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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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랏골의 비가(悲歌)
金炳傑
≪현대문학(現代文學)≫에 17회에 걸쳐 실린 송기숙(宋基淑)의 「자랏골의 비가(悲歌)」는 그의 문학적 방향을 확연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제목 자체가 암시하고 있듯이 이 장편은 민중문학(民衆文學)을 지향한다. 송기숙은 민중의 수모와 핍박, 궁기와 곤비를 적나라하게 조명함으로써 무엇을 위해 문학이 존재하는가 라는 큰 물음에 확답을 내놓은 셈이다.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운명·전통을 끈질기게 지탱하는 근원적인 젖줄기는 민중이다. 민중은 관념적·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가장 구체적으로 민족 생존의 저변을 형성하는 실상(實像)이다. 그들은 민족의 위기와 역사의 난국을 통째로 받아들이며 가장 큰 고통과 희생을 치르는 운동체(運動體)인 것이다. 민족 역사의 사실상의 주체이면서도 그러나 민중은 언제나 민족을 위한다는 위정자들의 정치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은 있어도 민중은 없었다. 다시 말하면 실재하는 것은 민중이고 민족이란 대외관계(對外關係)에서 형성되는 상대적 개념인데, 언제나 내세운 것은 민족이었고 민족을 형성한 민중은 계속 민족을 위한다는 이름 밑에 시달림을 당한 채 방치돼 왔다. 우리 역사는 계속해서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기에 민족의식(民族意識)이 강했으며, 민중은 나라사랑을 지상(至上)의 과제로 알았기에 민족의 운명을 내세우는 정부에 무조건 충성을 보냈다. 그러나 민중이 정부에게 가장 푸대접받는 역사가 반복해 왔을 뿐이다. 민중이 민족을 형성하고 그것을 지킬 대권(大權)을 정부에 주었는데 바로 이 민족이 개념화되어 민중을 혹사 착취하는 데 이용되는 일이 현재까지 계속됐다. 이것은 결국 민족도 없고 민중도 없고 그것을 이용하는 정부만이 있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옛날 중국대륙의 세력들과의 굴욕적인 협상이나 특히 한일합병(韓日合倂) 등은 집권자 몇 사람의 손에서 처리됐을 뿐 사실상 민족도 민중도 가담하지 않았다. 민족을 사랑했기에 민족의 대권을 가진 정부에 복종했으나 착취와 혹사 외에 아무런 대가(代價)도 받지 못한 민중의 분노가 터진 것이 홍경래란(洪景來亂)이나 동학혁명(東學革命) 등이다.(安炳茂 교수 「민족·민중·교회」동아일보 75.3.3)
민족 역사의 골격이며 구조의 중핵(中核)이면서도 언제나 제 값을 얻지 못하고 역사 밖으로 밀려난 민중을 작가는 문학 속에 끌어들여 생명을 부여하고 가치를 높여준다. 역사 기록에서 버림받은 소외된 민중을, 잡초 같은 그 존재양상을 문학은 주제로서 혹은 역사의 무대 전경으로 부상시켜 이름을 날려주며 빛을 던져 준다. 민중은 통치자와 구별되는 사람이다. 민중은 신분·권력·금권이 전연 없는 이를테면 더 이상 깔볼 상대가 되지 않는 밑바닥 사람들이다. 그렇게 서러움을 당하는 밑바닥군상을 양심적이며 휴머니즘을 지표로 삼는 문학이 사랑스럽게 포옹하고, 그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그들의 침묵을 발성(發聲)으로 환치하는 작업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벽초(碧初)의 「임꺽정」, 박연희(朴淵禧)의 「홍길동(洪吉童)」, 유현종(劉賢鍾)의 「들불」, 황석영(黃晳映)의 「장길산(張吉山)」등 역사소설의 깊은 의의는 그것이 민중을 역사의 중추세력으로 부각해 놓은 데 있다.
「자랏골의 悲哀」는 시간적으로 기미(己未) 3·1운동이 일어난 그 전 해 무오(戊午)(1918)년부터 4·19혁명까지의, 즉 3대에 걸친 한 촌락의 비극적 운명을 집약한다. 이것은 밑바닥인생을 한세상 짊어진 집단의 애가(哀歌)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는 일정한 주인공이 없다. 마을 전체가 말하자면 주인공격이다. <자랏골>의 우매하고 소박하고 가진 것이 없는 촌민들은 외부로부터 무시로 희롱을 당하고 죄 없이 죄에 옥죄이며 대를 이어 갖은 고통을 겪는다.
<자랏골>은 물론 <자랏골>이라는 특정한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는 이 나라 전체의 못난 서민층을 대변하는 지역이다. 우리는 이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자랏골>이 당할 숙명적인 비극을 넉넉히 읽어낼 수 있다.
그러니까, 자랏골을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도, 너희들은 꼭 이만큼의 농토만 벌어먹고 살아라 하듯, 삼십여 호가 일 년 양식이 빠듯할 넓이의 들판과, 산자락에 논 달랑치 몇 개를 덤으로 얹은 다음, 팔로 싸안듯 자랏골 안통을 옥죄어 싸안고 있었다.
