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 바퀴 밑에서 1
by 송화은율수레 바퀴 밑에서 1
제1장
요제프 기벤라트 씨는 중개업과 대리업을 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에 견주어볼 때, 그에게는 장점이나 특성이랄 것이 없었다. 여느 사람처럼 그는 넓은 어깨에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지간한 장사 수완을 지닌 그는 황금을 숭배하는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정원이 딸린 아담한 저택에다가 선조들이 대대로 묻힌 가족묘가 있었다. 그의 종교 의식은 약간 개방적이기는 했지만,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신과 관료주의에 대해서는 적절한 존경심을 표하였고, 시민적인 예의 범절의 확고한 불문율에 대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맹목적인 복종심을 보였다. 그는 가끔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한 번도 취한 적이 없었다. 때로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만한 일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형식적으로 허용되는 한계를 넘어서지는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난뱅이라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졸부라고 욕설을 퍼부어 댔다.
그는 시민 단체의 일원으로서 매주 금요일마다 독수리 주점에서 열리는 고주회(자그마한 공을 던져 핀을 쓰러뜨리는 독일의 전통적인 놀이로서 지금의 볼링 경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볼링과는 달리 이 놀이에서는 공의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 위에 올려 좋고 가볍게 던진다. 전용 고장이 아닌, 술집의 구석에 설치되어 있어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있다.)놀이에 참석했다. 뿐만 아니라 빵 굽는 날이나 라고(여러 고기를 다져 양념을 친 뒤에 소스를 뿌려 만든 스튜 요리)를 먹는 날, 그리고 순대 수프를 먹는 날에도 빠지지 않았다. 일할 때에는 값싼 여송연을, 식후나 일요일에는 고급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의 내면 생활은 속물적이었다. 그가 지녔던 정서는 이미 오래 전에 먼지가 되어버렸다. 낡고, 우악스럽기만 한 가족 의식과 자기 아들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이따금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즉흥적인 자선, 이러한 것들이 겨우 그의 정서의 가장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또한 그의 정신적인 역량은 엄격하게 한계가 그어진 타고난 교활함과 계산적인 술책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가 읽는 것은 신문뿐이었다. 그의 예술 감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는 해마다 개최되는 시민 단체의 소인극과 가끔 열리는 서커스 공연이면 충분했다.
그가 이웃의 어느 누구와 이름이나 집을 바꾼다 하더라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의 영혼 깊이만 하면 그에 대한 이야기는 족하다. 사려 깊은 풍자가만이 이 천박한 삶과 무의식적인 비극의 묘사를 배겨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남자에게는 하나뿐인 아들이 있었다. 이제 바로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한스 기벤라트는 의심할 여지없이 재능 있는 아이였다.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남다른지는, 다른 아이들 틈에 끼여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슈바르츠발트(독일의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검은 숯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의 이 자그마한 마을에서는 여태껏 그러한 인물이 배출된 적이 없었다. 이 좁은 세계 너머로 눈을 돌리거나 영향을 끼칠 한한 사람이 여기서는 아직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진지한 눈망울과 영리해 보이는 이마, 그리고 단정한 걸음걸이를 이 소년이 도대체 어디서 물려받았는지는 신만이 알리라. 혹시 어머니로부터? 그녀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별로 두드러진 특징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지 언제나 병들고 근심에 쌓인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난 8, 9세기에 걸쳐 그토록 많은 건실한 시민들이 나왔으면서도 아직 한 번도 재간꾼이나 천재를 길러내지 못한 바로 이 오래된 작은 마을에 정말이지 하늘로부터 신비로운 불꽃이 내려온 셈이었다.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관찰자라면 병약한 어머니와 훌륭한 가문의 연륜을 되짚어보며 지성의 이상비대증을 점차 심각해지는 몰락의 증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마을에는 그러한 부류의 시민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관료들이나 교사들 가운데에서 보다 젊고 약삭빠른 사람들만이 신물 사설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현대적인 인간의 존재에 관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모르더라도 교양 있는 척하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견실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들의 삶 어디에나 치유할 수 없는 고루함이 배어 있었다. 자족하며 지내는 돈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지난 20연 년 동안에 수공업자에서 공장주로 탈바꿈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이들은 관료들 앞에서 모자를 벗어 인사하며 친분을 다지려고 노력하면서도, 자기네들끼리 어울릴 때에는 그들을 인색꾼이니 서기 종놈이니 하고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야심은 자기 아들이 가능하면 대학 공부를 마치고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바람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한낱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의 아들들은 거의 모두가 라틴어 학교에서 힘에 겨워 끙끙거리며 낙제를 거듭한 끝에 겨우 졸업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한스 기벤라트의 재능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교사들이나 교장 선생, 이웃 사람들이나 마을 목사, 학교 친구들 등, 모든 사람들은 이 사내아이가 영리한 두뇌를 가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그의 장래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슈바벤 지역에서는 부모가 부유하지 않을 경우 재능 있는 아이들 앞에 단 하나의 좁은 길만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은 주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교에 입학한 뒤, 거기서 다시 튀빙엔의 수도원에 들어가고, 나중에 목사가 되어 설교단에 서거나 아니면 대학의 강단에서는 것이었다. 해마다 4,50명의 지방 소년들이 이처럼 평탄하고 안전한 길을 밟는다.
이제 갓 입교식(성서문답과 신앙고백을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는 신교의 종교 의식이다.)을 끝낸 아이들이 모두 공부에 지친 나머지 무척이나 여윈 모습으로 국가의 보조금을 받아 인문 과학의 다양한 영역을 섭렵하고, 8년 내지 9년 뒤에는 그들의 인생 여정에 있어 보다 긴 두 번째의 삶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여기서 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국가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몇 주 뒤에는 어김없이 주 시험이 치러지게 되어 있었다. 해마다 열리는 헤카콤베(수소 100마리를 제물로 바치는 예식. 여기서는 힘들고 어려운 시험을 빗대어 이르는 말이다.)에서 국가는 그 주에서 특히 머리가 뛰어난 젊은이들을 선발한다.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도시와 마르에서는 수많은 가족들이 시험 장소인 수도를 향해 눈을 들어 한숨과 기도, 그리고 기원을 보낸다.
한스 기벤라트는 이 작은 마을이 힘겨운 경쟁에 내보내기로 한 유일한 후보자였다. 그 명예는 대단했다. 그렇다고 그가 이러한 명예를 거저 얻은 것은 아니었다. 매일 4시까지 계속되는 학교 수업 이외에도 교장 선생이 따로 가르치는 그리스어 수업이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6시에는 마을 목사님이 친절하게도 라틴어와 종교의 복습 강의를 해주었다. 또한 일 주일에 두 번씩은 종교의 복습 강의를 해주었다. 또한 일 주일에 두 번씩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수학 교사로부터 한 시간에 걸쳐 지도를 받았다.
그리스어 시간에는 불규칙 동사 다음으로 불변화사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 문장 결합의 다양한 가능성에 주안점이 두어졌다. 라틴어에서는 간결한 문체를 유지하는 법과 운율의 섬세함을 배웠다. 그리고 수학에서는 복잡한 비례법을 집중적으로 익혀나갔다. 교사가 자주 강조한 바와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비례법이 앞으로의 연고와 삶에 전혀 필요치 않은 거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매주 중요했다. 다른 주요 과목들보다 오히려 더 중요할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논리적인 추리 능력을 키울 뿐 아니라, 명확하고 냉정한, 효과적인 모든 사고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정신의 과도한 부담과 이성의 지나친 훈련 때문에 정서가 등한시되거나 메마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한스는 매일 아침마다 학교 수업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입교식의 준비 교육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수업에서는 브렌츠(요하네스 브렌츠.(1499-1570) 슈바벤의 신교주의자로서 그 지방의 영주인 울리히 공의 조언자이자 설교자이기도 했다. 그는 루터를 지지하여 뷔르템베르크의 종교개혁에 앞장섰다.)의 종교문답을 통하여, 학생들의 관심을 끌 만한 질의 응답의 암기와 암송을 통하여, 종교적인 삶의 신선한 입김이 젊은이들의 영혼 깊숙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스는 생에 활력을 주는 이러한 시간들을 단축시키고, 그 축복을 스스로 저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단어들과 연습 문제를 적은 종이쪽지를 남몰래 문답서에 끼워 넣은 채 거의 한 시간 내내 이 세속적인 지식에 골몰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의 양심이 지나칠 정도로 무뎌진 것은 아니어서 그는 끊임없이 당혹스러운 불안감과 은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담임 목서가 그의 곁에 다가오거나 그의 이름을 부를 때면 그때마다 수줍어하며 몸을 움츠렸고, 답변을 해야 할 때면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가슴은 두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발음조차도 흠잡을 데 없이 정확했다. 이러한 그의 재능을 담임 목사는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한스는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까지 정다운 등잔불 밑에서 학교 수업의 과제물들을 풀어나갔다. 그것들은 쓰기와 외우기, 그리고 복습과 예습의 과제물이었다. 그의 담임 교사는 가족의 평화에 둘러싸인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면 특별한 깊이와 자극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스는 화요일과 토요일에는 10시까지, 그 밖의 다른 날에는 11시나 12시까지, 때로는 더 늦게까지도 공부를 했다. 아버지는 지나치게 기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해 약간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한스는 가끔 한가한 시간이 생길 때나, 우리의 삶 가운데 일곱 번째 부분을 차지하는 일요일이면, 학교에서 미처 읽어보지 못한 책들을 읽거나 이미 배운 문법을 다시 복습하며 부족한 지식을 메워 나가야만했다.
물론 지나치면 안 되지, 무리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일 주일에 한두 번쯤 산책을 하도록 하려무나. 산책이란 꼭 필요할 뿐더러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거든.
날씨가 좋은 날에는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갈 수도 있지. 신선한 공기를 쐬며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손쉽고 즐거운 일인지,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어쨌든 고개를 높이 치켜들거라!
그래서 한스는 될 수 있는 대로 고개를 높이 치켜들고 다녔다. 산책할 때에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밤샘한 듯한 얼굴과 가장자리가 푸르스름해진 피곤한 눈으로 수줍은 모습을 한 채 아무 말 없이 주위를 돌아다녔다.
기벤라트 학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험에 합격할까요? 어느 날, 담임교사가 교장에게 물었다.
그 아이는 해낼 거예요. 해낼 거라고요. 교장 선생은 환성을 지르듯이 말했다. 그 아이는 아주 영리는 아이예요. 그 아이를 한번 쳐다보세요. 정말이지 정신으로 충만해 보이는 걸요.
지난 한 주일 사이에 그의 정신 세계는 더욱 충만해졌다. 어여쁘고 부드러운 소년의 얼굴에는 움푹 패인눈동자가 음울한 열정을 지닌 채 불안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이마에는 그의 정신을 드러내는 듯한 가느다란 주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또한 가늘고 마른 팔과 손은 축 늘어진 채 보티첼리를 연상케 하는 나른 한 우아함을 보여 주었다.
이제 시험 날이 다가왔다. 한스는 다음날 아침 아버지와 함께 슈투트가르트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서 주시험을 치르고, 자신이 신학교의 좁은 수도원 문을 들어설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방금 그는 교장 선생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그 지배자는 헤어질 무렵에 보통 때와는 달리 부드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에는 더 이상 공부하지 말아라. 내게 약속할 수 있겠지. 내일 아침에는 아주 건강한 상태로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해야 한다. 이제 한 시간 가량 산책하고 나서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해라. 젊은이들은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하는 법이라고 한스는 교장 선생으로부터 무서운 충고를 실컷 들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처럼 호의 어린 격려를 듣고 나니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쉬며 교정을 나섰다. 커다란 키르히베르크의 보리수들은 늦은 오후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흐릿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시장 터에는 두 개의 커다란 분수대가 출렁거리며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검푸른 잣나무로 가득한 주의 산들이 곧지 않게 늘어선 지붕 너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 한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광경처럼 여겨졌다. 한스 자신이 유혹에 빠질 만큼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 한스는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공부하지 않아도 괜찮았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는 천천히 시장 터를 가로질러 낡은 시청을 지나고, 시장 골목을 거쳐 대장간을 지나서 오래된 다리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한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넓은 다리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는 여러 달에 걸쳐 매일 네 번씩이나 여기를 지나다녔었다. 그런데도 다리 위에 있는 자그마한 고딕식의 예배당을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강물이나 수문, 둑이나 방앗간 등을 전혀 눈여겨보지도 않았었다. 수영 터인 초원이나 수양버들이 늘어진 강변도 그냥 지나쳤었다. 그 강변에는 제혁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강물은 호수처럼 깊고 푸르게, 그리고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끝이 뾰족한 버드나무 가지들은 휘어진 채 강물에 닿을 정도로 깊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스는 여기 보냈던 시간들을 다시 회상해 보았다. 예전에 그는 반나절, 혹은 하루 온종일 수영도 하고, 잠수도 하고, 노도 젓고, 낚시도 했다. 아, 낚시질! 이제 그는 낚시하는 법조차 거의 잊어버렸다. 지난해에는 시험 준비 때문에 낚시하는 법조차 거의 잊어버렸다. 지난해에는 시험 준비 때문에 낚시질이 금지되었었다. 그래서 그는 쓰디쓴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낚시질! 그것은 오랜 학창 시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추억거리였다. 수양버들의 옅은 그늘 아래 물레방앗간의 둑에서 떨어지는 깊고도 잔잔한 물소리! 물위에 어른거리는 불빛과 길게 늘어진 낚싯대의 잔잔한 흔들림, 그리고 미끼를 문 고기를 잡아당길 때의 흥분, 차갑게 꼬리를 흔들어대는 살이 오른 물고기를 손에 잡아들 때의 그 형용할 수 없는 기쁨!
그는 더러 윤기 나는 잉어를 낚아 올리기도 했다. 흰 잉어와 탐스러운 잉어들, 그리고 멋진 빛깔을 자랑하는 자그마한 잉어들. 오랫동안 그는 강물 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푸른 강변을 바라보는 사이에 어느덧 갚은 상념에 사로잡히고, 어쩐지 애수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의 아름답고 자유로운, 거친 즐거움이 그토록 멀어져 간 것만 같았다. 무심결에 한스는 주머니에서 빵 한 조각을 꺼내 크고 작은 덩어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물 속에 던져 넣고, 물고기들이 물 속에 가라앉은 빵 부스러기를 뜯어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아주 자그마한 금붕어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작은 덩어리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뒤, 굶주린 듯한 주둥이로 큰 덩어리들을 이리저리 밀쳐댔다. 그러자 덩치가 더 커다란 은빛 잉어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고기의 거무스레하고 펀펀한 등은 희미하게나마 강바닥과 고별되었다.
은빛 잉어는 빵 덩어리 주위를 조심스럽게 에워싸더니, 갑자기 주둥이를 둥글게 벌리고는 재빨리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완만하게 흐르는 강물에서는 후텁지근한 향내가 피어올랐다. 여러 조각의 엷은 고름들은 푸른 수면 속에서 어렴풋하게 비치고 있었고, 물방앗간에서는 둥근 톱니바퀴가 신음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그리고 강물은 두 군데의 둑에서 시원하면서도 나지막하게 흘러나와 한 군데로 모여들었다.
소년은 입교식이 행해졌던 지난 일요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감독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엄숙한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리스어의 동사를 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었다. 다른 경우에도 종종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한스의 생각은 뒤범벅이 되곤 했다. 학교에서도 그는 눈앞의 놓여 있는 공부 대신에 이미 했거나 아니면 나중에 해야 할 공부를 늘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을 거야!
한스는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갑자기 힘센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고, 친근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한스는 깜짝 놀랐다.
잘 있었어, 한스! 잠시 나랑 산책 좀 할까?
그 사람은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였다. 한스는 예전에 가끔 그의 곁에서 저녁나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건 벌써 오래 전의 일이 되고 말았다.
한스는 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이 경건주의자의 이야기를 별로 주의 깊게 듣지는 않았다. 플라이크는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러고는 소년 한스에게 행운을 빌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정작 그가 이야기를 건넨 궁극적인 목적은, 시험이란 단지 외형적이고 우연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스에게 환기시켜 주려는 것 떨어진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가장 탁월한 학생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 설혹 한스가 그런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신이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특별한 섭리를 가지고 있으며, 예정된 길로 그들을 이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스가 이 남자에 대해서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한스는 그의 의젓하고 장중한 성품을 존경해 오던 터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플라이크 아저씨와 다른 기도의 형제들에 대하여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곤 했다. 한스도 어떤 때는 이들의 농담이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외 없이 함께 웃음을 터뜨렸었다. 게다가 한스는 자신의 비겁함을 부끄러워해야 할 판이었다. 어느 대부터인가 그는 이 구둣방 아저씨의 날카로운 질문 대문에 거의 겁에 질린 사람처럼 도망 다니다시피 했다. 한스는 자기 자신과 교사들의 자랑거리가 된 뒤로 약간 교만해져 있었다. 그래서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는 종정 우습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고, 그의 건방진 마음을 꺾어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그래서 소년 한스의 영혼은 호의가 넘치는 이 인도자의 손에서 자꾸만 멀어져 갔다. 이미 한스는 반항심이 한창 절정에 달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자아 의식을 건드리는 별로 달갑지 않은 모든 접촉에 대해서 민감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금 한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아저씨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으면서도 아저씨가 염려와 친절에 가득 찬 시선으로 자기를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크로넨 가세(골목)에서 그들은 마을 목사와 마주쳤다. 구둣방 아저씨는 점잖으면서도 차갑게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사라졌다. 왜냐하면 마을 목사가 새로운 유행을 따를 뿐 아니라, 부활도 믿지 않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목사는 한스를 데리고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내니? 그가 물었다. 이제 곧 시험이 있을 텐데 기분이 좋겠구나.
