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神曲) / 단테
by 송화은율신곡(神曲) / 단테
제 1 곡
생의 절반을 보낸 나는 올바른 길을 잃고 홀로 어두운 숲 속에 서 있었다.
아, 그토록 음산하고 울창하며 험한 그 숲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
생각만 해도 두렵고 죽음 못지않게 괴롭지만, 거기서 찾아낸 행복을 알리기 위해 익히 보아 둔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리라.
나 어떻게 해서 그 숲으로 들어섰는지 알 수 없지만 올바른 길을 버렸을 때, 그토록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어느 언덕 기슭, 내 마음을 공포로 쥐어짜던 계곡이 끝나는 곳에서,
우러러 높이 바라보니,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커다란 유성(遊星)빛이 산기슭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토록 고달프게 지새던 밤, 가슴 깊이 소용돌이치던 두려움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
마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다를 벗어나 뭍으로 헤어나온 사람이 무시무시한 바다를 뒤돌아보는 것처럼,
나 도망치고픈 마음에, 산 사람을 돌려보낸 적이 없는 그 길을 되살펴 보려고 몸을 뒤로 돌렸다.
지쳐 잠시 쉰 다음 다시 황량한 비탈길을 걸어갔으나 뒷다리가 내내 뻣뻣하였다. 그러나 보라 ! 오르막길에 접어들었을 때 나타난 날렵하고 민첩한 표범 한 마리를.
내 앞에서 떠나지 않고, 갈 길을 가로막았으므로 나는 몇 차례나 되돌아 가려고 했었다.
날이 밝을 무렵이라 태양이 별들과 함께 떠오르고 있었으니, 그 별들은 태초에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아름다운 별들을 창조하였을 때도 여전히 태양과 함께 있었더니라.
이 성스러운 시간, 이 맑은 계절은 사나운 점박이 짐승에 대한 공포를 감싸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 놓기에는 아직 일렀으니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자 한 마리 나타나 앞을 막으며 금시라도 덤벼들듯 머리를 번쩍 치켜들고 울부짖는 모습에, 대기(大氣)도 두려워 떠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나타난 암늑대 한 마리
피에 굶주려 비쩍 마른 모습이 모르긴 해도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화를 입혔으리라.
그 흉포한 모습에 혼비백산한 나 언덕에 오를 희망을 잃고 말았으니.
마치 재물을 모으는 데만 마음을 쏟던 자가 그 재물을 잃고 비통에 잠겨 눈물 흘리듯 힘센 짐승이 다가와 점점 해가 비치지 않는 곳으로 나를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협곡으로 쫓길 때 눈앞에 한 사람 나타났으니
그는 오랜 침묵으로 목이 잔뜩 잠겨 있었다.
쓸쓸한 황야에서 본 그가 반갑기 그지없어 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노라.
"살려 주시오. 그대 살아 있는 사람이든 환영이든 아무래도 좋으니, 나를 살려 주시오." 지금은 사람이 아니지만, 먼 옛날 사람이었지. 어버이는 롬바르디아 출신이며, 두 분의 고향은 만토바였네.
나는 율리우스 케사르 시대 후기에 태어나 어진 임금 아우구스투스 치세(治世)의 로마에서 살았노라.
허위와 가식 투성이인 이교(異敎)의 신들이 판을 치던 시대, 자신만만하던 일리온의 성이 불타 버린 후 시인이었던 나는 트로이아에서 온 안키세스의 정의로운 아들을 찬송했었지.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온갖 기쁨의 출발이요, 원천인 저 환락의 산에 오르지 않고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되돌아오느냐 ?
"그러면 당신이 바로 저 범람하는 강물처럼 시구(詩句)를 퍼부으시던 베르길리우스이신가요?"
하고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이었다.
"오, 모든 시인의 영예이며 빛이신 그대여. 나는 오랫동안 한결 같은 애정을 기울여 당신의 시집을 읽었나니, 그대 나의 참 스승이요 귀감이시나이다.
나에게 영예를 안겨 준 아름다운 문체는 오직 그대에게서 배운 것일뿐.
보십시오, 저 맹수들을 !
나 저놈들에게 쫓겨 예까지 왔으니
오, 내 영혼의 구세주시여 ! 저 짐승들로부터 지켜 주십시오.
저놈들로 하여 나의 온 핏줄과 맥박이 부르르 떨리나이다."
그는 눈물 글썽한 나를 보고 대답하기를,
"이 숲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 누구나 다른 길을 가야 하느니 저기 네 앞에 저 맹수는 누구든 자기 길을 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나중에는 죽음을 안겨줄 것이다.
피에 굶주린 저 놈들은 아무리 먹어도 만족을 모르나니, 먹기 전보다 먹고 난 후에 더 배고파한다.
저 놈들과 비슷한 짐승들은 비일비재하나니, 사냥개가 나타나 물어 죽일 때까지 놈들의 수는 더욱 늘어나리라.
그 사냥개는 대지의 산물이나 약탈물이 아닌, 지혜와 사랑과 덕을 양식으로 삼으리니, 그의 고향은 펠토르와 펠토르 사이에 위치하리라.
그는 처녀 카밀라와 에우리알로스, 투르누스, 그리고 니소스가 상처를 입고 죽어간 저 가엾은 이탈리아의 구원이 되리라.
병든 자만심의 모든 지방을 사냥하여 늑대들을 지옥으로 몰아 넣으리니, 그리로부터 마왕의 질투가 처음으로 이 세상에 내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너 자신을 위하건대 나를 따르리라. 내 너를 이끌어 이곳으로부터 영원한 곳으로 너를 안내하리라
그곳에서 너는 절망의 외침을 들을 것이며 끝없는 고통 속에 제2의 죽음을 애원하는 조상들의 지친 영혼을 보게 되리라.
다음으로 너는 불길 속에서 그런대로 만족해 하는 영혼들을 볼 것이니 때가 되면 축복받은 영혼들 사이로 옮겨갈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니라.
네가 여전히 그곳으로 오르기를 원한다면 나보다 더 훌륭한 영혼이 너를 인도하도록, 너와 작별하기 전에 그 분에게 너를 맡기겠노라.
그 까닭은 하늘을 지배하는 황제께서, 율법을 어겼다 하여 나 같은 자의 안내를 받아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황제는 물과 공기와 대지를 지배하며 그곳에는 궁전이 있고, 보좌(寶座)가 있나니 황제가 택하는 자 행복하리로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시인이시여, 당신이 생전에 모르셨던 하느님의 이름으로 간청하나니 이 재앙과 더욱 큰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방금 말씀하신 곳으로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바라옵건대 나로 하여금 성(聖) 베드로의 문과 방금 말씀하신 비참한 자들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내가 말을 마치자 그는 발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따라갔다.
(후략)
요점 정리
작자 : 단테(A. Dante)
갈래 : 서사시
율격 : 내재율(원문은 3연체의 운율)
성격 : 상징적. 우의적. 서사적. 종교적. 철학적. 계몽적
어조 : 담화조
심상 : 상징적
표현 : 이탈리아 어로 씌어짐.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짐
주제 : 영혼의 순례와 정화
전체 줄거리 : 35세가 되던 해 단테는 어두운 숲 속을 헤매다가 짐승들에게 앞을 가로막혀 절망에 빠져 있던 중,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로부터 지옥, 연옥, 천국을 보여주겠다는 제의를 받는다. 아홉 개의 권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옥(地獄)'에서 그들은 신앙을 갖지 못한 자, 애욕에 사로잡힌 자, 욕심쟁이, 구두쇠와 낭비벽의 죄인, 분노죄를 범한 죄인, 이단자들, 자살자, 사기범, 반역자들이 고초를 받는 참상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다음 일곱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는 '연옥(煉獄)'에서는 거만한 자들, 질투죄를 범한 자들, 분노죄를 범한 자들, 태만한 자들, 탐욕죄를 범한 자들, 음식과 육욕을 탐욕한 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연옥을 통과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와 헤어져 '천국(天國)'으로 향한다.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초원에는 꽃이 만발하고 레테의 강이 흐른다. 황금의 촛대를 선두로 신비로운 행렬이 다가오는데, 천사가 꽃을 뿌리는 꽃구름 속에 베아트리체가 나타난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으며 10개의 하늘을 차례차례 둘러 본다. 베아트리체는 이제 자기 자리로 가고, 성 베르나르트의 도움으로 드디어 아베마리아 성가가 울리는 가운데 단테는 신의 성스러운 얼굴을 뵙게 되고, 삼위 일체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지복의 경지에 이른다.
내용 연구
생의 절반 : 단테는 인간의 생애를 70세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 절반은 35세이다. 인생은70이라는 설은 성경의 시편에 있는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올바른 길 : 선하고 행복한 길
어두운 숲 속 : 무지와 인간성 결여 및 부패의 상징. 곧 죄 많은 인생
깊은 잠 : 영혼의 잠. 선과 죄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
어느 언덕 : 숲과의 반대 개념. 즉 행복한 천국을 상징함
공포로 쥐어 짜던 계곡 : 죄로 물든 세상
유성(遊星) : 태양
산 사람을 돌려 보낸 적이 없는 : 지옥이나 연옥, 그리고 천국도 다음에 가는 곳이다. 한 번 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민첩한 표범 : 화려한 겉모습 때문에 육욕(肉慾)의 유혹이나 관능(官能)의 향락을 상징함.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자 : 폭력 또는 오만함을 상징함
암늑대 : 탐욕을 상징함
해가 비치지 않는 곳 : 어두운 숲
그는 오랜 침묵으로 - 잠겨 있었다 : 단테 이전의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고전 연구가 등한시되어 왔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이 아니지만 : 유령을 뜻함
롬바르디아 : 이탈리아 북부 지방
만토바 : 롬바르디아 지방의 도시
아우구그투스 : 옥타비아누스 황제
일리온 : 트로이가 전쟁으로 멸망함
안키세스 : 트로이아의 영웅 아이네이아스 아버지
베르길리우스 :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단테가 심취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나 윤리학에 통달하고 있었으며,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이상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단테의 갈망을 풀어 주며 초라한 영혼을 인도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인물이다.
영예를 안겨 준 : 단테는 이미 '단시', '새로운 삶'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다른 길 : 천국으로 이끄는 길
비슷한 짐승들 : 탐욕에 따르는 여러 가지 죄악
사냥개 : 해석이 구구하다. 일반적으로 단테의 친구이며, 베로나의 왕 칸그란데 델라 스칼라를 가리킨다고 한다.
펠토르와 펠토르 사이 : 지금까지 '하늘과 땅 사이'로 해석해 왔으나 오늘날에는 지리학적인 해석도 하고 있음
카밀라, 에우리알로스, 투르누스, 니소스 : 아이네이아스가 이끈 트로이아 유민들이 이탈리아에 도착한 후 라틴 인들과 벌인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마왕의 질투 : 마왕 루치페로의 질투. 이 마왕은 재앙의 짐승으로 탐욕을 모르고 사는 인간의 행복을 질투한다.