처음부터 남의 선산 그늘에서 고사리나 뜯어먹고 사는 자랏골 사람들은, 욕심 이래봤자 기껏 도토리 주워 먹고 사는 다람쥐의 그것이어서, 자식새끼들 삼시 세끼 끼니나 안 굶기고 큰 통티만 없으면 그만이었지, 섬지기로 셈할 논밭 모을 궁리도 없었고, 하다못해 요새 면서기 한 자리라도 벼슬길 타보려는 과남한 생심은 처음부터 없는 사람들이라, 양문이가 여기다 묏등을 써서, 관운재운을 눈에 안 보이는 명당소응으로만이 아니고, 그것을 짐으로 져갈 것이어서 그렇게 짊어져간다 하더라도, 개발에 놋대괄로 제 분수에 닿지 않는 그런 관운 재운에 시샘할 위인붙이들은 당초에 아니었다. 이 자랏골이 생기고부터 지금까지, 비락토일망정 섬지기를 넘겨 제 이름 밑에 논밭문서를 가져본 사람도 없고, 감투라고는 개가 쓰다 버린 짚벙거지 하나도 주워 써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토정비결에 그 흔하게 오르내리는 관재(官財)운이라는 것도, 관운이라면 개한테 붙을 멍첨지에나 빗대어 웃었고, 재운이랬자 훗장 나뭇짐에 혹시 눈먼 웃돈이나 몇 푼 붙을까 하는 기대가 고작이어서, 어디까지나 동네 한가운데다 묏등이, 여기 살아 눈뜬 사람들의 사람 대접이냐는 그것뿐이었지, 그 어줍잖은 풍수설 타고 넘어갈 관재운 걱정은 아니었다.
이렇듯 <자랏골> 사람들은 처음부터 크다 만 벼 포기처럼 궁기에 찌든 삶을 안고 서식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욕심도 샘도 없거니와 분에 넘치는 기대를 남몰래 품어 보는 일조차 하지 않으며, 주어진 조건을 주어진 대로 천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이는 우직한 천민이다. 그러나 세상물정은 사람이 우직하다 해서 우직한 대로 그냥두지 않는다. 천민이라 해서 천민만큼의 동정심을 얻어내는 것도 아니다. 못난 백성은 굽이굽이 흐르는 역사의 물살에 밀리며 한없는 곤욕과 천대와 학대에 시달린다.
<자랏골>의 비운은 그곳이 묏자리로서 명당이라는 것 때문에 일어난다. <자랏골>에 있어서 명당이라는 것은 풍수들이 조작해 낸, 한낱 전설로만 치부될 수 없는 실증적인 근거가 있다. 왜정 초기에 그곳에서 값진 고려자기, 순금 문갑 등 희귀한 것들이 발굴되었다. 그렇게 값진 부장품이 나온 것은 옛날부터 부자나 권세 있는 사람들이 <자랏골>에 묘를 썼다는 얘기가 된다. <자랏골>의 한복판에 지금 그 마을의 정기를 몽땅 빨아삼킨 듯 근동의 호세가(豪勢家) <이양문>의 어머니 묘가 위세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이 묘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양문>의 집안은 일제시대나 지금이나 운이 튀고 복이 닥쳐 아들들이 고관, 재벌 ,국회의원 등으로 출세일로로 치닫는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자랏골의 꾀죄죄한 인생들은 세대가 바뀌어도, 나라에 광복이 이루어져도, 정정(政情)이 달라져도 재앙이 그칠 때가 없고 학대와 질곡을 참다못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다. 그 비극의 원인은 <양문>의 묏자리 때문에 야기된다.
<자랏골>의 큰 비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최초의 인물은 <용골영감>과 <고당영감>이다. 이 두 사람은 동학혁명때 전봉준(全琫準)장군 밑에서 이름을 떨친 용사였으나, 혁명이 좌절되자 피신하여 <자랏골>에 깊숙이 묻혀 살고 있다. 그들은 당호나 택호는 물론 이름까지 바꾼 채 덤덤한 <자랏골> 사람으로 지낸다. <용골염감>은 힘이 장사이다. 그러나 그는 힘을 좀처럼 쓰지 않는다. 돌부처같이 크고 둔한 그의 몸집 속에는 자기 혼자만의 외 따른 세계가 있는데, 누구도 그 엄숙한 내밀(內密)을 알아내는 사람이 없다. 그는 <고당영감>이외는 누구하고도 깊이 혀 닳아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그의 집에는 대대로 물려받은 보도(寶刀)가 있어 <용골염감>은 밤중에 산에 올라가서 칼연습을 한다는 소문이 마을에 자자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확인한 사람은 없다. 어쨌든 <용골염감>에게는 동학군다운 흔적이 깊이 박혀있다.
