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수레바퀴 밑에서 2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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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밑에서 2

 

 

<중략>

 


   제4장

   4년에 걸친 수도원 생활에서 각 학년에 걸쳐 한두 명쯤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마련이다. 누군가가 죽게 되면, 장송곡과 더불어 땅에 묻히거나 친구들에 의해 고향으로 호송되기도 한다. 때로는 제멋대로 수도원에서 도망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학칙에 어긋나는 엄청난 죄를 지어 퇴학 처분을 받는 학생도 있다. 매우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상급 학년에서는 청춘의 고뇌에 빠진 젊은이가 헤어날 수 없는 방황 끝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거나 물에 뛰어들어 자살함으로써 짧고 어두운 출구를 찾기도 하는 것이다.

   한스 기벤라트의 학년에서도 여러 동료 학우들이 사라져 갔다. 더구나 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하리만치 모두가 헬라스 방의 학우들이었다.

   이 방에 거처하는 학생들 가운데 키가 작고 소심한 금발의 소년이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힌딩어였다. 그리고 힌드라는 애명으로 불렸다. 그는 알고이 지방의 어느 마을에서 온 양복점 주인의 아들이었다. 워낙 얌전한 성격인지라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얼마간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구두쇠로 소문이 난 실내악의 대가 루치우스와 책상을 나란히 썼었다. 그래서 다른 학우들보다는 루치우스와 어느 정도 더 가깝게 지냈다. 그 외에는 달리 친한 친구가 없었다. 힌딩어가 곁에서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헬라스 방의 학우들은 자기들이 그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한 마디의 불평도 없는 선량한 이웃으로서, 그리고 간혹 격양되기 쉬운 공동 생활에서의 쉼터로서.

   1월의 어느 날, 힌딩어는 연못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친구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스케이트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구경만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견디기 힘든 추위를 느낀 나머지 몸을 녹이기 위하여 발을 동동 구르며 연못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내닫기 시작했는데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들판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자그마한 호수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따스한 물이 제법 세차게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물 위에만 살짝 얼음이 얼어 있었다.

   그는 갈대를 헤치고 그리로 들어갔다. 그는 몸집이 작고 가벼웠지만, 기슭 가까이에서 그만 얼음이 깨지고 말았다.

   그는 발버둥을 치며 잠시 소리를 질러보았다. 하지만 남의 눈에 띄지도 않은 채 어둡고 차가운 물 속에 빠지고 말았다.

   2시에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가 없어진 사실을 알아차렸다.

   힌딩어는 어디 있지?

   복습을 담당하는 교사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헬라스 방을 뒤져보도록 해라!

   하지만 거기서도 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지각인 것이로군. 뭐, 그럼 그냥 시작하지, 74쪽 7구절을 배울 차례야. 아무튼 다신 이런 일이 없길 바란다. 시간은 꼭 지키도록 해!

   3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도 여전히 힌딩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해진 선생은 학생을 보내어 교장 선생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교장 선생은 즉시 교실로 달려왔다. 그리고 짐짓 위엄있는 질문을 던지고는 상임 조교와 복습 교사의 인솔 아래 학생 열 명을 실종자의 수색에 나서게 했다. 교실에 남아 있는 학생들은 받아쓰기 연습을 했다.

   4시에 복습 교사가 노크도 없이 교실로 들어와 교장 선생에게 귓속말로 보고를 했다.

   조용!

   교장 선생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학생들은 숨을 죽인 채 꼼짝도 않고 의자에 앉아 교장 선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러분의 동료 힌딩어는

   그는 목소리를 약간 낮추어 말을 이어갔다.

   연못에 빠진 것 같다. 이제 여러분은 그를 함께 찾아야 한다. 마이어 교수님께서 여러분을 인솔 할테니 한 마디도 어김없이 그 분 말씀을 따르도록 해라. 제멋대로 행동해선 안 된다!

   겁에 질린 학생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교수 뒤를 따라나섰다. 마을에서는 몇몇 어른들이 밧줄과 널빤지, 막대기 등을 가지고 나와 서둘러 학생들과 합류했다. 매우 추운 날씨였다. 태양은 숲의 가장자리에 기울어 있었다.

   마침내 뻣뻣하게 굳어버린 소년의 자그마한 시체가 발견되어 눈 덮인 갈대 숲에서 들것에 실렸을 때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 신학교 학생들은 놀란 새처럼 불안에 떨며 시체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시체를 쳐다보며 파랗게 곱은 손가락을 문지르고 있었다.

   물에 빠져 죽은 친구의 주검이 앞서 실려가고, 학생들은 그 뒤를 따라 눈 덮인 들판을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답답한 가슴은 갑자기 전율에 휩싸였다. 마치 노루가 자신의 적을 냄새맡듯이 이 소년들도 무서운 죽음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느끼게 되었다.

   슬픔과 추위에 떠는 일행 가운데 한스 기벤라트는 우연하게도 친구 하일너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두 소년은 울퉁불퉁한 들판길을 걷다가 그만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제서야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죽음의 광경에 소스라친 한스는 잠시만이라도 부질없는 이기심을 떨쳐 버리려고 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뜻하지 않게 친구의 창백한 얼굴을 가까이서 대하고 보니 말할 수 없이 처절한 마음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서 일시에 치솟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자기도 모르게 친구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하일너는 화를 내며 한스의 손을 뿌리치고는 기분이 상한 듯이 시선을 다른 2데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 몸을 돌리더니 대열의 맨 뒤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모범 소년 한스는 가슴이 저리는 듯한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얼어붙은 들판길을 걸어 비틀거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추위에 새파래진 뺨을 타고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잊을 수도 없고, 또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죄악과 태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단사의 아들이 아닌, 바로 자신의 친구 하일너가 맨 앞에서 높이 들린 들것 위에 실려 가는 것처럼 여겨졌다. 마치 한스의 배신에 대한 고통과 분노를 한 몸에 지고 또 다른 세계로 떠나가듯이. 성적이나 시험이나 성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심의 순결이나 오욕에 의하여 인간이 평가되는 그러한 세계로.

   마침내 일행은 국도에 다다랐다. 그리고 황급히 수도원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서 교장 선생을 앞세우고 모든 교사들이 죽은 힌딩어를 맞이했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러한 명예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선생들은 언제나 죽은 학생을 살아 있는 학생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잠시나마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삶과 젊음에 내재하는 소중한 가치를 가슴 깊이 되새겨보는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년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면서도.

   그날 저녁, 그리고 그 다음날도 하루 온종일 눈에 보이지 않는 시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마술과 같은 효력을 나타내었다. 학생들의 모든 행위와 언어를 부드럽게 하기도 하고, 어루만져주기도 하고, 또 살며시 에워싸기도 했다. 이 짧은 기간에는 싸움이나 노여움, 야단법석이나 웃음도 모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마치 잠시 수면 위로 사라진 물의 요정처럼, 생명체도 숨을 죽이고 있는 듯한 잔잔한 물 속으로.

   죽은 학우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 학생들은 언제나 그의 본명을 불렀다. 왜냐하면 힌두라는 별명이 아무래도 죽은 사람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에는 무리에 끼여 눈에 띄지도 않고, 아무도 반기지 않던 힌두가 이제는 자신의 이름과 죽음으로 커다란 수도원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튿날, 힌딩어의 아버지가 도착했다. 그는 자기 아들이 누워 있는 방에서 혼자 두세 시간을 보내고 난 뒤, 교장 선생으로부터 차를 대접받고는 별장 <사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날이 되었다. 관은 침실에 안치되어 있었고, 알고이에서 온 힌딩어의 아버지는 그 옆에 서서 모든 진행 과정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몸집으로 보아 그는 정말이지 영락없는 재단사였다. 몹시 마르고, 날카로워 보이는 힌딩어의 아버지는 초록빛이 도는 검은 프록코트를 걸치고, 통이 좁은 남루한 바지를 입고, 손에는 다 낡아빠진 예식용 모자를 들고 있었다. 우수에 젖은 그의 작고 수척한 얼굴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1크로이처 짜리 촛불처럼 초라하고 나약해 보였다. 그는 내내 교장 선생과 다른 교사들에 대한 당혹감과 존경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관이 들어올려지기 바로 전, 슬픔에 잠긴 자그마한 덩치의 재단사는 다시 한 번 앞으로 걸어나와 머뭇거리며 애정 어린 몸짓으로 관의 뚜껑을 어루만졌다. 그러고 나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제자리에 선 채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었다. 적막이 감도는 커다란 공간의 한가운데 겨울날의 고목처럼 서 있었다. 그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아무 희망도 없는 듯한, 그리고 체념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했다. 목사는 그의 손을 잡고 곁에 서 있었다. 잠시 뒤에 재단사는 괴상망측하게 휘어진 모자를 머리에 쓰고, 맨 앞에 서서 관을 따라나섰다. 계단을 내려와 수도원 뜰과 낡은 문을 지나 눈 덮인 하이얀 들판 너머로 묘지의 낮은 담을 향하여 걸어갔다.

   무덤가에 모인 대다수의 학생들은 음악 선생의 지휘에 맞추어 합창곡을 부르면서도 지휘자의 손을 주시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양복점 주인의 외롭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음악 선생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슬픔에 잠긴 재단사는 추위에 떨며 눈 속에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목사와 교장 선생, 최우등생의 조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합창하는 학생들을 향하여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따금 왼손으로 저고리 자락에 숨겨놓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기는 했지만, 정작 그것을 끄집어내지는 않았다.

   나중에 오토 하르트너가 말을 꺼내었다.

   <저 분 대신에 우리 아빠가 그 자리에 서 계셨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더라고.

   그러자 모두들 입을 모아 동감을 나타내었다.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어.

   장례식을 치른 뒤, 교장 선생은 힌딩어의 아버지와 함께 헬라스 방으로 들어왔다.

   너희들 가운데 죽은 힌딩어와 특히 친했던 사람이 누구지?

   교장 선생은 방에 있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힌두의 아버지는 처량한 얼굴로 불안한 듯이 어린 학생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이때, 루치우스가 앞으로 나섰다. 힌딩어의 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더니 잠시 꼭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계면쩍게 고개만 끄덕이더니 이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고 나서 기차에 몸을 싣고 먼길을 떠났다. 눈으로 뒤덮인 겨울 산천을 하루종일 달려 고향에 이르게 되면, 지금 카를 힌딩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부인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수도원에는 마법의 주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선생들의 야단치는 소리가 들리고, 학생들이 꽝 하고 문을 닫는 소리도 커져 갔다. 이미 사라진 헬라스 방의 옛 친구 힌두도 차츰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몇몇 아이들은 슬픔에 젖은 그 연못가에서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그 가운데 더러는 가만히 병실에 누워 있거나, 아니면 털로 짠 슬리퍼를 신고 목에는 붕대를 감은 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한스 기벤라트는 목이나 발에 아픈 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불행한 그날 이후로 더욱 진지하고 성숙해 보였다. 아마도 그의 내면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이제 그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이렇게 다른 세계로 옮겨진 그의 영혼은 낯선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에 휩싸인 채 이리저리 방황하며 아직 편히 쉴 곳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선량한 힌두를 잃은 슬픔이 아니었다. 단지 갑작스럽게 되살아난 하일너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일너는 다른 두 명의 학우들과 함께 병실에 누워 뜨거운 차를 마셨다. 거기서 그는 힌딩어의 죽음으로 인하여 얻은 인상을 차근히 적고, 뒷날의 시작을 위하여 인상을 가다듬을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이것도 그에게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처량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함께 병실에 있는 학우들과는 거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금고형에 처해진 뒤로 그에게 강요된 고독은 늘상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배겨나지 못하던 그의 예민한 감수성에 쓰라린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선생들은 하일너를 불만에 가득 찬 혁명적인 인물로 낙인찍었다. 그리고 엄중한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학우들은 슬그머니 그를 피했고, 상임 조교는 그에게 조롱섞인 알량한 친절을 베풀었다. 하일너의 정신적인 친구인 셰익스피어와 실러, 레나우는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굴욕적인 세계와는 또 다른 보다 강력하고 위대한 세계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처음에 하일너의 시 「수도사의 노래」는 그저 은둔자 같은 우울한 음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차츰 수도원과 교사들, 그리고 동료 학우들에 대한 증오심에 가득한 쓰디쓴 시구로 변해 버렸다. 그는 고독 속에서 쓰디쓴 순교자의 향락을 마음껏 누렸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오히려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 가혹하리만치 모멸적인 수도사의 시를 쓰며 그는 마치 자신이 어린 유베날리스가 되기라도 한 듯이 여기고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 일 주일이 지났다. 두 명의 동료 학우들은 완쾌되어 나가고, 하일너 혼자 병실에 누워 있었다. 이때, 한스가 그에게 병문안을 왔다. 한스는 멋쩍게 인사를 하고는 의자를 침대 가까이로 가져갔다. 그리고 거기에 앉은 뒤, 환자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일너가 불쾌한 나머지 등을 돌려 벽 쪽으로 누워버렸기 때문에, 그에게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스는 이에 물러서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옛 친구가 자기를 보게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힘을 주어 손을 꽉 쥐었다. 친구는 화를 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한스는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내 말 좀 들어봐

   한스가 말했다.

   그때 난 겁쟁이였 어. 널 그냥 모르는 척했지.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란 걸 넌 잘 알고 있잖니. 난 여기 신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가능하다면 최우등생이 되려고 다짐해 왔어. 넌 그걸 공부벌레나 하는 짓이라고 비웃었지. 그래, 나도 네 말이 옳다고 생각해. 하지만 어차피 그건 내가 품고 있던 이상이었어. 난 이것보다 더 나은 게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단 말이야

   하일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스는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여길 좀봐. 정말 미안해. 네가 다시 내 친구가 되어줄지 모르지만, 어쨌든 제발 날 용서해 줘!

   하일너는 그냥 눈을 감은 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과 정직한 미소가 친구를 향하여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하일너는 외롭고 무뚝뚝해 보이는 자신의 역할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한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일너, 제발 네 주위를 이렇게 계속 맴도느니 차라리 꼴찌를 하는 편이 나을 거야. 너만 좋다면 우린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어. 다른 아이들 따위는 우리 안중에는 없다는 걸 보여주자고.

   그때서야 하일너는 한스의 손을 꼭 쥐며 눈을 떴다.

   며칠 뒤에 하일너도 병실을 나섰다. 수도원에서는 새로이 맺어진 우정에 대하여 적지 않은 흥분이 일어났다. 이제 두 소년에게는 놀라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물론 전혀 색다른 경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의 존재에 대한 야릇한 행복감과 은밀한 무언의 일체감이 넘치는 그런 나날들이었다. 아무튼 예전과는 달라졌다.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있는 사이에 두 소년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한스는 한층 부드럽고, 온화하고, 열정적으로 바뀌었다. 하일너는 더욱 강인하고, 남성다운 기질을 띠게 되었다. 그 동안 두 소년 모두 서로를 무척 그리워해 왔다. 그래서 이들의 재결합은 하나의 커다란 체험이며 값진 선물과 같았다.

   조숙한 두 소년은 그들의 우정 속에서 가슴 벅찬 수줍음을 지닌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첫사랑의 달콤한 비밀을 다른 학우들에 앞서 맛본 것이다. 더욱이 이들의 동맹은 성숙해 가는 남성다움의 거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다른 학우들에 대한 반항심을 양념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일너를 꺼리고, 한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의 숱한 우정은 아직도 순박한 소년의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하일너와의 우정이 깊어지고, 즐거워져 갈수록 학교는 한스에게 점점 더 낯설게만 여겨졌다. 새로운 행복감이 싱싱한 포도주처럼 용솟음치며 한스의 피와 사상을 꿰뚫고 퍼져나갔다. 이에 비하면, 리비우스나 호머는 빛 바랜 하찮은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무랄 데 없던 모범 학생 기벤라트가 수상쩍은 하일너의 몹쓸 영향 때문에 문제 학생으로 전락해 버린 사실에 대하여 선생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선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청년의 발효가 시작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시기에 조숙한 소년의 기질에서 나타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다. 애당초 선생들에게는 하일너의 남다른 천재적 기질이 어쩐지 섬뜩하기만 했다. 예로부터 천재와 선생들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게 마련이다. 학교에서 보여지는 그런 학생들의 몸가짐은 처음부터 선생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다. 천재들은 선생들에게 전혀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 불량한 학생들에 다름아니다. 14살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고, 15살에 사랑에 빠지고, 16살에는 술집을 드나들게 된다. 그리고 금지된 책을 읽으며, 몰염치한 작문을 쓰고, 이따금 선생들을 조롱어린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한다. 그래서 선생들의 수첩에 금고형을 받게 될 후보자나 선동가로 기록되는 것이다.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선생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절제한 인간이 아닌, 라틴어나 산수에 뛰어나고, 성실하며 정직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 이러한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마다 누구나 분노와 수치를 느끼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기서 우리가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

   진정한 천재들의 상처가 아물고, 학교 선생들에게 보란 듯이 오히려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모습에서 우리는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또한 훗날 이들은 죽은 뒤에 저 멀리서 비쳐오는 유쾌한 후광에 둘러싸인다. 그래서 마침내 학교에서 다른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걸작품 내지 고귀한 모범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학교마다 법규와 정신의 싸움판이 자꾸 되풀이되고 있다. 국가나 학교가 해마다 새롭게 자라나는 보다 귀중하고 심오한 젊은이들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더욱이 선생들에게 미움이나 벌을 받은 학생들, 학교에서 도망치거나 내쫓긴 학생들, 바로 이들이 후세에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재산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러는 무언의 반항심과 더불어 자신을 소모하고, 마침내 파멸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과연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누가 알겠는가!

   남과는 다른 두 젊은 소년들의 행위를 위험하다고 여긴 학교 선생들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대신에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학교 규칙에 따라 곱절이나 엄하게 다스렸다. 히브리어에 가장 열심히었던 한스를 자랑거리로 여겨온 교장 선생만이 그를 구제하기 위하여 허튼 시도를 해보았다. 그는 한스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 방은 예전에는 수도원장이 기거하던 저택의 어느 구석방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가까운 이웃 마을 크니틀링엔 태생의 파우스트 박사가 여기 와서 가끔 엘핑어 포도주를 마셨다고 한다.

   교장 선생은 비범한 인물이었다. 식견이나 실무 능력에 있어서도 어느 누구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자기 학생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인간적인 호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즐겨 반말을 쓰기도 했다. 그의 치명적인 결점은 지나친 허영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단에서 종종 허풍투성이의 곡예에 빠져들기도 하고, 자신의 권력과 권위가 조금이라도 의심받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이의를 받아들이거나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없고, 성실하지도 못한 학생들은 교장 선생과 더할 나위 없는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반면에 기백이 넘치고, 정직한 학생들에게는 적잖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려고만 하면, 교장 선생은 즉시 펄쩍 뛰며 흥분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눈빛과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아버지와도 같이 자상한 친구의 역할만큼은 노련하게 감당해 왔다. 지금도 교장 선생은 자신의 역할을 잘 엮어내고 있다.

   자리에 앉게.

   기벤라트 그는 수줍은 듯이 주춤거리며 들어서는 소년의 손을 힘주어 쥐고는 친근하게 말했다.

   자네와 잠깐 얘기 좀 하고 싶은데, 반말해도 괜찮겠지?

   그럼요, 교장 선생님.

   기벤라트! 자네 스스로도 느끼고 있겠지만, 요즘 들어 자네 성적이 조금 떨어졌다네. 적어도 히브리어에선 말이야. 아마 지금까진 자네가 우리 학교에서 히브리어에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을 거야. 그래서 자네 성적이 갑자기 떨어지는 게 나로선 무척이나 유감이라네. 자네 혹시 히브리어에 아예 흥미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그럴 리가 있나요, 교장 선생님.

   잘 생각해 보게! 그럴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혹시 다른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나?

   아녜요, 교장 선생님.

   정말인가? 그래, 그렇다면 다른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하겠지. 그걸 찾게끔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모르겠어요. 전 항상 숙제를 꼬박꼬박 해왔건든요.

   물론이지, 물론 그래.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같아도 차이는 있게 마련이댜. 지금까지 자넨 숙제를 잘해 왔어. 그게 또한 자네 의무이기도 하나까. 하지만 이전엔 성적이 더 좋았고, 노력도 더 많이 했잖아. 어쨌든 지금보단 더 많은 관심을 보여왔지. 왜 갑자기 자네 학구열이 식어버렸는지 궁금하기만 하네. 자네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냐?

   아니오.

   그럼 두통이 있나? 썩 건강해 보이질 않아.

   예, 가끔 머리가 아프긴 해요.

   하루 일과가 좀 벅찬가?

   아니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자네 혹시 개인적으로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닌가? 솔직히 말해 보게나!

   아녜요. 책은 거의 읽질 않아요, 교장 선생님.

   그렇다면 난 정말이지 짐작할 수 없네. 어딘가에 문제가 있긴 있을 텐데 말야. 자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주겠나?

   한스는 권력자가 내민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얹어놓았다. 교장 선생은 그를 엄숙하면서도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는 힘주어 한스의 손을 잡았다.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교장 선생이 한스를 다시 불렀다.

   하나만 더 얘기하지, 기벤라트. 요즘 자네 하일너와 가깝게 지내지, 안 그래?

   예, 맞아요. 그 애는 제 친구거든요.

   어째서 그렇게 된 거지? 자네들은 원래 성격도 전혀 다르잖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애는 그냥 제 친구일 뿐이에요.

   내가 그 친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그 아이는 불만투성이에다 정서도 불안정해. 재능이 있기야 하지만, 전혀 노력하는 기미가 보이질 않아. 더군다나 자네한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뿐이라네. 난 자네가 그 아이를 좀더 멀리하길 바래.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럴 순 없습니다, 교장 선생님.