영원한 곳 : 지옥
제 2의 죽음 :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 첫 번째 죽음이고, 영혼이 소멸하는 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 지옥의 형벌을 받는 자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영혼의 소멸을 원한다. '요한계시록' 9장 6절 참조
만족해 가는 영혼들 : 연옥의 영혼
더 훌륭한 영혼 : 단테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
황제 : 하느님을 가리킴
하느님 : 베르길리우스는 예수 이전에 태어났으므로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성 베드로의 문 : 천국에 이르기 위한 연옥의 문, 이 문은 천사가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생의 절반을 보낸 나는 -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 숲 속에 빠져 듦(세속의 죄에 빠져 든 것을 의미)
그러나 어느 언덕 기슭, 내 마음을 - 두려움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 : 커다란 유성 빛의 인도(신의 인도로 숲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의미)
그러나 보라! 오르막길에 접어들었을 때 - 짐승에 대한 공포를 감싸 주는 것 같았다. : 표범의 등장(악의와 육욕을 의미하는 표범이 길을 가로막음)
아직 일렀으니 - 대기(大氣)도 두려워 떠는 것 같았다. : 사자의 등장(폭력과 교만을 의미하는 사자가 길을 가로막음)
잠시 후 나타난 암늑대 한 마리 - 나를 몰아 넣었기 때문이다. : 암늑대의 등장(무절제, 탐욕을 의미하는 암늑대가 길을 가로막음)
그렇게 협곡으로 쫓길 때 눈앞에 - 나를 살려 주시오. : 낯선 사람의 등장
지금은 사람이 아니지만, 먼 옛날 - 하고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이었다. : 정체가 밝혀짐(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
오, 모든 시인의 영예이며 빛이신 그대여, 나는 - 맥박이 부르르 떨리나이다. : 베르길리우스의 찬양과 구원의 요청
그는 눈물 글썽한 나를 보고 - 이 세상에서 내보낸 것이다. : 숲에 대한 베르길리우스의 설명(짐승과 사냥개의 대비)
그러므로 너 자신을 위하건대 - 황제가 택하는 자 행복하리라. : 베르길리우스의 안내(지옥, 연옥, 천국)
나는 그렇게 말했다. - 나는 그를 따라갔다. : 단테의 동의와 요청(함께 길 떠남)
이해와 감상
1304년에 시작되어 단테가 죽을 때까지 쓰여진 이 작품의 원제목은 "코메디아(La Commedia)"인데 이것은 희극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이전의 비극과는 달리 행복하게 결말을 맺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옥, 연옥, 천국의 3부곡으로 된 이 작품은 각 편이 33장, 총서1장 등 모두 1백 장으로 되어 있다. 100이라는 숫자는 그 당시 가장 완전한 숫자로 알려졌고, 각 편을 33장으로 구성한 것은 기독교의 삼위 일체 교리에서 얻어진 것으로, 단테의 깊은 신앙심을 나타낸다. 숲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주인공이 인간 이성의 상징인 베르길리우스와 소년 시절의 연인이었던 베아트리체의 안내로 지옥,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러 삼위 일체의 비밀에 접하는 순례기인 <신곡>은 고뇌를 통하여 영혼의 정화를 성취시키는 인간 행로를 상징한 것이며,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신학적/철학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그 당시의 학자간에 공통어였던 라틴 어가 아니라 새로이 형성되어 가기 시작한 지방어인 이탈리아 어로 썼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출처 : 김윤식·김종철 저 문학교과서)
감상 2
이 작품의 순서가 지옥에서 연옥으로 다시 천국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부터가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 고통을 받는 죄인들의 장소인 지옥과 연옥은 고뇌의 상징이며, 유혹과 본능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유혹과 죄악에 물들기 쉽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단테가 이런 과정을 거쳐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진정한 고뇌를 통하여 인간이 고결하게 영혼을 정화할 수 있다는 그 나름의 인생관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단테가 종교와 인생에 대하여 내린 해석이요, 길의 제시가 된다. 이 작품의 제목이 본디 희곡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도 그런 의미를 함축한다. 원래 비극과 같이 처절한 몰락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행복을 얻는 것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인 것이다.
소년 시절의 연인이었던 베아트리체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르스가 단테와 함께 실명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 작품의 특별한 장치이다. 실명으로 등장함으로써 자기 스스로가 겪은 것이거나 실제로 있는 일처럼 보이게 하는 사실적 제시의 효과를 거두면서, 또한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더 분명해진다는 점에서 간접성을 띠는 이중적 효과가 있다. 또, 이 작품은 라틴 어가 아니라 이탈리아 어로 썼다는 점에서 자국어 문학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문학사적 의의를 가지기도 한다. (출처 : 김대행·김동환 저 문학교과서)
심화 자료
신곡의 구조도
출처 : 김윤식 김종철 문학교과서
단테의 지옥편 'Dante's Infemo 그림
http://www.iath.virginia.edu/dante/images/magnifier2.html
'신곡' 의 의의
'신곡' 은 지옥, 연옥, 천국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기 33편의 칸토(곡)로 구성되어 있고 1 편인 지옥편에 서장이 달려 있어 총 100칸토이다. 이것은 완벽한 수인 10의 제곱을 나타내는 것으로 작품의 유기적 전체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각 부는 동심원의 구조를 이루면서, 지옥편에서는 사탄이 자리잡고 있는 지구의 중심을 향하여 점차 내려가는 이야기를, 연옥편에서는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서의 여행을, 천국편에서는 지구의 외곽에 있는 행성들로부터 지고천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을 묘사한다.
이처럼 '신곡' 은 중세적 이념의 획일적 보편성을 나타내기 위한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지옥 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여행자의 윤리적, 정신적 체험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보여 주지만, 그 세부에 있어서는 당대의 사회 현실에 확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온갖 종류의 방종과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등장하여 생생한 현실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신곡' 이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비통일적이고 첨가적이며 병렬적인 증세의 구성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세부에서는 사실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구어체와 유머러스한 문체를 사용하면서 다양한 어조로 현실의 문제를 형상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 역사와 전설이 만나는 마당이 되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의 창작 동기
인간이 이 세상에서의 목적과 저 세상에서의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데, 그 목적은 신에 의하여 정해진다고 단테는 생각하였다. 따라서, 현세에서의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윤리적이고 지적인 미덕이 명령하는 대로 살아가야 하며,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현세의 행복으로 안내하는 것은 황제의 의무이며, 천국의 행복으로 안내하는 것은 교황의 의무라는 것이 단테의 생각이었다. '신곡'에서는 이러한 시상을 우의적으로 나타내었다. 단테는 정치적, 종교적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영혼의 행복을 찾기 위하여 그 과정을 탐색하는 의미로 이 작품을 썼다고 할 수 있다.
베아트리체(Beatrice)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단테가 9세 때 첫눈에 반해(단테는 "그때부터 사랑이 내 영혼을 압도했네"라고 씀) 1321년 죽을 때까지 자신의 생애 대부분과 시 작품을 바치며 사모한 여인.
단테는 40년에 걸쳐 완성한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 베아트리체를 찬미했다.
베아트리체는 피렌체 귀족의 딸인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 여인은 시모네 데 바르디와 결혼했다가 1290년 6월 8일 24세의 나이로 죽었다. 단테는 서정시를 덧붙인 산문 작품 〈새로운 인생 La vita nuova〉(1293경)에서 베아트리체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연대기를 썼다. 여기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와의 만남, 그녀의 아름다움과 선량함에 대한 찬미, 베아트리체가 자기에게 상냥하게 대하거나 냉정하게 대할 때 그가 보인 강한 반응, 두 사람의 인생에 일어난 사건에 관해 쓰고 있으며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의 본질을 설명한다. 또한 〈새로운 인생〉은 베아트리체의 죽음을 전해들은 날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 사건이 일어난 뒤 괴로움에 가득 찬 마음으로 쓴 몇 편의 시도 담겨 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관해서 아직까지 어떤 여자에 대해서도 씌어진 적이 없는 작품"을 쓸 수 있을 때까지 더 이상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쓰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이 약속은 〈신곡〉으로 실현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쓴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지옥편 Inferno〉에서 그의 중재자가 되고, 〈연옥편 Purgatorio〉을 통해서는 그가 닿고자 하는 목표가 되며, 〈천국편 Paradiso〉에서 그를 이끌어주는 안내자로 등장한다. 〈연옥편〉에서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순간 9세 때와 같이 압도당하게 되고, 연옥을 여행하는 동안 베아트리체의 존재는 줄곧 눈부시게 그를 비추다가 천국으로 올라간다. 정신적으로 승화한 이러한 사랑의 표현은 단테가 완전히 영적인 존재에 몰입하는 것으로 끝난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신곡"과 "데카메론"
"신곡"과 "데카메론"은 비슷한 시기의 작품이면서도 서로 대조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신곡"은 중세 말기의 정신적 양식의 표현으로 보다 종교적이고 영적이며 보편적인 세계를 다룬다. 반면에 "데카메론"은 르네상스 초기의 육체적인 양식의 표현으로 개인의 본능과 욕정에 관한 노골적인 표현을 다루는 등, 보다 인간 중심적인 주제가 중심이 된다. 따라서 "신곡"에는 중세의 비장미(悲壯美), "데카메론"에는 근대의 풍자와 골계미(滑稽美)가 두드러져 나타난다.
[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단테…내세의 시간여행 하나님의 섭리 터득
슬픈 사랑과 시를 승화시켜 지순지고(至順至高)한 경지까지 끌어올렸던 단테는 ‘신곡(神曲)’을 통해 자신이 평생 고민했던 종교 문제와 정치·윤리문제들을 보여주면서 그 문제의 해답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주의 주도 피렌체를 개척한 로마인의 후손으로 귀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단테는 1265년 5월 피렌체에서 알리기에로 디 벨린치오네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에게 알려진 단테라는 이름은 성이 아니라 이름이다. 원래 세례명이 드란데였는데 그것이 변해 단테라고 간단히 부르게 됐다.
피렌체는 꽃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피렌체는 평화와 사랑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피비린내 나는 정쟁(政爭)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끝없는 싸움이 전개되던 도시였다. 단테가 태어나 35세 추방당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그의 생가의 주소는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웠던 피렌체의 중심부에 위치한 산타 마르게르타 3.중세풍의 우뚝 솟은 3층 벽돌집인 그의 생가 바깥 벽면에는 청동으로 된 단테의 흉상이 있다. 거기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단테가 사랑했던 여인 베아트리체의 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단테는 그토록 사랑했던 고향 피렌체에 묻히지 못하고 라벤나의 성 프란체스코 사원에 잠들어 있다.그는 35세에 추방돼 이곳저곳 유랑생활을 하면서 피렌체 시민들이 자신을 계관시인으로 맞이해 줄 것을 소원했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1321년 세상을 떴다.
오늘날 단테 묘소 건물 천장에는 사원을 밝히는 조그마한 등 하나가 인상적으로 달려 있다.이 등은 피렌체시가 1908년 달아준 것이다. 피렌체 시민들은 단테가 숨진 뒤에야 그의 위대성을 깨닫고 그의 유골을 고향으로 옮기려 했으나 실패했다. 대신 이 사원에 등을 달고 해마다 단테가 세상을 뜬 날 불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단테가 19년에 걸쳐 완성한 ‘신곡’은 서곡 1가,지옥편 33가,연옥편 33가,천국편 33가 등 모두 100가로 이루어진, 지옥으로부터 천국에 이르기까지의 순례담으로 당시에는 속어였던 이탈리아어로 쓰여졌다.
신곡은 단테가 35세 되던 1300년 4월8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성 금요일 새벽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어두컴컴한 산림속을 방황하고 있던 단테는 로마의 시성 베르길리우스를 만나 그의 안내에 따라 피안의 세계로 간다. 지옥은 전체 아홉 단계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하부로 내려갈수록 죄가 무거운 영혼들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연옥의 문을 지키는 칼을 든 천사는 단테의 이마에 7개의 P(Peccata,죄)자를 그려주면서 천국에 이르면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연옥에서 속죄해야 하는 오만 질투 분노 태만 탐욕 폭식 색욕의 7가지 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연옥은 위로 올라가면서 7개의 두렁길로 갈라진다. 단테가 그 두렁길을 통과할 때마다 천사가 그의 이마에 새겨진 P자를 하나씩 지워준다.
