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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을 경영하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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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을 경영하야

 

 

십 년을 살면서 초가삼간 지어 냈으니

(그 초가삼간에) 나 한 간, 달 한 간, 맑은 바람 한 간을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곳이 없으니 이대로 둘러 두고 보리라.

요점 정리

지은이 : 송순(宋純)

갈래 : 평시조, 한정가

성격 : 전원적, 관조적, 풍류적, 낭만적, 자연친화적 태도

표현 : 과장법

제재 : 전원 생활

주제 : 자연 귀의(自然歸依), 안빈낙도(安貧樂道)

출전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내용 연구

경영(經營)하여 : 계획하여. 마음 속으로 꿈꾸어

초려삼간(草廬三間) : 세 칸밖에 안 되는 작은 초가. 초가 삼간으로 '초려삼간'의 공간적 의미는 초장의 '초려 삼간'은 자연 속에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지만 자연을 압도하지는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과 인간을 격리하는 공간이 아니라, 조화롭게 어울리게 하는 공간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바탕에서 중장에서는 '나'와 시적 대상인 '달, 청풍'이 '초려' 속에서 한데 어우러지는 물아일체(物我一體), 혼연일체(渾然一體)의 경지를 보여주며, 종장에서는 이것이 확장되어 '강산(江山)'을 방에 친 병풍(屛風)처럼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곧 이 시조에서 '초려'는 화자가 자연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기도 하고 자신을 자연으로 확장하기도 하는 중심적인 공간이기도 하는 어울림의 공간이다.

맛져 두고 : 맡겨 두고

山(강산)은 드릴 듸 업스니 둘너 두고 보리라. : 아름다운 산수는 집안에 들여 놓을 곳이(들여 놓을 수가) 없으니, 집 주변에 병풍처럼 둘러 두고 즐겁게 보리라.

이해와 감상

 

초장에서 자연에 은거하는 청빈한 생활을 보여 준 후, 중장은 나와 달과 청풍(淸風)을 한 집에 사는 식구처럼 표현함으로써 더할 수 없는 친근감과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나타냈다. 중장은 근경(近景), 종장은 원경(遠景)으로 표현의 조화를 이루었다. 초가(草家)삼간(三間)을 산 속에 지어 놓고 달과 바람을 즐기는 작가의 선풍 도골(仙風道骨)을 상상할 수 있는 이 노래는, 산수의 아름다움에 몰입된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종장에서 강산을 둘러 두고 보겠다는 표현은 재미있는 착상이다. 강산을 안방에 둘러 친 병풍처럼 연상한 것이다.

이해와 감상1

 

사대부들은 자연 속에서 삶의 진실과 풍류를 추구하고자 하였는데 그들의 작품을 흔히 강호 가도(江湖歌道)라 이르고 작품 속에는 풍류 정신(風流精神)이 담겨 있었다.

이 작품은 산수 자연의 아름다움에 몰입하여 풍류를 즐기는 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작가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면앙정'이란 정자를 짓고 자연에 파묻혀 지낼 때 자연과의 교감을 노래한 것으로 자연에 몰입한 경지가 돋보이는 삶의 자세에서 작자의 높은 정신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시조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몰입한 경지를 노래한 한정가(閑情歌)로 자연 친화를 통하여 안분지족(安分知足)과 안빈낙도의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는 작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심화 자료

 

무위 자연(無爲 自然)

 

'무위'는 불교에서는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닌 불변하는 상태를 의미하며, 도가(道家)에서 '무위'라는 말은 '사람의 생각이나 힘을 더하지 않은 자연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만일 우리가 무위 자연이라고 한 노자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 그가 주장한 무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반드시 자연의 의지와 호흡에 맞는 것만을 한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옳다고 믿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무위'라는 말은 노장(老壯)사상에서 도(道)란 우주 만물을 존재하게 만드는 본질로서, 절대적 일체를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저절로 그러함(自然)'의 속성으로 파악되는데, 이에 따라 자연이란 저절로 그러한 도의 절대성을 나타내게 된다. 이로 보아 '무위자연'은 무엇을 억지로 하지 않으며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사는 모습을 뜻하며, 어린애와 같이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모습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무위자연의 삶이란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난 본래의 자기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도는 늘 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道常無爲 而無不爲)"라는 말에서 이러한 생각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스스로 낮추지 않는, 그리고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 소박한 공동체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지 자기 멋대로 하는 방임이나 게으름 내지 비활동성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원리대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함의(含意)를 담고 있는 것이 무위 자연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도가사상(道家思想)

 

노장사상(老莊思想)을 계승, 발전시킨 철학사상.

