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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에 불리한 시대 /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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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에 불리한 시대 /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

 

나도 알고 있다. 행복한 사람만이

인기가 있다. 그런 사람의 말소리를 사람들은

즐겨 듣는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아름답다.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이 좋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나무가 불구라고 욕한다.

하지만 그것은 옳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나는 보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뿐이다.

왜 나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가?

소녀들의 가슴은

예전처럼 뜨거운데.

 

내 시에 각운을 쓴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

 

내 안에선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과

칠장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펜을 잡게 하는 것은

두 번째 것뿐이다.


요점 정리

작자 :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서정적. 독백적. 저항적

어조 : 저항을 노래하는 남자의 의지적이고 독백적인 어조

심상 : 서술적. 상징적

구성 :

1연 인간의 공통적 소망인 행복

2연 행복을 가로막는 삶의 터전

3연 현실의 모순에 주목하는 나의 시

4연 환상을 거부해야 하는 나의 시

5연 시에 불리한 시대 속에서 써야 하는 나의 시

제재 : 나의 시 정신

주제 : 어두운 현실의 극복 소망

내용 연구

준트 해협(海峽) :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해협

각운(脚韻) : 시가에서, 구나 행의 끝에 규칙적으로 같은 운의 글자를 다는 일. 또는 그 운.

오만(傲慢) : 잘난 체하여 방자함

칠장이 : 비인의 미술 대학의 입학 시험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전력이 있는 히틀러를 지칭하는 말

마당의 뒤틀린 나무는 토양이 좋지 않음을 말해 준다. : 토양이 좋지 않은 마당에서 자라난 나무가 뒤틀린 모양을 하는 것처럼 왜곡된 사회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마흔 살의 소작인 여자'가 행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시대에 자신의 시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느끼고 있다. '준트 해협의 푸른 보트와 즐거운 요트'를 노래하면서 현실의 상처를 망각하기보다는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을 노래하면서 이들의 행복을 주장하고 찾아내겠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토양에서는 나무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 어둡고 슬픈 삶을 사는 것은 바로 그들의 사회와 삶의 터전이 잘못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준트 해협의 - 찢어진 그물뿐이다. : 바닷가의 낭만적이고 즐거운 풍경을 노래하면서 현실을 망각하기보다는 현실 소외되고 억압받는 삶의 모습을 직시하겠다는 뜻으로 '즐거운 요트'와 '찢어진 그물'이라는 대립된 시어로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내 시에 각운을 - 보일 것이다. : '운(韻)'은 서로 무관한 단어들이 화음을 통해 시 전체에 조화와 완결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작자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억압과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이므로 조화와 행복을 노래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안에선 - 경악이 서로 싸우고 있다. : 각운 등을 사용해 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가슴 한 구석에서 숨쉬고 있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을 노래하기보다는, 히틀러의 연설 내용이 지닌 여러 가지 비인간적 독소를 세계 만방에 드러내어 이를 차단하는 것이 궁극적인 아름다운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읊고 싶은 시인의 순수한 열정과 히틀러의 독재를 비판하고 싶은 현실 참여 의지가 서로 갈등을 이루고 있다.

이해와 감상

헤겔에 따르면, 서사 양식은 중심 인물과 부수 인물들이 엮어 나가는 사건 구조를 통해 인간 삶의 총체성을 보여 주는 것임에 비해 서정 양식은 즉자적인 생의 주관적 충동을 생생히 묘사하는 것이라 한다. 이 경우 생의 주관적 충동에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미의 추구가 깊이 개입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역사 이래 인간이 만들은 시가 대부분 비참한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도 이에서 연유한 것으로 본다. 브레이트 역시 서정시의 원래 목표가 순수미의 구현이요, 행복과 아름다움이 인류의 공통된 소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시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해진 현대의 시대 상황에 대해 비판의 태도를 견지한다.

