레니즘 왕국 중 3대 강국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세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 왕국, 셀레우코스가 세운 시리아 왕국, 바빌로니아의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고노스의 자손에 의해 유지된 잔존 마케도니아 왕국이었는데, 이들 3국의 건국자는 모두 알렉산드로스 3세 휘하의 대표적인 장군이었다. 헬레니즘 시대를 정치적으로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즉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룩한 제국의 분열과 일련의 새로운 여러 국가의 건설이 이루어진 BC 323~280년, 세력균형, 주변지역에 대한 그리스 문화 및 그리스적 생활양식의 확대, 철학·과학의 우위 등을 특색으로 한 창조적 국면을 이룬 BC 280~160년, 동방 및 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정치적 쇠퇴와 자멸을 앞둔 BC 160~30년으로 나뉜다.

사회·경제

헬레니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농업이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리스가 경제·사회 생활의 중심이었다. 토착민은 사회·경제 활동에서 제외되었으며, 헬레니즘화한 상류층만이 참여했다.

사회

'그리스인의 디아스포라'(그리스와 에게 해에서 온 많은 그리스인 이민과 소수의 마케도니아 이민)의 소수 상류층이 관리와 육군·해군 및 궁정의 높은 지위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인·상인·공인·교사·의사·예술가·기술자로 일했다. 그리스인 또는 그리스의 문화를 받아들인 마케도니아인이었던 그들은 헬레니즘화한 동방인과의 혼혈로 이어졌고, 이들이 중산층을 대표했다.

경제

경제생활이 비교적 왕정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도시에서는 제조업 및 상업 부문에서 자유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군주정체 국가에서는 국가에 의한 경제체제가 결정적이었다. 국왕은 행정사무와 상비군을 유지하는 데 많은 경비를 필요로 했다. 상비군은 점점 증대되어, 국왕은 많은 용병의 유지와 육군·해군의 기술적 장비에 엄청난 재원을 조달해야 했다. 이때문에 국가재정과 일반경제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의 풍요한 재력은 페르시아의 재화를 유통시켜 새로운 경제적 상황을 빚어냈고, 많은 자본을 회전시킬 수 있는 무역과 상업을 증진시켰다. 그러나 BC 3세기 전반의 경제적 번영은 서서히 쇠퇴하여, BC 200년 이후에는 그리스의 빈곤화와 이집트의 통화팽창을 초래했다.

농업은 여전히 경제생활의 기반이었다. 사유지가 증가했으나, 국왕이 가장 넓은 토지의 소유자였다. 국왕이 직접 소유하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는 무거운 세금이 매겨졌다. 제조업은 변함없이 소규모 작업장에서 이루어졌다. 공업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량생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은 과세와 독점에 의해 이익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소금은 왕가의 독점 품목이었으며, 이집트에서의 대표적인 독점 물자는 기름·종이·곡물이었다. 사기업은 어느 정도 발달할 여지가 있었지만, 항만(港灣)은 대상(隊商)의 통로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관리·보호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국가경제기구가 특히 유명했으며 국왕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배자로 꼽혔다. 그러나 일반 농민의 생활은 여전히 빈곤했고,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낮았다.

 

헬레니즘 문화의 여러 가지 양상

지방마다 지방어가 발달했지만, 통일된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어를 공통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교육과 문학

초기에는 그리스 고전시대의 연속이었다. 수사학은 역시 헬레니즘적 교육의 지배적인 요소였다. 고르기아스·이소크라테스 등 전시대 이론가들의 기본적인 이념은 좋은 말은 좋은 사상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사학 교육의 복잡한 조직은 자칫 자화자찬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으며, 특히 문체가 화려하고 공허한 형식주의로 기울었다. 그러나 BC 1세기에 로도스 섬에는 건전한 수사학파가 존재해 로마의 위대한 변론가 키케로와 유명한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강렬한 영향을 주었다