그때 황금의 촛대를 든 신비로운 행렬을 선두로 하여 천사가 꽃을 뿌리는 사이로 베아트리체가 나타난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방황과 죄를 힐책한다. 그리고 단테로 하여금 망각의 레테 강물로 몸을 적시게 하고 그 물을 마시게 함으로써 모든 과거를 잊고 깨끗한 정신으로 천국을 향하여 날아갈 수 있도록 한다. 단테는 9개의 천계를 통과하여 드디어 ‘제10하늘’인 광명천(光明天)에 이른다. 그곳은 우주의 가장 높은 곳이며 빛나는 천사와 성인들이 계단에 늘어앉아 있다. 단테는 성 베르나르드의 안내로 찬양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삼위일체의 성스런 교리를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 신곡의 결말이다.
영국의 문예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은 ‘신곡’을 가리켜 ‘중세 1000년의 침묵의 소리’라고 격찬했다. 단테의 ‘신곡’은 기독교 문학 중 최고로 평가되고 있는 신앙의 찬가이며 기독교적 세계관을 잘 드러낸 걸작이다.
이 작품이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이유는 작품에 가득한 신앙적 알레고리 때문이다.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단테는 어두운 숲속에 놓인다. 어두운 숲은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한 영혼의 상태를 뜻한다. 단테가 ‘신곡’의 주제를 ‘영혼의 상태’라고 한 이유가 여기있다.
‘신곡’의 원제목은 ‘코메디아(La Commedia)’이다. 코메디아는 희극이라는 뜻이 아니고 처음에는 비참한 운명,곧 지옥에서 허덕이나 ‘나중’에 행복한 결말,곧 천국으로 끝나는 이야기라는 중세적 의미를 지닌다.‘나중’이란 우주적인 천상의 시간이라는 기독교적 의미다. 단테적 시간은 신의 구원과 천상의 은총에 참여하게 될 내세의 시간까지를 포함하고 있고 단테의 공간은 우리의 삶의 터를 지옥과 연옥과 천상까지로 확대하고 있다.
신곡 속의 단테는 인류 영혼의 대표자다. 지옥과 연옥은 고뇌의 상징이며 인간 본능과 유혹의 세계이다. 단테가 이런 과정을 거쳐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은 인간은 고뇌를 통해 영혼을 고결하게 정화할 수 있다는 단테의 세계관을 보여준다.‘신곡’의 주제는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서의 온갖 죄를 없애고 인간을 행복한 공간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보통 사람들은 청소년기에 큰 꿈을 품었다가도 꿈을 실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조금씩 그 꿈의 크기를 줄인다. 현실과 타협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했던 사람들은 꿈을 실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체험하면 체험할수록 더욱 웅대한 꿈을 꾼다. 단테는 중세의 마지막이었던 당대의 험한 시대고(時代苦)와 끝까지 대결하면서 ‘신곡’을 완성한 위대한 영혼이다.
‘신곡’은 100년이 넘는 기간 서구세계의 모든 고등교육의 장에서 주요 교과목이 되어왔고 수많은 시인의 지침서로서 자양분을 제공해줬다. 그를 세계 4대 시성(詩聖) 중 1인으로 일컫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혜니(경문대 교수)출처 :
http://www.kmib.co.kr/html/kmview/2002/0620/091862406723111411.html
단테(Alighieri Dante)
1265 이탈리아 피렌체~1321 이탈리아 라벤나.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서(西)유럽 문학의 거장. 후에 〈신곡 La divina commedia〉으로 제목이 바뀐 기념비적인 서사시 〈희극 La commedia〉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위대한 중세문학작품은 인간의 속세 및 영원한 운명을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아주 포괄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寓話)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박학다식함, 당대 사회문제의 예리하고 포괄적인 분석, 언어와 시상(詩想)의 창의성 등은 놀라울 정도이다.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를 시어(詩語)로 선택함으로써 단테는 문학발달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조국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시가(詩歌) 문화에 표현능력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가 수 백년 동안 서유럽에서 문학어로 쓰이게 되는 데 기여했다. 시 이외에도 중요한 이론적 저술들을 썼는데 그 범위는 수사론에서부터 도덕·철학 및 정치사상에까지 이른다. 고전전통에 매우 정통한 사람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보에시우스의 작품들을 인용했으나 비전문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당대 최신의 스콜라철학과 신학을 매우 능숙하게 활용했다. 박학다식함과 당대의 뜨거운 정치논쟁에 개인적으로 연루된 사건들로 인해 중세정치철학의 주요 논문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 De monarchia〉을 썼다.
초기생애와 〈신생〉
단테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대부분 그 자신의 입을 통해서이다. 1265년 피렌체에서 해가 쌍둥이 성좌를 운행하고 있을 때(5. 21~6. 20) 태어났으며 평생 고향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황제를 지지했다 하여 추방당한 피렌체(귀족)파인 기벨린 당에 대항하여 기병으로 싸운 이야기, 위대한 스승 브루네토 라티니와 재능있는 친구 구이도 카발칸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또한 처음으로 예술적인 모험을 시작한 시(詩)문화를 비롯하여 시작(詩作)을 하는 과정에서 구이도 구이니첼리의 도움을 받았음을 기술하고 그의 가문은 고조부인 카차구이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카차구이다는 〈천국편〉에 나오는 노래 중편에 등장하며 단테의 성(姓) 알리기에리는 카차구이다의 부인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그의 먼 조상들이 아르노강 둑을 따라 정착했던 로마 병사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에서 긍지를 느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단테는 더 가까운 가족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신곡〉에는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언급도, 형제나 누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신생 La vita nuova〉에 누이 1명이 언급되어 있는 듯하며, 아버지가 단테와 친구 포레셰 도나티 사이에서 농담조로 주고받는 무례한 소네트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단테는 1265년에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이 지지한 구엘프당이 1266년에야 망명에서 돌아왔다는 사실로 볼 때 단테의 아버지는 꼭 망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 만큼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단테가 14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이름은 벨라였지만 가족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는 라파 디 키아리시모 치아투피와 재혼하여 아들 프란체스코와 딸 가에타나를 두었다. 단테의 아버지는 1283년 이전에 죽은 듯하며 당시 성년에 들어선 단테는 고아로서 아버지 소유의 재산을 팔 수 있었다. 아버지 알리기에리는 자식들에게 피렌체와 시골에 있는 소유지를 물려주어 대단하지는 않지만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재산을 남겼다. 이 무렵 단테는 이미 1277년부터 약혼한 사이였던 젬마 도나티와 결혼했다.
단테의 인생은 황제파인 기벨린 당과 교황파인 구엘프당 사이에 벌어진 오랜 대립의 역사에 의해 결정되었다 (→ 색인 : 구엘프와 기벨린). 13세기 중반 이후 그들의 대립관계는 잔인하고 치명적이었다. 두 파는 번갈아가며 우선권을 획득했는데 그때마다 상대에게 무서운 형벌을 가했고 유형을 내렸다. 1260년에는 얼마동안 지배권을 쥐고 있던 구엘프당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패했으나(〈지옥편〉 10곡, 32곡), 1266년에는 교황과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베네벤토에서 기벨린당을 물리치고 그들을 영원히 피렌체에서 쫓아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단테는 전후(戰後)의 긍지와 영토 확장주의의 분위기로 가득찬 도시에서 토스카나 전역에 정치적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열망을 품고 성장할 수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로마와 고대 도시국가의 문명과 비교했다.
피렌체는 정치력을 신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피렌체의 지적 우월권을 확보하는 데 지도적인 인물은 망명에서 돌아온 브루네토 라티니였다. 〈지옥편〉에 묘사된 단테와 위대한 스승의 만남은 단순히 한 학생과 선생의 만남이라기보다는 한 세대 전체가 그들의 지성적 사부와 만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티니는 젊은 세대 가운데 구이도 카발칸티, 포레세 도나티, 단테를 포함한 우수한 인재들에게 새로운 민중 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그들의 지식과 작가로서의 역량을 조국 피렌체를 위해 쓰라고 격려했다.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단테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천국편〉(8곡, 117)에서 단테는 사람이 도시국가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사정은 인간에게 훨씬 더 나빴으리라는 생각은 어떤 논쟁의 여지도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당대의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라티니를 "피렌체인들을 순화시키고 그들에게 좋은 화술(話術)을 가르치고 우리 공화국을 정치 철학, 즉 정치론(la politica)에 따라 지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선도자이자 스승"이라고 불렀다. 라티니의 가장 중요한 저서 〈 보전(寶典) Les Livres du Tresor〉(1262~66)은 라티니가 망명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기에 프랑스어로 씌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전 인용문의 보고였으며, 그책에 담긴 교양은 바로 단테의 교양이었다. 이 저서 제2권의 첫 부분에는 일찍이 라틴어가 아닌 근대 유럽 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Ethics〉의 일부가 실려 있다. 라티니는 철학·윤리학·정치학 분야의 거의 모든 논제나 주제를 다루는 데 키케로와 세네카의 작품을 자유롭게 인용하였고, 통치 문제를 다룰 때는 자주 〈구약성서〉의〈잠언〉을 인용했는데, 이는 단테도 마찬가지였다. 라티니의 저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성서,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의 글들이 초년의 단테에게 문화적 지주가 되었다. 특히 로마는 가장 고무적인 동화(同化)의 원천을 제공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키케로가 숭배되기 시작했고, 키케로는 시민으로서의 지식인의 존재를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좋은 본보기가 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단테의 교양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된 라티니의 유산에서 또 하나의 로마적 요소는 영광에 대한 사랑, 즉 전력을 다해 남보다 뛰어나려는 노력을 하면서 명성을 추구하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라티니는 〈지옥편〉(15곡)에서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방법을 단테에게 가르쳐주는 인물로 찬미된다. 작별을 고하며 라티니는 그의 저서 〈보전〉을 읽으라고 권하는데, 그는 자신이 그 책을 통해 계속 기억되리라 믿는다.
단테에게는 뛰어난 지적·미적 자신감이 있었다. 〈신생〉(3장)에서 자신이 말했듯이 그는 18세가 되었을 때 이미 혼자 시작(詩作) 기술을 터득한 상태였고, 〈신생〉의 첫 시가 된 초기 소네트 1편을 당대의 가장 유명한 시인들에게 보냈다. 그가 받은 여러 답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카발칸티에게서 온 것이며, 그로 인해 두 사람의 위대한 우정관계가 시작되었다.
위대한 정신들의 만남이 모두 그렇듯이 단테와 카발칸티의 관계도 복잡한 것이었다. 〈신생〉의 제3장에서 단테는, 그가 첫번째 책을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쓴 것은 카발칸티의 권유에 따른 일이었다고 말한다. 뒤에 이탈리아어로 쓴 〈향연 Convivio〉과 라틴어로 쓴 〈속어론(俗語論) De vulgari eloquentia〉에서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현지 토속어를 변호하는 첫번째의 위대한 르네상스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은 그에게 현지 토속어로만 글을 쓰라고 설득하였던 카발칸티와의 논의에서 점차 무르익은 것이었다. 단테는 그에게 이런 지적인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신생〉을 가장 훌륭한 친구(primo amico)인 카발칸티에게 바쳤다.
그러나 뒤에 단테가 피렌체의 6인 통령(統領)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을 때 카발칸티를 추방하려는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카발칸티는 망명생활 동안 말라리아에 걸려 1300년 8월에 사망했다.
〈지옥편〉(10곡)에서 단테는 그의 위대한 친구에 대한 기념문을 썼는데 이것은 라티니에 대한 추도문과 마찬가지로 비통한 찬사였다. 두 경우 모두 단테는 그들에게 입은 은혜와 그들에 대한 애정을 기록했고, 그들이 지닌 위대한 장점들을 평가했지만 각각의 경우에 마찬가지로 그들과 헤어진 사실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위해서 옛 친구와 스승들이 주었던 것과는 다른, 더 강력한 미적·지적·정신적 후원을 찾아야만 했다. 카발칸티의 평가와는 달리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정신적 안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단테가 창조한 베아트리체의 형상은 모든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허구의 여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단테의 사상이 변화하고 경력의 부침(浮沈)을 겪음에 따라 베아트리체 역시 그의 작품에서 크나큰 변화를 겪는다. 〈신생〉에서는 신성한 존재였으나 〈향연〉에 나오는 칸초네에서는 세속적 여인으로 나오며, 〈신곡〉에서 더욱 깊은 이해력을 지니고 등장하여 단테를 '속된 무리'로부터 인도 해준다.
