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운치(韻致)/ 본문 일부 및 해설 / 신석정
by 송화은율
생활의 운치(韻致)/신석정
<전략>
그렇다. 인간이 의욕하는 것은 가장 자유로운 속에서 아무 구애없이 스스로의 개성을 십이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그러나 오늘이란 현실을 굽어볼 때 무참히 짓밟히고 무참히 짓밟는 것을 목도하게 되니 가슴 아플 수밖에 .
한 국가가 한 국가를 짓밟는가 하면, 개인이 개인을 짓밟고 있지 않은가? 국가나 개인을 막론하고 짓밟는다는 것은 비극임에 틀림없다. 아무래도 민주주의의 참다운 모습은 밟히지도 밟지도 않는 데서 제 1 과 제 2장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운치 있는 내일의 생활을 위한 그 기본 문제의 해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는 날, 시인은 비로소 맑은 목청을 다듬을 것이요, 천공을 비상하는 단정학(丹頂鶴)을 선망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꿈과 현실은 그 거리가 너무 아득하기에 시인과 더불어 우리는 한숨을 내쉬어야 하고, 때로는 가슴을 쥐어뜯어야 한다.
일찍이 도연명(陶淵明)은 술로 그의 울분과 빈궁을 달래던 나머지 "天秋萬歲後 誰知榮與辱 但恨在世傳 飮酒不得足"(천만년이나 지나간 뒤, 뉘 있어 영예로움과 욕됨을 알리오? 다만 한 되는 것은 내 세상에 있었을 때, 마음껏 술을 마시지 못한 것이로다). 이런 데카당적 자만(自輓)을 써 놓았음을 볼 때, 새삼 가슴에 파고드는 측은한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기에 동쪽 울밑에 피어 있는 국화꽃을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보았으리라. 그 또한 꿈에서 살고 꿈을 먹다가 꿈같이 떠나간 시인이다. 아아 위대한 무상일진저!
각설, 이미 울밑에 개나리가 만개했고 뒤이어 수선이 터지더니, 용담, 도라지, 더덕, 백합이 지각(地殼)을 뚫고 일어서느라고 수런대고, 백목련이 화피를 벗는가 하면, 후박도 움을 싸고 있던 그 투박한 껍질을 훌훌 벗어던지고, 목단도 고물고물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더니, 식나무도 묵은 잎새를 한두 잎 떨구고 잇다.
고대하던 라일락 홍매가 첫 꽃을 선보이고, 장미들도 다투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렇게 봄은 수다를 떨고 있건만 태연스럽게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춘산목(春山木), 호랑가시, 동백, 낙우송 그리고 은행나무, 석류도 봄을 외면한 듯 영 말이 없다. 글쎄! 파초도 무장을 해제시켜야겠는데 아직도 아침 저녁은 쌀쌀하니 걱정이다.
라디오에서 떠들어대는 약 광고 유행가에는 기가 질렸으니, 말할 것도 없고 시시한 친구들의 김빠진 이야기에 지칠 때에는 으레 나는 좁은 내 정원의 어린 식물 가족을 보살피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물론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인간이요, 더 아름다운 넋은 그 아름다운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에서 사없이 나오는 웃음이지만, 어디 요즘에는 그런 인간을 대하고 그런 인간의 웃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고 보니, 차라리 정원의 어린 식물 가족들의 죄없는 얼굴들을 들여다보고, 그 침묵 속에서 갸륵한 마음을 굽어본다는 것은 다시 없는 나의 열락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속운(俗韻)을 동반하는 희로애락을 초월할 무념 무상의 경지라고 해도 좋다.
올 봄에는 시누대와 곁들여 오죽(烏竹)을 심어 바람과 햇볕에 머물다 가게 하고, 남쪽 울밑에는 이팝나무를 심어 5월에는 백설 같은 꽃을 피게 하리라.
이 나무들이 풍기는 그 싱싱하고도 향긋한 내음 속에서 나는 그저 천천히 그리고 되도록 청수하게 늙어가리라. 내 만일 오류(五柳) 선생을 본받아 자만(自輓)을 쓸 양이면 재세전(在世傳)의 부족한 음주를 탓하기 전에 한 그루 나무나 한 포기 풀로 화신(化身)할 것을 초(草)하리라.
