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섭
by 송화은율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전쟁 직후의 네거티브 필름-손창섭론
송하춘
손창섭 소설의 현주소는 정확히 6?25 전쟁 직후로 제한된다. 그 안에 일제와 해방 후의 좌우 대립과 피난이라는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모두 전쟁이 휩쓸고 간 피난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작중 인물들도 모두가 피난민들이다. 그들의 삶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피난 생활 그 자체다.
피난지에서의 삶은 경제적인 궁핍과 사랑의 결핍 두 가지로 요약된다. 손창섭 소설은 이런 결핍에 대한 단순한 불만이나 고발이 아니다. 그것은 결핍된 삶 자체로서 전후의 극단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이때 결핍 또는 궁핍이란 말은 상대적으로 정상(正常)이란 말을 상정케 한다. 송창섭 소설은 왠지 정상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가 비정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인물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구자들뿐이고, 그들의 얽힘도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러고도 이런 비정상이 정상인 것처럼 리얼리티를 확보하는데, 전쟁 직후라는 특수 상황이 그 점을 가능케 한다.
손창섭 소설은 전후의 왜곡된 상황에 대한 하나의 전형이다. 이 점에서 또한 손창섭 소설은 전체가 하나의 모습으로 귀착된다. 이상(李箱)의 소설이 「날개」하나로 기억에 남듯 손창섭 소설도 한 가지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것은 「날개」나 「오감도」처럼 별개의 작품이 아니다. 손창섭 소설은 그냥 전체가 한 가지 모습이다. 소설의 현장이 하나이고, 인물들끼리의 관계가 하나이고, 가난이 하나이고, 사랑이 하나이다.
먼저 그 인물들과, 그들이 얽혀 지내는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손창섭 소설의 인물은 기본적으로 네 사람이다. 남자가 세 사람, 여자가 한 사람, 그들은 대개 한 집에 모여 지낸다. 때로는 방 한 칸에 모여 살기도 하지만, 그들은 한 집안 식구는 아니다. 각각이 남남이거나, 최소한 두 가구 이상이 모여 이룬 복합형 취락 구조다. 그 집 혹은 그들의 방은 동굴 속처럼 어둡고 칙칙하다. 그 안에서 그들은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면서 생활한다. 손창섭 소설의 전체는 불협화음이다. 가족끼리 어울려 살면서도 남남처럼 서먹하고, 남남끼리 어울려 살면서도 가족처럼 끈끈한 것이 손창섭 소설의 특징이다.
만기 치과 의원(萬基齒科醫院)에는 원장인 서만기씨와 간호원 홍인숙양 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사람 둘이 있다. 그 한 사람은 비분 강개파 채익준씨요, 다른 한 사람은 실의의 인간 천봉우씨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서만기 원장의 중학교 동창생이다.
「잉여인간」의 첫 장면이다. 여기서도 주요 작중 인물은 세 남자와 한 여자 모두 넷이다. 서만기와 채익준과 천봉우와, 그리고 홍인숙, 그 가운데 서만기 혼자만 생업이 있고, 채익준과 천봉우는 무직이다. 벌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 벌이가 있는 서만기에게 생계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도 손창섭 소설은 벌이가 없는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벌이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어울려 살기란 모두 정상적인 얽힘이 아니다. 서로 얽힐 수 없는 관계이지만, 전쟁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 손창섭의 시각이다. 손창섭은 처음부터 가능한 인간의 관계들을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가능한 관계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 지내는가를 그는 주목한다. 「잉여인간」의 인물들은 목적 없이 만나는 생활의 낙오자들이지만, 중학교 동창이라는 인연으로 하나의 가족적인 틀을 형성한다. 혹은 군대 동기인 경우도 있다. 혹은 이북에서 같이 지내다가 피난 나온 사람들이기도 하다. 「혈서」의 세 젊은이들, 「설중행(雪中行)」의 옛 제자와 은사, 「비오는 날」의 동욱 남매, 「인간동물원초(人間動物園抄」의 죄수들, 그들은 모두 방 한 칸에 여자를 사이에 두고 위험한 혼숙을 한다. 「사선기(死線記)」처럼 옛 애인의 집에 함께 기거하기도 한다. 「생활적」의 동주 부부와 봉수 부녀, 「유실몽(流失夢)」의 상근 부부와 처남도 어울릴 수 없는 관계들의 어울림으로써, 전후 피난생활에 대한 풍속도를 이룬다.
