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심훈

by 송화은율
반응형

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식민지 지식인의 현실 인식
김흥규

 

 

 

1

한 사람의 올바른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진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많은 연구자들에게 관심의 표적이 되는 작가 또한 이에서 예외는 아니다. 작가들도 때로는 왜곡된 자료나 부분적 사실에 집착한 해석에 의해서 정당한 이해나 평가의 영역에서 버림받는 경우가 있다. 심 훈은 바로 그러한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길지는 않았으나 갖가지 사건과 방황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작품으로 이루어진 그의 생애는 실상 단순한 요약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상록수>라는 소설 한 편으로 그의 모습을 단순하게 보려는 발상과 어긋나게 심훈의 생애와 문학적 실천은 다채롭고도 깊은 바가 있다. 이것을 온당하게 밝혀 내는 일은 아직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심훈의 생애를 대략 더듬어 보고 그의 작품들과 의식에서 발견되는 변모의 양상을 추적함으로써 보다 나은 이해의 가능성을 찾아 보기로 한다.

연보에 의하면, 심훈은 1901년 9월에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본명은 대섭(大燮)이었으며 훈(熏)이라는 이름은 1926년부터 쓴 것이다. 14세인 1915년에 경성 제일 고등 보통 학교에 입학하였고, 3.1운동 상시 동교 4학년 학생으로서 운동에 가담하여 5개월 정도 투옥되었다가 집행 유예로 풀려났다. 이 때 감옥에서 몰래 써서 어머니에게 내보낸 편지를 보면 후일의 심훈으로 하여금 식민지의 어둠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바른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하였던 용기의 바탕이 이미 18세의 소년에게 깃들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어머님!

우리가 천번 만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친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큰 힘을 받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그러길래 나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워하여 하소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듬해인 1920년에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서 여러 곳을 편력한 끝에 1921년 항주에 이르러 지강 대학 극문학부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그가 공부한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왜 그러한 분야에 뜻을 두게 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기의 경험이 삼훈의 생애나 문학에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923년 귀국한 그는 곧 극문회라는 단체의 조직 멤버의 하나가 되었고, 연극.영화제 인물들과 빈번한 교섭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1925년에 영화 <장한몽>의 주인공 이수일을 맡은 배우가 사고를 일으키자 그 대역을 담당한 일도 있다. 1927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영화 제작 현장에서 영화 공부를 하였는가 하면 이 해에 귀국하여 <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원작.각색.감독하여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대체로 보아 1928~9년까지의 심훈은 영화인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리라고 여겨질 만큼 이 방면의 일에 적극적이었고, 당시로 보아서는 괄목할 만한 식견과 능력을 가졌던 듯하다.

같은 기간에 있어서 심훈의 문학 활동은 아직 본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산발적인 자취만을 보여 준다. 1924년에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번안 소설 <미인의 한>의 후반부를 담당하여 썼다는 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소설(번안이기는 하지만)이다. 그러나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발표작은 1926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 소설 <탈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에 몰두하게 된 것은 1930년 무렵부터이다. 일제의 검열 및 게재 정지 처분에 의해 신문 연재가 중단되고 만 두 편의 장편 소설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가 이 해의 작품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전신(轉身)이 일어난 것일까? 무엇 때문에 심훈은 영화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다소 멀어져서 소설 창작 쪽에 더 큰 힘을 기울이려고 하였던 것일까? 짐작해 볼 수 잇는 한 가지 사실은 그의 높은 야심과 의욕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영화계는 그것이 실현되기에는 극히 열악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그의 합당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상업적 성공을 위하여 영화를 만들기보다는 스스로의 시대 이해와 예술적 표준에 충실한 영화를 이루어 보고자 고심하였던 것 같고, 이 점에서 당대의 사정은 극히 불리하였을 것임이 명백하다. 이러한 모순 관계는 손쉽게 해결되기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영화라는 것은 막대한 제작비를 소요하며, 이에 따르는 재정적 기반과 대중적 호응의 터전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게 때문이다. 심훈이 영화에서 한 걸음 물러나 소설에 몰두하게 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보다 용이한 대응의 양식을 찾으려는 기도의 표현이 아닐까 추정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던 것처럼, 두 편의 야심적 소설이 모두 검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중단됨으로써 그는 또 하나의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식민지 시대라는 제약된 상황 속에서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한 해에 두 편의 장편 연재 소설이 계속하여 타격을 받은 예는 드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좌절과 함께, 현실적 생활에서도 심훈은 심한 곤란을 겪었다. 1924년 이후부터 그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성 방송국 등의 직장을 전전하였으며, 수개월간 입원하였는가 하면(1926년), 도일91927년), 재혼(1931년) 등의 크고 작은 사건을 치렀다. 이 과정은 한 생활인으로서의 심훈에게 많은 소모를 요구하며, 서울이라는 식민지 도시에서의 굴욕적이고 어수선한 생활을 더 이상 감당해 보려는 의욕을 잃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빈털터리가 되어 가족을 이끌고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낙향하여 가게 되었다. 번거로이 상황을 설명하느니보다는 그 자신이 쓴 글의 일부를 인용해 두는 편이 이 무렵의 사정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참새도 깃들일 추녀끝이 있는데 가의무일지(可依無一枝)의 생활에도 인제는 고만 너덜머리가 났다. 그래서 일생 일대의 결심을 하고 <직녀성>의 원고료로(빚도 많이 졌지만) 엉터리를 잡아 가지고 풍우를 피할 보금자리를 얽어 논 것이 위에 적은 자칭 '필경사'다.

