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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밑에서 / 해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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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전문

 

(전략)

 

 두더지가 모아 둔 저장물을 먹고 한동안 살아가듯이, 한스는 전에 얻은 지식을 가지고 얼마 동안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괴로운 궁핍의 연속이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아 조금씩 새로운 노력에 의해서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무모함에 그 자신 또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부질없이 머리를 썩힐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구약 성서 최초의 다섯 권 다음으로 호머를 포기하고, 크세노폰 다음에는 대수(代數)를 포기하여 버렸다. 선생님들 간에는 그의 평판이 조금씩 내려가면서 우에서 양으로, 양에서 가로, 드디어는 영으로 떨어지는 것을 별 관심도 갖지 않고 태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두통이 일어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그리고 두통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헤르만 하일러를 생각하기도 하고 가냘프고 하염없는 꿈을 좇으며 몇 시간이나 멍청한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조교수인 비드리히는 친절한 젊은 선생이었는데 한스의 얼빠진 웃음에 대하여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다. 그리하여 이 분은 탈선한 소년을 아끼는 마음에서 진정으로 동정심을 가지고 공연히 화를 내기도 하고 벌을 준다는 듯이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 방관해 버리고마는 상태였다. 때로는 경멸에 가득 찬 농담을 하기도 하여 잠든 그의 공명심을 일깨워 주려고도 하였다.

 

"만일 잠들지 않으셨다면 이 문장을 읽어 주시기 않겠습니까?"

유독 화가 난 사람은 교장 선생님이었다. 이 허영심 많은 사나이는 자기 눈의 위력을 너무나도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위풍당당하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아도, 한스는 언제나 비굴하게 죽여 주십쇼 하는 듯한 멋적은 웃음으로 대해 줄 뿐이었으므로 화가 벌컥 치밀곤 하였다. 한스의 비웃음은 교장 선생을 차츰 신경질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머저리 같은 천치 바보의 얼굴로 웃지 말아라. 오히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그것보다 더 그의 마음에 충격을 준 것은 아버지의 편지였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아들의 마음을 고쳐 달라고 교장 선생에게 애원하였다. 교장 선생이 기벤라트 씨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스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솔직한 사람들이 보통 쓰지 못하는 격려나 도의적인 울분으로 뒤덮인 글귀를 하나도 빠짐없이 늘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눈물겨운 호소를 잊지는 않았다. 그것이 아들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였다. 교장 선생을 비롯하여 한스의 아버지나 교수나 조교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의무에 충실한 지도자들은 어느 누구나 다 한스의 마음 속에서 그들의 소망을 방해하는 독소와 딱딱하게 굳은 게으름을 발견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바른 길을 밟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온정에 넘친 조교수를 제외하고는, 가냘픈 소년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얼빠진 웃음이 소멸되어 가는 영혼의 시달림을 받아, 소년이 물에 빠진 듯이 불안스럽고 절망적인 가슴을 부여안고 주위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나 아버지나 몇 명의 교사의 잔인한 명예욕은 이 소년이 숨김없이 그들에게 드러낸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아무런 후회도 없이 짓밟아 버림으로써, 이 나약하고 아름다운 소년을 이런 지경에까지 몰고 와 버렸다는 걸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째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위험한 소년 시절에 매일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던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 버렸던가? 왜 낚시질이며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금지시켰던가? 왜 심신을 갈갈이 찢어 놓은 것 같은 쓸데없는 공명심의 공허하고 저속한 이상을 불어넣어 주었던가? 왜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마땅히 쉬어야 할 휴가를 그에게 주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지칠 대로 지친 노새는 길가에 쓰러져서 아무 쓸모도 없게 되어 버렸다. 초여름에 마을의 의사는 한스에게 성장에 기인하는 신경 쇠약에 불과하다고 거듭 진단을 했다. 휴가 중에 마음껏 먹고 항상 숲속을 거닐면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마음만 있다면 꼭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일이 그렇게 되지는 못하였다. 휴가가 시작되기 3주일 전이었다. 한스는 오후 수업 시간에 교수에게 심하게 꾸중을 들었다. 교수가 욕을 퍼붓고 있을 동안 한스는 의자에 쓰러져서 공포에 질려 떨리 시작하다가 그만 흐느껴 우는 바람에 수업은 아주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반나절 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 이튿날 한스는 수학 시간에 칠판에 그린 기하 도표를 설명하도록 지명받았다. 한스는 앞으로 나갔지만 칠판 앞에서 현기증을 일으켰으며, 백묵과 자로 선을 긋고 있던 중 그만 그 두 가지를 다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우려고 허리를 굽혔으나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의사는 환자가 어리석은 짓을 했기 때문에 상당히 화를 냈다. 그는 신중한 태도로 즉시 휴가를 취할 것을 명했고, 신경과 의사를 초청하도록 권했다.

 

"저 아이는 또 무도병(舞蹈病)이 생긴 겁니다."

의사는 교장에게 속삭였다. 교장 선생은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무모하게 화난 얼굴을 하고 있기보다는 아버지처럼 자비에 넘친 표정으로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고 어쩌면 알맞은 것인지도 모른다.

 

교장 선생과 의사는 각기 따로 한스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주고 한스를 고향으로 내려 보냈다. 교장 선생의 노함은 오히려 심한 우려로 변해 버렸다. 얼마 전에 하일러 사건 때문에 뒤숭숭했던 학무과는 이 새로운 불행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모두가 의외로 생각한 것은, 교장 선생이 이번 돌발 사건에 대해서 으레 해야 할 훈화(訓話)조차 단념해 버린 것이다. 오히려 최후 순간에 있어서 한스에게는 끔찍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한스가 정양(靜養) 휴가를 하고 나서도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교장 선생은 뻔히 알고 있었다. 가령 그 전에 완치된다 하더라도 그때는 벌써 훨씬 뒤떨어진 그 어린 학생은 휴학한 수개월 동안, 아니 몇 주일 간의 학과라도 회복할 가망이 없으리라. 진심으로 격려해 주듯이 "잘 가! 다시 만나자."는 말로 그와 헤어지기는 했지만, 그 다음 순간 헬라스 반에 들어서서 주인 없는 텅 빈 세 개의 책상을 볼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 타고난 재능을 지닌 이 두 제자가 연기같이 사라져 버린 데 대한 죄의 일부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마음 한 구석에서 떨어 버리기에 교장은 적잖이 신경을 썼다. 그러나 배짱 좋고 도의적으로도 강한 남자였기 때문에 이 무익하고 어두운 의심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떨쳐 버리기는 쉬운 일이었다.

 

조그만 여행 가방을 들고 떠나가는 신학교 학생 뒤로 교회와 성문과 박풍(膊風), 또한 탑들이 있는 수도원이 사라졌다. 그리고 숲과 언덕이 벌판 아래에 가라앉고 그 대신 바덴 주 국경 언저리의 과일 나무들이 물결치는 초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다음에는 프포르츠하임 시가 나타나고, 그 뒤로는 슈발츠발트의 검푸른 전나무 산들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를 뚫고 무수한 계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을 받아 가며 전나무 숲들은 어느 때보다 푸르고 시원한 짙은 그림자를 연상케 하였다. 소년은 경치가 바뀌어 가자 더욱 고향의 모습을 짙게 해 주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결 즐거운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고향이 가까워지자 문득 아버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버지가 어떻게 자기를 맞이해 줄 것인가 하는 불안이 아늑한 여행의 기쁨을 산산이 부숴 버리고 말았다. 시험을 치러 슈투트가르트에 여행할 때라든가 마울브론으로 입학하러 여행할 때라든가 그때마다 느껴지던 불안과 긴장을 동반한 기쁨이 더불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저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교장 선생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신학교도 학문도 야심에 충만했던 온갖 희망도 완전히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이제 그를 슬프게 하는 원인이 되지 못했다. 오직 기대를 배반당해 실망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근심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누를 뿐이었다. 지금의 그는 정양 그것보다도 실의에 차 있는 아버지에 대한 불안감이 천 근 만 근의 중압감으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휴식하고, 실컷 잠을 자고, 마음껏 울어 보고, 마음껏 꿈이나 꾸어 온갖 시달림과 학대에서 제발 안정을 얻어 보자는 간절한 소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선 도저히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한스는 기차 여행이 끝날 무렵 심한 두통이 일어났다. 기차는 그가 좋아하는 곳을 달리고 있었는데도 그는 창문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곳 언덕과 숲을 옛날에는 열심히 돌아다녔던 곳인데도 정다운 내 고향 정거장에서 하차해야 된다는 것조차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

 

우산과 여행 가방을 들고 그는 기차에서 내렸다. 아버지는 아들을 말없이 살펴보고 있었다.

 

(후략)


 요점 정리

 작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갈래 : 장편 소설. 성장 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한스의 모든 역정이 시간의 진행에 따라 서술되는 성장 소설식 구성

신학교 진학을 위한 교육

억압적이고 비교육적인 신학교 생활

귀향

열정적인 사랑의 체험

생활의 관습에 부적응

아버지, 목사, 교장

신학교 교장 - 하일러

방랑

엠마

아우그스트

명예 출세 그리고 부귀영화

인내, 규율 - 자유, 낭만

갈등과
고뇌

사랑, 열정

노동, 현실 그리고 죽음

 성격 : 비판적, 자전적, 철학적, 서정적, 묘사적

 표현 : 외적인 사건보다는 인물의 내면적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심정적 진실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또한, 과거형 시제를 주로 사용함으로써 회상의 감상성을 짙게 하고 있다.

 배경 : 시간(19세기 말). 공간(신학교와 고향 슈발츠발트)

 경향 : 순수 문학(문학의 계몽성, 목적 의식, 선전성을 배척하고, 인간성의 옹호에 입각하여 문학의 예술성, 자율성을 추구하는 문학)

 제재 : 한스 기벤라트의 짧은 인생

 주제 : 한 소년의 내면적 성장과 좌절, 자연과의 교감을 잃어버린 어린 학생이 엄격한 신학교에서 겪는 좌절을 통한 근대 교육 제도 비판, 엄격한 신학교 생활의 비판 및 자연과의 교감 옹호

 특징 : 작가 자신의 체험이 짙게 배어 있고, 한 소년의 내면적 성장과 좌절을 그린 작가 자신의 경험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또한 작자인 헤세 자신도 한스처럼 신학교에 들어 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헤세는 그러한 좌절을 딛고 작가로서 성공하지만, 한스는 끝내 자멸하고 만다. 엄격한 규율과 형식뿐인 지식을 요구하는 신학교나 출세하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 마을 모두 한스에게는 고통스러운 곳이며, 한스는 결국 그에게 강요되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된다. 성장 소설로 주인공의 변모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

 줄거리 :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낚시를 즐기고, 토끼와 자연을 사랑하는 섬세한 감성의 소년이다. 그는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다.

 

힘든 준비 기간을 거쳐 그는 마침내 신학교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한다. 신학교 생활은 엄격하고 고되지만 그는 비교적 잘 적응하여 좋은 성적을 유지해 나간다. 그러다가 헤르만 하일러라는 천재적이고 반항적인 시인학생을 만나게 되어 깊은 우정을 나눈다. 우정이 깊어 갈수록 그는 주입식 교육과 가혹한 규율이 지배하는 학교 생활을 견딜 수 없게 된다. 한스는 힌두라는 친구의 죽음, 헤르만 하일러와의 이별 등을 겪으면서 더욱 심한 정신적 압박감을 느끼고 몸과 마음이 무너져 간다. 결국 한스는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무기력과 우울증 속에 방황하다가 빈민 거리의 사람들과 사귀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엠마라는 처녀와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이 역시 짧은 만남으로 끝남으로써 또 한 차례 깊은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그는 결국 기계공으로 취직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고된 노동과 정신적 갈등 속에 일 주일을 보낸 후 첫 일요일에 취해서 혼자 돌아오던 중 물에 빠져 죽고 만다. - 교과서 수록분은 한스가 정신적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전개' 부분.

