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아내의 마음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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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마음

宋德峰 지음

金成愛 역/해설

 

1.

부인송씨가 문절공(文節公 : 柳希春의 시호)에게 답한 편지

- 공이 홍문관 관리로 서울에서 벼슬하는 동안 넉달 간을 홀로 살면서 일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홀로 사는 괴로움을 과장하고 심지어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알라는 내용으로 자랑하자 부인이 담양(潭陽) 본가에 있으면서 이 글로 답장을 보냈다.

삼가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라고 스스로 자랑하셨는데 우러러 사례할 바가 없습니다. 다만 듣건대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본래 성현의 가르침이지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쓰는 것이겠습니까? 마음이 이미 정해져서 물욕에 가리워지지 않으면 자연 잡념이 없는 것이니 어찌 규중 아녀자의 보은을 바라겠습니까? 3~4개월 동안 홀로 지낸 것을 가지고 고결한 척하며 덕을 베푼 생색을 낸다면 반드시 담담하게 무심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깨끗해서 밖으로 화려한 유혹을 끊어버리고 안으로 사념이 없다면 어찌 꼭 편지를 보내 공을 자랑한 뒤에야 알겠습니까? 곁에 나를 알아주는 벗이 있어 공론이 펴질 것이요, 아래로는 권속 노비들의 눈이 있으니, 굳이 애써서 편지를 보낼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아마도 겉으로만 인의를 베풀고 남이 알아주기를 서둘러 바라는 병폐가 있는 듯합니다. 제가 가만히 살펴봄에 의심스러움이 한량이 없습니다.

첩도 당신에게 잊을 수 없는 공이 있으니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몇 달 동안 혼자 지내고 매양 편지마다 구구절절 공을 자랑하지만 60이 가까운 몸으로 그렇게 홀로 지내는 것이 당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크게 유리한 것이지 첩에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나 당신이 높은 관직에 있어 도성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는 처지에 몇 달 동안이라도 혼자 지내는 것은 또한 보통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일이기는 합니다. 저는 옛날 어머님의 상을 당했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고 당신은 만리 밖에 귀양가 있어 그저 하늘을 울부짖으며 통곡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정성으로 장례를 치르어 남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곁에 사람들도 혹 봉분이나 제례가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3년상을 마치고 또 만리 길을 나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간 일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지성을 바쳤으니 이것이야말로 잊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이 몇 달 홀로 지낸 일과 나의 몇가지 일을 비교한다면 그 경중이 어떻습니까? 원컨대 당신은 영원히 잡념을 끊고 건강을 보전하여 수명을 늘이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크게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나의 뜻을 이해하고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 송씨

2.

묘비를 세우려는 글(1571년 7월에 쓰다.)

남편 미암(眉巖)이 종성(鍾城)에서 귀양살이를 한 지 19년 만인 1565년(명종 20) 겨울에 성상의 은혜를 받아서 다음해(1566) 봄 은진(恩津)으로 양이(量移)되자 나도 모시고 돌아와 함께 지내었다. 온갖 고생 중에도 오직 바라는 것은 친정 선영의 곁에 비석을 세우는 일이었는데 마침 은진에서 생산되는 돌의 품질이 가장 좋았으므로 즉시 석공을 불러다 값을 주고 사서 배에 실어 보내 해남(海南)의 바닷가에 두게 하였다. 그 후 1567년(명종 22) 겨울에 공이 홍문관 교리로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갈 때 비로소 담양(潭陽)에다 돌을 옮겨두었으나 인력이 모자라서 깎아 세우지는 못하였다. 그러다 1571년(선조 4) 봄에 공이 마침 전라감사에 제수되었으므로 숙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하여 마음이 부풀어 있었는데, 공은 백성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만 잘하고 집안 일을 돌보지 않으면서 나에게 편지하기를, “반드시 사사로이 비용을 마련한 뒤에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나의 졸렬함을 잊고 이 글을 지었으니, 한편으로는 남편이 읽고 감동해서 도와주기를 바라서요 또 한편으로는 후손들에게 남겨주고자 해서이다.

착석문(착石文)

천지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성현을 세워 교화를 밝히고 삼강오륜의 도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를 용감히 행하는 자가 적었으니 이 때문에 진실로 뒤늦게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은 지극한 마음은 있으나 힘이 부족해서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인인 군자가 불쌍히 여겨 유념하여 구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첩이 비록 명민하지는 못하나 어찌 강령을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어버이께 효도하고픈 마음에 옛사람을 따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2품의 관직에 올라 삼대(三代)가 추증을 받고 나도 고례에 따라 정부인이 되어 조상 신령과 온 친족이 모두 기쁨을 얻었으니, 이는 반드시 선세에 적선을 한 음덕의 보답입니다. 그러나 내가 홀로 생각하며 잠못이루고 가슴을 치며 상심하는 것은 옛날 우리 선군이 항상 자식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정성을 다해서 내 묘 곁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쟁쟁하게 귀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 어버이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였으니 매양 이것만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는 족히 인인 군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인인 군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렵고 곤궁한 사람을 구해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편지하기를, “형제끼리 사사로이 비용을 마련하면 그 밖의 일은 내가 도와주겠다.” 하니, 이는 무슨 마음입니까? 청덕에 누가 될까봐 그런 것입니까? 처의 부모라고 차등을 두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우연히 살피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까?

