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상자 / 요점정리 / 은희경
by 송화은율은희경 殷熙耕 [1959~]
195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내동생》이라는 첫 작문을 쓰고 나서 문예반에서 글쓰기 연습을 하였다. 《강소천전집》을 즐겨 읽었고 일기 쓰는 것을 좋아했다. 이야기 꾸며내기에 재능이 있음을 안 문예반 교사는 소설 쓰기를 권했으나 시 쓰는 것을 더 좋아했다. 숙명여자대학에 입학하여 1977년 창작모임을 만들어 시를 쓰고 문집을 만들기도 했다. 졸업 후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근무하였다.
1994년 한 달간 휴가를 내어 일기장과 메모를 챙겨 들고 서울을 떠나 다섯 편의 단편을 썼고 서울로 돌아와 중편 《이중주》를 써서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새의 선물》(1996)은 열두 살에 성장을 멈춘 어린 화자를 통해 생의 이면을 날카롭게 풍자한 소설이다. 《타인에게 말걸기》(1997)는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체, 의문스러운 유머, 해학적 풍자가 잘 나타난 개성있는 작품이다.
《마지막춤은 나와 함께》(1998)는 장면전환이 빠른 에피소드식 구성으로 겉으로는 강한 듯하지만 내적으로는 약한 주인공의 복잡한 성격을 잘 그려냈다. 결혼과 가족제도의 문제를 다룬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1999)는 경쾌한 유머와 등장인물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녀의 소설에는 인간의 본성이 날카롭지만 유머러스하게 그려져 있다. 그 때문에 평론가들은 그녀의 작품이 신랄하고 가차없으며 냉정하다고 평가한다. 그녀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점은 유머를 통해 섬세하게 심리묘사를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이야기꾼으로서 재능과 서정적 감수성이 잘 섞여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등단하자마자 문학적 인정을 받았으며 독자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풍부한 상상력과 능숙한 구성력, 인간을 꿰뚫어보는 신선하고 유머러스한 시선, 감각적 문체 구사에 뛰어난 소설가이다.
그밖의 작품으로 《아내의 상자》(1997), 《서른살의 강》(공저, 1996) 《마이너리그》<2001>,등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이해와 감상
이 글은 남편의 시각에서 아내를 보고 쓴 관찰자 시점으로 되어있다.남편의 눈에 비춰진 아내는 단 한 마디로 평범한 여자이다, 남편의 눈에는 상자를 쌓아가고 외출하는 걸 싫어하고 잠을 깊이 자는 것 따위는 일상화되어 버린다.
그러나 남편의 눈에 비친 평범한 아내는 신도시처럼 짜맞춰진 '평범'이란 단어에 외로워하고 지루해 하는 내면이 있는 여자이다, 내면이 있는 아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시키지않으려 한다.단지 안락의자 옆에 차곡차곡 쌓아둔 상자에다 담아 놓을 뿐.아내는 집안을 꾸미기 좋아하고 외출을 자주 하는 옆집여자를 통해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끝내 적응을 하지 못하고 남편의 분노로 아내는 요양원인지 정신병원인지 모를 어떤 곳으로 사회와 격리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남편이 말하는 평범한 삶은 정말로 어떠한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상성과 존재의 소멸과정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반복적인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결국은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오고 만다.현대적인 의미에서 일상성은 개인의 사회적 존재 문제와도 직결된다.신도시 아파트의 황량한 풍경 ,그 속에 자기 존재의 심연을 헤매는 주인공이 있다. 닫혀진 아파트의 내부공간은 그녀의 존재를 규정하는 일상성의 조건이다. 이 조건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 그 자신의 존재를 열어 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존재는 아득하게도 손에 잡히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그 실체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가능성마저 잃고 있다.더구나,주인공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자의식의 공간은 점차 좁혀져 더 이상 아무런 공유점을 발견할 수 없다. 이 극한의 상황에서 빚어 낸 것이 바로 자기 존재를 스스로 가두는 하나의 상자가 아닐까?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문명의 상자를 하나씩 지니게 마련이다. 그 상자를 열면 삶의 굴레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덮쳐 온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그 상자를 열지 못한다.그러나 스스로를 그 상자 속에 가두어 버릴 수 있다.이것은 자기 존재의 심연을 열고 들어서는 유일한 방법이다.하지만 존재의 소멸에 이르는 이 길을 누구도 감히 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줄거리
마지막으로 아내의 방에 들어가본다. 아내는 상자를 많이 갖고 있다. 아내의 상자에는 지난 시간 동안 그녀를 스쳐간 상처들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이제 여기 없다 . 내일이면 이사를 가기 때문에 아내의 방은 없어진다.