〔도교와 도가사상〕

 

도교와 도가사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분된다. 그것은 전자가 종교사상이요, 후자가 철학사상이라는 점도 있지만, 두 사상은 애당초 다른 진리관에서 출발하여 전연 별개의 사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도교는 고대의 민간신앙을 기초로 노장사상·역리(易理)·음양·오행·참위(讖緯)·의술·점성, 그리고 불교와 유교사상까지 받아들여, 심신의 수련을 통한 불로장생의 탐구와 기복(祈福)을 통한 현세이익을 추구하여 나가는 종교현상이다. 이를 크게 수련도교와 기복도교 또는 과의(科儀)도교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도가사상은 이와는 달리 노장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철학사상으로 인간의 현실적 타락과 무지의 근거를 찾아 그것을 척결해 내고, 자연의 실상을 깨달은 참지혜를 통하여 무위(無爲)의 삶을 추구하는 사상 경향을 말한다. 이를 보통 무위자연사상이라고도 한다.

〔도가사상의 수용〕

 

우리 나라에 도가사상이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624년(영류왕 7)에 들어왔고, 신라와 백제에도 그 무렵을 전후하여 유입되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도가사상이 신도사상(神道思想) 내지는 선도사상(仙道思想)으로 대표되는 민족고유사상과 자연풍류사상의 바탕 위에서 도교와 분명한 구분 없이 혼합된 형태로 받아 들여 이해되어 왔다.

 

이와 같은 경향은 수용 초기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왔으니, 우리 나라의 도가사상을 굳이 도교와 구별해서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여말 선초 성리학의 학문적 구명과 더불어 노장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새로이 일어난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도교의식이나 연단법(煉丹法)과는 다른 차원의 도가사상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도교와 구별되는 우리 나라의 도가사상은 원칙적으로 여말선초에 성리학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단(異端)의 사유를 구명하고자 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 이전까지 도가사상은 유교나 불교처럼 뚜렷한 자기 모습의 사상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민간신앙에 근거를 둔 미신적 종교현상으로만 존속해왔을 뿐, 한번도 학문 대상으로서 심각한 문제거리로 대두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이전 고려시대까지의 사상 속에서 도가사상의 실마리를 전혀 찾을 수 없다거나, 도가의 체계적인 이해와 정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교와 도가사상이 함유된 다양한 종교현상 속에서, 풍수·도참 사상 특히 단학파(丹學派)의 도맥(道脈)을 형성한 수련도교의 인물과 사상 가운데서 도가철학의 요소를 찾아 새롭게 이해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 구체적인 작업은 앞으로 새롭게 정립해야 할 우리 나라 철학계의 과제이다.

 

도가철학 내지 도가사상은 그저 막연히 도교라고 할 때와는 달리 노장사상에 대한 철학적 이론을 학문적으로 문제삼아 다룬 것만을 의미한다. 도교와 도가사상의 실질적인 구분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도가사상에 대한 학문적 관심〕

 

도가사상, 즉 노장철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조선 건국의 주도적 인물인 정도전(鄭道傳)의 〈심기리편 心氣理篇〉이라는 짤막한 논문과 그 논문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달고 서(序)·발문을 붙인 권근(權近)의 해설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이 논문의 내용은 ≪불씨잡변 佛氏雜辨≫과 더불어 이단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분석인데, 참다운 진리탐구의 학문이 무엇인가를 천명함으로써 고려 말에 전래되기 시작한 ‘송학’, 즉 성리학의 학문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목적을 둔 저술이었다. 여기서 이단은 노(老)·불(佛)을 의미한다. 도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이단사상으로 비판받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비판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연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비판이 비록 ‘이단’임을 증명하여 뿌리 뽑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 사유형태를 학문 영역 안으로 끌어 들여야 하는 것이다. 학문적 이해와 연구가 이루어진 바탕 위에서라야만 그 비판은 합리적 설득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도가사상의 이해와 한계〕

