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산 바라보며
by 송화은율수양산 바라보며
수양산(백이, 숙제가 은둔한 중국의 산, 여기서는 수양대군을 가리키기도 함)을 바라보면서, (남들이 다 절개가 굳은 선비의 표상이라고 말하는) 백이과 숙제를 오히려 지조(志操)가 굳지 못하다고 나는 꾸짖으며 한탄한다.
차라리 굶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뜯어 먹어서야 되겠는가?
비록 산에 자라는 풀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의 땅에서 났는가?
요점 정리
지은이 : 성삼문(成三問)
갈래 : 평시조
성격 : 지사적, 풍자적, 절의가, 충의가
표현 : 풍유법, 중의법, 설의법
제재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
주제 : 굳은 절의와 지조
출전 :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내용 연구
수양산(首陽山) : 백이, 숙제가 은둔 생활을 한 중국의 산. 여기서는 수양 대군을 가리키기도 함
채미(採薇) : 고사리를 캠. 고사리를 뜯는 일
하는것가 : 하는 것인가. 해서야 되겠는가
푸새엣 것 : 산과 들에 절로 나는 풀 따위
首陽山(수양산) 바라보며 夷劑(이제)를 恨(한)하노라. : 수양 대군을 향해,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탓한다는 말이다. 중국의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 하여 충절의 화신이라고 알려진 이들을 작가는 원망한다고 하여 기존의 상식을 뒤엎고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제보다 더 굳은 지조를 지녔음을 외치는 표현이다. 수양산은 산 이름과 수양 대군[세조]을 뜻하는 중의법이다.
비록애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 : 고사리는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고사리라는 것이 주나라의 땅에서 난 것이 아니란 말이냐? 나 같으면 고사리마저도 캐먹지 않겠다는 뜻으로 지은이의 철저한 절의(節義)의 정신을 보여 준다.
이해와 감상
세조의 단종 폐위에 항거한 작자의 의지를 은유적으로 드러낸 '절의가(節義歌)'로 주(周)나라의 충신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굳은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 :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끝까지 죽음으로 의로움을 지킨 성삼문의 자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절의가(絶義歌)이다.
심화 자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
중국 은(殷)·주(周)나라 교체기인 BC 1100년 무렵의 전설적 성인(聖人) 형제. 백(伯)·숙(叔)은 장유(長幼)를 나타낸다. 《사기(史記)》 <백이열전>에 의하면, 은나라 때의 고죽국(孤竹國)의 국군(國君) 아들로서, 아버지가 죽은 뒤 왕위를 사양하고, 함께 나라를 도망쳐 주나라의 서백창(西伯昌;文王)의 덕을 사모하여 주나라로 갔다. 그러나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아버지 문왕이 죽은 뒤, 은나라 말 주왕(紂王)이 폭정을 일삼으므로, 제후 서백[西伯-주왕(周王)]의 아들 발[發-주무왕(周武王)]이 이를 치려 하자, 백이 숙제는 "신하로서 군주를 치는 것이 어찌 인(仁)이라 하겠는가?"하고, 만류했지만, 발이 끝내 주(紂)를 치는 것을 보고 "주(周)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으리라."고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굶주려 죽었다. 이로부터 후세 사람들은 충의와 절개를 일컬을 때면 으레 이들 형제를 들어 말하게 되었다.
성삼문(成三問)
1418(태종 18)∼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 개성유후(開城留后) 석용(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달생(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승(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塾)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홍문관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 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년 9월 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 그가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후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허조(許璽)·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는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 회의를 열고 그의 아버지 승과 유응부·박쟁(朴怨)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尹師路)·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金銷)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 :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 :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 달 8일 아버지 승과 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그 때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그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 : 절개를 지킨 신하)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그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하였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莊陵 : 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홍주성선생유허비 洪州成先生遺墟碑〉와 〈연산성선생유허비 連山成先生遺墟碑〉가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梅竹軒集, 莊陵誌, 國朝榜目, 秋江集, 宋子大全, 成謹甫集,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大東奇聞, 海東雜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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