 내용 연구

수레 바퀴 : 한스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 어딘가로 끊임없이 가야하는 인생길로 자신의 내면과 이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억압적인 학교와 사회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

 

 두더지가 모아 둔 저장물(지식의 비유)을 먹고 한동안 살아가듯이, 한스는 전에 얻은 지식을 가지고 얼마 동안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새로운 학습을 통하여 계속되는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전에 해 두었던 공부로 근근히 수업을 때우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묘사) 그 다음부터는 괴로운 궁핍의 연속이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아 조금씩 새로운 노력에 의해서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무모함에 그 자신 또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부질없이 머리를 썩힐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구약 성서 최초의 다섯 권 다음으로 호머를 포기하고, 크세노폰 다음에는 대수(代數)를 포기하여 버렸다.(한스의 성적이 떨어지고, 고전에 관심이 없음과 정상적인 생활에서 멀어지고, 공부를 포기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줌). 선생님들 간에는 그의 평판이 조금씩 내려가면서 우에서 양으로, 양에서 가로, 드디어는 영으로 떨어지는 것을 별 관심도 갖지 않고 태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 한스의 변화의 과정

 

 또다시 두통(내면적 갈등의 표출)이 일어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그리고 두통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헤르만 하일러를 생각하기도 하고 가냘프고 하염없는 꿈(학교를 떠나 자유롭게 되고 싶은 생각)을 좇으며 몇 시간이나 멍청한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조교수인 비드리히는 친절한 젊은 선생이었는데 한스의 얼빠진 웃음에 대하여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다. 그리하여 이 분은 탈선한 소년을 아끼는 마음에서 진정으로 동정심을 가지고 공연히 화를 내기도 하고 벌을 준다는 듯이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 방관해 버리고마는 상태였다. 때로는 경멸에 가득 찬 농담을 하기도 하여 잠든 그의 공명심을 일깨워 주려고도 하였다.(학업 성적이 좋았던 한스가 다시 성취욕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도록 일부러 경멸하는 태도를 보여 자극을 주고자 했다는 것으로, 비드리히 선생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알 수 있는 구절)

 

 "만일 잠들지 않으셨다면 이 문장을 읽어 주시지 않겠습니까?(한스를 비꼬는 말이지만 그 속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음)" - 조교수가 한스를 걱정함

 

 유독 화가 난 사람은 교장 선생님이었다. 이 허영심 많은 사나이는 자기 눈의 위력을 너무나도 자부하고 있었다(교육적 허영에 사로 잡혀 한스의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교장이 한스를 문제 학생으로 간주하고 있음). 그래서 그가 위풍당당[威風堂堂 : 풍채나 기세가 위엄 있고 떳떳함.]하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아도, 한스는 언제나 비굴하게 죽여 주십쇼 하는 듯한 멋적은 웃음으로 대해 줄 뿐(한스의 체념적 태도)이었으므로 화가 벌컥 치밀곤 하였다. 한스의 비웃음은 교장 선생을 차츰 신경질적으로 만들어 버렸다.(교장과 한스의 갈등)

 

 "그런 머저리 같은 천치 바보의 얼굴로 웃지 말아라. 오히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한스에 대한 교장의 신경질적 반응과 이전에는 한스가 뛰어난 학생이었음을 뒷문장을 통해 알 수 있다.) -교장 선생의 한스에 대한 노여움

 

 그것보다 더 그의 마음에 충격을 준 것은 아버지의 편지였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서 아들의 마음을 고쳐 달라고 교장 선생에게 애원하였다. 교장 선생이 기벤라트 씨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아버지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스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솔직한 사람들이 보통 쓰지 못하는 격려나 도의적인 울분으로 뒤덮인 글귀를 하나도 빠짐없이 늘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눈물겨운 호소를 잊지는 않았다. 그것이 아들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였다. - 아버지의 편지와 권고 

 

 이 부분은 한스의 타락의 과정, 혹은 변화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변화의 과정은 무엇보다도 지식의 차원에서 먼저 그 조짐을 보이는데, 한스는 그 동안 열심히 읽었던 여러 고전들을 포기하고, 그 결과 성적도 계속 하락한다. 떨어지는 성적과 반비례하여 공상의 시간이 느는데 이를 지켜 보던 조교수는 그를 어떤 식으로든 자극하고자 노력한다. "만일∼않겠습니까?"라는 질문은 한스를 비꼬면서도 자극하는 질문으로 여기서의 잠은 지성의 잠으로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다. 조교수의 노력과 상반되는 반응을 보이는 대표적인 인물로 교장 선생님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권위와 위력만을 생각한 나머지 한스의 상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에게 보이는 그의 반응에 화가 치밀 뿐이다. 아버지의 편지가 한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

 호머 : 고대 그리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를 쓴 시인(B.C. 880(?)∼750). 여기서는 그의 저작을 가르치는 강의 과목을 뜻함.

 크세노폰 : 고대 그리스의 군인·저술가(B.C. 431∼352). 저서로「그리스의 역사」,「소크라테스의 추억」등이 있음. 여기서는 그의 저작을 대상으로 한 강의 과목을 뜻함.

 대수 : 대수학의 준말. 숫자와 숫자를 대신하는 글자 및 기호와 그것들을 묶어서 지은 식으로 수의 성질이나 관계를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 

 

 교장 선생을 비롯하여 한스의 아버지나 교수나 조교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의무에 충실한 지도자(교육자들에 대한 비꼼과 비판)들은 어느 누구나 다 한스의 마음 속에서 그들의 소망(잔인한 명예욕으로 작자가 평가, 학생들이 학과 공부와 규칙에만 충실하도록 해서 우수하고 착실한 신학생을 만들겠다는 소망)을 방해하는 독소와 딱딱하게 굳은 게으름을 발견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바른 길(학업에 매진하는 태도)을 밟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학생 개개인의 내밀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교육 방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음)

 

 아마 그 온정에 넘친 조교수를 제외하고는, 가냘픈 소년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얼빠진 웃음이 소멸되어 가는 영혼의 시달림을 받아(한스가 멋쩍은 웃음만 보이는 것은 인생의 고민으로 가득 찬 정신 세계의 갈등 때문임을 보여주는 말) , 소년이 물에 빠진 듯이 불안스럽고 절망적인 가슴을 부여안고 주위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한스가 비인간적인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는 모습이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음) 학교나 아버지나 몇 명의 교사의 잔인한 명예욕(아버지와 교사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태도가 드러남)은 이 소년이 숨김없이 그들에게 드러낸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아무런 후회도 없이 짓밟아 버림으로써, 이 나약하고 아름다운 소년을 이런 지경에까지 몰고 와 버렸다는 걸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어린 한스의 좌절이 어른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그러한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위험한 소년 시절에 매일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던가? 왜 그에게서 토끼(자유와 자연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연과의 교감)를 빼앗아 버렸던가? 왜 낚시질이며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금지시켰던가?(성장기 소년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즐겁게 노는 것이라는 작자의 생각이 은연중 드러나 있다.) 왜 심신을 갈갈이 찢어 놓은 것 같은 쓸데없는 공명심의 공허하고 저속한 이상을 불어넣어 주었던가? 왜 시험이 끝나고 나서도 마땅히 쉬어야 할 휴가를 그에게 주지 않았던가? - 어른들의 명예욕에 희생된 한스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노새(완전히 지친 한스를 비유한 말)는 길가에 쓰러져서 아무 쓸모도 없게 되어 버렸다.(학업을 포기한 한스는 이제 더 이상 학교에서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의 비유적 표현) 초여름에 마을의 의사는 한스에게 성장에 기인하는 신경쇠약에 불과하다고 거듭 진단을 했다. 휴가 중에 마음껏 먹고 항상 숲속을 거닐면서 충분히 휴식을 취할 마음만 있다면 꼭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한스의 병이 자연과의 교감하지 못하고 단절한 점에 있다는 점을 암시) 그러나 섭섭하게도 일이 그렇게 되지는 못하였다. 휴가가 시작되기 3주일 전이었다. - 건강이 악화된 한스

 한스는 오후 수업 시간에 교수에게 심하게 꾸중을 들었다. 교수가 욕을 퍼붓고 있을 동안 한스는 의자에 쓰러져서 공포에 질려 떨기 시작하다가 그만 흐느껴 우는 바람에 수업은 아주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반나절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 이튿날 한스는 수학 시간에 칠판에 그린 기하 도표를 설명하도록 지명 받았다. 한스는 앞으로 나갔지만 칠판 앞에서 현기증을 일으켰으며, 백묵과 자로 선을 긋고 있던 중 그만 그 두 가지를 다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우려고 허리를 굽혔으나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한스의 상태가 매우 심각한 것임을 객관적인 묘사를 통해 밝히고 있다.) - 수업 시간의 두 가지 일화

 

 의사는 환자가 어리석은 짓(무리해서 수업에 참가한 일)을 했기 때문에 상당히 화를 냈다. 그는 신중한 태도로 즉시 휴가를 취할 것을 명했고, 신경과 의사를 초청하도록 권했다.

"저 아이는 또 무도병(舞蹈病)이 생긴 겁니다."

 의사는 교장에게 속삭였다. 교장 선생은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무모하게 화난 얼굴을 하고 있기보다는 아버지처럼 자비에 넘친 표정으로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한스가 꾀를 부리거나 게으른 것이 아니라 그의 병이 심하다는 것을 깨닫고나서 태도를 바꾸고 있다. 교장의 이중적 태도가 드러남) 그것이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고 어쩌면 알맞은 것인지도 모른다. - 의사의 진단

 

 교장 선생과 의사는 각기 따로 한스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주고 한스를 고향으로 내려 보냈다. 교장 선생의 노함은 오히려 심한 우려로 변해 버렸다. 얼마 전에 하일러 사건 때문에 뒤숭숭했던 학무과는 이 새로운 불행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모두가 의외로 생각한 것은, 교장 선생이 이번 돌발 사건에 대해서 으레 해야 할 훈화(訓話)조차 단념해 버린 것이다. 오히려 최후 순간에 있어서 한스에게는 끔찍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한스가 정양(靜養) 휴가를 하고 나서도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교장 선생은 뻔히 알고 있었다. 가령 그 전에 완치된다 하더라도 그때는 벌써 훨씬 뒤떨어진 그 어린 학생은 휴학한 수개월 동안, 아니 몇 주일 간의 학과라도 회복할 가망이 없으리라. 진심으로 격려해 주듯이 "잘 가! 다시 만나자."는 말로 그와 헤어지기는 했지만, 그 다음 순간 헬라스 반에 들어 서서 주인 없는 텅 빈 세 개의 책상을 볼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 타고나 재능을 지닌 이 두 제자가 연기같이 사라져 버린 데 대한 죄의 일부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마음 한 구석에서 떨어 버리기에 교장은 적잖이 신경을 썼다. 그러나 배짱 좋고 도의적으로도 강한 남자였기 때문에 이 무익하고 어두운 의심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떨쳐 버리기는 쉬운 일이었다.(비교육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이 드러난 말로 교장은 제자의 앞길을 막아 버렸다는 자책감을 갖는 것이 아무런 현실적 가치도 없고 부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말) - 정양 휴가 결정과 교장 선생님의 태도

 이 지문은 한스가 신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극도로 건강이 악화된 것을 확인한 교장 선생님이 한스의 휴가를 결정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도 서술자는 사건의 추이를 기록하는 한편 이 사건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섬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교장 선생님의 반응은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신학교에 대한 서술자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극도로 화가 나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자비에 넘치는 표정을 띠고 있다든지, 어리고 능력있던 두 제자의 불행에 대한 죄책감을 금새 씻어 버린다든지 하는 태도는 권위주의적이고 무자비한 신학교의 대표자로 능히 짐작한 만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휴가가 시작되기 3주 전이라는 이유만으로 건강이 악화된 한스에게 수업을 계속받도록 강요하여 극도로 쇠약해지게 만든 일은 신학교의 낡은 관습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런 상황에서 이별할 때 보여 주는 교장 선생님의 친절한 태도는 한스에게는 말 그대로 끔찍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 언급되는 '하일러 사건'과 '텅 빈 세 개의 책상'은 한스 이전에도 신학교의 엄격한 규율로 불행 맞아야 했던 학생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다른 부분에 나오겠지만, 친구의 죽음과 헤르만 하일러가 학교를 떠난 일은 한스의 정신 세계에서도 큰 충격을 가한 사건들이다.

 무도병(舞蹈病) : 얼굴·손·발·혀 따위가 뜻대로 되지 않고 저절로 심하게 움직여,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 되는 신경병.

 훈화(訓話) : 교훈하는 말

 정양(靜養)휴가 :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요양하면서도 쉬도록 하는 휴가

 헬라스 반 : 한스 기벤라트가 친구 헤르만 하일러와 함께 속해 있던 기숙사의 반 이름

 조그만 여행 가방을 들고 떠나가는 신학교 학생 뒤로 교회와 성문과 박풍(膊風), 또한 탑들이 있는 수도원이 사라졌다. 그리고 숲과 언덕이 벌판 아래에 가라앉고 그 대신 바덴 주 국경 언저리의 과일 나무들이 물결치는 초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다음에는 프포르츠하임 시가 나타나고, 그 뒤로는 슈발츠발트의 검푸른 전나무 산들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를 뚫고 무수한 계곡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을 받아가며 전나무 숲들은 어느 때보다 푸르고 시원한 짙은 그림자를 연상케 하였다.(다른 단락에 비해서 분위기가 밝음) - 고향으로 가는 길의 풍경 

소년은 경치가 바뀌어가자 더욱 고향의 모습을 짙게 해 주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결 즐거운 심정이 되었다.