다른 한편 <고당영감>은 무일푼이었던 <용골영감>과는 달리 <자랏골>에 들어 올 때, 다소 재물이 있어 여남은 마지기 논도 사고, 그 후 귀가 반듯한 기와집도 지었다. 그에게 아들 형제가 있는데, 10여 년 전에 고향을 표연히 떠났던 큰아들이 뜻밖에도 의젓한 사각모를 쓰고 동네에 홀연히 나타난다. 때는 1917년경이다. 그라 일본 유학생으로서 금의환향하게 되어, 마을 사람들은 그대까지 외부의 양복장이들한테 죄 없이 죄짓고 살던 서러움과 억울함이 일시에 풀려, <그들은 제 살이라도 깎아줄 듯 황홀하게 들떠>버린다. 사실 <자랏골>에 들어와서 <널 도깨비 갈밭 헤매듯> 군도(軍刀)를 옆구리에 철럭거리며 서슬을 번득이고 쏘다니던 왜놈 헌병과 보조원들이 뜻밖에 대학생과 맞부딪치게 되자. 고양이 만난 쥐꼴로 기가 죽어 슬슬 꽁무니를 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서울 임금님과 얼굴 맞댄 것만큼이나 옹골지고 기막힌 자랑>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른다. <자랏골>에서 대학생이 났다는 소문은 개울에서 용이 솟았다는 격으로 근동을 진동시킨다. 그러나 <고당영감>이 집과 논밭, 그리고 명당으로 이름난 대밭까지 몽땅 읍내 <양문>이에게 매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랏골>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을 맞은 격이 된다.
돈이 아니라 금덩어리를 쏟아 놓아도, 동네 가운데다 묏자리 팔아먹을 허욕은 없으니, 두 번 다시 그런 맹랑한 소리를 입밖에 내지 말게. 사람 사는 동네 가운데다 송장을 눕히겠다는 소리가 내 귀에는 총 한 정신 가진 소리도 안 들려 !
한때 <고당영감>의 방안에서 이렇게 외치는 언성을 들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여간 영감의 살림이 양문의 손에 넘어간 것만은 사실이다. 사또 덕에 큰기침을 한다고 대학생 바람에 콧대가 높아졌던 <자랏골>촌민들은 닭 쫓던 개가 아니라 천지가 뒤집히는 큰 충격을 받는다. 가재를 팔아 버린 <고당영감>은 그 때부터 병을 핑계삼아 두문불출이고, 그 아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재를 넘어 다니더니, 해동할 무렵 온다간다 말없이 종적을 감춘다. 먼 훗날에 밝혀지는 이야기이지만 그는 아버지 살림 판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면서 만주 대륙을 쏘다녔다고 한다.
<자랏골>에 명당을 얻게 된 <양문>이는 마을 사람들의 환심과 협력을 얻기 위해 큰 술잔치를 여러 번 베풀어준다. 그러나 <양문>의 어머니 묏자리를 한사코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용골영감>이다. 마을 한복판에 묘를 잡는다는 것은 사람 사는 방안에 백골을 눕히는 거나 다름없는 불길(不吉)이며, 그만큼 <양문>의 안하무인격인 독존에 <용골영감>은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그러나 친일 세도가로서 고을을 주름잡는 <양문>의 위세와 기고만장을 그 앞에서 꺾을 장사는 없다. 일이 착착 진행되어 묏자리가 될 <고당영감>의 대밭이 훤하게 깎여 마을 한가운데가 민틋하게 살을 내놓는다. 그런데 천묘(遷墓)를 막 서두를 무렵에 <자랏골>을 비극의 회오리바람 속에 휘몰아 넣는 첫 번째 사건이 벌어진다. <누가 그랬는지 묘가 앉으면 관이 들어서겠다 싶은 자리에 큼직한 구덩이를 하나 파고 틉틉한 똥을 실하게 한 장군 요량이나 퍼다 부어놓은 것이다.>
이 돌발사건으로 <자랏골>은 한바탕 쑥밭이 되는 것이다. 누가 주모자인지 발각되지 않는다. 사건이 <양문>과 관계 있는 것이고 보니 외양간의 소도 오한이 들 지경이다. 마을에선 노소 가릴 것 없이 사내꼴 뒤집어쓴 촌민들은 읍내 헌병대 분견소로 마소처럼 끌려가 <쇠좆몽둥이> 세례를 받는다. <공중에 휘둘러 잔뜩 힘을 채다가 때기 치는 서슬로 벗은 등 짝을 갈라놓으면 넋은 넋대로 몸뚱이는 또 몸뚱이대로 마룻바닥에 나동그라진다.> 가장 잔혹한 형벌을 당하는 사람은 <용골영감>과 그 아들 형제 <병열>, <병만>이다. <용골영감>은 무지하게 매맞아도 돌부처이다. 살이 묻어나게 몸뚱이를 훑어 가도 영감은 활화산 같은 노기를 삼키고 있을 뿐 꿈적도 안 한다. 일은 그것으로 일단락 되어 모두 풀려 나온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그 다음에 일어난다. <용골영감>의 큰딸 <옥분이>가 <양문>의 산지기놈들한테 뒷산 콩밭에서 야밤중 능욕을 당한 후 소나무에 늘어진 사체(死體)로 발견된다. 영감의 가슴은 더할 수 없는 분노와 복수의 노도에 충일 한다. 그는 고리눈에 불덩이를 튀기며 놈들을 찾아 잡아 때려눕힌 다음, 뒷산 중턱 큰 바위에 스스로 머리를 찧고 낭자하게 피를 흘리며 목숨을 끊는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한없이 업신받고 억압당한 자의 막다른 자기 폭파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그것으로 끝날 수 없고 대를 이어 지속해야 하는 반항의 시발을 의미한다. 사실 <용골영감>의 한 많은 생애는 끝났으나, 아들 <병열>, 즉 <곰영감>의 시대에도 <자랏골> 천민들의 반항과 거기에 대한 <양문>일가의 보복, 이렇듯 없는 자와 가진 자와의 충돌, 할거, 억압, 복수의 파란만장은 계속된다. 그것은 동시에 한국 서민층의 수난사(受難史)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고당영감>의 죽음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용골염감>과 더불어 한 세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문불출이던 <고당영감>은 알 수 없는 병을 앓다가 마을 사람들이 헌병들한테 죽도록 매맞고 나온 다음날 세상을 떠난다. 그는 죽기 전에 마을을 배반한 죄책감에 휘감긴다. 그러나 살림을 팔아 버린, 그리하여 <양문>으로 하여금 <자랏골>을 재앙과 곤욕 속에 파묻히게 한 그의 행위는 결코 배반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 독립투쟁을 위해 정치 자금을 마련하려는 아들의 간청을, 그 자신도 과거에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 동학군(東學軍)에 가담했던 입장이다 보니 <고당영감>으로선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는 그 깊은 사연 때문에 그는 자기내적(自己內的)인 큰 고민을 겪었을 것이며, 그것이 그의 죽음을 초래한 주인(主因)이라 해도 틀림없다.
