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 / 본문 일부 및 해설 / 송건호
by 송화은율
선비정신 / 송건호
<전략>
경계할 복고풍(復古風)
그 자체 내에 이 같은 취약점이 있는데다 일제의 적극적인 회유정책(懷柔政策)을 빼놓을 수 없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합 당했을 때 그들은 특히 유림(儒林)의 포섭에 주력했다.
즉, 합방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한 정부 요인들에게는 작위(爵位)를 주어 '은사공채(恩賜公債)'를 발행, 막대한 액수인 이자로 편안한 여생을 보장해 주었고, 이밖에 정부 관리를 지낸 자 3천 559명, 양반과 유생 9천 811명에게 각각 후한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뿌렸다.
구한국 정부의 관리란 으레 양반 유생 출신이며, 과거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도 말하자면 유생이므로 일제(日帝)로서는 당시만 해도 유생들이 큰 위협적 존재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특히 유생의 회유(懷柔)에 주력한 것이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유생은 일제에 포섭되고 나머지 수절한 유생들은 사회적으로 영락하고 게다가 항일 운동에서조차 소외되어 이조 5백 년간에 걸친 자랑스러운 선비의 전통은 이렇게 허무하게도 붕괴되고 말았다.
초야에 묻혀 살던 무명의 선비 황현(黃玹)이 스스로 자결의 길을 택한 것도, 5백 년간에 걸친 선비의 전통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무너지고 나라는 망했는데, 명색 선비란 사람들이 너나 없이 일신의 안락을 위해 일제의 은사금을 타먹기에 급급하는 것을 보다 못해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황현(黃玹)과 전후해 자결한 20여 명을 마지막으로 이조의 선비 정신은 사실상 전통이 끊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대두된 것은 이미 사라진 이 같은 선비 정신을 그리워하는 심리라고 보겠는데, 이는 그만큼 오늘의 세대가 혼탁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선비 예찬은 오늘의 시대에 긍정적 구실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비 예찬이 복고풍(復古風)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다. 선비란 중세 신분 사회의 양반층의 이상상이므로 선비 정신은 반민중적이 되기 쉽고 현실 의식의 결여, 생활 능력의 부정 등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초연한 생활인을 그렇게 부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선비를 이렇게 보고, 이런 뜻에서 선비 대망을 한다면 현대 사회에 있어 선비는 긍정적 구실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현대가 요구하는 선비는 대중을 무시하는 고고형(孤高型)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같이 호흡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선비는 공리공론(公理空論)을 일삼는 관념형 인간이 아니라, 현실 의식에 투철하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매목되지 않고 현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향하려는 이념형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 사회가 기사 정신을, 일본이 무사도를 근대 속에서 새롭게 그 정신을 계승했듯이, 우리도 선비 정신을 오늘의 시민 사회 속에서 새롭게 되살리는 자각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작가 : 송건호
형식 : 수필
성격 : 경세적, 교훈적
주제 : 참된 선비의 현대적 의미
상궤(常軌) : 떳떳하고 바른 길.
비난의 적(的) : 비난의 주된 대상이나 목표.
공리공론(公理空論) : 현실적인 근거나 실천이 따르지 않는 헛된 생각이나 이론.
초야(草野) : 시골의 궁벽한 땅. 벼슬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함.
안빈도락(安貧道樂) : 가난을 탓하지 않고 인간(선비)의 도리를 지킴.
족적 : 발자취. 흔적.
숭절 : 절개를 높이 따름.
은사금(恩賜金) : 임금이 은혜로써 내린 돈.
영락 : 떨어져 나감.
복고풍(復古風) : 옛것을 좋아하고 따르려는 풍조.
고고형(孤高型) : 혼자 세속에 초연하여 고상한 모양.
공리-공론(空理空論) : 실천이 따르지 아니하는, 헛된 이론이나 논의.
자각 : 자기가 품은 지식 내용의 진실성이나 자기가 진실한 것으로 생각한 언행에 대하여 그것이 참으로 진리성과 성실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자기를 반성함. 또는 그런 일.