손창섭 소설의 인물들은 대부분 무력증 환자다. 「잉여인간」의 천봉우처럼 모두 실의에 빠져 있다. 천봉우는 늘 말이 없고, 방금 자다 깬 사람처럼 가수 상태에서 허덕인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를 작가는 6?5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피난 나갈 기회를 놓치고 적치 삼 개월을 꼬박 서울에 숨어 지내다 보니, 빨갱이와 공습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불안한 긴장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중학 시절의 그는 재기 발랄한 야심가였다. 그러던 것이 전란 통에 양친과 형제를 잃고 나자 인간 만사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이처럼 손창섭 소설의 인물은 모두가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다. 환자의 증세는 다시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가 경제적인 무력감이라면, 다른 하나는 애욕의 무력감이다. 천봉우의 무력감은 일종의 성적 편집 증세로 나타난다. 간호원 인숙에 대한 천봉우의 연애감정이 그 예다.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항상 무력감에 빠져 있던 그가 인숙한테만은 유난히 강렬한 애욕을 느끼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관계의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이고도 충동적인 욕구일 뿐이다. <인숙양을 바라볼 때만은 잠에서 덜 깬 사람같이 언제나 게슴츠레하던 그의 눈이 깨어 있는 사람의 눈답게 빛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있음에 대한 존재의 확인이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값한다. 섹스를 통해서 그는 인간 본능의 밑바닥을 훑어본다. 그리고 인간의 위선을 벗겨 내기도 한다. 「생활적」의 <그날 밤 동주는 그냥 수컷이었을 뿐이다.>와 같은 동물적 행위는 손창섭 소설의 전편에 깔려 있다. 전쟁으로 인한 졍제적 궁핍과 인간의 훼손을 식욕과 성욕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해 반응해 보는 것이다. 「잉여인간」에서 이 점은 만기를 둘러싼 봉우 처의 맹목적인 애욕과, 처제 은주가 형부에게 바치는 순결한 사랑과, 간호원 인숙이의 헌신적인 사랑에서도 나타난다. 그것들은 모두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극단적이고도 병적인 상태의 인간상을 말해 준다. 상호 이해와 신뢰에서 생기는 정상적인 인간 관계가 아니라, 위기의 상황에서 자행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충동적인 확인이다.
「혈서」의 달수는 길을 걷다가 거리에서 문득 인간 실존의 문제에 직면한다.
한번은 거리에서 바로 자기 앞을 걸어가던 사람이 미군 트럭에 깔려 즉사했다. 그때 달수 자신도 하마터면 트럭 앞대가리에 이마빼기를 들이받을 뻔했다. 그날 이후 달수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데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대량 살육이 자행되었던 6.25 때가 아니라, 그러한 불안은 실로 그날부터였다. 따라서 자기는 왜 죽지 않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을까가 문제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은 납덩어리처럼 무겁게 잠시도 쉬지 않고 그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그러한 달수에게는 준석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살아 있음>에 대한 실감은 인간 위기의 자각을 의미한다. 전후 세대들이 갖는 절망감 속에서 실존의 문제가 제기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겪고 났을 때, 그들은 <우연히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그들의 인생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 그렇게 선택된 삶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훗날 전쟁이 휩쓸고 간 피난지에서 그들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한 것이다.
손창섭 소설에서 실존의 문제는 허무주의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허무의 정체는 우선 책임의 부재로 나타난다.
이 자식아, 창애의 배가 불렀건 꺼졌건, 그게 나하구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창애의 배는 어디까지나 창애의 배지, 내 배는 아니다. 창애 배가 부른 게 어째서 내 죄란 말야.
「혈서」에서 창애라는 여자를 두고 준석과 달수가 벌이는 한판 논리다.