   그럴 수 없다구? 아니, 왜?

   그 아이는 제 친구인걸요. 전 제친구를 그냥 내벼려둘 수 없어요.

   음, 하지만 자넨 다른 친구들과 좀더 가깝게 지낼 수도 있잖아? 자네 혼자만 하일너의 나쁜 영향권에 빠져 있단 말이야. 우린 벌써 그 결과를 훤히 눈앞에 보고 있다네. 도대체 그 아이가 뭐길래 자네 마음을 끄는 거지?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린 서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를 저버리는 건 비겁한 일 같아요.

   그래, 그래. 자네에게 강요하진 않겠어. 하지만 차츰 그 아이를 멀리하길 바래. 그럼 좋겠어. 그럼 난 더 바랄게 없겠네.

   교장 선생의 마지막 이야기에는 앞서 보여주었던 부드러움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튼 한스는 교장 선생의 방을 나설 수가 있었다.

   이때부터 한스는 새로이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전처럼 그리 쉽게 진도가 나가지는 않았다. 그저 너무 뒤로 처지지 않으려고 힘겹게 따라갈 뿐이었다. 이 모두가 우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한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로 손해를 보았다거나 방해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소홀하게 대한 모든 것을 보상해 조는 값진 보물처럼 여겼다. 그것은 이전의 무미건조한 의무적인 삶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맡큼 깊은 온정이 깃들인 고귀한 삶이었다. 거기서 한스 자신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처럼 느끼고 있었다.

   위대한 영웅 행위가 아닌, 지겹고도 무의미한 공부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절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자꾸 자신을 속박하는 것이었다. 하일너에겐 대충 공부를 하고서도 필요한 부분을 재빨리 외워 자신의 지식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한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친구는 하루가 멀다하고 틈이 나느 대로 한스를 유혹했다. 한스는 아침에 한 시간씩 일찍 일어나 공부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마치 적과 싸움이라도 하듯이 히브리어 문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한스는 이제 호머와 역사에만 관심을 가졌다. 어둠을 헤쳐 나가는 듯한 기분으로 호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다가갔다. 역사 속에서 영웅들은 단순한 이름이나 숫자로 남기를 거부하며 타오르는 눈빛으로 바로 앞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살아 있는 붉은 입술과 얼굴, 그리고 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붉고 두툼하고 거친 송을, 또 어떤 이는 차분하고 차갑고 딱딱한 손을, 다른 이는 가늘고 뜨겁고 핏줄이 선명한 손을.

   그리스어로 씌어진 복음서를 읽을 때에도 한스는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모습이 너무나 가깝고 분명하게 느껴진 나머지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기까지 했다. 마가복음 6장에서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배에서 내리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그들은 예수를 곧 알아보고, 그리로 달려가니라.> 이 대목에서 한스도 배에서 내리는 인간의 아들 예수를 보았다. 몸이나 얼굴에서가 아니라, 빛이 충만한 크고 빛나는 사랑의 눈으로, 그리고 가볍고 흔드는 가냘프고 아름다운 갈색의 손에서 그를 알아보았다. 그의 손은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영혼에 의해 만들어진 손, 바로 그 영혼이 살아 숨쉬는 손이었다. 그쪽으로 오라고 부르는 듯하기도 하고, 반갑게 반기는 듯하기도 했다. 파도가 일렁이는 호수의 가장자리와 무거워진 어선의 뱃머리가 잠시 한스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는 겨울철에 연기처럼 내뿜어지는 입김과도 같이 모드 사라져버렸다.

   이따금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어 나타났다. 책 속에서 동경과 갈망에 사무친 인물이나 역사의 한 부분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살아나 자신의 시선이 생동하는 눈망울에 맺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한스는 놀라워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쏟았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현상들을 바라보며 한스는 자신이 심오한 변화를 겪은 듯한 이상야릇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마치 자신이 검은 대지를 투명한 유리처럼 꿰뚫어보거나, 혹은 신이 자기를 쳐다보기라도 하듯이. 이런 귀중한 순간들은 예기치 않게 다가왔다가 하소연할 틈도 없이 얼른 사라져버렸다. 낯설고 거룩한 그 무엇이 감도는 순례자나 친근한 스님처럼. 이들에게 말을 걸거나 억지로 머물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스는 이러한 체험들을 혼자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하일너에게조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일너는 예전에 앓던 우울증이 점점 더 심해져 불안한 심정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수도원이나 선생들, 그리고 동료 학우들뿐 아니라, 심지어 날씨나 인간적인 삶,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비판을 가했다. 때로는 싸움질을 하기도 하고, 느닷없이 어리석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아무튼 다른 학우들로부터 고립되고, 또한 이들과 대립하게 된 뒤로는 졸렬한 자부심을 내세우기에 급급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반항적이고 적대적인 대립 관계에 빠져버렸다. 기벤라트는 하일너의 행동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거기에 함께 말려들고 말았다. 그래서 이 두 소년은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는 학우들로부터 멀리 외딴 섬처럼 떨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스는 즐겁지 않은 주위의 변화에 대하여 점점 관심을 잃어갔다. 그리고 교장 선생이라도 없어졌으면 하고 은근히 바랄 뿐이었다. 한스는 그 앞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한때는 촉망받는 학생이었던 한스가 이제는 교장 선생의 냉대와 고의적인 경멸을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 교장 선생의 전공 과목인 히브리어에 대하여 차츰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났다.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4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의 몸과 마음이 모두 달라져 버렸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도 즐거운 일이었다. 학생들 대부분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키가 부쩍 자라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팔과 다리가 함께 자라지 못한 옷자락을 비집고 희망에 넘쳐 길게 뻗어나왔다. 사라져 가는 소년의 모습과 수줍게 가슴을 펴기 시작하는 남성의 모습 사이에서 온갖 명암이 이들의 얼굴 위에 교차되고 있었다. 매끄러운 이마에는 성장 시기에 나타나는 선이 굵은 골격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모세의 성서 연구를 통하여 얻어진 의젓한 어른다움이 일시적이나마 새겨져 있었다. 이제는 통통한 뺨을 가진 소년들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한스 또한 변해 있었다. 키나 덩치는 하일너와 비슷했지만, 나이는 오히려 더 들어 보였다. 예전에는 투명할 정도로 부드럽게 빛나던 이마의 가장자리가 지금은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이 움푹 들어가고,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그리고 손발과 어깨는 뼈만 앙상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한스는 학교 성적에 대한 불만이 쌓일수록 하일너의 영향을 받아 학우들로부터 차츰 더 멀어져 갔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모범 학생이나 장래의 최우등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학우들을 내려다볼 수도 없었다. 자만심이란 단어가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에게 그런 눈치를 주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이 마음속으로 그렇게 느낄 때면 한스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특히 흠잡을 데 없는 하르트너와 참견하기 좋아하는 오토 벵어와는 여러 차례 다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벵어가 또다시 비웃으며 약을 올려댔다. 한스는 이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주먹을 휘둘렸다. 그래서 서로 치고받는 지독한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원래 겁쟁이인 벵어라 하더라도 나약한 상대 하나쯤은 손쉽게 해치울 수가 있었기 때문에, 한스에게 가차없이 주먹질을 가한 것이다. 하일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한가로이 싸움판을 바라보며 한스가 <징계당하는>꼴을 고소하게 여기고 있었다. 한스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실컷 두들겨맞았다. 코에서는 피가 터져 흘렀고, 갈빗대는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 없었다. 밤새도록 수치와 고통과 분노에 쌓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친구 하일너에게는 이 사건을 비밀에 붙이기로 작정했다. 이때부터 한스는 독한 마음을 먹고 주위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 같은 방의 동료들과도 거의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자주 비가 내리고 저녁에는 황혼이 길어진 탓이었을까! 봄을 맞이하여 수도원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잘 치는 학생과 플루트를 잘 부는 학생 두 명이 거처하는 아크로폴리스 방에서는 정기적인 음악의 밤을 벌써 두 차례나 열었다. 게르마니아 방에서는 희곡 독서회가 열렸다. 그리고 몇몇의 젊은 경건주의자들은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 매일 밤마다 주석을 곁들인 칼브의 성서를 한 장씩 일어나갔다.

   하일너는 게르마니아 방의 독서회에 가입하려고 신청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앙갚음을 할 심산으로 성경반에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누구 하나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일너는 점잖은 기독 학생들 슈바르츠발트의 북동쪽에 위치한 바덴 뷔르템베르크의 도시로 헤세의 고향이기도 하다.

  의 소모임에 억지로 밀고 들어가 이들의 경건한 대화 속에 끼어 들었다. 그러고는 신성모독의 날카로운 독설로 불화와 논쟁을 야기시켰다. 오래지 않아 이러한 장난에도 싫증이 났다. 하지만 그의 언어 습관에는 진지하면서도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오래도록 배어 있었다.

   아무튼 그것은 거의 주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학생들은 모두 새로운 개척 정신에 흠뻑 빠져 있었다.

   스파르타 방에 기거하는 한 학생이 가장 많이 화제에 오르내렸다. 재능이 뛰어나고, 기지가 넘치는 소년이었다. 그의 주된 목적은 우선 개인적인 명성을 얻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활기를 불어넣고, 온갖 우스꽝스러운 장난으로 단조로운 학교 분위기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려고 했다. <둔스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 학생은 동료 학우들의 관심을 끌고, 자신의 이름을 날릴 만한 기발한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어느 날 아침, 침실에서 나온 학생들은 세면장 입구에 붙어 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스파르타에서 보낸 여섯 가지의 경구>라는 제목과 더불어 일부러 골라낸 유별난 학우들과 이들의 어리석은 행동과 장난, 우정 등이 이행시로 신랄하게 풍자되어 있었다. 기벤라트와 하일너도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이 자그마한 집단에 엄청난 흥분이 일어났다. 마치 세면장이 무슨 극장이라도 되기나 하듯 모두들 그리로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떠들썩하게 서로 뒤엉켜 밀쳐대고 야단이었다. 마치 한 떼의 꿀벌들처럼, 하지만 그들의 여왕벌은 지금 막 날아오르려고 하는 참이었다.

   다음날 아침, 방문마다 온통 경구와 풍자시가 나붙었다. 반박하거나 동조하는 식구들, 그리고 새로이 공격을 가하는 식구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소동의 장본인은 또다시 여기에 끼어들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곡물 창고에 부싯장작을 집어넣으려는 그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이제 그는 느긋하게 손을 비벼대며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며칠 내내 이 풍자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그들은 이행시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애쓰며 생각에 깊이 잠긴 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이전과 다름없이 공중에 매달린 학생은 아마 루치우스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어느 선생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수도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이 불순한 유희를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약삭빠른 둔스탄은 자신이 얻은 월계관 위에서 편히 쉬고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도 벌써 그는 또 다른 결전을 치를 준비에 골몰해 왔다. 마침내 신문의 창간호를 발행한 것이다. 이 신문은 아주 작은 크기의 초고용지에 복사되었다. 신문 발행을 위해 둔스탄은 몇 주일 전부터 애써 자료를 모았다. <가시다람쥐>라는 이름을 붙인 이 신문은 익살맞은 기사를 주로 다루고 있었다. 여호수아서의 저자와 마울브론 신학교의 어느 학생이 나뉴는 우스꽝스러운 가상의 대화를 창간호의 특종감이었다.

   그 성공은 가히 압권이었다. 둔스탄은 시간에 쫓기는 편집인과 발행인다운 얼굴 표정과 행동거지를 보였다. 그리고 고대 베네치아 공화국의 그 유명한 아레티나와도 흡사한, 비난과 칭송이 어우러진 미묘한 명성을 여기 이 수도원에서 즐기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편집에 참여한 헤르만 하일너가 둔스탄과 더불어 꽤나 날카로운 풍자를 곁들인 검열을 펼쳤을 때는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일너에게는 그러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재채나 기질이 충분했다. 거의 한 달이 넘게 이 자그마한 신문은 수도원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한스는 친구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 한스 자신에게는 그 일을 하고 싶은 관심이나 할 수 있는 재능이 없었다. 더군다나 부쩍 바빠진 하일너가 요즈음 거의 저녁마다 스파르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스가 얼마 전부터 다른 일에 관심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스는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맥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돌아다녔다. 별로 내키지 않는 공부는 진척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리비우스 시간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선생은 번역을 시키기 위하여 한스의 이름을 불렀다. 한스는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자넨 왜 일어나지 않는 거지?

   선생은 화를 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한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을 곧게 펴고 의자에 앉아 고개를 약간 수그린 채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선생의 고함 소리에 어렴풋이 꿈에서 깨어나기는 했지만, 그 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한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다른 손들이 그를 더듬고, 다른 목소리들이 그에게 말을 건네었다. 나지막하게 아주 가까이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였다. 그것은 입에서 내뱉는 단어가 아니라, 샘에서 솟아나 깊고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물소리 같았다. 그리고 수많은 시선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낯설기는 했지만, 예감으로 가득 빛나고있었다. 그것은 아마 한스가 지금 막 리비우스를 읽으며 찾아낸 로마 군중의 눈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꿈에서 보았거나 언젠가 그림에서 본 적이 있는 낯선 사람들의 눈일 것이다.

   기벤라트!

   선생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자고 있는거니?

   천천히 눈을 뜬 학생은 의아하다는 듯이 선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 졸고 있었구만!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가 어딜 배우고 있는지 한 번 말해 줄 수 있겠나? 응?

   한스는 손가락으로 책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는 어디를 배우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일어서는게 어떻겠나? 선생은 빈정대며 물었다. 그제서야 한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날 쳐다보게!

   한스는 고개를 들어 선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선생은 한스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디 아픈가, 기벤라트?

   아녜요, 선생님.

   다시 앉거라. 그리고 수업이 끝나는 대로 내 방으로 오도록 해.

   한스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리비우스 위로 몸을 내던졌다. 이제 그는 잠에서 깨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한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또 다른 눈은 수많은 낯선 인물들의 발자취를 쫓고 있었다. 이들은 아득히 먼 미지의 세계로 서서히 사라져갔지만, 머나먼 안개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때까지도 번뜩이는 시선을 끊임없이 한스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선생의 목소리와 번역하는 동료 학우의 목소리, 그리고 강의실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나지막한 목소리들도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다시 여느 때처럼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들리는 것이었다. 의자나 강단, 칠판 역시 예전처럼 그 자리에 서있었다. 벽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른 콤파스와 삼각자가 걸려 있었다. 주위에는 동료 학생들이 한스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뻔뻔스러운 눈초리로 한스를 힐끗힐끗 훔쳐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한스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수업이 끝나는 대로 내 방으로 오도록 해!>라고 선생이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하느님, 맙소사.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수업이 끝난 뒤에 선생은 눈짓으로 한스를 불렀다. 그러고는 뚫어지게 쳐다보는 학우들 사이로 한스를 데리고 나갔다.

   자, 말해 보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자고 있었던게 아니란 말이지?

   예.

   그럼 내가 자네 이름을 불렀을 때 왜 일어나지 않았지?

   저도 모르겠어요.

   혹시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건 아니가? 자네 귀가 어둡지 않나?

   아녜요. 저도 선생님이 부르시는 소릴 들었어요.

   그런데도 일어나지 않았단 말이지? 게다가 나중에는 눈빛도 이상해지더군. 자넨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전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정말 일어나려고 했었단 말예요.

   그런데 왜 일어나지 않은 거야? 역시 몸이 좋지 않은거로구나.

   그렇진 않아요. 제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머리가 아픈 건 아니니?

   아녜요.

   그래, 좋다. 이제 가보도록 해라.

   식사를 하기 전에 한스는 다시 침실로 불려갔다. 거기에서 교장 선생이 마을 의사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한스를 진찰하고 나서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확실한 병세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호의적인 미소를 보이며 한스의 증세가 대수롭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흔히 나타나는 경미한 신경쇠약입니다, 교장 선생님.

   의사는 소리를 죽여 여유있게 웃어 보였다.

   일시적인 쇠약 증세지요. 가벼운 현기증이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이 젊은이는 매일 바깥 바람을 쐬야 합니다. 두통을 없애 주는 물약을 조금 처방해 주겠습니다.

   이때부터 한스는 매일 식사를 마친 뒤 한 시간씩 산책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스가 그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한스의 산책길에 하일너가 동행하지 못하게 한 교장 선생의 단호한 금지령이 마음에 걸리 뿐이었다. 하일너는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부어 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스는 언제나 혼자 산책에 나섰다. 거기서 그는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봄이 성큼 다가오는 계절이었다. 둥글게 굽어진 아름다운 언덕 위로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푸른 초목들이 마치 맑고 엷은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나무들은 윤곽이 뚜렷한 갈색의 그물과도 같은 겨울의 형상을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어린 잎사귀들과의 유희를 즐기며 함께 어우러졌다. 그래서 살아 숨쉬는 신록의 파도가 끝없이 넘쳐흐르는 시골의 색깔을 띠는 것이었다.

   예전에 라틴어 학교를 다니던 시절, 한스는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봄을 바라보았다. 그때에는 생기발랄한 호기심으로 자연의 세계를 낱낱이 들여다보았다. 철새들이 돌아오는 차례와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차례를 종류에 따라 관찰했다. 그리고 5월이 다가오기가 무섭게 낚시하러 강으로 내달았다. 하지만 이제는 새들의 종류를 구별한다거나 움트는 싹을 통하여 관목의 종류를 식별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단지 자연의 커다란 움직임과 여기저기서 싹트는 색깔을 지켜볼 뿐이었다. 한스는 어린 잎사귀들의 향내음을 맡으며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산들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놀라움에 사로잡힌 채 들판을 거닐었다.

   한스는 곧 피곤해졌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드러누워 잠들고 싶은 욕구에 자꾸 빠져들었다. 그는 거의 내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숱한 형상들을 보고 있었다. 한스 자신은 그것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밝고, 부드럽고, 색다른 꿈들이었다. 마치 초상처럼, 낯선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가로수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렇다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바라보기 위하여 존재하는 순수한 그림들이 없었다. 하지만 이 그림들을 바라보는 것이 곧 한스에게는 하나의 체험이었다.

   다른 공간과 다른 인간들에게 내맡겨진 느낌이었다. 낯선 대지, 밟기 편안한 부드러운 땅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한 가볍고 잔잔한, 꿈으로 가득 찬 향료가 스며든 낯선 공기를 호흡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림들 대신에 때로는 어두우면서도 따듯한 감정이 북받쳐올랐다.

   마치 가벼운 손길이 그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때, 한스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다.

  그가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 책들은 그림자처럼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수업 시간에 히브리어의 단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수업이 시작되기 30분전에 예습을 시작해야 했다. 구체적인 관조의 순간들이 자주 나타나기도 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 안에 서술된 사물들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옆에 있는 사물보다도 훨씬 더 생동감이 넘치고, 현실에 가까웠다. 한스는 자신의 기억력이 전혀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느슨해지고,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따금 낡은 기억들이 무서우리만치 생생하게 그를 엄습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한스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었다.

   수업을 받거나 책을 읽다가도 가끔 아버지나 늙은 안나, 혹은 예전의 학교 선생이나 학교 친구 가운데 누군가가 떠오르곤 했다. 그 영상들은 바로 한스의 눈앞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잠시 동안 한스의 주의력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기 일쑤였다. 슈투트가르트에 머무를 때의 일이나 주 정부의 시험을 치를 때의 일, 그리고 방학 때의 일들도 다시금 되살아났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강가에 앉아 햇빛을 머금은 강물의 내음을 맡던 때도 있었다. 동시에 한스가 꿈에 그리던 그 세월들이 마치 옛날 이야기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후덥지근하고 을씨년스러운 어느 날 저녁, 한스는 하일너와 함께 침실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하일너에게 고향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낚시질에 대한 이야기,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스의 친구는 눈에 띄게 말이 없었다. 그저 한스가 이야기하는 대로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긴 채 하루 종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자그마한 잣대로 몇 번이고 허공을 쳐대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스도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두 소년은 창턱에 걸터앉았다.

   얘, 한스!

   마침내 하일너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에 겨워 떨리고 있었다.

   응?

   아냐, 아무것도,

   뭔데, 말해 봐!

   그냥 생각해 봤어. 네가 이야길 많이 하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구?

   좋아, 한스. 너 혹시 여자 뒤를 쫓아다닌 적 있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지껏 두 소년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와도 같은 신비의 세계가 마치 동화에 나오는 정원처럼 그를 끌어다녔다. 한스는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딱 한 번.

   한스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땐 아직 멍청한 어린애였지.

   다시 침묵이 흘렀다.

   …… 그런데 넌, 하일너?

   하일너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그만두자! 이런 이야긴 꺼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정말이지 쓸데없는 짓이라고.

   아냐. 그렇지 않아.

   …… 난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네가? 정말이야?

   고향의 이웃집 아가씨야. 올 겨울에 나 그녀한테 키스를 해줬어.

   키스라구?

   응, 그래. 그땐 벌써 어두웠었거든. 저녁 무렵 얼음판위에서였어. 그녀가 스케이트 벗는 걸 내가 도와주었지. 그때 입을 맞춘거야.

   그 여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니?

   응,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도망쳐 버렸어.

   그 다음엔?

   그 다음엔! 그게 전부야.

   하일너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스에게는 그가 마치 금단(禁斷)의 정원에서 나타난 영웅처럼 보였다.

   때마침 종이 울렸다.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등불이 꺼지고, 주위가 온통 적막에 쌓였다. 한스는 침대에 누워서도 한 시간이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하일너가 여자친구에게 한 입맞춤을 상상해 보았다.