〈신생〉(1293경)은 단테가 생전에 만든 2권의 시집 가운데 첫번째 것이며, 2번째 작품은 〈향연〉이다. 둘다 운문과 산문이 혼합된 작품(prosimetrum)인데, 두 작품에서 산문은 약 10년의 기간을 두고 지은 시들을 서로 연결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사용되었다. 〈신생〉은 1283년 이전부터 대략 1292~93년에 쓴 시들을 모은 것이고 그보다 더 규모가 크고 야심적인 작품 〈향연〉에는 1294년 직전부터 〈신곡〉을 쓸 때까지 쓴 가장 중요한 시들이 실려 있다.
단테가 '작은 책'(libello)이라 부른 〈신생〉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책은 42개의 짤막한 장(章)으로 나뉘고 25편의 소네트, 1편의 '발라타', 4편의 칸초네에 관한 주석이 실려 있다. 5번째 칸초네는 베아트리체의 죽음 때문에 극적으로 중단되고 만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시 자체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산문으로 된 주석이 제공해주는데, 그 이유는 일부의 시들이 실제로는 거기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시기에 씌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 단테가 9세였을 때 동갑인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일, 18세가 되었을 때 그녀가 단테에게 건넨 인사,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감추기 위해 단테가 강구한 여러 방편, 그녀가 더 이상 아는 체하지 않았을 때의 위기감, 그녀가 그를 경시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갖게 된 고뇌, 결국 그 고뇌를 초월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미덕만을 노래하기로 한 결심 등을 다루고 있다. 또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한 젊은 친구의 죽음, 베아트리체 아버지의 죽음, 단테 자신의 예언적인 꿈) 끝에 마침내 베아트리체가 죽고, 슬픔에 잠겨 있는 동안 일시적으로 베아트리체를 대신하여 호감을 주는 젊은 여인 '고귀한 부인'(donna gentile)이 유혹의 손길을 뻗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는 베아트리체에게로 돌아가게 되며 그녀를 영원히 찬양하게 된다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단테는 시간이 좀 흐른 뒤 그녀에 대해서 "일찍이 어떤 여인에 대해서도 쓴 일이 없는" 시를 쓰리라 결심한다.
그러나 이처럼 자서전적인 목적으로 씌어진 듯이 보일지라도 〈신생〉은 기이할 정도로 개인과는 관계가 없다. 이 책의 배경을 살펴보면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세부적인 묘사를 피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그래서 베아트리체가 실제로 누구인가를 따지는 일은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주석에 사용된 언어는 높은 수준의 보편성을 고수하며, 사람의 이름이 명시된 일도 드물다. 예를 들면, 카발칸티는 단테의 '가장 좋은 친구'로 3번 언급되며, 단테의 누이는 '가장 가까운 혈연으로 연결된 여인'으로 언급된다. 단테는 감정적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를 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감정적 반응이 보이지 않게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인다. 단테가 10여 년에 걸쳐 쓴 시들을 배치해 넣은 시집은 좀더 큰 전체 구조라든가 시어(詩語)의 보편성 등을 지방 시인들의 작품수준을 능가해보겠다는, 초기부터 변함없이 견지해온 그의 야심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망명과 〈향연〉·〈제정론〉
단테의 초기 망명생활에 관한 정보는 아주 부족하지만 대략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처음 단테는 추방된 구엘프 백당에 들어가 군사적 탈환을 모색하려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듯하다. 그러나 이 노력은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하였음이 드러났다. 분명 단테는 피렌체의 또다른 추방자인 기벨린당원들에게 점차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고, 저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귀환을 보장받기로 결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향연〉(1304~07경)이다.
단테가 계획한 것은 15권으로 된 저서였는데, 그 가운데 14권에는 여러 다른 칸초네에 관한 주석을 쓰기로 했다. 그는 4권밖에 완성하지 못했으나 다양한 방법으로 완성된 이 주석들은 시의 영역을 넘어 아마추어 철학자가 닥치는 대로 많은 것을 늘어놓은 교훈들의 개요가 되었다. 단테가 〈향연〉에서 의도했던 것은 〈신곡〉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도전적인 도덕적·정치적 쟁점들을 적절한 윤리적·형이상학적인 구조 속에 담아내려는 것이었다.
〈향연〉 제1권은 많은 부분이 감동적이며 체계적으로 속어를 옹호하는 데 씌어졌다. 미완성에 그쳤으나 이 책과 짝을 이루는, 〈속어론 De vulgari eloquentia〉(1304~07경)은 주로 품위있는 시어(詩語)를 바탕으로 하는 시작(詩作) 기술에 관한 소(小)논문이다. 단테는 〈향연〉에서 속어의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제1권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 영광된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한다.
"이것이 새로운 빛, 새로운 태양이 되리라. 해묵은 태양이 질 때 떠오르게 될 새로운 태양은, 빛을 비추지 않는 해묵은 태양 때문에 그늘과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어주리라."
단테가 묘사했던 혁명은 바로 당시 지배계층이던 성직자들의 라틴 문화가 황혼기로 접어들고 속된 지방 도시문학의 출현을 의미했다. 단테는 자신이 이 둘 사이에 있으며, 새롭게 참정권을 얻은 민중 독자들을 교육시키는 철학자이자 중개자라고 생각했다. 단테가 공표했던 이탈리아 문학은 곧 주도적인 문학이 되었고 이탈리아어는 유럽의 주도적인 문학어가 되었으며 이러한 위치는 3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향연〉에 엿보이는 단테의 성숙한 정치·철학 체계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 이 저서에서 그는 처음으로 제국의 전통, 특히 로마 제국의 전통을 옹호하는 감동적인 글을 썼다. 단테는 〈향연〉에 영혼이 신에게 귀의하게끔 도와주는 인간 고유의 욕구, 즉 '오르메'(horme)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 욕구는 본보기와 교리를 통한 적절한 교육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잘못 인도되어 파괴력으로 사회를 분열시키게 된다. 〈향연〉에서 단테는 정치 사상과 인간의 욕망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는 바를 결부시켰다. 즉, 교황이 세속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면 그때는 인간의 욕망을 신에게 향하도록 하는 적절한 정신적 본보기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황제의 권한이 약해진다면 그때는 사람의 의지에 물리적 제한을 가할 만한 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테는 이와 같은 요인이 이탈리아가 빠져들었던 혼돈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런 상황을 치유하려는 바램을 품고 〈신곡〉이라는 서사적 과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 처음에는 엄청난 희망을 품다가 나중에는 더 큰 실망에 빠져들고 말았다. 1308년 11월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공(公)이 독일 왕으로 뽑혔고, 보니파키우스의 뒤를 이은 교황 클레멘스 5세가 1309년 7월 하인리히를 로마의 왕으로 선포하고 그를 로마로 초대했다. 하인리히는 로마의 성(聖)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을 쓰게 될 예정이었다. 다시 한번 황제의 통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탈리아를 흥분시켰으며 단테도 황제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의 출현으로 평화가 회복되면서도 황제가 정신적으로는 종교적 권위에 예속할 것을 선언케 되리라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이상이 곧 실현되리라고 생각했다. 1310년 이탈리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리히 7세의 매력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북방에서 허비한 나머지 적들에게 세력을 규합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단테가 주시했던 대로 이 성스러운 운명의 순간에 반대하는 데 가장 앞장선 인물은 피렌체 시정부였다.
이 시기에 단테가 쓴 중요한 정치적 서간체 작품들은 그가 전(全)이탈리아에서 큰 존경을 받고 개인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서간체 작품에서 그는 하인리히를 찬양하며 부지런히 일을 처리하라고 간청했고 피렌체 시정부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후의 행동에서 단테가 보니파키우스의 이중성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클레멘스 자신도 하인리히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행동은 단테가 가장 위대한 논쟁서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1313경)를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향연〉에서 다루었던 정치적 논쟁을 확장시켰다. 클레멘스의 속임수에 격분한 분위기 속에서 단테는 그가 지닌 논쟁의 힘을 교황이 정치적 통치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 다시 말해 황권의 정치적 권위가 교황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을 반대하는 데 쏟았다. 단테는 〈제정론〉의 마지막 문장에서 인간을 위해 신이 마련한 목적지는 2가지라고 서술한다. 하나는 지상낙원의 형태로 나타나는 현세의 행복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낙원의 형상으로 구현되는 영생의 행복인데, 이렇게 목적지는 다르지만 이 2가지가 서로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현세의 행복이 어떤 면에서는 영생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므로 로마 정부가 절대 로마 교황직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키며 끝난다. 단테가 지녔던 문제는 그가 비유적인 언어와 역사적 예를 들어 이야기했더라면 더 잘 옮길 수 있었을 미묘한 관계를 이론적 언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교황과 황제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단테는 교회에 대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가지고 있었던 선의(善意)와 같은 특수한 역사적 사례들을 지적하며 그러한 관계가 가치있는 것임을 시사했다. 하인리히 7세의 임무 실패에 대해 단테가 실망한 이유는 하인리히의 초기 후원자가 외관상 클레멘스 교황으로 보였고 또 그 같은 상황이 두 최고 권력가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재수립하는 데 이상적으로 보였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
〈신곡〉
단테의 망명시절은 그 자신도 거듭 되풀이하여 말하듯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어렵게 편력하는 시기였다. 이에 대해서는 〈천국편〉(17곡)에서 카차구이다의 "남의 빵이란 얼마나 쓴 것인지 또 남의 층층대를 오르고 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라는 감동적인 비가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단테는 추방기간 동안 시를 씀으로써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는데, 이 위대한 시는 1308년 이전에 쓰기 시작된 듯하며 죽기 바로 전인 1321년에 끝을 맺었다. 아울러 그는 마지막 몇 년간 북부 이탈리아의 많은 귀족 저택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라벤나에서 유명한 프란체스카의 조카 구이도 노벨로 다 폴렌타의 환대는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단테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당시 최고의 문필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구이도 자신이 추도사를 진행한 훌륭한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신곡〉의 구성은 단순하다. 일반적으로 단테 자신으로 추정되는 한 인간이 기적적으로 저승세계로 여행 할 수 있게 되어 지옥·연옥·천국에 사는 영혼들을 찾아가게 된다. 그에게는 안내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이고 또 하나는 '천국'을 소개하는 베아트리체이다. 1300년 부활제인 성(聖)금요일 저녁부터 부활절(일요일)을 약간 넘긴 시간에 일어난 이 허구의 만남을 통하여 단테는 추방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물론 실제로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그는 이미 추방된 몸이었음). 이런 식의 구상을 통해 단테는 망명 중에 겪게 될 이야기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재난에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를 설명하고 이탈리아가 처한 난관의 해결책까지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유랑은 한 나라의 제반문제를 포괄하는 소(小)우주가 되면서 아울러 인간의 타락상을 나타내게 된다. 단테의 이야기는 이처럼 역사적 특수성과 전형성을 지닌다. 〈신곡〉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 구성 요소는 곡(曲 canto)이다. 이 시는 100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크게 〈지옥편〉·〈연옥편〉·〈천국편〉의 3편으로 나뉘어져 기법상 각 부마다 33개의 곡이 있다. 그러나 〈지옥편〉에는 시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하는 곡이 하나 더 있다. 대부분의 곡은 136~151행 정도의 길이이며, 시의 운율체계는 3운구법(韻句法:aba bcb cdc 등)이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신성한 숫자인 3이라는 숫자가 이 작품의 어디서나 나타난다.