<자랏골>의 두 번째 비극은 기미 3·1운동 때 발생한다. 읍내 장에 갔던 <자랏골> 사람들은 뜻밖에 엄청난 사건을 목격한다. 읍민들의 만세소리, 태극기의 물결, 말 탄 왜놈 헌병들의 광 질주(疾走), 콩튀듯한 총소리, 연설하는 사람, 글자 그래로 날벼락 같은 풍경이다. 너구리굴처럼 답답하고 조용했던 <자랏골>은 그날 밤 천지가 무너진 듯한 사건의 목격담으로 밤새는 줄을 모른다. 지방에서 터진 3·1운동의 파동 실태가 우매한 촌민들의 입을 통해 기술(記述)되는 그 장면의 묘파력에 있어서 송 기숙은 지금까지 이런 유의 어느 소설에서도 볼 수 없었던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제5장에 실린 농민들의 대화 중에서 몇 토막을 여기 인용하겠다.
"아이고, 그놈의 총소리 참말로 징상스럽데, 징상스러워."
"참말로 벼락소리를 어디 거그다 댈 것이어? 생바우도 쪼개지겄어."
"허허, 저 사람, 벼락소리가 뭣이여. 나무를 폴고 내려오는디 말이여, 골목에서 막 나오는디, 아, 그 잣것들이 저쪽에서 호마를 타고 우크르, 산 무너지는 소리로 쇠켜 내려오등마는, 하필 내 젙에 뽀짝 와갖고는 , 거그서 뜽금없이 빵하고, 하늘 무너지는 소리로 총을 쏘더란 마시. 아이고매나, 나죽었구나. 그때는 그로크롬 죽었다는 생각밲이는 못하고 정신이 어디로 달아나부러서, 도치 맞고 나자빠진 소맨키로 눈만 멀뚜웅멀뚜웅 하고, 그 자리에 그러고 그냥 한참서 있었내 그랴,……"
"그놈들이 그로크롬 무지하게 설치는디, 그런다고 됙립이 되기는 될란가 몰라?"
"됙립 ? 됙립이 뭣이간디?"
"이 깝깝한 사람아, 됙립이 됙립이제 뭣이기는 뭣이여?"
"아 모른께 묻제잉, 누구는 그런 것을 뱃속에서부터 배와갖고 나왔간디?"
"일본놈 쫓아내고 우리만 사는 것이 됙립이제 뭣이여?"
"아이고, 그 징상스런 것들을 쉽게 쫓아내지까?"
"뭐이, 들어본께 서울서는 일본놈들을 홰딱 쫓아내고 시방 임금도 새 임금이 들어앉았다는디 그래?"
"그로크롬 무지하게 총을 가지고 나대는 놈덜을 어뜨크롬 쫓아냈으까?"
"허허. 총이 멋이여. 조선 놈들이 시방 지대로 심은 안 쓰잔께 그러제, 맘 묵고 쓰기로만 하먼이사, 왜놈덜 저것들이 총이 그것이 말하간디? 잇날에도 한번 은제 왜놈덜이 수수만 명 떼끌어서 쳐들어왔는디, 다 들어오두록 내뿌러뒀다가 말이여, 어뜬 도통한 중이 한나 나서갖고, 휘딱 한번 도술을 부려분께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더라여. 그 통에 그 수만 명이 달아나는디, 귀따기야 떨어져라 낸중에 찾자 함시롱, 꼭 우케 덕석에 참새떼 날아 가대끼 내빼더라여."
"아하, 그런께 잇날에도 그런 일이 한번 있기는 있었그마. 그런디, 요새도 그로크롬 도술 부리는 중이 쉽게 있으까?"
"아 있제 없어? 달구새끼가 천 마리면 봉이 한 마리 난다는디, 조선 천지에 중이 몇이라고 총 중에 그런 중 한나 없을 것인가?"