   다음날, 한스는 조금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하일너는 한스가 물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쪽에서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스의 학교 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 선생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이상한 눈초리로 한스를 흘겨보았다. 몹시 기분이 상한 교장 선생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스의 동료들은 그가 너무나도 성적이 떨어진 나머지 결국 최우등생이 되려는 목표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벌써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단지 하일너만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애당초 하일너에게는 학교라는 존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한스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또 어떻게 변해 가든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둘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하일너는 신문을 편집하는 일에도 싫증이 났다. 그래서 다시 친구에게로 완전히 돌아와버렸다. 교장선생의 금지령을 무시한 채 여러 차례에 걸쳐 한스를 따라 산책길에 나섰다. 한스와 함께 양지바른 언덕에 드러누워 몽상에 젖기도 하고, 소리내어 시를 읽기도 하고, 교장 선생을 희롱하는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한스는 날마다 하일너가 연애담을 털어놓았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고 있었지만, 하일너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스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동료 학우들 사이에서 두 소년은 여전히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하일너가 신문<가시다람쥐>에서 이들에게 심술궂은 농담을 퍼부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신문은 그 사이에 폐간되어 버렸다. 그래도 무척 오래 버틴 셈이었다. 애당초 이 신문은 겨울과 봄 사이의 지루한 몇 주일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었다. 이제 바야흐로 아름다운 계절이 시작되었다. 식물을 채집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아니면 야외에서 놀이를 하면서 얼마든지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점심때에는 체조하는 아이들, 씨름하는 아이들, 달리기하는 아이들, 그리고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활기찬 고함 소리가 수도원의 안뜰을 가득 메웠다.

   그때 다시금 엄청난 소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장본인은 역시 발길에 채이는 돌같은 존재인 헤르만 하일너였다.

   교장 선생은 마치 자기가 내린 금지령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하일너가 거의 매일 기벤라트와 함께 산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한스를 그냥 내버려두고, 자신과 오랜 적대 관계에 있는 주범 하일너를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교장 선생은 하일너에게 반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일너는 반말을 쓰지 말라고 단호히 요구했다. 교장 선생은 그의 항명에 대하여 엄하게 꾸짖었다. 하일너는 한스가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을 새삼 밝혔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들의 교제를 금지할 권리는 없다고 대들었다. 심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 겨로가 하일너는 여러 시간 동안이나 감금되었다. 이에 덧붙여 당분간은 기벤라트와 함께 외출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금지령이 떨어졌다.

   다음날 한스는 <공식적인> 혼자만의 산책길에 나섰다.

   2시에 학교로 돌아와 다른 학우들과 함께 강의실에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될 즈음에 하일너가 없어진 사실이 밝혀졌다. 예전에 힌두가 없어졌을 때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단지 이번에는 아무도 지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3시에 모든 학생들이 세 명의 선생들과 함께 실종된 학우를 찾아 나섰다. 여러 조로 나뉘어 숲속을 뛰어다니며 하일너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다. 적지 않은 학생들과 두 명의 선생들까지도 어쩌면 하일너가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5시에는 이 지방의 모든 파출소에 전보가 들어갔다. 저녁에는 하일너의 아버지에게 속달편지가 배달되었다. 밤이 깊도록 아무런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밤새 모든 침실에서 속삭이는 소리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하일너가 물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난무했다. 또 다른 학생들은 하일너가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종자 하일너는 돈을 한푼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모두들 틀림없이 한스가 이 일에 대하여 알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하여 가장 많이 놀라고 걱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한스였다. 한스는 밤에 침실에서 다른 동료들이 서로 묻는 소리를 엿듣고 있었다. 또한 아이들이 나름대로 추측하고, 허튼 소리를 지껄이기도 하고, 빈정거리기도 하는 소리를 모두 귀담아 들었다. 그러고는 침대로 기어가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친구를 걱정하고, 또 괴로워하며 길고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일너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더욱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마침내 한스는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진맥진한 나머지 잠이 들었다.

   이 시각, 하일너는 몇 마일 떨어진 숲속에 누워 있었다. 너무 추워 잠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를 만끽하며 차가운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마치 비좁은 새장에서 빠져나온 한 마리 새처럼 팔다리를 쭉 뻗어보았다. 하일너는 점심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걸었다. 크니틀링엔에서 얻은 빵을 이따금 한 입씩 뜯어먹으며 봄날의 맑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밤의 어둠과 별들과 분주하게 떠도는 구름을 쳐다보았다.. 하일너는 적어도 지긋지긋한 수도원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며 자신의 의지가 그 어떤 지시나 금지령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교장 선생에게 보여준 것이다.

   다음날도 사람들이 하루 종일 그를 찾아다녔지만 헛일이었다. 하일너는 마을 가까이 들녘에 쌓아둔 짚더미 속에서 두번째 밤을 보냈다. 아침에는 다시 숲속으로 들어갔다. 저녁 무렵에 마을로 들어가려다가 순찰중이던 경찰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경찰은 다정스런 농담을 해가며 그를 읍사무소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하일너는 익살과 애교로 읍장의 환심을 샀다. 읍장은 하일너가 하룻밤을 묵을 수 있도록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일너는 푸짐하게 햄과 달걀을 얻어먹었다. 그 이튿날, 이미 수도원에 와 있던 아버지가 그를 데리러 왔다.

   탈주자 하일너가 붙잡혀 왔을 때, 수도원에는 엄청난 흥분이 일었다. 그는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다녔다. 짧았던 천재다운 여행을 뉘우치는 기생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교수회의의 비밀 재판에서는 전혀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매우 불손하게 행동했다. 선생들은 하일너를 붙들고자 했으나 그는 이미 도를 넘어버렸다. 그는 명예스럽지 못한 퇴교 처분을 받고, 저녁에 아버지와 함께 두 번 다시 돌아 오지 않을 머나먼 길을 떠났다. 친구 기벤라트와는 단지 악수를 나누며 이별을 아쉬워했을 뿐이었다.

   거역과 타락으로 물든 이 <극악한> 사건에 대하여 교장 선생은 격한 감정을 쏟아가며 멋들어진 연설을 했다. 슈투트가르트의 상급 관청으로 보낸 보고서는 훨씬 억제되고, 엄정하며, 한층 부드러운 문체로 씌어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학교에서 쫓겨난 괴짜 하일너와의 서신 왕래가 금지되었다. 한스는 그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하일너와 그의 도주를 놓고 몇 주일씩이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더욱더 멀리 떨어지고, 시간이 점점 더 많이 흘러가면서 학생들의 판단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겁에 질려 피해 다니던 도망자 하일너를 이제는 마치 자유를 찾아 날아간 독수리처럼 부러워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헬라스 방에는 빈 책상이 두 개나 놓여 있었다. 나중에 없어진 학생은 먼저 없어진 학생처럼 그렇게 빨리 잊혀지지 않았다. 단지 교장 선생만이 두번째 사건도 잘 처리되어 잠잠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하일너는 수도원의 평화를 깨뜨릴 만한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 한스가 목이 빠지도록 기다려보았지만, 하일너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 하일너는 떠났고, 또 사라져버렸다. 이 인물과 탈주 사건은 차츰 지난날의 이야기가 되어갔고, 급기야는 하나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이 열정적인 소년은 천재다운 시도와 방황을 거듭한 끝에 삶의 고뇌를 거쳐 엄격하고 정숙한 규율을 몸에 익혔으리라. 그래서 비록 위대한 인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어엿한 인물이 되었으리라.

   뒤에 남은 한스에게는 하일너의 도주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의혹의 눈초리가 따라다녔다. 이로 인하여 한스에 대한 선생들의 호의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 어느 선생은 한스가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넨 왜 그 잘난 친구 하일너와 함께 가지 않았나?

   교장 선생은 한스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마치 바리새인이 세리(稅吏)에게 그러했듯이 경멸에 가득 찬 동정심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기벤라트는 더 이상 학생들의 무리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는 문둥병자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제5장

   들쥐가 저장해 둔 먹이로 살아가듯이 한스는 예전에 익혀둔 지식으로 얼마간 버텨나갔다. 하지만 그것마저 바닥이 난 뒤에는 궁핍한 나날이 시작되었다. 비록 무기력하나마 다시금 새로이 땀을 흘려 곤경에서 잠시 벗어나보기도 했지만, 전혀 희망이 없는 절박한 상황 앞에서는 한스 자신도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부질없이 애쓰는 일을 그만두었다. 모세오경 다음에는 호머를, 크세노폰 다음에는 대수를 포기해 버렸다. 선생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판이 자꾸 떨어지는 현실도 별다른 흥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성적은 <수>에서<우>로, <우>에서 <미>로, 급기야는 <가>로 내려앉고 말았다. 한스의 두통은 일상사처럼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헤르만 하일너를 생각하기도 하고,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가벼운 몽상에 잠기기도 하고, 몇 시간이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기도 했다.

   점점 늘어가는 선생들의 질책에 대하여 한스는 비굴하리만치 알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복습 지도를 맡고 있는 자상한 젊은 교사 비드리히 단 한사람만이 궁색한 한스의 미소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궤도에서 이탈한 소년 한스를 동정과 관용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다른 선생들 모두는 한스에게 화가 나 있었다. 수업을 마친 뒤에도 교실에 남아 자습을 하도록 한스에게 벌을 주곤했다. 때로는 그의 잠들어 버린 공명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넌지시 비꼬기도 했다.

   자네 지금 자고 있지 않다면, 이 문자을 한번 읽어보는게 어떻겠나?

   누구보다도 분에 겨워 한 사람은 교장 선생이었다. 허영심에 사로잡힌 교장 선생은 자기 시선이 미치는 엄청난 힘에 대하여 커다란 자부심을 느껴오던 터였다. 그래서 그는 무서우리만치 위협적인 눈을 부릅뜨고 한스를 쳐다보았지만, 한스는 언제나처럼 비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교장 선생은 벌컥 화가 치밀어올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스의 미소가 교장 선생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만 것이다.

   그런 미련한 얼굴로 멍청하게 웃지 말게. 엉엉 소리내어 울어도 시원찮을 텐데.

   한스에게는 아버지의 편지가 더 큰 상처가 되었다. 교장 선생이 보낸 편지를 일고 너무 놀란 한스의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하여 한스에게 애걸하는 하는 투의 편지를 썼다. 한스에게 보낸 아버지의 천지에는 견실한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모든 격려와 도덕적인 분노를 담은 상투적인 문구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거기서 애절한 호소의 눈물이 구구절절 흘러나와 아들의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다.

   교장 선생으로부터 아버지, 그리고 교사들과 복습 교사들에 이르기까지, 어린 소년들을 키우는 의무에 충실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바람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한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 오기와 타성에 젖은 성향을 억지로라도 다시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그 동정심 많은 복습 교사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야윈 소년의 얼굴에 비치는 당혹스러운 미소 뒤로 꺼져가는 한 영혼이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과 절망에 쌓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차게 짓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마을 의사는 다시 한 번 한스를 진찰해 보았다. 그리고 성장기에 흔히 나타나는 신경쇠약 증세라고 진단을 내렸다. 방학이 시작되기만 하면, 충분한 휴식과 식가, 그리고 숲속에서의 충분한 산책이 그의 병세를 낫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방학이 시작되기 3주전의 일이었다. 오후 수업 시간에 한스는 선생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선생이 계속 욕설을 퍼부어대자, 한스는 그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러고는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더니 하염없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수업은 완전히 중단되고, 한스는 반나절이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다음날, 수학 선생은 벽에 걸려 있는 칠판에 기하 도형을 그리고 나서 이 도형을 증명하도록 한스를 호명했다. 한스는 그만 칠판앞에서 현기증을 일으키고 말았다. 백묵과 잣대를 들고 아무렇게나 칠판 위에 휘갈겨 쓰다가 필기 도구를 떨어뜨렸다.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굽혀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마을 의사는 자신이 돌보는 환자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 몹시 화를 내었다. 그는 한스가 즉시 요양을 위해 휴가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신경전문의와의 상담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저 아이는 분명 무도병(舞蹈病)에 걸리고 말 거예요 마을 의사는 교장 선생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교장 선생은 무자비하리만치 화난 표정을 아버지처럼 자상하고 동정어린 표정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교장 선생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 어울리기조차 했다.

   마을 의사와 교장 선생은 각기 한스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소년의 호주머니 속에 넣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교장 선생의 분노는 어두운 근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벌어진 하일너 사건으로 인하여 떠들썩해진 교육청이 또다시 터진 이 불행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놀랍게도 교장 선생은 이 사건에 대하여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스가 고향에 돌아가기 얼마전쯤부터는 섬뜩할 정도로 그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교장선생은 한스가 요양을 위한 휴가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혹시 완쾌된다 하더라도, 이미 한참 뒤로 처진 학생이 그 사이에 태만하게 보낸 몇 개월은커녕 몇 주일의 공부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교장 선생은 헤어지면서 한스의 힘을 북돋아주기 위하여 <또 만나세>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헬라스 방에 들어가 텅 빈 세개의 책상을 볼 때마다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두 소년과의 이별에 대한 책임의 일부가 혹시라도 자신에게 있지나 않은지, 사뭇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교장 선생은 담력이 세고 도덕적으로 강인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전혀 이롭지 않은 암울한 의구심을 마음속으로부터 떨쳐버릴 수 있었다.

   자그마한 여행가방을 들고 떠나가는 신학교 학생의 뒤로 교회와 문, 박공지붕, 그리고 탑들과 더불어 수도원이 그 모습을 감추고, 숲과 언덕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에 바덴의 국경 지대에 있는 비옥한 과수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포르츠하임이 나타나고, 곧바로 검푸른 잣나무들이 늘어선 슈바르츠말트의 산이 나타났다. 수많은 계곡 사이로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작열하는 여름날의 태양 아래 더욱 푸르러 보이는 숲은 여느 때보다도 시원스러운 그림자를 한층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소년은 고향의 정취가 물씬한 풍경으로 바뀌어가는 창 밖을 내다보며 다시금 즐거운 기분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고향 마을이 가까워지면서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마중을 눈앞에 둔 당혹스러운 두려움이 자그마한 여행의 기쁨마저 송두리째 짓밟아버렸다.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슈투트가르트로 갔던 일,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마울브론으로 떠났던 일, 이러한 추억들이 그때의 긴장과 불안스러운 기쁨과 더불어 또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을 해야만 했는가?

   교장 선생뿐 아니라, 한스도 자신이 두 번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학교니 학문이니 야심에 찬 희망이니 하는 것들도 이제는 모두 끝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한스가 그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스의 마음은 실망스럽게도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우울하고 어두워졌다. 지금 한스는 그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푹 자고, 마음껏 울고, 한없이 꿈에 잠기고 싶었다. 그리고 이 모든 번민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 집에서는 그러한 희망이 실현되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기차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한스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신나게 뛰놀던 언덕과 숲이 있는 정든 땅을 지나오면서도 더 이상 창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래서 하마터면 낯익은 고향의 기차역에서 내리지 못할 뻔했다.

   드디어 한스는 우산과 여행가방을 들고 고향의 흙에 발을 디뎠다. 아버지는 아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아들의 비행(非行)에 대하여 실망과 분노를 느끼던 아버지는 고장 선생이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고 나서는 당혹스러운 두려움에 싸여 있던 터였다. 그는 수척하고 비참한 한스의 몰골을 상상하고 있었다. 마르고 쇠약해 보이는 한스는 그래도 여전히 혼자 걸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고장 선생과 의사가 보낸 편지를 통해 알게 된 아들의 신경병에 대하여 남모르는 불안감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가족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경병으로 고생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병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언제나 이해심이 결여된 조소와 경멸 섞인 동정으로 정신병자를 대하듯이 이야기를 거들곤 했다. 그런데 지금 아들 한스가 이런 끔찍스러운 질병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집에서의 첫날, 한스의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지 않아 무척이나 기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스는 그것이 짐짓 꾸며진 아버지의 의도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걱정과 불안을 몰래 감추며 한스를 자상하게 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따금 아버지는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리만치 호기심어린 염탐꾼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면서 한스 몰래 동정을 살폈다. 한스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맑은 날에는 밖으로 나가 몇 시간이고 숲속에 누워 있었다. 그럴 때면 한스는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서는 이따금 소년 시절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한스의 상처입은 영혼에 희미한 여운(餘韻)을 남기며 스쳐 지나갔다. 꽃이나 풍뎅이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산짐승들의 발자취를 쫓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언제나 잠시뿐이었다. 대부분은 나른한 몸으로 이끼 위에 누워 아픈 머리를 감싸쥐고는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끝내는 미지의 꿈들이 다시 한스에게 다가와 그를 머나먼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꿈을 꾼 적도 있었다. 한스는 친구 헤르만 하일너가 죽은 채로 들것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로 다가가려고 했다. 교장 선생과 여러 선생들이 황급하게 그를 밀쳐냈다. 그들은 한스가 다시 다가서려고 할 때마다 아플 정도로 세게 때리는 것이었다. 신학교의 교사들뿐 아니라, 라틴어 학교의 교장 선생과 슈투트가르트의 시험관들도 모두 화난 표정으로 거기에 모여 있었다.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었다. 들것 위에는 물에 빠져 죽은 힌두가 누워 있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그의 아버지는 슬픔에 잠긴 채 통이 높은 비단 모자를 쓰고, 구부러진 다리로 그 옆에 서 있었다.

   또 다른 꿈을 꾸었다. 한스가 도망친 하일너를 찾아 숲을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 나무들 사이로 하일너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한스가 그를 부르려 할 때마다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마침내 멈추어 선 하일너는 한스를 가까이 오게 한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얘, 난 여자 친구가 있다구.

   그러고 나서는 큰 소리로 껄껄 웃더니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한스는 약간 말라보이는 아름다운 남자가 배에서 내리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그 남자는 고요하고 거룩한 눈과 어여쁘고 평화로운 손을 가지고 있었다. 한스가 그에게로 달려갔을 때, 또다시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한스는<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침내 복음서의 한 구절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들은 예수를 곧 알아보고, 그리로 달려가니라.>

   이제 한스는 <περιεδραμον>가 어떤 변화형인지 알아내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또한 이 동사의 현재형과 부정형, 완료형, 미래형 나아가 단수와 양수(兩數),복수일 때의 변화형을 하나하나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들이 서로 뒤엉켜 막힐 때마다 조바심이 나고,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 뒤에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머릿속이 온통 상처로 얼룩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스의 얼굴은 체념과 죄의식에 사로잡힌, 졸린 듯한 미소로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그때, 교장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그 멍청한 웃음은 뭔가? 자넨 지금 울어도 시원찮을 텐데!

   이따금 호전된 기미가 보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한스의 건강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자꾸 악화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한스의 가정의(家庭醫)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의 진찰 소견을 하루하루 뒤로 미루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한스의 어머니를 진찰하고, 어머니에게 사망 진단을 내렸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재발하는 관절통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살펴주고 있었다.

   한스는 이제 비로소 지난 2년 동안의 라틴어 학교 시절에 친구를 한 명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당시의 동료 학우들은 이미 고향을 떠나버렸거나, 아니면 견습공이 되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스는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와도 친분을 맺지 못했다.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고, 그들 또한 한스에게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고작해야 늙은 고장 선생이 두 번 정도 다정스럽게 몇마디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라틴어 선생과 마을 목사도 길거리에서 한스를 만날 때에는 친근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한스는 그들에게 실상 무가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가득 채워넣을 수 있는 그릇도 아니었고, 다양한 종류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논밭도 아니었다. 한스를 위하여 시간을 낸다거나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마을 목사가 조금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한스를 돌보아주었다면, 한스를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 목사가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줄 수 있는 학문, 혹은 적어도 학문을 추구하는 자세 따위는 벌써 오래전에 한스에게 남김없이 주었다. 그 이상은 마을 목사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라틴어 실력에 대하여 어느 누구라도 타당한 근거를 내밀며 반박하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성경을 설교를 위한 출처로 삼지 않았다. 그는 역경에 처한 사람들이 기꺼이 찾아갈 수 있는 그런 부류의 목사는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온갖 고뇌를 덜어 줄 수 있는 선량한 시선과 다정한 언어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기벤라트 역시 한스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기 위하여 나름대로 무진 애를 쓸 뿐, 한스의 친구나 위로자가 되지는 못했다.

   사랑마저 빼앗기고 모두에게 버림받은 한스는 자그마한 정원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숲속에 누워 몽상에 젖었다. 때로는 괴로운 상념에 쫓겨다니기도 했다. 독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책을 펴기가 무섭게 머리와 눈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느 책에서나 수도원 시절과 그 당시의 두려운 악령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리고 숨막힐 듯이 무시무시한 꿈의 한 모퉁이로 한스를 데려가서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거기에 꽉 붙들어놓는 것이었다.

   이렇듯 고통과 고독에 내맡겨진 병든 소년 한스에게 위로자의 가면을 쓴 또 다른 유령이 다가왔다. 그리고 점차 그와 친숙하게 되어 급기야는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권총을 구한다거나 숲속 어딘가에 밧줄을 매단다거나 하는 일은 물론 어렵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거의 매일 같이 한스의 산책길을 따라다녔다. 한스는 조용하고 외딴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끝에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죽음의 보금자리로 정해 놓았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찾아갔다. 머지 않아 사람들이 멀리서 자신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상상을 하며 이상야릇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밧줄에 매달 나뭇가지도 마음속으로 정해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무게를 충분히 지탱할 수 있는 지도 시험해 보았다. 이제는 한스의 가는 길에 아무런 장애물도 놓여 있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아버지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와 헤르만 하일너에게 보내는 무척 긴 편지를 썼다. 나중에 이 편지들은 한스의 주검 옆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제 모든 준비가 확실하게 갖추어졌기 때문에 한스에게는 여느 때와는 달리 평안이 깃들이기 시작했다.<숙명적인>나뭇가지 아래 앉아 있노라면, 여태껏 그를 짓누르던 압박감은 어느새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기쁨에 넘치는 환희가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왜 진작 저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은 돌처럼 굳어졌고, 이미 죽음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한스는 얼마 동안이나마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먼 여행길을 떠나지 전에 기꺼이 그러하듯이, 이 마지막 날들의 아름다운 햇빛과 고독한 몽상을 마음껏 맛보려고 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예전부터 낯익은 주위 환경에 여전히 머물면서 자신의 위험천만한 결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남다른 쓰라린 쾌감을 주었다. 의사를 만날 때마다 한스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자, 두고 보라니까.