문학에서는 놀이에 가까운 다양한 재능과 학식이 창조정신보다 중요시되었으며, 언어와 운율이 한층 중요시되었다. 문학과 그 관련 학문이 나란히 발달해 상호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테오프라스토스의 제자이며 10년 동안 아테네 귀족정치의 지배자였던 디미트리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알렉산드리아에 무세이온이라는 연구소를 세울 때 조력했다. 그것은 유명한 도서관과 함께 고전세계에 있어 학자·작가 들의 최대 집합소가 되었으며, 이 두 기관에서 근대 도서관과 대학 및 아카데미가 생겨났다. BC 3세기의 시인으로서 제1인자였던 칼리마코스는 이 도서관의 도서목록 책임자였다. 로도스 섬의 아폴로니오스는 장편 서사시 〈아르고나우티카 Argonautica〉에서 풍부한 상상력으로 호메로스의 전설을 쇄신하려는 시도를 했다. 한편 아라토스는 별에 관한 교훈서사시 〈현상 Phaenomena〉에서 헤시오도스의 전승을 써넣었는데, 이 책은 BC 4세기의 산문으로 된 논문에 기초한 것으로서 항해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 씌어졌다. 칼리마코스와 기타 시인은 찬가인 에필리아와 특징 있는 헬레니즘적 형식의 단시(短詩)인 에피그람을 썼는데, 이것은 이미 영웅의 업적에 관한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 풍자시는 BC 100년경까지 성행했으며, 위대한 시인이자 편집자인 멜레아그로스의 사화집 〈스테파노스 Stephanos〉은 이 시대에 생겨났다. 이 시대에 가장 잘 알려진 시인 테오크리토스는 사실적인 대화체로 씌어진 〈미모스(mimos)〉의 작가이며 〈전원시집 Idylls〉을 저술한 전원시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문학은 독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씌어졌고, 그 요구를 만족시켜야 했다. 또 대중적인 제례나 구경거리는 헬레니즘 세계에 넘칠 만큼 많았는데, 고전극 특히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이 자주 상연되었다. 그러나 연극을 지배한 형식은 새로운 희극이었으며, 여기에는 역시 종래의 등장인물과 습관적인 장면이 수반되었다. 희극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에게 호소용으로 전락하여 생기 없는 에로티시즘과 비정상적인 개인의 감정에 필요 이상의 흥미를 나타냈다. 상연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종의 극시인 헤론다스의 〈미미암비 Mimiambi〉는 풍자와 외설로 가득 찬 사실적인 대화편이었다. 로마 제국의 연극 공연물 중 가장 대중적인 형식이었던 팬터마임은 그 기원을 헬레니즘 시대에 두고 있다.

사서 편찬

알렉산드로스 3세의 공적은 전기적인 역사작가들이 선호하는 주제였으며, 그것은 사실에 입각한 작품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역사가로는 그리스의 티마이오스, 헬레니즘 시대의 폴리비오스가 있다. 폴리비오스는 정치가로서 역사의 유용성을 굳게 믿었으며, 윤리적 태도를 지켰다. 그는 로마와 아카이아 동맹의 열렬한 찬미자로, 서술에 다소 불공평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투키디데스 이후의 그리스 역사가 가운데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폴리비우스는 로마 제국의 확장을 전반적인 주제로 하여, 동시대의 역사와 동시에 세계사를 썼는데, 아무도 시도한 일이 없는 기술방법을 사용했다.

학문

폴리비우스의 역사 기술 방법은 역사학에 가깝다. 학문적인 사람은 아테네 연대기 작가이며 〈아테네 법 주석 Psephismaton synaggo〉의 편찬자인 크라테로스 같은 고전 작품 연구가였다. 알렉산드리아 사람은 많은 고전 작품을 보존하고 판독 가능한 문헌을 정확히 입증했다는 점에 공적이 있다. 이리하여 이 시대에 고전문학이 탄생했다. 고전 문학의 시조는 호메로스이며, 그 작품은 제노도토스와 아리스타르코스에 의해 편찬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사람들 역시 주석을 썼는데, 그것은 후세에 고전 주석의 자료가 되었다. 그밖에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후세에 남긴 업적은 아테네의 비극과 희극의 텍스트와 현존하는 선집을 편찬한 일이다.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의 학자는 언어와 문법연구에 업적을 남겼는데, 디오니시오스는 오늘날까지 유용한 문법용어의 대부분을 최초로 만들어냈다. 전기문학도 역시 학문의 한 분야가 되어, 어떤 파피루스 문서에는 대화체로 씌어진 사티로스의 〈에우리피데스전〉의 일부분이 남아 있다. 전기 가운데는 가십과 중상적인 욕설을 쓴 것도 많았으며, 유명인의 것으로 알려진 가짜 편지들은 논픽션적인 요소로 인해 인기를 모았다. 그 이후 시대의 저자, 즉 플루타르코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작품에 나오는 일화의 대부분은 헬레니즘 작가에게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소설 예술