학교(억압적인 교육)

학교와 멀어질수록

 경계선

고향과 가까워질수록

고향(고단한 사회)

 

해방감

자유의 정점

불안감

 

 그러나 고향이 가까워지자 문득 아버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버지가 어떻게 자기를 맞이해 줄 것인가 하는 불안이 아늑한 여행의 기쁨을 산산히 부숴 버리고 말았다. 시험을 치러 슈투트가르트에 여행할 때라든가 마울브론으로 입학하러 여행할 때라든가 그때마다 느껴지던 불안과 긴장을 동반한 기쁨이 더불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저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교장 선생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신학교도 학문도 야심에 충만했던 온갖 희망도 완전히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이제 그를 슬프게 하는 원인이 되지 못했다. 오직 기대를 배반당해 실망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근심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누를 뿐이었다. - 기쁨과 불안감의 교차 

 

지금의 그는 정양 그것보다도 실의에 차 있는 아버지에 대한 불안감이 천 근 만 근의 중압감으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휴식하고, 실컷 잠을 자고, 마음껏 울어보고, 마음껏 꿈이나 꾸어 온갖 시달림과 학대에서 제발 안정을 얻어 보자는 간절한 소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서 도저히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자신에게 실망할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학교로부터 벗어난 해방감을 마음껏 누리지 못할 것 같았다.). 한스는 기차 여행이 끝날 무렵 심한 두통이 일어났다. 기차는 그가 좋아하는 곳을 달리고 있었는데도 그는 창문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곳 언덕과 숲을 옛날에는 열심히 돌아다녔던 곳인데도 정다운 내 고향 정거장에서 하차해야 된다는 것조차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 - 아버지에 대한 생각과 두려움

 

우산과 여행 가방을 들고 그는 기차에서 내렸다. 아버지는 아들을 말없이 살펴보고 있었다. - 아버지와의 만남

 이 지문은 마침내 정양 휴가를 얻은 한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부분이다. 신학교를 떠나는 대목에서 신학교의 엄격한 규율과는 대조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묘사된다. 엄격한 신학교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된 한스는 아주 기쁘지만은 않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인데 가장 큰 것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걸었던 기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시험을 치르고 신학교에 입학하던 때를 잠시 회상하며 그 때의 기쁨에 젖기도 하지만 이제 다시는 그 신학교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이르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이러한 주인공의 심정은 매우 자세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서술자가 마치 주인공의 마음 속에 있는 듯이 이러한 사실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박풍 : 지붕의 양쪽 끝머리에 '∧'자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판

 바덴주 : 독일 남서부의 한 지방

 프포르츠하임 : 독일 남서부의 도시

 슈발츠발트 : 독일 남서부의 산지(山地)

 슈투트가르트 : 독일 남부에 있는 공업 도시

 마울브론 : 주인공 한스가 다니던 신학교가 있던 곳

 하차 : 차에서 내림

 

 

 한스가 변화하게 되는 과정을 정리해 보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이끌어주기 : 한스가 변화하는 과정은, 곧 학교 생활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심리적 추이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을 확인하도록 한다. 그 면화의 핵심은 삶에 대한 화의와 좌절감과도 연관됨을 알도록 한다.

 

예시답안

 학업에 흥미를 잃은 한스는 성적이 계속 떨어지고, 멍청한 웃음으로 모든 질책에 대응한다. 교장 선생님은 그런 그에게 극도로 화를 내고, 눈물겨운 호소가 담긴 아버지의 편지로 인해 한스는 충격을 받는다. 어른들의 명예욕에 희생된 한스는 심한 쇠약 증세를 보이게 되고 결국 무도병(舞蹈病)에 걸리게 되어, 의사의 권유로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게 된다. 한스는 비인간적이고 엄격한 규율과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한다. 어린 한스의 좌절은 어른들에게 드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성장기 소년인 한스의 인생에 있어서 자연과 교감은 중요한 것이지만, 어른들의 명예욕에 희생되어 결국은 병을 얻고 좌절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스의 심리는 어떠할지 한스의 입장이 되어 말해 보자.

 

이끌이 주기 : 한스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계기를 통해 그의 심리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를 정신적인 압박감에 시달이게 한 실체가 무엇인지 차악하도록 유도한다.

 

예시답안

 신학교를 떠나는 부분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운 자연 충경의 묘사는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한스의 내면적 기쁨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고향이 가까워오자 자신에게 실망할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학교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마음껏 누리지 못할 것 같다는 행각에 심한 두통을 느낀다.

 

 

한스는 고향에 돌아온 후 무기력과 우울증으로 방황하다가 결국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여러분이 한스였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보고, 옆 친구와 서로 이야기 해 보자.

 

 한스는 아버지, 목사, 선생님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정해 놓은 꿈을 가지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걸어 갔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한스의 삶이 우리의 10대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10대들도 다른 무엇을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어른들이 정해 놓은 교육 과정과 절차에 따라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공부에서 멀어지면 철저히 비난받는 일이 다반사이고, 공부만이 제1의 가치로 취급되어, 다양한 개성과 능력을 펼쳐 보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한스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다면 결국 죽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내가 한스였다면, 우선 나에 대한 수치심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려고 할 것이다. 사실 헤르만 헤세도 한스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위대한 작가가 되지 않았는가. 정말 위대한 것은 본래부터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헤쳐나가는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질문

1. 주인공이 신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

주인공인 한스는 천재적이고 반항적인 시인학생 헤르만 하일러와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부터 갑갑한 학교생활을 점점 증오하게 되다가 헤르만 하일러가 학교를 그만 두게 되자 더욱 심한 갑갑한 마음에 견디지못하게 고향에 내려가게 됩니다.

 

2. 주인공이 학교를 그만두고 선택한 직업은?

기계공

 

3. 주인공의 세속적인 타락(?)을 부추긴 친구는?

헤르만 하일러라는 천재적이고 반항적인 시인학생

 

4. 주인공이 사랑을 느낀 여인의 이름은?

엠마

 

5. 주인공이 신학교 시험을 마치고 가장 하고싶었던 취미생활은?

낚시질(자연과 더불어 노는 것)

 

6. 책 제목의 의미는 ?

한스는 어른들이 자기에게 지워준 수레바퀴의 무게를 견디지못하게 결국 죽게 된다.

 

7. 주인공은 신학교에서 친구의 죽음을 맞는데, 어떻게 죽는지?

 이름은 힌딩거 이며 1월에 스케이팅을 하는 친구들을 따라 간다. 하지만 스케이팅이 없는 관계로 구경만 할 속셈이었는데 점점 추워져 몸을 녹일 심산으로 연못 주변을 서성거리다 한 작은 호숫가에 다다랐다. 이 호수에는 지하에 온수가 솟아있었으므로 살얼음이 얇게 얼어 있었다. 몸이 작고 빠른 그였지만 호숫가 가까이에서 얼음이 깨져 물속에 빠져 익사한다.

 

8. 처음 출근해서 사장이 주인공에게 부여한 첫 작업은?

울퉁불퉁하고 모가 난 톱니바퀴를 줄로 밀어 정교하게 만드는 작업

 

9. 죽기 전날 읍내로 술을 마시러 간 계기는?

기계공 동료들이 어떤 일이 있어도 한스는 와야 된다며 부추겼다.

10. 주인공의 갈등, 고뇌를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의 이름과 직업은?

플라이크(구둣방주인)

 작자의 개인 체험과 작품 세계

 엄격히 말해서 어느 갈래에 속하는 작품이든 작자 자신의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문학 작품이란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작자와 작품이 완전히 하나로 묶여 있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자신의 체험이나 관찰을 주제로 삼고 있다. 그가 관심을 둔 대상은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개인적인 삶의 측면을 캐냄으로써 자서전적 내면 세계라는 영역을 벗어나고, 개개인의 지적이고 정신적인 상황을 해명함으로써 시대의 일반적 상황을 규명하려 하였다. 따라서 소년기의 우울한 몽상, 스쳐 지나가는 단편적인 영상, 눈앞에 전개되는 한 폭의 풍경 등 이런 것이 모두 그에게는 소중한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수레바퀴 밑에서'에는 작자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헤세 자신이 열네 살에 슈바벤의 국가 시험에 합격하였고, 그 시험의 특전에 따라 말브론의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우울하고 사색적인 소년이었던 헤세에게는 신학교의 분위기가 너무나 딱딱하고 무미 건조했기 때문에 어느 날 신학교를 탈출하고 만다. 그 후 소년은 회복된 듯 싶어 다시 고등학교에 입학하나, 거기서도 결국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퇴학을 당한다. 이후 헤세는 서점의 점원, 출판 조합의 조수, 기계 공장의 견습공 노릇을 하면서 때로는 이웃이나 타인과의 따뜻한 조화를 갈망하기도 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되면 거기서 도망쳐 멀리 브라질로 도망갈 계획을 세우기도 하는 등 희망과 좌절 사이에서 방황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경험은 그대로 작품의 소재가 되었고 그가 겪었던 번민과 고뇌를 작품 속의 주인공도 똑같이 겪고 있는 것이다.(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블랙박스 문학)

 '수레바퀴' 의 의미

 이 작품의 제목인 '수레바퀴 밑에서'는 "녹초가 되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수레바퀴 밑에 깔리게 될 테니까." 라는 신학교 교장의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한스는 전체적으로 애처로운 느낌을 주는 소년으로서, 연애를 처음 경험하는 과정에서도 상대 여성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 '수레바퀴에 닿은 달팽이처럼 촉각을 감추고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식의 순진한 면을 보인다.

 

 또한 한스의 고집스럽고 심술궂은 성격적 요소는 학교를 뛰쳐나와 공방에서 일하면서 비참한 심정으로 자포자기가 되어 하루 종일 시계를 몰래 엿보면서 작은 톱니바퀴를 문질러 대는 그의 행위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톱니바퀴는 또 하나의 수레바퀴라고 생각해도 좋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레바퀴' 는 한스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험난한 무게이자, 동시에 끊임없이 돌고 돌면서 어디론가 굴러가는 인생길을 상징한다. 즉 한스는 학교와 사회의 '수레바퀴' 아래서 질질 끌리며 죽음의 그림자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블랙박스 문학)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작가가 29세 때 쓴 것으로, 한 소년의 내면적 성장과 좌절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헤세 자신도 이 작품의 주인공 한스처럼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헤세는 그러한 좌절을 딛고 작가로서 성공하였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한스는 끝내 자멸하고 만다.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내성적이고 소심하면서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낚시였는데 그는 이것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규율과 지식만을 강요하는 신학교 생활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교과서에 수록된 부분은 학교 생활의 유일한 위안이었던 헤르만 하일러가 떠난 후 그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가는 과정을 절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는 결국 자신의 내면 세계와 조화될 수 없는 삶의 수레바퀴 아래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감상2

 때는세기(世紀)의 전환기인 1900년경, 남부 독일(南部獨逸)의 슈발쯔바르트(검은 숲의 뜻)의 작은 동네에 사는, 어린 소년 한스 기벤라트는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공부에만 쫒기고 있었다. 까닭인즉, 이 머리가 좋은 소년을 엘리트 코스로 걷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아버지를 비롯하여(어머니는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 동네 목사며 학교 선생님들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한 첫번째의 관문인 슈투트가르트에서 행한 주 시험(州試驗)에 그는 멋지게 합격한다. 드디어 마우르브본의 신학교(神學校)에 진학하는 길이 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준비교욱을 위하여 소년은 즐기는 수영이라든지 낚시질을 할 시간도 모조리 빼앗기고 공부에만 열중하게 되는데, 소년은 차츰 여위어 빠지고 게다가 때때로 두통까지 일어나게 된다.