우리가 신도시로 이사를 온 것은 작년 삼월이다. 자기의 방이 생겼다는 사실에 아내는 기뻐했다.나는 아내를 사랑했다. 그녀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문대 비서학과를 나온 아내는 원래 미술대학을 지망했었다, 대학 입시 날 수채화를 그릴 때즘 두통이 심해져 귀에서 물 흐르느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서 깨어났다. 입시 강박증이라고 했다.전문 대학을 졸업한 아내는 조그만 오퍼상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나를 만나 결혼을 했다.
아내는 외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에 아내는 집안 일을 하거나,책을 읽거나, 신문과 잡지 따위를 뒤적였다. 그녀는 다 읽은 책을 상자에 담아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시간에 잠을 잤다. 아내의 잠은 이상하리만큼 깊었다. 그녀는 몸이 아플 때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심지어 화가 났을 때조차 잠을 잤다.
우리의 삶은 그럭저럭 평온했다. 그 무렵 옆집으로 그 여자가 이사를 왔다. 아내는 자기가 임신을 할 수 없는 것이 선택 이론에 의해서 도태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옆집여자와 외출을 자주 했다.아내는 옆집여자에게 포풀러를 선물 받았다.
다음 날 나는 붙임 클리닉에 진료 예약을 했다.클리닉에 가는 날 회사에 월차를 내어 평소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나갔다. 나들이 기분이 나는 싱그러운 오월 날씨였다. 갑자기 우리 차 앞으로 스포츠카 두 대가 나타나 서로 물총 장난을 했다. 내가 매일 아침 지옥을 향한 진입로이듯 나는 질질 끌려가듯 갔지만 그들은 노래하듯이 경쾌하게 뚫고 지나갔다.그리고 그들은 연녹색 선 속의 오솔길 뒤로 사라져 버렸다. 아내는 그 오솔길을 쳐다보며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봄이 가기 전에 언제한 번 나오기로 약속을 했다.
아내의 배란기에 나는 되도록 일찍 퇴근했다. 그녀는 힘든 눈치였지만 클리닉의 지시와 내가 주는 정자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내는 말 수가 적어졌다. 아내 앞으로 배달돼 오던 잡지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아내는 잠이 늘어난 것 같았다. 한동안 밤마다 걸려오는 장난 전화에 시달리다 못해 아내가 전화선을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버린 일, 아내가 화상을 입은 일 등이 있었지만 심각하게 큰 일들은 아니었다.
지금은 다시 봄이다. 시계를 자주 보며 그런 자신에게 당황했던 나와 달리 아내는 한시간 뒷면 우리가 헤어진다는 것을 잊기 위해 그다지 애쓰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에게 지난 겨울은 무척 힘들었다.
십일 월 마지막 밤, 아내는 열 시간 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의 방에 들어가 보았지만 아내가 간 곳을 찾을 만한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잡 밖으로 나가 아내를 기다리는데 옆집 부부가 왔다. 옆집여자의 부자연스런 몸짓 속에서 여자가 틀림없이 뭔가 할 말을 가지고 다시 찾아 오리라는 것을 눈치 채고 집으로 돌아와서 여자를 기다렸다. 옆집여자는 남편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 달라며 그린 파크라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나는 당장 가보았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내가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아내는 집에 돌아오자 감기로 앓아 누웠다.떠나는 날 아침 어딘가에서 전화가 왔다. 어디서 왔냐고 내기 묻자 장난 전화라고 말했다. 아내는 조수석에 탔다.불임 클리닉에 가던 때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그곳에 도착해서 나는 아내를 그 곳에 입원 시켰다. 다음 날 나는 부동산과 포장이사 회사에 전화를 했다.
신도시를 벗어나면서 나는 언젠가 스포츠카가 달려갔던 오솔길로 들어갔다.