현대 시대의 진정한 선비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상에서 도피하는 고고한 선비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모순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참여적 지식인이 진정한 선비임을 말하고 있는 글이다. 필자는 "선비는 대중을 무시하는 고고형(孤高型)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같이 호흡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선비는 공리공론(公理空論)을 일삼는 관념형 인간이 아니라, 현실 의식에 투철하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매목되지 않고 현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향하려는 이념형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송건호
1926년(호적상으로는 1927년) 군북면 비야리에서 출생한 송 선생은 지난 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시 후배 기자들이 해임되자 이에 항의하며 과감히 편집국장을 사임했다. 실직과 정부의 계속되는 감시 속에서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등 3개 단체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하 민언협, 현재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으로 명칭을 변경해 민주언론운동 주도)의 초대의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의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송건호 선생은 지난 80년 `5·17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포고령 위반혐의로 군사재판을 받고 3년6월의 형을 선고받았으며 육군형무소에서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특히 민언협 2, 3대 의장 당시인 지난 1985년 기관지인 `말'지를 창간하고 민주언론운동을 활성화. 1987년 세계 언론사에 유례가 없는 국민주를 표방한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하고 창간 사장·발행인 겸 대표이사로, 독립성을 갖춘 `국민의 언론'을 표방하며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바탕으로 새로운 언론문화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80년 당시 군사정권이 자행한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90년부터 전신마비 증상을 보이는 "파킨슨 증후군" 병으로 투병 중이며 97년부터는 폐렴까지 겹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가 2001년 12월 20일 사망. 송건호 선생은 언론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언론 관련 각종 칼럼과 미개척 분야인 현대사 연구 및 저술활동으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출처 : http://www.hani.co.kr/section-009010000/2001/12/009010000200112211926001.html
청암 선생을 회상하며/ 성유보
삶을 통해 '언론' 가르친 내 인생의 큰 스승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스승'이셨던 송건호 선생님이 끝내 우리 곁을 영영 떠나시다니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이 비통한 마음에 과묵하셨던 선생님이 언젠가 나에게 털어 놓으셨던 비화 한 토막이 떠오른다. 부디 선생님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선생님께서는 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5·17 군사쿠데타 때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영어의 몸이 되셨다. 이때 전두환 정권은 당시의 거의 모든 민주화 운동을 현 김대중 대통령이 주도한 내란 모의 사건으로 조작하고자 했다. 그 각본에 따르면 김대중씨와 언론계와도 모종의 커넥션이 있어야 했다. 그들은 그 연결고리로 동아투위를 설정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동아투위는 1980년 5월 16일에 서울 수유리 수도원에서 세미나를 하고 있다가 새벽 1시에 쿠데타가 일어난 걸 알고 몸을 숨겨 버렸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송건호 선생님을 김대중씨와 동아투위를 다리 놓은 인사로 만들려고 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은 선생님이 김대중씨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으며, 이 돈을 동아투위에 전달했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송건호 선생님을 접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선생님은 거짓말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분이셨다. 이런 분에게 터무니없는 자백이 강요되었으니 어떠했겠는가? 선생님은 “이 때문에 참 많이 맞았다”고 짤막하게 말씀하셨다. 차마 “고문당했다”고 표현하시지 않으셨지만, 나는 무지막지한 고문이 있었을 것으로 직감했다. 선생님께서 “끝내는 돈을 받았다고 허위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으니까.
그 다음 고백은 더욱 송건호 선생님다우시다. “안 받은 돈을 받았다고 했으니, 도대체 얼마를 받았다고 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할 수 없어서 수사관에게 `얼마를 받았다고 (자술서에)쓸까요?'라고 했더니, 그 수사관이 `야, 이 ××야, 돈 받은 ×이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하면서 또 때리더라”는 것이다.
옛말에 혼돈의 시대에는 `크게 어진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자 같아 보인다(大賢若愚)'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송 선생님께 어울리는 말은 없어 보인다.
송건호 선생님은 참으로 한 평생을 한결같이 크게 어질고 크게 의롭게 살려고 하신 분이다. 1975년 동아일보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들이었던 우리 동아투위 위원들이 동아일보사에서 강제로 쫓겨났을 때, 선생님께서는 “언론자유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쫓겨나는 회사에 더 이상 머물 수는 없다”면서 편집국장직을 미련없이 던져 버렸고 그 이후 선생님은 우리 해직 언론인들의 정신적 대부가 됐다.
술·담배도 못하고 `촌지 봉투'나 `공짜 술 대접받기'도 몰랐던 고지식하고 가정적인 선생님이셨지만, 민주주의를 위해서나 정도의 언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안위도,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도 대의를 위해 접을 수 있는 분이었다. 1984년 12월 통아투위, 조선투위, 80년해직기자협의회와 젊은 출판인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의 전신)'를 결성했을 때 송 선생님은 의장직을 기꺼이 수락하셨다.
이 `언협'이 1985년 6월 <말>(현 월간 <말>)이란 불법(?)잡지를 출판하자 전두환 정권은 편집인 명의로 기록되어 있는 나를 잡아가서 29일 구류 처분을 내렸다. 유치장으로 면회오신 선생님께서는 “왜 발행인인 나는 놔두고 편집인만 잡아가느냐”고 호통치셨던 기억이 난다.
오늘날 한국의 언론인들이 송건호 선생님이 사셨던 `언론인의 혼'을 반에 반만 지키고자 한다고 해도 한국언론은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목탁'으로 자리잡고도 남을 것이다.
송건호 선생님!
이제 저희를 넘어 더 젊은 새로운 세대들이 이 땅의 참 언론과 참 언론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새로운 지평이 열릴 희망이 보입니다. 속세에서의 모든 한과 고뇌, 저희들에게 물려주시고 고이 영면하소서!