창애 부친은 이 집 주인인 규홍이가 창애와 결혼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달수는 창애가 간질병 환자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준석은 결혼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 두 사람에게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각과 주장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창애가 준석의 애를 배는 사건이 생긴다. 달수가 볼 때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준석은 그게 뭐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전후 세대들은 전쟁이 바로 자기 책임이 아니듯, 어떤 일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다. 심지어는 자기가 저지른 일까지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논리적인 강변을 낳는다. 극단의 허무주의다. 「유실몽」에서도 이런 허무주의는 비슷하게 나타난다.
하나두 나의 죄는 아닙니다. 그렇다구 물론 춘자씨 죄두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춘자씨의 부친이나 우리 누이의 잘못두 아닙니다. 그저 명확한 사실은, 우선 나에게는 한 벌의 신사복이 필요하다는 것뿐입니다. 그뿐입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염색한 군복만을 입구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런 허무주의가 극단화하면 준석처럼 <비분 강개파>가 되지만, 세상을 향해 부르짖음을 포기할 때 그의 인물은 오히려 <실의에 빠진 인물>이 되고 만다. 준석에 비해 달수가 그런 인물이다. 손창섭 소설의 인물들은 작가 자신이 표현한 대로 <비분 강개파>와 <실의에 빠진> 두 가지 유형의 인물로 나뉜다. 비분 강개파는 세상을 향해 적극적이지만 오히려 불합리한 데가 많고, 실의에 빠진 인물은 합리적이지만 그 대신 세사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다. 비분 강개파나 실의에 빠진 인물이나 전후 세대라는 점에서는 같다. 합리적인 행동도 전쟁 때문에 무기력해졌고, 불합리한 행동도 전쟁 때문에 가능해졌다. 손창섭 소설은 이 두 가지 유형의 극단적인 인물들이 꾸려내는 전후 사회의 풍속도다. 달수처럼 순리대로 살아도 세상은 절망적이고, 준석처럼 억지로 살아도 세상은 굴러간다. 6?5가 그들의 의식 세계에 그만큼 큰 피해 의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피해 의식은 그들이 삶의 현장에 뛰어들려고 할 때 훨씬 민감하게 나타난다. 손창섭에게 삶의 현장이란 곧 가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가 연애를 하고,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고자 하는 것도 다름 아닌 가정을 꾸리자는 일로써, 삶의 현장을 마련하는 일과 같다. 맨 처음 추천작인 「공휴일」에서 이미 이 문제는 제기된다. 도일이 바로 그 <생활> 때문에 연애와 약혼과 결혼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나 도일은 <이성이나 결혼 문제 같은 데 대해서 남들처럼 흥미를 가지 못하는 인물>이다. <결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고, 약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고, 파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어서, 마침내 사회적 결속력이 결여된 성격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성격은 극단적인 허무주의의 산물로서, 일상과 괴리될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어머니 같아 뵈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적인 삶의 현장으로부터 늘 격리되어 있다.
아침이 되어도 동주(東周)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송장처럼 그는 움직일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몸은 지칠대로 지쳐버린 것이다. 몸뿐이 아니다. 마음도 곤비할 대로 곤비(困憊)해 있었다. 심신이 걸레 조각처럼 되는대로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것이다. 걸레 조각처럼.
「생활적」의 현장은 이처럼 비생활적이다. 이 폐칩된 공간 속에 두 가구 네 식구가 불협화음을 내며 산다. 동주와 춘자 부부, 봉수와 순이 부녀, 그 가운데 특히 실의에 빠진 동주와 옆방에서 신음하는 순이와의 <생활적>인 관계는 그대로 전쟁 직후의 <생활>이다.
순이는 밤에도 자는 것 같지 않았다. 밤낮없이 누워서 신음 소리만을 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신음 소리를 내기 위해 장치한 기계와도 같았다. 동주는 종내 어느 날 순이에게 물어보았다. 「너 어째서 그렇게 밤낮 신음 소리를 지르니? 그렇게 죽어오게 아프냐?」순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어떻게 해요. 그냥은 심심해서 못 견디겠는걸」그때부터 동주는 무겁고 암담한 순이의 신음 소리를 아껴주기로 한 것이다. 그 신음 소리는 머지않아 죽을지도 모르는 순이의 최선을 다한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비생활적>인 <생활>의 공간은 자주 <동굴 속>으로 표현된다. 그 동굴 속은 어둡고, 그 안에 불구자가 누워 있고, 그 옆에 하릴없는 실업자가 그것을 지켜보고, 그래서 그곳은 가난과 사랑의 위험 지대로써 모든 손창섭 소설을 하나의 암울한 폐허로 그려내는 것이다. 「혈서」의 비생활적인 생활 공간도 같은 풍경이다.