하지만 무덤으로 가득 뒤덮인 산이 눈 앞을 가로 막았다. 무덤만이 끝날 줄 모르고 이어져있는 길을 계속 달렸다. 이윽고 시야가 뚫렸다. 반갑게도 저 멀리서 늘씬한 포장 도로가 나타나 있다.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와 그 작품 세계
현대적 삶의 숙명 - 희망과 절망의 정지된 변증법
-"사랑은 마치 모래 벌판 위로 내리는 눈과 같다"는 의미
- 강 상 희 (문학평론가)
- 본원적인 자아를 발견해 가는 험난한 도정
사랑은 소외와 공허의 사막을 방황하는 현대인의 삶을 치유할 만능의 열쇠인가.그것은 또한 적자생존.우승열패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적 삶의 공포를 위무할 만한 권능을 가지고 있는가.
은희경의 소설이 줄곧 탐색해 온 주제에 의식의 핵심은 이러한 물음에 맞닿아 있다.하지만 그녀가 내놓은 소설적 응답은 그 물음에 관한 우리의 평균적인 이해 수준을 훨씬 넘어선 자리에 놓여 있다. 사랑은 마치 모래 벌판위로 내리는 눈과 같다고 은희경은 말한다.백색 설원의 일체감은 미혹일 뿐,모래는 여전히 모래로서의 외로움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사랑은 타인이 나와 관계 맺기 위해 던져 놓은 영롱한 빛깔의 덫이며 ,적자생존.우승열패라는 야수의 논리를 은폐하는 가면이라는 것이다.이제 타인은 사랑의 이름으로 나에게 규격화된 삶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네가 느끼는 와로움과 무의미를 덜어 줄 여러 관계와 정체감을 부여하였으니 ,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할 네모꼴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피노키오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맨 처음 해야 할 일이 학교에 가는 것이었듯이 ,사랑의 숨결로 거듭난 너는 네모꼴 삶이라는 학교로 가서 그곳의 규율을 내면화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은희경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대체로 그와 같은 갈등 상황에 빠져 있다. 사랑의 이름으로 부여된 네모꼴의 삶과 그것의 규율을 받아들여야 하는가,그러할 때 휘몰아치는 삶의 모순과 자기 억압을 과연 견뎌 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은희경 소설의 여성 인물들은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수세적인 위치로 자신을 내몰지 않는다.위장된 화해로써 갈등을 은폐 하기 보다는 오히려 갈등의 근원으로 회귀하여 그곳에서 진정한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이 회귀 과정은 여성 인물들이 자신에게 덧씌어진 아내.연인 ,어머니라는 정체성의 껍질들을 하나하나 벗어 버리고, 본원적인 자아를 발견해 가는 험난한 도정이다. 그 도정의 막다른 지점에서 은희경이 발견하게 되는 여성적 자아의 모습 .그것은 바로 소외와 공허에 신음하는 현대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은희경의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는, 현대인과 현대적 삶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만의 방>을 둘러본 버지니아울프의 외침이 여전히 남성상과 여성성의 이항 대립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면, 은희경은 버지니아울프로부터 더 멀리 나아가 이항 대립을 헤체 하고 있다. 이상 문학상 수상 작품인 <아내의 상자>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지우고 그 대립을 해체하여 ,여성성의 문제를 현대인이 처한 숙명적 삶이라는 커다란 틀로 섬뜩하게 형상화한, 은희경 소설의 한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 단편소설의 고전적인 미학 계승
<아내의 상자>는 의식의 집중을 기할 수 있는 회상이라는 소설적 장치를 사용하여 구성의 안전성을 확보하고 있다.주제 의식과 관련 없는 디테일이 거의 없으며,대부분의 묘사가 고도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 회상의 장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회상을 통한 역행적 시간 구성은 사건의 우연한 진행을 방치하는 소설에서는 도달하기 힘든 의미의 응축을 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방에 들어가 본다."는 소설 첫 문장처럼 주제의식과 관계 없는 디테일을 삭제하고 곧바로 의미 탐색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작가의 서술 전략은 회상의 장치와 적절하게 호흡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특히 회상의 임의성과 무방향성을 통제하는 저돌적인 서술 방식으로 인해 이 소설은 주제의 집중,인상의 통일이라는 단편소설의 고전적인 미학을 보기 좋게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고전 미학적인 안정감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상자>가 폭발적이고도 낯선 힘을 내뿜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인물 설정 방식에서 그 힘의 한 원천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아내의 상자>에는 작중 화자인 '나'와 아내가 주요 인물-기실 한 인물의 두 모습이지만-로 설정되어 있다.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으로 일상의 평온을 즐기고 ,규격화된 생홯에 아무런 거부감을 갖지 않는 인물이다.TV마감 뉴스를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고,증권 시황에 틈 관심을 갖고 있으며,시사 주간지를 탐독하는 전형적인 소시민형 인물이다. 그 반면에 화자의 회상과 관찰을 통해 서만 접할 수 있는 아내의 모습은 불투명하기 그지없다. "시시하다고 할 만큼 평범한 사람"이라는 남편의 진술에 의해 드러나는 아내의 생의 이력은 대단히 피상적이다.어머니가 있었다, 미술 대학을 지망했지만 실패하고 전문대학 비서학과를 나와 조그만 오퍼상에 있었다,적은 월급으로 적금을 붓는 평범한 생활을 했다,두 명의 친구가 있다,집안 정돈을 썩 잘한다는 사실들뿐이다.