예, 괜찮아요.
그래,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하거라! 우리가 너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특히 라틴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바란다.
하지만 혹시라도 제가 시험에서 떨어지게 된다면.
한스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떨어진다고?
목사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그만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시험에서 떨어진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구나. 전혀 불가능한 일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니!
전 그냥,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한스! 그럴 리가 없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자 그럼 너희 아버님께 인사 좀 전해 주려무나! 용기를 내!
한스는 마을 목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난 뒤에 구둣방 아저씨가 사라진 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 아저씨가 무슨 말을 했던가? 만일 온전한 마음과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면, 라틴어 따위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아저씨처럼 말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마을 목사까지! 만일 시험에서 떨어지게 된다면, 한스는 그 앞에 얼굴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침울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온 한스는 언덕에 비스듬히 자리잡은 자그마한 정원에 들어섰다. 거기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아 거의 허물어져 버린 정자가 서 있었다. 예전에 그는 널빤지로 토끼집을 만들어 3년 동안이나 토끼들을 길렀었다. 하지만 지난가을에 그 토끼들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시험 공부 때문이었다. 그 뒤로 한스는 기분 전환을 위한 시간적인 영유를 좀처럼 갖지 못했다.
한스가 정원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일이 벌써 오래 전이었다. 텅 빈 칸막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벽모퉁이의 석순들은 다 허물어져 버렸다. 나무로 만든 자그마한 물레바퀴는 비틀어지고 깨어진 채 수도관 옆에서 하릴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한스는 기쁨에 겨워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 모든 물건들을 자기 손으로 만들고, 또 다듬기도 했었다.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는 자그마한 물레바퀴를 집어들더니 이리저리 구부린 뒤에 쓰지 못하게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그러고는 울타리 너머로 내던져버렸다. 이런 쓸모 없는 물건은 없애야 한다.! 정말이지 이 모든 일들은 이미 오래 전에 다 끝나버린 것이었다.
문득 학교 친구 아우구스트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 한스는 아우구스트의 도움을 받으며 물레바퀴도 만들고, 토끼집도 고쳤었다. 오후 내내 그들은 여기서 돌팔매질도 하고, 고양이를 뒤쫓기도 하고, 천막을 치기도 하며 여기서 놀았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씻지도 않은 노랑무를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그러다 한스는 공부에 전념해야 했고, 1년 전에 학교를 그만둔 아우구스트는 기계 견습공이 되었다. 그 뒤로 아우구스트는 두 번 밖에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구름의 그림자가 서둘러 골짜기 너머로 흘러가고, 해는 이미 산기슭에 거의 닿아 있었다. 잠시 한스는 몸을 내던진 채 울부짖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헛간에서 손도끼를 들고 나와서는 가냘픈 팔로 마구 휘둘렀다. 토끼집이 산산조각으로 쪼개져 버렸다. 나무 조각들은 이리저리 퉁겨 올랐고, 철못들은 삐걱 하는 소리를 내며 휘어지고 말았다 지난해 여름에 쓰다 남은 썩은 토끼 먹이들이 밖으로 드러났다. 한스는 닥치는 대로 손도끼를 휘둘러댔다. 마치 토끼와 친구 아우구스트, 그리고 어린 시절의 옛 추억들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아니, 원, 이럴 수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니? 아버지가 창가에서 밖을 향하여 소리쳤다. 너 거기서 뭐하는 거니?
땔감을 만드는 거예요.
한스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손도끼를 내던지고는 안뜰을 가로질러 골목길로 나선 뒤에 강기슭을 따라 상류로 걸어갔다. 양조장 가까이 에는 두 개의 뗏목이 묶여 있었다. 예전에 그는 가끔 뗏목을 타고 강물을 따라 몇 시간이고 떠내려갔었다. 따스한 여름날 오후에 뗏목 나무 사이에서 철썩거리는 강물을 따라 가노라면 때로는 흥분되기도 하고, 때로는 졸음에 빠지기도 했다.
한스는 줄이 풀어져 강물 위에서 둥실거리는 뗏목에 올라탔다. 그리고 버들개지 덤불 위에 몸을 던지고는 상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뗏목이 흘러간다. 때로는 급하게, 때로는 천천히. 초원이랑 밭이랑, 마을과 서늘한 숲가를 지나서 위로 들려진 수문과 다리 아래로 떠내려간다. 나는 뗏목 위에 누워 있다. 마치 모든 일이 다시 예전과 같아진 것 같다. 카프베르크에서 토기 먹이를 찾거나, 강가에 있는 제혁공장의 뜰에 걸터앉아 낚시를 하던 시절, 머리도 아프지 않고, 걱정거리도 하나 없던 그 시절처럼.
피곤에 지친 한스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 왔다. 슈투트가르트에서의 시험이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그는 한스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필요한 책을 모두 챙겼는지, 검정옷을 준비해 놓았는지, 가는 도중에 혹시 문법을 공부할 생각은 없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한스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짤막하게 대답하며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곧 저녁 인사를 했다.
잘 자거라. 한스! 푹 자야 해! 그럼, 내일 아침 여섯 시에 깨워줄게. 그 사전도 잊지 않았겠지?
예, 물론 그 사전을 잊지 않았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한스는 자그마한 자기 방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자기만의 자그마한 방, 시험이 지금까지 그에게 가져다준 유일한 축복이었다 그 안에서 한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지배자였다. 여기서 그는 피곤과 졸음, 두통과 싸우며 시저와 크세노폰, 문법과 사전, 그리고 수학 숙제와 씨름하며 기나긴 저녁나절을 보냈다. 때로는 공명심에 불타 고집을 부리며 끈덕지게 밀어 부치기도 했고 때로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이 방에서 그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즐거움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시간들을 보냈었다. 그것은 자부심과 도취, 승리감에 가득 찬, 꿈과도 같은 기이한 시간들이었다. 그때에 그는 학교나 시험,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보다 높은 존재의 영역을 꿈꾸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뺨이 두툼하고 평범한 학교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더 나은 존재라는 예감이 한스를 사로잡았었다. 언젠가는 속세에서 벗어난 높은 곳에서 우쭐대며 이들을 내려다보네 되리라는, 건방지면서도 행복에 겨운 예감이었다.
한스는 마치 지금도 이 자그마한 방안에 보다 자유롭고 상큼한 공기가 들어 있기라도 한 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꿈과 바람 속에 어렴풋한 상상의 날개를 펴며 여러 시간을 보냈다. 그의 밝은 눈꺼풀이 피곤에 지친 커다란 눈동자를 천천히 내리덮었다. 다시 눈이 떠지고, 잠시 깜박거리더니 이내 감겨버렸다. 소년의 창백한 얼굴이 메마른 어깨 위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야윈 두 팔은 피곤에 지친 나머지 축 늘어지고 말았다. 한스는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어머니처럼 다정하고 고요한 졸음의 손이 불안에 떠는 심장의 파도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귀여운 이마에 난 가느다란 주름살을 펴주었다.
일찍이 그런 일은 없었다.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교장 선생이 몸소 기차역까지 나와주었다. 검정 프록코트를 몸에 두른 기벤라트 씨는 흥분과 기쁨, 자부심에 겨워 가만히 서 있지 못했다. 그래서 초조한 듯이 총총걸음으로 교장 선생과 한스 주위를 돌아다녔다. 동시에 즐거운 여행과 아들의 합격을 비는 역장과 역무원들의 인사를 받았다. 아버지는 자그마하고 뻣뻣한 여행가방을 왼손과 오른손에 번갈아 들었다. 그리고 우산을 팔 아래 끼웠다가는 다시 무릎 사이에 끼우기도 했다. 몇 번이나 우산을 떨어뜨렸다. 그럴 때마다 가방을 내려놓고는 우산을 다시 주워 올렸다. 그의 행동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가 왕복 차표를 가지고 슈투트가르트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아들은 겉으로 매우 침착해 보이기는 했지만, 남모르는 불안감이 그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이윽고 역에 다다른 기차가 멈추어 섰다. 아버지와 아들은 기차에 올라탔고, 교장 선생은 손을 들어 인사를 보냈다. 아버지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도시와 강물이 골짜기 아래로 차츰 사라져갔다. 이들에게 기차 여행은 하나의 고통이었다.
아버지는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생기를 되찾았다. 쾌활하고 다정다감한, 만사에 능한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주의 수도에 발을 디디고는 2,3일 정도 머물게 된 소도시인의 감격,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스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불안해졌다. 시가지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답답하고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낯선 얼굴들, 뻐기는 듯이 높게 치솟은 휘황찬란한 건물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어 있는 길, 철로 마차 그리고 길거리의 소음이 한스를 겁에 질리게 했을 뿐 아니라 괴롭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숙모 댁에 묵기로 했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들, 숙모의 친절함과 수다스러움, 그냥 무턱대고 앉아 있어야 하는 분위기,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쉬지 않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의 배려, 이러한 것들이 어린 소년을 완전히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다시피 했다. 한스는 어설프고 당혹스러운 느낌으로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눈에 익지 않은 주위의 환경, 숙모가 입고 있는 도시 풍의 옷차림새, 벽에 걸려 있는 큰 무늬의 양탄자, 탁상시계,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진 시끌벅적한 거리의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벌써 오래 전에 집을 떠나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힘들게 배운 지식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오후에는 다시 한 번 그리스어의 불변화사를 훑어보려고 했지만, 숙모가 그에게 같이 산 을 해왔다. 그 순간에 한스는 초원의 푸름이며 숲의 나뭇잎 소리를 심안으로 보았다. 그는 기꺼이 숙모의 제안에 따라 나섰다. 그러나 이곳 대도시에서의 산책이 고향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의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시내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스는 숙모와 단 둘이서 산책에 나섰다. 하지만 벌써 계단에서부터 불행이 시작되고 말았다. 이층에서 그들은 건방져 보이는 어느 뚱뚱한 여인과 마주쳤다. 숙모가 무릎을 굽혀 인사를 건네자마자, 그녀는 매우 능숙한 말솜씨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무려 15분 이상이나 그 자리에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한스는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옆에 서 있었다. 그 여인이 끌고 온 강아지는 한스의 냄새를 맡기도 하고, 짖어대기도 했다. 한스는 이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그 낮선 뚱보 아줌마가 코에 거는 안경 너머로 자꾸만 한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서기가 무섭게 숙모는 어느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숙모가 다시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한스는 수줍은 듯이 길거리에 서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옆으로 밀치기도 하고, 골목길의 아이들이 놀려대기도 했다. 상점에서 나온 숙모는 한스에게 넓적한 초콜릿을 한 개 주었다. 그는 초콜릿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예의바르게 했다. 다음 모퉁이에서 그들은 철로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손님을 가득 태우고, 끊임없이 종소리를 울려대며 거리를 달렸다. 마침내 넓은 가로수 길과 정원이 나타났다. 분수에서는 물이 솟구치고, 울타리를 두른 관상용 꽃밭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다.
자그마한 인공 연못에서는 금붕어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오가기도 하고, 짝을 지어 원을 그리듯이 빙빙 돌아다니기도 했다. 수많은 얼굴들, 가지각색의 우아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 자전거들, 환자용 휠체어들, 그리고 유모차들이 눈에 띄었다. 소란스러운 목소리들도 귀에 들려왔다. 숙모와 한스는 먼지투성이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마침내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숙모는 내내 수다를 떨며 이야기를 늘어놓았었다. 이제 그녀는 신음하듯이 크게 숨을 내쉬고는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초콜릿을 먹으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왜 안 먹으려고 하는 거니? 그러지 말고 어서 먹으려무나, 먹으라니까!
한스는 초콜릿을 끄집어내 잠시 은박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자그맣게 한 조각을 떼어 물었다. 초콜릿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숙모에게 바른 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초콜릿 조각을 입에 문 한스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삼키려고 애를 썼다. 그 사이에 숙모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낯익은 사람을 발견하고는 즉시 그리로 달려갔다.
여기 앉아 있도록 해라! 내가 곧 돌아올 테니.
한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서 손에 들고 있던 초콜릿을 잔디밭에 냅다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박자를 맞추어 흐느적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주위의 사람들을 이리저리 쳐다보고 있노라니 문득 자신이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스는 다시 한 번 불규칙동사를 외워보려고 했지만, 끔찍하게도 거의 아무 것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외웠던 모든 지식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바로 내일이 주 시험인데!
이윽고 숙모가 한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올해에는 118명이나 되는 수험생들이 주 시험에 응시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들 가운데 36명만이 합격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소년은 무척이나 풀이 죽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한스가 이번에도 음식을 전혀 먹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를 단단히 꾸짖어 주었다. 심지어 숙모마저도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밤에 한스는 깊이 잠들기는 했지만, 힘에 겨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꿈에 시달렸다. 그는 117명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시험장에 앉아 있었다. 시험관은 고향의 마을 목사나 숙모와 비슷해 보였다. 한스 앞에는 자신이 먹어야 하는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가 눈물을 머금으며 초콜릿을 먹는 사이에 다른 수험생들은 차례로 일어나더니 좁은 문을 통해 나가는 것이었다. 모두들 주어진 초콜릿을 다 먹어치웠다. 하지만 한스의 눈앞에 놓인 초콜릿 더미는 자꾸 커져갔다. 급기야는 책상과 의자 위로 넘친 나머지 당장이라도 그를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다음날 아침, 한스는 커피를 마시며 시험에 늦지 않기 위해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시각에 고향 마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는 아침 수프를 먹기 전에 기도를 올렸다. 그의 가족과 숙련공들, 그리고 두 명의 견습공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플라이크 아저씨는 여느 때나 하는 조찬 기도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오, 주님! 오늘 시험을 치르는 한스 기벤라트 학생을 보살펴주소서. 그를 축복하시고, 강하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한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는 올바르고 씩씩한 일꾼이 되게 하소서!
한스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마을 목사는 아침 식사를 하며 부인에게 말했다. 이제 기벤라트가 시험장에 들어갈 시간이오. 두고 보구려, 언젠가 그 아이는 훌륭한 인물이 될 테니까. 틀림없이 모두들 그 아이를 눈여겨보게 될 걸요.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아이에게 라틴어를 가르친 게 헛된 노력은 아닌 게지요.
한스의 담임 선생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생들에게 말했다. 자, 지금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주 시험이 시작되고 있을 거다. 우리 모두 기벤라트의 행운을 빌자꾸나. 물론 그에게 행운 따윈 필요하지도 않을 거야. 너희 같은 게으름뱅이 놈들이 열 명쯤 모여도 당해 내지 못할 만큼 그는 똑똑하니까. 거의 모든 학생들이 자리를 비운 한스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합격이나 낙제에 내기를 건 학생들은 특히 더 그랬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원과 관심은 쉽사리 먼 거리를 뛰어넘어 멀리까지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한스 또한 자신을 생각해 주는 고향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조교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와 함께 시험장에 들어섰다. 무척이나 부끄럽고 두려웠다. 안색이 창백한 소년들로 가득 찬 커다란 강당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취조실에 갇혀 있는 범죄자처럼 여겨졌다. 교수가 들어오더니 학생들에게 조용하도록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고는 라틴어의 문체 연습 텍스트를 받아쓰게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시험 문제가 너무 쉬운 나머지 우습게 여겨졌다. 거의 흥얼거리듯이 재빨리 초안을 작성하고 나서는 깨끗한 필체로 조심스럽게 정서해 내려갔다. 한스는 답안지를 가장 먼저 낸 수험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시험을 치르고 난 뒤에 그는 숙모 댁으로 가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두 시간이나 무더운 도시의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다시 얻은 균형감각이 그의 기분을 그다지 해치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잠시나마 아버지와 숙모의 곁을 떠나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적이 기쁘기조차 했다. 소음으로 가득 찬 낯선 수도의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마치 자신이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모험가처럼 여겨졌다. 한스는 시내를 온통 헤매고 다니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수없이 물어보았다. 힘겨운 방황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숙모 댁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선 한스에게 질문이 퍼부어졌다.
어떻게 했니? 어땠어? 시험은 잘 본 거니?
쉬웠어요
그는 뿌듯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건 제가 벌써 5학년 때 번역할 수 있었던 문제였거든요.
한스는 자유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여러 친지들과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한스를 끌고 다녔다. 거기서 한스는 우연히도 주 시험을 보러 괴핑엔에서 온 어느 소년을 만났다. 검정옷을 입은 그 아이는 어쩐지 수줍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두 소년은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먹한 듯하면서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넌 라틴어 시험이 어땠다고 생각하니? 쉬웠지, 안 그래? 한스가 물었다. 그래, 무척 쉬웠어.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란다. 사람들은 쉬운 문제에서 실수를 많이 하게 되는 법이거든. 주의를 게을리 하다 보면 말야. 틀림없이 그 안에 함정이 숨겨져 있는 거라고.
정말 그럴까?
물론이지. 그 분들이 그렇게 멍청하진 않거든.
한스는 약간 놀란 기색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머뭇거리며 물어보았다.
너 아직 시험 문제 가지고 있니?
괴핑엔 소년이 자기 노트를 가지고 왔다. 두 소년은 한 단어도 빠뜨리지 않고, 차근하게 시험 문제를 살펴나갔다.
괴핑엔 소년은 라틴어에 매우 능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는 두 번씩이나 한스가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문법 용어를 언급했다.
그런데 내일은 무슨 시험을 보게 되지?
그리스어하고 작문이야.