이 겨울 들어 불이라고는 지펴본 적 없는 방 한가운데 다리 하나 없는 준석(俊錫)은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것이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한 장밖에 없는 이불 속에 엎드린 채 일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 춥기도 하려니와, 일어나 앉아 그에게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이었다. 준석이가 누워 있는 발치 쪽으로 취사 도구가 놓여 있는 석유 풍로와 나란히 창애(昌愛)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안에 한쪽 다리가 없는 불구자 준석과, 그 곁에 또 간질병 환자인 창애가 누워 있는 동굴 속 같은 풍경은 모든 손창섭 소설을 하나로 모습짓는 전후 피난 생활의 음화다. 「유실몽」의 강노인도 같은 분위기의 동굴 속에서 신경통을 앓고 있다. 「비오는 날」의 움막집은 낡은 목조 건물이다. <한쪽 귀퉁이에 버티고 있는 두 개의 통나무 기둥이 모로 기울어지려는 집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기와를 얹은 지붕에는 두세 군데 잡초가 반 길아나 무성해 있었다. 나중에 들어 알았지만, 왜정 때는 무슨 요양원으로 사용되어 온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전면은 본시 전부가 유리 창문이었는데 유리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해서 오른편 창문 안에는 가마니때기가 드리워 있었다.> 그 안에 <왼쪽 다리가 어린애의 손목같이 가늘고 짧은> 동옥과 <목사가 되겠노라고 하면서도 술을 사랑하는> 동욱이 함께 기거한다. 「미해결의 장」에서 이런 폐허의 장면은 전쟁과 직결되며, 그것은 곧 지구상의 병리적 대상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전찻길을 건너고, 국민학교 담장을 끼고 돌아와 육이오 때 파괴된 채로 버려둔 넓은 공터를 가로질러 나는 또 문 선생네 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국민학교의 그 콘크리트 담장에는 사변 통에 총탄이 남긴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나는 오늘도 걸음을 멈추고 그 구멍으로 운동장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침 쉬는 시간인 모양이다. 어린애들이 넓은 마당에 가득히 들끓고 있다. 나는 언제나처럼 어이없는 공상에 취해 보는 것이다. 그 공상에 의하면 나는 지금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병리학자인 것이다. 난치의 피부병에 신음하고 있는 지구덩이의 위촉을 받고 병원체의 발견에 착수한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박테리아에 의해서 발생되는 질병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도 그 세균이 어떠한 상태로 발생 번식해 나가는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학교 교정을 보는 시선이 마치 동굴 속처럼 어둡다. 어린 학생들을 보는 그의 시선도 마치 그 안의 불구자들처럼 불결하다. 동굴 속과 같은 움막집, 불구자와 같은 그 속의 인간들, 난치의 피부병에 신음하고 있는 지구덩이, 박테리아로 표현되는 어린 학생들까지, 그의 시선은 마치 세균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처럼 한 가지다. 그는 사물을 개체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을 하나의 현미경으로 관찰할 때, 보이는 것은 한 가지로 불순한 것들뿐이다.