   운명의 여신은 한스로 하여금 자신의 암울한 구상을 마음껏 즐기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한스가 날마다 죽음의 잔을 들이키며 몇 방울의 환희와 생의 의욕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처입은 불구의 젊은 영혼 하나쯤이야 그다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그 영혼은 자신의 원을 끝까지 그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계획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직 삶의 쓰디쓴 맛을 느끼지 전까지는.

   벗어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념이 점차 사라지더니 그 대신에 나른하면서도 편안한 체념의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한스는 하루하루 흘러가는 세원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애착이나 관심도 없이 푸른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때로는 몽유병자나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날, 한스는 나른하고 울적한 심정으로 정원에 있는 잣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막 머릿속에 시구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라틴어 학교 시절에 배운 오래된 시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흥얼거렸다.

   아, 나는 피곤합니다.

   아, 나는 지쳤습니다.

   지갑에는 돈 한 푼 없고,

   주머니에도 없습니다.

   그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선율에 맞춰 아무 생각도 없이 스무 번씩이나 이 시구를 주절거렸다. 때마침 창가에 서 있던 아버지는 이 노래를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단조로운 가락에 무의미해 보이는 이런 노래가 감정이 메마른 아버지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아들의 증세를 정신박약의 불치병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점점 더 불안한 심정으로 아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사실을 알아차린 한스는 무척 괴로웠다. 하지만 아직 저 튼튼한 나뭇가지에 밧줄을 매달 시기가 오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 세월은 흘러 무더운 계절이 다가왔다. 주 시험과 여름방학 이래로 벌써 한 해가 지나가 버렸다. 한스는 가끔 지난날들의 추억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의 감수성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 버렸기 때문에 별다른 감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낚시질을 하고는 싶었지만, 감히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가에 서 있을 때마다 괴로운 상념들이 한스를 괴롭혔다. 이따금 그는 어느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강기슭에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다. 그러고는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무리지어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향하여 애닯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다.

   매일 저녁 무렵이면 수영을 하기 위하여 강을 거슬러 상류로 걸어갔다. 그때마다 언제나처럼 검사관 게슬러의 자그마한 집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연하게도 한스는 자신이 3년 전에 무척 좋아하던 엠마 게슬러가 집에 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두세 차례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예전에 그녀는 나긋나긋한 몸매를 지닌 매우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 큰 처녀가 되어 있었다. 투박해 보이는 걸음걸이와 아이답지 않게 유행을 따른 머리 스타일은 그녀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놓았다. 길게 늘어뜨린 의상도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짐짓 여성답게 보이려고 애쓰는 그녀의 태도 또한 꼴불견이었다. 한스에게는 그녀의 이런 모습들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미로움과 따스함이 느껴졌던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서글프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들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훨씬 더 아름답고, 즐거웠으며, 활기가 넘쳐흘렀다. 벌써 오래전부터 한스는 라틴어와 역사, 그리스어와 시험, 신학교, 그리고 두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동화책도 있었고, 도둑 이야기가 적힌 책도 있었다. 자그마한 정원에는 한스가 손수 매달아놓은 절구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나숄트 집안의 현관 앞에 모여 리제의 모험담을 듣기도 했다. 그때는 가리발디라고 불리던 이웃집의 늙은 할아버지 그로스요한을 오랫동안 강도 살인범이라고 생각하며 꿈을 꾸기도 했다.

   일 년 내내 한 달에 한 번꼴로 애타게 기다려지던 일들이 있었다. 풀을 말리는 일, 토끼풀을 베는 일, 첫 낚시질에 나서는 일, 가재를 잡는 일, 호프를 거둬들이는 일, 나무를 흔들어 자두를 따는 일, 불을 지펴 감자를 굽는 일, 그리고 곡식 타작을 시작하는 일 등이었다. 그 사이에도 틈틈이 즐거운 일요일과 축제일이 있었다.

   또한 신비스러운 마법의 힘으로 한스를 끌어당기는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었다. 집이나 골목길, 계단, 곡물 창고의 바닥, 울타리, 그리고 사람들이나 갖가지 동물들이 그에게는 모두 사랑스럽고, 친숙하게 여겨졌다. 이것들은 한스를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비밀의 세계로 유혹했다. 호프를 딸 때는 같이 거들어주었다. 그리고 다 큰 처녀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노랫말들을 외우려고 애썼다. 대부분의 가사들은 지나치게 익살스러운 나머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더러는 몹시 애절한 내용을 담고 있기도 했다. 그런 노래를 듣고 있자면 저절로 목이 메었다.

   이 모든 일들이 어느 틈엔가 한스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 둘씩 사라져버렸다. 처음에는 저녁 무렵 리제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일이 없어지고, 일요일 아침에 고기잡는 일이 없어지더니 그 다음에는 동화책을 읽는 일도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호프를 따는 일과 정원에서 절구가 달린 물레방아를 지켜보는 일도 그만두게 되었다.

   아, 이 모든 추억들이 어디로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조숙한 소년 한스는 이제 병든 나날 속에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또 하나의 유년기를 체험하게 되었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아쉬워하는 그의 동심은 지금 갑자기 끓어오르는 동경과 더불어 저 꿈결같이 아름다운 시절을 향하여 다시 줄달음쳤다. 그리고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이 추억의 숲을 헤매고 다녔다. 그 추억은 지나치리만치 강하고 뚜렷한 나머지 병적이기까지 했다. 한스는 자신이 직접 몸으로 체험했던 과거에 못지 않은 애정과 열정으로 이 모든 것들은 다시 받아들였다. 기만과 억압에 짓눌린 한스의 소년 시절은 마치 오랫동안 막혀 있던 샘물이 터져나오듯이 그의 마음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으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한스 기벤라트도 그랬다. 그래서 어린이 나라에서 그가 꿈꾸어온 발자취를 한 번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오래된 돌다리에서 가까운 기벤라트의 집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골목길의 한쪽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스의 집이 속해 있는 거리는 마을에서 가장 길고, 넓고, 멋지게 뻗어 있었다. 이 거리는 (게르버 거리)라고 불렸다. 언덕을 따라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또 다른 거리는 짧고 좁을 뿐 아니라, 무척이나 초라했다. 이 거리는 (매의 거리)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은 어느 음식점의 간판에 그려진 송골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게르버 거리에는 집집마다 선량하고 견실한 토박이 시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집과 묘터, 그리고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정원은 집 뒤의 언덕을 타고 가파른 경사를이루며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울타리는 70년에 지어진, 노란 금작화로 뒤덮여 있는 철길둑과 맞닿아 있었다. 게르버 거리와 품위를 견줄 만한 곳은 마을 광장 하나뿐이었다. 거기에는 교회당과 지방청, 법원, 시청, 그리고 교구청이 들어서 있어 도회지풍의 깔끔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게르버 거리에는 공공건물 하나 없었지만, 어엿한 현관문이 달린 주택들과 고풍스러운 목조 건물, 그리고 산뜻하고 밝은 색깔의 박공지붕들일 줄지어 있었다. 한쪽켠으로만 늘어선 집들은 친근하고 편안하고 밝은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길 건너편에 난간이 달린 성벽 아래로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넓적하게 죽 뻗은 게르버 거리는 산뜻하며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매의 거리)는 그 반대였다. 이곳에는 쓰러져 가는 어두침침한 가옥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담벼락에는 얼룩진 회칠이 부서져 떨어지고, 박공지붕은 앞으로 삐죽 튀어나오고, 여러 군데 균열이 생긴 현관문과 창문은 덧대어 붙여놓았다. 또한 굴뚝은 기울어지고, 홈통은 파손되어 있었다. 집들은 앞을 다투어 공간과 햇빛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했다. 골목길은 좁은데다가 기이하게 굽어져 있어 하루 종일 베일에 쌓인 듯이 어두컴컴했다. 비가 올 때나 해가 진 뒤에는 물안개가 낀 암흑의 세계로 바뀌었다.

   어느 창문 할 것 없이 장대와 줄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빨래가 잔뜩 널려 있었다. 협소하고 누추한 골목길에는 수많은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세들어 사는 사람이나 하룻밤을 묵고 가는 사람을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허물어져 가는 집구석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언제나 가난과 범죄, 질병이 들끓게 마련이었다. 티푸스가 발병하거나 살인이 벌어져도 항상 그곳이 문젯거리였다. 이들 가운데에는 우스꽝스러운 마분장수 호테호테와 가위를 가는 아담히텔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히텔이 온갖 범죄와 부도덕한 짓을 벌이며 다닌다고 수군거렸다.

   학교에 들어간 지 처음 한두 해 동안 한스는 (매의 거리)에 자주 놀러갔었다. 누더기 옷을 걸친 옅은 금발의 아이들은 함께 어울리며 미심쩍어 보이는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한스도 이 무리 틈에 끼여 악명높은 로테 프로뮐러가 들려주는 살인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한때는 소문난 미인이었던 이 여자는 공장 노동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애인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추문이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칼부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 혼자 살고 있는 그녀는 저녁 무렵 공장이 문을 닫은 뒤, 커피를 끓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녀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낙네들과 젊은 노동자들뿐 아니라, 이웃에 사는 아이들도 문지방에 둘러앉아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검게 그을린 돌화로 위에는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었다. 그 옆에는 기름 촛대가 푸른빛이 감도는 석탄불과 더불어 이상스럽게 깜빡거리며, 구경꾼들로 붐비는 을씨년스러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벽과 천장위로 마치 귀신의 움직임같은 구경꾼들의 그림자를 커다랗게 드리우고 있었다.

   거기서 여덟 살 난 한스는 핑켄바인 형제와 알게 되어 아버지의 엄격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1년 가까이 사귀었다. 마을에서도 가장 약삭빠른 부랑아인 이들 형제의 이름은 돌프와 에밀이었다. 이들은 과일을 훔치거나 작은 산짐승의 밀렵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잔재주나 장난에 있어서는 이 아이들을 따를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틈틈이 새알이나 연탄, 어린 까마귀 새끼, 찌르레기와 토끼들을 몰래 내다 팔기도 했다. 더욱이 밤낚시가 금지된 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낚싯대를 드리우곤 했다. 마을 정원은 어디나 할 것 없이 자기 집을 드나들듯이 들락거렸다. 울타리가 아무리 뾰족하고, 담장에 유리 조각이 촘촘이 박혀 있다 하더라도 전혀 힘들이지 않고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스가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낸 친구는 (매의 거리)에 사는 헤르만 레히텐하일이었다. 부모 없이 고아로 자란 헤르만은 병약한 몸에 어딘지 남다른 데가 있는 조숙한 아이였다. 그는 한쪽 다리가 너무 짧아 언제나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골목길에서 벌어지는 아이들의 놀이에도 끼지 못했다. 마르고 창백한 얼굴에는 고뇌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굳어져 버린 입과 지나치게 뾰족한 턱이 눈에 띄었다. 헤르만은 매우 뛰어난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낚시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한스에게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레히텐하일은 아직 낚시 허가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이 두 소년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몰래 낚시질을 하곤 했다. 낚시질이 하나의 즐거움이라면, 남들의 이목을 피하여 숨어서 하는 낚시질은 보다 커다란 즐거움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절름발이 레히텐하일은 낚싯대를 알맞게 자르는 일, 말총을 꼬는 일, 낚시줄을 물들이 일, 실을 올가미처럼 매는 일, 그리고 낚싯바늘을 뾰족하게 가는 일 등을 한스에게 가르쳐주었다. 또한 날씨와 강물을 보는 일, 쌀겨를 풀어 물을 흐리게 하는 일, 알맞은 미끼를 고르는 일, 그리고 그 미끼를 바늘에 다는 일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레히텐하일은 물고기의 종류를 구별하는 법이나 미끼에 달려드는 물고기들의 헤엄치는 소리를 듣는 법, 낚싯줄을 적당한 깊이에 늘어뜨리는 법도 알려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스 앞에서 몸동작과 손동작을 실제로 보여주면서 낚싯줄을 당기거나 늦추거나 할 때의 호흡하는 요령과 섬세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레히텐하일은 낚시 가게에서 살 수 있는 멋들어진 낚싯대나 코르크, 유리 줄, 이 모든 인위적인 낚시 도구들을 매우 우습게 생각했다. 또한 손수 만든 낚시 도구를 쓰지 않고서는 고기를 낚을 수 없다는 것을 한스가 믿게 만들었다.

   한스는 핑켄바인 형제와는 다툰 끝에 헤어졌다. 하지만 말이 없는 절름발이 레히텐하일은 한스와 싸우지 않았는데도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2월 어느 날, 그는 옷을 벗어둔 의자 위에 목발을 올려놓고는 초라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잠시 뒤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조용히 저 머나먼 나라로 떠나가 버린 것이다. (매의 거리)는 레히텐하일을 이내 잊어버렸다. 단지 한스만이 그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매의 거리)에는 레히텐하일 말고도 유별난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 음주벽이 너무 심한 나머지 결국 해고당하고만 뢰텔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2주일에 한 번꼴로 술에 만취되어 길거리에 쓰러져 있거나 한밤중에 소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보통 때에는 어린아이와도 같이 순박한 사람이었다. 얼굴에는 언제나 다정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한스에게 타원형의 담배통에서 나는 냄새를 맡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스가 가져다주는 물고기를 버터에 구워 함께 먹기도 했다. 그리고 유리 눈알이 박힌 박제된 말똥가리새와 가냘프고 고운 음색으로 고풍스러운 춤곡을 들려주는 아주 오래된 시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맨발로 걸어다니더라도 커프스 단추는 꼭 달아야 하는 늙은 기계공 포르슈를 누가 모르겠는가! 그의 아버지는 전통이 오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엄격한 교사였다. 포르슈는 성경을 절반이나 외우고, 격언이나 도덕적인 금언도 매우 많이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지식이나 노령의 백발에도 불구하고, 아무 여자나 쫓아다니며 술을 마구 퍼마셨다. 조금 취기가 돈다 싶으면, 기벤라트 집의 모퉁이에 걸터앉아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대며 장황하게 격언을 늘어놓기 일쑤었다.

   한스 기벤라트 2세, 사랑하는 아들아, 내 말 좀 들어보거라! 지라하가 뭐라고 이야기하든가? 남에게 그릇된 충고를 하지도 않고, 또한 이로 인해 나쁜 마음을 품지도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나무에 달린 푸른 잎사귀와 같으니라. 어떤 잎은 떨어지고, 어떤 잎은 다시 자라나느니. 사람들의 인생도 이와 같으니라.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태어나느니. 자, 이젠 집에 가도 좋다. 이 바다표범 같은 녀석아.

   포르슈 노인은 경건한 격언 이외에도 유령 이야기나 무시무시한 전설들을 잔뜩 알고 있었다. 그는 유령이 떠돌아 다니는 장소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대하여 의구심을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대개는 자신이 하는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회의와 과장이 섞인 내뱉는 듯한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겁에 질린 사람처럼 점점 목을 움츠려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급기야는 소름이 끼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아련히 한스를 유혹하는 무시무시한 추억들이 이 초라하고 비좁은 골목길에 얼마나 많이 숨겨져 있던가! 자물쇠 장수 브렌들레도 여기에 살고 있었다. 그의 일터는 문을 닫은 뒤로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황폐하게 변해 버렸다. 그는 반나절이나 창가에 앉아서 활기가 넘쳐흐르는 골목길을 침울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가 가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누더기 옷을 걸치고 돌아다니던 동네 아이들이 하나라도 그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무척 고소한 표정으로 귀와 머리를 잡아채고는 온몸이 파랗게 멍들 정도로 마구 꼬집어대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아연줄로 목을 맨 채 층계에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하나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늙은 기계공 포르슈가 뒤로 다가가 생철을 자르는 가위로 목이 매달려 있는 철사 줄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혀를 내민 시체는 계단을 굴러 두려움에 떠는 구경꾼들 한가운데 떨어지고 말았다.

   밝고 넓은 게르버 거리를 나와 음침하고 습기에 찬 (매의 거리)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숨막히는 공기와 더불어 즐겁고도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한스를 내리눌렀다. 그것은 호기심과 두려움, 양심의 가책과 모험에 대한 행복한 기대감이 뒤섞인 복합감정과도 같았다. (매의 거리)는 지금이라도 동화나 기적, 전대미문의 도깨비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마술이나 유령의 존재가 그럴 듯하게 여겨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전설이나 추잡한 로이틀링의 통속 문학을 읽을 때처럼 달콤한 고뇌의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이책은 선생들에 의하여 강제로 빼앗기게 마련이었다. 거기에는 존넨비르틀레라든지 쉰더한네스, 혹은 메서카를레라든지 포스트미헬 같은 인물들, 그리고 이들과 비슷한 암흑가의 영웅들, 중범죄자들, 모험가들의 행각과 형벌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여느 동네와는 다른 곳이 (매의 거리) 이외에도 아직까지 하나 남아 있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어두컴컴한 다락이나 이상스러운 방안에서 자신을 잊을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것은 근처에 있는 커다란 피혁 공장의 낡고 거대한 건물이었다. 어두침침한 다락에는 커다란 가죽들이 걸려 있었고, 지하실에는 은폐된 굴과 금지된 통로가 있었다. 저녁이면 리제가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동화를 들려준 곳도 바로 여기였다.

   여기는 건너편에 있는 (매의 거리)보다 더 조용하고, 친밀감과 인간미가 넘쳐흘렀다. 하지만 (매의 거리) 못지 않은 수수께끼가 가득 숨겨져 있었다. 굴이나 지하실, 무두질하는 뜰이나 시멘트가 깔린 바닥에서 일하는 피혁 견습공들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기이하고 독특해 보였다. 하품이라도 하듯이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무척 커다란 방들은 공포와 매력을 간직한 채 적막에 싸여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처럼 거칠고 무뚝뚝해 보이는 집 주인은 모두가 싫어하는 두려운 존재였다. 리제는 이 괴상망측한 집에서 요정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정감이 넘쳐 흐르는 그녀는 모든 아이들과 새들, 고양이들과 강아지들의 보호자이자 어머니였다. 그리고 동화나 노래 가사도 많이 외우고 있었다.

   벌써 오래전에 낯설게 되어버린 이 세계에서 지금 소년한스의 생각과 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심한 환멸과 절망으로부터 도망쳐 이미 흘러가 버린 아름다운 시절로 돌아온 것이다. 그때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고, 자기 앞에 놓여진 세계를 매우 거대한 마법의 숲으로 보았었다. 그 숲은 소름끼치는 위험과 마법에 걸린 보물, 그리고 에머랄드의 성들을 아무도 볼 수 없게 깊숙이 숨겨놓았었다. 한스는 이 야생의 숲으로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기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금세 지쳐버렸다. 지금 그는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어두컴컴한 입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느 정도의 호기심을 채우려는 국외자일 뿐이었다.

   두세 차례에 걸쳐 한스는 (매의 거리)를 다시 찾아갔다. 바로 여기에 예전과 다름없는 희뿌연 어둠과 역거운 냄새, 구석진 모퉁이와 햇빛이 들지 않는 계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늙은 남자와 여자들이 문앞에 앉아 있었고, 몸을 씻지도 않은 옅은 금발의 아이들이 소리를 질러대며 뛰놀고 있었다. 기계공 포르슈는 이제 너무 나이가 들어 한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스가 수줍은 듯이 인사를 보냈지만, 그는 그저 비아냥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가리발디라고 불리우던 그로스요한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로테 프로뮐러도 마찬가지였다. 우편배달부 뢰텔러는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이 음악 소리가 나는 시계를 망가뜨려 버렸다고 투덜 거리더니 한스에게 냄새 맡는 담배를 권하고 나서는 그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뢰텔러는 핑켄바인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담배 공장에 다니는 녀석은 벌써 어른처럼 술을 퍼마신다고 했다. 또 다른 녀석은 교회 축성식에서 칼부림을 벌인 뒤로 도망간 지 벌써 1년이 넘었다고 했다. 이 모든 일들이 한스에게 참담하고 우울한 인상을 풍겼다.

   어느 날 저녁, 한스는 안채로 이르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습기에 찬 뜰을 지나 피혁 공장으로 가보았다. 마치 이 커다란 낡은 집에 이미 사라져버린 수많은 즐거운 추억과 더불어 자신의 어린 시절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듯이.

   굽어진 층계와 돌을 깐 문어귀를 지나 어두컴컴한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가죽이 널려 있는 다듬이터를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거기서 그는 코를 찌르는 가죽 냄새와 더불어 갑자기 솟구치는 추억의 뭉게구름을 들이마셨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뒤뜰로 가보았다. 거기에는 무두질을 하는 굴과 가죽의 찌꺼기를 말리는 건조대가 있었다. 높이 세워진 그 건조대 위에는 좁은 지붕이 덮여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벽 앞의 의자에는 리제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감자 바구니를 앞에 놓고는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귀를 기울이며 둘러앉아 있었다.