7원 짜리 셋방 속에서 어린것과 지지고 볶고 그나마 몇 달씩 방세를 못 내서 툭하면 축출 명령을 받아 가며 마음에 없는 직업에 노명을 이어갈 때보다는 맥반총탕일망정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끓여 먹고 저의 생명인 시간을 제 임의로 쓰고 티끌 하나 없는 공기를 마음껏 마시는 자유나마 누리게 되기를 별르고 바란 지 무릇 몇 해였던가.<필경사잡기>

그러나, 그가 낙향 생활을 하나의 도피--식민지 도시의 소란스러운 현장으로부터 이탈하여 한가하게 유유자적할 만한  목가적 전원에로 파묻혀 들어가는 행위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 있어서 낙향이 일종의 탈출구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낙향한 농촌 속에서의 생활도 그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싸워왔던 삶의 연장이요, 나아가서는 보다 철저한 재출발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글의 끝부분에서 심훈은 다음과 같이 그의 결심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나는 이기적인 고독한 생활을 영위하려는 것도 아니요, 또한 중세기적인 농천에 아취가 생겨서 현실을 도피하려고 필경사 속에다가 청춘을 감금시킨 것도 아니다.

다만 수도원의 수녀와 같이 무슨 계획을 꾸미다가 잡혀 가서 한 10년 독방 생활을 하는 셈만 치고 도회의 유혹과 소위 문화 지대를 벗어나 다시금 일개의 문학 청년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비록 일단사호음(一單食瓠飮)의 생활이라도 내 손으로 지탱해 나가면서 형극의 길을 제일보로부터 고쳐 걸으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씌어진 작품이 장편 소설 <영원의 미소>(1933), <직녀성>(1934) 그리고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 모집 당선<상록수>(1935)이다.  발표된 시기와 집필 시기 사이에 약간 차이는 있겠으나, 거의 1년에 한 편씩의 장편 소설을 쓴 셈이다. 그에게 위의 작품들이 만족할만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낙향 생활은 다소나마 성공적인 것이었다 하겠다.

일찍부터 지녀왔던 영화에의 욕구가 여기에서 되살아났다. 야심작 <상록수>를 영화화하려는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매우 유망할 것으로 보였던 이 계획은 일제의 방해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좌절을 마지막으로, 그는 뜻밖의 병을 얻어 1936년 9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좌절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심 훈의 생애에 있어서는 이때 이른 죽음조차도 또 하나의 불행한 중단이었다.

2

길지 않은 활동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심 훈이 남긴 작품은 상당히 많은 양에 달한다. 그 중에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설 작품이 우리의 눈을 끈다. 이 작품들을 통해서 심 훈이 그리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식민지의 제약 속에서 또 그 자신이 지닌 경험과 전망의 바탕 위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깊이 있는 검토는 보다 충분한 논의를 전제로 한 별도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우선 대략의 가설적 관찰을 바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 보기로 한다.

우선 거칠게 요약해서 말한다면, 심 훈의 소설들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식민지 시대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좌익적 색채를 띤 '운동'의 모습이 주축을 이룬 <동방의 애인> <불사조>에서나 농촌의 양상이 전면적으로 취급된 <영원의 미소> <상록수>에서나 이 점은 대체로 같다. 다른 것은 소재와 그것을 인식하고 처리하는 방법이라 하겠는데, 이 차이는 물론 중시하여야 할 것이지만 위의 작품들을 한데 묶어 보는 데에 장애가 되는 요인은 아니다.