 마우르브본의 신학교는 기숙 제도(寄宿制度)로서, 우리들의 주인공 한스는 헤라스라고 불리우는 방에서 9명의 학우들과 기거를 함께 하게 된다. 그런데 기묘한 인연으로, 수석을 노리는 모범생 한스와, 시인 기질이 있는 열혈한(熱血漢)으로서 권위를 싫어하는 헤르만 하이루나는 친밀한 우정으로 맺어지게 된다. 그러나, 하이루나가 학교로부터 탈주를 기도하다가 퇴학 처분을 받게 되자, 한스는 고립된다. 그리고 학업 성적이 차츰 떨어지고, 그 위에 신경 쇠약 증세까지 겹쳐서, 고향으로 가서 요양을 하기 위하여 중도 퇴학을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과실주를 담그는 일을 하면서, 엠마라는 여성과 덧없는 사랑을 맺지만, 결국은 그녀에게 놀림을 당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권고로, 어린 시절의 학교친구인 아우그스트가 근무하고 있는 기계 공장에 고용되어 일을 하게 되는데, 어느 일요일, 아우그스트 등과 함께 근교로 하이킹을 가서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강에 빠져 익사를 하고 만다, 그것이 자살이냐, 그렇지 않으면 사고사이냐 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헤세가 이 소설에 대하여, 「이 책에는 사실상의 체험으로서, 강요당하는 생활의 편린(片鱗)이 숨기어져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자전적(自傳的) 소설이다. 헤르만 하이루나(H·H)와 한스의 일인 이역(1人2役)으로서, 작자 자신(H·H)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수레 바퀴 밑』이라는 제목은 「마음이 약해지면 안돼. 그렇잖으면 곧 수레 바퀴 밑에 깔리고 마는 거야」라고 자못 친절하게 충고하는 신학교 교장의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최초의 연예 체험에 있어서도,엠마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수레 바퀴에 부딪친 달팽이처럼, 촉각(觸角)을 오므리고껍질 속으로 움츠려 들어가는」그런 순진한 주인공이, 180도로 전환을 하여 거리의 공장에서 일하게 되고, 「죽을만큼 처참한 심정으로, 온 종일 시계만을 훔쳐 보면서, 안달나게 작은 톱니 바퀴를 갈아야 하는데」, 이톱니 바퀴도 또 하나의 수레바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한스는 학교와 사회라는 「수레 바퀴밑」에서, 줄줄 죽음의 그림자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솔직한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가 이 가련한 소년의 운명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심화 자료

 '수레바퀴 밑에서'와 헤세의 경험

 이 작품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헤세 자신이 14살에 슈바벤의 국가 시험에 합격하였고, 그 시험의 특전에 따라 말브론의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우울하고 사색적인 소년이었던 헤세에게는 신학교의 분위기가 너무나 딱딱하고 무미건조했기 때문에 어느 날 신학교를 탈출하고 만다. 그 후 소년은 회복된 듯 싶어 다시 고등 학교에 입학하나, 거기서도 결국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퇴학을 당한다. 이후 헤세는 서점의 점원, 출판 조합의 조수, 기계 공장의 견습공 노릇을 하면서 때로는 이웃이나 타인과의 따뜻한 조화를 갈망하기도 하고m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되면 거기서 도망쳐 멀리 브라질로 도망갈 계획을 세우기도 하는, 희망과 좌절 사이에서 방황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경험은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작품의 소재가 되었고 그가 겪었던 번민과 고뇌를 작품 속의 주인공도 똑같이 겪고 있는 것이다. (출처 : 한샘문학)

 수레바퀴의 의미

 이 작품의 제목인 '수레바퀴 밑에서'는 "녹초가 되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수레바퀴 밑에 깔리게 될테니까."라는 친절을 가장한 신학교 교장의 말에서 딴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한스는 전체적으로 애처로운 느낌을 주는 소년으로서, 최초의 연예 경험에 있어서도 상대 여성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 '수레바퀴에 닿은 달팽이처럼 촉각을 감추고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식의 순진한 데가 있었다.

 

 자신의 고집스럽고 심술궂은 성격적 요소는 오히려 한스의 친구인 시인의 기질을 가진 소년 헤르만 하일러에게서 나타나는데, 이름 자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소년이 시골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는 전환 같은 것 도 헤르만 하일러적인 고집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주인공 한스의 연약한 체질로 보아서는 다소 당돌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어쨋든 한스의 공장에서 비참한 심정으로 자포자기가 되어 하루 종일 시께를 몰래 엿보면서 작은 톱니바퀴를 문질러 댄다. 이 톱니바퀴도 또 하나의 수레바퀴라고 생각하여도 좋은 것이다. 이리하여 한스는 학교와 사회의 '수레바퀴' 아래서 질질 끌리며 죽음의 그림자에 가까워진다. (출처 : 한샘문학 )

 헤세(Hermann Hesse)

  1877. 7. 2 독일 칼프~1962. 8. 9 스위스 몬타뇰라. 독일의 소설가·시인. 194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서, 그의 주요 주제는 인간의 본질적인 정신을 찾기 위해 문명의 기존 양식들을 벗어나 인간을 다루고 있다. 자기 인식을 호소하고 동양의 신비주의를 찬양했으며, 사후에 영어권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동양에 선교사로 있었던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으로 마울브론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모범생이었지만 적응할 수 없었던 그는 칼프 탑시계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있었고 후에는 튀빙겐 서점에서 일했다. 갑갑한 전통학교에 대한 그의 혐오는 지나치게 근면한 학생이 자기 파멸에 이르는 내용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 Unterm Rad〉(1906)에 잘 나타나 있다. 1904년까지 서점 점원으로 일했고 그해 자유 기고가가 되었으며, 실패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작가에 관한 〈페터 카멘친트 Peter Camenzind〉라는 첫 소설을 발표했다. 예술가의 내면과 외면의 탐구는 〈게르트루트 Gertrud〉(1910)·〈로스할데 Rosshalde〉(1914)에서 계속되었다. 이즈음 인도를 방문했고 후에 석가모니의 초기 생애를 그린 서정 소설 〈싯다르타 Siddhartha〉(1922)에 반영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중립국 스위스에 살면서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독일의 전쟁 포로들과 수용자들을 위한 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1919년 스위스의 영주권을 얻었고 1923년 그곳 시민이 되어 몬타뇰라에 정착했다.

 

 인간의 위기에 대한 심오한 감성을 지닌 작가로서, 카를 구스타프 융의 제자 J. B. 랑과 함께 정신분석을 연구했으며 융과도 알게 되었다. 분석의 영향이 〈데미안 Demian〉(1919)에 나타나는데, 이 소설은 고뇌하는 청년의 자기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곤경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는 유명해졌다. 그의 후기 작품은 그가 융의 개념인 내향성과 외향성, 집단 무의식, 이상주의 및 상징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후기 문학 활동은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 몰두했다.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1927)에서는 중년 남자의 유산계급 수용과 정신적인 자기실현 사이의 갈등이 묘사되었다. 〈지와 사랑 Narziss und Goldmund〉(1930)에서는 기존 종교에 만족하는 지적인 금욕주의자와 자기자신의 구원 형태를 추구하는 예술적 관능주의자를 대비시켰다. 그의 최후의 최장편 소설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1943)에서는 극도의 재능 있는 지식인을 통해 사변적인 삶과 적극적인 삶의 이중성을 탐구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헤세의 학창 시절 회고

 당시의 체험을 그(헤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답니다.

“나는 자유로운 점심시간에 가장 가까운 언덕을 올랐다. 나는 다른 편 언덕에 펼쳐져 있는 깊은 호수를 조망했다. 그곳에는 내가 모르는 것, 더 위대한 것, 미지의 나라, 세계, 자유가 있었다. 그곳에는 자유로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감추어진 목표, 숭고함과 몰락이 있었다. 그곳에는 회복시켜주는 힘, 말 못하는 나의 근심과 걱정을 치유하는 자유로운 공기가 있었다” (출처 : 알로이스 프린츠 저 / 헤르만 헤세의 '모든 시작은 신비롭다'에서)

 헤세의 또 다른 성장 소설 '데미안(Demian)

  독일 작가 H. 헤세의 소설(1919).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불안하고 혼란한 청춘기의 고뇌와 방황을 1인칭으로 솔직하고 강렬하게 표현함으로써 젊은 전쟁세대에 계시와도 같은 영향을 미쳤다. 헤세의 작품세계에서 초기의 서정성·낭만성이 사라지는 전환점이 되는 작품으로, 신비적 직관과 초인사상의 영향이 드러나 있다. '데미안'은 헤세 개인의 생애에서 보면 매우 불우했던 시기에 씌어진 작품이다. 전쟁과 가족적인 갈등과 정신적인 고통에서 야기된 신경 쇠약 증세를 치유하기 위해 정신 분석적 치료를 받는 동안, 자신의 갈등과 문제를 갈파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격정적으로 이루어졌다. 1차 대전 전후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씌어진 '데미안'은 물질 문명에의 지나친 편향을 비판하고 내면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유럽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들은 이 책에서 그들 자신의 정신적 곤경이 고백적으로, 숨김없이 솔직하고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 열광했다. 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유럽의 각 전선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의 배낭 속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책은 성경과 '데미안'이었다고 한다. (출처 : 권미애, '데미안' 해설 : 참된 아름다움의 힘'에서)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작품 세계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조언을 구하는 독자에게 실천적 행동을 위한 명백한 길을 제시하기를 늘 거부해 왔다. 그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누구나 자기의 불안을 회피하려 들지 말고 사회의 관습적 가치 체계와 요구들을 회의하고 모든 독단적 규범에 맞서 주체적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시인으로서 발언했다. 그보다 내밀하고 소홀히 하기 쉬운 고통과 희열을 그는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는 개인의 운명과 생활 감정에 대해 본질적이면서도 이 세상의 권력과 위신을 위한 투쟁에서나 통치 형태 및 사회 질서를 둘러싼 투쟁에서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그러면서도 뚜렷이 드러나지 않고 어쩌면 일상적일 수도 있는 그런 사건과 경험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에게는 모든 인간 존재의 기본 조건이 되는 핍박과 위험들,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끊임없이 되살아 나는, 불확실하고 위협받는 현존재의 혼란 같은 것이 문제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 같은 핍박에 대하여 미리 주어진 모든 해답이나 의미 해석을 무시하면서도 본연의 인간성을 간직할 줄 앎으로써, 부단히 깨어 있고 회의하는 의식을 가진 현대 작가임을 입증했다.

  그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이나 핍박 가운데서 정신의 힘을 경험했다. 그리하여 그는 과거의 종교적 전통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그와 동시에 모든 규범에 저항하고 자기의 경험을 신뢰해야 하는 필연적 요청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문학적 서술 형식도 비로소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해냐하면 이제는 궁핍한 상황에 대한 심리학적인, 사회학적인 분석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오히려 체험 상황을 생생히 묘사하고 조명함으로써 완곡한 암시로만 파악할 수 있는, 언표되지 않은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문학적 사건과 형상, 인물과 모티프를 통해서만,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의 어두운 힘을 몰아내고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대응 방식을 확언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헤세에게 있어서 인간이 처한 위험이 어떤 방식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되고 문학이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헤세는 종종 절망과 믿음의 갈등에 관해 말했고,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는 타고난 재능"을 강조한 방 있다. 그리하여 그는 때때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생과 창작 전체는, 그것을 통찰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조화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 그러나 고통을 이겨낼 믿음이 없지는 않은 -- 고통을 감내하기 위한 쉴 새 없는 투쟁으로 드러나 보일 것이다." (<요르단에게 보낸 편지>, 1932)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들은 인류사이 벽두부터 모든 문학에는 '고통의 힘'이 작용해 왔으며, 마치 문학이란 언제나 고통의 체험을 서술하고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사명도 갖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신과 영웅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조차 문학은 인간이 분쟁과 투쟁, 고통과 몰락, 아약함과 덧없음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에 못지 않게 희랍 비극은 고통의 힘을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하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그가 눈앞 난관을 제거했다고 생각하면서 단호한 행동을 취하면 취할 수록, 그에게는 고통의 심연이 점점 깊은 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신의 좌절을 깨닫고 고통의 불가피함을 체득하는 한편,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운명을 잊어버리지 않고, 형상화를 통해 그 운명을 현재화하고 해석할 때에만 문학의 언어는 필연성과 고유한 권리를 획득하며, 목적론적이고 사물화된 사고에서 해방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합목적적인 제도나 조직을 통해 현존재의 궁핍을 극복하거나 줄일 수 있고, 자연에 대한 인식 덕분에 자연의 힘을 통찰하고 다스릴 수 있게 됨에 따라 천재지변에 대해서도 옛날 사람들처럼 놀라지 않게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뇌의 총량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우리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내재적 법칙성을 인식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인간 삶의 모험이나 우연 혹은 세상사의 변화무상함에 직면하더라도 소박하고 감각적인 과거 시대보다는 담담하게 마주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과 심적 상황에 대한 인간의 불안이 조금이라도 감소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며, 각 개인은 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계기로도 좌절할 수 있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현대에 올수록 주관성에 몰두하게 되고,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혐에 대한 지신감을 회복하기 위한 토대를 주관성 가운데서 찾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내적 경험 상황에로의 결정적 전환, 자기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자아를 위협하는 궁핍한 상황에로의 결정적 전환을 보여주는 위대한 본보기이다. 인간에 대한 위협이란 이를테면 정치, 사회적 제도에 기인하는, 따라서 생활 환경을 보다 잘 통제하기만 하면 인간을 죄절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요컨대 인간체 대한 위협은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통일된 감정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지닌 존재인 인간 자신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래로 인간의 내적 경험 및 체험 세계를 투시하려는 작업은 독일 소설의 본래적 주제가 되어 왔다. 장 파울(Jean Paul), 티크(Tieck)와 호프만(Hoffmann) 같은 낭만주의자들, 뫼리케(Morike)나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 등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분명하다. 헤세가 이런 작가들을 자신의 모범이요 스승이라고 늘 고백한 사실을 보더라도, 그가 이들에게서 읽어 낼 수 있는 소설의 주관화를 보다 철저히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의 모든 작품은 전기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작가로부터 거의 분리시킬 수 없는 소설적 자아의 내적 체험 세계가 무엇보다 소설의 시점을 압도하게 된다. 헤세의 창작이 드러내는 이 같은 기본 태도를 우리는 객관화 능력의 결핍이나 지나친 개인주의라고 매도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런 태도에서 어떤 결정적 통찰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고뇌의 체험과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을 객관적 해답이 주어진 사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각 개인이 자신의 내면에 비추어서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체험의 연관으로서 진행되는 사건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그 체험 연관 내에서 사태의 진실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헤르만 헤세가 일찍부터 자기의 자아를 문제의 출발점으로 삼거나, 시점을 바꾸어 다양한 이름을 빌어서 자아를 문제삼으면 삼을 수록, 그의 작품의 본래적 가치를 면밀히 규정하고 일관된 기본 체험 및 결정적 통찰을 그대로 부각시키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그의 작품이 방대하다는 것부터가 벌써 삶의 풍요로운 체험을 밀도 있게 확산시키고, 그의 작품이 주관성을 띰에도 불구하고 비유로서 읽혀질 수 있다는 데에 그의 창작의 의미가 들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 세계를 움직이고, 마음의 불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경고하는 다채로운 비유의 세계에 마주치게 된다. 이때 작품의 상황은 폭 넓게 해석되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규정하기 힘든 작품의 기본 정조(情操)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러한 기본 정조를 우리는 깨어 있는 자기 의식에서, 자연스럽고 소박한 삶에 대한 사랑에서, 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추적하는 의지에서, 혹은 보다 차원 높은 정신적 삶을 견지하고 영원에의 믿음을 지니면서도 유위 변전하는 상황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발견하게 된다. 자기 탐구가 정열적으로 심화되면 될 수록 내면의 갈등은 그만큼 더 강해진다. 우울과 고독의 정조, 좌절과 절망의 정조는 모든 성취와 희열의 시원(始源)인 어두운 지반이다.