이 시의 2·3·5연은, 요트/어부들의 찢어진 그물, 마흔 살에 벌써 허리가 굽은 소작인의 여자/가슴이 뜨거운 소녀,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열광/칠장이(히틀러)의 연설에 대한 경악(驚愕) 등과 같은 대립 구조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대립적 문맥은 아름답고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사회적 불평과 억압을 함축한다. 첫 연에서 시적 화자는 아름다움과 행복의 좋은 점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억압하는 사회적 어둠 속에서 화자는, 인간의 근원적 마음인 아름다움과 행복에의 추구에 대한 노래보다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시를 쓰고자 한다. 독일 시에서의 운(韻)은 서로 무관한 단어들의 화음을 통해 시 전체에 조화와 완결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내 시에 각운을 쓴다면/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보일 것이다.'라는 시적 화자의 진술은, 억압과 불평등의 사회 속에서 조화와 행복의 세계를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시에 불리한 시대"라는 시의 제목은, 바로 운(韻)이 있는 조화와 행복한 세계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시대적 어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최동호 외 3인저 문학교과서)

감상 2

이 시는 브레히트가 독일의 나치 정권 치하에서 덴마크로 망명하여 생활할 때 쓴 시로, 어두운 상황 속에서 적극적인 사회 참여시를 쓸 수밖에 없는 시인의 심정을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마당의 뒤틀린~말해 준다'는 억압받는 토양에서는 나무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어둡고 힘든 삶을 사는 것은 바로 그들의 사회와 삶의 터전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시인의 사상을 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하지만~옳다'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잘못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소극적인 민중의 태도 역시 비판하고 있다. 이 시의 2·3·5연은 대립 구조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대립적 문맥은 아름답고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을 함축한다. 따라서, '내 시에 ~ 보일 것이다.'라는 시적 화자의 진술은, 억압과 불평등의 사회 속에서 조화와 행복의 세계를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즉, '시에 불리한 시대'란 조화와 행복한 세계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시대적 어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제목이다.

심화 자료

브레히트(Bertolt Brecht)

본명은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1898. 2. 10 독일 아우크스부르크~1956. 8. 14 베를린. 독일의 시인·극작가·연극개혁가.

연극적 환상을 일으키는 전통에서 벗어난 그의 서사극은 드라마를 좌익운동을 위한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토론장으로 발전시켰다.

바이에른 지방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의학을 공부하고(1917~21), 군 병원에서 복무하면서(1918) 1924년까지 바이에른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첫 희곡 〈바알 신 Baal〉(1923 공연)과 첫 성공작 〈밤의 북소리 Trommeln in der Nacht〉(1922, 클라이스트 문학상 수상), 시와 노래 모음 〈가정용 설교집 Die Hauspostille〉(1927), 최초의 본격 희곡 〈에드워드 2세 Edward Ⅱ〉(1924) 등이 나왔으며, 베데킨트·랭보·비용·키플링과 같은 작가들을 숭배했다. 이 시기에 또한 반부르주아적 태도가 격렬해졌는데, 이런 태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무너져버린 서유럽 문명에 대한 그 세대의 깊은 실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브레히트의 친구 중에는 조롱과 인습타파적인 풍자를 통해 부르주아 예술의 잘못된 표준이라 여긴 것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다다이즘 운동의 일원들도 있었다. 1920년대 후반 그에게 마르크스주의 원리를 가르쳐준 사람은 제국의회의 공산당원이었다가 1926년 독일 공산당에서 쫓겨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카를 코르슈였다.

베를린에서는(1924~33) 잠시 막스 라인하르트 감독과 에르빈 피스카토르 감독을 위해 일하기도 했으나 주로 자신의 동인들과 함께 일했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함께 성공을 거둔 풍자적인 민속 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1928)와 〈마하고니 시(市)의 흥망 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1930)을 썼다. 또한 자신이 '교훈극'(Lehrstucke)이라고 부른 정통 연극의 테두리 밖에서 상연하기 위한 매우 교훈적인 작품들을 썼는데, 후에 바일, 힌데미트, 한스 아이슬러가 이 작품들에 곡을 붙였다. 이 시절 자신의 ' 서사극' 이론과 부정형 운문으로 된 간결한 형식들을 발전시켰으며,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1933년 스칸디나비아로 망명했으며(1933~41), 주로 덴마크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1941~47) 할리우드에서 영화제작에 참여했다. 한편 독일에서는 그의 책이 불태워지고 시민권이 취소되었으며 독일 연극계에서 작품 상연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1937~41년에 대부분의 위대한 희곡을 비롯하여, 주요 이론적 평론과 대담, 그리고 〈스벤보르거 시집 Svendborger Gedichte〉(1939)으로 출판된 많은 시들을 썼다. 이 시기의 희곡 작품들은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출을 통해서도 유명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30년전쟁을 배경으로 한 사극 〈억척 어멈과 그 아이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41)·〈갈릴레이의 생 Leben des Galilei〉(1943), 전쟁 전의 중국을 무대로 한 비유극 〈세추안의 선인 Der gute Mensch von Sezuan〉(1943), 전쟁 전의 시카고를 무대로 해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비유한 희곡 〈저지할 수 있었던 아르투로 우이의 득세 Der Aufhaltsame Aufstieg des Arturo Ui〉(1957), 취했을 때는 관대하지만 술이 깨면 냉혹해지는 한 핀란드 농부를 그린 통속극 〈푼틸라 씨와 하인 마티 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1948), 아이를 버린 명문 출신 생모와 그 아이를 돌봐준 하녀가 서로 아이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이야기인 〈카프카스의 백묵원 The Caucasian Chalk Circle〉(1948년 영어로 초연, 1949년 독일어로 된 〈Der kaukasische Kreidekreis〉가 나옴) 등이다.