식민지 현실을 이처럼 지속적으로 탐구하려는 태도는 그의 초년의 경험에서부터 어는 정도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고, 중국을 방랑하며 민족의 현실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으며, 귀국하여서는 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당대의 갖가지 모순과 문제를 목격하는 등의 경험에서 그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해 보겠다는 의욕이 싹튼 것은 오히려 당연 이상의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심 훈을 일단 같은 시대의 양심적인 작가·지식인들과 동렬에 놓고 생각할 수 있다.

<동방의 애인>은 국외로부터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는 젊은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심훈은 자신이 직접 겪은 중국에서의 방랑 생활 체험을 토대로 해서 일정한 역사적 사태의 추이를 그려보려고 하였다. 홍 이섭 교수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중국에서 전개된 민족 운동이 1919년 이후 공산주의와 접촉하는 조기적(早期的) 실상을 상해 등지에서 보고 들은 대로 작품 속에 펴 보이려는'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피식민지적 생활 조건을 인식하고, 피식민지인의 옳은 진로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30년대 초의 농촌과 심 훈 문학>, 홍이섭 《창작과 비평》25) 이러한 목표를 포기함이 없이 신문의 지면에 표현하기 위해 심 훈은 매우 고심하였던 흔적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고심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핵심적인 부분이 나타날 만한 때에 이르러 연재를 중단케 했다.

<불사조>는 다시 국내를 배경으로 하여 비슷한 문제를 다루려 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에도 난관은 동일하였다. 목적한 바를 달성하기 위하여는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적 인물들의 의식과 행동을 그려야 할 터이나, 그럴 경우에는 이미 경험한 바 강제 중단의 폭력이 명백한 사실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로 인해 고심하였고 작품조차도 혼선을 면치 못하였으나, 결국에는 중단 당하고 말았다.

중단·압수 등의 규제 조치를 받지 않으면서, 식민지 현실의 인식·형상화라는 목표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작품이 <상록수>이다.  여기에는 물론 그럴 만한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가 실시한 이른바 농촌 진흥책이다. 1920년대까지의 약탈 정책에 의해 피폐해진 조선 농촌의 참상을 그럴듯한 방법으로 위장하고 그 책임을 농민들의 무지와 나태라는 허구적 요인에 전가하면서 보다 강화된 착취의 기반을 조성하자는 것이 이 정책의 진의(眞意)였다.  그러나, 배후의 의도는 어쨌든 일제는 농촌 진흥이라는 표어를 내건 이상 농촌 문제에 관해 얼마간의 관심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고, <상록수>와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규제의 손을 대지 못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를 영화화하려는 시도를 방해한 것으로 보아 일제가 이 작품의 영화화가 가져오게 될 대중적 반향을 위험시한 것은 분명하다.)      

또 하나의 요인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30년대 초에 성행했던 브나로드 운동이다. 이 운동은 물론 총독부가 내걸었던 농촌 진흥의 구호와도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양상의 브나로드 운동은 일제의 의도와 관계없이 제 기능을 수행하였고 또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1935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이를 금지하려는 획책을 뚜렷하게 하였는데, <상록수>는 이러한 움직임이 강화되기 이전의 분위기 속에서 그 발표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심 훈은 <상록수>에서 실제 인물인 조카 심재영과 최용신을 모델로 하여 당시의 농촌과 그 속에 잠재한 여러 문제들을 포착하고 그려내었다. 심 훈이 이광수의 <흙>보다 구체성과 깊이에서 보다 우수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실과도 관계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상록수>가 보인 성과와 함께 우리는 그 한계도 따져 보아야 할 것이고, 이를 심 훈의 다른 작품과 관련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도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심 훈은 또한 상당량의 시를 남겼다. 1932년에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사실이 있음을 보더라도 그는 시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 그는 시인으로서 스스로를 세워 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잘 다듬어진 시를 만들어 내겠다는 집착도 없었다.

생애를 개관하면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문학적 성과에서도 심 훈은 완벽한 자기 실현의 열매를 거두지 못한 작가였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아마도 식민지 시대의 제약과 이를 회피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던 그의 시도 사이의 갈등에서 구해져야 할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