   한스는 어두컴컴한 문턱에 서서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늑한 평화가 저물어가는 피혁 공장의 뜰에 가득 차 있었다. 뜰의 담장 너머로 흐르는 강물의 가날픈 속삭임 이외에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그녀의 칼소리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아이들은 거의 꼼짝하지도 않고 얌전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밤중에 어린 아이의 음성이 강 건너편에서 들려왔다고 전해지는 성 크리스토포루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스는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어두컴컴한 현관을 살그머니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는 어린아이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저녁 무렵 피혁 공장의 뜰에서 리제 곁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두 번 다시 피혁공장이나 (매의 거리)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제6장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검푸른 잣나무 숲에서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활엽수들이 횃불처럼 노랗게, 혹은 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골짜기에는 벌써 짙은 안개가 자욱히 끼여 있었고, 아침에는 차가운 강물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예전에 신학교 학생이었던 한스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날마다 밖으로 돌아다녔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웃과 어울릴 수 있었지만, 그는 전혀 내키지도 않았고, 몸도 무척이나 피곤했기 때문에 일부러 교제를 피했다. 의사는 그의 건강을 위해 물약, 간유, 달걀과 냉수욕을 권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한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건강한 삶에는 나름대로의 내용과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젊은 기벤라트의 삶에서는 이미 그 목적과 내용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한스를 서기나 기능공으로 만들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한스가 아직 허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우선 조금이라도 기력을 회복해야만 했다. 이제 진지하게 그의 앞날을 생각해 볼 때가 온 것이다.

   처음에 느꼈던 혼란스러운 상념들도 차분하게 가라앉고, 한스 자신도 더 이상 자살을 염두에 두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 한스는 변덕스러운 흥분과 불안 상태로부터 잔잔한 우울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마치 부드러운 늪 속으로 가라앉기라도 하듯이 한스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서서히 그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지금 그는 가을의 들판을 돌아다니며 계절의 힘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저물어가는 가을, 고요히 떨어지는 낙엽, 갈색으로 물든 초원, 새벽의 짙은 안개, 그리고 너무 익은 나머지 이제는 지쳐버린 식물들의 말라가는 모습, 이런 것들이 한스를 여느 병자처럼 절망에 쌓인 무거운 기분으로 몰아갔다. 그는 이것들과 함께 소멸하고, 잠들고, 또한 죽음에 이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젊음이 이러한 바람에 반기를 들고, 은근히 생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한스는 노랗게 물들고, 갈색을 띠고 그러다가 마침내 벌거숭이가 되고 마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또한 숲속에서 피어오르는 우윳빛의 안개와 마지막 과일 수확이 끝난 뒤 생명을 잃어버린 채 이제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시들어 가는 과꽃이 있을 뿐인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헤엄이나 낚시철이 지난 뒤 마른 잎새에 뒤덮인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 싸늘한 강가에는 피혁 공장의 억센 직공들만이 버티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즙 찌꺼기들이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압착장이나 물레방앗간은 어디나 할 것 없이 모두 과즙 짜기에 한창 바빴기 때문이다. 시내 어느 거리에서나 천천히 발효하기 시작한 과즙의 향내가 그윽이 풍겨나고 있었다. 아랫마을 물레방앗간에서는 플라이크 씨도 자그마한 압착기를 빌려와 한스를 과즙 짜기에 초대했다.

   방앗간의 앞뜰에는 크고 작은 압착기, 달구지, 과일을 가득 담은 바구니와 자루, 손잡이가 달린 통, 등에 지는 통, 대야, 나무로 만든 통, 산더미같이 쌓인 과일 찌꺼기, 나무로 만든 지렛대, 손수레, 빈 운반 도구 등이 널려 있었다. 압축기가 움직이면서 삐걱거리기도 하고, 찍찍하는 소리, 신음하는 듯한 소리, 떨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녹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 녹색은 과일 찌꺼기의 황갈색과 사과 바구니의 색깔, 담록색의 강물과 맨발로 뛰노는 어린이들, 그리고 맑은 가을 하늘의 햇빛과 어우러져 보는 이들에게 기쁨과 삶의 즐거움, 풍요로움을 띠는 매혹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사과가 으스러지면서 내는 소리는 떫으면서도 식욕을 돋구었다. 그곳에 와서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얼른 사과 하나를 집어들고 덥석 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롱 속에는 갓 짜낸 달콤한 과즙이 적황색을 띤 채 햇살 아래 미소지으며 한줄기 흘러나왔다. 그곳에 와서 그 광경을 보는 사람이라면, 한 잔을 청해 재빨리 들이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촉촉이 젖은 눈망울을 글썽이며 달콤한 행복감의 물결이 자신의 몸 속을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 감미로운 과즙은 즐겁고 상큼한 향내를 저 멀리까지 가득히 채웠다.

   이 향기야말로 한 해를 통틀어 가장 멋들어진, 성장과 결실의 정수인 것이다. 다가오는 겨울에 앞서 이런 향기를 들이마실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쁘고, 멋진 일들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포근한 5월의 비, 쏴 하는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여름 비, 신선한 가을의 아침 이슬, 부드러운 봄날의 햇살,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의 뙤약볕, 하얗게 또는 새빨갛게 빛나는 꽃망울, 수확하기 전의 잘 익은 과일나무가 보여주는 적갈색의 윤기, 계절과 함께 찾아오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즐거운 것들.

   그것은 누구에게나 빛나는 나날이었다. 부유하고 거만한 사람들도 체면치레를 하지 않고 손수 나와서 살진 사과를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열 개가 넘는 사과 포대를 세어보기도 하고, 은으로 만든 휴대용 잔으로 맛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과즙에는 한 방울의 물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단 한 자루의 사과 포대밖에 없었지만, 유리잔이나 질그릇으로 맛을 보기도 하고, 과즙을 짜 넣은 통속에 물을 타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자긍심이나 행복감이 다른 사람들보다 덜하지는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과즙을 짜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친지나 이웃들의 압착기를 찾아다니며 한 잔씩 얻어 마시기도 하고, 과일을 한 개씩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했다. 이들은 전문가다운 어휘를 구사하며 자기들도 이 분야에 남 못지 않은 지식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나 부잣집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자그마한 잔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이들의 손에는 베어먹은 사과와 빵 한 조각이 들려 있었다. 과즙을 짜면서 빵을 실컷 먹어두면, 나중에 배가 전혀 아프지 않다는 근거 없는 전설이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떠들어대는 소리는 접어두고라도 어른들의 고함 소리가 서로 뒤섞여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었다. 무척 분주하게 오가는 이 목소리들은 흥분과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

   한스야, 이리 오너라! 여기 이쪽으로! 딱 한 잔만 마셔보렴!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벌써 배가 부른 걸요.

   자네 50킬로그램에 얼마나 주었나?

   4마르크.

   그래도 최고급품이라고. 한 번 맛 좀 보게나.

   이따금 예기치 않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과를 담은 포대 한 자루가 너무 일찍 터져, 사과들이 그만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내 사과! 여러분, 좀 도와주시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사과를 주웠다. 단지 몇몇의 개구장이 녀석들만이 그 사이에 사과를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야, 이놈들아, 주머니에 넣지 마! 네놈들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건 좋지만, 주머니에 숨기진 말아라. 잠깐, 거기 놔두지 못하겠니!

   이봐, 이웃 양반! 그렇게 재지만 말고, 내 것도 한 번 드셔보시게!

   꿀맛이구만! 정말 꿀맛이야. 대체 얼마나 만들었수?

   두 통밖에 안 되지만, 짭짤하게 재미를 본 셈이라고.

   한창 무더울 때 짜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구만. 그랬더라면 그냥 다 마셔버렸을 거라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서너 명의 까다로운 늙은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과즙 짜기를 그만둔 지 오래되었지만,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경험과 지식이 풍부했다. 이들은 과일을 거저 얻다시피 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지금보다 훨씬 값싸고, 품질도 좋았으며, 더군다나 설탕을 과즙에 넣는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둥 그 당시에는 나무에 열매가 달리는 것부터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는 등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땐 그래도 수확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 나도 사과나무를 한 그루 가지고 있었는데, 거리서만 사과를 250킬로그램이나 땄으니까 말야.

   하지만 시절이 그토록 나빠졌다고 하면서도, 이 까다로운 늙은이들은 실컷 과즙 맛을 보면서 압착기 주위를 돌아다녔다. 아직도 이가 남아 있는 늙은이들은 손에 든 사과를 열심히 씹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가운데 한 늙은이는 커다란 배를 몇 개씩이나 억지로 입에 집어넣더니 결국에는 심한 배앓이를 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는 탄식을 늘어놓았다.

   예전에는 이런 거 열 개쯤 거뜬하게 먹어치웠단 말야.

   커다란 배를 열 개나 먹어도 배가 아프지 않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거침없이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플라이크 씨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한가운데 압착기를 세워놓고, 나이가 들어보이는 견습공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는 바덴에서 사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의 과즙은 언제나 최고급품이었다. 그는 내심 만족스러워하며 (맛 좀 보려는)사람들을 누구도 물리치지 않았다. 야단법석을 떠는 무리들 틈에 끼여 즐겁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의 아이들은 한층 더 신바람이 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의 어린 견습공이었다. 두메산골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견습공은 다시 야외로 나와 힘이 닿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또 과즙을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품질이 뛰어난 달콤한 과즙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건강미가 넘치는 시골 청년다운 그의 얼굴은 사튀로스의 가면처럼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의 손은 여느 일요일보다 더 깨끗하게 보였다. 제혁공의 손치고는 너무나도 깨끗했다.

   과즙을 짜는 일터에 온 한스 키벤라트는 불안스러운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는 자신이 원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맨 처음 짠 과즙을 담은 잔이 건네졌다. 그것도 나숄트 집안의 리제에게서. 한스는 과즙의 맛을 보았다. 잔을 들고 마시는 동안에 달콤하고 강렬한 과즙의 맛과 더불어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가을의 즐거운 추억들이 미소지으며 되살아났다. 동시에 다시 한 번 어우러져 함께 즐기고 싶은 욕망이 살그머니 일어났다. 낯이 익은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고, 과즙을 담은 잔이 한스에게 여러차례 건네졌다. 플라이크의 압착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벌써 주위의 흥겨운 분위기와 여러 잔의 과즙이 그를 사로잡은 뒤였다. 한스는 기분이 전혀 달라져 있었다. 그는 매우 유쾌한 기분으로 구둣방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과즙에 얽힌 상투적인 농담을 몇 마디 늘어놓기도 했다. 장인 플라이크는 놀라움을 감추며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반 시간쯤 지날 무렵, 푸른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가 그리로 다가와서는 플라이크 아저씨와 어린 견습공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보냈다. 그러고는 과즙 짜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아, 참!

   아저씨가 말했다.

   여긴 하일브론에서 온 내 조카딸이란다. 이 아이의 고향에서는 물론 다른 수확제를 벌이지. 거기에서는 포도가 무척 많이 나거든.

   그녀는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되어보였다. 여는 저지대 출신처럼 몸놀림도 가볍고, 성격도 쾌활해 보였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풍만하고 균형잡힌 몸매였다. 동그란 얼굴에 검고 따뜻한 눈빛과 입맞추고 싶어지는 아리따운 입은 활달하고 영리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아무튼 그녀는 건강하고 명랑한 하일브론 아가씨처럼 보였지만, 아무래도 경건한 구둣방 아저씨의 친척으로는 여겨지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속세에 속한 존재였다. 그녀의 눈은 밤마다 버릇처럼 성경과 고스너의 보물상자를 읽는 사람의 눈은 아니었다.

   한스는 갑작스레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엠마가 빨리 가버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를 뜰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웃기도 하고, 재잘거리기도 하고, 어떤 농담이라도 재치있게 슬쩍 받아넘기는 것이었다. 한스는 부끄러운 나머지 그만 입을 꼭 다물고 말았다. <당신>이라는 존칭을 해야 하는 젊은 아가씨들과 사귄다는 것이 그에게는 어쩐지 끔찍하게 여겨졌다. 더군다나 이 아가씨는 지나치게 활달한 수다쟁이였다. 더욱이 그녀는 한스가 옆에 있거나, 그가 수줍어한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스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당황한 나머지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짐짓 싫증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방금 누군가가 죽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는 누구도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물론 엠마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한스가 듣기로 그녀는 2주일전부터 플라이크 아저씨 집에 놀러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벌써 온 마을 사람들을 다 사귄 터였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달려가 새로 짠 과즙을 맛보고, 잠시 익살을 부리며 웃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부지런히 일을 거드는 척하며 아이들을 안고 사과를 주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 주위에 흥겨운 웃음을 온통 퍼뜨리고 다녔다.

   가끔 지나가는 개구쟁이 아이들을 불러세우기도 했다.

   너 사과 먹을래?

  그러고는 잘익은 빨간 사과를 집어들고, 두 손을 등 뒤에 감춘 뒤에 알아맞히게 했다.

   오른손이게, 왼손이게?

   하지만 사과는 한 번도 아이들이 맞춘 손에 들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난 아이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사과 하나를 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자그마하고, 덜 익은 풋사과였다.

   그녀도 이미 한스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스에게 언제나 두통을 앓는 바로 그 사람이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한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벌써 옆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한스가 살그머니 집으로 도망치려고 할 때, 플라이크 아저씨는 그의 손에 지렛대를 쥐어주었다.

   자, 이제 조금만 더 해주게나. 엠마가 도와줄 거야. 난 작업장에 가봐야 하거든.

   구둣방 아저씨는 가버리고, 견습공이 플라이크 씨의 부인과 함께 과즙을 날라야 했다. 그래서 한스는 엠마와 단 둘이서 압착기 옆에 남게 되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미친 사람처럼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는 순간에 지렛대가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소녀 엠마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장난삼아 지렛대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 난 한스가 다시 한 번 잡아당겨보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버티고 서 있었다.

   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버티고 있는 지렛대를 돌리는 동안에 갑자기 부끄럽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지렛대를 돌리는 일을 천천히 멈췄다. 그는 달콤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젊은 아가씨가 뻔뻔스러울 정도로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자, 갑자기 그녀가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만 같았다. 더욱 다정하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낯선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스도 약간 어색하게 친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고 나서 지렛대는 완전히 멈추어 섰다.

   엠마가 말했다.

   너무 무리하진 맙시다.

   그러고는 한스에게 방금 마시고 남은, 과즙이 반쯤 담긴 잔을 건네주었다. 이 한 모금이 그에게는 앞서 마셨던 과즙보다 더 진하면서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한스는 잔에 든 과즙을 다 마시고 나서도 더 마시고 싶다는 듯이 빈 잔을 들여다보았다. 왜 심장의 고동이 심해지고, 호흡이 가빠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스커트가 자신의 몸에 스치고, 그녀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게 하기 위해 그녀에게 가까이 접근하려고 애쓰면서도, 한스는 지금 자기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그녀와 스칠 때마다 그의 심장은 두려움에 가득 찬 기쁨으로 인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달콤한 행복감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그의 무릎이 약간 떨리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뭔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도는 것 같은 현기증이 났다.

   한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녀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한스는 그녀가 웃을때면 같이 웃고, 그녀가 엉뚱한 소리를 할 때면 손가락을 내뻗으며 짐짓 겁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씩이나 그녀가 건네준 잔을 받아 과즙을 다 마셔버렸다. 이와 동시에 수많은 기억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녁 무렵에 사내들과 함께 현관 앞에 서 있던 하녀들, 이야기책에 나오는 두세 개의 문장, 수도원 시절에 헤르만 하일너에게서 받은 입맞춤, 그리고 <아가씨들>이나 <애인이 생기면 어떨까> 등에 대해 학생들 사이에 오가는 수많은 말과 이야기와 밀어들. 한스는 산에 오르는 노새처럼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모든 사물이 변해 있었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주위 사람들이 고운 빛깔을 띠고 미소짓는 구름 속으로 녹아들었다. 말하는 소리, 욕하는 소리, 웃는 소리 하나하나가 한데 어우러져 암울하게 울려 퍼지며 사라져갔다. 강물과 낡은 다리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련하게 보였다.

   엠마의 모습도 달라져 있었다. 한스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단지 검고 쾌활한 눈과 불그스레한 입술과 그 안으로 뾰족하게 드러난 하이얀 이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형체는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한스는 그저 하나 하나의 부분을 보고 있었다. 검은 양말을 신은 단화며 목덜미에 늘어뜨린 흐트러진 곱슬머리, 푸른 목도리 속에 감추어진 햇빛에 그을린 둥근 목덜미, 팽팽하게 당겨진 어깨의 옷매무새, 그 아래로 파도치는 숨겨, 붉은 빛으로 투명하게 내비치는 귀.

   얼마 뒤에 엠마는 손잡이가 달린 통 속으로 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잔을 집어올리려고 몸을 굽히다가 그녀의 무릎이 통의 모서리에 눌려 한스의 손목에 닿았다. 한스도 천천히 몸을 굽혀 얼굴이 거의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을 뻔했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은은한 향내가 풍겼다. 그 아래로 흐트러진 곱슬머리의 그림자 속에 갈색의 고운 목덜미가 따스한 온기르 내며 푸른 코르셋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목덜미는 단단하게 채워진 고리의 틈새로 살짝 드러나 있었다.

   엠마가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의 무릎이 한스의 팔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고, 그녀의 머리가 그의 뺨을 스쳤다. 그녀는 몸을 굽히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따. 한스는 온몸에 강한 전율을 느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갑자기 깊숙하게 밀려드는 피로감 때문에 압착기의 조이개를 꽉 잡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심장은 경련을 일으키듯이 뛰놀았다. 팔에는 힘이 빠지고, 어깨가 아파왔다.

   이때부터 한스는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 소녀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그 대신에 그녀가 다른 곳을 바라볼 때면, 아직 맛보지 못한 쾌감과 꺼림칙한 양심의 가책이 뒤섞인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순간에 그의 내면에서는 무엇인가가 끊어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멀리 푸른 해안을 따라 자신을 유혹하는 새롭고 낯선 땅이 그의 영혼 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저 어렴풋이 예감할 뿐이었다. 그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안과 달콤한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뇌와 환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하지만 그의 쾌락은 참신한 사랑의 힘, 그리고 생동감이 넘치는 생명에 대한 최초의 예감을 의미했다. 그의 고통은 아침의 평화가 깨어지고, 자신의 영혼이 두 번 다시 찾지 못할 어린 시절의 세계를 이미 떠나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난파를 간신히 벗어난 한스의 가벼운 조각배는 이제 새로운 폭풍과 입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심연, 그리고 극도로 위험한 암초에 점점 가까이 빠져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올바른 지도를 받아온 젊은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안내자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때마침 구둣방의 어린 견습공이 다시 돌아와 압착기의 일을 교대해 주었다. 한스는 엠마의 손이 닿거나, 그녀가 다정하게 말 한 마디라도 건네주기를 기다리며 잠시 더 거기에 머물렀다. 그녀는 다른 압착기마다 찾아다니며 열심히 재잘거리고 있었다. 한스는 견습공 앞에서 공연히 부끄러운 생각이 든 나머지 작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다르게 변해 있었다.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과즙 찌꺼기를 먹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참새들은 요란스럽게 지저귀며 쏜살같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하늘이 이처럼 높고, 아름답고, 그리움으로 푸르게 물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강물이 이다지도 맑고, 청록색의 거울처럼 미소짓던 적이 없었다. 둑이 이리도 눈이 부시리만치 하이얀 거품을 내뿜은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장식을 두른 그림처럼 새로이 그려져 투명하고, 산뜻한 유리판 뒤에 세워진 듯이 보였다. 또한 모든 것이 한바탕 축제가 벌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스는 가슴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굳건한 감정과 처음 느껴보는 눈부신 희망의 파도가 세차게, 불안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굽이쳤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단지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겁에 질린 절망적인 불안감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희미하게 솟구치는 샘물이 되어 있었다. 몹시도 강렬한 그 무엇이 한스의 가슴 깊숙이 묶여진 사슬을 끊고, 자유를 만끽하려는 듯했다. 그것은 아마도 흐느낌이거나 노래거나 부르짖음이거나, 아니면 떠들썩한 웃음이었을 것이다. 이 흥분된 감정은 겨우 집에 돌아와서야 조금 가라앉았다. 집에서는 물론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딜 갔다오는 거니?

   기벤라트 씨가 물었다.

   플라이크 아저씨네 방앗간에요.

   그래, 그 아저씬 과즙을 얼마나 짰더냐?

   두 통쯤요.

   한스는 과즙 짜기를 하게 되면, 플라이크 아저씨의 아이들을 부르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물론이지 아버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다음주에 짤 거니까, 그 아이들을 모두 데려오도록 해!

   저녁 식사를 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한스는 뜰로 나갔다. 두 그루의 잣나무 이외에 푸른 것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스는 개암나무 가지를 하나 꺽어 허공에 휘둘러대며 시들어버린 잎사귀들을 마구 쳐 흩날리게 했다. 해는 벌써 산자락 뒤로 숨어버렸다.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잣나무의 우듬지가 솟아 있는 검푸른 산세는 촉촉하게 스며드는 초록빛의 맑은 저녁 하늘을 갈라놓았다. 길게 뻗은 잿빛의 구름은 황갈색으로 달아오른 채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처럼 한가롭고 즐거운 모습으로 금빛의 엷은 허공을 가르며 골짜기 아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아름다운 색깔로 무르익은 저녁 노을에 취한 나머지 한스는 하릴없이 뜰을 거닐고 있었다. 이따금 멈취 서서는 눈을 감고, 엠마의 모습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압착기 옆에서 마주 서 있던 모습, 그녀의 잔에 든 과즙을 마시게 해주던 모습, 커다란 통 위로 몸을 굽혔다가 일어설 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 그녀의 머리카락이며 꽉 달라붙는 푸른 옷 속에 내비친 그녀의 몸매며 그녀의 목, 검은 머리에 덮여 갈색으로 그늘진 그녀의 목덜미, 이 모든 것들이 그를 황홀한 전율에 몸부림치게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얼굴만은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미 해가 저문 뒤에도 한스는 서늘한 냉기를 느끼지 않았다. 깊어가는 황혼은 이름조차 모르는 베일에 가린 은밀한 비밀처럼 여겨졌다. 한스는 자신이 하일브론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한 남성다운 혈기가 그저 낯설고, 초조하고, 피곤하기만 한 상태로 어렴풋이 이해될 뿐이었다.