괴핑엔 소년은 한스가 다니는 학교에서 얼마나 많은 수험생들이 왔는지 물어보았다.
아무도 안 왔어.
한스가 말했다.
나 혼자 뿐이야.
그래? 우리 괴핑엔에서는 열두 명이나 왔단다! 우리 가운데 세 명은 무척 뛰어난 아이들이야. 모두들 그 아이들이 가장 좋은 성적을 얻게 될 거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어. 지난해에도 괴핑엔에서 온 아이가 수석을 차지했었거든. 넌 시험에 떨어지면, 김나지움에 갈거니?
지금까지 한스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글쎄, 모르겠어. 아니, 아마 그러진 않을 거야.
그래? 난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계속 공부하게 될 거야. 우리 엄마가 날 울름으로 보내주신다고 했거든.
그 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한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 명의 천재뿐 아니라, 열두 명이나 되는 괴핑엔 소년들도 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한스는 이들 앞에 감히 얼굴을 내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한스는 곧바로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mi로 끝나는 도사들을 다시 한 번 죽 훑어보았다. 그는 라틴어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리스어는 조금 달랐다. 한스는 그리스어에 깊이 빠질 만큼 그 언어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지 그리스어로 된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특히 크세노폰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산뜻하게 씌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귀엽고, 힘차게 울려 퍼졌다. 거기에는 멋들어진 자유 정신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법을 공부하거나 독일어를 그리스어로 옮겨 적어야 할 때면, 마치 서로 상반되는 규칙과 형태투성이인 미로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 낯선 언어 앞에서 한스는 그리스어의 철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첫 수업 시간에 느꼈던 겁에 질린 듯한 소심함을 다시 느끼는 것이었다.
다음날에는 예정된 시험 순서에 따라 그리스어와 독일어 작문 시험을 치렀다. 그리스어 시험은 매우 길었다. 더군다나 그다지 쉬워 보이지도 않았다. 논술 시험의 주제는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자칫하면 문제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10시경부터 시험장이 찌는 듯이 무더워지기 시작했다. 한스는 별로 좋지도 않은 펜으로 답안을 써 내려갔다. 그래서 그리스어 시험을 다시 정서할 때까지 답안지를 두 장이나 망쳐버렸다. 작문 시간에는 옆에 앉은 뻔뻔스러운 수험생 때문에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그 소년은 질문을 적은 종이 쪽지를 한스에게 들이밀고는 해답을 가르쳐달라고 옆구리를 찔러댔다. 하지만 옆에 앉은 수험생과의 접촉은 매우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만일 이 규칙을 어길 때에는 가차없이 시험장에서 쫓겨나게 되어 있었다. 겁에 질린 한스는 종이 쪽지에 (나를 가만히 내버려둬!)라는 글귀를 적어 그 학생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날씨가 무척 무더웠다. 시험장 안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끈질기게 책상 사이를 오가던 감독 교수도 삼베로 만든 손수건으로 여러 차례 얼굴을 닦았다. 한스는 두꺼운 입교식 예복을 입은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별로 달갑지 않은 심정으로 답안지를 제출하고 말았다. 마치 자신이 쓴 답안이 전부 틀리기라도 한 듯이, 그리고 이제 시험을 모두 망치기라도 한 듯이.
식탁에서 한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같은 얼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마구 퍼부어지는 질문공세에 대해 그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숙모가 그를 위로해 주기는 했지만, 격앙된 아버지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옆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다시 한 번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잘 보지 못했어요. 한스가 말했다. 왜 신중하질 못했니? 정신을 바짝 차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제기랄!
한스는 잠자코 있었다. 아버지가 욕설을 퍼부어 대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버진 그리스어를 전혀 모르시잖아요!
2시에 구술 시험에 가는 일이 가장 내키지 않았다. 그것은 이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찌는 듯한 시내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매우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한스는 고통과 불안, 그리고 현기증으로 인해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커다란 녹색 탁자에 자리잡고 있는 세 명의 심사위원들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10분에 걸쳐 몇 개의 라틴어 문장을 번역한 뒤에 이들이 묻는 질문에 대해 대답해 나갔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10분 가량 세 명의 다른 심사위원들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그리스어를 번역한 뒤에 다시 한 번 질문 공세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한스는 불규칙적인 형태의 부정과거에 대한 질문을 받았지만, 전혀 대답하지 못하고 말았다.
가도 좋아요. 저기, 오른쪽 문으로
문을 나서던 한스는 갑자기 그 부정과거형을 생각해 내고는 그대로 멈추어 섰다.
가세요
한 심사위원이 그에게 소리쳤다.
가라니까요! 아니면 혹시 어디가 불편한가요?
아닙니다. 하지만 부정과거형이 지금 생각났거든요.
한스는 방안을 향해 그 동사의 변화 형태를 크게 외쳤다. 그리고 심사위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았다. 한스는 타는 듯한 머리를 감싼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지금까지 오갔던 질문과 답변을 생각해 내려고 애써보았지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커다란 녹색의 탁자, 프록코트를 입고 진지한 얼굴 표정을 한 세 명의 늙은 심사위원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책, 그리고 그 책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떨리는 손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릴 뿐이었다.
맙소사, 도대체 그가 어떤 답변을 했던가!
한스는 거리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 및 벌써 몇 주 동안이나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한 더 이상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고향의 정원과 잣나무가 우거진 푸른 산, 강변의 낚시터가 마치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오래 전에 한 번 본 듯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 오늘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쨌든 한스는 시험을 망치고 말았다.
한스는 우유빵을 하나 사들고는 오후 내내 시내를 돌아다녔다. 아버지에게 변명을 늘어놓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집에 돌아와 보니 모두들 한스를 걱정하고 있었다. 한스는 피곤하고 처량해 보였다. 가족들은 그에게 달걀 수프를 먹였다. 그러고는 그를 침대로 보내었다. 내일은 산수와 종교 시험을 볼 차례였다. 그 시험만 끝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날 오전에 치른 시험은 별 탈이 없었다. 어제는 전공 분야에서 불운을 겪었지만, 오늘은 모든 문제가 잘 풀려나갔다. 한스에게는 쓰디쓴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좋아.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집으로!
시험이 다 끝났어요. 이제 우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됐어요.
한스가 숙모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고 싶어하셨다. 온 가족이 탄슈타트로 가서, 그곳 온천 공원에서 커피를 함께 마시자고 했다. 하지만 한스는 오늘 혼자만이라도 떠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허락해 주었다. 한스는 기차역까지 배웅을 받았다. 차표를 손에 쥔 한스는 숙모로부터 작별의 입맞춤을 받았다. 숙모는 그에게 간식도 주었다. 기차에 피곤한 몸을 실은 한스는 아무 생각도 없이 푸른 구릉지를 지나 고향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검푸른 잣나무 숲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야 비로소 환희와 구원의 감정이 소년을 들뜨게 만들었다. 한스는 늙은 하녀와 자그마한 자기 방, 교장 선생과 지붕이 낮은 정든 교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과의 재회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기차역에는 호기심어린 낯익은 얼굴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한스는 자그마한 가방을 손에 든채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서둘러 집으로 걸어갔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좋은 시간 보냈니?
늙은 안나가 물었다.
좋은 시간이라고요? 아니, 도대체 시험이란 게 무슨 좋은 일이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전 다시 돌아온 게 그저 기쁠 뿐이에요. 아빠는 내일 오실 거예요.
한스는 시원한 우유를 한 컵 마시고 나서 창문 앞에 걸려 있는 수영 바지를 집어들고는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즐겨 수영하는 강가의 초원으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그는 시내에서 훨씬 떨어진 저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높이 솟은 덤불 사이로 수심이 깊은 강물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거기서 한스는 옷을 벗고, 조심스럽게 손과 발을 차가운 물 속에 담갔다. 추위에 약간 떨기는 했지만, 그래도 재빨리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스는 약한 물살을 거슬러 천천히 헤엄쳤다. 요즈음 며칠 사이에 쌓였던 땀과 두려움이 미끄러지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강물이 그의 가냘픈 몸을 식히며 어루만지는 동안, 새로운 의욕으로 충만해진 한스의 영혼은 아름다운 고향을 되찾은 것이다.
그는 힘차게 헤엄쳤다. 그러고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또다시 힘차게 헤엄쳤다. 그러고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또다시 헤엄쳐 갔다. 상큼한 차가움과 피곤함이 그를 에워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등을 뒤로하고 누운 채 다시 강물을 따라 내려갔다. 저녁파리들이 황금빛 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한스는 그 가느다란 날갯짓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늦은 저녁 하늘을 가로지르며 바삐 날아가는 자그마한 제비떼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산너머로 사라진 태양이 하늘을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한스는 다시 옷을 주워 입고, 꿈에 잠긴 채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골짜기에는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한스는 상인 자크만의 정원을 지나쳐 갔다. 거기서 그는 아주 어렸을 때, 몇몇 친구들과 함께 아직 여물지도 않은 자두를 몰래 따먹은 적이 있었다. 한스는 키르히너의 목재소도 지나쳐 갔다. 거기에는 흰 잣나무에서 잘라낸 목재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예전에 그는 낚시하러 갈 때면 언제나 이 목재 더미 아래서 지렁이를 찾아내곤 했다. 감독관 게슬러의 작은 저택도 지나쳐 갔다. 2년 전에 한스는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게슬러의
딸 엠마에게 말을 걸고 싶어 애를 태우기도 했다. 한스와 동갑내기인 그녀는 마을 전체에서 가장 귀엽고, 우아한 여학생이었다. 그 당시에 한스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녀의 손을 잡아보는 것이 단 하나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한스가 너무나도 수줍어했기 때문에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뒤에 엠마는 기숙사로 보내졌다. 이제는 그녀의 얼굴도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또다시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추억은 뒤의 다른 경험과는 전혀 다른 짙은 색깔을 띠었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야릇한 향내를 풍겼다. 그 시절에는 저녁 무렵이면 나숄트 집안의 리제에게로 놀러갔었다. 그리고 안채로 이르는 통로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함께 감자 껍질을 벗기며 옛날이야기를 듣곤 했다. 일요일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둑 아래로 달음박질을 쳤다. 그러고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가재나 금붕어를 잡기도 했다. 어떤 때는 나들이옷을 흠뻑 적신 채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한테 매를 맞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수수께끼같이 이상야릇한 일들과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한스는 오랫동안 이 모든 것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목이 구부러진 구둣방 아저씨 슈트로마이어^36^사람들은 그가 자기 부인을 독살했다고 믿었다. 보따리를 등에 걸머지고, 나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 지방의 각지를 떠돌아다니던 모험가 (베크 씨)^36^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름에 언제나 씨를 붙였다. 왜냐하면 예전에 그는 멋진 마차와 더불어 네 마리나 되는 말을 소유했던 부유한 재력가였기 때문이다.
이제 한스는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단지 이름만 기억할 뿐이었다. 이 어둡고 비좁은 골목길의 세계가 그로부터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 대신에 생동감이 넘치는 어떤 다른 체험도 달리 생겨나지는 않았다.
다음날도 쉬는 날이었다. 한스는 아침 늦게까지 잠자리에 누워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낮에는 기차역에서 아버지를 마중했다. 아버지는 슈튜트가르트에서의 즐거웠던 시간의 행복감에 흠뻑 빠져 있었다.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원하는 건 뭐든지 내게 말해도 좋다.
아버지는 유쾌한 기분으로 말했다. 한 번 잘 생각해 보려무나!
아녜요. 다 틀렸어요.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 분명히 떨어졌을 거예요.
바보 같은 소리 좀 그만 해라. 어째서 그러니!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원하는 걸 말하는 게 좋을거야.
방학 때 다시 낚시하러 가고 싶어요. 허락하시는 거죠?
그래, 좋아. 네가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일요일이었던 다음날 아침에는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소낙비가 마구 퍼부었다. 한스는 몇 시간이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치른 시험 문제를 다시 한 번 면밀하게 살펴보며 자신이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사실, 그리고 더 잘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밖에는 다른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합격은 꿈조차 꿀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어지러운 두통! 불안감이 그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스는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저, 아버지!
왜 그러니?
뭐 좀 물어보려고요. 아까 그 소원에 관한 건데요. 전 그냥 낚시를 그만 둘래요.
그래,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지금 또 그 얘길 하는 거니?
왜냐하면, 제가, 저, 제가 물어보려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혹시 제가
속 시원히 말해 보려무나. 이게 웬 꼴사나운 짓이냐! 그래, 뭔데?
혹시 제가 시험에 떨어지게 되면, 김나지움에 다녀도 될까 해서요.
기벤라트 씨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뭐라고? 김나지움이라고?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한 채 소리를 질렀다.
네 녀석이 김나지움에 가겠다고? 도대체 어느 놈이 네게 그런 짓을 일러주던?
아무도 그런 말 안 했어요. 그냥 제가 한 번 생각해 본 거예요.
극도의 두려움이 소년의 얼굴에 스며 있었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 가보거라. 가봐!
그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마 네가 긴장해서 그런 걸 거야. 원, 김나지움엘 가겠다니! 넌 내가 뭐 상공회의소의 고문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니?
아버지는 손을 내저으며 매우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스는 체념에 잠겨 고개를 떨군 채 밖으로 나왔다.
저게 사내녀석이야!
아버지는 아들의 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럴 수가! 이젠 저 녀석이 김나지움엘 다 가려고 하다니! 그래, 맘대로 하려무나. 넌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한스는 반시간 가량이나 창턱에 걸터앉아 깨끗이 닦여있는 마룻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신학교나 김나지움이나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될 경우에 어떻게 될지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마 치즈 가게나 사무실의 견습생으로 일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여지껏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던 바로 그 가련한 여느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귀엽고 영특한 소년 한스의 얼굴이 분노와 고뇌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분에 겨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침을 뱉은 뒤에 옆에 놓여 있던 라틴어 시선집을 집어들고, 벽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비를 맞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월요일 아침, 한스는 일찍 학교에 갔다.
잘 있었니?
교장 선생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제 나한테 올 줄 알았는데. 그래, 시험은 어땠니?
한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 왜 그러니? 잘 보지 못한 게야?
그런 거 같아요.
자, 좀더 기다려보자꾸나!
그 늙은 신사는 한스를 위로해 주었다.
아마 오늘 오전중으로 슈투트가르트에서 소식이 올 거야.
오전 시간이 끔찍스러울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도 한스는 속으로 울멱이며 제대로 음식을 삼키지 못했다.
오후 2시에 한스는 교실에 들어섰다. 이미 거기에는 담임 선생이 와 있었다.
한스 기벤라트!
그는 큰 소리로 한스를 불렀다.
한스가 앞으로 걸어나갔따. 선생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기벤라트! 넌 이번 주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했단다.
축제 분위기에 싸인 적막감이 감돌았다. 문이 열리더니 교장 선생이 들어왔다.
축하한다. 그래, 이젠 무슨 말 좀 해보려무나?
소년은 놀라움과 기쁨에 넘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래,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니?
제가 그걸 미리 알기만 했다면, 정말이지 1등도 가능했을 거예요.
이 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자, 이젠 집에 가보도록 해라!
교장 선생이 말했다.
그리고 아버님께 이 소식을 알려드려야지. 앞으론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일 주일 뒤에는 방학이 시작되니까.
소년은 현기증을 느끼며 길거리로 나섰다. 길가에 늘어선 보리수와 햇살 아래 펼쳐진 시장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예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더 아름답고, 의미깊고, 즐겁게 보였다. 그가 시험에 합격하다니! 더군다나 2등으로 말이다! 처음에 느꼈던 기쁨의 소용도이가 서서히 걷히고, 차츰 감사의 메아리가 울려퍼졌다. 이제 그는 마을 목사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그는 상급 학교에 올라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치즈 가게나 사무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다시 낚시도 하러 갈 수 있었다. 한스가 집뎅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현관에 서 있었다.
뭐, 새로운 소식이라도 들었니?
아버지가 넌지시 물었다.
별 거 아녜요. 이젠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된대요.
뭐라고? 도채체 그게 무슨 소리냐?
전 이제 신학교 학생이니까요.
아니, 세상에. 그럼 네가 시험에 합격했단 말이냐?
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적은 어땠니?
2등으로 붙었어요.
그것은 아버지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였다. 그는 할 말을 잊은 채 아들의 어깨를 계속 두드렸다. 그러고는 할 말을 잊은 채 아들의 어깨를 계속 두드렸다.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뒤에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입을 열기는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마침내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한스는 안으로 뛰어들었다. 다락방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 텅 빈 다락방의 벽장을 열어 젖혔다. 그러고는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상자와 실뭉치, 코르크 마개를 잇는 대로 끄집어냈다. 한스의 낚시 도구였다. 이제는 칼로 잘 다듬어 멋들어진 낚싯대를 만드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로 내려갔다.
아빠, 주머니칼 좀 빌려주세요!
뭐에 쓰려고?
나뭇가지를 잘라 낚싯대를 만들려고요. 전 낚시하러 갈 거예요.
아버지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자
그는 환한 얼굴로 위엄있게 말했다.
여기 2마르크가 있다. 그걸로 칼을 사도록 해라. 한프리트 씨에게로 가지 말고, 길 건너편에 있는 도공한테 가서 사거라.