 

  그의 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일련의 인물들은 명백히 친족성(親族性)을 드러낸다. 그 계보는 헤르만 라우셔에서 출발하여, 페터 카멘친트와 한스 기벤라트에서 크눌프와 데미안으로, 클링조르와 싯다르타로, 하리 할리와 골드문트로, 그리고 마침내는 요제프 크네히트로 이어진다. 각 인물에서마다 우리는 한 개인의 체험 연관과 한 인격체의 삶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인생 행로에 마주치게 되고, 그 인생 행로는 깊이 회상의 세계로 몰입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소설적 사건의 소재가 되고 소설적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는 프랑스나 러시아의 사회 소설에서와 같은 객관적 관찰자의 태도나 사회를 분석하는 태도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기억 세계가 문제되고, 그런 한에서는 주관적 관심이 문제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일련의 기억 세계를 형상화하거나 작가에게 중요한 이간 및 만남을 상기시키는 작품들이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일련의 체험 순간들을 집약하고 이런 저런 체험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 그런 작품들은 객관적 사건에 집착하는 경직된 노벨레 형식을 무시하고, 다만 개인적 삶의 증인이고자 할 따름이다. 또한 작품의 제목들도 고백의 온갖 단편(斷片)이나 상상력의 유희를 어렴풋이 짐작케 하는 것들이 많다. 부단히 새롭게 자화상을 그리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작품집으로는 『이편에서, 1951』, 『우화집, 1935』, 『꿈의 발자취, 1945』, 『회상록, 1950』, 『후기 산문집, 1951』 등이 있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주관성으로 인해, 고도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다층적인 작품 세계는 현저한 특징을 획득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같은 자아는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경험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재의 진실에 관한 모든 문제를 자기의 내면에서 판단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의 기억 및 체험 가운데서 현대인의 정신과 영혼이 처한 상황의 한 단면, 현대인이 처한 일종의 세계상황, 무방비 상태 및 의식의 위기가 드러남으로써 비로소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풍요로운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채 겉보기에는 질서 있고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벌써 가장 개인적인 생활 영역에서마저 끊임없이 새로운 불안과 파국의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슈바르츠발트의 북쪽 지류인 나골트 강을 끼고 있는 헤세의 고향 도시는 정신적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기보다는 전원적 생활을 보장해 주는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양친은 뿌리 깊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슈바벤 경건주의의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부친과 외조부는 인도에서 전도 사업에 종사한 경력이 있으며, 헤세 자신의 묘사에서 우리는 이 집안의 영적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성장기의 헤세는 이러한 세계로부터 단호히 뛰쳐 나옴으로써 자기의 길을 찾는다. 즉 그는 프로테스탄트 신학도의 길로 이어지는 말브론 수도원 부속학교를 도망쳐 나와 어린 시절부터 방랑자의 길로 접어들며, 나중에도 시민적 삶의 틀에 박힌 형식을 거부한다. 시대 정신과의 대립은 그를 점차 독일의 체제에 대한 방항자로 키워 간다. 이러한 위기 상황의 내면에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자기 내면의 불안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식이 일찍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문명 비판적 색채가 짙은 것은 그런 까닭에서이다.

  물론 이처럼 관습적인 것을 멀리하는 이유를 밝히는 작업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벌써 유년 및 소년 시절부터 헤세는 부모와 교회와 학교의 판에 박힌 대답을 의심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경험에 의해 자기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소설들이 인간의 성장 과정을 그토록 즐겨 다룬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의 가장 명확하고도 결정적인 특징은 1919년에 나온 『데미안 Demian』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 1차 대전 후의 젊은 세대는 자신의 운명과 불안과 회의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다.

  참으로 살아 있는 인간은 무엇인가. 이것을 오늘날의 인간이 옛날 인간만큼도 모른다는 것은 물론이다. 게다가 이간은 누구나 자연의 소중하고 유일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대량으로 학살당한다. …… 인간은 누구나 정신이 육화된 존재이며, 누구나 피조물로서 고통받고 있다. …… 나의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으며 꾸면 댄 이야기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도 않다. 내 이야기에는 더 이상 기만당하고 싶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모순돠 혼란, 광기와 몽상이 배여 있다.

  이처럼 인간에 관한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질서의 세계, 이상의 세계, 설교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연 사고와 삶은 통합될 수 있으며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 그리고 정신이 인간의 삶에서 돌발하는 신비로운 힘이나 본능적인 힘이나 마성적(魔性的)인 힘에 맞닥뜨린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따위의 불확실성 속으로 빠져 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과연 정말로 우리의 삶과 경험과 불안에 부합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고개를 든다.

   너에게 허용된 세계는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는 알았고, 목사와 교사들이 그러듯이 나머지 절반의 세계를 너의 것으로 만들고자 시도해 왔다. …… 우리가 체험하는 사고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에는,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폭력이나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상황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해석할 때에만 제압될 수 있으며 그것을 부인하거나 감출 때에는 결코 제압될 수 없다는 통찰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이 규범과 법칙, 전통과 관습에 의해 가로막히게 될 때, 그리고 더 이상 해결할 수 없고 재앙에 굴복하는 그런 불안이 엄습할 때 최악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시대의 특징은, 어디를 가더라도 "자기 자신에 내재하는 미지의 것에 대해 불안해 하는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삶의 법칙이 더 이상 들어맞지 않으며, 과거의 규범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의 종교도, 그들의 윤리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부합되지 않는다. ……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상에 매달려 있다."

  교회나 사회의 종교적 신념이 초개인적 보편 타당성을 상실하면 할 수록, 정신과 삶의 긴장은 그만큼 더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신념은 인간을 다시 자기 자신과의 일치로 이끌어 갈 수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 삶의 근본 체험으로 되돌아가서 정신적, 영적 삶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필요성이 생겨난다.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 1943』에서까지도 이러한 상황이 문제된다. 여기서도 '잡문의 시대'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이 "죽음, 불안, 고통, 기아에 거의 아무런 보호 없이 내맡겨져 있고 교회에서는 더 이상 위안받을 수 없으며, 정신으로부터 아무런 조언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 한층 더 단호하게 강조되고 있다. 단지 "홍수처럼 쏟아지는, 파편화되고 무의미한 교양물과 지식의 단편들"만을 이용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언어가 소름끼치도록 무가치해질" 위험이 닥쳐오고, "정신의 자기 불신과 정신의 힘과 품위에 대한 정신의 불신"만 높아지고, "삶이 삭막하게 기계화되고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대중이 믿음을 버리고 예술이 진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단지 "몰락의 음악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것처럼 보인다. 클링조르는 그 몰락의 음악 소리를 들었노라고 말한다. 인간의 궁핍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신의 계도적(啓導的) 힘을 더 이상 정당화시킬 수 없을 뿐더러, 그전에는 유효했던 제도들이 영향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마저 회의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았고, 따라서 자신의 궁핍과 위협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헤세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독자에게 새로운 정치·사회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지성이 맡아야 할 과제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정신의 역할을 외적 삶의 실천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에 국한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삶의 의미와 삶의 현실 사이의 긴장은, 그 긴장이 인간의 내면에서 화해하고 특히 자신의 경험에서 마주치는 현실의 힘들을 일단 사실로서 인정하면서 형상화를 통해 드러내 보임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이로써 헤세는 창작의 사명을 이야기하는 셈이 된다. 그의 문명 비판적 태도는 그가 보여주는 무수한 체험적 상황 속에서 전개된다. 얼른 눈에 띄지는 않지만 각 개인에게 본질적 의의를 갖는 경험들, 각 개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힘의 유희로 나타나는 그런 경험들은 마땅히 주목받아야 하고 충분히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하다. 그의 어린 시절의 체험과 성장 과정을 온전히 자기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적 진실과 진리의 본래적인 시금석이 된다. 싱클레어의 이야기는, 그가 어린 시절에 어두운 힘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부터 비로소 하나의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그런 힘들에 무방비 상태로 내맡겨져 있다. 그런 불안과 억압 하에서는 부모도, 학교도 도움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와 학교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삶의 과정에 들어맞지 않는 도덕적 척도로써 재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싱클레어를 지배하려 들고 청소년 범죄에 가담시키고 점차 커다란 불안 속에 몰아넣는 동료에게 싱클레어가 어떻게 의지하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밖에서 보면 그는 오갈 데 없고 도덕적으로 문제성 있는 소년으로 보이지만, 내면적 사건에 비추어 보면 닥쳐오는 삶의 힘들에 대하여 어찌할 바 모르는 불안과 불확실성이 드러날 뿐이다. 이 같은 힘의 유희가 투시되고 친구가 새로운 자신감과 결단력을 일깨워 줄 때야 비로소 싱클레어는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런 점에서 '탕자의 귀향'은 독특한 의미를 얻지만, 그렇다고 궁극적인 확실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내적 힘들의 균형은 늘 새롭게 무너지며, 일반적 규범으로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초기 작품에서는 주로 젊은이가 성장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에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위협들이 부각되었다. 따라서 초기 작품에서는 위협적이고 불안한 체험들에 시험당하는 인간 내면의 독자적 활동이 두드러지게 문제시되었다. 1904년에 발표되어 처음으로 헤세를 널리 주목받게 한 소설 『페터 카멘친트』는, 동경과 격정이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자칫 그릇된 길로 빠져 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젊은이의 우울과 회의로 가득 차 있다. 모든 목표는 어둠 속에 파묻힌 것처럼 보이고,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와 과제에 대한 물음에도 아무런 해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불안과 깊은 고독의 몸짓이 이런 인간의 특징이 된다.

 

  그는 도처에 도사리는 거대한 우울과 동경의 소리에 사로잡혀 귀를 기울였다. ……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오, 맙소사, 그 모든 것이 한낱 장난, 우연, 채색된 그림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 내 가슴 속에서는 언제나 동경과 사랑의 불안한 파도가 넘쳐 흐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나에겐 고통뿐이고, 기쁨은 간곳없다니!

   그는 자연을 이해한다고 자신할 수 없으며, 아무리 탐구하고 이해하려고 해도 수수께끼만이 남을 뿐이다. 그는 아무도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는 이 같은 무지를 인정함으로써 삶의 근원적 힘을 깨닫게 되고 삶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마치 친구나 여행의 동반자에게 귀기울이 듯이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우울은 비록 치유될 수는 없어도 고귀해지고 순화되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 1906』에 등장하는 한스 기벤라트의 학장 시절 이야기는 고뇌에 찬 삶의 유희 속에서 자신의 힘을 마음대로 시험해 보는 이런 이야기의 반대 유형처럼 보인다. 이 소설에서 헤세는 자신의 학창시절 경험을 집요하게 되새기면서, 편협한 학교 제도야말로 재능이 있고 부지런하지만 불안에 시달리고 위축된 젊은이를 좌절케 하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여기서 한 인가은 자신의 생명력과 합일될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이 생명력을 억압하고 위축시킴으로써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고 자아의 붕괴를 가져오는 그런 명령과 규범, 의무와 학습 내용에 질식해 버리고 만다.