 

이단을 막고 ‘올바른 학문’, 즉 정학(正學)인 유학을 천명하려는 확실한 목적의식에서 쓰인 것이기는 하지만, 정도전의 〈심기리편〉은 유(儒)·불(佛)·도(道) 삼가(三家)의 사상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비교, 검토한 뛰어난 저작이다. 일관성 있는 논리와 이해의 깊이는 유학의 분명한 자기 위치를 확보하고 있으며, 도가사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정도전은 삼가사상의 핵심적인 문제를 불가(佛家)는 심(心), 유가는 이(理), 도가는 기(氣)로 파악하였다. 다시 말해 불가는 심학(心學)으로, 유가는 이학(理學)으로, 도가는 기학(氣學)으로 규정한 것이다. 우리 나라 도가사상의 학문적 출발은 이렇게 기철학(氣哲學)으로 성격이 규정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 ‘기’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기(理氣)’에서의 ‘기’와 비슷한 개념으로 형이하의 현상적 존재 일체를 의미하였다. 성리학에서 ‘이’는 그러한 현상적 존재의 본질이자 원리로 ‘기’보다 한 차원 높은 실재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도가는 우주와 인간의 여러 현상이 ‘이’에 의해 존속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기’만을 알고 논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정도전은 비판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가철학을 유가의 이기구조에서의 ‘기’, 즉 형이하의 현상적 존재만을 전부인 것으로 인식하는 철학이라고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가에서 다루는 ‘기’가 과연 그러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 도가의 ‘기’는 ‘이’와 상대가 되는 ‘기’의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오히려 유가의 ‘이’ 이상으로 모든 것의 근원인 형이상적 실체이며 본질인 동시에 ‘현상 그 자체’인 궁극적 실재이다.

 

유가의 입장에서 보면 ‘기’에 대한 의미분석은 형이하적인 ‘기’, 경험 가능한 것의 요소 이상일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기’는 ‘기’요 ‘이’일 수 없는 이상, 유가적 사념 속에서는 ‘기’가 근원적·본질적일 수 없으며 보편적 존재일 수도 없었다. ‘기’는 특수이고 개체적이며 형이하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바로 여기에 ‘기’ 개념에 대한 유가적 이해의 한계가 있다.

도가의 ‘기’ 개념과 유가의 개념구조 내에서의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님을 미처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없는 ‘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유가의 굳건한 입장이다. 예컨대, 도가에 대한 비판은 “노장이 ‘기’만을 말하고 ‘이’를 말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가해졌다.

 

정도전 이후 조선시대의 사상적 풍토는 표면적으로는 계속 도가사상을 배척의 대상으로 삼아 왔으나, 도가의 기론(氣論)을 어떤 형태로든 받아 들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 없는 ‘이’만을 문제삼을 수 없는 것이 성리학이고 보면, 기론은 유가철학이 다루어야만 하는 자기 운명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도가철학의 실재는 ‘부정되는 동시에 긍정의 소지를 항상 보유하면서’, 때로는 적극적인 수용의 양상으로, 때로는 유가적인 ‘기’와는 다른 새로운 기의 의미를 탐색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철학적 수용과 그 추이〕

 

철학적 수용이라 함은 막연한 사상성의 침투가 아니라 이론적인 학문적 이해로 들어와 문제가 된 경우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은 표면적으로는 성리학과 아무런 관련도 맺지 못하고 부정적으로만 평가되어 뿌리째 뽑혀 나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도가의 ‘기’를 ‘이기’와 연결된 ‘기’의 의미로 파악하는 것부터가 자기수용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었던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권근은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化生)하는 질료가 ‘기’이다. 인간도 기를 받아 생(生)하는데 이 ‘기’는 형이하의 것이다.”라는 주희(朱熹)의 말을 이용하면서, 도가철학은 바로 이 ‘기’를 문제삼아 나간 철학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기는 반드시 ‘이’가 있어야 존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유가에서 인지된 ‘이’의 개념이다.