형식으로서 소설의 기원은 헬레니즘 시대에 귀착된다. 〈헤로와 네안드로스〉·〈피라무스와 티스베〉·〈사포와 파온〉 등의 로맨틱한 이야기는 고전소설의 근원을 이루었다. 또한 수많은 작품이 발표되었는데, 대개는 창녀의 생애 또는 요리법·해몽법 등을 다룬 것들이었다. 이 작품들의 문학적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그 감성적인 분위기나 특수한 정보는 여성을 포함한 많은 독자의 요구를 채워주었다.

과학

지리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2가지 사실에 기초하여 진보했다. 첫째, 알렉산드로스 3세 원정의 순서와 관련해 원정이 행해진 동방제국(인도·아프가니스탄)의 탐험과 아시리아의 피테아스나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대서양에서 한 발견을 위한 항로이며, 둘째, 소요학파들의 학술적 연구의 전문화였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측량기사는 서아시아를 광범위하게 측량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디카이아르코스는 이미 판명되어 있는 지역에 대한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그리스 연대학의 기초를 확립했는데, 그의 명성은 수리지리학의 업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지구의 둘레를 측량해 오늘날 알려진 것보다 불과 80㎞ 짧은 수치를 얻어냈다. 또한 여러 대륙의 형상에 대해 큰 발견을 했고 기술지리학 교과서를 저술했는데, 그에게는 많은 후계자가 있었다. 포세이도니오스는 대서양을 연구하여 에라토스테네스가 처음으로 가능성 있다고 발표한 사항, 즉 서쪽으로 돌아가는 비교적 짧은 항해로써 인도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초기에 스트라보는 〈지리학 Geography〉을 편찬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귀중한 자료의 수집이며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 된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리'를 수학 교과서로 사용했다. 평면 및 입체 기하학의 포괄적인 이 교과서의 논리는 정의·공준(公準)·공리(公理)로 나뉜다. 이 책은 놀라운 천재의 저작으로 평가되지만, 주로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선현들의 저작을 근거로 하고 있다. 에우클레이데스 역시 중요한 수학적 연구를 했다. 그는 '순수과학'의 가치를 최초로 언명한 사람으로 꼽힌다. 한편 순수수학·응용수학을 포함해 고대 수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수학자는 아르키메데스로서 몇 종류의 저서가 남아 있다. 그는 적분법과 관련한 방법을 사용하여 면적을 구하는 문제를 풀었으며, π의 정확한 값을 최소한의 근사치까지 구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자기의 이론을 기계에 응용하여 여러 가지 정교한 장치를 발명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기술적 업적은 이론적 업적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과대망상은 거대한 선박의 건조에 관한 위대한 기술적 업적을 성취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여러 가지 기계장치를 만들고 또 그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을 남겼다.

천문학의 사상과 관찰은 태양계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견해는 지구중심설, 즉 태양·달·유성이 움직이지 않는 지구의 주위를 회전한다는 설이었다. 그 다음에는 지구는 자신을 축으로 하여 회전하며 금성과 수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이론이 나왔다.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은 지구보다 크며 모든 천체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태양중심설은 거부되었고, 히파르코스는 복잡한 순환과 지구의 원주에서 원운동하는 작은 원의 조직에 기초하여 지구중심설을 부활시켰다. 그는 태음년과 태양년을 거의 정확히 계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지구와 달과의 관계가 조수의 변화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아낸 셀레우코스의 이론과 함께 놀라운 성과로 꼽힌다. 몇몇 천문학자는 태양의 지름과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려 시도했지만, 모두 실제보다 훨씬 작은 수치를 제시했다. 천문학에서 달성한 업적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권위 있는 서적에 요약되어 있다.