가로되,
내 그림자를 거두는 날엔
한 그루 춘산목(春山木)으로 서서
저 수려한 거악(巨嶽)을 마주 보리라.
그도 아니면
천 년을 넘어도 오히려 솟구치는
의젓한 은행나무로 하고 서서
못 다한 한을 풀어 보리라.
그도 아니면
아아 그도 아니면
한 포기 노루귀의 빨간 꽃잎술로
춘분(春分)에 앞서 봄을 핥으리라.
이 서투른 자만(自輓)이 어느 가을날 황혼의 바람에 펄펄 날릴 때에도, 저 오리나무 숲 너머 고덕산은 지금 보이는 저 모습으로 푸르게만 서 있을 것이다.
작자 : 신석정
형식 : 수필
성격 : 사변적, 감상적
주제 : 운치있는 삶을 위해서 해결되어야 할 것들.
도연명(陶淵明) : 중국 진나라 때 시인, 이름은 잠(潛)
오두미(五斗米) : 다섯 말의 쌀
평담 한아(平淡閑雅) : 평온 담담하고 한가한 가운데 아취를 즐김.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 동쪽 울 밑에 핀 국화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
오류(五柳) 선생 : 도연명.
곤곤(滾滾) : 강물이 넘실넘실 힘차게 흐르는 모양.
자만(自輓) : 죽음에 임해서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애도해서 쓰는 글.
지각(地殼) : 지구의 표면.
운치 있는 생활을 위해 해결되어야 할 것들을 말하고, 그것들이 해결되는 날에 시인은 비로소 맑은 목청을 다듬을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글이다.
신석정(辛夕汀)
1907∼1974. 시인.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釋靜·石汀) 외에 석지영(石志永)·호성(胡星)·소적(蘇笛)을 쓰기도 하였다. 전라북도 부안 출신. 아버지는 기온(基溫)이다.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 뒤 1930년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中央佛敎專門講院) 박한영(朴漢永) 문하에 1년 남짓 불전을 연구하며 회람지 ≪원선 圓線≫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6·25사변 이후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내다가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55년부터는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61년에 김제고등학교, 1963년부터 1972년 정년퇴직 때까지는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67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24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년 ≪시문학≫지에 시〈선물〉을 발표하여 그 잡지의 동인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로부터 〈임께서 부르시면〉·〈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 초기 대표작들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들을 모아 1939년에 첫시집 ≪촛불≫에 이어 1947년에는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를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나의 文學的自敍傳 蘭草잎에 어둠이 내리면(辛夕汀, 知識産業社, 1974), 現代韓國詩人硏究(金海星, 大學文化社, 1985), 辛夕汀詩作品年譜(崔勝範, 心象 2∼9, 1974), 辛夕汀硏究(許素羅, 韓國言語文學 14, 1976), 辛夕汀硏究(許衡錫, 慶熙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88).
신석정고택(辛錫正古宅)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있는 시인 신석정의 옛집.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 신석정(夕汀, 본명 錫正)이 시인으로서 꿈과 청춘을 키우며 첫시집 《촛불》과 제 2시집《슬픈목가》를 탄생시킨 곳이다.
석정이 이 집을 마련한 것은 1935년이다.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향리에서 문학의 꿈을 키우며 지내던 그는 1930년 상경하여 불교 전문 강원에서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스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시문학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시작(詩作)활동을 하였으나 어머님의 부음을 받고 귀향하였다. 그 후 이 집을 마련하여 분가하였으며 스스로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지었다.
청구원은 이름대로 앞뜰에는 큰 은행나무를 위시하여 온갖 나무들이 큰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집 서편에는 우거진 시누대밭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울안이 모두 채소밭으로 변하여 단 하나의 나무도 남아있지 않다.
집도 본래 초가였으나 기와로 개옥하였고 지붕끝에는 함석으로 처마를 덧달아 내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반 규모의 조촐한 농가이다. 평면은 부엌에 이어 안방과 윗방 건넌방이 연이어 있고 방앞에 마루가 놓여진 一자집이다. 1952년 전주시 노송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그는 이 집에 살았다. ≪참고문헌≫ 辛夕汀의 文學과 人生(扶安文化院, 199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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