“그런께, 그 종우때기 읽은 영감이 설두를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갑는디, 그 영감이 멀라고 연설을 하든가? 서울서는 참말 일본 놈들 다 쫓아냈다고 하던가? 그러고 그러크롬 하면 일이 어뜨크롬 된다고 하던가?”
“그런께, 뭣이라고 딱 집어서 말을 않는디, 먼 소리가 먼 소린가, 하도 문자를 많이 써서 말을 한께 똑똑히는 못 알아듣겄는디, 서울서는 학생들이랑 뽈깡뒤집히고 조선팔도가 말짱 불이 붙었다고 하는 것이, 하여가네 보통 일은 아니라는 소리 같어.”
“잇날맨키로 중이 도술 부린다는 얘기는 없고?”
“똑똑히 들어볼라고 듣기는 들었는디, 똑 부리지게 뭣이 으짠다는 소리는 없고, 아 참 그러고 본께 그 시님이란 것이 일트먼 중 이제? 도술 부린다는 소리는 않데마는, 서울서는 서른 몇 명을 뽑아서 뭣이로 내세웠다는디, 그 속에는 시님도 한난가 둘인가 찌었다고 한 것 같그마.”
“옳제. 그러먼 시방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모양이네. 막바지에 가면 그 중이 영락없이 도술을 부리네.”
“그로크롬 일본놈덜이 쫓겨가는 날에는 양문이 저 작자도 지가 심을 못쓸 테제. 그런다치라먼 쌍놈의 새끼 쫓아가서 코 빠진 것 구경이나 쪼깐 해주세.”:
“호마 타고 껍죽거릴 적에는 천하가 몽땅 제 세상인 줄 알았다가 꼴 한번 좋겄다.”
여기 인용한 대화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또한 필자의 임의대로 뽑아놓았기 때문에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도 있다. 하여튼 얼마 되지 않는 이 대화만으로도 작가가 기미운동 당시의 농님들의 실상을 리얼하게 부상시켰다고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경들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며 얘기하듯이 3 1운동에 대한 촌민들의 진담(珍談)은 그것이 우매한 대로 그 나름의 뜻이 있고, 허황하면서도 결코 과장된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그들의 솔직한 판단과 의견의 표출이요 그 교차(交叉)인 것이다. 지적인 가식이 없는 그네들의 대화는 우리 고유의 토착미와 토속적(土俗的)인 익살을 질퍽하게 풍겨 준다. 그리고 나라의 독립에 대한 그네들의 염원은 민족 역사의 모진 풍난에 누구보다 험한 고난을 겪어 온 천민들이다 보니, 말로 다할 수 없는 갈증이나 다름없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다 해서 그들에게 무슨 똑 떨어질 만한 기대가 있을 까닭이 없고, 다만 한세상 원통스러웠던 한이나 한번 풀어 보자는 것이 그들이 고작 품어 보는 최대의 희망이라면 희망이랄 수 있겠다.
3·1운동 다음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자랏골> 에 두 번째 폭풍이 밀어닥친다. <양문>의 묏등이 반 넘어 뭉개지고 뭉개 낸 꼭대기에 지난번처럼 똥을 실하게 두 장군 요량이나 퍼다 부어놓은 것이다. 게다가 그 곁에 난데없이 태극기가 꽂혀 바람에 나부끼고 있지 않는가! 이 광경을 목격한 <양문>의 산지기 <춘영>이라는 자는 망연자실(茫然自失), 허둥지둥 똥을 처리하며 태극기를 갈기갈기 찢어 팽개친다. <다 죽었어, 다 죽어! 너나 없이 다 죽었당께. 디질라고 환장을 해도 분수가 있제. 이것이 뉘 못인지 알고 이 염뱅을 했냔 말이여? 어뜬 놈이냐? 살았달 생각 말어라읭! 염라대왕이 즈그 외할애비래도 못 살아, 못 산당께!> 이렇게 뻐럭뻐럭 악을 쓰며 <춘영>은 재 너머 읍내로 뛰어간다. 예상한 대로 <양문>을 선두로 헌병 놈들이 말발굽 소리에 쇳소리 요란하게 칼집을 철거덕거리며 들이닥친다. <자랏골>사람들은 또 분견소로 끌려가 피나무 껍질 벗겨지듯, 또한 뼈가 박살되도록 경친다. 그러나 아무리 조져대도 범인을 딱 가려낼 수 없게 되자 <용골영감>의 두 아들 <병열> <병만>과, <덕재영감> 아들 <중구>, 세 젊은이에게 놈들은 억지 죄를 뒤집어씌워 2년 징역을 치르게 한다.
