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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아들 / 투르게네프 (I.S. Turgenev)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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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아들 / 투르게네프 (I.S. Turgenev) 

 

작품의 아우트 라인

 

 1859년의 봄, 대학을 졸업한 아르카지이가 친구 바자로프를 데리고 아버지 니콜라이의 농장으로 돌아온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신구 양세대 (新舊兩世代)의 대립이 시작된다. 아무런 생산적인 활동도 하지 않고, 이상주의적인 공론만을 능사로 하며, 무의 도식하는 귀족의 취미의 빠아베르(니콜라이의 형)를 바자로프는 증오한다. 빠아레르는 바자로프의 무례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니콜라이는 자식들의 세대로부터 낙오된 것을 한탄한다. 아르카지이는 편견(偏見)을 가지지 않는 자신의 관대한 마음에 자기만족을 하면서, 가정부(家政婦) 페니치카에 대한 아버지의 실수를 용서한다. 페니치카나 그밖의 사용인들은 바자로프에 대하여, 자기들과 동일한 평민적인 태도에 호감을 가진다. 빠아레르와 바자로프의 논쟁(論爭)은 정치, 사상,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전개된다.


 어느 날, 바자로프와 아르카지이는 군청 소재지로 나가, 도지사 저택의 무도회에서 젊은 미망인오찐조와 알게 된다. 연애를 저속한 장난이라고 하여 이를 부정하는 바자로프도,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성에 강하게 매혹되어, 정열을 억제하지 못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도 크게 마음속의 동요를 느끼지만, 자신의 평화를 지키고자하는 이성이 승리하여, 바자로프의 품속으로 뛰어 들려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 한다.


 실망한 바자로프는, 아르카지이와 함께 그의 귀향(歸鄕)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늙은 부모한테로 갔다. 그러나, 부모의 맹목적인 사랑과 지나친 보살핌이 귀찮아서, 곧 실험도구를 남기고 온 아르카지이의 집으로 도피한다. 여기서, 그는 과학 실험에 열중하지만, 어느 날 사소한 일이 원인이 되어 빠아베르와 결투 사건이 일어나, 그는 다시 늙은 부모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노부(老父)의 진료(診療)를 도와 주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질부사로 죽은 농민의 시체를 해부하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에 상처를 입고, 그것이 패혈증(敗血症)으로 약화된다. 의사인 그는 자기의 증세가 절망적인 것임을 깨닫는다. 임종이 가까워 온 어느 날, 오진쪼와가 의사를 대동하고 그의 죽음에 임박한 병상을 찾아 온다. 그는 죽음의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며, 희미해 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의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그 무의미를 비웃고, 부모에게는 한 마디도 입밖에 내놓지 않았던 부모에 대한 깊은 애정과 슬픔을 토로한다. 최후의 의지의 힘을 발휘하여 죽음을 거부하려고 몸부림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죽음의 공포와 싸우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외로운 시골의 묘지에서, 바자로프의 무덤 앞에 엎드려 언제까지나 그곳을 떠날 줄 모르는 노부모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슬픔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는다. 무덤 위에 피어 나고 있는 꽃은 자연의 위대한 평화와 영원한 화해를 말해준다고, 작자는 말함으로써 이 소설의 끝을 맺는다.

 주인공 하이라이트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라고, 아르카지이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작품 속에 처음으로 나타난 투르게네프의 신조어(新造語)이다. 바자로프는 의사를 지망하는 젊은 자연 과학자로서, 새로운 시대의, 그리고 형성 도상에 있는 온갖 감정적 지적특질을 한 몸에 지닌 투르게네프가 창조한 인물, 말하자면 가까운 장래에 나타날 새로운 인간상(人間像)이다.
 사상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도덕, 사회, 예술에 있어서의 체의 귄위를 부정하고, 이성과 논리(論理)와 유용성(有用性)의 한계 내에 있는 것만을 인정하는 「생각하는 리얼리스트」(비평가 비사레프가 붙인 이름)인 바자로프는, 예술에 있어서의 감상주의, 낭만주의, 이상주의, 신비주의 등 일체의 이름(주의)을 부정하고, 한 콀레의 구두가 세익스피어보다 중요하고, 그것이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기 때문에, 한 사람의 화공(靴工)이 라파엘로 보다 낫다고 단언하고, 푸시킨의 시( )마저 한가한 자의 시간 보내기 놀이라고 흑평한다.