 

  헤세의 후기 작품을 보면 물론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세는 그의 후기 작품에서 영혼의 평형을 위협하는 힘들을 지적해 보이고, 거의 병적이고 사람이 헤체돌 위기에 놓인 상황까지도 문제삼으며, 인간의 자기 소외로 번질 우려마저 있는 의식의 온갖 긴장들을 경고한다. 얼핏 읽기에는 별이야기가 없는 것 같고 완전히 자서전에 가까운 기록인 『요양객, 1925』에서는 유머로 가득 차고 자신에 대한 아이러니가 섞인 문체로 초로에 접어든 한 남자의 고충이 서술되고 있다. 때때로 우울증 비슷하 증세로 고통을 받는 이 남자는 주변 환경을 짐스러워하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부대끼다가 요양 도중에 점차 깊숙히 무기력 상태에 빠져 든다. 이 환자의 이야기는 금방 상징적 의미를 얻으면서 삶의 모순을 의식시켜 준다. 온천 요양은 원래 신경통을 치료하기 위한 요법이지만, 인간의 나약함, 누구도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제 문제는 평온의 파괴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삶의 피제약성' 가운데서 바로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인간이 아직도 어떤 치료제를 써서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가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고통에 길들여져서 스스로가 죽어야 할 존재이고 죽음에 속하는 존재임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 모두가 이상적 치유제를 써서 완전무결하게 치유되고 영원히 살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과연 정당하고 기대할 만한 것인가? 우리가 이 까다로운 문제에 양심적으로 대답한다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우리는 완전히 치유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또 영원히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온천 요법의 효능에 대한 소박한 믿음은 마침내 "원시적 미신" 일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받는다. 병세가 호전될 수는 있을지언정 치유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호텔의 주인도 환자가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요양의 본래적 성과는 "병이란 마치 머리칼이 세듯이 생기는 것이그 그 병을 깨끗이 긁어 낸다거나 미신을 쫓 듯이 쫓아내려 한다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는 사실의 통찰에 있는 것이다. 이 요양소는 모든 인간사의 덧없음을 상징하며, 끝없이 계속되어 온 삶의 죽음의 유희를 상기시켜 준다. 인간에게는 여하한 이상적 치유도 있을 수 없다. 죽음의 법칙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병을 통해 드러나는 덧없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요양객을 짓누르는 고통은 인간의 근본 상황을 가리키는 '비유 혹은 수수께끼'가 된다. 문제는 이 수수께끼를 풀고 해석하는 일이지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덧없음이라는 두려운 해답뿐인 듯하다. 물론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반응을 정확하고도 세밀히 묘사하고 분석할 수는 있겠지만, 이 모든 '절망과 좌절'을 묘사하는데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평형의 상실과 재발견' 그리고 시련을 극복할 줄 아는 진실된 인간 태도인 것이다. 병에는 완벽한 치료제가 있을 수 없듯이, 삶의 불안에 대해서도 인간사의 불완전함을 미리 알면서도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의식적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무상(無常)의 교훈' ― 이것이 없으면 아름다움도 없을 것이다 ― 은 유머의 태도를 정당화한다. 즉 외관상의 신경증 환자의 고통과 억압을 묘사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아이러니로 설명될 수도 있다. 적대적 현실과의 이 모든 마주침은 다만 삶을 더욱 구역질나게 하거나 아니면 기존의 규범에 함몰된 속물적 삶에의 유혹을 가져올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삶과 의식 사이에 참된 긴장을 회복함으로써, 이 모든 부질없음을 웃어 넘기고 의식을 마비시키는 온갖 유혹을 부술 수가 있다. 인간에 대한 위협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으며, 인간은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을 암시해 주는 두 가지 계기를 여기서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규범도 아니며, 불합리한 환경에 대한 적응일 수도 없다.

 

  오히려 자아가 자기 스스로를 의식하면서 자기 자선에 마주 설 때, 그리하여 주체적 결단으로써 자신을 되찾을 때 해방은 가능하다.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는 나 자신의 관찰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의식의 자기 회복을 결단하고 준비하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주는 삶의 위대성과 힘에 대한 경외(敬畏)도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궁핍이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라면, 그것은 이율배반 속에서만 배태되고 모든 불협화음을 자신 속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삶의 일부일 터이다. 즉 "우리는 요양소의 음울한 손님들이 아니라, 이 세상이라는 화려한 식탁에 초대받은 하느님의 손님들이었다." 삶의 그 모든 희로애락의 이면에 숨겨진 통일성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이다. 해냐하면 이 통일성이야말로 "유희와 고통과 웃음으로 가득 찬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의 기술(記述)은, 자기 의식과 삶의 통일성이 어떻게 서로를 비추어 주는가를 예시하는 하나의 본보기일 수 있다. 깨어 있는 자기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상황을 포착하고, 자신의 상황에서 출발하여 삶의 불가해한 통일성을 부단히 천착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과연 어디에서 하나의 톤과 그에 맞서는 톤이 서로 어우러지며 대립 속에서 통일성이 획득되는가를, 그 이중의 멜로디를 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에 대한 위협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하고 인간을 지탱하는 삶의 힘을 가리켜 주는 결정적인 근본 체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무상함 및 불가피한 불안이라는 관점에서 일상 경험을 해석하는 것이 어떤 의미와 타당성을 갖는지 우리는 좀더 엄밀히 규정할 필요성을 느낀다. 헤세가 그의 소설에서 구체적 체험의 상황과 그 상황이 과거와 맺는 관련을 천착하는 방식은 독일 소설 기법의 전통을 통해 이미 준비되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자아라는 것이 삶 속에 내던져진 존재로 파악되고 또 이 삶이 다시 그 자체의 의미를 침묵한다는 점에서, 헤세 특유의 관찰 방식은 단호함과 절실함을 획득한다. 말하자면 헤세의 소설에서 삶은 여하한 목표도 드러내지 않으며, 부단한 유위변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주장할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자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서만 삶의 단호함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삶 자체의 초개체적 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삶을 확신하는 방식은 일체의 정신적 객관화가 오히려 삶을 은폐하고 위장하려 든다는 사실 앞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내면적 인간 상황을 그 극한까지 몰고 가는 사유 방식으로서, 이 같은 사유 방식을 최초로 표현한 사람은 니체였다. 니체는 일체의 시작(詩作) 및 사유가 삶의 현실 그 자체 앞에서는 과연 얼마만큼이나 사람을 미혹하는 허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삶 자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시인한 것이다. 이때의 삶이란 인간 속에서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따라서 인간에게 자각을 일깨워 주는 그런 삶이다. 니체의 이 같은 문제 의식 및 확신이 헤르만 헤세에게도 결정적 의의를 갖는다는 점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헤세 자신도 『페터 카멘친트』 이래로는 그의 소설 속에서 니체라는 이름을 빈번히 언급한 바 있으며, 니체를 그 이전 시대와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기" 때문에, 또 "그의 내면에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상이 씌어 있기" 때문에 헤세는 그를 칭송한다.

 

 『유리알 유희』에서도 인간이 방황 끝에 각성자로서 삶의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는 한, 그것은 니체적인 개념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천차만별의 그의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그렇듯이 헤세 역시 니체의 영향권에 속한다.

 

  그럼 이제 헤세가 과연 어떻게 인간에 대한 위협을 겪으면서 삶의 숭배에 도달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비로소 헤세를 니체와 구별짓는, 헤세에게 본질적인 경험들이 보다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 키르케고르 번역자 크리스토프 슈렘프(Christoph Schrempf)의 죽음에 부친 1944년의 추도사에서 헤세는 자기 일생의 믿음의 토대에 관해 언급했는데, 그것은 그의 창작의 근본 동인(動因)이 무엇인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나에게 그리고 나를 통해 일어난 모든 사건은 좋은 것이다. …… 그것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며, 우리는 살아간다기보다는 오히려 살아지는 존재인 까닭이다. 우리의 이성보다 우월하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힘에 의하여, 삶에 의하여, 하느님에 의하여 우리의 삶은 영위되는 것이다." 삶에 의해 살아지는 한 인간은 살아가게 마련이라는 명제야말로 헤세가 그의 후기 작품에서, 특히 『황야의 이리』 이래로 점점 더 의식적으로 부각시킨 중요한 변증법이다. 이로써 그는 오늘날의 창작 및 사유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의식 상황을 포착하려고 시도한다. 릴케의 『시도시집(時禱詩集)』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대목이 나온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질 수 밖에 없음을 나는 느낀다. …… 도대체 스스로 사는 자가 누구한 말인가? 신이여, 삶이여, 그대는 스스로 사는가?" 궁극적으로 인간은자기 스스로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삶을 지배하기 위한 모든 기술적 수단, 사회의 모든 규범 및 관습도 우리 삶의 출발점이자 동인인 저 힘들을 우리에게 친수갛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점을 인간으로 하여금 경험케 해주는 그런 한계가 이로써 명시된 셈이다.

 

    시인이 인간에 대한 위협과 인간의 무상함을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서 경험하고 도처에서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시인은 이 힘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우리는 제기했었다. 고뇌에 대한 외경심 언제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바탕이다. 이처럼 궁핍한 상황을 믿음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측면에서 가능하다. 즉 우선은 고유한 자기 의식의 결단에 의해, 그리고는 모든 상상력의 활성화에 의해, 마지막으로는 ― 조직 및 집단 사상에서 표명되는 것과 같은 ― 정신적 질서에의 귀의 및 전통의 자유로운 수용을 통해 그것은 가능하다. 이 세 가지 동기들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가이 자기 자신과 궁핍한 상황을 극복함에 있어 창작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헤르만 헤세는 초기 작품에서부터 자기 의식의 내적 결단이라는 문제에 대단한 비중을 두었으며, 그 까닭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규범 및 질서들이 인격적인 삶의 길은 힘들을 속박하거나 파괴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미 우리는 언급한 바 있다. 그렇게 볼 때 그의 전(全)작품은 인간의 자기 탐구 바로 그것이며, 그런 맥락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마다 특정한 고유의 존재로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는 인간 존재이다. 그리하여 『데미안』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생각지 않으며 안 된다. 그러고 나서 그대는 과연 그대라는 존재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다른 것은 없다. 새로운 신들을 섬기려 하는 것은 틀린 생각이었고, 이 세상에 무엇인가를 배풀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잘못이었다! 자각한 인간에게는 자신을 찾고, 자기 안에서 확실해지고,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가는 것 이외의 아무런 의무도 없다. 그 길이 어디로 나아가든, 그건 아무래도 좋다. …… 누구에게든 진정한 소명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 이르는 것뿐이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원하는 삶에 응답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될 때 삶에의 전환은 시작된다. 그렇지만 자기라는 것은 곧잘 우리의 손아귀에서 빠져 달아나며, 삶의 변화무쌍한 형태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마련이다. 덧없는 소망을, 한쪽으로 치우친 격정을 정당화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자아 속에는 필연적인 그 무엇인가라도 있는 것일까? 물론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삶에 친숙해질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관여는 아직 의식화되지 않은 상태이며, 따라서 그 이상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인도의 시'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싯다르타, 1922』에서 동방 사상이 문제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이다. 적어도 동방 사상은 내면적 자기 확신에의 요구를 보다 정확히 규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삶의 보이지 않는 힘들이 불교적 개념으로, 즉 '아트만'과 '움'이라는 개념으로 재현되고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아트만은 어디서 발견될 수 있었는가, 어디에 살았으며, 그 영원한 심장은 어디서 두근거렸는가? 그곳은 바로 내 자신의 자아, 누구나가 품고 있는, 파괴할 수 없는, 가장 깊은 내면인 내 자신의 자아 가운데가 아니고 어디겠는가? 그것은 살덩이도 다리도, 사상도 의식도 아니었노라고 최고의 현자들은 가르쳤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결국 자기 자신으로의 희귀도 확실한 지반은 못 되며, 단지 새로운 의문과 새로운 불안을 낳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때의 자아란 무한한 삶의 비유일 뿐이기 때문이다. 『유리알 유희』에는 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친구여, 완벽한 학설을 동경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하도록 노력하게나, 신성(神性)은 개념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속에 있는 것일세." 마찬가지로 유리알 유희자들의 연마에서도 중요한 것은, 자아와 삶이 과연 어떻게 서로를 인식할 수 있으며 과연 어떻게 자아가 스스로를 삶에 의해 살아지는 존재로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의식이나 사유가 그 자체로서는 여기에 도움이 될 수 없다면, 남은 것은 오로지 명상의 길, 상상력의 길, 창작의 길일 뿐이다. 문제는 '침잠'이다. 침잠을 통해 영혼은 삶의 통일성을 체득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지혜로운 태도를 도야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체적 결단력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로 인해 창작은 명상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유리알 유희』에서는 명상의 태도가 일체의 정신 생활을 규정짓는다. 명상 수련이 여기서는 중요한 교육 수단으로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독자들에게 그것이 어색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명상 수련이 교육 수단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작품에서 명상은 "정신과 영혼의 부단한 화해"를 가능케 한다고 일컬어진다. 혹은 명상의 의미는 "개체를 질서 속에 편입시키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진정한 명상의 경지에 들어서면 "우주의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명상을 수행할 수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면 우리는 '상상력'의 유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되고, 내면의 표상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의 선율, 하나의 기억, 인생의 한 단면도 명상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서 일깨워져야 하고, 그리하여 개별자와 전체와의 연관이 경험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명상이라는 것은 헤세의 초기 작품에서도 일찌기 예시된 바 있는 태도, 즉 창작에 대한 옹호와 관련이 있다. 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유와 창작의 관계를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명상의 태도가 과연 어떻게 실천될 수 있고 정당화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벌써 페터 카멘친트는 '관조의 기술'을 습득하고, 그럼으로써 지상(地上)의 것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단순하고 무반성적인 인간에 대한 사랑을 소생시켜서 마침내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그는 죽음의 체험을 통해 "정신의 왕국에서 미래의 고향을 찾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된다. 그러나 정신의 이러한 힘이 그에게 밝혀지는 것은 사고나 개념적 지식 및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 직관을 통해서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생각하고 원하고 염원해 온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눈뜬 그의 심안(心眼)" 앞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 영혼의 형상력이 활동하기 시작하고, 사고에 맞먹는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내적 표상과 직관 속에서 비로소 사고는 정당성을 얻으며, 또한 인간은 자기의 본성을 그리고 그 본성과 삶과의 연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페터 카멘친트는 자기가 "대지의 맥박에 귀기울이도록" 인간을 가리치고자 하는 시인임을 자각한다. 문제는 사물화된 세계를 관찰하거나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심안을 통해 스스로를 경험하는 때달음을 얻는 것이다.