무심한 관찰자의조그만 관심으로도 포착할 수 있는 이러한 이력들이 문제적인 것은 이들이 부부 관계라는 점 때문이다.화자는 "나는 아내를 사랑헸다.그녀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화자가 알고 있는 것은 아내의 삶의 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다.아내의 생에 관해 생각을 모으는 순간에도 화자는 빈약한 목록만을 작성할 수 있을 뿐이다.화자는 아내의 내면의 영토를 전혀 들여다볼 수 없으며 ,그에게 그러한 의지가 있는지의 여부마저 불분명하다.이 느슨한 결합의 부부 관계를 지탱해 주는 힘을 화자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화자는 그 결합이 힘을 '오해'하고 있고,아내는 현대적 삶의 원자화에 의해 그 힘이 너무 미약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이 오해와 이해의 긴장이 생활의 수면 위로 솟아오를 때 그 폭발력과 낯섦은 그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
- 아내의 자발적 불임 -희망과 현실 순응 사이의 괴리
이들 부부 관계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아내의 불임이다.소설,연극,영화등이 서사물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대개 훼손된 생에 동력을 불어넣고,마모되거나 단절된 관계를 매끄럽게 이어 주는 기증을 한다. 그 일은 또한 갈등과 모순 해결의 상징이자,희망의 현실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그러한 상징과 암시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그것은 부부 관계를 이어 주는 끈이라든지, 소외와 공허를 채워 줄 충만한 의미도 아니다."나는 아내가 아이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질문을 나 자신에게조차 심각하게 해보지도 않았다, 나는 단지 인생은 필요한 것을 갖춰 나가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화자 진술처럼 이들에게 아이란 기구나 승용차 혹은 직장에서의 직급처럼 단지 일상적 삶이 갖추어야 할 하나의 사물 또는 자격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내의 자발적(!)불임은 일상적 현실 너머의 어떤 인간적 숙명-희망과 현실 순응의 엄청난 괴리와 같은 -을 가리키기 위한 몸짓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화자에 의해 회상된 아내의 말에서 그 몸짓의 의미를 추측해 볼 수 있다.그녀는 자기 스스로를 적자생존 사회에서 도태될 열등한 종자라고 규정한다. 규격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다는 것,바로 내면을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자기의 방이란 곧 내면의 구체화된 대응물임을 직감한 데서 나온 것이다.그러나 표면적인 현상의 우위와 잁체의 사물화를 승인해야 하는 현대의 일상적 삶은 내면이라는 것 자체를 부적응의 증표로 간주한다. 신화 속 인물 율리시스가 선원들에게 일상적 현실 건너편에서 들려 오는 요정의 노래를 듣지 말라고 명령하여 내면의 생성을 원천봉쇄한 것처럼,현대인의 삶은 내면을 무화시킴으로써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내면은 오직 예술과 종교의 몫일 뿐 ,일상적 삶은 내면을 적자생존의 불리한 조건으로 간주한다. 현대인의 삶은 얼마나 피상적인가.삶의 본원적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와 기호 가치가 현대적 삶의 중심에 놓여 있지 않은가.이러한 낯익은 탄식은 탄식일 뿐, 일상적 삶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교환 가치와 기호 가치이다. 그러한 때 내면이란 일상적 삶의 대극점에 있는 인물 .