생물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에 관한 저작과 테오프라스트스의 식물에 관한 저작이 있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몇몇 추종자밖에 없었다. 한편 의학은 크게 발전했으며, 특히 해부학과 생리학의 진전이 두드러졌다. 사체의 해부는 보편적으로 실시되었으며, 외과의술과 산아제한도 성공을 거두었다. 동물의 생체실험이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뇌와 신경, 동맥과 심장과의 관계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졌다. BC 2세기까지 의학자들은 의약과 독약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헬레니즘 시대의 외과의술 기구는 1800년 무렵 서양의 그것에 맞먹는 것이었다. 화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며, 물리학·지질학에 관한 지식도 거의 없었던 듯하다.

미술과 건축

미술과 건축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 미술의 계승이다. 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아한 기능과 감정의 힘은 대개는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건축의 발달은 수학과 공학의 진보와 궤를 같이 했다. 도시계획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상수도·하수도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성벽의 건조와 요새화가 두드러졌다. 건축은 전반적으로 거대한 규모로 축조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예로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 및 여러 도시의 주랑(柱廊)이 있는 시장 등이 있다.

대부분의 조각가는 BC 4세기의 거장들이 걸어온 길을 답습했지만, 새로운 양식도 대폭 발달했다. 동적인 느낌을 살려 사실적인 관능성을 표현했고, 점차 복잡한 군상의 조각이 시도되었다. 조각은 수요가 많았고 고가에 매매되었다. 초상 조각은 이 시대의 위대한 업적의 하나였다.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상〉의 리시포스를 들 수 있으며, 그밖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밀로스 섬 출토의 〈아프로디테 상〉(루브르 미술관)·〈키레네 아프로디테 상〉(로마 테르메 미술관), 로마에 있는 이른바 영웅적인 〈헬레니즘 시대의 지배자〉 등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여성적 관능미와 근육이 왕성한 남성미를 강조했다. 부조는 한층 더 사실적인 경향을 보였는데, 그 원인은 부분적으로 원근법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깊이를 구별한 점, 조각과 회화를 조합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회화에서는 실제로 순수한 헬레니즘 시대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초기 회화의 모사(模寫)로는 폼페이에서 발견된 모자이크로 된 〈알렉산드로스〉가 있는데, 강한 힘과 구도의 정교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외의 것으로는 폼페이의 장식 벽화와 프레스코가 있다. 원근법은 빛과 그림자와 함께 헬레니즘 시대에 쓰였던 수법이지만, 이른바 색채구성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많은 실례가 아시아 미술에 대한 그리스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간다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인도의 불상인데, 이 불상에는 확실히 그리스 기원을 나타내는 양식이 있다.

철학

더이상 독립 도시국가의 시민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 윤리의 전통적인 기반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활의 새로운 기준을 찾으려는 요구가 높아지면서 여러 부류의 철학자가 이에 대해 고심했는데, 그들은 모두 본래는 일반 시민에게 왜 불행과 고통을 피해야 하는가를 설파한 도덕가들이었다. 그 가운데 디오게네스가 수립했던 견유학파(犬儒學派)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들은 원시적인 자기만족의 생활을 주장했다. 디오게네스는 아무 것도 써서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대개 테베의 크라테스와 같은 편력의 설교자로서 시와 산문을 썼다. 그들은 새로운 문학형식, 특히 대중을 향해 설교와 풍자문을 보통의 운문으로 썼으며, 이것을 패로디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보리스테네스의 비온은 전자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메니포스는 후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두 사람 모두 노예였으며, 그들의 저작에는 반부르주아 경향이 명백하지만, 그 가르침은 개인을 사회의 진공지대에 버려두었다. 가장 급진적인 결론을 이끌어낸 학파는 피론이 세운 '회의파'였다. 이 일파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완전한 허무주의로 일관했다.