한스는 즉시 대장간으로 달려갔다 대장간 아저씨는 시험에 관해 물어보았다. 한스가 시끄러운 오리나무와 개암나무가 강을 따라 브리웨다리 아래로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거기서 한스는 꽤나 오래 고른 끝에 흠집이 없고 유연한 가지를 잘라내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한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눈망울을 번뜩이며 즐거운 기분으로 낚싯대를 다듬었다. 그 일은 낚시질 그 자체에 못지 않은 즐거움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오후내내, 그리고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한스는 그 일에 매달렸다. 헝클어진 희색과 갈색, 녹색의 실을 나누어 꼼꼼하게 살핀 뒤, 끊겨진 실을 잇기도 하고, 서로 뒤엉켜진 매듭을 풀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모양과 크기의 코르크 마개와 깃축을 살펴보기도 하고, 새로 깎기도 했다. 망치질을 해서는 무겁거나 가벼운 자그마한 납덩이들을 틈새를 갖춘 둥근 형태로 만들었다. 그 틈새에 낚싯줄을 끼워 무게를 붙이게 되어 있었다. 다음으로는 낚싯바늘 차례였다. 한스는 서너 개의 낚싯바늘을 보관해 두었었다. 그것들을 네 겹의 검은 재봉실이나 장막현, 그리고 꼬아 엮은 말총끈에 단단히 동여매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작업이 모두 끝났다. 이제 한스는 7주나 되는 기나긴 방학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그에게는 낚싯대가 전부였다. 그것만 손에 들고 있으면, 혼자서 강가에 앉아 얼마든지 하루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2장
여름 방학은 이래야 한다! 산 위에는 용담처럼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눈부시게 빛나는 무더운 날들이 몇 주일이나 계속되었다. 이따금 세찬 폭풍우가 갑작스럽게 몰아칠 뿐이었다. 강물은 사암 바위들과 잣나무 숲의 그늘, 그리고 좁은 골짜기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따스했기 때문에, 저녁 늦게라도 물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마른풀과 베어놓은 풀의 내음이 마을을 휘감고 퍼져나갔다. 밀밭의 좁다란 두렁은 누렇게 금빛이 도는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냇가에는 독미나리처럼 희게 피어난 풀들이 어른의 키만큼이나 높다랗게 우거져 있었다. 우산 모양의 그 꽃들은 언제나 조그마한 딱정벌레들로 뒤덮여 있었다. 사람들은 속이 빈 줄기를 잘라내어 크고 작은 파리를 만들기도 했다.
숲가에는 솜털과 노랑꽃을 가진 양담배풀이 위엄을 드러내며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가늘고도 억센 줄기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부처꽃과 분홍바늘꽃은 골짜기를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안쪽 잣나무 아래에는 빨간 디기탈리스가 품위 있고 아름다우면서도 이국적인 자태를 자랑하며 피어 있었다. 그 꽃은 은빛 나는 털을 지닌 넓적한 근생엽과 튼튼한 줄기, 그리고 높다랗게 늘어선 예쁜 분홍빛의 꽃받침을 가지고 있었다. 옆으로는 갖가지의 버섯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불그레한 빛을 반짝이는 파리버섯, 두껍고 넓적한 우산버섯, 괴상스럽게 생긴 선옹초, 붉은 가지가 많이 난 싸리버섯, 그리고 이상하게도 색깔이 없으면서 엷게 기름기가 넘치는 석장초. 숲과 초원사이의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두렁에는 아귀 센 금작화가 불에 그을린 듯한 짙은 황색으로 반짝이고, 라일락 담자색의 길쭉한 석남화가 무리지어 있었다. 그리고 재벌 풀베기를 바로 눈앞에 둔 초원에는 황새냉이, 동자꽃, 꿀풀, 체꽃이 다채롭게 우거져 있었다.
활엽수림에서는 방울새들이 쉼없이 지저귀고 있었다. 잣나무 숲에서는 여우 빛깔을 띤 다람쥐들이 나무 꼭대기에서 뛰놀고 있었다. 두둑과 담장, 메마른 풀로 뒤덮인 묘터에는 초록 도마뱀들이 따사로운 햇볕 아래 편히 숨쉬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매미의 드높은 울음소리가 초원 너머로 끝없이 울려 퍼졌다.
마을은 이맘때면 시골풍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마른풀을 실은 마차와 그 풀내음, 낫을 가는 소리가 거리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만일 여기에 두 채의 공장 건물이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누구나 자신이 시골에 있다는 착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방학 첫날, 한스는 늙은 안나가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부엌에 나와 조급한 마음으로 커피를 기다렸다. 한스는 불을 지피는 일을 거들고 난 뒤에 빵을 가져와서는 신선한 우유를 탄 차가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남은 빵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밖으로 나갔다.
한스는 철둑 위에서 멈추어 섰다. 둥근 양철통을 바지 주머니에서 끄집어내어 부지런히 메뚜기를 잡기 시작했다. 기차가 스쳐 지나갔다. 철길이 무척이나 가파르게 뻗어 있었기 때문에, 기차는 느긋한 속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모두 열린 창문 너머로 승객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흥겹게 나부끼는 깃발처럼 연기와 증기를 길게 내뿜으며 달리고 있었다. 빙빙 돌며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는 어느덧 햇살이 가득한 이른 아침의 맑은 하늘로 사라져갔다. 이 모든 풍경이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한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치 잃어버린 아름다운 시간을 이제 갑절로 다시 찾으려는 듯이. 그리고 전혀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듯이.
메뚜기를 담은 통과 새로 만든 낚싯대를 손에 든 한스는 다리를 건너 수풀을 지나 말을 씻기는 웅덩이로 갔다. 그곳은 강가에서 가장 깊은 곳이었다. 그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한스의 가슴은 남 모르는 기쁨과 사냥꾼의 즐거움이 넘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곳에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버드나무에 기대어 편안하게 낚시질을 즐길 수 있는 터가 있었다. 한스는 실을 풀어 조그마한 납덩이를 달아매고, 낚싯바늘에 살진 메뚜기를 가차없이 찔러 꽂았다. 그러고는 강의 한가운데로 힘껏 내던졌다.
익히 알려져 있는 오래된 유희가 다시 지작되었다. 자그마한 붕어떼가 먹이를 따먹으려고, 낚싯바늘 주위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먹이가 없어졌다. 두번째 메떠기의 차례가 되었다. 잠시 뒤에 또 다른 메뚜기가 매달렸다. 네번째 메뚜기와 다섯번째 메뚜기도 뒤를 이었다. 한스는 더욱더 조심스럽게 먹이를 바늘 끝에 꽂았다. 마침내 그는 낚싯줄을 무겁게 하기 위해 납덩이를 하나 더 매달았다. 이제 처음으로 제법 당치가 큰 물고기가 낚싯밥을 건드려보았다. 그 무고기는 낚싯밥을 물고는 조금 자아 당기다가 그냥 놓아버리더니 다시 한 번 달려들어 먹이를 덥석 물어버렸다. 훌륭한 낚싯꾼은 낚싯대와 줄을 통해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스는 재빠르게 나꿔챈 뒤에 무척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물고기가 바늘에 물려 있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물고기는 황어였다. 한스는 그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담황색으로 빛나는 넓적한 몸뚱이와 세모난 머리, 그리고 매우 아름다운 살색의 배지느러미. 이 물고기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하지만 제대로 어림잡기도 전에, 물고기는 필사적으로 몸뚱이를 뒤틀기 시작했다. 강물 위에서 두려움에 못 이겨 발버둥치던 물고기는 결국 도망치고 말았다. 물고기가 서너 차례 물 속에서 선회하다가 은빛 번개처럼 물 속 깊이 사라지는 모습을 한스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볼뿐이었다.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꽉 물지 않았던 것이다.
낚시꾼은 이제 낚시질의 흥분과 긴장 상태에 사로잡혔다. 한스의 두 눈은 수면에 닿아 있는 가느다란 갈색의 낚싯줄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의 몸놀림은 군더더기가 없이 빠르고, 확실했다. 두 번째 황어가 먹이를 물더니 다시 빠져나갔다. 그 다음에는 아쉽게도 자그마한 잉어가 걸렸다. 그리고 세 마리의 망둥이가 연달아 낚였다. 망둥이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생선이었다. 그래서 한스는 무척이나 기뻤다. 그 물고기는 작은 비늘이 기름진 몸뚱이, 우스꽝스럽게 하얀 수염이 달린 두툼한 머리, 조그만 눈과 가늘고 긴 아랫몸뚱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녹색과 갈색 사이의 색깔을 띠고 있다가도 일단 뭍에 올라오기만 하면, 강철 빛깔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태양은 높이 솟아올랐다. 둑 위로는 물거품이 하이얀 눈처럼 빛나고, 수면 위에는 따사로운 산들바람이 흔들거렸다. 하늘 위로는 손바닥 크기만한 눈부신 구름 조각 여럿이 <무크베르크> 위에 떠 있었다. 무더운 날씨였다. 푸른 하늘 한가운데 조용히 떠도는 하이얀 구름 조각이 한여름날의 무더위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자그마한 구름 조각들은 오래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햇빛을 담뿍 머금고, 햇빛에 흠뻑 젖어 있었다. 구름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종종 날씨가 얼마나 무더운지 모를 수도 있다. 푸른 하늘이나 반짝이는 수면에서가 아니라, 한낮의 범선인 구름 조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사람들은 갑자기 찌는 듯한 태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늘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땀으로 얼룩진 이마를 손으로 닦아내는 것이다.
한스는 차츰 낚시질에 흥미를 잃어갔다. 약간 피곤하기도 했다. 어차피 이때쯤이면 늙고 큰 은빛 황어들은 햇빛을 쬐려고 수면위로 올라온다. 이것들은 거무스레한 빛깔을 띤 채 강을 거슬러 헤엄쳐 간다. 그러다가도 때로는 공연히 깜짝 놀라기도 한다. 어쨌든 이때쯤에는 낚싯밥을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한스는 낚싯줄을 버들개지 너머로 물에 드리웠다. 그러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푸른 강물을 바라보았다. 물고기들이 거무스레한 등을 보이며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느릿하게 살며시 헤엄치면서. 따뜻한 날씨에 유혹되어 마술에 라도 걸린 듯이. 물고기들은 따스한 물 속에서 기분이 좋겠지! 한스는 장화를 벗고, 물 속에 발을 담갔다. 물의 윗부분은 제법 미지근했다. 한스는 자신이 낚은 물고기들을 살펴보았다. 저것들은 커다란 주전자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다가 가끔 살며시 파닥거릴 뿐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물고기들이 움직일 때마다 흰색과 갈색, 녹색과 은색, 옅은 황금색과 청색, 그리고 다른 여러 색깔들이 비늘과 지느러미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적막으로 휩싸여 있었다. 다리 위를 달리는 차 소리나 물레방아의 덜그덕거리는 소리도 여기서는 아주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단지 하이얀 거품이 이는 둑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물소리만이 들려왔다. 조용히, 서늘하게, 졸음에 잠긴 듯이. 그리고 뗏목의 말뚝을 스쳐 도는 물살의 나지막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법과 문체론, 산수와 암기, 그리고 오랫동안 쉬지도 못한 채 쫓기는 듯이 살아온 1년이라는 세월. 이 모든 괴로운 방황도 졸음에 잠긴 따스한 한나절 속으로 조용히 잠겨버렸다. 한스는 약간 머리의 통증을 느꼈지만, 여느 때처럼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이제 다시 예전처럼 강가에 앉은 한스는 둑에서 흘러내리는 하이얀 물거품이 물보라가 되어 흩날리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깜박거리며 드리운 낚싯줄을 지켜보았다. 그의 곁에서는 낚아올린 물고기들이 주전자 안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척 멋진 일이었다.
이따금 자신이 주 시험에 합격한 일이 문득 떠올랐다. 게다가 2등으로 합격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한스는 맨발로 물장구를 치며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꽂아 넣고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정작 한스는 휘파람을 불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오래된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학교 친구들로부터 무척이나 놀림을 당하기도 했었다. 고작해야 그는 이빨 사이로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어대는 정도였지만, 자기 혼자서 즐기기에는 그만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아무도 그의 휘파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은 교실에 앉아 지리 공부를 하고 있을 게다. 한스 혼자서만이 자유롭게 수업을 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는 같은 또래의 모든 아이들을 앞질러버렸고, 그 아이들은 이제 그의 발아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한스를 몹시 놀렸다. 한스는 아우구스트 이외에 친한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싸움이나 놀이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자, 이제 네 녀석들은 내 뒷모습이나 멍하니 쳐다볼 테지! 야, 이 오소리 같은 놈들, 얼간이 같은 놈들아! 이 순간, 한스는 그들을 무척 경멸했다. 그래서 입을 삐죽거리기 위해 잠시 휘파람을 멈추었다. 낚싯줄을 걷어올리던 한스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낚싯바늘에 꿰어놓은 먹이가 다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는 통 속에 남아있던 메뚜기들을 놓아주었다. 메뚜기들은 취한 듯이 흐느적거리며 마지못해 낮은 잔디 속으로 기어들었다. 옆에 있는 제혁 공장에서는 이미 점심 시간이었다. 이제 한스도 식사를 하러 갈 시간이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 모두 거의 말이 없었다.
고기 얼마나 잡았니?
아버지가 물었다.
다섯 마리요
아, 그래? 아무튼 나이 든 큰 물고기들은 잡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어린 물고기들을 한 마리도 보지 못하게 될 테니까
대화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날씨가 무척이나 무더웠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정말이지 유감스러웠다. 그런데 왜 안 되는 걸까? 사람들은 해롭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이 정말로 해로운 것일까? 한스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른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종종 수영하러 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버릇없이 굴기에는 한스가 너무 성숙해 있었다. 하느님, 맙소사! 구두 시험에서 감독 교수들이 한스에게 <씨>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던가!
한 시간 가량 정원에 있는 붉은 잣나무 아래 누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쉴 만한 그늘은 충분했다. 책을 읽거나 날아다니는 나비를 바라보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거기서 2시까지 누워 있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하마터면 한스는 잠이 들어버릴 뻔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수여하러 갈 시간이었다.!
수영터가 있는 초원에는 어린 꼬마애들이 서너 명 가량 보였다. 큰 아이들은 지금 모두 교실에 앉아 있었다. 한스는 생각만 해도 그지없이 기뻤다. 아주 천천히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더운물과 찬물을 번갈아 가며 즐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잠시 헤엄치다가 물 속으로 잠수하기도 하고, 물을 철썩거리며 치기도 했다. 그러고는 강가에 배를 깔고 누워버렸다. 빠르게 말라 가는 피부에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어린 녀석들은 존경어린 표정으로 살그머니 한스 옆으로 기어왔다. 그렇다, 이제 한스는 유명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여느 아이들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햇빛에 그을린 가느다란 목덜미 위로 고운 머리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영혼이 충만한 듯한 얼굴과 남을 압도하는 듯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한스는 너무 말라 있었다. 가느다란 팔다리가 무척 연약해 보였다. 가슴과 등은 갈빗대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장딴지에는 살이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오후 내내 한스는 햇볕과 물 사이를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4시가 지날 즈음에는 대부분의 학교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야, 기벤라트! 넌 참 좋겠구나
한스는 느긋하게 팔다리를 뻗었다.
그래, 나쁘지 않아
신학교에는 언제 가는 거니?
9월에나 가게 될 거야. 지금은 방학중이거든
한스는 학교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누군가가 조롱 섞인 시구를 읊을 때에도 한스는 태연스럽게 그대로 누워 있었다.
만일 지금 내가 슐체 리자베트처럼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대낮에도 침대에 누워 있는데.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네.
한스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한 아이다 단숨에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먼저 조심스럽게 물을 끼얹어 몸을 식혔다. 헤엄치기 전에 잔디밭에 드러눕는 아이들도 있었다. 멋진 잠수를 선보인 아이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위에서 물 속으로 떠밀린 아이는 겁에 질린 나머지 "사람살려!" 하고 외쳐댔다. 아이들은 서로 뒤쫓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헤엄치기도 했다. 그리고 잔디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아이들에게 물을 뿌리기도 했다. 첨벙거리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강가의 잔디는 물에 젖은 옅은 빛깔의 번지르르한 몸매들로 온통 빛나고 있었다.
한 시간 뒤에 한스는 그 자리를 떠났다. 물고기들이 다시 입질을 시작하는 따스한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갈 때까지 그는 다리 위에서 낚시질을 했지만,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물고기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낚싯바늘에 달려들기는 했지만, 미끼만 먹어치울 뿐이었다. 낚싯바늘에 매단 버찌가 너무 크거나 물렁한 모양이었다. 한스는 나중에 다시 한 번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저녁 식탁에 앉은 한스는 많은 친지들이 그를 축하하기 위해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오늘 발행된 주간지를 받아들었다. 거기에는 <공지사항>이라는 표제어 아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올해 우리 마을은 초급 신학교의 입학 시험에 단 한 명의 후보자인 한스 기벤라트를 보냈었다. 방금 우리는 그 소년이 2등으로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한스는 신문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자부심과 환호성으로 터질 지경이었다. 잠시 뒤에 그는 또다시 낚시하러 나갔다. 이번에는 두서너 개의 치즈조각을 미끼로 가지고 갔다. 치즈는 물고기들이 좋아하는 먹이일 뿐 아니라 어두운 날씨에도 눈에 잘 띄었다.