 바자로프에 의하여 상징되는 1860년대의 니힐리스트는, 과학을 신(神)과 바꾸어 놓는 무신론자, 유물주의자이고, 그들이 부르짖는 니힐리즘은 혁명 이론의 허무주의와 달리, 주로 도덕적·정치적·개인적인 일체의 제약, 국가, 사회, 가정의 일체의 귄위에 대한 개인적인 반항이었다.


 「페쵸린(레르몬토프의 『현대의 영웅』의 주인공)에게는 지식이 있지만 의지가 없고, 바자로프에게는 의지가 있지만 지식이 없고, 바자로프에게는 의지와 지식이 모두 갖추어 있다. 그에게는 사상과 행동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이것은 비사레프가 지적한 말이다.

 작자의 생애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1818년에 중부 러시아의 오름르시(市)에 대어나, 어머니의 영지(領地) 스빠스코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구귀족(舊貴族)의 집안이지만, 가난한 미모의 사관(士官)이었고, 어머니는 농노(農奴)를 5천명이나 거느린 대지주(大地主)로서, 아버지보다 6살 손위였는데, 이 부자연스러운 결혼은 돈을 위한 그것이었다. 폭군적인 여지주(餘地主)와 학대를 받는 농노들의 비참한 모습은, 소년의 마음을 깊은 상처를 남겨 주었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은 『첫사랑』『무무』등의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다.


 그는 15살 때에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에 들어갔고, 다음 해 페테르부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농노제의 폐지를 꿈꾸는 민주주의의적 경향을 뛴 청년으로서, 문학 써클에 출입하였고, 바이런 풍(風)의 낭만주의적 시작(詩作)에 열중하였다. 졸업후에는 베를린 대학에 유학하여 바쿠닌, 게르첸 등과 함께 해겔 철학에 몰두 하였고, 서구 문화의 가치에 대한 안목이 열리고, 서구파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는 벨린스키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현실을 주시하는 사실주의의 경향을 뛰우고,『사냥꾼의 일기』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가 이 작품에 의하여 농노 해방을 위하여 싸우고자 한 소년 시절의 맹세를 이행하였다는 것은 유명하다.


 그는 1840년대부터의 러시아 지식인의 의식의 흐름, 정신사를 씀으로써, 그들의 사명을 역사에 정착시키는 것을 자기 문학의 하나의 사명으로 삼았고, 장편 제1작 『루진』(55년)으로, 1840년대의 이상주의자들의 모습과 사명을 역사 위에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귀족의 보금자리』로 몰락해 가는 귀족의 만가(輓歌)를 향수어린 어조로 욾음으로써, 귀족의 역사적 사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버지와 아들』로 40년대의 관념의 세대와 60년대의 잡계급(雜階級) 출신의 행동의 세대의 충돌을 묘사함으로써, 러시아를 이끌어갈 기수(旗手)의 교체를 강조하였다. 농노 해방의 전 해에 『그 전날밤』을 써서, 새로운 러시아를 걸머질 의지와 행동의 인간상의 출현을 예고하였다. 이밖에도 농노 해방 이후의 러시아의 혁신과, 중도파의 소란스러운 사회 정세를 국외에서 관망하고, 허무하고 무익한 유희라고 한탄한 『연기』나도드니키 운동의 파멸을 그린『처녀지』의 둥 장편이 있다.
 그는 25살 때의, 오페라 가수 포리는 비아르도(1821∼1910)를 안 이래, 조국을 버리고 항상 부인 곁에 있으면서, 1883년 65살의 생애를 파리 교의의 별장에서 부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마칠 때까지, 기묘한 우정을 계속 간직 하였다. 일생동안 결혼을 하지 않았다. 연로하여도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지지 않고, 영혼의 위험을 맞이한 인간의 가슴 속에 피어 오르는 향수(鄕愁)의 시(詩)라고도 할『산문시』는 시인으로서의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명문구 낙수

  「귀족주의, 자유주의, 진보, 원리 어떻습니까? 아무 쓸모없는 이 외래 언어의 범람! 러시아인에게는 이따위는 그저 준다 해도 필요치 않습니다.」(바자로프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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