   저녁 식사 때, 한스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익숙해져 있는 환경 한가운데 자신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버지와 늙은 하녀, 식탁, 그리고 방안에 있는 모든 세간살이들이 갑자기 낡아빠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마치 긴 여행에서 방금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놀랍고, 서먹하면서도 다정스러운 느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죽음을 부르는 나뭇가지에 추파를 던질 때만해도 한스는 작별을 고하는 자의 애절한 우월감을 가지고, 지금과 다름없는 사람들과 사물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금 과거로 되돌아와 놀라움에 미소지으며 잃었던 현실을 되찾은 것이다.

   식사를 마친 뒤 한스가 일어서려고 할 때, 아버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게 말을 꺼냈다.

   한스야, 너 기계공이 되고 싶니, 서기가 되고 싶니?

   왜요?

   한스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다음 주말에 기계공 슐러 씨에게 가보든지, 아니면 그 다음주에 관청에 들어가 견습을 하든지 할 수 있을 거야. 한 번 잘 생각해 보려무나! 그런 다음에 내일 다시 얘기해 보자꾸나

   한스는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질문이 그를 당혹스럽고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생기에 넘치고 활동적인 일상적 삶이 전혀 예기치 않게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여러 달 전부터 낯설게 되어버린 일상적인 삶은 유혹하는 듯한 얼굴과 위협하는 듯한 얼굴로 약속하기도 하고, 강요하기도 했다. 애당초 한스는 기계공이나 서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손으로 하는 힘든 육체노동을 약간 두려워하던 터였다. 이때, 지금은 기계공이 되어 있는 학교 친구 아우구스트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스는 그에게 이 일에 대해 물어보리라고 마음먹었다.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동안, 한스는 점점 더 침울해지고,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다지 급하거나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대신에 무언가 다른 일이 그를 바쁘게 몰아댔다. 한스는 불안한 마음으로 현관 복도를 이리저리 오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자를 집어들더니 집을 나와 천천히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한 번 더 엠마를 만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가까운 주점에서는 고함 소리와 목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창문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하나씩 불이 켜지며 희미한 붉은 빛을 어두운 밤공기에 내비치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들이 손에 손을 잡고, 떼를 지어 큰 소리로 떠들거나 웃으며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이들은 희미한 불빛에 흔들거리며 졸린 듯이 가물대는 거리를 젊음과 기쁨이 넘쳐흐르는 따사로운 물결처럼 걸어갔다. 한스는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의 고동이 목구멍에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뒤에서 누군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우물가에는 어느 여인이 상치를 씻고 있었다.

   다리 위에서 여자 친구와 함께 산책하고 있는 두 사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사내는 자기 여자 친구의 손을 살며시 잡아 흔들며 여송연을 피우고 있었다. 다른 젊은 쌍은 서로 바짝 달라붙은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허리를 감싸고, 여자는 자신의 어깨와 머리를 그의 가슴에 푹 파묻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스는 이러한 광경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막 그것이 은밀한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어렴풋하게나마 욕정을 자극하는 달콤한 의미를 품고 있었다. 한스의 시선은 이들에게 머물렀다. 그는 가까이서 손짓하는 이해의 지평선을 향해 상상의 날개를 폈다. 그의 가슴은 답답해지고, 깊숙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커다란 비밀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감미로운 것인지, 아니면 두려운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들 가운데 무언가를 떨리는 가슴으로 예감하고 있었다.

   한스는 플라이크 아저씨 집 앞에서 멈추어 섰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설혹 들어간다 하더라도 거기서 무엇을 하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한스는 열한두 살의 어린 소년 시절에 종종 여기에 놀러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플라이크 아저씨는 그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한스가 지옥이나 악마나 성령에 대해 호기심어린 질문을 끊임없이 퍼부을 때에도 아저씨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러한 기억들이 한스에게 그다지 편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조차 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출입이 금지된 비밀스러운 세계 앞에 자신이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어둠에 쌓인 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자신이 구둣방 아저씨를 모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아저씨가 여기 서 있는 한스의 모습을 본다든지, 또는 지금이라도 문 밖으로 나온다든지 한다면, 한스를 야단치기보다는 그저 비웃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한스에게는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살그머니 집 뒤로 돌아간 한스는 뜰의 울타리 너머로 불이 켜져 있는 거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구둣방 아저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큰아들은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엠마는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방을 청소하느라 분주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잠시 언뜻 눈에 비칠 뿐이었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멀리 떨어진 골목길의 발자국 소리와 정원 저편에서 잔잔히 흐르는 냇물 소리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밤공기는 더욱 서늘해졌다.

   거실의 창문 옆에는 어둠에 가린 채 복도에 딸린 자그마한 창문이 나 있었다.

  한참 뒤에 이 창문으로 희미한 물체가 나타나더니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한스는 그 형체가 엠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불안스러운 기대에 못 이겨 심장의 고동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한참이나 한스가 있는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스는 그녀가 자신을 보았거나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꼼짝도하지 않고 그녀 쪽을 향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자기를 알아볼지 모른다는 기대와 불안에 떨면서.

   희미한 형체가 다시 창가에서 사라지더니 이내 정원으로 난 작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엠마가 집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 한스는 당황한 나머지 도망치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꾸물대다가 그냥 울타리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어두운 뜰을 가로질러 자기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자기에게로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한스는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더욱더 강한 미지의 힘이 그를 붙잡는 것이었다.

   엠마는 그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단지 나지막한 울타리가 반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한스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두 사람 모두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너,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아냐.

   그녀가 한스에게 <너>라고 불렀을 때, 그는 마치 그녀의 손이 자신의 살갗을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엠마는 울타리 너머로 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수줍어하면서도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는 약간 힘을 주어보았다. 그녀가 전혀 손을 빼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용기를 내어 그녀의 따뜻한 손을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가 여전히 기꺼운 듯이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자,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대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흥분과 야릇한 체온, 그리고 행복한 나른함이 밀어닥쳤다. 그를 에워싼 공기는 어쩐지 미지근하기도 하고, 끈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골목길도 정원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바로 앞에 있는 그녀의 밝은 얼굴과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마치 머나먼 밤하늘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한테 뽀뽀해 주겠니?

   그녀의 밝은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몸으로 내리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울타리를 두른 나뭇가지들이 약간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은은한 향내를 풍기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한스의 이마를 스쳤다. 넓게 퍼진 하얀 눈꺼풀과 까만 속눈썹으로 덮힌 그녀의 눈은 살며시 감긴 채 바로 한스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수줍은 듯이 내민 한스의 입술이 그 소녀의 입에 닿았을 때, 강렬한 전율이 그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이 순간, 그는 또다시 부르르 떨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는 한스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그녀의 얼굴을 그의 얼굴에 들이밀며 그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다. 한스는 그녀의 입술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치 한스의 생명을 삼켜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의 입이 자신의 입을 내리누르며 탐욕스럽게 빨아대는 것이었다. 한스는 나락에 빠져드는 듯한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낯선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그처럼 전율에 휩싸인 환희는 견디기 힘든 피곤과 고통으로 변해 있었다. 엠마가 그의 입술을 자유롭게 놓아주었을 때, 한스는 비트적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손가락으로 울타리를 꼬옥 붙들었다.

   얘, 내일 저녁에 다시 와!

   엠마가 말했다. 그러고는 집안으로 재빨리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들어간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한스에게는 무척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여전히 울타리를 붙들고, 그녀가 사라진 뒤안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그는 자신의 피가 머릿속에서 쿵쾅거리며 맥박치는 소리를 들었다. 고통에 겨워 고르지 않게 물결치는 심장의 파도가 다시 넘쳐흘렀다. 금방이라도 호흡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때 막 방문이 열리더니 구둣방 아저씨가 들어섰다. 늦게까지 작업장에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자기를 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한스는 즉시 도망쳐 버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내키지도 않는 걸음을 느릿느릿 옮기고 있었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쓰러질 것만 같았다. 졸린 듯한 박공과 붉은색의 음침한 창문이 있는 어두침침한 골목길은 마치 색이 바랜 무대의 배경처럼 그의 곁을 흘러 지나갔다. 다리와 강물, 뜰과 정원도 함께 흘러갔다. 게르버 거리의 분수는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음색으로 울리면서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꿈에 사로잡힌 한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을 열고, 칠흑처럼 어두운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다른 문을 지나 또 다른 문을 여닫고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한참 뒤에야 자기 집에 돌아와 자기 방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을 벗기로 마음먹기까지는 또다시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스는 옷을 벗은 채 멍하니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가을밤의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떨며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한스는 이내 잠에 빠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운 뒤에 몸이 조금 따뜻해지자, 심장이 뛰기 시작하더니 피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거칠게 끓어올랐다. 눈을 감으니 그 소녀의 입이 아직도 자신의 입에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영혼을 송두리째 빨아내고는 그 속에 고통스러운 열정을 불어넣으려는 듯이.

   밤늦게서야 한스는 잠이 들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꿈에서 꿈으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깊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는 주위를 더듬어 엠마의 팔을 잡았다. 그녀가 그를 껴안자, 두 사람은 포근하고 깊은 물결을 타고 천천히 가라앉았다. 갑자기 구둣방 아저씨가 나타나서 한스에게 왜 찾아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때, 한스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은 플라이크 아저씨가 아니라, 망룰브론의 기도실 창가에 걸터앉아 익살을 부리던 헤르만 하일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광경도 곧 사라져버렸다.

   이제 한스는 과즙을 짜는 압착기 옆에 서 있었다. 엠마는 지렛대가 움직이지 못하게 버티고 있었고, 한스는 지렛대를 돌리려고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녀는 한스에게로 몸을 굽힌 채 그의 입술을 찾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적막과 어둠에 휩싸여 버렸다. 그는 또다시 따뜻하고 어두운 심연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와 동시에 교장선생의 연설이 들려왔다. 그것이 한스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한스는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다. 무척이나 화창한 날씨였다. 그는 오랫동안 뜰을 거닐며 잠을 떨치고 머리를 맑게 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졸음의 안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정원에 홀로 피어 있는 보라색의 과꽃이 햇빛을 받으며 아름답게 미소짓고 있었다. 마치 지금이 8월이기라도 한 듯이. 따스하고 포근한 햇살이 이미 시들어버린 가지들과 잎이 진 덩굴 주위로 다정하게 응석을 부리며 흘러내렸다. 마치 이른 봄날처럼, 하지만 한스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무것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또 이 모든 것이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문득 여기 이 정원에서 자신이 키우던 토끼가 뛰놀고,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절구가 움직이던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 뚜렷하면서도 강렬하게 한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3년 전, 9월의 어느 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세당(프랑스 동부에 는 도시의 이름. 1870년에 독일군이 프랑스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곳이다.) 축제일의 하루 전날이었다. 아우구스트가 담쟁이 덩굴을 가지고 한스에게로 왔다. 이들은 윤이 날 정도로 깃대를 깨끗이 닦은 다음, 황금빛의 꼭대기 위에 담쟁이를 달아매었다. 그러고는 내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소년 모두 축제에 대한 기대와 커다란 기쁨에 넘쳐 있었다. 깃발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안나 할머니는 자두를 넣은 과자를 굽고 있었다. 밤에는 높은 바위 위에서 세당의 불이 타오르게 되어 있었다.

   한스는 왜 하필이면 오늘 그날 밤이 생각나는지, 왜 그 추억이 이처럼 아름답고 강렬한지, 왜 그 추억이 자신을 이다지도 비참하고 슬프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별을 고하기 위하여, 이미 흘러가 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큰 행복의 가시바늘을 남기기 위하여 자신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이 추억의 옷을 입고 즐겁게 미소지으며 자기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단지 그는 이 추억이 어젯밤에 있었던 엠마에 대한 기억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옛날의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다시 깃대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보이고, 친구 아우구스트가 웃는 소리가 들리고, 갓 구운 과자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했건만, 이제는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전혀 낯선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한스는 껍질이 거친 아름드리 잣나무에 기대어 절망에 싸인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 눈물도 그에게 순간의 위안과 구원을 줄 뿐이었다.

   점심 때, 한스는 아우구스트에게 달려갔다. 이미 일급 견습공이 되어 있는 친구는 예전보다 살도 찌고, 키도 컸다. 한스는 그에게 자신의 관심사를 이야기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는 세상물정을 잘 아는 사람같은 얼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쉬운 일이 아니라구. 어쨌든 넌 약골이잖니. 우선 처음 일 년간은 쇠를 단련하면서 지겹도록 망치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망치가 국이나 떠먹는 숟가락은 아니란 말야. 그리고 쇠를 이리저리 날라야 하고, 저녁엔 일이 끝나는 대로 뒷정리도 해야한다고. 줄질을 하는 데도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냐. 게다가 처음엔 웬만큼 익숙하게 될 때까지 잘 들지도 않는 낡은 줄밖에 주지 않는다구. 그건 원숭이의 궁둥이처럼 매끄럽단다.

   한스는 금세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래, 그럼 난 그만둬야 할까봐?

   그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냐! 벌써 겁을 먹으면 어떡하니! 난 그저 우리 일터가 춤이나 추는 무도장과는 다르다는 얘기를 했을 뿐이야. 그 외에 뭐 그래, 기계공이란 정말 멋진 거라고. 머리도 좋아야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그저 형편없는 대장장이에 그치고 말지. 여길 한 번 봐!

   아우구스트는 번질번질한 쇠로 정교하게 구워 만든 자그마한 기계 부품들을 두세 개 가져와서는 한스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반 밀리미터도 어긋나면 안 되는 거야. 모든 게 손으로 만든 거라고. 나사까지 말야.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이걸 좀 더 갈아서 단단하게 만들면 되는 거지

   그래, 정말 멋지구나. 내가 알고 싶은 건...

   아우구스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 겁나니? 그래, 물론 견습 시절은 괴로운 법이지. 어쩔 도리가 없는 거라고. 하지만 내가 옆에 있잖니! 걱정하지 마, 도와줄 테니까. 네가 다음주 금요일에 일을 시작하면, 난 마침 2년의 견습 생활을 마치고 토요일에 처음으로 주급을 받게 되거든. 그럼 일요일엔 축하 모임을 가질 생각이야. 맥주도 있고, 과자도 있고, 사람들고 모두 올 거야. 너도 와야 해! 그래야지 우리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알 수 있구말구! 어쨌든 우린 예전에 아주 좋은 친구였잖니.

   식탁에서 한스는 아버지에게 기계공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 주일 뒤에 시작해도 좋은지 물어보았다.

   그래, 좋다 아버지가 말했다. 오후에는 한스를 데리고 슐러의 작업장으로 가서 견습을 위한 신청을 했다.

   하지만 땅거미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자, 한스는 이 모든 것들을 거의 잊어버리고 말았다. 오늘 밤에 엠마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벌써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때로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스는 마치 강여울로 배를 몰아가는 사공처럼 엠마와의 만남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오늘 밤에는 식사 따위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우유 한 잔을 마시기가 무섭게 밖으로 나갔다.

   모든 것이 어제와 다름없었다. 졸음에 잠겨 있는 어두운 골목길, 불 꺼진 창문,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한가로이 거니는 연인들.

   구둣방 아저씨의 정원 울타리에 다다른 한스는 커다란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어둠 속에 서서 남몰래 주위를 살피는 자신의 모습이 영락없이 도둑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1분도 채 기다리지 않아 엠마가 한스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정원 문을 열어주었다. 한스는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그녀는 덤불로 둘러싸인 길을 지나 뒷문을 통하여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한스를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들은 지하실의 맨 위에 있는 층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때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소녀는 기분이 좋았는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이미 그녀는 여러 차례나 키스한 경험이 있었을뿐 아니라, 연애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수줍고 연약한 소년 한스가 그녀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한스의 가느다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이마와 눈, 그리고 빰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이 그의 입술에 닿고, 그녀가 빨아들이는 듯한 키스를 한참이나 해대자, 한스는 현기증을 느낀 나머지 축 늘어진 채 맥없이 그녀에게 기대고 말았다. 그녀는 소리로 웃으며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쉴새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한스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스의 팔과 머리카락, 목과 두 손을 가볍게 어루만지고는 자기 뺨을 그의 뺨에, 자기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그녀가 하는 대로 자신을 내맡겼다. 달콤한 전율과 행복한 불안이 그를 휘감았다. 이따금씩 열병을 앓는 환자처럼 가냘프게 몸을 떨기도 했다.

   넌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애인이야!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너무 겁이 많은 거 아니니!

   그녀는 자기 목덜미와 머리카락으로 한스의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자기 가슴 위에 가볍게 내리눌렀다. 그는 부드러운 곡선이 달콤하면서도 낯설게 물결치는 것을 느꼈다. 두 눈을 감은 채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만! 이제 그만해!

   그녀가 또다시 키스하려고 하자, 한스는 뿌리치듯이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그녀는 그를 두 팔로 껴안아 자기 옆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한스는 그녀의 몸에 닿자마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 날 좋아하는 거니?

   그녀가 물었다.

   그는 그렇다는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잡고는 장난치듯이 자기 코르셋 아래로 그의 손을 밀어넣었다. 한스는 아주 가까이서 낯선 생명의 맥박과 호흡을 뜨겁게 느꼈다. 심장의 고동이 멎고, 죽을 지경으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어졌다.

   한스는 자기 손을 부리치며 신음하듯이 말했다. 이젠 집에 가봐야 돼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다가 하마터면 지하실의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왜 그래?

   엠마가 놀라서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너무 피곤해

   한스는 그녀가 정원 울타리까지 자기를 꽉 껴안고, 부축해 주었다는 사실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작별 인사를 하는 소리도, 그의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떻게 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마치 커다란 폭풍우가 자신을 휩쓸고 가는 것 같기도 하고, 거센 물결이 흔들거리며 자신을 데려가는 것 같기도 했다.

   한스는 좌우로 희미한 등불이 가물거리는 집들을 보았다. 그 위로는 산등성이와 잣나무의 우듬지, 검게 물든 밤의 어둠, 그리고 조용히 흐르는 커다란 별들이 보였다. 그는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강물이 다리 기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또한 수면위로 정원이며, 희미한 집들, 밤의 어둠, 가로등과 별들이 비치는 모습을 보았다.

   다리위에서 한스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나도 피곤한 나머지 어쩌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난간에 걸터앉아 강물이 다리 기둥에 부딪히는 소리와 둑에서 거품이 이는 소리, 그리고 물레방아가 도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손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가슴과 목구멍에서는 피가 막혀 있다가 갑자기 터져나왔다.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했다. 피가 다시 심장을 향해 용솟음칠 때는 어지러웠다.

   한스는 집에 돌아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눕자마자 곧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그는 어마어마한 공간을 넘나들며 심연에서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한밤중에는 괴로움에 지친 나머지 눈을 떴다. 그러고는 아침까지 꿈과 현실 가운데 몽롱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목이 마르게 애닯은 그리움에 지쳐 억누를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리 저리 내동댕이쳐진 채. 이른 새벽이 되어 그의 고통과 번민이 끝없는 흐느낌으로 터져나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눈물에 흠뻑 젖은 이불 위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기벤라트 씨는 과즙을 짜는 압착기 옆에서 짐짓 의젓하게 야단법석을 떨며 바쁘게 움직였다. 한스도 일을 거들어 주었다. 구둣방 아저씨의 아이들 가운데 두 아이만이 와서 분주하게 과일을 나르고 있었다. 이들은 시음을 위한 자그마한 유리잔과 더불어 큼지막한 검은 빵을 손에 들고 다녔다. 하지만 엠마는 보이지 않았다. 자그마한 유리잔과 더불어 큼지막한 검은 빵을 손에 들고 다녔다. 하지만 엠마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술통을 들고 나가 반 시간이나 자리를 비웠다. 한스는 그제서야 용기를 내어 그녀에 대해 물어보았다.

   엠마는 어디에 있니? 오고 싶지 않다던?

   아이들은 먹거리를 입안에 잔뜩 집어넣고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누난 벌써 떠나버렸는걸/

   아이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떠났다구? 어디로?

   고향으로.

   아주 떠나버린거니? 기차로?

   아이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댔다.

   도대체 언제?

   오늘 아침에.

   다시금 아이들은 사과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한스는 압착기를 돌리며 과즙이 담겨 있는 통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이제야 모든 일들이 어렴풋하게나마 차츰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다. 모두들 즐거운 기분으로 일에 매달렸다. 아이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저녁이 되어 모두 다 집으로 향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한스는 자기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10시가 되고11시가 되었지만, 불은 켜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에 길고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느때 보다 늦게 눈을 떴을 때, 그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나머지 불행에 빠지고 말았다는 막연한 느낌에 사로 잡혔다. 엠마의 일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것이다. 한스가 어젯밤에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벌써 언제 떠날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미소와 입맞춤, 그리고 그녀의 능숙한 몸놀림을 떠올려보았다. 그녀는 한스를 전혀 진실된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다.

   분노에 찬 고통과 더불어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사랑의 힘은 흥분과 불안에 감싸인 채 음울한 번민으로 바뀌었다. 한스는 집에서 정원으로, 정원에서 거리로, 거리에서 숲으로, 그리고 다시 숲에서 집으로 헤매며 다녔다.