그러나 불구자가 있는 풍경은 음산하지만, 그 불구자를 향한 시선은 따뜻하다는 점이 또한 손창섭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의 휴머니즘이다. 그들은 불구자와 함께 어울려 산다. 그의 소설 속에 어차피 완벽한 인물은 없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거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결핍된 인물들뿐이다. 결핍된 인물이 결핍된 인물을 돕는 모습은 괴기스럽지만 훈훈하다. 「비오는 날」의 원구는 가난하지만 동옥의 불구를 보는 마음이 아프다. 동욱이 군대에 끌려가고, 동옥이 창녀촌에 팔아 넘겨졌을 때, 원구는 마치 자기가 팔아 넘기기라도 한 것 같은 죄책감에 젖는다. 간질병자인 「혈서」의 창애는 달수가 돌본다. 달수는 가난한 고학생으로 취직을 하지 못하여 실의에 빠져 있지만, 준석으로부터 끝내 창애를 지켜내지 못하였을 때 그는 손가락을 잘리는 불행을 겪기도 한다. 「생활적」의 죽어가는 순이는 동주가 보살핀다. 순이의 신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동주는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다. 신경통 환자인 「유실몽」의 강 노인은 옆방의 사내가 보살피고, 「포말의 의지」에서 창녀 옥화는 종배가 돕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돕는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 돕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이나 다같이 궁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다만 궁핍한 사람들끼리 한데 모여 견디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손창섭 소설의 휴머니즘이다.
「사선기」는 지금까지 언급한 손창섭 소설의 거의 모든 특징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룬 한편의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다. <생을 향락하다니? 생의 어느 구석에 조금이라도 향락할 수 있는 대견한 요소가 있단 말인가?> 이런 절규도 그 동안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던 그의 절망적 표현이다. <해방 이래 한결같이 계속되는 초조, 불안, 울분, 공포, 그리고 권태 속에서, 물심 어느 편으로나 잠시도 안정감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동식은, 결혼에 대한 특별한 관심도 느껴보지 못한 채, 앞으로 살아가노라면 어떻게든 자기의 ‘생활’이라는 것이 빚어지려니 싶어 어물어물 지내오다 보니 오늘날까지 남들같이 출세도 못 하고 돈도 못 모으고, 따라서 궁상스런 홀아비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기력증은 모두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해방 전에 동식과 정숙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 사이에 성규가 정숙을 좋아하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동식의 집은 지주였다. 그 때문에 해방 직후, 동식의 부자는 끌려가 매를 맞고 아버지가 죽는다. 이때 성규는 좌익의 세력자였으므로 정숙이 만일 자기와 약혼을 해주면 무사히 동식을 풀어주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겠다고 한다. 동식을 위해 정숙은 성규와 약혼한다. 「사선기」는 그 성규와 정숙 부부, 그리고 옛 애인 동식이 함께 기거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피난살이를 다룬다. 이 소설의 현장도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동굴 속 같다. <먼지와 그을음과 파리똥으로 까맣게 전 창 하나 없는 벽과 천장 구석구석에는 거미줄이 얽히어 있고, 때우고 또 때우고 한 장판 바닥에서는 먼지가 풀석풀석 이는 음침한 단칸방이었다. 이 방에 들어설 때마다 동식은 어느 옛날 얘기에나 나옴직한 끔찍스러운 괴물이라도 살 것 같은 우중충충한 동굴을 연상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 <언제나처럼 성규는 그러한 방 아랫목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죽어가고 있다. 동식을 보는 성규의 시선은 아내의 옛 사랑에 대한 질투와 죄책감이다. 그 질투와 죄책감이 오늘의 비참한 현실과 교착될 때 그는 패배적인 인간상을 형성한다. 정숙을 보는 동식의 시선은 옛 사랑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이다. 그 연민과 죄책감도 오늘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는 승리자일 수 없다. 해방과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전쟁을 겪고 난 이들 젊은이에게 남은 건 절망과 좌절일 뿐이다.