한스는 낚싯대를 내버려둔 채 간단한 손낚시를 가지고 갔다.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낚싯질이었다. 실을 손에 쥐고 하는 이 낚시질은 낚싯대나 낚시찌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낚싯줄과 낚싯바늘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약간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훨씬 재미가 있었다. 미끼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물고기가 먹이를 건드리거나 입으로 물거나 할 때에도 그 기미를 알아차려야 한다. 낚싯줄이 움찔할 때에는 바로 눈앞에서처럼 물고기들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낚시질에서 낚시꾼은 민첩한 손가락을 지녀야 하고, 탐정처럼 조심스럽게 주위의 동정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움푹 패인 좁다란 골짜기에는 강물이 굽이치며 휘감아 돌고 있었다. 어둠이 일찍 찾아 들었다. 강물은 거무스레한 빛깔을 띠며 다리 아래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아랫녘의 물레방아에는 벌써 불이 켜져 있었다. 떠들고 노래하는 소리가 다리와 골목길 너머로 울려 퍼졌다. 밤 공기는 약간 후텁지근했다. 강에서는 검게 보이는 물고기가 단숨에 물위로 뛰어올랐다. 이런 밤에는 물고기들이 놀랄 만큼 흥분하게 마련이었다. 이리저리 치닫기도 하고, 공중으로 퉁겨 오르기도 하고, 낚싯줄에 부딪히기도 하고, 겁도 없이 그냥 미끼를 향해 달려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치즈 조각이 다 떨어질 즈음에는 자그마한 잉어 네 마리를 건져 올렸다. 한스는 내일 이 물고기들을 마을 목사에게 가져다주려고 마음먹었다. 따스한 바람이 골짜기 아래로 불어왔다. 벌써 주위는 어두워졌지만, 하늘은 아직도 밝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마을에서는 교회의 탑과 성의 지붕만이 시커먼 윤곽을 드러내며 밝은 하늘을 향하여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아주 멀리서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따금 천둥소리가 아득하고 부드럽게 들려왔다.
한스는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머리와 팔다리가 편하면서도 나른하고 피곤했다. 무척 오랜만에 맛보는 느낌이었다.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름날들이 위로와 유혹의 날개를 펴며 한스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산책이나 헤엄, 낚시질, 그리고 몽상에 젖은 나날들이었다. 단지 1등이 되지 못한 것이 그를 불쾌하게 했다.
이른 아침, 한스는 벌써 목사관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강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마을 목사가 서재에서 나왔다.
오, 한스 기벤라트! 좋은 아침이구나! 축하한다, 정말 축하해, 너 거기 들고 있는 게 뭐니?
물고기인데요. 서너 마리밖에 안 돼요. 어제 낚시로 건져올린 거예요.
원, 이거 좀 보게나! 고맙다. 자, 들어오너라.
한스는 낯익은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여느 목사의 서재와는 다르게 보였다. 화초 냄새나 담배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다. 마을 목사가 소장하고 있는 훌륭한 책들은 거의 전부가 말끔하게 겉칠을 하고, 금박을 입힌 신간 서적이었다. 여느 교회의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책들은 아니었다. 그런 책들은 색이 바래고, 표지가 휘어지고, 곰팡이가 슬고, 얼룩이 져 있게 마련이었다. 서재를 좀 더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런히 정돈된 책들의 제목에서도 새로운 정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라져가는 세대의 존경할 만한 고전적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정신과는 또 다르다. 여느 목사의 서재에 꽂혀 있는 훌륭한 장서들, 예컨대 벵엘이나 외팅어, 슈타인호퍼, 또는 뫼리케의 <투름하안>에서 아름답게 그려진 경건한 가인들의 글들이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현대적인 작품들 속에 파묻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잡지 다발이나 강단, 서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책상, 이 모든 것들이 높은 학식과 품위를 풍기고 있었다.
마을 목사가 이 서재에서 무척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물론 실제로도 목사는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설교나 교리문답, 성경 공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학술 잡지의 연구서와 논물, 그리고 자신의 저술에 필요한 사전 연구를 위해서였다. 몽상적인 신비주의나 예감에 가득 찬 명상도 여기서는 금기 사항이었다. 또한 학문의 깊은 골짜기 너머 사랑과 동정심으로 목마른 민중의 영혼에 다가서는 순박한 신학도 여기서는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 대신에 성경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가차없이 행해졌다. 그리고 <역사적인 예수>를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예술이라고 불리울 만한 신학이 있고, 학문이라고 불리울만한 신학이 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신학말이다. 그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과학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오래된 포도주를 언제나 새로운 술 포대에 담는다. 새로운 술 포대에 담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치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술가들은 언뜻 보기에 그릇된 주장들을 태연스럽게 고집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비평과 창조, 학문과 예술 사이의 불평등한 오랜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과학은 별다른 도움 없이 언제나 정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언제나처럼 예술은 믿음과 사랑, 위로와 아름다움, 그리고 연원에 대한 예감의 씨앗을 뿌려왔다. 또한 풍요로운 토양을 새로이 발견하여 온 것이다. 그것은 삶이 죽음보다 강하고, 믿음이 의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한스는 강단과 창문 사이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가죽 소파에 처음 앉아보았다. 마을 목사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그는 절친한 동료에게 하듯이 한스에게 신학교에서의 생활과 학업에 대해 이야기하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마을 목사가 말했다.
네가 거기서 겪게 될 새로운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신약성서의 그리스어를 배우는 걸 거야. 그걸 배우면 네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될 테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만큼이나 기쁨도 커지는 법이란다. 처음엔 언어를 익힌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그건 세련된 그리스어가 아니라, 새로운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특수 어법이란다.
한스는 주의깊게 귀를 기울였다. 마치 자신이 진정한 학문에 한 발짝 다가선 듯한 자랑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마을 목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틀에 박힌 교육은 당연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매력을 잃도록 만들게 마련이지. 신학교에서 배우는 히브리어도 처음에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될 거야. 그리스어를 한 번 배워둘 생각이라면, 이번 방학에 조금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니. 그럼 신학교에 가서는 다른 걸 할 수 있는 시간과 의욕이 남게 되는 거지. 누가복음 두세 장을 함께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리스어를 무척 손쉽게 익힐 수 있을 거야. 사전은 내가 빌려주도록 하지. 하루에 한 시간 가량, 기껏해야 두 시간 가량 매달려보는 거야. 물론 그 이상은 금물이란다. 넌 지금 무엇보다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니까 말아. 아무튼 이건 단지 제안에 불과한 거란다. 정말이지 난 네 멋진 휴가를 망치고 싶진 않단다.
물론 한스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마을 목사가 제안한 누가복음 공부는 마치 상쾌하고 푸른 자유의 하늘에 나타난 가벼운 한 조각 구름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 제안을 거절하기가 어쩐지 부끄러웠다. 더욱이 방학이나 휴가 때에 새로운 언어를 틈틈이 배운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운 일이었다. 어차피 한스는 신학교에서 배우게 될 새롭고도 다양한 공부에 대해 은근히 겁을 집어먹고 있던 터였다. 특히 히브리어가 그랬다.
한스는 흡족한 기분으로 목사관을 나선 뒤에 낙엽송이 늘어선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만족스럽지 못한 사사로운 감정은 이미 모두 사라져버렸다. 마을 목사와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더욱더 굳어져 갔다. 신학교에서도 다른 학우들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야망과 인내심으로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스는 꼭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 걸까? 그것은 한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3년 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선생들과 마을 목사, 아버지, 특히 교장 선생까지도 격려의 채찍질로 한스를 숨가쁘게 몰아세웠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우등생이었다. 맨 앞에 우뚝 서 있는 한스는 아무도 자기 곁에 다가서지 못하게 발버둥쳤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했다. 아무튼 주 시험에 대한 어리석은 걱정은 어느덧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물론 휴식을 갖는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일이었다. 산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에 바라보는 숲은 유난히 아름답게 보였다. 줄지어 늘어선 잣나무들이 회랑처럼 끝없이 펼쳐진 숲터를 청록색의 둥근 천장으로 뒤덮고 있었다. 잡초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여기저기에 산딸기 덤불이 무성할 뿐이었다.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이끼로 뒤덮인 지대가 있었다. 거기에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이끼 위로 키 작은 월귤나무와 석남화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이미 이슬을 말라버렸다. 화살처럼 곧게 뻗은 나무 줄기 사이로 아침 숲의 색다른 무더위가 감돌고 있었다. 햇살의 따스함과 이슬의 아지랑이, 이끼의 냄새, 그리고 송진과 잣나무의 바늘잎, 버섯 등이 서로 어우러져 발산하는 이 향내는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듯이 살랑거리며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스는 이끼로 뒤덮인 언덕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다닥다닥 엉켜 있는 나무 줄기를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와 공연히 시샘하는 듯한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검은빛이 짙게 감도는 잣나무의 우듬지 사이로 그름 한 점 없이 검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게 뻗은 수많은 나무 줄기들이 저 멀리까지 육중한 갈색의 벽을 쌓고 있었다. 노오란 햇살이 여기저기 흩어지며 이끼 위에 따사로운 빛을 던지고 있었다.
애당초 한스는 멀리까지 걸어볼 생각이었다. 적어도 뤼첼 저택이나 크로쿠스 초원까지는. 하지만 지금 그는 이끼 위에 누워 산딸기를 먹으며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자신이 이처럼 피곤한지 의아스러웠다. 예전에는 서너 시간을 산책하면서도 전혀 피곤을 느끼지 않았었다. 한스는 다시금 힘을 내어 멀리 한 번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끼 위에 누운 한스의 시선은 나무 줄기에서 나무 꼭대기로, 그리고 또 다시 푸른 잔디위로 헤매고 있었다. 이 숲의 공기가 왜 그를 이다지도 피곤하게 만드는 걸까!
한스는 정오 무렵에 집에 돌아왔다. 또 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눈도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숲으로 난 언덕길에서 지나치게 따가운 햇살을 쬐었기 때문이다. 한스는 부득이 오후의 반나절을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다시금 강가로 가서 수영을 할 때에야 비로소 머리가 맑아졌다. 이제 마을 목사에게 갈 시간이었다.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는 작업장 창가에 놓여 있는 세발의자에 앉아 일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그가 한스를 불렀다.
얘, 어딜 가는 거니? 요즘엔 도무지 널 볼 수가 없구나.
마을 목사님 댁에 가는 길이에요
아니, 여전히 거길 간다고? 주 시험도 다 끝났잖니.
예, 근데 지금은 다른 거예요. 신약성서라고요. 제가 여지껏 배운 거하고는 전혀 다른 그리스어로 씌어져 있거든요. 이젠 그걸 배우려는 거예요.
구둣방 아저씨는 차양이 없는 모자를 눌러쓰고, 수심에 잠긴 듯한 넓적한 이마에 두꺼운 주름을 지었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할 말이 있다. 지금까진 시험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만, 이젠 주의를 좀 주어야겠고나. 넌 우리 마을 목사가 무신론자라는 걸 알아야 한다. 성서가 잘못이라느니, 거짓이라느니 하며 그 사람이 널 속일지도 몰라. 그런 목사와 신약성서를 읽다보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믿음을 잃게 되는 거란다.
하지만, 플라이크 아저씨. 전 그냥 그리스어를 배우는 것뿐이에요. 신학교에 가면 어차피 그걸 배워야 하거든요.
그야 넌 그렇게 말하겠지. 하지만 네가 성경을 경건하고 양심적인 선생님 밑에서 배우는 거하고, 사항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밑에서 배우는 거하고는 전혀 다르지.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분이 정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렇지 않아, 한스!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모두들 그 사실을 알고 있단다.
그럼, 전 어떡하죠? 배우러 가겠다고 벌써 약속을 해버렸는데요.
그렇다면 물론 당연히 가야지.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만든 거라든지, 성경이 사람들을 기만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성경이 성령에 의해 씌어진 게 아니라든지 하는 말을 듣기만 하면, 즉시 나한테 오너라. 그 문제에 대해 함께 얘길 나누자꾸나. 그렇게 해주겠니?
예, 플라이크 아저씨! 하지만 그렇게 심각하진 않을 거예요.
이제 곧 알게 될 거다. 하여튼 내가 한 말을 잊어선 안돼!
마을 목사는 아직 목사관에 돌아오지 않았다. 한스는 서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박을 입힌 책의 표지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한스는 방금 전에 구둣방 아저씨가 한 이야기 때문에 깊이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한스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마을 목사나 새로운 양식을 지닌 성직자들에 대해 주고받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야 처음으로 긴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런 문제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한스에게 있어 이 문제는 구둣방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거나 끔찍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여기서 오래된 위대한 비밀의 배후를 캐낼 수 있는 가능성을 예감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학교에 다닐 때에는 신의 존재라든가 영혼의 소재, 악마와 지옥 등에 대한 의문으로 인해 가끔 터무니없는 상념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혹들은 지난 몇 년에 걸쳐 모두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엄격한 교육 제도 아래서 공부에 전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한스가 학교에서 얻은 기독교적인 신앙은 고작해야 구둣방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나 개인적인 삶으로 되살아났다. 그 아저씨와 마을 목사를 비교하던 한스는 미소를 지었다.
힘든 세월을 거쳐 얻게 된 구둣방 아저씨의 준엄하고 확고한 신앙을 소년 한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풀라이크는 현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단순하고 편협하기도 했다. 그는 지나치게 독실한 신앙으로 인해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기도하는 모임에서는 엄격한 재판관이자 권위 있는 성경 해석가로 행세해 왔다. 또한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신앙심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그 외에는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소시민적인 수공업자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마을 목사는 풍부한 경험과 뛰어난 언변을 지닌 설교자일 뿐 아니라, 부지런하고 학식이 높은 인물이었다. 한스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올려다 보았다.
이윽고 마을 목사가 돌아왔다. 그는 프록코트를 벗고 나서 가벼운 차림의 검정색 실내 조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그리스어로 씌어진 누가복음의 원문을 한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것은 라틴어를 공부할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몇 안 되는 문장을 읽은 뒤에 하나하나의 단어를 차근차근 번역해 나갔다. 마을 목사는 별로 낯설지 않은 예문을 들어가며 재치있고 능숙한 어투로 이 언어의 근원적인 정신을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이 책이 생겨난 시대와 내력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단 한 시간만에 그는 학습과 독서의 전혀 새로운 개념을 소년 한스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한스는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시구와 단어 뒤에 어떠한 비밀과 사명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예로부터 수많은 학자들이나 명상가들이나 연구가들이 이러한 문제와 어떻게 씨름해 왔는지. 한스는 공부를 하는 가운데 마치 자신이 진리 탐구자의 세계로 발을 디뎌놓은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마을 목사는 한스에게 사전과 문법서를 빌려주었다. 한스는 집에 돌아와 저녁 내내 공부에 몰두했다. 얼마나 많은 공부와 학식의 산을 넘어야 비로소 참된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어떠한 난관이 닥친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구둣방 아저씨의 일은 잠시 한스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며칠 동안이나 이 새로운 존재 양식이 한스를 사로잡았다. 매일 밤마다 그는 마을 목사를 찾아갔다. 언제나 그에게는 진정한 학문이 보다 더 아름답고, 어려우면서도, 또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낚시하러 나섰다. 그리고 오후에는 수영하러 초원으로 갔다. 그 이외에는 거의 집에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주 시험에 대한 불안감과 승리감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던 야망이 다시금 살아나서는 한스에게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동시에 지난 몇 달 사이에 자주 느껴왔던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감정이 그의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통이 아니었다. 빠른 맥박과 흥분을 동반한 승리에 대한 조급함이었다. 또한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억제되지 못한 욕망이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어김없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섬세한 고열이 지속되며 독서와 학습의 성취는 폭풍처럼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한스는 예전에 15분 가량 걸리던 크세노폰의 가장 어려운 문장들을 이제는 손쉽게 잃을 수 있었다. 사전을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도 날카로운 이해력을 십분 발휘하여 무척이나 난해한 글들을 척척 읽어 내려갔다.
그래서 한스는 무척 기뻤다. 이처럼 고조된 학습 의욕과 인식 욕구와 더불어 자신감에 가득 찬 자아 의식이 더해 갔다. 마치 학교나 선생이나 학창 시절이 벌써 오래전에 흘러가 버린 것처럼, 그리고 지식과 능력의 고지를 향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혼자만의 길을 걷고 있기나 한 것처럼.
한스는 이런 느낌과 동시에 너무나도 선명한 꿈 때문에 자꾸 잠에서 깨어났다. 밤중에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할 때에는 성휘애 대한 강박관념이 그를 뒤흔들어 놓았다. 자신이 다른 학교 친구들보다 앞서 있다거나, 교장을 포함한 모든 학교 선생들이 자기에게 경의나 찬사의 눈길을 던진다거나 하는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한스는 뿌듯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은 자신에 의해 일깨워진 한스의 아름다운 야망을 이끌어 나갔다. 또한 소년이 성숙해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교장 선생의 은밀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학교 선생들은 무정하다거나, 고루하다거나, 혹은 영혼조차 없는 속물이라고 욕하지 마라! 아, 그렇지 않다. 긴세월에 걸쳐 아무런 성과없이 자극에 무덤덤해져 버린 한아이의 재능이 싹트기 시작할 때, 그 아이가 나무 칼이나 돌팔매질이나 활쏘기와 같은 어리석은 놀이를 그만두고, 앞을 향하여 힘껏 발걸음을 내디딜 때, 멋대로 자라온, 통통한 뺨을 지닌 아이가 진지한 학습을 통하여 섬세하고, 진지한, 거의 금욕적인 아이로 탈바꿈할 때, 그 아이의 얼굴에 연륜과 학식이 더해 가고, 그의 눈망울이 목표를 향하여 더욱 깊어질 때, 그리고 그의 보드라운 손이 점점 더 희어질 때, 학교 선생의 영혼은 기쁨과 자랑에 겨워 활짝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학교 선생의 의무와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직무는 어린 소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자연의 조야한 정력과 욕망을 길들임과 동시에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에게 국가적으로 공인된 절제의 평화로운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현재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시민이나 임무에 충실한 관료라 할지라도 하교에서의 이런 교육이 없었다면, 마구 날뛰는 난폭한 개혁가나 쓸데없는 상념에 사로잡힌 몽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소년의 내면에는 거칠고 야만적인 무질서의 요소가 숨어 있다. 먼저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
그것은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다. 먼저 그것을 밟아 꺼버려야 한다. 자연이 만든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이 치우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하듯이 학교 또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깨부수고, 굴복시키고, 강압적으로 제어해야 한다. 학교의 사명은 정부가 승인한 기본 원칙에 따라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잠재된 개성들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은 병영에서의 주도면밀한 군기를 통하여 극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이 어린 소년 기벤라트는 얼마나 아름답게 성숙했는가! 길거리를 배회한다거나 장난을 치는 따위는 스스로 그만두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공연히 웃는 일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이다. 정원 가꾸기와 토끼 기르기, 그리고 낚시질 따위의 취미 생활도 벌써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
어느 날 저녁, 교장 선생이 직접 기벤라트의 집으로 찾아왔다.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한스의 아버지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한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스는 책상에 앉아 누가복음을 일고 있었다. 교장 선생은 매우 다정하게 말을 건네었다.