한편 아테네에 출현한 새로운 2개의 학파, 즉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이미 진리의 발견보다는 개인적 행복에 이르기 위한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의 논리는 폴리스 사회의 논리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참된 목적은 인간의 혼을 혼란하게 하지 않는 평정, 즉 ' 아타락시아'(ataraxia)에 있었는데 공포·고통·감정에서 해방되는 것이 그 기본이었다. 향락은 인간 행복의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간 정신의 평정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하는 경우에 한했다. 자기 철학의 기초를 데모크리토스의 유물주의적 원자론에 둔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 가지는 과학적인 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감정생활의 유물론적인 설명을 위한, 또 심신(心身)과 관련한 사실에 대한 비범한 통찰에 대한 근거로써 이용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도덕의 기초로서의 자유의지를 믿었다.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우정과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바탕으로 했다. 그의 이론은 실제로는 전혀 변하지 않았으며, 그 대부분은 필로데모스 또는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와 같은 열렬한 추종자들에 의해 후세에 전해졌다.

스토아 학파는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인 페니키아인에 의해 정립되었고, 그가 아테네에서 강의했던 스토아(주랑 현관)의 이름을 기념하여 그렇게 불렸다.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그리스적이며 견유학파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학파의 가장 오래된 선구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이며, 그의 로고스는 영원한 법칙에 의해 우주를 지배하는 섭리 또는 자연으로 재건되었다. 로고스는 물질적인 모든 것에 내재하는 '정신'(pneuma)이며 자연현상에 관한 최종적인 설명을 부여해주는 역학적 힘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또한 그것은 합리적인 심리학과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 이론에 따르면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노예 사이에는 각각 아무런 차이도 없다. 모든 인간의 형제애라는 위대한 이념은 스토아학파에서 정점에 달했으며, 그들은 완전한 덕을 얻어 전적으로 자기충족적인 인간이 되는 힘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시대의 어떠한 철학적 종교에서도 신은 부속물과 다름없었다. 스토아 학파는 신화를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공적인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는 스토아 학파의 조언을 바탕으로 많은 사회개혁을 했다.

헬레니즘과 유대인

유대인은 주의(主義)를 가지고 그리스 문명에 반대한 유일한 민족이었는데, 양자 사이의 영향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BC 3세기에 대사제에 의해 지배되었던 유대의 소사회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리스인은 오랫동안 유대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다만 팔레스타인 이외의 땅에 사는 유대인의 수가 점점 증가했으므로, 일부 그리스의 작가들은 막연하게나마 유대인의 일신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유대 왕국 내의 일부에서 그리스식 생활양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BC 300년경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에게 의탁했던 사람들은 이들 상류층이었다. 유대인 사회에서 헬레니즘화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대중들로부터 배척되었는데,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치세하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을 예루살렘의 신전에서 제사했는데, 사실은 그리스풍으로 꾸민 시리아의 바루 신이었다. 유대의 지도적 귀족인 마카베오가(家)는 셀레우코스가와의 전쟁으로 유대주의를 구했지만, 당시의 독립국가는 심각하게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을 드러냈다. 이는 이도메아 출신 헤로데 왕의 통치시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유대 문학은 BC 2~1세기에 번영했으며, 어느 정도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2개의 역사서인 제1·2 마카베오서는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제2마카베오서는 처음부터 그리스어로 씌어졌다. 이처럼 유대 문학의 대부분은 유대 지방 밖에서 씌어졌으며, 그리스의 영향은 당연히 디아스포라에서 가장 강했다. 회당을 가진 유대인 사회는 헬레니즘 사회의 곳곳에 존재했으며, 어떤 도시에서는 자치적인 정치단위로 승인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리스식 이름을 쓰고 그리스 양식을 모방했지만, 그들은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유대 생활의 종교적 관습이 도처에서 그리스인과의 밀접한 교류를 불가능하게 하자 반유대주의가 시작되었다. 그 원인의 일부는 경제적 경쟁에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로의 종교적 선언에 의한 것이었다. 유대인은 어떤 직업이든 독립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유대인의 중요사회는 이 도시의 건설초부터 참여했지만 시민권은 얻지 않았다. 한편 〈비교(秘敎)의 서(書) Hermetica〉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이집트의 신 토토의 그리스 이름)의 계시를 기록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점에서 유대인의 전통 특히 일신교 사상, 또한 그리스의 저작물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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