-소외되고 공허한 삶 앞에 놓여 있는 두 갈래의 길
'아내의 방' 역시 그러한 의미 망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자기만의 방은 육체의 독립성과 의식의 절애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신도시로 이사 오면서 자기의 방이 생겼다는 사실에 아내가 기뻐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외부로 향하는 눈길을 돌려 자기 자신을 응시할 가능성을 열러 주었기 때문이다.아내는 그 방에서 책을 읽고,잠을 잔다. 화자가 "유배지 같은 아내의 방"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그곳은 일상적 현실에 등을 돌린 내면의 "유배지"인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방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아내를 찾을 전화 번호 하나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화자는 아내의 방에서도 그녀의 존재감과 내면성을 두러내 줄 별다른 징후들을 발견하지 못한다.아내의 방은 단지 형식적인 자신의 표상일 따름이었던 셈이다, 아내의 내면은 그보다 더 멀고 깊숙한 곳에,어쩌면 아내 자신조차 알지 못할 어떤 곳에 있는 것이다.형식적인 자림의 단위 역시 근원적으로는 무의미하다는 것, 기껏해야 '집과 "도시'라는 커다란 관계 망 속의 작은 단위에 불과 했던 것이다.아내의 방을 채우고 있는 것은 생명력이 증발된 것들뿐이다.
상자들과 독일식 책상,그리고 이웃집 여자에게서 선물 받은 포푸리 화환. 포푸리 화환은 특히 "영혼이 휘발돼 버린 뒤까지 살아 있을 뿐이다.그 포푸리 화환은 그녀 자신이 아닐 때만 평온하게 보이곤 했던 아내의 모습이기도 하다.독한 인공의 향기를 내뿜는 포푸리 화환은 내면과 일상적 삶의 엄청난 괴리를 느끼며 박제화되어 간,하나의 사물이 되어 버린 아내의 표상인 것이다.화자는 "짐에 돌아와 보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준비되어 있었다.아내까지도"라고 회상한다, 아내는 오랜 시간 동안 손때를 묻힌 서랍 장처럼 편안하고 다정한 사물이다. 다만 아내의 내면은 서랍처럼 열어 볼 수 가 없다. 화자의 분노와 절망은 서랍장과 아내의 차이를 분별했을 때 더욱 커진다."이 집 안에 아내라는 여자의 내면을 알 만 한 것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대체 나는 무엇을 근거로 아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 왔던 걸까"라고 화자는 자문한다.평온한 일상의 수면 아래 "가물치가 꼬리를 바둥 거리는 물 새우를 반쯤 삼키고 있는 "아내의 내면은 불가지의 영역으로 사라져 버린다.
하나의 사물로서의 아내란,현대 소설에 있어서 내면의 영토를 침삭 하기 시작한 사물들의 독특한 지위를 보여 준다.초기의 현대 소설에서 우리는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를 헤쳐 나가는 주인공의 모험을 본 바 있으며,그 뒤의 소설에서는 그러한 모헙이 사라지면서 내면 의식만이 비대화된 인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의 소설에서는 자립성을 얻은 사물들이 내면 의식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인물이 왜소화 되는 대신에 사물들이 두툼한 묘사의 옷을 입고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아내의 상자>에서 아내는 상자의 의식 속에 하나의 사물로 각인되어 있었을 뿐이다.이 소설이 심리적 깊이를 내보이지 않은 것은 이러한 태도를 지닌 인물을 화자로 설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사물이 세상의 주인됨은 이웃집 여자의 경우에도 잘 드러나 있다. 집 안을 채우고 있는 온갖 사물들은 이웃집 여자를 바깥으로 몰어내고 새로운 주인이 된다.