 

‘기’의 운동을 규정하는 본원은 ‘이’에 있다는 것이다. 이 ‘이’에 근거를 둔 현상은 질서를 보유하며, 이 규범이 생의 의미인 자기질서〔道德〕라는 가치의 영역을 이룬다. 현상적 존재의 의미는 ‘이’가 부여한다. 그것이 다름아닌 의(義)요, 덕(德)이요, 미(美)요, 선(善)이요, 성(性)이요, 정(情)이다.

 

그러나 ‘기’만을 문제삼는 도가에서는 현상적 실상이 무엇이며, 존재성이냐 비존재성이냐가 문제이지, 현상적 존재의 ‘가치론적인 의미’, 즉 선악과 시비를 깊이 따지지 않았다. ‘기’는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상 자체’일 따름이다. 의미는 부여하는 바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가치의 절대적인 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문제삼지 않았다.

그런데 유가에서는 바로 ‘존재의 의미’를 묻고 탐색하여 그것을 행위의 준칙으로 삼고자 한다. 현상적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찾아낸 근거·원리·규범이 다름아닌 ‘이’이다. 이때 ‘이’는 어디까지나 ‘근거’이지, 그것이 그대로 의·덕·미·선은 아니다. 그러한 가치론적 의미들은 모두 현상적 존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개념들이니 유가철학은 ‘이’ 못지않게 ‘기’를 중요시 하였다.

 

‘기’는 현상적 존재성이다. 도가사상에 대한 비난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체계 내부로 수용하는 것도 이 점에 입각해 있다. 도가에 대한 비난은 생의 의미를 찾아 들어 갈 근거를 설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으며, 도가의 관점에서는 생은 생 그대로 용인되어야 할 전부이다. 이렇게 보면 유가의 비판과 부정에도 불구하고 도가를 ‘생의 철학’으로 수용할 길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생은 현상적 존재의 개체 개체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형이하의 ‘기’이다. 의미없는 생은 생이 아니라 할지 모르나 도가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기’의 본 모습으로 보고 목적이나 의도를 위하여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위험하게 여겼다. ‘몸은 죽은 나무같이 해야 하며, 마음은 식은 재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유가는 생을 무조건 용인하지 않고 반성을 통해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갔다. 생은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 된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도가철학은 그러한 인위적 의미부여를 거두었을 때 비로소 생이 온전해진다고 보았다.

 

‘기’의 문제가 화생만물(化生萬物)하는 현상적 존재에서 다루어지는 생의 철학이었기에, 도가사상에 대한 기철학적 측면의 연구와 이해, 수용은 기론을 더욱 분명히 하여 ‘이’의 존재론적 의미를 검토하고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도가사상의 학문적·이론적 논구는 여말선초에 유자(儒者)들의 이해와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나라 도가사상은 이를 통하여 성립되었다. 도가에 대한 기철학으로서의 파악은 그 동기가 도가사상에 대한 긍정적·동조적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지배이데올로기로 강력하게 요구되었던 성리학의 수용과 정착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던 비판의식에 있었다.

논박, 배척, 부정하기 위하여 도가를 살펴보고 그 취약점을 찾아내려 애썼던 것이다. 따라서, 그 논구와 이해의 방법은 출발부터 유가적인 사유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해의 자기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통해서 우리 나라 도가의 실질적 내용을 비로소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사상적·철학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도가는 ‘기철학’이라는 사실로 하여 배척되고 평가 절하되었으나, 뒤집어 보면 바로 그 점이 유가에 수용될 여지가 있었던 곳이다. 도가의 기론이 유가의 ‘이기구조적 사유’에 끼친 영향을 염두에 두고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철학으로서의 이해와 파악이 우리 나라 도가사상의 특질로 지적될 수 있겠다.