 

  한스 기벤라트의 학창 시절을 보면 학습과 관조, 사고와 창작의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기벤라트의 운명은 우리로 하여금 넘 일며적으로 오성적(悟性的) 능력의 함양에만 주력하고 환상과 감정의 역할을 그만큼 무시하지는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 소년이 학교 지식으로 인해 억눌리면 눌리수록, 그의 영혼의 힘은 그만큼 더 위축되어서 마침내 그는 유년기의 충동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젊은이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한다는 것, 꿈꿀 줄 알고, 유희를 알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귀기울이기를 배운다는 것은 중요하다. 시는 이 모든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아니, 이러한 경험 자체가 이미 시인 것이다. 학교 공부에 짓눌리고 질식할 듯한 한스 기벤라트의 옆에는 또 다른 젊은이가 있다. 그는 상상력의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 헤세 자신과 흡사하게 ― 학교의 규율에 순종하지 않는다. 개념적 학습과 상상력의 직관은 서로 섞일 수 없다. 결국 이러한 괴리에서 우리는 교육받은 삶의 궁핍함을 보게 된다.

 

  후기에 가서도 헤세는 주제를 다양하게 변형시키면서 직관을 옹호하고자 했다. 특히 『지와 사랑 Narzis" und Goldmund, 1930』의 이야기가 그렇다. 시종일관 그의 창작 방식의 특징이 되어 온 것은, 개인적인 체험 상황이 스스로 내적 표상을 생생히 보여주면서 또한 명상의 태도로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명상이란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체험을 직관으로 꿰뚫어 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체험 현실은 부단히 변해 갈 수밖에 없으며, 삶에서 마주치는 극단적 모순들이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게 만든다. 체험의 순간순간들은 새로운 체험에의 요구를 불러일이킬 뿐이다. 헤세의 인물들이 쉴 새 없이 부단히 시련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체험에서 마주치는 삶의 현실을 직관하면서 형상화함으로써 인간은 자신 및 다른 모든 삶과의 관련 속에서 삶의 현실을 이해하고, 보다 숭고한 통일성을 깨닫게 된다.

   특히 『싯다르타』에서 헤세는 그에게 본질적 의의를 지니는 이러한 태도를 정관의 태도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중요한 것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혜이다. 그 지혜만 "삶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순간마다 삶의 통일성을 생각하고 느끼고 호흡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심적 상태를 말한다. 강물의 비유 속에서는 변화와 지속이 만난다. 강물을 보고 싯다라트는 "잔잔한 가슴과, 그 무엇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영혼으로 귀기울이는 법"을 배운다. 그리하여 그는 강물이 흐르는 소리에서 "삶의 소리, 존재자의 소리, 영원한 생성의 소리"를 든는다. 내면의 표상은 삶에의 사랑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인간의 정신 태도에 대해 상상력이 갖는 의의는 인정된 셈이다. 문제는 시인의 특수한 재능이나 허구욕 혹은 창의욕이 아니라, 스스로 경험한 삶을 직관하면서 제압하는 일이다. 현대적 사유에서 너무나 상치되는 두 영역인 지식과 직관, 사실적 관찰과 인격적 체험은 명상을 통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며, 자기 자신으로 들어가야 할 자아는 모든 생명체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처럼 자아가 명상적 직관에 의지함으로써 삶의 충일함과 힘이 드러난다고 해서 확실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삶에의 사랑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주체적 활동과 그것을 둘러싼 현실 사이의 상호 작용도 가능해지며, 보다 숭고한 통일성을 직관하면서 체득할 수도 있다. 또한 뮤즈의 왕국도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며, 그럼으로써 색채와 형식, 소리와 리듬의 유희에서 생기는 희열도 되찾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컨대 자기 자신을 되찾은 인간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삶의 멜로디에 호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유희의 사상은 또한 불안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지는 않을까? 이 세계는 상상력에 의해 활력을 얻음으로써 일련의 몽상(夢像)들로 변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인간은 삶의 이미지들이 엮어 내는 유희에 익숙해질 것이고 거기서 구속력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한낱 유희로 전락해 버릴 위험 역시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벌써 싯다르타는 이러한 유희의 상념에 불안해 한다. 그러면서 "나는 기이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나는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다. …… 마치 구기 선수가 공을 가지고 놀 듯이, 나는 내 일거리들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구경꾼으로서 옆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 진심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사실 상상력을 통해 펼쳐지는 이러한 유희가 어떤 질서를, 의미를, 참된 현실을 인식케 해줄 때에만, 그리고 그 유희가 인간 정신 속에서 어떤 관련을 되찾을 때에만 그는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후한 일종의 상형 문자가 된다는 점이다. 유희는 상징이 되어야 하고, 문제를 해명하는 힘을 획득해야 하며, 정신의 질서를 되비춰 주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황야의 이리』에서의 '마술 극장' 그리고 특히 『유리알 유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된다. 삶의 유희가 인간의 지성을 회복시켜 주는 한, 그것은 자아를 정신 질서와 합일시켜 준다.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 1927』에서는 인간에 대한 모든 위협들이 다시 한 번 철저히 부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시대와 대립해 있으면서 '시민적 낙관주의'를 혐오하는 '고독자의 핍박' 그리고 '인간 존재의 문제'에 또 한 번 부닥치게 된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겨험들이 어떻게 유머의 태도를 통해 성찰되고 극복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다시 제기된다. 위로받을 길없는 삶은 '새로운 자기 직관'의 길을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으며, '마술 극장'은 바로 그런 변화를 도와 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의 묘사는 환상과 현실 사이의 독특한 중간층에서 움직이며, 그럼으로써 각별한 집중 효과를 얻는다. 절망의 구렁텅이를 빠지는 하리 할러를 삶의 세계로 다시 데리고 가는 사람은 어느 무희이다. 즉 그녀는 "삶의 순간들을 보여주는 작은 유희" 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가며, 이 유희는 두 사람을 완전히 압도해 버린다. 그녀는 그를 다시 삶이라는 비유의 세계에, 마땅히 그의 몫이어야 할 '삶의 비유들'에 친숙해지게 한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심장과 영혼으로 가득 채워질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우리 자신은 이미 줄곧 삶의 유희 속에 얽혀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유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진지함을, 의미를 드러낸다. 물론 '마술 극장' 내에서는 마치 폭력과 죽음과 몰락만이 난무하기라도 하듯이 모든 것이 분열될 위기가 또다시 닥친다. 그러나 이처럼 "끝없이 다체로운 삶의 유희" 속으로 "자아가 분열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새로운 질서로 인도된다. 비록 의식이 그 질서를 인식하거나 형성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내면의 귀로는 그것을 들을 수 있다. 즉 그 질서는 음악으로 말하는 것이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삶이라는 저주받을 라디오 음악" 뒤에 숨어 있는 정신을 숭배하고, 본래의 선율을 듣는 일, "삶의 유희가 엮어 내는 무수한 형상들"의 의미를 예감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모차르트의 출현이야말로 모든 비밀을 벗기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동방 순례』에서는 유희 사상이 동맹 사상과 결합된다. 그리하여 대단한 시적 마력을 지닌 불가사의한 상형문자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것은 도대체가 소설의 이야기로 씌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삶이라는 가면극"에서 보다 심오한 의미를 찾는 모든 사람들은 본래 일종의 동맹을 맺은 셈이며, 늘 새로운 형태와 상징으로 통일성에의 믿음이 생겨나는 한,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의 인간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확신이 표현되고 있다. 이 동맹의 구성원들은 삶을 유희라고 생각한다. 해냐하면 "삶이란, 그것이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라면, 다름 아닌 유희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들은 모두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한 방랑 길에 올라야만 한다. 그들은 "동맹의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들이 내면의 몽상을 좇아 "우리 동맹의 태고적 역사와 신앙"에 관련된 모든 장소와 기억들을 추적할 때에만 그 비밀은 파알될 수 있다. 그들은 영혼의 동방, "어디에나 있으면서 아무 데도 없는 곳" 그리고 "모든 시대들이 하나가 되는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시인들이 창조한 인물들을 만나기도 하고, 중세 혹은 황금 시대로 몰려가기도 하며, 왕의 궁전에 기거하는가 하면 요괴의 집에 기거하기도 한다. 결국 이 동맹의 역사를 서술하려는 온갖 시도는, 도대체 그런 동맹이 존해하기나 하는 것일까 하는 불신과 의혹으로 끝날 뿐이다. 이를테면 "사건의 중심"이나 "수레바퀴의 중심" 같은 것은 도무지 찾아낼 수 없다. 본질적인 것은 "무명의 존재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봉사의 법칙"만이 정당하다. 그것은 곧 믿음과 봉사심을 가지고 동맹에 참여함을 뜻한다. 동맹의 비유 속에서 말하자면 독특한 질서 관념이 펴현되고 있다. 그 질서를 인식할 수 없지만 따를 수는 있는 것이다.

 

 『유리알 유희』가 '동방 순례자들'에게 헌증된 것이고 또 이 작품이 종종 '마술 극장'이라는 표현으로 일컬어진다면, 여기서 우리는 1943년에 씌어진 이 작품에서 헤세가 이미 오래 전부터 친숙하던 표상들을 재거모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삶의 유희 사상과 동맹 사상이 다음과 같은 식으로 통합되어 있다. 즉 유리알 유희라는 이름 하에 정신적 삶의 부활 및 보존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하나의 종단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여기서 유리알 유희란 곧 삶의 무궁무진한 유희를 음악적으로 재현하고, 또 명상과 사색에 몰두함을 뜻한다. 그리고 종단의 의미가 요제프 크네히트의 교육 과정을 통해 서술되는 한, 교양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때 교양의 과제는 정신의 구속력이 인간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교양생활을 위협하는 이기적이고 방종한 정신에 맞서, 봉사하는 정신 태도를 함양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때의 정신은 이미 미심쩍은 기로 접어든 전문과학의 영역에 얽매이지 않는 정신이다.

  정신 생활이 진정한 질서를 획득할 때, 교양과 성숙의 과정에서 이 질서를 깨닫게 될 때, 또한 단계적 전진을 거쳐 인간의 고유한 삶이 실현될 때에만 이러한 봉사는 가능해진다. 요제프 크네히트는 성장하면서 종단의 위계 질서 속에 점점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마침내는 카스탈리엔 주의 최고 지위인 '유희 명인'이 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종단 세계가 교육하는 것은 특정 학설이 아니라 명상의 태고, 유희의 수련, 그리고 삶의 핍박에 대한 유리알 유희자의 책임 등이라는 점이다. 청년 크네히트의 소명은 가장 단순한 소리 기호의 음악화를 통해 완성되며, 그런 단계들을 거쳐서 마침내는 그의 상상력이 하나하나의 형상을 통해 전체의 연관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기에 이른다. 그는 "각각의 상징, 그리고 그 상징들의 조합(組合)이 이러저러한 개별 사례나 실험 혹은 증거들에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가장 내밀한 중심으로, 근원지(根源知) 속으로 인도된다." 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일상의 세계말고도 또 다른 사계가 있다. 즉 "보다 질서잡히고 보다 아전한, 그러면서도 부단한 감독 및 수련을 필요로 하는 인위적 세계, 위계 질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정신 기능 및 도덕의 순화"를 도모하며 "자신의 삶을 정신과 진리에 바치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 그리고 크네히트가 마침내 직위를 버리고 아무런 주저 없이 다른 한 인간을 위해 죽어 갈 때, 이로써 봉사는 가장 심오한 의미를 보여준 셈이다. 언제나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체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은 헤세에게는 그 어떤 제도보다 고귀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모순의 통합에 성공한 듯이 보이는 교양 생활의 한 단계가 제시된 거이다. 상상력의 가장 추상적인 연구와도 양립도리 수 있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개별자는 정신의 질서에 편입되고, 그리하여 개인적 체험 및 회상들은 삶의 문맥 속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개별자의 교양 경로는 본래의 위협성을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뮤즈에겐 정신적 태도가 활짝 열리고, 인간은 삶의 유희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며, 그럼으로써 파국을 몰고 올 듯한 정치 및 사회 생활의 위협들에 역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이고 활기 찬 태도의 형성은 모든 창작 활동이 마땅히 봉사해야 할 본래의 목표임이 드러나며, 그처럼 인격으로 충만되고 의식화된 정신 태도만이 인간상의 쇄신과 점증하는 삶의 궁핍에 대한 대응책을 약속해 준다.