브레히트는 반(反)국가활동 위원회의 출두명령을 받아 증언해야 했고 그후 1947년 마침내 미국을 떠났다. 취리히에서 1년을 보내면서 횔덜린의 소포클레스 번역을 채택한 〈안티고네 모델 1948 AntigoneModell 1948〉(1948 공연)과 그의 가장 중요한 이론서인 〈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 Kleines Organon fur das Theater〉(1949)를 썼다. 이 지침서에 나타난 그의 극이론의 본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이론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로 믿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반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드라마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를 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약 관객이 실제로 오이디푸스, 리어 왕, 햄릿과 같은 과거의 영웅들의 감정이 그들 자신의 감정과 똑같다고 느낀다면, 인간 본성은 변함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념이 저절로 무력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존재를 믿게 한다거나 그 인물들과 동화하도록 해서는 안 되며, 서사시인들이 쓰는 기법과 같은 방법을 따르도록 해야 하고, 그 방법을 통해 관객은 그가 무대 위에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닫고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구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서사적'(이야기체·비[非]극적) 연극은 관객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의 환상이 아니라 인간 행동을 과학적 정신으로 제시해주는 것이고, 연극은 연극일 뿐 실제 현실이 아님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키는 여러 고안 장치를 통하여 얻어지는 거리감과 소외(疏外) 효과(Verfremdungseffekt)에 바탕을 둔다.

 

1949년 브레히트는 소련 점령구역에 있는 라인하르트 독일 극장에서 〈억척 어멈과 그 아이들〉을 무대에 올리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부인과 함께 베를린으로 갔다. 그의 부인 헬레네 바이겔은 이 연극의 주역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브레히트는 자신의 극단인 '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했고, 영구히 베를린에 정착하여 그때부터 앙상블과 자기 작품의 무대 공연에 전념하게 되었다. 종종 동유럽에서는 비정통적 미학이론 때문에 의심을 받았고 서유럽에서는 공산주의적 견해 때문에 명예가 손상되거나 배척당했지만, 1955년 파리 국립극장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같은 해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이듬해인 1956년 동베를린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브레히트는 우선 많은 양식과 서법(敍法)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극작가로서는 아주 강도 높은 연구자로, 잠시 떠오른 착상이라도 끊임없이 엮어갔는데 이러한 그의 착상은 항상 자신의 것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서푼짜리 오페라〉는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Beggar's Opera〉에, 〈에드워드 2세〉는 말로의 〈에드워드 2세〉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냉소적인 유머와 아울러 드물게 음악적·시각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생동적인 성격을 창조한다거나 극에 긴장과 구체적 형식을 부여하는 데는 종종 실패했다. 연출자로서 그는 밝고 분명하고, 단단하게 짜여진 서사적 구성을 좋아했으며, 독일 연극을 그 본성에 반하여 소극적으로 연기하게 한 완벽주의자였고, 자신이 선호하는 것뿐 아니라 결점에서도 원칙들을 이끌어낸 이론가였다.

브레이트 시론(詩論)

브레이트는 시에 대해서 "한 시인의 시 작품 전체는 하나의(내적인) 역사를 가져야 하며, 이러한 역사는 외적인 역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언급은 시란 어떤 의미에서건 사회적인 산물이며 시는 시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브레히트는 시를 쓰는 행위를 '생산의 전체적인 계획'이라고 부르고 시 각각의 작품들은 이러한 계획 속에서 존재할 때만 전망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나의 어머니 /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1920년 작.

번역: 브레히트/김광규 역,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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