기특하구나, 기벤라트! 이제 다시 공부에 여념이 없구나! 그렇다고 한 번도 보이질 않는거니? 난 매일 널 기다리고 있었단다.
가 뵈려고 했었어요.한스는 변명을 늘어 놓았다. 하지만 멋진 물고기 한 마리쯤 잡아 갖다 드리려고 했어요.
물고기라고? 도대체 무슨 물고기 말이니?
그건, 잉어나 뭐 그런 거요.
아, 그래. 그런데 너 다시 낚시하러 다니니?
예 어쩌다가 한 번식 가요. 아빠가 허락해 주셨거든요.
흠, 그래! 어때, 재미있니?
예, 그러믄요
좋다, 아주 좋구나. 땀흘려 일해 얻은 휴가니까. 그래서 요즘 공부에는 흥미를 잃은 게로구나
아뇨, 천만에요, 교장 선생님. 공부도 하고 싶어요.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절대 강요하진 않겠다.
아녜요, 정말 하고 싶어요.
교장 선생은 두세 번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가느다란 수염을매만지며 의자에 앉았다.
얘, 한스!
그가 말했다.
내 말은 이런 거야.
오래전부터 종종 경험해 온 일이지. 시험을 잘 치르고 난 뒤에 별안간 뒤로 쳐지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법이란다. 신학교에선 새로운 과목들을 여러 가지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새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배울 걸 미리 준비해 두는 학생들이 곧잘 그렇게 하지. 그런 학생들이 적지 않단다.
특히 시험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은 학생들이 곧잘 그렇게 하지.
그런 학생들은 자신의 월계관 위에서 휴가를 편히 보낸 학생들을 누르고는 어느 날 갑자기 정상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거야.
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넌 언제나 어렵지 않게 일등을 할 수가 있었지. 하지만 신학교에는 모두 능력 있고 부지런한 학생들뿐이란다. 그런 아이들을 앞지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내 말 알아듣겠니?
예
그래, 너한테 제안 하나 할까 한다. 이번 방학에 미리 공부를 해두는 게 어떻겠니? 물론 지나쳐서는 안 되겠지! 넌 충분한 휴식을 즐길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으니까. 내 생각으로 하루에 한두 시간쯤은 그다지 무리가 안 될거야. 노력을 게을리하면 자칫 궤도를 벗어나기 쉬운 법이란다. 더군다나 나중에 다시 제자리를 찾을 때까진 몇 주일씩이나 고생을 해야 할 거라고. 넌 어떻게 생각하니?
교장 선생님, 저야 물론 그럴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요. 선생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하면.
좋아. 신학교에선 히브리어 다음으로 특히 호머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거야. 지금 기초를 잘 다져놓기만 하면, 나중엔 곱절이나 즐겁고 손쉽게 호머를 읽을 수 있다고. 호머의 언어는 고대 이오니아의 방언이지. 그건 시의 음률과 더불어 아주 독창 적인 거란다. 뭔가 고유한 맛이 그 속에 스며 있는 거라고. 정말이지 그의 시를 올바르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한 자세로 근본부터 하나하나 공부해야 할거야.
물론 한스는 이와 같이 새로운 세계에도 기꺼이 뛰어들 마음 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서슴없이 교장 선생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교장 선생은 헛기침을 하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내 솔직히 말하지. 난 네가 수학 공부를 하는 데 두세 시간 정도 시간을 내줬으면 좋겠다. 물론 네가 산수에 약하다는 건 아냐. 그렇다고 여태껏 수학에 자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잖니. 신학교에서는 대수와 기하를 배우게 될 거야. 그러니 어느 정도 미리 공부를 해두는 게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이죠, 교장 선생님
언제라도 날 찾아오너라. 물론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네가 훌륭하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나로서는 더없는 영광이란다. 아무튼 수학 선생님한테 개인지도를 받게끔 아버님께 잘 말씀드리도록 해라. 아마 일 주일에 서너 시간 정도면 충분할 거야.
예, 잘 알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또다시 뜨거운 공부의 열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시간을 내어 낚시를 하거나 산책을 나설 때마다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수학을 가르치는 개인교사는 한스의 수영 시간을 과외 시간으로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대수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한스에게 별로 만족을 주지 못했다. 찌는 듯이 무더운 오후 시간에 수영장 대신에 수학 교사의 후덥지근한 방을 찾아갔다. 거기에 틀어박혀 모기가 윙윙거리는 먼지투성이의 공기를 마시며 피곤한 머리를 부둥켜안은 채 텁텁한 목소리로 에이 플러스 비, 에이 마이너스 비를 중얼대야 하는 현실이 가혹스럽게 여겨졌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무기력하고 갑갑한 분위기가 암울한 절망감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한스에게는 수학이 이해하기 힘든 낯선 과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수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쟁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따금 한스는 수학 문제를 풀며 훌륭한 해답을 찾아내어 기쁨에 젖기도 했다. 수학의 세계에서는 미로를 헤매거나 남을 속이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주제 영역을 벗어나 거짓스런 주변 영역을 서성거릴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한스는 라틴어를 매우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 언어는 뚜렷하고, 확실하며, 좀처럼 의혹의 여지를 남기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산의 모든 결과가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의 어떤 다른 의미는 생겨나지 않았다. 수학적인 학습과 강의는 마치 곧게 뻗어 있는 국도를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고, 어제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하루가 다르게 터득하기는 하지만, 일시에 드넓은 세계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언덕에 오르지는 못한다.
교장 선생의 수업 시간이 조금 더 생기에 넘쳤다. 마을 목사는 젊음이 넘치는 호머의 언어에서보다 구약성서의 변질된 그리스어에서 훨씬 더 매력적이고 화사한 감동을 찾아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호머는 역시 호머였다. 처음에 느꼈던 힘든 굴레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뜻하지 않던 즐거움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자꾸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종 한스는 아름답게 울려펴지는 난해하고 비밀스러운 시구 앞에서 초조와 긴장으로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앉아 있었다. 그럴 때면 얼른 사전을 뒤적이며 맑게 개인 고요한 정원으로 들어가는 얼쇠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어느새 한스는 또다시 숙제 더미에 깔려 있었다. 어느 때는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이를 악물며 과제물을 풀었다. 아버지 기벤라트는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자신들의 줄기에서 뻗어난 가지가 자신들이 막연하게 존경해 마지않던 높은 영역에까지 치솟기를 바라는 속인들의 이상이 아버지의 우둔한 머릿속에서도 어렴풋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휴가의 마지막 주가 되었다. 교장 선생과 마을 목사는 갑자기 눈에 띌 정도로 부드럽고 자상해졌다. 한스가 산책하도록 배려도 해주고, 아예 공부를 하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또한 상쾌하고 활기찬 마음으로 다시금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도 이야기하여 주었다.
한스는 두세 차례 낚시하러 갔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우두커니 강둑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강물 위에는 엷은 푸른빛을 띤 초가을의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예전에는 여름 방학을 무척이나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었다. 하지만 왜 그랬었는지조차 지금은 알 길이 없었다. 이제 방학이 끝나고, 신학교가 시작된다는 생각에 오히려 기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는 완전히 새로운 삶과 배움이 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낚시질 따위는 한스의 관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물고기 한 마리 잡기도 여간 어렵지 않았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한스를 놀려대기도 했다. 그 뒤로 한스는 아예 낚시질을 그만두고, 낚싯줄을 다락방에 있는 상자에 넣어버렸다.
몇 주 동안이나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에게 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휴가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비로소 떠올랐다. 이제라도 한 번 아저씨를 찾아가 보리라고 마음먹었다.
저녁이었다. 양쪽 무릎에 어린아이를 한 명씩 올려놓은 아저씨가 거실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았는데도 집 안에는 온통 가죽과 구두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스는 계면쩍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아저씨의 거칠고 넓적한 오른손에 얹었다.
그래, 도대체 어떻게 지냈지?
아저씨가 물었다.
목사님한테서 열심히 배웠니?
예, 날마다 거기 가서 많이 배웠어요.
뭘 배웠는데?
주로 그리스어였어요. 그리고 그밖에 다른 것도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나한테는 한 번도 찾아올 생각을 안 했구나?
물론 뵙고 싶었어요, 플라이크 아저씨. 하지만 전혀 시간이 나질 않았어요. 마을 목사님한테 매일 한 시간씩, 교장 선생님한테는 매일 두 시간씩, 더욱이 수학 선생님한테는 일 주일에 네 번씩이나 가야 했거든요.
아니, 지금 휴가중인데도 말이니? 그건 어리석은 짓이야!
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선생님들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는거예요. 그리고 뭐, 공부하는 게 그다지 힘들진 않으니까요.
그럴 테지.
플라이크는 이렇게 말하며 소년의 팔을 잡았다.
물론 공부하는 게 나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도대체 네 팔이 이게 뭐니? 얼굴도 무척 수축하고. 너 아직도 두통이 있니?
가끔요.
정말 어리석은 일이구나. 한스! 그건 죄악이란다. 너만한 나이에는 바깥 공기도 실컷 마시고, 운동도 충분히 하고, 편히 쉬어야 하는 법이라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방학이란 게 있는 줄 아니? 넌 정말 뼈와 가죽만 앙상하구나.
한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물론 넌 잘 해나가겠지. 하지만 지나친 건 좋은게 아니란다. 그건 그렇고, 목사님한테서는 뭘 배웠니? 무슨 말씀을 하시든?
말씀을 많이 하시긴 했는데, 나쁜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목사님은 무척 박식한 분이세요.
성경에 대해 모독적인 말씀은 없으셨니?
예,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너한테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영혼을 더럽힐 바에야 차라리 열 번이라도 육신을 썩히는 게 낫단다. 넌 나중에 목사님이 될 거잖니. 그건 근사하면서도 힘든 일이지. 올바른 일꾼이 되기 위해선 네 또래인 대부분의 젊은애들과는 달라야 하는 거란다.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게.
구둣방 아저씨는 일어서더니 두 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잘 가거라, 한스! 언제나 바른 길에 서도록 해라! 주님께서 널 축복하시고, 보호해 주시길 빈다. 아멘!
아저씨의 엄숙한 태도와 기도, 그리고 사투리가 섞이지 않은 짤막한 작별 인사가 소년 한스에게는 어쩐지 답답하고 곤혹스러웠다. 마을 목사는 헤어지면서 아저씨처럼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스는 신학교에 갈 준비를 서둘렀다. 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다보니 불안스러웠던 며칠이 숨가쁘게 흘러가 버렸다. 이불이며 옷가지며 책을 담은 상자는 이미 차편을 통해 수도원으로 보낸 뒤였다. 가지고 갈 여행가방도 다 챙겨놓았다.
어느 서늘한 아침 아버지와 아들은 마울브론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향과 부모님의 집을 떠나 낯선 학교에 가는 것은 여간 흥분되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3장
주의 북서쪽 숲이 우거진 언덕과 적막이 감도는 자그마한 호수 사이에 시토 교단의 마울브론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름답고 견고하게 지어진 이 커다란 건축물은 오랫동안 잘 보존되어 왔다. 이 수도원은 건물의 내부와 외부를 막론하고 그 웅장함과 화려함이 남달랐기 때문에 누구라도 거기서 한번쯤 살고 싶어한 만큼 매력적인 거주 공간이었다. 수도원은 수백 년에 걸쳐 주변의 푸른 자연 환경과 함께 어우러져 고상하고 친밀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 수도원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높은 담장 사이로 그림처럼 열려 있는 문을 지나 탁 트인 평온한 뜰로 들어서게 된다. 거기에는 분수대가 물을 뿜어대고, 오래 묵은 나무들이 엄숙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앞뜰의 양쪽으로 낡고 단단한 석조 건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사이로<파라다이스>라고 불리는 후기 로마네스크풍의 현관과 더불어 교회의 본당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아름다운 현관은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황홀한 분위기를 풍겼다. 본당의 장중한 지붕 위에는 바늘처럼 뾰족한 작은 탑이 익살스럽게 세워져 있었다. 어떻게 그토록 작은 탑에 종이 매달려 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전혀 손상되지 안은 본당의 회랑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었다. 이 회랑은 분수가 흐르는 멋들어진 예배당을 마치 장식물이기라도 하듯이 옆에 두고 있었다. 힘차면서도 우아한 십자형의 원형 지붕이 덮인 성직자 식당, 기도실, 담화실, 평신도 식당, 수도원장의 저택, 그리고 두 개의 교회당이 당당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담장, 들창, 문, 정원, 물레방아, 저택들이 이미 낡아버린 육중한 건축물을 에워싼 채 환하고 밝게 장식하고 있었다.
적막이 감도는 드넓은 앞뜰은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마치 꿈꾸는 듯이 나무 그늘과 더불어 유희를 즐기는 것이었다. 점심 식사 뒤에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만 잠시 그곳에 생명이 용솟음쳤다. 수도원에서 빠져 나온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몸을 풀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공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휴식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걸음을 재촉하여 흔적도 없이 담 너머로 사라졌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뜰에 서서 여기가 바로 건실한 삶과 기쁨의 장소라고, 여기서 생동감이 넘치는 행복의 뿌리가 자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또한 여기서 성숙한 정신을 가진 선량한 사람들이 즐거운 명상을 거쳐 밝고 아름다운 창작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속세와 동떨어진 이 훌륭한 수도원은 오래 전부터 언덕과 숲 뒤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에게 아름답고 평온한 분위기를 마련해 주기 위하여 프로테스탄트의 신학교 학생들에게는 열려 있었다. 거기서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도시나 가정 생황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고, 해를 끼칠 수도 있는 분망한 인생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젊은이들은 여러 해에 걸쳐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진중한 인생의 목표 아래 순수하고 이상적인 학문의 향유를 통하여 젊은 영혼들의 정신적인 갈증이 해소되는 것이었다.
자아 훈련과 공동체 의식을 키우는 기숙사에서의 생활도 중요한 교육의 원동력이 된다. 신학교 학생들의 생계와 학업을 뒷받침하는 교회 재단은 이들이 남다른 정신의 소유자가 되도록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정신을 통하여 이들은 나중에라도 언제든지 다시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정교하고 확고한 낙인이다.
간혹 집단생활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수도원을 뛰쳐나가는 사나운 개구쟁이들을 제외한 슈바벤의 신학교 학생들은 평생 그러한 낙인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수도원의 신학교 문턱을 어머니와 함께 들어선 학생이라면 누구나 평생 동안 이날을 흐뭇한 감동을 느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본다. 하지만 한스 기벤라트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날을 아무런 감동 없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러면서도 다른 어머니들을 살펴보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침실이라고 불리는, 벽장이 붙어 있는 커다란 복도에는 상자와 바구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부모와 함께 온 소년들은 집을 풀거나 소지품을 정리하기에 바빴다. 번호가 새겨진 옷장, 그리고 서재에 있는 번호가 새겨진 책꽂이가 모두에게 하나씩 주어졌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마룻바닥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집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을 꺼내고 있었다. 조교는 군주처럼 그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며 이따금 친절한 조언을 해주었다. 모두들 가방에서 끄집어낸 옷가지를 펴고, 속옷을 말끔하게 접고, 책들을 차곡차곡 쌓고, 장화와 실내화를 가지런히 놓았다. 왜냐하면 필요한 속옷의 개수와 그 밖의 중요한 가정용 신변잡화의 명세가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새겨 넣은, 놋쇠로 만들어진 세숫대야는 세면장으로 가지고 갔다. 해면과 비눗갑, 빗, 칫솔이 그 옆에 나란히 놓여졌다. 뿐만 아니라 소년들은 램프와 석유통, 그리고 한 벌의 식기도 가지고 왔다.
소년들은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매우 흥분한 상태로 바쁘게 움직였다. 아버지들은 미소 띤 얼굴로 곁에서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간혹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며 지루한 모습을 감추지 못한 채 몰래 밖으로 나가려고도 했다. 어머니들은 그야말로 온갖 정성을 다하여 돕고 있었다.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는 주름을 펴고, 띠를 반듯하게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이것들을 찬찬히 살펴본 뒤, 가능한 한 쓰임새에 걸맞도록 깔끔하게 옷장에 나누어 넣었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 애정 어린 목소리로 타이르거나 이것저것 가르쳐주었다.
새로 산 내의는 특히 아껴 입어라. 3마르크 50페니히나 주었으니까. 빨랫감은 매달 기차편으로 보내거라. 급할 때는 우편으로 보내고. 검은 모자는 일요일에만 쓰도록 해.