성유보/동아투위 위원장·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 선언문
우리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새로이 열어야 할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을 유린해온 오랜 독재체제를 청산하고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되어 있는 비민주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여 국민이 주인되는 진정한 민주화를 실현시키고, 분단을 극복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여 생활의 향상을 이룩하는 한편,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 이 병든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바꾸어 놓아야 할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 속에서 참다운 민족문화를 꽃피게 하는 한편 비뚤어진 교육을 바로잡아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발휘케할 수 있는 교육을 실현시키는 것 역시 우리가 성취해야 할 주요과제입니다.
이러한 우리사회와 민족의 광범위한 과제는 국민 모두의 힘과 뜻과 지혜를 남김없이 발휘케하고 동원해 냄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의 가장 강력한 수단의 하나가 누구나 자기의 현실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민족적 언론임을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일입니다.
우리가 한세기에 가까운 언론의 역사를 두고서도 이제 새 신문을 창간하고자 하는 것은 이같은 민족적 역사적 과제가 참된 새로운 언론을 어느 때보다도 시급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범위한 과제는 국민 모두의 힘과 뜻과 지혜를 남김없이 발휘케하고 동원해 냄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의 가장 강력한 수단의 하나가 누구나 자기의 현실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민족적 언론임을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일입니다.
우리가 한세기에 가까운 언론의 역사를 두고서도 이제 새 신문을 창간하고자 하는 것은 이같은 민족적 역사적 과제가 참된 새로운 언론을 어느 때보다도 시급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1896년 이 땅에 '독립신문'이 창간된 지 근 백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동안 우리의 언론은 외세 아니면 독재권력의 억압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왔고, 진정 민족을 위한 자주적 언론을 갖지 못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주 민족언론의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새 신문의 창간을 결심하게 된 것은 이 땅에 언론매체가 부족한 때문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백만의 부수를 주장하는 여러 신문, 97%의 보급률을 자랑하는 텔레비전을 포함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방송망과 수십만 부를 넘는다는 월간지와 주간지 등 수많은 언론매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굳이 새 신문을 창간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목소리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는 바르고 용기있는 언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제 통치 밑에서 이땅의 언론은 외세의 억압으로 민족언론으로서의 구실을 못하다가 8.15해방을 맞았으나, 민족의 분단상황 속에서 온갖 탄압과 간섭 때문에 제 구실을 못해왔습니다.
특히, 5.16 군사쿠테타 이후 20여년 동안 이 땅의 언론은 이른바 근대화 바람 속에서 사실과 진실을 은폐, 왜곡하고 상업주의적인 보도에 급급함으로써 독재권력의 지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에 항거한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1975년과 1980년 언론현장에서 무더기로 추방당하고 투옥되는 시련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 땅의 언론은 국민으로부터 '제도언론'이라는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80년대 언론은 언론기본법이라는 법적 구제도 부족해, '보도지침'을 통한 권력의 일상적인 제작 지시로 거의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개탄할 일은 오늘의 언론은 이러한 통제 속에서도 이미 지난 날 보여준 바와 같이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용기있는 저항정신을 보여주질 못하고 오히려 유유낙낙 권력측의 부단한 간섭과 규제에 순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언론현실은 탄압의 결과라기 보다는 많은 경우 자진 협조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언론다운 언론의 부재는 오늘의 언론인들의 도덕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권력의 정책적 의도하에 언론기업이 구조적으로 예속당해 이미 자주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한 둘 양심있는 언론인이 남아있다 해서 언론이 제 기능을 되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과 같은 통제와 억압의 틀 속에서 언론이 저항다운 저항을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제도언론은 그 기업구조로 보아 비록 이 땅에 민주화의 꽃이 핀다해도 정치적 경제적 자주성을 견지하지 못한 채 필경은 권력의 입장에서 국민에게 진실을 전달하지 못하고 그들을 오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 언론의 창간을 통해 지금의 제도언론이 갖는 이같은 구조적 결함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위한 첫째 요건은 기존의 언론처럼 몇사람의 사유물이 되거나 권력에 예속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책정한 창간기금 50억원을 나라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의 참여로써 이룩하여 문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되는 신문을 만들고자 합니다.
새 신문은 나라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민족적 고통에 동참하는 가운데 책임있는 편집을 다 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근거로 해서 새 신문은 국민에 바탕을 둔 언론으로 성장할 것이며 따라서 민주적 가치와 사회정의를 지향하면서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온갖 사실들을 언제나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숨김없이 공정하게 보도할 것입니다.
오늘의 제도언론이 보여주듯이 사소한 일은 크게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정작 크고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들은 은폐하거나 왜곡 보도하여 국민들을 오도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노동자, 농민, 여성 등 기존언론이 소홀히 다루는 부분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보도할 것입니다.
신문이 걸어야할 정도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권력이 요구해 올지도 모를 부당한 간섭을 거부하고 '국민의 신문이며 신문인의 신문'이라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공정하고 신중하고 그러나 용기있게 진실을 보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겨레신문이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정도를 걷는 참된 신문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어떠한 장애도 극복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신문을 키워갈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굳은 결의는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로써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오늘의 이 발기 선언대회가 역사적으로 길이 남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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