다른 한편 몸뚱이에 구렁이를 감은 듯 어혈이 맺혀 나온 마을 사람들은 그들대로 한 차례 지겨운 곤욕을 치러야 한다 맞아 어혈이 들거나 골병든 데는 똥물 밖에는 약이 없는 마을이다 보니, 그야말로 <개똥에 미끄러져 쇠똥에 입맞추듯> 사내들은 병이랑 게 처음부터 얻어맞아 걸린 더러운 생병이라 약도 더럽게 똥물을 들이마셔야 할 처지인 것이다. <자랏골> 아낙네들은 우황든 소처럼 끙끙 앓고 있는 남편들에게 똥물을 한 사발씩 떠다가 억지로 마시게 한다. 이러한 원시적인 요법이 과연 효력이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병자들은 목숨이 살아 놓고 볼 일이기에 사람 똥 아니라 개똥 물이라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의 구호책으로 세상에 이런 일보다 더 처절한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똥 같은 인생들이 똥 같은 대접밖에 받지 못한 그런 역사만을 되풀이해온 당시 한국의 비천한 촌민들에겐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이고 간에 그것을 구분할 것조차 없는 초라한 시간이 누적했을 따름이다. 나라가 해방이 되어도 <자랏골>의 응달에는 햇빛이 쬐지 않았다. 일제가 물러가도 <양문>의 권세는 도리어 약진의 신작로를 줄달음칠 뿐이다. 해방된 이 땅은 민족을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했던 사람들의 후예보다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친일패들이나 그 자손들이 더 많이 날뛰며 앙천대소(仰天大笑) 했던 것이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과거사이며, 그런 과거의 병폐가 오늘날에도 지배적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천민들의 형편이야 거론조차 할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후손들의 시대에 와서도 <자랏골>의 비참한 생활은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다. 가령 일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명절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자랏골>사람들의 명절은 성묘 오는 산주들의 뒷바라지에 항상 남의 추석이요 남의 설이다. 남의 논밭에 얹혀사는 형편이니 팔자소관으로 돌려 그걸 타박하고 어쩌고 할 계제는 당초부터 없거니와 그래도 명절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정해 놓은 날일 텐데, <자랏골>은 지주들의 성묘 뒷바라지에 항상 굽실거려야 하는 처량함을 벗어날 길이 없다. 가을에 곡식을 거둬들여도 <자랏골> 빈농들에게는 시름이 한 짐씩 더 얹혀지기만 한다. <갖바치 날 물리듯> 가을만 들어서면 가닥을 추릴 수도 없는 갖가지 잡부금에 비료대며 농자금, 그야말로 터주에 붙이고 조왕에 붙인 격이 되어 남는 것이 없다.
<자랏골>의 궁색이며 재액이며 살인극이며, 그 밖의 산지기 일거리로 해서 벌어지는 동네 배후의 음모, 질투, 갈등, 보복, 도장사건(塗裝事件) 등 모든 사건은 직접 간접으로 <양문>이와 그의 묏자리가 화근인 것이다. 그것은 40년간이나 계속되는 <자랏골>의 숙명이다. <종수>의 아버지 (고당영감)의 둘째 아들)는 6·25때 <양문>의 묘의 정기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자기 논의 바위를 떨어버린다고 발파 구멍을 만들다가 피살된다. 그것은 <양문>의 산지기인 <질천>의 소행인 것 같다. <질천>의 소행이지만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문>의 부추김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훗날 <종수>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바위를 떨어내려고 하다 <양문>의 아들의 고발로 경찰서에 끌려가 빨갱이로 몰리며 심하게 경친다. 다른 한편 <선찬>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인 <텃골양반>은 해방23년 후에 <양문>의 묘의 도장사건에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양문>의 친척 지치래기들한테 몽둥이 몰매 맞아 <선찬>의 아버지는 죽고, <텃골양반>은 다리 병신이 되고 만다. 억울하게 매맞아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먼 훗날 <선찬>이 <양문>의 묘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려다 경찰에 잡혀간다. 그뿐만 아니라. <용골영감>의 둘째 아들 <병만>은 병신 아들 <해룡>이가 <양문>의 호마한테 귀를 뜯겨 피투성이가 된 꼴을 보자, 눈에 분노의 불꽃을 튀기며 창을 들고 미친듯 달려가서 호마의 배를 찔러 죽이는데, 결국 그는 논밭과 집까지 팔아 <양문>의 말 값을 물어주고 거지 신세가 되어 살다가 어느 날 바위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다.
이렇듯 <양문>으로 해서 <자랏골>은 비명에 간 사람들이 여럿 되지만, 그 이외에 간접적인 피해도 여간 크지 않다. 우선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이 동네의 사람꼴 같지 않은 살림살이가 그런 예의 하나가 된다. 지금은 옛날처럼 <양문>이나 산주(山主)들이 이 동네 사람들의 거지 취급하듯 탁탁 하대하거나 혹은 제 마음대로 위토(位土)를 떼어 옮길 수도 없게 되어, 그만큼 나라의 해방 덕을 입었다면 입었다 할 수 있고, 산주들의 일제 때 같은 횡포는 없어졌으나 그래도 옛날 거드럭거리던 행티가 속속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산주들의 비위에 거스르면 가을 곡수나 제물 마련 등 티격붙일 것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자랏골>은 산주들 앞에서 늙어도 소승, 젊어도 소승으로 늘 굽실거릴 뿐이다. <자랏골>에서 나서 그대로 산중 두더지로 자란 젊은층은 애비들의 그런 꼴에 <지게목발 두들기는 신고산 타령>을 부르며 구슬픔을 금치 못한다, 고향 땅의 처량함을 벗으려고 도시로 나갔던 젊은이들이 또한 모진 객지바람에 시달리다 돌아오는 것이 일쑤이며, 어떤 경우에는 몸까지 폭삭 망치는 일도 있다. <텃골양반>의 딸 <써운>은 서울 식모살이하다가 자식 없는 그 집에 돈을 받고 주인의 아기를 낳아 준다. 대가로 받은 돈으로 <써운>은 친구와 편물점을 내려다 사기꾼 놈에게 적잖은 돈을 몽땅 날려보낸다 다시 부유한 집 식모로 들어간 그녀는 잃어버린 돈을 되찾으려는 환각(幻覺)에 잡혀 그만 뜻하지 않게 그 집 패물을 훔쳐 고향으로 도망간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곧 경찰에 잡혀간다. 그 후 경찰에서 나온 <써운>은 봉두난발의 험한 꼴로 다시 집에 돌아와서 <엄니, 우리 애기 어쨌어? 얼른 내놔! 젖 주게> 하며 헛소리 친다. 그녀는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그러다가 집을 뛰쳐나간 그녀는 마침내 재 너머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그녀의 시체의 부피와 무게는 단순한 살덩어리의 부피와 무게가 아닌, 자신뿐만 아니라 그 부모를 포함한 <자랏골>사람들의 전체의 원한과 고통이 응어리진 잔흔(殘痕)이나 다름없다.