마음씨 좋아 보이는 뚱보 아주머니는 높은 상자 위에 앉아 아들에게 단추 다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집이 그리워질 땐 언제라도 편지하려무나. 아무튼 크리스마스까진 얼마 남지 않았잖니.
꽤나 젊어 보이는 어여쁜 아주머니는 가득히 채워진 아들의 옷장을 살펴보더니 애정 어린 손으로 속옷이며 겉저고리며 바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뺨이 통통하고 어깨가 딱 벌어진 아들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부끄러운 나머지 멋쩍게 웃으며 어머니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나약하게 보이지 않기 위하여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별은 아들보다 어머니에게 더 힘들어 보였다. 어떤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양상이 전혀 달랐다. 그들은 짐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를 도와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저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가능하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별에 대한 불안, 자꾸만 커져 가는 고향에 대한 애정과 애착, 이러한 감정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대한 수치심과 어른스러워지는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더러는 울음을 억누르면서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슬픔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어머니들은 자식들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은 짐꾸러미에서 생활필수품 이외에도 사과를 담은 자루와 훈제한 소시지, 구운 비스킷이 담긴 광주리 등, 값비싼 물건들을 꺼내었다. 스케이트를 가지고 온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자그마한 덩치에 약삭빠르게 보이는 아이는 햄 덩어리를 통째로 가지고 왔다. 그것만으로도 주위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소유물을 전혀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 집을 떠나 이곳에 온 학생과 예전부터 기숙사에서 생활한 학생을 식별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급생들도 흥분과 긴장을 감추지는 못했다.
기벤라트 씨는 아들을 도와 민첩하고 노련한 손놀림으로 짐을 풀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나서는 잠시 지루해 보이는 얼굴로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충고하거나 훈계하는 아버지들, 위로하거나 조언을 주는 어머니들, 그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들들뿐이었다. 그의 생각에도 아들 한스의 인생 여정에 도움이 될 만한 덕담을 들려주는 것이 옳을 듯 싶었다. 그래서 한참 생각에 잠긴 끝에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말없이 서 있는 한스 곁으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그리고 갑자기 입을 열더니 엄숙한 말투로 판에 박힌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 한스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연변에 무척 의아해지기는 했지만, 그냥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목사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이를 눈치챈 한스는 부끄러운 나머지 아버지를 구석으로 잡아당겼다.
자, 알겠지! 우리 가문의 명예를 높여주겠지? 그리고 어른들 말씀을 잘 듣도록 해라!
예, 물론이죠.
한스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말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따분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불안스러운 마음으로 호기심어린 눈을 깜빡이며 창문 너머로 적막이 감도는 회랑을 내려다보았다. 속세를 벗어난 듯한 회랑에는 고풍스러운 품위와 평온이 감돌고 있었다. 그 분위기는 여기 위에서 시끄럽게 떠도는 아이들의 생동적인 삶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한스는 자기 일에 바쁜 동료 학우들을 찬찬히 둘러보았지만,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함께 시험을 본 괴핑엔 출신의 소년은 뛰어난 라틴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 소년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한스는 이 일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함께 공부하게 될 동급생들을 살펴보았다. 아이들이 가지고 온 소지품들은 그 종류와 수량에 있어 모두 엇비슷했다. 그래도 도시에서 온 소년과 시골에서 온 소년, 부유한 집안의 소년과 가난한 집안의 소년을 쉽게 구분할 수가 있었다. 물론 재력가의 자제들이 신학교에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 이유는 부모들의 자부심이나 깊은 식견, 아니면 아이들의 재능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체험한 수도원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자식들을 마울브론으로 보내는 교수나 고급관리들도 결코 적지는 않았다. 4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입고 있는 검은 예복은 옷감이나 재단이 제각기 다르게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예의범절이나 방언, 그리고 행동 양식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엿볼 수 있었다. 경직된 팔다리와 마른 체격을 지닌 슈바르츠발트 태생의 소년들, 엷은 금발에 입이 넓적한 고원지대의 윤기나는 소년들, 활동적인 성격의 자유롭고 명랑한 평야 지방의 소년들, 뾰족한 장화를 신고 순화된 사투리를 구사하는 슈투르가르트의 세련된 소년들. 이들 꽃다운 나이의 소년들 가운데 대략 5분의 1이나 되는 소년들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수척하면서도 수려한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어느 <마마보이>는 빳빳한 털로 짠 멋진 펠트모자를 쓰고 품위 있는 자태를 뽐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남다른 겉치레 때문에 벌써부터 몰지각한 몇몇 학우들이 언젠가는 그를 약올리거나 골탕먹이려고 벼른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라도 자세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겁에 질린 듯한 이 어린 무리들이 주의 젊은이들 가운데 선발된 뛰어난 인재들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암기 위주의 교육을 받은 평범한 소년들도 있었고, 영민하거나 자기 주장이 강한 소년들도 있었다. 이들의 매끄러운 이마 뒤에는 보다 높은 삶에 대한 바람이 반쯤 꿈에 잠겨 있었다.
영리하고 고집센 슈바벤의 인재들 가운데 더러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거대한 세계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그러고는 다소 무미건조하고 완고한 자신들의 일상적인 사고를 새롭고 강력한 체제의 중심 축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슈바벤 사람들은 올바르게 교육받은 신학자들을 세상에 내놓았을 뿐 아니라, 철학적인 명상을 가능하게 만들어온 전통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이곳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명망 있는 예언자들이나 이단자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 풍요한 땅은 정치적인 전통에 있어 다른 주에 비해 훨씬 뒤떨어졌지만, 적어도 신학과 철학의 정신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온 세계에 확고한 영향력을 끼쳐왔던 것이다. 또한 예로부터 이 지방의 민중들은 심미적인 형태와 환상적인 시학을 즐겨왔다. 그런 까닭에 때로는 훌륭한 음유 시인들이 나오기도 했다.
마울브론 신학교의 시설과 관습은 외형상으로 슈바벤의 분위기를 좀처럼 띠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원 시절부터 남아있던 라틴어 이름 옆에 고전적인 명칭이 새롭게 붙여졌다.
학생들에게 배정된 방들은 <포룸>,<헬라스>,<아테네>,<스파르타>,<아크로폴리스>라고 불렸다. 맨 끝에 위치한 가장 협소한 방은 <게르마니아>라고 불렸다. 거기에는 게르만적인 현실로부터 로마나 그리스의 환영을 만들어내려는 의도가 다분히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외형적인 관점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히브리어로 된 이름이 더 잘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비록 우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테네라고 불리우는 방에는 흥미롭게도 마음이 넓고 말솜씨가 뛰어난 학생들이 아니라, 무척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학생들이 들어갔다. 스파르타 방에는 전사나 고행자 같은 학생들이 아니라, 쾌활하면서도 뻔뻔스럽게 거만을 떠는 학생들이 들어갔다. 한스 기벤라트는 아홉 명의 학우들과 함께 헬라스 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한스는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싸늘하고 공허한 침실에 들어가 비좁은 침대에 몸을 눕혔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가슴을 짓눌렀다. 천장 위에는 커다란 석유 램프가 매달려 있었다. 소년들은 빨간 불빛 아래서 옷을 벗어던졌다. 10시 15분이 되자 조교가 와서 불을 꺼버렸다. 이제 그들은 모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두개의 침대 사이로 옷이 널려진 의자가 있었고, 기둥에는 아침 종을 치기 위한 줄이 묶여 있었다.
두세 명 가량의 소년들은 벌써 사귀었는지 머뭇거리면서도 귓속말로 몇 마디씩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다른 아이들은 아직 낯설어서 그런지 조금은 어눌한 심정으로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냥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미 꿈나라로 가버린 아이들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있었다. 학우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옆에 누워 있는 학우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하나 건너 옆의 침대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겁에 질린 소리가 들려왔다. 한 아이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쓴 채 울고 있었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이 나직한 흐느낌이 한스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놓았다. 그다지 향수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향에 두고 온 작고 조용한 혼자만의 방이 그리워졌다. 게다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초조감과 주위의 많은 동료들에 대한 불안감이 그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았다. 하지만 벌써 침실 안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꿈나라에 가 있었다. 어린 소년들은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베개에 뺨을 푹 파묻은 채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슬픔에 겨워하는 아이들이나 반항심이 강한 아이들, 쾌활한 성격을 가진 아이들이나 겁을 집어먹은 아이들, 모두 다 똑같이 달콤하고 깊은 휴식과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오래된 뾰족한 지붕과 탑, 들창, 고딕식의 첨탑, 담벽, 그리고 아치형의 행랑 위로 창백한 반달이 떠올랐다. 달빛은 추녀의 가장자리와 문지방에 머물더니 고딕식의 창과 로마네스크식의 문 위로 흘러갔다. 그러고는 회랑을 낀 분수대의 크고 우아한 수반 위에서 엷은 금빛으로 떨고 있었다.
다음날, 예배당에서는 입학식이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교사들은 프록코트를 입고 서 있었고, 교장 선생은 축하 연설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상념에 잠긴 듯한 얼굴로 몸을 굽힌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따금 뒤에 앉아 있는 부모들을 힐끗 훔쳐보기 위해 눈을 돌리기도 했다. 어머니들은 이런저런 생각에 미소지으며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곧은 자세로 교장 선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적이 진지하고 단호해 보였다. 자랑하고픈 뿌듯한 느낌과 아름다운 희망이 이들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금전적인 이익을 위하여 자기 자식을 팔아벼렸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한 명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하나씩 앞으로 호명되어 교장 선생과 악수를 나누며 의무와책임에 대한 선서를 했다. 이제 이들은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기만 하면, 죽는 날까지 국가로부터 생계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선물이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들에게는 부모들과 이별을 나누어야 하는 순간이 훨씬 더 진지하고 애절하게 여겨졌다. 부모들은 더러는 걸어서, 더러는 우편마차로, 그리고 더러는 서둘러 잡은 차편으로 뒤에 남겨진 자식들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졌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손수건들이 부드러운 9월의 공기를 가르며 오래도록 나부끼고 있었다. 마침내 자식들을 두고 떠나는 부모들의 모습은 숲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긴 채 발걸음을 돌려 수도원으로 향했다.
자, 이제 너희 부모님들은 떠나셨구나.
조교가 말했다.
학생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주고받았다. 같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학생들끼리 어울리기 시작했다. 잉크 병에 잉크를 채우고, 램프에는 기름을 붓고, 책과 공책을 정돈하며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호기심어린 눈들이 서로 마주칠 때마다 주저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두고 온 고향과 학교에 대하여 묻기도 하고, 함께 진땀을 흘렸던 주 시험을 회상하기도 했다. 서로들 재잘거리며 책상 주위로 몰려들었다. 여기저기에서 소년들의 해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녁 무렵, 같은 방 동료 학우들은 항해를 마친 위의 승객들보다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다.
한스와 더불어 헬라스 방에 기숙하게 된 새로운 동료들 가운데에는 네 명의 유별난 인물들이 있었다. 그 외의 나머지 학생들은 그저 평범한 부류에 속할 뿐이었다. 우선 슈투트가르트에서 온 교수의 아들 오토 하르트너는 재능이 뛰어나고, 침착하며, 언제나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행동 거지에 있어서도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그는 체격이 건장하고, 의상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다녔다. 그에게서 풍겨나는 당당한 풍채는 같은 방 동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 다음에는 산악 지대에서 온 시골 읍장의 아들 카를 하멜이 있었다. 그를 사귀는 데에는 시간이 꽤나 걸렸다. 왜냐하면 그는 모순투성이일 뿐 아니라, 무디고 차가운 자신의 공간에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때로는 격정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제멋대로 굴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이 난폭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또다시 그는 본연의 껍질 속으로 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냉정한 관찰자인지, 아니면 음흉한 위선자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성격이 그리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눈에 띄는 인물은 슈바르츠발트에서 온 헤르만 하일너였다. 그는 훌륭한 가문에서 자란 아이였다. 벌써 첫날부터 주위에서는 그가 문예 애호가이자 시인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또한 주 시험에서 그가 육각운으로 글을 썼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즐기고, 활기가 넘쳤으며, 멋진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외양을 일부러 부각시키기 위하여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이러한 성향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젊은이들의 경솔한 느낌들이 서로 불확실하게 뒤섞여 나타나게 되는 혼합물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자신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장해 있었다. 그는 벌써 나름대로 시행 착오를 거치며 자기 길을 가기 시작했다.
헬라스 방에서 가장 특이한 존재는 에밀 루치우스였다.
엷은 금발의 이 소년은 엉큼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나이 든 시골 노부처럼 끈질기고 부지런하고 무뚝뚝했다. 그리고 미숙한 덩치와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년 티를 내지 않았다. 또한 더 이상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학교에 들어온 바로 그 첫날, 다른 학우들이 지루한 나머지 잡담을 늘어놓거나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애쓰는 동안에, 그는 여유있는 표정으로 조용히 자리에 앉아 문법책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고는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뜬 채 공부에 몰두했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이 괴팍한 소년이 매우 교활한 구두쇠이며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악덕조차도 너무 완벽했다. 그래서 동료 학우들은 오히려 그에게 찬사를 보내기도 하고, 그냥 눈감아주기도 했다. 돈을 벌거나 아끼는 방식에 있어서도 그는 무척 약삭빠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빈틈없는 수완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놀란 학우들은 제대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침 일찍 일어날 때부터 일이 벌어졌다. 루치우스는 맨 먼저 아니면 맨 나중에 세면장에 나타났다. 그것은 다른 학우의 손수건이나 비누를 빌려쓰고, 자신의 소유물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의 손수건은 언제나 두 주일이 넘도록 더렵혀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규칙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손수건을 바꾸어놓도록 되어 있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상임 조교의 검사가 행해졌다. 루치우스도 월요일 아침에는 번호가 달린 걸이못에 깨끗한 수건을 걸어 놓았다. 하지만 점심 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자기 수건을 다시 걷어서는 반듯이 접은 다음에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 대신에 아껴두었던 낡은 수건을 걸어놓았다. 그의 비누는 너무 딱딱한 나머지 별로 닳지도 않았다. 그래서 몇 달이나 쓸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에밀 루치우스가 너저분하게 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나 말쑥하게 차려입고는 엷은 금발머리에 가르마를 타서 정성껏 빗어 넘겼다. 속옷과 겉옷도 지나치리만큼 아껴 입었다.
루치우스는 세면장에서 곧바로 식당으로 건너갔다. 아침식사에는 커피 한 잔과 설탕 한 조각, 빵 한 개가 고작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이런 식사는 결코 충분하지 못했다.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은 보통 여덟 시간 잠을 자고 나면, 몹시 배가 고프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루치우스는 이에 만족했다. 그는 매일 설탕 한 조각씩을 먹지 않고 모아 두었다. 그러고는 1페니히에 설탕 두 조각, 혹은 공책 한 권에 설탕 스물다섯 조각을 <구매자>에게 넘겼다. 저녁나절에 비싼 기름을 아끼기 위하여 다른 학우들의 램프에서 비쳐 나오는 불빛으로 공부한다는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원래 몹시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살림을 꾸려가거나 돈을 아끼는 방법을 전혀 터득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진 만큼 다 써버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미래를 위해 저축한다는 것이 낯설게 여겨질 뿐이다.
에밀 루칭스는 물적인 소유나 획득될 재화에까지 자신의 방식을 넓혀갈 뿐만 아니라 정신의 영역에 있어서도 가능한 만큼 이득을 얻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그는 매우 현명했다. 정신적인 소유란 모두 상대적인 가치를 가질 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치를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 수 있는 과목만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다른 과목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중간 성적으로 만족했다. 언제나 그는 자신의 학급 결과를 동료 학우들과 견주어보았다. 곱절이나 노력하여 얻은 2등보다는 차라리 반쯤 노력하여 얻은 1등이고 싶었다. 저녁에 종료 학우들이 지루한 시간을 메우기 위하여 갖가지 놀이나 독설을 즐길 때에도 그는 조용히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친구들이 떠들어대는 소음도 그에게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따금 그는 질투는커녕 오히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왜냐하면 다른 학우들이 모두 그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한다면, 그가 애쓴 보람이 전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부지런한 노력가의 교활한 술수를 어느 누구 하나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허풍을 떨거나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처럼 루치우스도 급기야 어리석은 짓을 범하고 말았다. 수도원의 모든 강의가 공짜로 이루어진다.
는 사실에 착안하여 그는 바이올린 교습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예전에 바이올린을 배웠거나, 음감이 섬세하거나, 아니면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음악을 남달리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라틴어나 산수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린 또한 배우면 된다고 믿었다. 음악이란 연륜과 더불어 점점 더 유익해지는 재산이며,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를 끌 수 있는 수단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무튼 바이올린은 모든 신학교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악기였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데에 전혀 돈이 들지 않았다.
루치우스가 와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음악 선생 하스는 소름이 오싹 끼칠 지경이었다. 그는 음악 시간을 통하여 루치우스의 실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루치우스가 노래를 불러 동료 학우들을 꽤나 즐겁게 했지만, 음악 선생은 그를 거의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년이 바이올린 배우는 것을 말리려고 무진 애를 써보았지만 루치우스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공손하게 살며시 미소지으며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또한 음악에 대한 흥미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연습용 바이올린 가운데 가장 나쁜 악기를 받았다. 그러고는 일주일에 두 번씩 개인지도를 받고, 매일 30분 가량 혼자서 연습에 몰두했다. 첫번째 연습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같은 방의 학우들은 소음을 견디다 못해 그에게 욕설을 퍼부어 댔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이 신음소리를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다고 윽박질렀다.