   이렇게 해서 한스는 자신 속에 숨겨져 있던 사랑의 비밀을 너무나도 빨리 알고 말았다. 그것은 달콤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쓰디쓴 맛이었다. 부질없는 탄식과 그리운 추억, 그리고 암울한 사색으로 물든 나날들, 숨가쁜 심장의 고동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무서운 꿈결로 빠져 드는 밤의 연속. 꿈 속에서는 피가 이상하리만치 격렬하게 끓어올라 끔찍스러운 거대한 괴물이 되기도 하고, 목을 휘감아 죽음을 부르는 팔이 되기도 하고, 불타는 눈빛을 지닌 환상의 짐승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심연이 되기도 하고, 이글거리는 커다란 눈이 되기도 했다. 한스는 잠에서 깨어 홀로 싸늘한 가을밤의 고독에 사로잡힌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엠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치다가 눈물로 뒤범벅이 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한스가 작업장으로 들어가야 할 금요일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한스에게 아마포로 만든 푸른 작업복과 반 모직의 푸른 모자를 사주었다. 한스는 한 번 입어보았지만, 대장장이의 작업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학교며 교장 선생이나 수학 선생의 사택, 플라이크아저씨의 일터, 혹은 목사관을 지날 때에 무척이나 비참한 느낌이 들 것만 같았다. 공부에 흘림 숱한 땀과 눈물, 공부를 위하여 억눌러야 했던 자그마한 기쁨들, 자부심과 공명심, 그리고 희망에 넘치는 꿈도 이제는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이 모두가 다른 학교 친구들보다 뒤늦게 하찮은 견습공이 되어 주위 사람들의 놀림을 받으며 작업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란 말인가! 만일 이 일을 하일너가 알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한스는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푸른 대장장이의 작업복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옷을 처음으로 입어보게 될 금요일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거기서는 적어도 새로운 체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도 검은 그름 속에서 잠시 빛나는 섬광처럼 곧 사라져버렸다. 한스는 엠마가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끝내 잊지 못했다. 그의 피는 소녀와 나눈 흥분의 시간들을 잊지도 못하고, 이겨낼 수도 없었다. 그의 피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다시금 눈뜬 그리움을 채우기 위하여 아우성치며 솟구쳐 올랐다. 시간은 그렇게 고통에 싸여 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올 가을은 여느 해보다 유난히 더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햇살과, 은빛 새벽, 한낮의 화창한 미소, 맑은 저녁 하늘을 누릴 수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우단같은 짙은 푸른 색을 띄었다. 밤나무들은 황금빛으로 빛났고, 담과 울타리 위에는 야생포도의 잎사귀들이 보랏빛을 드리웠다.

   한스는 불안에 싸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발버둥쳤다. 하루 종일 시내와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상사병을 사람들이 눈치챌까 두려웠다. 하지만 저녁에는 골목길로 나가 하녀들을 쳐다보기도 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젊은 연인들의 뒤꽁무니를 살금살금 쫓기도 했다. 인생의 모든 매혹적인 욕망이 엠마와 함께 다가왔다가 심술궂게도 그녀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한스는 그녀의 곁에서 느껴야 했던 고통과 불안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만일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녀의 숨겨진 모든 비밀을 밝히고, 마법에 걸려 있는 사랑의 정원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동산의 문은 지금 한스 앞에서 굳게 닫히고 말았다. 그의 환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후텁지근한 숲 속으로 얽혀 들고, 그 곳에서 절망에 쌓인 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자학에 빠져 든 한스는 이 좁은 마술 세계의 바깥에 아름답고 넓다란 세계가 환하고 다정하게 놓여 있다는 사실을 굳이 모른 척 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금요일이 마침내 다가왔다. 지금 한스는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푸른 작업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게르버 거리를 따라 일터로 향했다. 한스를 아는 사람들은 더러 호기심어린 논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기까지 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너 대장장이가 된 거니?

   작업장에서는 벌써 멋들어지게 일이 돌아가고 있었다. 주인은 마침 쇠를 단련하고 있었다. 그가 빨갛게 달군 쇠를 모루 위에 올려놓자, 옆에 있는 숙련공이 묵직한 망치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주인은 틀을 제대로 짜맞추기 위하여 가볍게 두들겼다. 그는 집게를 자유자재로 놀리며 손에 맞는 망치를 들고는 사이사이에 모루를 치며 박자를 맞추었다. 그 소리는 활짝 열어 젖힌 문을 통하여 아침거리로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기름과 줄밥으로 새까매진 긴 작업대에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숙련공과 아우그스트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들은 자기 몫의 나선대에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천장에는 선반과 숫돌, 풀무와 천공기를 움직이는 가죽 벨트가 윙윙 하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고 있었다. 그것은 수력을 이용한 작업이었다.

   아우구스트는 작업장에 들어선 친구를 향하여 고래를 끄덕여 보이고는 주인이 짬이 날 때까지 문에서 기다리라고 눈짓을 보냈다.

   한스는 줄과 멈춰 있는 선반, 돌고 있는 가죽 벨트, 공전반 등을 수줍은 듯이 쳐다보았다.

   주인은 방금 전에 하던 일을 마치고 한스에게로 다가와 쇠를 달구느라 달아오른 딱딱하고 큼지막한 손을 내밀었다.

   저기에 네 모자를 걸도록 해라.

   주인은 벽에 박힌 빈 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리 와봐. 여기가 네 자리고, 이건 네 나선대란다

   그는 한스를 맨 뒤에 있는 나선대로 데리고 있다. 그리고 나선대를 다루는 법, 작업 도구와 작업대를 정돈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네가 힘센 장사가 아니라는 건, 벌써 네 아버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구나. 그래, 좀더 힘이 세어질 때까지는 당분간 망치질을 하지 않아도 좋다.

   주인은 작업대 밑으로 손을 넣고 주철로 만든 톱니바퀴를 끄집어내었다.

   자, 이걸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 이제 막 주조한 거라 바퀴가 아직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았단다. 여기저기 울퉁불퉁하고, 모가 나 있는데, 그걸 갈아내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정밀한 기계 부품이 다 망가지고 말거든.

   주인은 톱니바퀴를 나선대에 끼우고, 다 낡아빠진 줄을 손에 들고는 어떻게 하는지 시범을 보여주었다.

   자, 이젠 네가 계속하도록 해라. 절대 다른 줄을 써서는 안 돼! 점심 때 까진 충분한 일거리가 될 거야. 끝나거든 나한테 보여주렴. 일할 땐 시키는 일 외엔 다른 일에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단다. 견습공이란 딴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한스는 줄질을 시작했다.

   잠깐!

   주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하는 게 아냐. 왼손은 이렇게 줄 위에다 올려놓는 거라구. 너 혹시 왼손잡이니?

   아녜요.

   그럼, 좋다. 이젠 될 거야

   주인은 문 가에서 가장 가깝게 놓여 있는 나선대로 되돌아갔다. 한스는 자신이 과연 잘할 수 있을지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처음에 여러 차례 문질러보니 놀랍게도 톱니바퀴가 생각보다 부드럽고, 무척 수월하게 벗겨져 나갔다. 하지만 느슨하게 벗겨지는 것은 단지 주철의 맨 바깥에 있는 부서지기 쉬운 표피일 뿐, 매끄럽게 밀어야 할 단단한 쇠는 그 밑에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한스는 정신을 가다듬고, 열심히 일을 계속해 나갔다. 소년 시절의 장난기어린 놀이를 그만둔 뒤로 이제껏 무엇인가 눈에 드러나는 유익한 물건을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기쁨을 맛본 적이 없었다.

   좀더 천천히 해라!

   주인이 한스를 향하여 소리쳤다.

   줄질을 할 땐 박자를 맞춰서 하는 거라구. 하나, 둘, 하나, 둘. 그리고 거길 잘 눌러야 돼. 그렇지 않으면 줄이 못 쓰게 되거든.

   조금 나이가 들어보이는 숙련공이 선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스는 궁금한 나머지 살짝 곁눈질을 해보았다. 그 숙련공은 강철로 만든 굴대를 원반에 기우고 벨트를 걸었다. 굴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또 불꽃을 튀기며 빠르게 돌았다. 그 사이에 숙련공은 털같이 얇은, 번쩍거리는 쇠부스러기를 털어내었다.

   작업 도구며 쇳덩어리, 강철과 놋쇠, 하다 만 일거리, 번들거리는 작은 바퀴, 끌과 천공기, 회전 철구 여러 형태의 송곳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화로 옆에는 망치와 다듬는 망치, 모루 덮개, 집게와 납땜 인두가 걸려 있었다. 줄과 프레이즈반은 벽을 따라 늘어져 있었다. 또한 선반 위에는 기름걸레와 자그마한 비, 사포줄, 쇠톱 등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기름 통과 산소 통, 못 상자, 나사 상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여기서는 언제나 숫돌이 쓰였다.

   한스는 제법 새까매진 자신의 손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압은 옷은 다른 동료들이 기워 입을 시꺼먼 작업복에 비하면 아직까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새파랗게 보였다. 한스는 자기 옷도 머지않아 그처럼 다 낡아빠진 옷이 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아침 시간이 지나면서 작업장 안은 손님들로 차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는 편물 공장에서는 자그마한 기계 부품을 갈거나 고쳐 가기 위하여 직공들이 찾아왔다. 어느 시골 농부는 수리를 위하여 맡겨두었던 세탁기의 압착 롤러가 다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듣고는 한바탕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 뒤로 점잖아 보이는 공장 주인이 찾아와 한스의 주인과 옆방에서 상담을 나누었다.

   그 사이에도 사람들은 일을 계속했다. 바퀴나 벨트도 규칙적으로 돌고 있었다. 한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동의 찬가를 듣고 또 이해했다. 그것은 적어도 초보자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고, 산뜻한 매력을 풍기는 것이었다. 한스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와 인생이 커다란 선율에 어우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9시에는 15분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모두들 빵 한 조각과 즙 한 잔을 받아들었다. 그제서야 아우그스트는 새로 온 견습공 한스에게 인사를 건네며 용기를 북돋아주려고 했다. 그러고는 다가오는 일요일에 대하여 정신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날에 아우그스트는 자신이 처음 받게 되는 주급을 동료들과 함께 마음껏 써보려고 작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한스는 지금 자신이 줄로 갈고 있는 바퀴가 무엇에 쓰이는 부품인지 물어보았다. 아우그스트는 그것이 탑시계에 들어갈 톱니바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돌아가고 작동되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때마침 수석 숙련공이 다시 줄질을 시작했기 때문에 모두들 재빨리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10시와 11시 사이에 한스는 지치기 시작했다. 무릎과 오른팔이 약간 아파왔다. 다리를 바꾸어 딛고, 살그머니 팔다리를 뻗어보았다. 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모했다. 그래서 줄을 잠시 내려놓고는 나선대에 몸을 기대어보았다. 아무도 한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게 선 채로 휴식을 취하며 자기 머리 위로 벨트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볍게 현기증이 일었다. 그래서 1분 가량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 주인이 한스 뒤에 서 있었다.

   아니, 무슨 일이냐? 벌써 지쳤니?

   예, 좀 피곤해요.

   한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옆에서 직공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곧 괜찮아질 거야.

   주인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번엔 납땜하는 걸 보여주지. 이리 와봐!

   한스는 어떻게 납땜질이 이루어지는지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먼저 인두를 불에 달구고, 땜질할 부위에 납땜액을 발랐다. 그 다음에는 뜨겁게 달구어진 인두에서 햐얀 금속이 흘러 떨어지며 부드럽게 치익 하는 소리를 내었다.

   걸레를 집어들고 잘 닦아내도록 해라. 납액은 금속을 부식시키니까 절대로 흘린 채로 내버려둬선 안 되는 거야.

   또다시 한스는 자신의 나선대 앞에 서서 줄로 자그마한 톱니바퀴를 문질러댔다. 팔이 쑤시고, 줄을 누르고 있는 왼손이 벌겋게 되어 아파오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어 상임 직공이 줄을 내려놓고 손을 씻으러 갔다. 그 사이에 한스는 자기가 줄질한 일거리를 주인에게 가지고 갔다. 주인은 그것을 대충 살펴보았다.

   좋다. 그만하면 됐어. 네 자리 밑에 있는 상자 안에 똑같은 톱니바퀴가 하나 더 있으니까 오후엔 그걸 하도록 해라.

   한스도 손을 씻고, 밖으로 나섰다. 한 시간 가량 식사 시간이 주어졌다.

   옛날 학교 친구였던 두 명의 상점 견습원이 길거리에서 한스의 뒤를 쫓아오며 놀려댔다.

   주 시험에 합격한 대장장이!

   한 녀석이 소리쳤다.

   한스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 자신이 정말 이일에 만족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작업장이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피곤에 지친 나머지 그저 쉬고 깊은 생각뿐이었다.

   집 문턱에 거의 이르렀다. 이제 식탁에 편히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는 순간, 문득 엠마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전 내내 한스는 그녀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는 살며시 자기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내던진 채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쳤다. 울려고도 해보았지만, 눈물이 말라 있었다. 그는 다시금 절망에 쌓인 채 영혼을 갉아먹는 그리움에 내던져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머리가 쑤시고 아팠다. 흐느낌을 참으려니 목구멍도 아파왔다.

   점심 식사는 한스에게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묻는 말에 대답도 해야 하고, 작업장에서의 일에 대해 이야기도 해야 하고, 또 아버지의 온갖 농담을 받아넘겨야만 했다. 아버지는 기분이 무척 좋았던지 좀처럼 한스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한스는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곧 뜰로 나갔다. 거기서 햇볕 아래 반쯤 꿈에 취한 채 15분 가량을 보냈다. 이제 다시 일터로 갈 시간이 되었다.

   오전이 다 가기도 전에 벌써 한스의 두 손에는 벌건 물집이 생겼다. 제법 심각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너무나 부풀어오른 나머지 아무것도 손에 쥘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일이 다 끝난 뒤, 집에 돌아기기 전에 그는 아우그스트를 따라 작업장을 말끔히 정리해 놓아야 했다.

   토요일에는 더욱 심했다. 두 손은 타는 듯이 아팠고, 물집은 더 커져 버렸다. 주인은 기분이 나빴는지 사소한 일에도 툭하면 욕설을 퍼부어댔다. 아우구스트는 며칠만 지나면 물집이 없어진다고 한스를 위로해 주었다. 게다가 그 뒤에는 손도 굳어지고, 전혀 통증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스는 죽고 싶으리만치 비통하고 불행한 심정으로 하루 종일 시계만 훔쳐보며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채 톱니바퀴를 갈고 있었다.

   저녁에 뒷정리를 하던 아우구스트는 한스에게 귓속말로 이야기를 건네었다. 내일은 두세 명의 동료와 감께 비라하에 가서 멋들어지게 놀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스도 그 무리에 끼어야 했다. 아우구스트는 2시에 자기가 한스를 데리러 가겠노라고 덧붙였다. 한스는 너무나도 피곤하고 지쳐있었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 침대에 누워 쉬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초대에 응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오니 안나 할머니가 상처난 손에 바르도록 연고를 꺼내주었다. 8시에 잠자리에 든 한스는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다.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가기 위하여 서둘러 움직였다.

   점심 식사 때, 한스는 아우구스트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와 함께 들판으로 놀러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별 다른 말없이 용돈으로 50페니히나 주었다. 하지만 저녁식사 전까지는 꼭 들어와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주었다.

   한스는 아름다운 햇살을 받으며 골목길을 거닐었다. 몇 달만에 처음으로 일요일이 주는 기쁨을 실컷 맛보았다. 평일에 손이 시꺼매지고, 팔다리가 피곤해지도록 일을 하고 난 뒤라야 일요일의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들뜨고, 태양은 더욱 밝게 빛나고, 모든 것이 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었다. 햇볕이 드는 집 앞의 벤치에 앉아 마치 제왕처럼 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정육점 주인이나 피혁공, 빵집 주인이나 대장간 주인을 한스는 이제 이해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을 속물 같은 인간이라고 경멸하지 않게 되었다. 한스는 약간 비뚤게 쓴 모자에 흰깃이 달린 셔츠, 정성들여 솔질한 나들이옷을 입은 노동자와 숙련공, 견습공들이 무리지어 산책을 하거나 거리를 거닐거나 음식점에 드나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늘상 수공업자들은 자기네들끼리 어울렸다. 목수는 목수끼리, 미장이는 미장이끼리 어울려 자신이 속한 직업의 명예를 지켜나갔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대장장이 조합은 가장 고상한 노동조합이었다. 특히 기계공이 가장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한스에게 정다운 느낌을 주었다. 그 가운데 더러는 약간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그 뒤에는 오늘날에도 미더우며 기본 수공업의 아름다움과 자랑스러움이 감추어져 있었다. 심지어 가장 비천한 양복점의 견습공도 이러한 아름다운 자긍심의 한 가닥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슐러의 집 앞에는 젊은 기계공들이 거만한 자세로 느긋하게 서 있었다. 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보내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들이 남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믿음직스러운 집단을 형성하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일요일의 여흥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스 또한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이들 무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하지만 미리 짜여진 일요일의 여흥에 대하여 약간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한스가 듣기로 기계공들은 막무가내로 인생을 호탕하게 즐기는 무리였다. 어쩌면 춤을 추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스는 춤에 문외한이었다. 아무튼 그는 힘닿는 데까지 짐짓 어른답게 보이려고 작정했다. 부득이 술에 취해 떨어지는 경우도 참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한스는 맥주를 별로 많이 마시지 못했다.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기껏해야 여송연 한 대를 끝까지 힘겹게 피워대는 정도였다.

   아우구스트는 한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이가 든 숙련공이 오지 않는 대신에 다른 장업장에서 일하는 동료 한 명이 함께 하기로 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일행이 적어도 네 사람은 되기 때문에 그만하면 마을 전체를 뒤집어 놓기에 충분하다고도 말했다. 뿐만 아니라 술값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오늘은 누구라도 원하는 만큼 맥주를 마셔도 좋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스에게 여송연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네 사람은 슬슬 걷기 시작했다. 늦지 않게 비라하에 도착하기 위하여!

   푸르른 강의 수면은 거울처럼 금빛으로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 단풍나무와 아카시아나무 잎사귀들이 거의 떨어져 버렸다. 그 사이로 부드러운 10월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드높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담청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고요하고, 맑고, 정감이 넘치는 가을날의 하루였다. 이런 날에는 지난여름의 아름다운 일들이 고통을 모르는 즐거운 추억이 되어 부드러운 공기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또한 아이들은 계절을 잊은 채 꽃을 찾으러 다닌다. 이런 날에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생각에 깊이 잠긴 듯한 눈으로 창가에서나 혹은 집앞의 벤치에 앉아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한 해뿐 아니라, 전 생애의 그리운 추억들이 말고 푸른 가을의 하늘 너머로 흘러가는 듯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흐뭇한 기분으로 아름다운 날을 찬미한다. 제각기 타고난 재능이나 기질에 따라 배불리 먹거나 취하도록 마시며, 혹 술을 바치거나 고기를 바치면서, 혹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아니면 술판을 벌이거나 난폭한 싸움판을 벌이면서, 왜냐하면 어디를 가더라도 과일을 넣은 과자가 구워지고, 지하실에는 갓 담근 사과잡이나 포도주가 익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음식점 앞과 보리수 광장에서 바이올린이나 하모니카로 한 해의 아름다운 마지막 날들을 노래하며 축하하고, 춤과 노래와 사랑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젊은 무리는 빠른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갔다. 한스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여송연을 피워물었다. 여송연을 피우니 오히려 몸이 상쾌해지는 것 같아 의아했다. 숙련공은 자신이 걸어온 여정에 대하여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가 실컷 떠벌려대도 어느 누구하나 개의치 않았다. 그런 이야기에는 으레 허풍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먹고 살 만큼 확실한 직장을 가지고만 있다면, 그리고 예전의 행적을 목격한 사람이 자기 주위에 없기만 하면, 아무리 얌전한 수공업 직공이라 해도 자신의 떠돌이 행각에 대하여 영웅담처럼 과장을 곁들여 재미있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젊은 수공업자의 인생에 담겨있는 멋들어진 시는 민중의 공유 재산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의 체험으로부터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모험담이 새로운 아라베스크의 무늬를 입고 다시금 새로이 태어난다. 유랑길을 떠도는 뜨내기 직공은 누구나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불멸의 익살꾼 오일렌슈피겔이나 불멸의 뜨내기 슈트라우빙어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 프랑크푸르트에서 머물 때였지. 원, 제기랄. 그게 인생이라구! 아직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말야. 아 글쎄, 그 멍청이 같은 돈 많은 상인이 우리 주인 딸과 결혼하려고 안달이 났지 뭐야. 그런데 아가씬 그놈을 보기 좋게 퇴짜를 놓아버렸지. 아마 내가 더 좋았던 모양이야. 그녀는 넉 달 동안이나 내 애인이었다고. 내가 주인 영감하고 다투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거기에 눌러 앉아 그의 사위가 되었을지 몰라.