「자랏골의 悲哀」는 뒤부분에서 소설의 중후감을 더 한층 크게 풍긴다. 이 부분에서의 사건과 이야기는 주로 <종수>를 중심으로 엮어진다. 그는 나이는 불과 20세 정도이지만 마을의 책임을 맡은 이장(里長)이다. 그가 경찰에 풀려 나온 다음날 <양문>이가 몸소 그를 찾아와서 그의 아버지 피살사건과 자기들은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해명한다. 6·25때 피난을 간 자기들이 산 사람 목숨도 건지기 어렵던 판국에 죽은 사람 묏등까지 걱정할 경황이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영감의 태도가 진지하지만 <종수>로선 어쨌든 영감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 주어야겠다는 부담감에 곁들여 <종수>는 또 다른 큰 걱정거리가 있다. 전 이장이었던 <득철>이랑 놈이 은행에서 얻어 낸 마을 미곡 담보 융자금을 홀딱 먹어 버리고 뺑소니친 것이다. <종수>는 읍내 낯익은 은행원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해 보지만 결과는 정해 놓은 이치대로이다. 미곡 담보 융자란 이단위 조합별로 상호 연대 신용 보증으로 대여한 것이므로 마을 전체가 공동 부담을 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펄펄 뛴다. <나는 하늘이 두 쪽으로 뽀개져도 그런 돈을 못 물겄어. 조리장사 체곗돈을 내다가 목때기 중놈 외입값을 물어줬으면 줬지 그런 돈을 못 물어.> <으째서 중놈 회값도 아니고 외입값도 아닌, 이런 애먼 돈을 영도 상도 모르는 산지기가 물어 쓰냔 말이여?> <아무리 내 도장이 찍혔다고 하제마는 미친년 모심대끼 아무 도장이나 줏어다가 꾹꾹 찍어 놓고 해 처묵은 것을 우리는 먼 웬수졌다고 죽는 놈만 죽어?> 이렇게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아우성이다. 그것은 단순한 항변이 아니라 통곡이요 몸부림인 것이다.
이장을 새로 맡은 <종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자랏골>은 <자랏골>대로 금방 차압이 붙게 되어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이다. 그때 구원의 손길이 뻗친다. <양문>의 쪽에서 일을 깨끗이 해결해 주겠다는 이야기이다. <양문>의 아들 <이종석>이 지금 국회 농림분과위원인 것이다. 그러나 <종수>의 입장으로선 그건 전연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유혹의 마수이다. <양문>의 묘의 정기와 관계 있는 자기의 논을 <양문>에게 팔아넘기라는 요구의 암시일 것이거나 최소한 논 안에 있는 바위를 더 이상 건들지 말라는 반대급부임에 틀림없다고 <종수>는 단정한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문제이다. 그들은 자기네 사활에 관한 일이므로 <종수>더러 개인적인 고집을 꺾고 <양문>쪽의 도움을 받아들이자고 간청한다. <종수>는 진퇴유곡에 빠진다.
종수와 문길이는 멀쑥한 얼굴로 선찬이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젠장칠 것, 징역을 살면 몇 년이나 살 것이여? 생사람을 죽이고도 썽썽한 놈이 있는디.”
“그래 그런 배짱이 있냐?”
“약만 구해줘!”
“좋다. 그런 배짱이라먼 내가 약을 구해주마.”
“정말?”
“정말이야, 설 전날까지만 구해주면 되겠지?”
처음에는 말이 쉽게 나와 농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설날까지 구해주기로 단단히 약속을 했다.
<자랏골>의 차압사건은 <이종석> 의원의 힘에 의하여 거뜬히 해결된다. 마을 사람들은 축제 같은 기분에 들뜨며 <이종석>의 칭찬에 침이 딸린다. 그러는 가운데 <곰영감>의 딸이 <양문>의 막내아들 <외팔이>의 소실로 들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종수>는 <양문>의 앞에 어이없이 굴복한 <곰염감>의 비굴과 배신행위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울분이 끓어오른다. 이제 마을 사람들도 온통 <양문>의 편에 든 것 같다. <종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독과 적막을 느낀다. 세상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분통에 가슴이 찢긴 <종수>는 이제 망설일 것이 없다.