이때부터 루치우스는 바이올린 들고 연습하기에 적당한 한적한 구석을 찾아 정신없이 신학교를 헤매고 다녔다. 그의 바이올린에서 나는 긁는 소리, 끙끙거리는 듯한 소리, 그리고 끼익끼익 문질러대는 이상야릇한 소리들이 이웃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시인 하일너가 말했다. 그것은 마치 고통받는 낡은 바이올린이 벌레먹은 구멍을 비집고 나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다고.
루치우스의 바이올린 실력에는 별로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그를 힘겹게 가르쳐왔던 음악 선생은 신경이 곤두선 나머지 그를 거칠게 대하기 시작했다. 체념에 빠진 루치우스는 근근히 연습을 이어 나갔다. 지금껏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그의 소시민적인 얼굴에도 근심어린 주름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하나의 완전한 비극이었다. 마침내 음악 선생은 그의 재능에 회의를 품고, 그에 대한 음악 교습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배우기를 즐겨하는 이 어리석은 소년은 이번에는 피아노를 택하여 여러 달에 걸쳐 헛된 수고를 했다. 급기야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슬그머니 그만두고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오갈 때면, 자기도 예전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하여 이 아름다운 예술로부터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것이었다.
헬라스 방에서는 익살맞은 학우들 덕분에 심심치않게 웃고 즐길 수 있었다. 문예가 하일너도 가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풍자에 능하고 기지가 넘치는 카를 하멜은 언제나 거리를 두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른 학우들보다 한 살 위인 하멜은 아무래도 거드름을 피우게 마련이었지만, 다른 학우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한 처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변덕이 심했다. 그래서 자기 동료들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싸움판을 벌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난폭하다 못해 거의 잔인하기까지 했다.
한스 기벤라트는 경악에 찬 눈으로 하멜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선량하고 온순한 학생의 자세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조용히 걸어갔다. 한스는 거의 루치우스만큼이나 부지런했다. 그래서 하일너를 제외한 같은 방의 다른 모든 학우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하일너에게는 독창적이면서도 경망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간혹 그는 한스를 공부벌레라고 놀려대었다.
저녁 무렵, 기숙사에서 벌어지는 싸움질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가는 소년들은 별 무리 없이 서로 잘 어울리게 되었다. 학생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다는 뿌듯한 느낌을 갖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선생들이 쓰는 <당신>이라는 낯선 호칭에 걸맞는 학문적인 진지함과 정숙한 행동거지를 보여주려고도 했다. 그리고 마치 갓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듯이, 그들은 이제 막 졸업한 라틴어 학교 시절을 건방진 표정과 동정어린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일부러 꾸민 거짓된 품위를 뚫고, 개구장이 같은 천연덕스러운 기질이 때때로 터져나왔다. 그러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침실은 쿵쿵거리며 뛰는 소리와 소년들의 거친 욕설로 온통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공동생활을 시작한 지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이 한 떼의 젊은이들은 마치 화학반응에 섞인 침전물 흡사하게 변화되어 갔다. 이리저리 떠다니던 탁한 덩어리들과 부스러기들이 모여들어 굳어지기도 하고, 다시 풀어지기도 하며 새로운 형태의 딱딱한 침전물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교육 시설의 책임자인 교사들에게는 매우 유익하고 귀중한 경험이었다. 처음에 느꼈던 수줍음을 떨쳐버리고, 이제 서로를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했다.
함께 어울리는 동아리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우정과 반감의 표현이 보다 뚜렷해졌다. 같은 고향에서 온 동향인이나 같은 학교를 다니던 동창생들이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를 찾아 나섰다. 도시 아이들은 시골 아이들과, 산골에 사는 아이들은 평지에 사는 아이들과 사귀려고 했다. 그것은 다양한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려는 은밀한 욕구이기도 했다. 서로를 찾아 나선 젊은 생명체들은 희미하게나마 미지의 세계를 더듬기 시작했다. 평등 의식과 더불어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는 강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자기만의 개성을 키워 나갔다. 형용하기 어려운 애정와 질투가 낳은 사소한 일들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깊은 우정이 맺어지기도 하고, 반항기가 섞인 적대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래서 급기야는 애정어린 사이가 되거나 함께 산책을 즐기는 다정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아니면 서로 맞붙어 주먹질을 하기도 했다.
한스는 이러한 일에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카를 하멜이 감정에 겨워 분명하게 자신의 우정을 고백했을 때에도 한스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 뒤에 하멜은 곧바로 스파르타 방에 있는 학우들과 친해졌다. 그래서 한스는 홀로 남게 되었다. 가슴 벅찬 감정이 행복한 우정의 땅을 지평선 위로 떠오르게 했다. 그러고는 한스의 나지막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수줍음 때문에 그는 다시금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어머니도 없이 엄격한 소년시절을 보내야 했던 한스는 사랑할 수 있는 기질을 읽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겉으로 드러나는 열정에 대하여 일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게다가 그에게는 소년다운 자긍심과 하릴없는 공명심이 더해져갔다. 그는 루치우스와는 달랐다. 한스는 진정으로 인식의 폭을 넓히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루치우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공부를 가로막는 모든 방해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래서 책상에 눌러앉아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다가도 다른 학우들이 우정을 즐기는 모습을 볼 때면, 질투심을 억누르지 못한 채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카를 하멜은 한스에게 어울리는 침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만일 그 누군가가 다가와 한스를 세차게 잡아당겼다면, 그는 기꺼이 따라갔을 것이다.
그는 수줍은 소녀처럼 가만히 앉아 자신보다 힘세고 용감한, 그리고 자신에게 행복을 안겨줄 누군가가 자기를 데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학교에서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특히 히브리어를 배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을 빠르게 흘러가 버렸다. 마울브론을 둘러싼 자그마한 호수와 연못들은 창백한 늦가을의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들어가는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떡갈나무, 그리고 황혼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아름다운 숲을 가로질러 초겨울의 세찬 바람이 울부짖기도 하고, 기뻐 날뛰기도 하며 세차게 몰아쳤다. 숲에서는 최후의 무도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벌써 여러 차례나 가벼운 서리가 내리기도 했다. 정서가 풍부한 서정적인 헤르만 하일너는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귀기 위하여 무척 애를 써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매일 외출 시간에 홀로 숲길을 거닐었다. 특히 숲속의 호수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울해 보이는 암갈색의 연못은 시들어버린 해묵은 활엽수의 우듬지로 뒤덮여 있었고, 갈대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몽상가 하일너는 애수에 젖은 아름다움 숲의 한 모퉁이에서 자신을 힘차게 끌어당기는 미지의 힘을 느꼈다. 여기서 그는 꿈에 젖은 듯한 나뭇가지를 휘저어 적막한 수면 위에 원을 그리거나, 레나우의 갈대의 노래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호숫가 아래 펼쳐진 골풀 위에 누워 가을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죽음의 호무를 되뇌며 명상에 잠겼다. 낙엽 지는 소리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우울한 화음을 엮어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주머니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 들고는 연필로 시구 한두 구절을 적어 넣었다.
10월도 다 저물어 가는 어느 흐린 날의 점심시간이었다. 혼자 산책길에 나섰던 한스 기벤라트가 이것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에도 하일너는 시를 쓰고 있었다. 자그마한 수문의 판교 위에 앉아 그 소년 시인은 공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뾰족한 연필을 입에 문 채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책이 그 옆에 펼쳐져 있었다. 한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 하일러! 너 여기서 뭐하니?
호머를 읽고 있어. 넌?
믿을 수 없는 걸. 난 네가 뭘 하고 있었는지 다 알아.
그래?
그럼. 넌 시를 쓰고 있었잖니.
그렇게 생각해?
물론.
거기 앉아봐!
기벤라트는 하일너 옆에 앉아 두 다리를 수면 위로 내려뜨렸다. 그러고는 여기저기서 갈색의 나뭇잎이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하나둘 소리없이 떨어져 갈색의 수면 위로 내려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긴 좀 스산하구나. 한스가 말했다.
응, 그래.
두 소년은 나란히 땅바닥에 등을 대고 길게 누워 있었기 때문에, 가을의 정취가 흠뻑 배어 있는 우듬지도 거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고즈넉하게 떠도는 구름만이 연푸른 하늘에 섬을 이루고 있었다.
정말, 멋진 구름이야!
한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즐거운듯이 말했다.
응, 그래.
하일너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저런 구름이 될 수만 있다면!
그럼?
그럼 돛단배처럼 저 하늘 너머로 여행을 떠나겠지. 숲과 마을, 읍과 주를 넘어서 말야. 아름다움 배가되어. 넌 아직 배를 본 적이 없지?
응, 아직. 그런데 넌?
물론 봤지. 참 딱하구나. 그런 일들에 대해 전혀 모르다니. 공부벌레처럼 그렇게 공부만 하니 별 수 있겠어!
그럼, 넌 날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니?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난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진 않아. 아무튼 배에 대해 얘길 계속해 봐.
하일너는 몸을 돌리다가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했다. 그는 배를 땅바닥에 대고 누워 팔꿈치를 괸 뒤, 두 손으로 턱을 받쳐들었다.
라인 강이었어. 그는 말을 이어갔다.
거기서 난 그런 배들을 보았지. 방학 때 말야. 한 번은 어느 일요일이었어. 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지. 밤이 되니까 오색영롱한 등불이 환히 비추는 거야. 그리고 불빛은 강물에 반사되어 빛나고. 우린 음악을 들으며 강물을 따라 올라갔지. 라인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말야. 아가씨들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있었어.
한스는 귀를 기울여 듣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고 음악 소리와 붉은 등불, 하얀 옷을 입은 아가씨들을 태운 배가 여름 밤을 가르며 행해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하일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 지금과는 전혀 딴판이었지. 여기에 있는 놈들이 그런 일들을 알기나 하겠어? 모두 다 따분한 위선자들뿐이라고! 그저 진땀이나 뻘뻘 흘리며 공부에만 매달리는 가엾은 존재들이지. 히브리어의 철자보다 더 고상한 걸 전혀 모르고 있어. 너도 마찬가지라고.
한스는 잠자코 있었다. 이 하일너라는 친구는 정말이지 괴짜였다. 그는 시를 쓰는 공상가였다. 한스가 하일너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한 적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하일너는 어지간히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우 박식하여 어떤 질문에도 훌륭하게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러한 지식을 경멸하고 있었다.
예컨대 호머를 읽을 때 말야. 우린 오디세이를 마치 무슨 요리책처럼 대하지. 겨우 두 구절을 읽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리게 마련이야. 단어 하나 하나를 낱낱이 되씹어보고, 찬찬히 음미하는 거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겨워지는 법이지. 그런데도 강의가 끝날 땐 언제나 되풀이해 떠들어대는 거야. < 여러분은 이 시인이 그걸 얼마나 멋지게 표현했는지 잘 아셨을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은 시작의 비밀을 들여다본 셈이지요! > 하지만 그건 단지 우리가 질식하지 않게끔 불변화사나 부정과거형에다 양념을 친 것뿐이라고. 이런 식으로라면 난 호머에 관심 없어. 도대체 이 낡아빠진 그리스의 잡동사니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야?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그리스식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면, 아마 당장이라도 쫓겨나게 될 거야. 그런데도 우리 방이 헬라스라니! 이건 정말이지 웃음거리라구. 어째서 < 쓰레기통 > 이나 < 노예 감옥 > 이나 < 비단 모자 > 따위로 부르지 않는 거지? 고전이라고 불리는 건 모두 허튼 수작에 불과한데 말이야.
그는 허공에 대고 침을 내뱉었다.
너 방금 전에 시를 쓰고 있었지?
이제 한스가 물었다.
응.
무슨 시야?
이곳의 호수와 가을에 대한 시야.
좀 보여줄래?
안 돼. 아직 끝내지 않았거든.
그럼 다 되면?
그래, 좋아.
두 소년은 몸을 일으켜 수도원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저길 봐!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도 알겠지?
< 파라다이스 > 를 지나면서 하일너가 물었다.
회당과 아치형의 창문, 행랑과 식당들 말야. 이게 다 고닥과 로마네스크풍이쟎니. 풍성하며 정교한 이 건축물들은 모두 예술가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거란다. 하지만 이런 마법의 성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그건 목사가 되려는 30명의 불쌍한 소년들을 위한 것뿐이라고. 우리 나라에 돈이 꽤나 남아도는 모양이야.
한스는 오후 내내 하일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한스가 느끼는 고민이나 바람이 그 소년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하일너는 자기 나름대로의 사고와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남다른 고민으로 괴로워하며, 자기를 애워싼 주위 환경을 경멸에 찬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는 낡은 기둥과 담장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영혼을 시구에 반영하고, 환상에서 자기만의 허구적인 삶을 만들어내는 기이한 비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감정이 풍부할 뿐 아니라, 남에게 구속받기를 꺼렸다. 한스가 1년 동안에나 내뱉을 농담을 하일너는 단 하루만에 해내었다. 동시에 그는 우울한 소년이었다. 자기 자신의 슬픔을 낯설고 귀한, 값진 보물처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날 저녁, 하일너는 자신의 엉뚱하고 괴팍한 성격을 같은 방에 있는 모든 학우들에게 드러내고 말았다. 동료 가운데 하나인 오토 뱅어라는 속 좁은 허풍쟁이가 그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잠시 하일너는 익살을 떨기도 하며 침착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토 뱅어의 따귀를 갈기는 것이었다. 일순간에 두 소년을 서로 뒤엉켜 심하게 몸싸움을 했다. 마치 키를 잃은 배처럼 부딪치기도 하고, 반원을 긋기도 하고, 잠시 주춤대기도 하며 헬라스 방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벽으로 밀치기도 하고, 의자를 넘어뜨리기도 하고,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치기도 했다. 두 소년 모두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고, 개거품을 내뿜기도 했다.
같은 방의 학우들은 냉정한 표정으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이따금 발을 살짝 옆으로 내딛었다. 그리고 책상과 램프가 망가지지 않도록 멀찌감치 옮겨놓았다. 그러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긴장된 표정으로 싸움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다. 하일너가 힘겹게 일어서더니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섰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은 충혈되고, 셔츠의 깃은 찢기고, 바지의 무릎에는 구멍이 났다. 그의 상대가 다시 덤벼들려고 했지만, 하일너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서 거만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난 이제 그만 할래. 때릴 테면 때려봐!
오토 맹어는 욕설을 퍼부으며 방을 나갔다. 하일너는 책상에 몸을 기댄 채 스탠드 램프를 돌려놓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더니 자꾸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일이었다.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신학교 학생에게 있어 가장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일너는 자신의 눈물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방에서 나가지도 않고, 창백한 얼굴을 램프 쪽으로 돌린 채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물을 닦기는커녕, 주머니에서 손을 빼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른 학우들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심술궂게 쳐다보며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마침내 하르트너가 그의 앞에 다가서서 물었다.
야, 하일너, 넌 부끄럽지도 않니?
눈물을 흘리고 있던 하일너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방금 전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부끄럽냐고? 너희들 앞에서?
그는 경멸섞인 어투로 크게 말했다.
천만에, 이 양반아!
그는 얼굴을 닦더니 화가 난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나서 램프를 끄고는 방에서 나갔다.
한스 기벤라트는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내내 자기 자리를 뜨지 않고,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범벅된 심정으로 하일너를 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15분 가량이 지난 뒤, 그는 사라진 친구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하일너는 차갑고 어두운 침실의 낮은 창턱에 앉아 꼼짝도 않고 회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어깨와 뚜렷이 눈에 띄는 가냘픈 머리는 어린애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스가 다가와 창가에 멈추어 섰는데도 그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뒤에 하일너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쉰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니?
나야.
한스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한스는 이제까지 자신의 책들을 신성한 보물처럼 소중하게 다루어왔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하일너의 무모하리만치 몰염치한 행위를 신전 모독에 비견할 만한, 심지어는 범죄적인 행위로까지 간주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영웅적인 인물의 위대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착하기만 한 기벤라트가 친구 하일너에게는 그저 손쉬운 장난감이나 집에서 애완용으로 기르는 고양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스도 가끔 그렇게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하일너는 한스를 필요로 했고, 그래서 그에게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일너는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줄 누군가를 원했던 것이다. 학교와 인생에 대하여 가히 혁명적이라고 불릴 만한 과격한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가지고 조용히 귀를 기울여 둘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또한 왠지 울적해질 때, 자신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신을 위로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젊은 시인에게는 이러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늘상 그러하듯이 가끔 헤아리기 힘든, 다소 어리광스러운 우울증이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이유는 어린 영혼으로부터의 조용한 이별, 그리고 목적도 없이 넘쳐흐르는 젊음의 열기와 예감과 욕망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타나는 이해하기 힘든 어두운 충동이었다. 그럴 때면 하일너는 누군가로부터 동정과 귀여움을 받고 싶은 병적인 욕구를 느꼈다. 예전에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던 귀여운 아이였다. 하지만 아직 여자들의 사랑을 받을 만큼 성숙하지 않은 지금에는 온순한 친구만이 그를 위로해 줄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가끔 하일너는 저녁 무렵에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한스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공부하고 있던 한스를 꾀어 함께 침실로 가자고 졸라댔다. 침실의 차가운 방이나 황혼이 어슴푸레한 높은 기도실에서 두 소년은 나란히 거닐었다. 아니면 추위에 떨며 창가에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하일너는 하이네를 읽는 서정적인 소년답게 온갖 애처로운 탄식을 내뱉으며, 어린애 같은 슬픔의 구름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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