끝으로, 전후 사회의 풍속도로써, 손창섭 소설에 나타난 일본 혹은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미국을 보면, 첫 작품인 「공휴일」에서 도일의 약혼녀인 아미는 <미국 유학의 장래>가 약속되어 있는 청년에게로 달아난다. 미국은 그녀에게 우월적이고, 그에게 열등감을 유발하는 곳이기도 한다. 「미해결의 장」에서 나의 일가는 미국 유학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움츠린 움막으로부터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미국으로의 창구로 설정하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우리 집 식구들은 온통 미국 유학열에 들떠 있는 것이다> <오냐, 다섯 놈이 모두 박사, 석사 자격을 얻어가지구 미국서 돌아만 와바라, 오 남매가 당장 미국서 박사, 석사 학위를 얻어가지고 귀국하게 된 것처럼 대장은 신이 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윗목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서 대장은 무슨 모욕이라도 당한 듯이 노려보는 것이다.> 그에게 미국은 선망의 대상이지만, 미국화가 곧 성공이라고 믿는 당시의 풍조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소적이다. 미국에 대해 그는 비판적이기까지 하다. 이에 비하면 일본은 그에게 우월적인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판적이지 않다. 다만 그곳이 우리에게 불행의 원천일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유학생을 따라잡는 일제의 검은 그림자를 그는 「낙서족」에서 주목한다. 주인공 박도현은 독립 투사의 아들로서, 「낙서족」은 지금까지 검토한 손창섭의 다른 소설과 달리 일본에서 겪는 우리 유학생의 수난기이다. 「생활적」의 춘자는 일본 여인이다. <해방되던 해 봄에 한국 청년과 결혼해 가지고 해방이 되자 곧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남편의 고향인 전라도에 가 살다가 여수 순천 반란 사건 통에 경찰에서 일보던 남편은 학살당했다. 그 뒤 일본에 돌아가려고 부산에 오기는 했으나 호적 초본이 있어야 외무부에서 정식 수속을 밟을 수 있는데, 친정과 연락이 취해지지 않아서 여태 돌아가지 못하여> 여기 눌러 산다는 것이다. 이 점은 아무 비판없이 일본의 잔재가 소설 속에 투영되는 경우다. 그런가 하면 「설중행」에서 귀남의 어머니는 일본으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에 그 자녀에게 불행을 끼친 경우가 된다. 해방 다음 다음해에 그녀는 남편과 자식을 떼어 두고 본국으로 돌아가버린다. 귀남에게 이런 비극은 다시 좌우 대립을 거쳐 6.25까지 이어진다. 모친이 떠나간 지 석 달만에 이번에는 부친이 덜컥 죽는다. 부친은 죽 청년단에 관계하고 있었으므로 좌익 계열에 의해 죽은 것이라고 해석된다. 귀남은 다시 고모네에게 맡겨지지만 그 고모네는 6.25 사변 통에 죽고 만다. 일제와 해방과 좌우 대립과 6.25는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동시적인 피해자로 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활적」에서는 전후 사회에 번지는 일본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을 동시에 비판한다. 동주는 그 <미스터 고상>이 질색이었다. <미스터 고상>은 미국 말과 일본 말이 동시에 합쳐진 언어 사용으로서, 그 당시 천박한 외래 문명의 범람을 지적한다.
손창섭 소설의 현장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벼랑 끝이다. 전쟁 직후의 절박한 상황이 그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모두가 벼랑 끝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혈연이 아니면서 혈연보다 더 끈끈하게 얽혀 지낸다. 얽힐 수 없는 관계들끼리 얽히고도 끝내 절연하지 못하고 지내는 모습들이 인간적이다. 피난민 의식의 표상이다. 손창섭은 남의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처럼 소설 속에 끌어들이지 않는다. 철저히 자기를 살다가 소진하면 끝이다. 그 때문에 그의 소설은 피난민 생활로 시작해서 피난민 생활로 끝이었다. 그의 작중 인물들은 대부분 대학생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대학 중퇴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대학생을 연상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 삶을 살게 한 점은 손창섭만의 큰 특징이다. 이 점은 그가 상식 선에서 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한다. 혹은 삶의 본질론에 입각했음을 의미한다. 전쟁을 일으킨 기성 세대에 대하여 직접 전쟁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전후 세대들이 갖는 공통적인 인식은 그들의 삶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게 선택된 삶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전후세대들이 갖는 실존의 문제에 닿아 있다.
손창섭의 전후 사회 인식은 경제적인 궁핍과 사랑의 결핍이다. 그 결핍은 다시 정신적인 결핍과 육체적인 불구로 요약된다. 그의 소설은 전후 사회의 결핍 그 자체에 대한 한 폭의 음화다. 그나마 그것도 인화지에 잘 현상된 사진이 아니라, 아직은 병리적인 관찰과 희화화된 인물로 남겨진 한 폭의 네거티브 필름일 뿐이다.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