이렇게 종수, 문길, 선찬 등은 다이너마이트로 양문의 묏등을 폭파하기로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묏등을 폭파하기로 제의한 것은 선찬이었으며, 거사일은 양문이 가족이 성묘를 오는 설날로 결정된다.
설날. 양문이 가족들이 성묘하러 오는 가운데 <자랏골> 사람들의 피맺힌 설움과 원한의 대상이던 양문네 봉분은 천둥번개가 꽝꽝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갈기갈기 파헤쳐지고 만다. <봉분이 앉았던 자리에는 꺼꾸로 그 봉분덩어리만한 홁구덩이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앞에 한 일자로 찢어진 묏벌은 양문이 식구들이라도 삼켜버릴 듯이 또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래로 죽어버리기라도 한 듯 꼼짝 않고 있던 양문이 식구들은 한 사람씩 꾸물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사건 후에 양문이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어찌된 일인지 전혀 말을 못한다는 것이며, 정신은 말짱한 것 같은데, 어떻게 말을 하려고 입을 들먹이면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고 입술만 조금씩 들먹이다 만다는 것이었다.
“양문이가 벙어리가 되아부렀다는 것이 참말이여?”
“말을 못한께 그것이 벙어리제 뭣이겄어?”
“그런께 묏등은 터지고, 양문이 입은 봉해졌단 말이여? 허허. 살다 본께 별일이 콩노물 질대끼하네.”
"묏등 터진 데사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인 께, 아가리 꽉 봉하고 있으라고 입에다가 주걸을 쌔려번진 모양이제. 하하하”
이와 함께 세상은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4·19혁명이 터지며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나와 자유당 시대는 역사의 유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자랏골의 悲哀」의 줄거리를 대충 훑어보았다. 우리는 이 장편의 결말에 <양문>이가 자기네 묘를 이장하게 되는 장면과 더불어 그 동안 수수께끼였던 도장사건, 그리고 <종수> 아버지의 피살사건의 장본인이 다름아닌 <곰영감>이었다는 암시를 읽게 된다. 그런데 소설의 이와 같은 결말은 이제까지 팽팽하게 지속했던 사건의 긴장과 파토스를 급전적으로 약화시켜 놓았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이 이렇게 처리되고 보니 결국 <양문>이라는 인물 그 자체는 조금도 죄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셈이다. <자랏골>이 수십 년을 두고 겪어 온 천대와 가난, 피해와 비극에 우리는 큰 충격을 느꼈고 나와 더불어 <양문>에게 대한 마을 사람들의 원한과 분노를 바로 우리 자신의 것처럼 생각해 왔던 우리의 심정은 소설의 끝맺음에서 완전히 뒤집히는 허망감을 금치 못한다. 반민족적 친일배였고 또한 자유당 치하의 세도가였던 <양문>은 4·19의 역사적 현장에서, 마땅히 역사의 지평에서 사라지는 패자로 부상되었어야 했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자랏골의 悲哀」는 그만큼 격조 높은 로망의 풍모를 띠게 되었으리라.
그 밖에 몇 가지 지적하고 싶은 필자의 불만은, 첫째 이 장편이 너무 좁은 지역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점, 모든 비극의 밑뿌리를 묏등에다 박아 놓은 점, 풍수지리설과 같은 미신적인 풍속이 너무 짙게 드러난 점등이다. 소설은 과거를 소재 혹은 주제로 다룰 때, 과거의 복고적인 재생(再生)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미래 예시적인 역사성을 근본이념으로 잡아야 그 의의가 빛나는 것이다. 둘째, 이 작품에는 독립투쟁에 투신한 대학생 <김태율>의 활동 상황이 전연 비쳐 있지 않고 그의 존재가 수수께끼로 처리된 것과 8·15해방이 또한 전연 영사되어있지 않은 점이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셋째는 <양문>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며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 <양문>은 <자랏골>의 비애에 음양으로 깊이 관련된 인물이다. 그렇다면 <양문>이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 즉, 그의 친일행위와 반민족성은 어떻게 전개되었던가, 그가 친일배로서 얻은 개인적인 이득은 무엇이었던가, 또한 해방 후 어떤 경로를 밟아 자유당 치하의 호세가로 날뛰게 되었던가 하는 제 사상(諸事象)이 폭 넓고 자상하게 기술되었어야 좋았을 것이다. 소설의 파토스는 비극적인 인물이나 상황의 묘사에 못지 않게 그 비극을 입히는 가해자의 모습과 행각도 질도(跌倒) 있게 그려져야 소설적 균형이 잡히고, 보다 깊은 감명을 주게 되는 것이다.
「자랏골의 悲哀」는 이런 몇 가지 결함과 동시에 장점도 많다. 우선 상황 설정과 인물 구성, 풍경 묘사에 있어서 송기숙은 뛰어난 필치(筆致)를 보여 준다. 사건 전개가 자연스럽고, 농민들의 대화는 흠잡을 데 없이 아주 여실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밖에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될, 그러면서도 실상 잃어버리고 있는 우리 고유의 토착어 격언 속담 풍자 익살 등이 이 소설의 지문과 대화의 곳곳에서 적절하게 수놓아져있다. 이 점만은 한국 문학의 큰 수확이라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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