단테의 〈지옥편〉은 위치상으로나 목적상으로 볼 때 그보다 앞선 위대한 고전들과는 다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Odyssey〉(7권)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d〉(6권)에서는 저승세계의 방문이 이 중간에 나온다. 왜냐하면 이 책의 중간 부분에서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테는 전통을 따르되 실제로는 저승세계를 방문하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하게 함으로써 전통을 변형시켰다. 그 이유는 그의 시의 정신적 유형이 고전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이기 때문이다. 단테의 지옥으로의 여행은 세상을 떠나는 영혼의 행동을 나타내며, 또한 이것은 우연히도 그리스도 자신이 죽은 계절과 일치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단테의 방법은, 찬란하나 결함있는 반역 천사장 루시퍼를 비롯하여 그의 타락한 천사들이 맨 먼저 모습을 나타내는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과 유사함). 〈지옥편〉은 잘못된 출발을 나타내는데, 이곳에서 주인공 단테는 타락한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데 다소 방해가 되었던 해로운 가치들을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지옥편〉의 복귀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단테가 지옥에 떨어진 망자들의 명부를 보는 것이 이 시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중립자들, 지체 높은 이단자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필리포 아르젠티,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 피에로 델레 비녜, 브루네토 라티니, 성직 매매 교황들, 오디세우스, 우골리노 등은 엄청난 힘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옥의 방문은, 베르길리우스와 후에 베아트리체가 설명하듯이, 진정한 회개를 시작할 수 있기 전에 거쳐야 할 극단적인 방법, 즉 고통스럽지만 꼭 겪어야만 할 일이다. 이것은 〈지옥편〉이 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왜 불완전한지를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흔히 34곡에서 마지막으로 사탄과 만나는 장면이 극적 혹은 감정적 힘이 부족하여 실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옥으로의 여행은 주로 이별의 과정을 의미하며 따라서 더욱 완전한 발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독특한 반(反)클라이맥스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 그런 끝맺음이 불가피한 이유는 사탄의 마지막 등장이 어떤 새로운 것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사탄이 인간 역사에 존재함으로써 생긴 슬픈 결과들은 이미 지옥을 통과하면서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연옥편〉에서는 주인공의 영혼이 갱생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시작된다. 사실상 이 부분의 여행을 이 시가 제시하는 진실한 도덕적 출발점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순례자 단테는 연옥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자신의 개성을 억누른다. 단테가 물리칠 필요가 있는 본보기들과 대면하게 되는 〈지옥편〉과는 대조적으로 〈연옥편〉에서는 본보기로 나타나는 인물이 거의 없다. 회개자들 모두가 인생의 길을 따라 순례하는 순례자들이다. 단테는 소외된 관찰자로서 공포감을 느끼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가담한다. 〈지옥편〉에서 본의 아닌 소외감에 대한 시가(詩歌)로서 거기서 단테가 자신이 예전 주장했던 것이 얼마나 유해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연옥편〉에서는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적 심상의 생활을 순례행각과 가장 어울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당당한 모습으로 지상의 낙원에 다시 찾아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현세의 기만적인 약속들을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엄격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연옥은 영혼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는 곳으로 좀더 넓은 시각으로 즐길수 있다. 〈지옥편〉(7곡)에서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에 관한 토론이 나오는 한 곡(曲)에서만 철학을 암시하지만, 〈연옥편〉에서는 역사·정치·도덕 분야의 모든 관점들이 개방되어 있다. 더욱이 〈연옥편〉은 시와 예술의 곡(曲)이기도 하다. 단테가 황량한 지옥세계를 지난 뒤에 "여기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시가 되살아나리니"하고 외쳤을 때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진의(眞意)였다. 지옥에 배정된 시인은 하나뿐이며 천국에 마땅한 시인은 둘을 넘지 않지만, 연옥에서는 독자들이 음악가 카셀라와 벨라쿠아, 시인 소르델로를 만나고 2명의 구이도, 즉 구이니첼리와 카발칸티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화가 치마부에와 조토를 비롯하여 여러 세밀화가들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연옥의 상단부분에서 독자들은 단테가 그의 고전적 전통을 재건하는 모습을 보게 되며, 다음으로 그가 포레세 도나티를 만났을 때 고전적 전통보다 더 고양된, 조국의 위대한 전통에 훨씬 가까이 가게 된다. 보나준타 다 루카와 만나면서 '청신체'의 진정한 원천에 관한 설명을 듣고, 구이도 구이니첼리를 만나서는 기교라든가 시적 제어력 등의 부분에서 그가 당시 세력을 떨치던 지방 시인 구이토네 다레초를 어떻게 능가했는지를 듣는다. 이 곡(曲)들은 〈지옥편〉(4곡)에 나타난 생각, 즉 단테가 지체높은 이단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서사시에 관한 계획을 알려주며 자기의 위치가 고전작가들과 나란히 "6번째"에 속함을 다시 알리는 내용이다. 〈연옥편〉에서 단테는 그 전통을 확장하여 스타티우스(그의 〈테바이드 Thebaid〉는 사실 지옥 밑바닥에 있는 더 음산한 현상들을 제공함)까지 포함시키지만 또한 그의 더 근대적인 전통이 구이니첼리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보여준다. 구이니첼리와 만난 다음 단테는 바로 지상 낙원에서 오래도록 기다린 베아트리체와 재회하게 된다. 이와 같이 단테는 고전에서 그의 도덕적·정치적 이해뿐만 아니라 서사시의 개념, 즉 당대의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충분히 포함할 만큼 큰 범위를 지닌 이야기라는 개념을 끌어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그리스도교적 소재를 이루고 있는 사랑의 철학을 배운 것은 바로 조국의 전통에서였다.
이것은 물론 단테의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가 다른 안내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극(劇)이 존재하지 않는 노래 속에서 베르길리우스를 거부함으로써 유일한 극적 사건이 이루어진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안내자로 등장시킨 것은 문학사상 가장 풍부한 문화적 전유(專有) 가운데 하나였다. 우선 단테의 시에서 베르길리우스는 고전적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 인물로서 〈지옥편〉(1곡)에서 이렇게 소개된다. "사람은 아니나 옛날엔 사람이었다. 나의 어버이는 둘다 만토바 출생의 롬바르디아 사람들이었고 나는 뒤늦게나마 율리오 치하에서 태어나 그릇되고 거짓투성이인 제신들의 로마에서 살았다." 더욱이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고향 (당대의 이탈리아 지역)과 연관이 있으며 그의 배경은 전부 로마제국이다(베르길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에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대제를 찬양했음). 그는 시인으로 나타나며 그의 위대한 서사시의 주제는 단테의 시의 주제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나는 시인이었고 자랑스런 일리온이 타버린 뒤 트로이에서 온 안키세스의 정의로운 아들에 대해 노래했었다." 단테 역시 부당하게 쫓겨난 피렌체의 정의로운 아들을 노래했는데, 아이네아스가 더 나은 도시를 찾아야 했듯이 그의 경우는 천상의 도시를 찾아야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주의깊게 연구한 시인이며 그로부터 얻어낸 시적 양식은 그 아름다움으로 단테에게 많은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단테는 수년간 베르길리우스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베르길리우스의 정신이 되돌아왔을 때는 오랫동안 침묵한 나머지 미약해보였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한 사람의 명문가를 넘어선 로마 제국의 시인이자 단테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며 현자(saggio), 혹은 도덕적 스승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긴 하나 신의 은총을 받은 특사로서, 그가 돌아온 것은 일찍이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믿음과 연결된 더 소박했던 신앙들이 소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물론 베르길리우스 혼자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러나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거부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는 슬프게도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즉 그의 의식 어디에서도 역사의 지배 과정으로부터 개인적인 자유를 얻으려는 생각이 보이지 않음을 발견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추방객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도덕적 교훈을 베풀어주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 자신의 시의 주제이자 단테의 시의 주제였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역사의 과정에 대한 믿음을 고수했으며 로마제국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역사의 과정은 그에게 깊은 위안이 되었다. 반면 단테는 역사를 초월하는 인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역사가 그에게는 악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천국편〉에서는 진정한 영웅적 실현이 이루어진다. 단테의 시는 죽음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의 인물들을 묘사한다. 그들의 역사적 영향은 계속되어 그들의 모든 행위는 추종자들에게 경이감과 동화(同化)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고조부 카차구이다, 성 프란키스쿠스, 성 도미니쿠스, 성 베르나르두스 같은 인물들을 만나면서 단테는 자신을 승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천국편〉은 실현과 완성의 시이다. 그것은 앞의 2편에 이미 묘사되었던 것을 실현하고 있으며, 미학적으로는 기대와 회고로 이루어진 정교한 시체계를 완성하고 있다.
평가와 영향
단테의 〈신곡〉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영예를 얻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400년까지 이 작품이 지닌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12개 이상의 주석이 나왔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이 시인의 일생에 대해 글을 쓴 뒤 1373~74년에 〈신곡〉에 관해 처음으로 공개강연을 했다(이것은 단테가 고대고전들과 함께 대학교과과정에서 채택된 첫번째 근대작가였음을 뜻함). 단테는 '시성'(詩聖 divino poeta)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555년 베네치아에서 그의 위대한 시의 제목에 '성스러운'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인 훌륭한 책이 출판됨으로써 그의 시는 단순한 〈희극〉이 아닌 〈신곡〉이 되었다.
서사시가 호소력을 잃고 다른 예술 형식(주로 소설과 드라마)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을 때도 단테의 명성은 계속되었다. 사실 그의 위대한 시에서 독자들은 고전작품 특유의 힘을 즐길 수 있다. 후세대도 자신의 지적인 관심사가 단테의 시에 반영되어 있음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시대에 이어 19세기에도 독자들은 〈지옥편〉에 등장하는, 힘세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불운한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20세기초의 독자들도 이 시가, 그 구조와 논지와는 무관하며 때로는 그것들과 대조를 이루기조차 하는 미학적인 언어표현력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후대의 독자들은 이 시가 강한 건축물처럼 각각의 여러 부분들이 반영되고 조화되기도 하면서 잘 통합되어, 아주 복합적인 음향을 지닌 걸작임을 증명하는 데 열중했다. 단테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뛰어난 전형들의 작품목록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예시(豫示)와 대응면에서 위대한 문장가적 재능을 갖춘 시를 창조했다. 더욱이 그는 중요한 정치적·철학적·신학적 주제들을 모두 조화시켜 작품을 쓰는 한편 도덕적 지혜와 고양된 윤리적 안목을 보여주기도 했다.