또 선군께서 당신이 장가오던 날 금슬백년(琴瑟百年)이란 구절을 보고 훌륭한 사위를 얻었다며 너무나 좋아하셨던 것을 당신도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신과 내가 지기(知己)로서 원앙처럼 함께 늙어가는 마당에 불과 4~5섬의 쌀이면 될 일을 이렇게까지 귀찮아 하니, 통분해서 죽고만 싶습니다.

경서에 이르기를, “허물을 보면 그 인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남들은 반드시 이 정도를 가지고 허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선유들의 밝은 가르침을 따라 비록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완벽하게 중도에 맞게 하려고 하면서 이제 어찌 꽉 막히고 통하지 아니하여 오릉중자(於陵仲子)처럼 하려고 하십니까? 옛날 범중엄(范仲淹)은 보리 실은 배를 부의로 주어 상을 당한 친구의 어려움을 구해주었으니 대인의 처사가 어떠하였습니까?

형제끼리 마련하라는 말은 크게 불가하니 저의 형제는 혹은 과부로 근근이 지탱하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혹은 곤궁해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도 있으니 비용을 거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원한만 사게 될 것입니다. 예(禮)에 말하기를, “집안의 있고 없는 형편에 맞추어 하라”하였으니 어떻게 그들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친정에서 마련할 힘이 있다면 나의 성심으로 진작에 해버렸을 것입니다. 어찌 꼭 당신에게 구차히 청을 하겠습니까? 또 당신이 종산 만리 밖에 있을 때에 우리 선군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오직 소식(素食)을 했을 뿐이요, 3년 동안 한 번도 제전(祭奠)을 안 했으니 전일 그토록 간곡하게 사위를 대접해주던 뜻에 보답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귀찮아하는 마음 없이 비석 세우는 일을 억지로라도 도와준다면 구천에서도 선인이 감격하여 결초보은하려고 할 것입니다.

나도 박하게 베풀고 당신에게 후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모님이 작고했을 때 갖은 정성과 있는 힘을 다하여 장례를 예대로 하고 제사도 예대로 지냈으니 나는 남의 며느리로써 도리에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이런 뜻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만약 내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면 나는 죽더라도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지성에서 느끼어 나온 말이니 한자 한자 자세히 살피시기 바랍니다.

 

<해설>

 

위의 글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의 부인 송씨가 남편에게 보낸 2편의 글로 「미암일기(眉巖日記)」 권5 부록에 실린 글이다. 송씨에 대한 기록은 허성(許筬)이 지은 유희춘의 신도비명(문집총간 34집 p387) 에 일부 전해질 뿐 다른 기록은 찾기 힘들다. 송씨의 본관은 홍주(洪州)이고, 자는 성중(成仲), 호는 덕봉(德峰)이다. 사헌부 감찰인 송준(宋駿)의 따님으로 성품이 명민하고 글도 잘해 사서를 섭렵하여 여사(女史)의 기풍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미암공이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될 적에 시모인 최씨부인(최부(崔溥)의 딸)이 살아계셨으므로 자신이 따라갈 수 없게 되자 공을 보살펴드릴 여자(첩)를 데리고 가도록 권하였다. 공이 이를 어렵게 여기고 마련할 여유도 없다고 사양하자 곧 패물 등 장신구를 헐값에 팔아 당장 사람과 말을 마련하여 끝내 보내주니, 친족들이 다 의롭게 여겼다. 그후 시모가 돌아가시자 장례와 제례를 정성껏 지내고 3년상을 마친 뒤에 여장을 꾸려 필마로 종성까지 3000여 리를 찾아갔으니,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한다. 다음의 시는 그 때에 지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참으로 당찬 송씨부인의 일면을 짐작케 한다.

가고 또 가 마침내 마천령에 오르니 / 行行遂至磨天嶺

동해는 가이없어 거울마냥 평평하다. / 東海無涯鏡面平

만리길 아녀자의 몸으로 무슨 일로 왔는가 / 萬里婦人何事到

삼종의 의는 중하고 일신은 가벼운 것 / 三從義重一身輕

<마천령 위에서 읊다 / 磨天嶺上吟>

그후 종성에서 미암과 함께 지내다가 선조 즉위 후에 유배에서 풀려나자 잠시동안 공은 서울에서 벼슬하고 부인은 담양 본가에 있었는데 첫 번째 글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571년 미암이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된 뒤 두 번째 글인 착석문을 썼는데 예나 지금이나 남편한테 섭섭한 것은 친정과 관련된 일이 으뜸인 듯하다. 이와 관련된 시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화락함이 세상에 짝이 없다 자랑 말고 / 莫誇和樂世無倫

진정 나를 생각거든 착석문을 보시오 / 念我須看착石文

군자는 호탕하여 막힘이 없으니 / 君子蕩然無執滯

범중엄의 선행을 지금까지 칭송하네. / 范君千載麥舟云

<미암의 운에 차운하다. / 次眉巖韻>

이 두 편의 편지는 투정 같기도 하고 농담 같기도 한 글 속에서 양반가의 근엄한 마나님이 아닌 고락을 함께 해온 부부의 허물없는 정경을 보는 듯하여 그야말로 인간냄새가 나는 글이 아닌가 싶다. 「미암일기」와 「미암집」에는 윗글 외에 부인과 차운한 시 등이 꽤 눈에 띄어 금슬좋은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상상케 한다. 유희춘은 1577년(선조 10) 5월에 졸하였으며 부인은 바로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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