그러나 사물로도 채울 수 없는 내면의 빈자리가 있다.아내가 그 빈자리를 잠과 독서로 채웠다면 이웃집 여자는 은밀한 외출로 그곳을 채우려 한다. 아내가 이 은밀한 외출의 삶의 공허와 권태를 못 이긴 중년여성들의 도피 방법인 은밀한 외출 역시 궁극적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지는 못한다. 도피 처에는 현대적 삶의 부패한 유혹만이 있을 뿐이다.<아내의 상자>는 이 소외되고 공허한 삶의 자리에 두 갈래의 길을 마련해 놓고 있다.하나는 신도시의 규격화된 길이고,다른 하나는 "연녹색 산속의 오솔길"이다. 신도시의 길은 아내를 더욱 강도 높은 질식 상태로 이 끈다."하늘도 언제 봐도 대충 구런 색의 지루한 안정의 빛이고 공기의 냄새마저 도식적"인 신도시의 길은 아내를 잠의 세계로 이끌 뿐이다.두 대의 스포츠카가 갔던 "연녹색 산속의 오솔길 "은 아내가 "환상의 길"이라고 명명하며 가보고 싶어했던 길이다.그러나 작품의 결말에서 화자의 눈에 포착되듯이 그 길의 종국은 "무덤으로 가득 뒤덮인 거대한 산"에 이어져있다, 규격화된 일상적 삶으로부터 탈출하여 도달한 그곳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무덤"에 불과한 것이다."무덤만이 끝날 줄 모르고 이어져 있는"그 길에서 벗어난 "늘씬 한 포장 도로"를 발견하고 느끼는 안도감은 일상적 삶의 규격을 자기 맞춤으로 여기는 화자에게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주홍 글씨"를 새기고 싶은 아내의 탈선 이후에고 "새벽 헬스 클럽과 외국어 학원의 야간 강좌에 등록 "하는 화자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늘씬한 포장 도로 '밖에 없을 것이다.그러나 화자가 느끼는 안도감 표면적인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내와 화자가 가고 싶어하는 길들은 현대인 모두에게 각인 돠어있는 두 갈래의 내적 충동이기 때문이다.일상적인 현실에 순응하면서 적자가 되고픈 욕망과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고 픈 욕망 사이에서 우리는 끝없는 갈등을 겪고 있지 않는가.<아내의 상자>는 아내와 남편으로 분열된 자아의 돌이키기 어려운 분리로써 결말을 삼고 있지만,그것은 오히려 통합에의 열망이라는 역설로 읽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 <날개>를 훨씬 능가하는 소설적 통찰력
그렇다면 탈출로는 없는가. '잠'으로써 "자신을 상처 입힌 세상을 향해 빗장을 지'른 상태를 벗어나 은밀한 외출의 동반자가 되어 행한 아내의 자기 파괴가 하나의 탈출이 될 수 있을까.<아내의 상자>에서 또렷한 대답이 들려 오지 않는다. 아내를 정신병원 혹은 요양소에 버리고 요양소에 버리고 오면서 화자는 아내가 이제 "희망따위를 볼모로 잡지 않을 "것이며 "헛된 희망을 갖는 일도 없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체계화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희망은 이제 봉쇄되어 버린 것이다. 일상적 현실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화자의 동의 없이 는 그곳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아내의 상자>는 이처럼 출구 없는 현대적 삶의 비극성을 날카로운 금속성 울림으로 들려주고 있다.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비극성의 한 자락을 일찍이 목도한 바가 있지 않은가. 바로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이다. 일상적 현실로부터 유폐되어 있는 '방'과 박제가 되어 버린 주인공,아내와 남편이라는 분열된 자아의 두 표상,현실적 관심을 지우기 위해 행하는 주인공의 끝없는 잠, 은밀한 외출을 통해 경험하는 내면 바깥의 현실, 그 연후의 환멸과 초월에의 욕망 ....<아내의 상자 >는 이처럼 우리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날개>와 근친성을 갖고 있다.그러나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는 이상이 관념적으로 도모한 현실 초월의 욕망의 현대적 삶의 네모꼴 체계 안에서는 무망한 것임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날개>를 훨씬 능가하는 소설적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현대 여성이 처한 열악한 삶의 조건과 융합된,현대적 삶의 탈출구 없음을 아프게 그렸다는 점에서 윌 소설이 도달한 하나의 진경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출구 없는 삶에서 무엇을 호명하여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을까.일찍이 사랑이 헛된 이름임을 말해 왔고,<아내의 상자>에서 희망이라는 이름마저 자아의 내무에서 추방해 버린 은희경은 이제 '광기 와 죽은 '그리고 "늘씬한 포장 도로 "라는 새로운 메타포들을 호명하고 있다. 이 철저하게 분리된 메타포의 극단성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안한 인간적 기초 위에 있으며 ,그것에 대한 불만이 우리를 어떠한 지경으로 인도하게 될지 두렵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거짓된 화해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회해의 가능성을 풀지 못한 과제로 남겨 두었다는 점에서 <아내의 상자>는 그 두려움을 뛰어넘는 농밀한 진정성을 지닌 작품으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