단테의 〈신곡〉은 650여 년 동안 인기를 누려온 시이다. 놀랍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착상이 주는 소박한 힘으로 끊임없이 여러 세대에 걸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작품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구세계의 모든 고등교육에서 주요 교과목으로 쓰였으며 계속하여 현대에 와서도 중요한 시인들에게 지침이 되었고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단테를 "그리스도교적인 최고의 상상력"이라 불렀으며 T.S. 엘리엇은 "근대세계는 셰익스피어와 단테가 나눠 가졌다. 제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근대에서 단테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밖에 없다고 하여 그를 발군의 작가로 높이 평가했다. 사실상 근대사상과 관련을 맺으며 세계에 등장시킨 전형들을 창조하는 데 두 사람은 쌍벽을 이룬다. 단테는 셰익스피어처럼 역사적인 인물들로부터 보편적 전형을 창조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신화의 보고(寶庫)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R.J. Quinones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이탈리아 문학(Italian literature)
이탈리아어로 씌어진 문학작품의 총체.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경부터 방언을 사용한 본격적인 문학작품이 씌어지기 시작했다. 13세기 이전에는 거의 모든 문학작품이 성직자들을 위한 학교에서 교육받은 작가들에 의해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그당시의 문학작품은 문학적 가치와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가 설정했던 기준에 못 미치는 것들이었다. 라틴어의 영향권에서 독립해 방언으로 씌어진 초기의 문학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문학의 발달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초기의 방언 문학
이탈리아 문학이란 오늘날 표준어가 된 토스카나 방언으로 씌어진 문학을 대전제로 한다. 라틴어의 영향권에서 독립해 방언으로 본격적인 작품들이 창작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3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찬란한 로마 문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프로방스 지방의 아름다운 서정시로부터 영향을 받아 태동된 이탈리아 초기의 문학은 중세 가톨릭교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종교적 색채가 짙었다. 당시의 문학이 중세 라틴 문학과 프로방스 문학을 모방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자체의 존재가치를 확고하게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민속적 소재에다 종교적 색채를 가미한 것은 시대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라는 역사적인 인물의 등장으로 이탈리아 문학은 마침내 본격적인 문학적 틀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탈리아 문학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피조물의 찬가 Cantico di Frate sole〉가 있다. 이 작품은 단지 이탈리아어의 모체가 된 토스카나 방언(움브리아어)으로 씌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 중요성을 널리 인정받아왔다. 성 프란키스쿠스처럼 풍부한 학식의 소유자가 무슨 이유로 라틴어를 마다하고 방언으로 이러한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모험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그의 모험은 후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으며 공감대를 형성해나갔다. 또한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한 시칠리아 학파가 태동되었고 청신체(淸新體 dolce stil nuovo) 시파의 감미로운 서정시들이 잉태되면서 방언 문학은 확고한 자리를 구축했고, 야코포네 다 토디의 등장으로 하나의 방언 문학이 아니라 이탈리아 문학으로 발전했다.
초기 문학에서는 시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산문은 아직 라틴어의 위력에 밀려 방언으로 창작되지 않았으며, 철학적 혹은 고양된 의미의 주제로 기록되었던 글들은 일반적으로 방언을 기피하고 라틴어를 선호했다.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구이니첼리가 프로방스 문학과 시칠리아 학파의 시를 계승·발전시켜 사랑과 여성찬미라는 대명제로 서정시 운동을 전개했는데, 단테는 그들을 가리켜 청신체 시파라고 명명했다. 청신체 시파에는 단테 이외에 구이도 카발칸티, 치노 다 피스토이아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토스카나 방언으로 작품을 썼으며, 성 프란키스쿠스로부터 시도되었던 방언 문학은 마침내 확고하게 자리를 굳혔다. 그들은 숭고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가장 고귀한 덕목 가운데 하나로 간주했는데, 이러한 사랑은 여성미에 대한 칭송과 직결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중세의 기사도 정신에서 한 단계 뛰어넘어 여성을 숭앙의 대상으로 삼는 입장에서 시적 세계를 구축했다.
14세기
14세기에 들어와 이탈리아 문학은 황금시대를 맞게 되었다. 방언으로 쓰기를 기피했던 산문문학이 하나씩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종교적 색채가 짙은 익명의 작가에 의해 〈성 프란키스쿠스의 작은 꽃들〉이 나왔으며, 파사반티, 카타리나 다 시에나, 콤파니, 빌라니 등의 주옥 같은 산문들에 이어 문학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케티의 〈300편의 이야기 Trecentonovelle〉가 발표되었다. 콤파니와 빌라니는 '연대기'를 각각 집필하여 당대의 갖가지 사회상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들의 연대기는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이면에서 사라지기 쉬운 사건들에 대해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일종의 에세이 같은 것이었다. 사케티의 〈300편의 이야기〉는 전승되어오던 민담들과 이야기들을 재구성 작업을 통해 집대성하면서 때로는 작가 자신이 직접 창작한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이 작품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Decameron〉과 더불어 이 시대가 낳은 최대의 산문문학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단테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최고의 시성이다. 그에 의해 이탈리아 문학은 물론 라틴 문학에서 독립된 유럽의 방언 문학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었던 우고 포스콜로는 단테를 가리켜 전인류의 시성이라고 했다. 단테는 생애 동안(1265~1321) 수없이 많은 글을 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유명한 〈신곡 La divina commedia〉(1310경~21)이다. 사후의 세계를 편력하는 일종의 환상여행기 같은 성격을 띠고 있는 이 작품의 저작 연대는 신비의 베일 속에 감춰져 있지만, 대략 1300년 이후로 추정된다. 인간의 선과 악, 그에 따른 은총과 벌의 갖가지 양상들이 작품 구석구석에 배어 있으며 환상과 역사, 신화와 종교, 온갖 학문과 예술 등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신곡〉은 죄와 벌의 세계를 다룬 〈지옥편 Inferno〉, 전생의 죄를 말끔히 씻어내는 정화의 〈연옥편 Purgatorio〉, 환희와 은총,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만이 존재하는 천상의 세계 〈천국편 Paradiso〉 등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테가 정치적인 이유로 고국을 등지고 정처없는 유랑생활을 하면서 집필했던 〈신곡〉은 모두 100곡으로 구성되어 있고 11음절 3연체의 정형시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기조에 깔고 시를 썼으며 시에 시인 자신이 산문으로 해설을 붙여 〈신생 La vita nuova〉(1293)을 내놓았다. 이 작품은 사실상 〈신곡〉의 전편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이탈리아어로 쓴 또하나의 중요한 작품은 〈향연 Il convivio〉(1304경~07)이라는 철학적 수필집으로, 이 작품은 라틴어 시대에 보이티우스가 썼던 〈철학의 위안 De Consolatione Philosophiae〉(5권, 1473)과 형식·내용이 비슷하다. 단테는 〈향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법론으로 중세의 문화와 철학을 재점검하고 그 핵심을 정리하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 작품을 통해 마침내 고양된 방언 산문을 완성한 셈이다. 그는 〈신생〉에서 시도했던 산문정신을 〈향연〉에서 발전시키려고 했는데, 〈신곡〉에 나타나 있는 시정신이 그러하듯 단테는 중세의 시학과 수사학에 바탕을 둔 방언의 개발이라는 근대정신을 태동시켰다. 단테를 일컬어 중세의 막내, 근대의 맏형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중세문화에 뿌리를 내려 그 뿌리에서 영양을 취해 새로운 시기의 기운을 꽃피웠다는 뜻이다. 이것은 〈신곡〉·〈신생〉·〈향연〉이 라틴어가 아닌 방언으로 씌어져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단테가 언어를 중요하게 여긴 사실은 그의 언어학 논문 〈속어론 De vulgari eloquentia〉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유럽에서의 문어(방언)를 체계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로망스계 언어들을 깊이 연구한 결과이다. 그외 단테의 작품으로 중요한 것들은 정치학에 관한 논문 〈제정론 De monarchia〉(1313경)과 그의 인생과 사상을 전달하는 〈서간문 Epistole〉 등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전환기의 위대한 선각자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다.
시성 단테와 더불어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페트라르카를 들 수 있다. 단테와 겨우 4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활동했던 동시대인이었지만, 그의 문학세계는 훨씬 더 근대성을 띠고 있다. 고양되고 숭고한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시의 주제를 발견함으로써 예술세계의 폭을 넓혔다. 페트라르카는 철두철미한 인문주의자였다.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학에 심취했으며, 그것에서 참다운 문학의 가치 및 전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절대적인 것은 오직 시뿐이었다.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지도 않았으며, 철학을 단순히 살아가는 데 지혜를 주는 기술로 간주했지만 시에 대해서만은 절대적이었다.
페트라르카의 인문주의에 대한 열정은 언어에 대한 태도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고전이 지닌 내용적인 가치뿐 아니라 그 언어의 중요성까지 인정해 모든 글을 고전 라틴어로 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것은 분명 단테에 비해 시대역행적인 태도였다. 그는 문학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글은 모두 라틴어로 썼다. 〈아프리카 Africa〉(1338년경 집필시작, 1396년 출판)·〈승리 Trionfi〉(1351~74) 등 방대한 작품들이 이에 포함되며, 〈칸초니에레 Canzoniere〉만 이탈리아어로 썼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의 명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칸초니에레〉이다. 〈칸초니에레〉는 중세의 탈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인간 중심의 사상과 태도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이탈리아에서 문예부흥이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페트라르카에 의해 제창되고 주도되었던 인문주의 정신과 운동은 곧바로 당대 또하나의 거장 보카치오에게 전승되었다. 보카치오의 문학은 시보다 산문에서 그 진가가 돋보인다. 단테의 세계가 천상에 펼쳐져 있다면, 페트라르카의 세계는 하늘과 땅 사이를 왕래했고 보카치오의 세계는 철저하게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시에서보다 산문에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보카치오는 아버지의 권유로 나폴리에서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으나, 법률 공부를 위한 라틴어 습득 과정에서 오히려 문학 쪽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한 소녀를 사랑하면서 더욱더 문학에 심취했고, 마침내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사랑의 고통 Il filocolo〉(1336경)·〈사랑의 환상 L'amorosa visione〉(1342~ 43경)·〈피에졸레의 요정이야기 Il ninfale fiesolano〉(1344~45) 등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 피암메타에게 헌정한 많은 시를 썼으며, 〈코르바치오 Il Corbaccio〉와 〈데카메론〉(1348~53) 같은 산문을 남겨 유럽에서의 산문문학을 확립시켰다. 그의 대표작 〈데카메론〉은 세계 문학사에서 이 작품만큼 번안과 표절이 많았던 작품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세계문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데카메론〉은 100편의 이야기와 10편의 발라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10명의 남녀가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피해 피에솔레 언덕으로 가서 무료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각각 하루 1편씩 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에는 그때까지 전해내려오던 것도 있고 보카치오 자신이 창작한 것도 있다.
문예부흥기의 문학
14세기 세 거장들의 문학은 15세기에도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의 위기와 종말을 알리면서 새 시대의 도래를 암시하는 문예부흥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여기에 근본적인 자극을 준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절대적인 가치로 숭앙하면서 오로지 신적인 것만 문학의 대상이 된다는 사상으로부터 이제 인간은 인간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의식을 찾아야 한다는 자아발견과 이성(理性)의 해방이라는 명제로 옮겨간 것이다. 인문주의의 물결은 개성의 발견과 이성의 해방이라는 문예부흥기의 핵심사상으로 전승되면서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규정지었다. 인간성의 탐구를 통해 완전한 인간이 형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는 고전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맨 처음 피렌체에 생긴 아카데미아가 로마·나폴리에도 문을 열었고 그리스·로마의 고전작품 속에서 새로운 정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방언 문학은 침체했고 다시 라틴어 문학이 부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많은 예술가들을 자신의 궁정에 끌어들여 활동하게 한 메디치가의 로렌초 대제를 비롯해 서정시인 안젤로 폴리티안 폴리치아노, 루이기 풀치 및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 Orlando innamorato〉를 발표한 기사문학의 거장 마테오 마리아 보이아르도, 전원적인 색채를 띤 산문작가 산나차로와 다반차티 등의 작품들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뿌만 아니라 철학 분야에서도 인간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여 문학과 더불어 15, 16세기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인간의 지성적 덕성과 권위에 대한 개념이 새로운 문명의 전제로 등장해, 인간은 종교에서 부르짖는 내세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희생에 연연하지 말고(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음) 이제는 지상에서의 삶도 만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이 신대륙을 찾아나서고, 그에 따라 미지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난 뒤 사람들의 의식구조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즉, 현실을 인식하는 범주 안에서 인간의 정신상태를 연구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기승을 부리던 라틴어 고집론이 점점 약해지고 방언 문학의 열기가 고조되었으며,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필가로 떠올랐다.