 

  모든 유토피아가 그렇듯이 헤세의 유토피아 역시 그런 생활 형식이 과연 그리 쉽사리 얻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그외 유토피아가 우리의 교양 생활의 위기를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한, 그의 유토피아는 우리 시대의 특수한 궁핍을 의식시켜 줄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창작 정신의 역할에 대한 깊은 숙고를 가능케 해주기도 한다.

 

  헤세는 문학이 사회적 신념 및 정치 신조에 봉사하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현대인의 모순된 상황을 드러낼 줄 알았고, 인격의 자존성과 정신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들은 충고와 위안의 힘을 갖게 된다. 그의 내면에는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살아 있고, 또한 모든 위협은 자기 내면의 주체적 활동을 소생시킴으로써만 극복돌 수 있다는 확신이 살아 있다. 그것은 정시에의 믿음이 삶의 유희 속에서 늘 새로운 형태로 자각될 수 있다는 확실이기도 하다. 각 개인의 기질에 따라 그리고 이러한 길에 대한 개방적 태도 여하에 따라 우리는 과연 헤세가 우리 자신의 숙제들과 핍박을 헤쳐 가는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에 결정적 기준이 되는 것은 객관적 합목적성이나 기계적 가능성이 아니라, 그러한 일들이 인간 및 그의 내적 상황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헤세가 인간에게 주체적 상황을 상기시켜 주고 명확한 자기 인식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한 한, 그는 일체의 정신 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내적 자기 경험을 강조한 셈이다. 그럼으로써 그의 작품은 비유적 특성을 얻게 되다.

 

- 어느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든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문학 작품이란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와 작품이 완전히 하나로 묶여져 있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자신의 체험이나 관찰을 주제로 삼고 있다. 그가 관심을 둔 대상은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개인적인 삶의 측면을 캐어 냄으로써 자서전적 내면 세계라는 영역을 벗어나고, 개개인의 지적이고 정신적인 상황을 해명함으로써 시대의 일대의 일반적 상황을 규명하려 하였다. 따라서. 소년기의 우울한 몽상, 스쳐 지나가는 단편적인 영상, 눈앞에 전개되는 한 폭의 풍경 등, 이런 것이 모두 그에게는 소중한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출처 : http://www.penart.co.kr/literature-library/2_world-literature/dautch/027.htm

 헤세 소설의 자아 묘사

 헤세는 자아와 세계, 감각과 지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사회적이고 지적인 시각만큼이나 다양하게 많은 심리적인 표현들로 다루고 있다. 개인을 초월해 존재하는 세계와 개인 사이의 끊임없는 분열은 극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라 상징적이거나 알레고리적인 자아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자기 자신 안에 용납할 수 없는 존재들을 용해시키는 최고의 모방으로서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노발리스의 견해를 흉내내어, 헤세는 상징적인 자아 묘사로써 갈등을 표현한다. 그의 소설에서 대표적인 인물들을 그림이나 동상 그리고 허구적인 전기들에다 그들의 분열된 자아를 반영시킨다. 이러한 심리적인 자아 묘사는 특별하게도 시인이나 주인공의 '나'를 규정하는 '영원한 자아'라는 헤세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출처 : 프리드만, '서정소설론')

 성장 소설

 '수레바퀴 밑에는' 는 '데미안'과 같은 성장 소설이다. 이 작품은 한스라는 소년이 고통과 갈등을 겪으면서 '내면에 이르는 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이처럼 젊은 시절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성숙의 과정을 그리는 소설을 성장 소설 혹은 교육 소설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소설은 성숙 이전과 성숙 이후라는 2항 대립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성숙의 문턱에서 직면하는 시련과 그 시련의 극복을 돕는 조력자 등의 문학적 장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곤충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 번데기를 만들어 그 안에 갇히듯이, 주인공이 한 단계 성숙해지기 위해 시련에 직면하고 그를 극복하는 과정은 종교 의식에서 유래된 입문 과정(통과 의례)으로 볼 수 있다. 한스의 경우 헤르만 하일러라는 친구의 도움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인식하게 된다. '데미안'에서는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도움으로 입문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치는 반면, 이 작품 속의 한스는 확실한 조력자가 없는 가운데 성숙의 단계에 성공적으로 다다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출처 : 한샘문학 )

 성장 소설(Inititation novel)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대하여 미성숙하고 아직 어린 주인공이 일련의 경험과 시련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을 의미한다. 형성 소설, 혹은 입사식 소설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입사식이란 유년이나 사춘기에서 성인 사회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식으로 통과제의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주인공에게는 시련과 신체적인 고통, 집단적인 신념에 대한 가르침이 따른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자신의 성장 체험을 소재로 삼아 육체적 정신적 시련과 성숙 과정을 한편의 자전적 성장 소설로 남기고 있다. 황순원의 '별', 이청준의'침몰선', '하근찬의 '흰종이 수염' 등이 이러한 성장 소설의 범주에 속한다.

 

 '수레 바퀴 밑에서'와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한 단상

 

  '수레 바퀴 밑에서'와 '죽은 시인의 사회'의 작품을 비교한다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본다. 영화로 더 유명한 톰 슐만이 쓴 '죽은 시인의 사회'의 전체적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859년에 창립된 명문 웰튼 고등학교의 새 학기 개강식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날, 이 학교 출신인 '키팅 (로빈 위리엄스)' 선생이 영어 교사로 부임해 온다.  그는 첫 시간부터 책을 찢게 하고, 그리고 한 학생에게(마지막 장면에서도 역시 그 학생이 책상으로 올라 가지만) 책상에 올라가서 바라보는 느낌을 통해서 새로운 인식의 깨달음을 갖게 한다. 파격적인 수업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오늘을 살라(Seize the day boys)'고 역설하며 참다운 인생의 눈을 뜨게 한다.

 ……

If you listen real close, you can hear them whisper their legacy to you, Go on, lean in. Listen.

You hear it? Carpe, Carpe. 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가까이 다가와보렴, 그들의 속삭임이 들릴 것이다. 들리니?

카르페, 카르페,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인생을 독특하게 살아라.

 extraordinary. : Highly exceptional; remarkable: an extraordinary achievement.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학교라는 틀에 갇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이 최고라고 알고 살아가는 소년들에게 키팅 선생은 이런 제안을 한다. 그리고 학생들과 옛 선배들 사진들 자세히 들여다보고, 말한다. 그들의 속삭임에 귀를 한번 기울여보라고. 그리고 나서 키팅 선생은 '오늘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의 라틴어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을 그들의 귀에 나지막이 읊조린다. 당신은 혹 '오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보다 나은 내일이 오리란 것만을 무작정 기대하는 건 아닌가. 잊지 말자. 결국 내가 바라는 미 래의 모습도 오늘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은 내 일생에 단 한번뿐이라는 것을

……

키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너스레 떨었다. 그리고 이어 소리 높여 답을 말했다.

 

'그건 바로 우리들이 구더기의 먹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게 될 봄, 여름, 가을은 앞으로 불과 몇 번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지. 믿고 싶지 않겠지만, 언젠가 우리는 모두 숨이 끊어지면서 몸이 차갑게 변할 것이다. 흔히 그걸 죽음이라 부르지. 아무도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춰 극적 효과를 놓였다. 키팅의 말은 학생들을 새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닐, 녹스, 토드 등 7명의 학생들은, 키팅으로부터 '죽은 시인의 사회' 라는 서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이 그 서클을 이어가기로 한다. 그리고 학교 뒷산 동굴에서 모임을 갖는 등, 그간의 권위적인 학교의 분위기에서 표출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내재된 끼를 마음껏 발산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도적 회원이었던 닐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연극 배우를 실행했고, 또한 같은 회원인 녹스는 크리스라는 소녀와의 사랑을 이루어간다. 그러나 닐의 아버지는 의사의 꿈을 이루어 주리라 믿었던 닐의 연극을 보자 군사학교로의 전학을 선언한다. 꿈이 꺾인 닐은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려는 노력도 보이 지 않고 그날 밤 권총 자살을 하고 만다. 그래서 이 사건의 원인 규명에 나선 학교측은 '죽은 시인의 사회' 라는 서클을 알려준 키팅 선생에게 책임을 돌리고 웰튼에서 그를 추방한다. 그가 떠나가는 날, 교장선생의 강압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장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토드를 시작으로 권위와 압박의 상징인 책상 위에 올라가 학생들은 "캡틴, 마이 캡틴" 을 외치며 눈물의 작별을 고한다. '오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그들이 책상 위로 오를 때마다 키팅을 향해 소리친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부름이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의 대화였고, 끊어진 세대와 세대의 연결이었고, 순수와 순수의 연결이었다. 그들은 교장의 무서운 고함에도 책상위에서 한결같이 버티고 선 채 키팅 선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키팅에게 외친 '오오 나의 선장님'은 단순한 부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양적인 무언의 교감이었고, 새로운 이상과 삶의 존재를 확인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었다. 키팅과 이제는 이별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별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 어느곳에서 존재하던지 그들은 이제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들의 이별은 단지 물리적 이별일 뿐이다. 그들을 이어주는 '죽은 시인의 사회'가 마음 속에 살아 있는 한 말이다.

 

 키팅은 학생들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학생들은 그에게 희망의 싹을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지긋이 바라보던 키팅은 마지막 말을 던진다.

 

"Thank You Boys, Thank You."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실천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문제는 그러한 삶을 실천을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또한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라는 작품이 주는 메시지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한스 기벤트도 역시 그를 병들게 했던 제도와 사회에 대한 그 어떤 노력이 없이 개인화되어 생을 마감하고 만다는 점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닐'이 자살한 것과 별다른 의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키팅'과 '죽은 시인의 사회'의 서클 학생들은 비록 그들의 문제가 개인화되어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헤세의 '한스'는 문제 자체를 안고 세상과 이별을 했다.

 

 이런 저런 점들을 비교하면서 글읽기를 시도하면 색다른 맛을 느끼리라고 본다. 이때 고려되어야 할 것들은 주인공들의 사회적, 역사적 환경과 배경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어떻게 작품 속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눈여겨 보면서 글을 읽어 내려간다면 배우는 바가 많으리라고 생각을 한다. - 청파의 글

 주인공 하이라이트

 이 소설은 주인공의 익사(溺死)로 끝난다. 헤세가 익사의 장면을 즐겨 쓴 것은 『수레 바퀴 밑』에서 헤라스의 동창생 힌데인거가 마우르브론의 연못에 빠져 죽은  것 외에, 『그린그조올의 마지막 여름』의 주인공이 「이태백(李太白)」(리다이페)으로 자처하는 것도, 강물에 비친 달 그림자를 잡을려고 물에 뛰어들어 익사한 이 주선 시인(酒仙詩人)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크라인과 바그너』의 주인공 익사 장면, 또는『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크네히트의 자살로 여겨지는 익사 등, 예를 들어 거론하면 무척 많다. 어쩌면, 작가는 「물에 몸을 던져, 거역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숨을 거두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는지 모른다. 사실은『수레 바퀴 밑』의 주인공은 목을 매어 죽는 자살도 꾀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있다. 한스가 신학교의 교사들한테서도 버림을 받는 제5장 1절에서는, 익사를 비유적 의미로 써서,「홀쭉한 소년의 얼굴에 비치는 어쩌야 좋을지 모르는 미소의 그늘에, 하나의 멸망해 가는 영혼이 번민하고, 물에빠진 듯이 겁을 먹고 절망적으로 주위를 둘러 보고 있는 것」을 누구하나 눈치 채지 못하몄다고, 작자는 비장하게 서술하고 있다.

 명문구 낙수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새끼 양처럼 온순하고, 비누 방울처럼, 터지기 쉬운 성품이었으나, 규칙을 대하게 되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특히 소년 시절에는 가장 완강하게 대들었다.」


「너는……하여야 한다」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나의 마음은 메시꺼워지고 굳어졌다. 이러한 특성이 나의 학교 시절에 크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은, 쉬이 납득이 갈 것이다.」(『약전(略傳)』에서)


「사실, 내가 살려고 시도한 것은, 나 스스로 내 속으로부터 빠져 나가려고 한 것 뿐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그처럼 힘든 일이었을까?」(소설『데미안』에서) - 나의 길을 가는 헤세에게 여러 가지 고난이 따랐으나, 그것을 파헤쳐 간 작자의 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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