   그러고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더러운 인신매매범이나 다름없는 놈팡이 같은 주인이 자기를 때리려고 겁도 없이 손을 뻗쳤다던가!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쇠를 단련하는 망치를 휘두르며 그 늙은이를 노려보았더니 겁을 집어먹은 채 슬그머니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아마 소중하게 아끼는 머리통이 깨질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 비겁한 얼간이는 직접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나중에 서면으로 해고를 통보해 주었다고 했다. 오펜부르크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였던 일도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의 대장장이가 일곱 명이나 되는 공장 노동자들을 반쯤 죽여놓았다는 줄거리였다. 지금도 오펜부르크에 가서 키다리 쇼르슈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아직 거기서 살고 있으며, 한때는 그도 같은 패거리였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대담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열정이 넘쳐흐르는 진실된 어투로 희열에 잠긴 채 이어져 갔다. 모두들 가슴속 깊이 만족을 느끼며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도 언젠가는 다른 마을의 다른 동료들 앞에서 이 이야기를 써먹어보리라고 남몰래 다짐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장장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진적이 있고, 한 번쯤은 망치를 들고 성질이 고약한 주인에게 덤벼든 적이 있으며, 또한 한 번쯤은 일곱 명이나 되는 공장 노동자들을 혼쭐나게 두들겨 준 적도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때로는 바덴에서, 때로는 헤센에서 , 혹은 스위스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망치대신에 줄이 쓰이기도 하고, 뜨겁게 달군쇠가 쓰이기도 했다. 공장 노동자 대신에 제과점이나 양복점에서 일하는 점원이 싸움질의 상대가 되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나 듣게 되는 진부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기를 즐긴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훌륭한 동업조합의 명예를 길이 빛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편력길에 오른 직공들 가운데 실제로 경험을 하거나, 아니면 창작을 하는데 있어 천재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이 두 부류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이야기에 사로잡혀 흥겨워한 사람은 아우구스트였다. 그는 끊임없이 웃어대며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를 쳤다. 벌써 숙련공이 다 되기라도 한 듯이 시건방진 향락주의자의 얼굴 표정을 짓고, 해맑은 하늘 위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 이야기꾼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견습공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벌써 자존심을 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고 짐짓 하나의 겸손한 본보기로 자신을 과시하려고 했다. 아무튼 숙련공이 일요일에 견습공들과 돌아다닌다는 것은 그다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풋내기의 돈으로 술을 얻어마신다는 것은 여간 부끄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국도를 따라 강 아래로 한참을 걸어갔다. 이제 곡선을 그리며 완만하게 언덕으로 오르는 차도와 그 구간의 반쯤밖에 되지 않는 가파른 오솔길 사이에서 하나를 택해야 했다. 거리가 멀고 먼지도 많이 나기는 하지만, 모두들 차도를 택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솔길은 일하는 평일에 찾는 길이었다. 혹은 산책하는 신사양반들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특히 민중들은 시정이 살아숨쉬는 일요일의 국도를 사랑한다.

   가파른 오솔길은 시골 농부들이나 도시에서 온 자연 애호가들에게 어울리는 길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노동 내지 운동일 뿐, 결코 민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지 못한다. 이와는 반대로 국도에서는 한가롭게 거닐며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고, 신발이나 나들이옷을 소중하게 다룰 수도 있다. 그리고 지나가는 마차나 말을 볼 수도 있고 산책에 나선 다른 사람들을 만나거나 앞지를 수도 있다. 때로는 멋지게 차려입은 아가씨들과 노래하는 젊은 사내들을 만날 수도 있다. 이들이 농담을 걸어오면, 웃으며 받아넘기기도 하고, 가다가 잠시 멈춰 서서는 함께 떠들어대기도 한다. 결혼하지 않은 외로운 총각이라면 아가씨들의 뒤를 쫓아갈 수도 있다. 저녁때에는 친한 동료들과의 개인적인 오해를 풀기 위해 스스럼없이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국도로 걸어갔다. 그 길은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언덕위로 다정스레 뻗어 있었다. 마치 여유를 부리며 땀을 흘리려고 하지 않는 사람처럼. 아까 그 숙련공은 웃옷을 벗어 지팡이에 걸치고는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는 이야기 대신에 흥겨운 휘파람을 거침없이 불기 시작하더니 한 시간이 지나 비라하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불어댔다. 한스에게는 빈정거리는 농담을 몇 마디 건넸지만, 그다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농담을 받아넘긴 사람은 한스가 아니라 오히려 아우구스트였다. 그러는 사이에 일행은 드디어 비라하에 다다랐다.

   마을 비라하는 붉은 기와 지붕과 은빛 나는 회색의 초가지붕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가을의 색깔을 드리운 과일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고, 뒤로는 검은 숲이 펼쳐져 있었다.

   젊은이들은 어느 주점으로 들어가야 좋을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주점 <닻>에는 가장 좋은 맥주가 있었고, <백조>에는 가장 좋은 과자가 있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모퉁이>에는 아리따운 주인집 딸이 있었다. 마침내 아우구스트는 동료들을 설득해 <닻>에 가기로 했다. 그는 자신들이 두세 잔 마신다고 해서 <날카로운 모퉁이>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눈짓으로 알려주었다. 모두들 흡족한 얼굴로 마을에 들어섰다. 양아욱 화분을 올려놓은 낮은 농가의 창턱과 마굿간을 지나 <닻>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황금빛의 간판은 싱싱하게 자란 두 그루의 어린 밤나무 너머로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숙련공은 어떻게든 주점 안에 들어가 앉으려고 했지만 벌써 거기는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뜰로 나가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손님들 사이에서 <닻>은 품격이 있는 주점으로 유명했다. 농부들이나 드나드는 오래된 주점이 아니라, 네모난 벽돌로 지어진 현대풍의 주점이었다. 창문이 지나칠 정도로 많이 나 있었고, 벤치 대신에 의자가 놓여 있었으며, 양철로 만들어진 화려한 색깔의 광고도 걸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회지풍으로 차려입은 여종업원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주인은 어느 경우에라도 팔소매를 걷어붙이는 법이 없이 유행에 걸맞게 멋진 갈색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원래 그는 파산을 당한 처지였는데, 커다란 맥주공장을 경영하는 채권자로부터 이 집을 임대받은 뒤로는 한층 형편이 나아지게 되었다. 뜰은 아카시아나무와 커다란 철망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고, 울타리는 야생의 포도나무로 반쯤 뒤덮여 있었다.

   자, 건강을 위하여!

   숙련공은 소리치며 다른 세 명의 동료와 함께 건배를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단숨에 잔을 비워버렸다.

   여기, 아리따운 아가씨! 잔이 다 비었잖아. 빨리 한 잔 더 가져와!

   그는 여종업원을 향하여 소리를 질러대며 식탁 너머로 술잔을 내밀었다.

   맥주 맛은 일품이었다. 상큼하고, 그리 쓰지도 않았다. 한스도 즐거이 자기 술잔을 비웠다. 아우구스트는 마치 미주가라도 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혓바닥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따금 제대로 뚫리지 않은 연통처럼 담배를 피워대기도 했다. 그 광경이 한스에게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인생을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 주점의 식탁에 앉아, 당연히 그럴 만한 자격을 지닌 사람처럼 유쾌한 일요일을 보낸다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함께 웃기도 하고, 간혹 용기를 내어 농담을 던져보는 것도 신나는 일이었다. 술을 다 들이키고 나서 잔을 식탁위에 힘껏 내리치며 아무 거리낌 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것도 신나는 일이었다. 한 잔 더, 아가씨! 옆의 식탁에 앉아 있는 낯익은 사람에게 건배를 청한다거나 꺼진 여송연 꽁초를 왼손에 끼운채 다른 사람들처럼 모자를 꺾어 뒤로 젖히는 것도 신나는 일이었다.

   다른 작업장에서 함께 온 숙련공도 흥에 겨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는 울름의 어느 대장장이는 스무 잔이나 되는 맥주를 마실 수 있다고 했다. 울름에서 만든 고급 맥주를 다 마시고 나서는 입을 닦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자, 이젠 고급 포도주로 한 병 더 가져와!

   그 숙련공은 칸슈타트의 어느 화부를 알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는 한꺼번에 단단한 소시지를 열두 개나 먹어치웠기 때문에 어느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지만, 두 번 째의 내기에서는 지고 말았다. 그 화부는 주제넘게도 어느 자그마한 주점의 식단표에 들어 있는 음식을 다 먹어치울 심산이었는데, 전혀 예기치 않게 식단표의 맨 마지막에는 네 가지의 치즈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세번째 치즈를 먹다가 그만 접시를 물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나 더 먹을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젊은 직공들은 이 이야기에 커다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 세상에는 어딜 가나 끈질기게 먹고 마셔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누구나 나름대로 그런 영웅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사람에게서는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어느 사나이>이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루드비히스부르크의 용기병>이었다. 어느 사람의 이야기에서는 열 일곱 개의 감자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서는 샐러드를 곁들인 열 한 개의 구운 과자였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매우 진지한 자세로 꽤나 현실감 있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훌륭한 재능을 가진 유별난 사람들이 숱하게 많다는 사실을 뿌듯한 기분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물론 이들 가운데에는 기인들도 있게 마련이었다. 현실에 부합되는 이런 산뜻한 느낌은 술집을 찾는 평범한 단골 손님들의 존경할 만한 유산이다. 술을 마시거나, 시국을 이야기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결혼을 하거나, 인생을 마감하는 일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젊은 사람들에 의하여 모방되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석 잔 째 들이키고 있을 때, 일행 가운데 누군가가 여종업원을 불러 과자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가 없다고 대답하자, 모두들 흥분한 나머지 펄쩍 뛰었다. 아우구스트는 일어서더니 여기서 과자가 없으면 다른 집에나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다른 작업장에서 온 숙련공도 형편없는 주점이라고 투덜거렸다. 단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직공만이 계속 머물기를 원했다. 그는 여종업원과 농도 짙은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벌써 여러 차례나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그 광경을 바라보던 한스는 이상하리만치 흥분하고 말았다. 모두들 술집 밖으로 나왔다. 한스에게는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술값을 지불하고, 모두들 길거리로 나왔다. 한스는 아까 마신 세 잔의 술기운이 도는 것을 느꼈다. 반쯤은 피곤하고, 반쯤은 무언가 해보고 싶은 편안한 느낌이었다. 꿈속에서처럼 엷은 베일이 눈앞에 드리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거의 현실과 동떨어진 채 저 멀리 아련히 보일뿐이었다. 한스는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한 김에 용기를 내어 모자를 약간 삐딱하게 쓰고 나니 정말이지 건달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직공은 다시금 용감무쌍하게 휘파람을 불어대기 시작했고, 한스는 그 휘파람 박자에 발걸음을 맞추려고 했다.

   주점 <날카로운 모퉁이>는 아주 조용한 분위기였다. 두세 명의 농부가 새로 짠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생맥주는 없고, 병맥주뿐이었다. 자리에 앉은 젊은이들 모두 앞에 곧 맥주가 한 병씩 놓여졌다. 다른 작업장에서 온 숙련공은 자신이 인색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이 함께 온 젊은 동료들을 위하여 사과가 든 커다란 과자 한 개를 주문했다. 한스는 갑자기 배가 무척이나 고팠기 때문에 단번에 과자를 여러 조각이난 먹어치웠다. 낡은 갈색의 술집에서 벽에 붙은 견고하고 넓은 벤치에 앉아 있노라니 어스레한 불빛 아래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고풍스러운 선술대와 커다란 난로는 희미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남 살을 댄 커다란 새장에는 두 마리의 곤줄박이새가 퍼득거리고 있었다. 그 창살 사이로 새의 먹이인 빨간 열매가 가득 매달려 있는 마가목의 가지가 꽂혀 있었다.

   술집 주인이 잠시 식탁으로 와서는 손님들에게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얼마 지난 뒤에야 젊은 무리는 다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 독한 병맥주를 두세 모금 마신 한스는 자신이 과연 한 병을 다 마셔버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직공은 또다시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라인 지방의 포로 축제며 객지를 떠돌아다니던 방랑생활, 값싼 여인숙에서 묵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모두들 즐거운 기분이 되어 귀를 기울였고, 한스도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웃음의 도가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몸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방이며 식탁, 술병이며 술잔, 그리고 동료들이 부드러운 갈색의 구름 속으로 자꾸만 녹아들고 있었다. 한스가 정신을 바짝차릴 때에난 희미하게 윤곽이 드러날 뿐이었다. 이따금 이야기나 웃음이 드높아질 때면, 한스도 큰 소리로 함께 웃거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또한 건배를 하려고 함께 술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난 뒤, 놀랍게도 그의 술병은 비어 있었다.

   제법 마시는데 아우구스트가 말했다.

   한 잔 더 할래?

   한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처럼 마셔대는 것이 적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직공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두들 함께 노래를 불렀다. 한스도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댔다.

   그 사이에 술집 안은 온통 손님들로 가득 찼다. 여종업원을 거들기 위하여 주인 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몸매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건강하고 힘이 넘쳐 흐르는 얼굴과 평온한 갈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술병을 새로이 한스 앞에 갖다놓을 때, 한스 옆에 앉아 있던 숙련공은 아주 능숙하고 멋들어진 언변으로 그녀에게 수작을 걸었지만, 그녀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숙련공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곱상하게 생긴 소년의 얼굴이 맘에 들어서였는지, 아무튼 그녀는 한스에게로 몸을 돌리고 나서 재빨리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선술대로 되돌아갔다.

   벌써 새 병째 술을 마시고 있던 숙련공이 그녀를 뒤쫓아갔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야기를 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키가 큰 소녀는 냉담하게 그를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등을 돌려버렸다. 그러자 그 숙련공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서는 빈 병을 두드리며 돌연 흥분된 어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애들아, 신나게 놀아보자꾸나. 자, 건배를 들자구!

   그 숙련공은 여자에 관한 음탕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스에게는 주위의 말소리가 서로 뒤섞여 가물거릴 뿐이었다. 술을 거의 두 병째 비울 즈음에는 말하는 것뿐 아니라, 웃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그는 새장으로 가서 곤줄박이새를 놀려주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두 발짝을 채 디디기도 전에 머리가 어지러워져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한없이 들떠 있던 흥겨운 기분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스는 자신이 거나하게 취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술을 마셔대는 것도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다. 저 멀리서 온갖 불행이 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버지와의 한바탕 말다툼,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장에 출근해야 하는 일. 차츰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다른 동료들도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잠시 머리가 맑아진 순간, 아우구스트는 술값을 지불하겠다고 나섰다. 모두들 무척이나 많이 마셨기 때문에 1탈러 (16세기에 보헤미아에서 유통되었던 은화. 프러시아의 1탈러가 3마르크에 해당되는 액수였다)를 내고도 별로 거스름돈을 받지 못했다. 젊은 무리는 떠들썩하게 웃으며 길거리로 나왔다. 저녁 노을이 눈이 부시리만치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한스는 혼자 몸을 가눌 수 없어 아우구스트에게 기댄 채 그의 도움으로 비트적거리며 걸었다.

   다른 작업장에서 온 숙련공은 감상에 젖은 나머지 내일 난 여기서 떠나야 해 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애당초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백조앞에 이르러서는 그 숙련공이 한 번 더 들어가자고 고집을 부렸다. 술집 입구에서 한스는 동료들의 손을 뿌리쳤다.

   나 집에 가야 돼.

   혼자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숙련공이 웃으며 말했다.

   아냐, 걸을 수 있어. 난 가야 돼. 집에.

   그럼 브랜디라고 한 잔 마시게나, 이 꼬마 양반아! 그걸 한 잔 걸치면, 다리에 힘도 생기고, 위도 편해질 거야.

   그럼, 물론이지. 한 번 보라니까

   한스는 어느새 자기 손 안에 자그마한 술잔이 쥐어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잔에 담겨져 있던 술은 이미 거의 다 엎질러진 뒤였다. 한스는 남아 있던 나머지 술을 들이켰다. 목구멍에서는 타는 듯한 느낌이 올라오고,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지고, 또 구역질이 나기도 했다. 그는 혼자서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와서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마을로 나왔다. 가옥이며 울타리, 뜰이 모두 기울어진 채 그의 곁을 빙빙 돌며 스쳐 지나갔다.

   한스는 사과나무 아래 이슬에 젖은 풀밭에 드러누웠다. 온갖 불쾌한 감정과 고통스러운 불안감, 혼돈에 싸인 상념 때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이 더럽혀지고, 모욕을 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내일 나는 어찌 될 것인가?

   그는 너무나도 낙심하여 자신이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영원히 쉬고, 잠들고, 또 부끄러워해야 할 것만 같았다. 머리와 눈도 아팠다. 한스는 더 이상 걸을 힘조차 없었다.

   앞서 느꼈던 희열의 흔적이 다시금 갑작스럽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스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대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아우구스틴.

   오, 그대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든 게 끝나버렸네.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왔다. 어렴풋한 상념과 추억들, 수치심과 자책감이 음울하게 물결치며 한스를 뒤덮었다.

   한스는 큰 소리로 흐느끼며 풀밭에 쓰러졌다.

   한 시간 뒤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한스는 몸을 일으켜 불안한 걸음걸이로 힘겹게 언덕을 내려갔다.

   기벤라트 씨는 저녁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아들이 돌아 오지 않자, 혼자서 욕설을 퍼부었다. 9시가 되어도 한스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등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꺼냈다.

   그놈이 이젠 아버지의 매를 맞지 않을 만큼 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집에 돌아오기만 해봐라. 혼쭐을 내줄 테니까!

   10시에 아버지는 현관문을 잠가버렸다.

   우리 아드님이 한밤중에 쏘다니겠다면, 얼마든지 해보라지. 어디 물을 데라도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아버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분에 겨워하면서도 아들의 손이 손잡이를 돌려보고는 살그머니 초인종 줄을 잡아당기기만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다. 아버지는 그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놈은 한번 따끔한 맛을 봐야 돼! 그 뻔뻔스런 녀석이 술에 취한게 틀림없어. 하지만 당장에 술이 깨게끔 해줘야지 장난꾸러기 같은 녀석, 흉칙스런 녀석, 가련한 녀석! 뼈마디가 으스러지도록 혼쭐을 내줘야지.

   마침내 아버지도 그의 분노도 잠에 굴복하고 말았다.

   같은 시각, 아버지가 마음속으로 그토록 꾸짖던 한스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검푸른 강물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조용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구역질이나 부끄러움이나 괴로움도 모두 그에게서 떠나버렸다. 어둠 속에서 흘러 내려가는 한스의 메마른 몸뚱이 위로 푸른빛을 띤 차가운 가을밤의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시꺼먼 강물은 그의 손과 머리, 그리고 창백한 입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먹이를 구하려고 나선 겁많은 수달이 교활한 눈초리를 번뜩이며 그의 곁을 소리없이 지나갔을 뿐, 어느 누구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물에 빠지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길을 잃고, 가파른 언덕에서 발을 헛디뎠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다가 몸의 중심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혹시나 아름다운 강물에 이끌려 그 위로 몸을 굽혔는지도 모른다. 평화와 깊은 안식이 가득한 밤, 그리고 창백한 달빛이 그를 향해 비추었기 때문에 피곤함과 두려움에 지친 나머지 어찌할 수 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휘말려들었는지도 모른다.

   한낮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한스를 찾아내어 집으로 데리고 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버지는 몽둥이를 옆으로 치우고, 이제까지 쌓인 분노를 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눈물도 보이지 않았고, 얼굴도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아버지는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가끔 문 틈 사이로 말없이 누워 있는 아들을 건너다보았다. 깨끗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들은 변함없이 고운 이마와 창백하고 영리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여느 사람들과 다른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의 천부적인 권리라도 되는 듯이. 이마와 두 손의 살갗은 약간 푸르스름하고 불그레하게 긁혀져 있었다. 곱상한 얼굴은 고이 잠들어 있었다. 두 눈은 하이얀 눈꺼풀로 덮여 있었고, 꼭 다물어지지 않은 입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거의 즐겁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 소년은 한창 피어오르는 꽃다운 나이에 갑자기 꺾여 즐거운 인생의 행로에서 억지로 벗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피곤과 외로운 슬픔에 지친 한스의 아버지도 미소짓는 무언의 환멸 속으로 빠져들었다.

   장례식에는 조합원이며 호기심에 가득 찬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한스 기벤라트는 또다시 유명인사가 되어 모두의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교사들과 교장 선생, 마을 목사도 그의 운명에 동참했다. 그들 모두는 프록코트를 입고, 장중한 비단 모자를 쓴 채 장례 행렬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를 속삭이며 잠시 무덤 가에 서 있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라틴어 선생이 한층 더 우울해 보였다.

   교장 선생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래요, 선생님. 저 아이는 훌륭하게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뛰어난 아이들이 도리어 불운을 맞게 된다느 건 정말이지 슬픈 일이지요!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는 한스의 아버지, 쉬지 않고 흐느껴 우는 안나 할머니와 함께 무덤 가에 남아 있었다.

   참으로 가혹한 일입니다. 기벤라트 씨!

   그는 동정어린 얼굴로 말했다. 저도 그 아이를 무척 좋아했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는 무척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어요. 그리고 일도 모두 잘 풀려나갔지요. 학교며 시험이며... 그러다 갑자기 한꺼번에 불행이 닥쳐온 겁니다!

   구둣방 아저씨는 묘지 문을 나서는 프록코트의 신사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 양반들 말입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뭐라구요?

   기벤라트 씨는 흥분한 나머지 펄쩍 뛰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원, 세상에.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째서? 도대체 왜 그렇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나, 우리 모두 저 아이에게 소홀했던 점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으세요?

   마을 위로 드넓은 푸른 하늘이 한가로이 펼쳐져 있었다. 골짜기에는 강물이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잣나무가 우거진 산들은 그리움에 가득 찬 듯이 부드럽고 짙푸른 분위기를 자아내며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플라이크 아저씨는 처량한 미소를 지으며 기벤라트 씨의 팔을 잡았다. 기벤라트 씨는 이 한때의 고요와 이상하리만치 고통스러운 숱한 상념에서 벗어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익숙한 삶의 터전을 향하여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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