아리오스토는 다른 예술가들처럼 궁정의 보호를 받았지만, 오로지 시작활동에만 몰두하는 생활을 염원하면서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문예부흥기의 연극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성난 오를란도 Orlando furioso〉(1516)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공백상태로 전락할 뻔했던 이탈리아 문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서사성 짙은 이 작품은 보이아르도가 완성하지 못했던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와 더불어 기사문학의 쌍벽을 이루는데, 아리오스토는 보이아르도의 작품이 끝나는 부분에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성난 오를란도〉는 전쟁·사랑·신앙·인간애 등의 일상적인 주제들이 수많은 삽화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개되는데, 주인공 오를란도의 내적 갈등과 고뇌가 예술로 승화된 이 시대의 대표작이다.
마키아벨리 역시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찍이 정치의 소용돌이 에 휘말렸던 그는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중시했고 시민의식과 정치의식을 일깨우는 데 전력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 〈군주론 Il principe〉(1513)과, 현실에 바탕을 둔 〈로마사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1513~21경)은 문예부흥 절정기의 획기적인 작품으로, 작가는 여기에 자신의 모든 사상을 탁월하게 반영해 인류의 지성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론〉의 저자로서 이 시대의 또다른 역사가 구이차르디니와 더불어 역사학의 대가로 지칭되며 순수문학작품으로 희곡 〈만드라골라 La Mandragola〉(1518)를 남겼다.
타소의 대표작 〈해방된 예루살렘 Gerusalemme liberata〉(1581)· 〈아민타 L'Aminta〉(1573)는 유럽 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걸작으로, 음악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했으며 주제면에서는 우울증을 시적으로 승화시켰다. 타소는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그리스도교 정신을 고양시켰으며, 인간감정의 우수에 찬 요소를 성공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서사시의 새로운 전형을 이루었다. 타소는 몇 가지 점에서 아리오스토와 비교된다. 특히 사랑이라는 주제를 보면, 아리오스토는 인생의 즐거움으로 부각되는데 반해 타소는 고통으로 인식된다. 또한 아리오스토는 대화체 수법을 사용함으로써 서사성을 강하게 풍기는 데 반해 타소는 감정의 흐름을 중시함으로써 서정성을 강조했다.
17, 18세기
17세기의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자국문화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이론적인 논쟁만 일삼았기 때문에 창작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다. 이때 그라비나를 발기인으로 한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아가 로마에 창설되어 곧 전국적으로 지부가 결성되었고, 목가시를 통해 구습을 타파하고 참신한 면모를 찾아보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아의 시인들도 문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아의 대표적 시인은 '칸초니에레'와 많은 오페라 대본을 남겨 멜로드라마를 개혁시킨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이다. 그는 시를 음악에 맞추는, 즉 시와 멜로디의 연관작업에 커다란 업적을 남김으로써 시와 음악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밖에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아에 속하는 무라토리·잔노네·비코 등이 비교적 수준높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철학과 역사학은 물론 문학에도 후세에까지 영향력을 미친 잠바티스타 비코의 〈신과학 Scienza nuova〉(1725~44)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비코는 역사의 3단계 발전설을 주장하여 신들의 시대, 영웅들의 시대, 인간들의 시대로 구분한 다음 '사실과 진실'의 구조적 본질을 통해 새로운 학문의 설립을 표방한 문화의 혁신가였다.
18세기 중반에 카를로 골도니가 등장하면서 이탈리아 문학은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골도니는 소재와 주제의 대담한 변혁을 통해 시민의식을 불러일으켜 희곡의 중요한 역할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문예부흥이 끝날 때까지 아리오스토에 의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희곡은 한동안 침체되어 있었는데, 골도니의 출현과 더불어 마침내 활기를 되찾았다. 당시 서민 풍자극의 성격을 지닌 '코메디아 델 라르테'(이탈리아 희극의 한 형식임)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본격적인 인물중심의 성격극을 창조해냄으로써 전 유럽의 관심을 끌었던 골도니는 현대적 의미의 희곡형식을 개발했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천태만상의 느낌을 주는 변화를 지니고 있다. 그의 희곡에는 하인으로부터 상인·평민·귀족 등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특히 소시민들의 생활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다.
비코의 〈신과학〉 이후 가장 탁월한 시인으로 평가받은 사람은 주세페 파리니이다. 파리니의 작품정신은 국민의식의 계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풍자시 〈하루 Il giorno〉(4권, 1763~1801)에서는 이탈리아의 한 젊은이를 등장시켜, 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의식과 생활태도를 심어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시가 단순히 도덕 교과서적인 범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훌륭한 예술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비토리오 알피에리 백작 같은 국민시인을 낳게 했고, 아울러 분열과 외세의 시련에 허덕이던 이탈리아인들에게 조국과 독립의 의미를 일깨워주었으며 '리소르지멘토'라는 통일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파리니와 알피에리의 문학은 역사의식에다 격조높은 서정성을 가미해 시와 희곡 분야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특히 〈사울 Saul〉(1773)과 〈비르지니아 Virginia〉에서 알피에리는 억압과 자유라는 대조적인 주제를 내세워 전환기의 이탈리아 문학을 풍요롭게 하면서 19세기를 잇는 교량 역할을 했다.
19세기
이 시기에는 창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프란체스코 데 상크티스의 문학이론에 바탕을 둔 국민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통일국가의 건설을 위해 '리소르지멘토' 운동이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데 상크티스는 문학을 국민생활과 연결시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학이 사회의 모든 현상과 유기적 관계 속에서 그 존재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특유의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발전된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이르러 베네데토 크로체, 안토니오 그람시 등을 비롯하여 오늘의 비평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70년 로마를 수도로 한 통일정부가 수립되면서 이탈리아는 오랜 분열에서 벗어나 유럽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문학은 물론 예술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비교적 활발한 문학활동이 전개되었지만, 자코모 레오파르디, 알레산드로 만초니에 버금가는 활동을 한 사람은 없다. 특히 레오파르디는 서정시 부문에서 놀라운 업적을 남겨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슴에 단테와 페트라르카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학적 흐름을 설정해주었다. 그는 낭만주의가 고전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활동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지켰다. 신체적 결함 때문에 외부세계와 어울리는 것을 피해 자신의 고향 레카나티의 자연 속에 파묻혀 사색과 시작에만 전념했다. 레오파르디의 서정성은 철저한 비관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초기 시에서 그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의 창조자인 자연을 극렬하게 비난하면서 자신의 염세적 인생관을 갈파했다. 자연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중기에 이르러 다소 완화되었으나 육체적 결함이 정신적 불안과 갈등을 가중시켜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허무감을 안겨주었다. 레오파르디의 서정시는 〈성가 I canti〉(1831)에 실려 있다. 그는 또 〈시집 Versi〉(1826)과 산문으로 〈도덕적 소품집 Operette morali〉(1827)·〈잡기장 Zibaldone〉(1817~32)을 남겨 자신의 인생철학과 사상을 후세에 전했다. 행복이란 영원히 꿈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 행복을 찾아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끝내 고통에 사로잡히는 자아, 즉 속임수를 당한 인간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핵심사상이다. 또한 시 〈실비아 A Silvia〉(1828)에는 자연이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고 굳게 믿던 인간이 항상 자연에 의해 배반당하며 꿈의 아름다움과 현실의 비참 사이에서 시달리게 된다는 그의 자연관이 압축되어 있다.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소설에서 특기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문학세계가 시·산문·희곡과 문학론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지만 소설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다. 그 이유는 ① 문학작품으로서의 성공, ② 참다운 문어 개발에 의한 표준어의 정립, ③ 외세에 항거하고 국민정신을 고취시켜 통일조국의 건설에 공헌한 점 등으로 압축된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 〈약혼자 I promessi sposi〉(1825~27)는 이탈리아인들에게 단테의 〈신곡〉 이래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문학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만초니는 이 작품에서 인생의 희극성과 비극성을 영국 작가 스콧의 영향에다 스스로 개발한 역사소설 기법을 살려 명료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17세기 밀라노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약혼자〉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역사적 현실을 17세기의 밀라노에 투영시켜 생동감있게 그리고 있다. 만초니에 이어 니에보가 등장해 심리적 수법으로 〈이탈리아인의 고백 Le Confezioni di un italiano〉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 역시 당대 이탈리아인들이 겪는 심리적 갈등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있다.
20세기
만초니 이후 비교적 우리시대와 가까운 시기의 작가들이 등장했다. 이것은 현대문학의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문학에서 현대라는 시점을 20세기의 언제로 설정해야 하느냐가 문제이다. 여기에는 2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는데, 그 하나는 리얼리즘 문학관을 내세우고 낭만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던 1860년, 즉 이탈리아가 통일국가의 터전을 마련한 해로 보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크로체가 〈미학 Estetica come scienza dell' espressione e linguistica generale〉을 발표한 1902년으로 보는 주장이다. 이 작품은 〈정신의 철학 Filosofia dello spirito〉에 실린 다른 영역의 작품들과 더불어 20세기 전반에 이탈리아는 물론 전세계의 문단을 흥분시켰는데, 이상적 관념론에 바탕을 두고 언어를 중시하며 직관에 의한 표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주요한 작가들은 조반니 베르가를 중심으로 한 베리스모(verismo:'사실주의'라는 뜻) 작가들과 안토니오 포가차로, 현대 이탈리아 문학의 풍운아로 평가되고 있는 가브리엘 단눈치오, 독자적인 입장에서 심리소설의 경지를 구축한 이탈로 스베보 등이다. 시에서는 조반니 파스콜리와 조수에 카르두치에 이어 황혼파·미래파 시인들이 있다. 현실과의 단절 속에서 자아상실증에 걸려 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파헤치려 했던 스베보는 〈어떤 생애 Una Vita〉(1892)·〈노년 Senilita〉(1898)·〈제노의 의식 La coscienza di Zeno〉(1923) 등을 발표해 '내적 독백', '의식의 흐름' 수법을 이탈리아 소설에 도입했다. 독자적으로 활동한 스베보와는 달리 베리스모 작가들은 베르가를 선두로 동인 성격을 띤 집단의식으로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베리스모는 이탈리아에서 배양된 프랑스식 자연주의이다. 루이지 카푸아나가 이론적 기초를 세웠고 베르가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반영되었던 베리스모는 스베보가 행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낭만주의에 반기를 들고 사실주의로 넘어가는 교량 역할을 했다. 베르가의 작품은 항상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 경제적인 여유는 있지만 늘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냉혹한 현실에 부딪쳐 몸부림치는 모습을 객관적 관점과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베르가의 대표작으로는 〈말라볼리아가(家)의 사람들 I Malavoglia〉(1881)·〈마스트로 돈 제수알도 Mastro-don Gesualdo〉(1889), 단편집 〈야외생활 Vita dei campi〉(1880), 희곡집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1884) 등이 있다.