 

서경덕(徐敬德)에 이르러 양상이 좀 달라진다. 지금까지 이해되어 온 유가적 사유체계 내의 ‘기’가 고식성을 탈피하여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된다. ‘이’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자율적으로 활동하는 ‘기’의 본질과 근원을 다룬 것은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서경덕은 이렇게 도가의 기 개념을 깊이 이해하고, 유가적 이기 개념을 철저히 검토한 바탕 위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이(李珥)는 노자(老子)를 새롭게 재평가하여 독자적인 주석과 편찬의 성과인 ≪순언 醇言≫을 남기고 있다. 조선 후기에 민간에 음성적으로 만연하던 도가사상을 깊이 우려한 한원진(韓元震)은 장자(莊子)의 사상이 철저한 오류임을 밝히려고 ≪장자변해 莊子辨解≫를 지었다.

 

박세당(朴世堂)은 무조건 비판을 일삼거나 유가와 배치되는 부분을 삭제하는 편법을 택하지 않고, 유가적 입장에 튼튼히 서서 ≪도덕경≫과 ≪장자≫를 차근차근 주석한 희귀한 전통을 수립하였다.

≪참고문헌≫ 三峰集(鄭道傳), 花潭集(徐敬德), 醇言, 莊子辨解, 新註道德經, 韓國哲學史(韓國哲學會, 東明社, 1987).

강호(江湖)가도

 

조선 시대 시가 문학에서 보이는 자연 예찬의 풍조. 시가 문학에서는 자연을 예찬하고 자연에 귀의하여 생활하는 것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사대부들이 창작하였다. 이러한 특징적인 현상을 조윤제는 강호가도로 규정하면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삶의 방식에서 그 형성 원인을 찾았다. 사회와 당쟁의 와중에서 벼슬길로 나서 자칫 거기에 휩쓸려 일신과 가문을 위기로 몰고 가기보다는 고향의 자연에 귀의하여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보다 안전한 삶의 방식이었다. 이들에게는 사유지가 이미 확보되어 있었고, 향리에서도 토지나 명망을 기초로 한 독점적 지위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을 예찬하는 강호가도의 구현은 도학을 기반으로 한 그들의 문학관, 세계관과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영남출신의 문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현보를 꼽을 수 있다.

 

이현보는 영남사림으로서는 비교적 일찍 환로(宦路)에 나서서 경상감사, 형조참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줄곧 자연으로 귀의할 것을 꿈꾸다가 마침내 귀향하여 그 기쁨을 '농암가'와 같은 시조로 노래하였다. 그 후 이황이 여러 편의 시조를 통하여 이현보가 표명한 자연에의 귀의를 이어갔고, 나아가 도학적인 이념과 교화 의도까지 노래에 포함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권호문(권(勸好文)을 비롯한 퇴계 문하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영남가단을 형성하였다. 그뿐 아니라 나이가 들어 벼슬을 사직한 치사(致仕)한객(閑客)이 그 유유자적한 심정을 자연에 담아 노래한 작품들도 강호가도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맹사성의 '강호사시가'가 대표적인데, 이 작품은 강호 자연마저도 군주의 통치가 행해지는 공간으로 규정함으로써 세계와의 단절이 아닌 화합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현보의 '농암가'와는 차이가 있다. (출처 :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3판, 지식산업사, 1933)

송순(宋純)

 

1493(성종 24)∼1582(선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潭仰亭). 담양 출신. 증 이조판서 태(泰)의 아들이다. 면앙정가단(潭仰亭歌壇)의 창설자이며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송순은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등을 지냈고, 1539년 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4월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 관찰사·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 윤원형과 황헌(黃憲)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년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咬)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 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 때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林悌)가 부(賦)를 쓰고, 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박순(朴淳)·고경명(高敬命) 등이 시를 지었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70세에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과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8년(선조 1) 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 판윤으로 특승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盧진)·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때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양산보·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 등의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 潭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 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신주가 모셔졌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遣閑雜錄(沈守慶), 稗官雜記(魚叔權), 旬五志(洪萬宗), 芝峰類說(李邈光), 竹窓閑話(李德泂), 韓國詩歌史綱(趙潤濟, 乙酉文化社, 1954), 國文學全史(李秉岐·白鐵, 新丘文化社, 1957), 湖南歌壇硏究(丁益燮, 進明文化社, 1975), 壬亂前後歌辭硏究(金東旭, 震檀學報 25·26·27, 196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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