베르가와는 약간 다른 성격을 띠었지만, 베리스모적(的) 특징을 지닌 작가로 그라치아 델레다, 루이지 피란델로를 들 수 있다. 사르데냐 출신의 여성작가 델레다는 〈재 Cenere〉(1904)·〈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Canne al Vento〉(1913)·〈엘리아스 포르톨루 Elias Portolu〉(1903)·〈어머니 La madre〉(1920) 등을 발표했는데, 그녀의 소설은 베르가적인 베리스모에 도덕주의를 부가시켰다고 볼 수 있다. 델레다는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의 범주에서 상응하는 선과 악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의 후기 작품 속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델레다는 1906년의 카르두치에 이어 192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피란델로 역시 세계적인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초기에 피란델로는 소설에만 전념했으나, 자신의 소설이 기대했던 것만큼 주목받지 못하자 표현양식을 희곡으로 바꾸었다. 그의 7편의 장편소설과 수많은 단편소설들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작품은 〈고(故) 마티아 파스칼 Il fu Mattia Pascal〉(1904)인데, 인간의 이중성을 노출시켜 현실과 환상의 괴리를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피란델로의 진가는 소설에서보다 희곡에서 찾아야 한다. 그는 〈생각해봐, 자코미노〉로 극작을 시작해 대표작 〈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인물 Sei personaggi in cerca d'autore〉(1921) 등 40편의 희곡을 통해 현대 희곡의 개념을 바꾸어놓았다. 동시대 작가이자 시인인 단눈치오는 전혀 다른 예술론을 표방했다. 초기의 작품들에서 주목받은 점은 감각주의이다. 〈기쁨의 자녀 Il piacere〉(1898)·〈죽음의 승리 Il trionfo della morte〉(1894)·〈바위산의 처녀들 Le vergini delle rocce〉(1896) 등의 장편소설에서 관능주의와 육욕 앞에 발가벗겨진 인간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후기에는 니체의 초인사상의 영향을 받아 쓴 〈불꽃 같은 삶 Il fuoco〉(1900)과 같은 대작이 있는데, 이것은 작가의 정치참여에서 얻어진 결실이다. 인생을 아름답게만 보는 단눈치오는 인생을 웃음거리로 보는 피란델로에 의해 공박을 받기도 했으며, 아름다운 시어로만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해 황혼파 시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황혼파 시인들의 활동과 더불어 이탈리아 문학은 본격적으로 20세기에 진입하게 된다. 20세기를 특징짓는 것으로는 시의 ' 에르메티스모'와 소설의 '네오레알리스모'( 신사실주의)를 들 수 있다. 에르메티스모는 주세페 웅가레티, 살바토레 콰시모도, 에우게니오 몬탈레 등의 시 사상을 일컫는 순수시 운동인데,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랭보·말라르메의 시에서 영향을 받은 소산물이다. 또한 에르메티스모는 표현법에서 강한 음악성을 나타낸다. 언어가 지닌 의미보다는 소리를 더 강조해 시적 순수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결과 이 운동에 참여한 시인들의 작품은 이탈리아인들은 물론 외국인들에게 더욱 난해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의 이탈리아 문학은 시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뛰어난 시인들이 등단하기는 했지만 소설이 더욱 활기 있게 문단을 차지했다. 20세기 소설의 주요특징은 단절상태의 현실에 처한 인간이 자아상실증에 걸려 있다고 보는 네오레알리스모 작품들에서 볼 수 있다. 이 그룹의 대표적 작가로 알베르토 모라비아를 들 수 있다. 22세에 발표한 처녀작 〈무관심한 사람들 Gli indifferenti〉(1929)을 비롯해 〈아고스티노 Agostino〉(1944)에 이르는 초기 작품, 〈로마의 여인 La Romana〉(1947)·〈두 여인 La ciociara〉(1957) 등의 중기 작품, 〈권태 La noia〉(1960)·〈천국 Il paradiso〉(1970)·〈바다의 목소리 Boh〉(1976)에 이르는 후기 작품을 통해 그는 도덕주의자적 관점에서 사회의 모순성을 작품의 주제로 삼아 신랄하게 사회를 비판했다. 모라비아는 동시대에 활동한 대부분의 작가들보다도 더 오랫동안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발표한 〈아프리카 산책〉·〈사물 La cosa〉·〈로마 여행 Viaggio a Roma〉 등은 그의 왕성한 창작력을 입증한다.
모라비아와 더불어 엘리오 비토리니, 체사레 파베세도 집요하게 현실 문제를 다루는 문제작가들이다. 비토리니의 〈붉은 카네이션 Il garofano rosso〉(1933~ 35)·〈시칠리아에서 나눈 대화 Conversazione in Sicilia〉(1941)·〈메시나의 연인들 Le donne di Messina〉(1949) 등은 모라비아의 작품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된다. 이 소설들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군상들이 끈질기게 진리를 추구하는 내용으로,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작품들이다. 파베세도 이같은 의도로 작품을 썼는데 〈아름다운 여름 La bella estate〉(1949)·〈닭이 울기 전에 Prima che il gallo conti〉(1949)·〈고향 Paesi tuoi〉(1941) 등에서 시적 산문체를 구사해 자신의 이야기를 더욱 솔직하게 작품 속에 부각시키고 있다. 이들 신사실주의 작가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현실과의 단절로 인한 인간의 소외감·피해의식·고독감인데, 오늘날 세계 문학에서 즐겨 다루는 주제이다.
알레산드로 만초니, 카를로 카솔라·조지오 바사니, 마리오 솔다티를 비롯해 중견작가들도 그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다. 특히 카솔라·바사니는 1960년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비교적 전통적 수법을 즐겨 사용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가는 데에는 정신분석법을 도입했다. 그러나 '63 그룹'이라 불리는 전위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와 달리 이그나치오 실로네의 폭넓은 문학정신, 레오나르드 시아시아 등의 남부 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투지와 그들이 지닌 인간미를 드러내주고 있다. 또한 카를로 에밀리오 가다, 이탈로 칼비노 등은 현대의 기계문명이 인간의 지성을 파괴했고, 인간 생활이 지극히 소비적으로 변해 사회악이 극심해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사회의 양심과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라고 했다. 오늘날 이탈리아 문단은 오레스테 델 부오노, 알베르토 베빌락콰, 움베르토 에코 등이 주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에 대한 탁월한 업적과 소설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1981)·〈푸코의 추 Il Pendolo di Foucault〉(1988)로 더욱 명성을 날렸다. 에코의 문학이론과 창작정신은 오늘의 이탈리아 문학을 대변해주고 있다. Macropaedia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구이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1483. 3. 6 피렌체~1540. 5. 22. 피렌체 근처 산타마프게리타아몬티치.
피렌체의 정치가·외교관·역사가. 그가 쓴 〈이탈리아사 Storia d' Italia〉는 당대의 역사를 다룬 매우 중요한 저서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 지배 때 피렌체의 저명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498~1505년에 피렌체·페라라·파도바 등지에서 로마법을 공부했으며, 그뒤 피렌체에서 법률 실무에 종사했다. 1508년 알라만노 살비아티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자신의 가족 회고록과 1378~1509년의 〈피렌체사 Storie fiorentine〉를 쓰기 시작했다. 〈피렌체사〉는 1494년 이후의 이탈리아 공화제 연구에 중요한 사료이고 구이차르디니의 역사 분석·서술 재능을 보여주는 저서이다. 그가 1511년 피렌체 대사가 되어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에게 파견되어 있었을 때, 1494년부터 계속 망명생활을 해온 메디치 가문은 당시 스페인 군대의 압력을 받고 있던 피렌체로 돌아와 권력을 회복했다. 1514년에 피렌체로 돌아온 구이차르디니는 다시 법률실무에 종사했으며 오토 디 발리아라는 치안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1515년에는 시뇨리아(최고행정관) 정부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13년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한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1516년에 구이차르디니를 모데나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듬해에는 레조 총독까지 겸하게 했다. 그는 1534년까지 계속 교황을 위해 일했다.
새로 교황령이 된 이 지역들은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고 내부에서도 혼란이 있었지만 그는 그곳을 통치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엄격하고 때로는 가혹하기조차 한 그의 정책은 질서회복에는 효과적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에 대한 인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레오 교황과 동맹관계에 있던 신성 로마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레조는 교황령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1521년 7월 구이차르디니는 교황군의 전권대리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종종 자신의 직무와 관련되는 당시의 정치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형태로 많은 비망록과 논문을 썼는데, 1521~25년에 쓴 〈피렌체 정부론 Dialogo del reggimento di Firenze〉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책에서 그는 피렌체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베네치아식의 귀족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교황군의 전권대리로서 그는 용기와 결단력을 발휘하여 1521년 12월 파르마가 프랑스에게 함락당하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같은 달 교황 레오 10세가 죽고 아드리아누스 6세가 즉위한 뒤 모데나와 레조 총독직을 박탈당했으나 1522년말 다시 복직되었다. 1523년 아드리아누스 6세가 죽자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두 도시를 원래 그곳을 지배했던 페라라 공작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비록 페라라 공작과의 싸움에서 레조는 빼앗겼지만 모데나를 지킬 수 있었다.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한 뒤 구이차르디니의 공적을 인정해 그를 1524년 교황령의 최북단 도시 로마냐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파비아 전투 뒤 카를 5세의 군대가 남하하려 하던 위험한 상황에서 구이차르디니는 교황에게 많은 조언을 했으며, 1526년 1월에는 교황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로마에 갔다. 그는 카를 5세에 대항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를 주장하며 교황 자문회의에서 뛰어난 역할을 했다. 1526년 5월에 이루어진 코냐크 동맹은 어느 정도 그가 노력한 결과였으며 그해 6월 교황군의 지휘관으로 동맹군에 참여했다. 그러나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황제군이 피렌체와 로마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자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태어난 도시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클레멘스 교황의 정책 결과 피렌체가 위기에 처하자 메디치 정권에 대한 반대의 소리가 높아졌다. 우르비노 공작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 가까이에 도착하고 메디치가 그를 마중하러 도시를 떠나자(1527. 4. 26) 피렌체에 반란이 일어났다. 도시 방어를 돕기 위해 그곳에 막 도착한 구이차르디니는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반란자들의 항복을 받아내 부르봉 공작군의 공격으로부터 시(市) 행정부 건물을 보호할 수 있었다. 며칠 뒤 부르봉 공작군은 로마를 장악했고 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가 축출되고 공화정부가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로마에서 클레멘스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게 되자 구이차르디니는 교황 전권대리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어렵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가 맺어왔던 메디치가와의 오랜 관계로 인해 공화제가 다시 들어선 피렌체에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피렌체에서는 강경 공화파가 승리해 교황과 타협하려 했던 니콜로 카포니 장관이 물러났으며(1529. 4), 뒤이어 황제군이 들어왔다. 이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 구이차르디니는 1529년 9월 피렌체를 떠나 교황청으로 갔다. 그뒤 메디치가를 피렌체에 다시 들어서게 하려는 교황의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피렌체 시민을 위해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고 애썼지만 1530년 3월 피렌체에서는 그를 반역자로 선고했다. 1528~30년 구이차르디니는 피렌체의 역사에 관한 2번째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해 그의 정치관과 사회관을 가장 간결하고 다채롭게 표현한 격언과 성찰(省察)의 묶음인 〈회상록 Ricordi〉을 펴냈다. 그의 정치사상은 친구인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지만 때로는 더 급진적이다. 그는 오랫동안 교황을 위해 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교회를 비판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논의'에 관한 고찰 Considerazioni intorno ai 'Discorse' del Machiavelli〉에서 로마역사를 과학적인 정치의 한 전형으로 본 마키아벨리의 의견에는 반대했다. 구이차르니나는 피렌체에서 공화정부가 무너진 뒤 교황 대표자격으로 돌아와 공화당원 추방에 앞장섰다. 1531년 클레멘스 교황은 그를 볼로냐 총독에 임명했으나 1534년 파울루스 3세가 즉위하면서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작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이 교황의 참모로 있었던 시기의 이탈리아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뒤 몇 년 동안 수정을 거친 이 책은 1494~ 1534년 사이의 이탈리아 역사를 다룬 그의 더 큰 야심작 〈이탈리아사〉의 줄기를 이루었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1536년으로 추측되는데 죽을 때까지 계속 수정했다. 그는 책에 기술한 많은 사건들과 직접 관련이 있었던 정치가였고 사료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 앞선 인문주의자들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그들을 능가한 역사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사〉는 격동과 침략의 시기인 16세기초 근대 이탈리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책이 되고 있다.
1537년 알레산드로가 살해당한 뒤 구이차르디니는 코시모 공작이 그 뒤를 이을 수 있도록 도왔는데, 아마도 공작의 권력이 지나치다고 생각해 이것을 제한시키고자 하는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새 통치자 아래서도 여전히 고위직책을 맡기는 했으나 자신의 희망과 개인적 야망이 만족되지 않자 말년에는 산타마가리타아몬티치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사〉의 완성에 몰두했다. N. Rubinstein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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