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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西遊見聞) / 본문 및 해설 / 유길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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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西遊見聞) / 유길준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한 겨레의 국민들이 일정한 토지를 차지하여 살면서 언어, 법률, 정치, 습속과 역사를 같이 하며, 또 같은 임금과 정부를 섬김으로써 이해 관계와 세상을 잘 다스림과 세상이 어지러움을 함께 하는 공동체이다. 토지가 넓은지 좁은지, 그리고 국민이 많은지 적은지에 따라서 산천을 차지하면서 작은 나라나 큰 나라나 별이나 바둑알처럼 흩어져 있다. - 국가의 개념과 성립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되는 원리에 따라서 생각해 보면 피차의 구별이 없지만 나라가 나라되는 큰 도리로 따져 보면 저 나라와 우리 나라의 구별이 있다. 그러니 나라는 사람들의 회합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나라가 세워짐에 따라서 터전을 이룩하는 것이다. 나라가 비록 사람을 따라서 그 이름을 얻는다고 하지만, 사람도 나라가 없으면 터전을 얻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름도 없게 될 것이다. 이제 그 이치를 밝히기 위해 비유를 들어 보자. 사람이 비록 가족의 성씨와 항렬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는 자기 한 몸의 사사로운 이름에 지나지 않고 어디서나 두루 통하는 공적인 이름은 아니다. 가령, 우리 조선 사람으로 말한다면 '조선인'이라는 세 글자가 가장 중대하고 공적인 것이다.
- 국가와 국민의 관계

 

 그러므로 우리 조선 사람이 된 자들은 그 이름이 아무개든지, 또 그 자신의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이처럼 중대한 조선인이라고 불리는 공적인 이름을 다같이 지니고, 강약의 구분이 없게 된다. 그 목숨은 빼앗을 수 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름은 빼앗을 수 없고, 그 생업은 못 하게 할 수 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 '조선인'이라는 공명의 중요성

 

 외국인을 대할 때에는 행실을 단정히 하고 몸가짐을 의젓하게 하여 조선인이라는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만약, 조그만 수치를 남기거나 모욕을 당하여 조선인이라는 이름을 훼손시키면, 그 한 사람의 부끄러움에 그치지 않고 온 나라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 조선인의 도리

 

(하략)


 작자 : 유길준
 형식 : 중수필, 기행 수필(해외 견문록)
 문체 : 국한문 혼용체, 한주국종체, 강건체
 성격 : 계몽적, 설명적, 논리적
 특징 : 기행문 형식을 통해 국민 의식의 각성을 위한 계몽적 내용을 서술하고, 단순 견문기가 아닌 서적을 상세히 살피고 검토하여 증거로 삼은 이론 서적의 성격이 짙음.
 제재 : 국가, 국민
 주제 : 국가에 대한 국민적 책임 - 조선인이라는 공적인 이름의 직책을 지키자.
 출전 : 서유견문
 의의 :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해외 견문록이고, 언문 일치의 새로운 문체 형성에 기여하였고, 갑오개혁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고 근대화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구성 : 기 - 서 - 결의 3단 구성
기 : 국가와 국민의 관계
서 : 국민의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
결 : 조선의 명예를 지키자는 결의


 부 : 무릇
 거유 : 점거하여 자기 것으로 만듦
 복사 : 좇아서 섬김
 치란 : 혼란에 빠진 세상을 잘 다스림
 인의 인되 - 피차의 구별이 무�(하)나 : 만민평등 사상
 공수 : 함께 받음. 함께 당함
 할거 : 토지 등을 분할하여 점거함
 기 : 바둑
 사구�(하)면 : 생각하면
 추구 : 이치를 미루어 생각하여 끝까지 규명해 냄.
 거아 : 저와 나.
 우 동일�(한) 제왕과 - 공수 (하는) 자니 : 또 같은 임금과 정부를 섬겨 이해와 세상을 잘 다스림을 함께하는 것이니
 국은 인의 회합흠을 - 성흠이라 : 나라는 백성들이 모인 것을 인연으로 그 이름이 성립되고, 백성은 나라가 건설된 것에 의존하여 그 바탕이 이루어진다.
 석명 : 분석하여 밝힘.
 논병 : 논의의 거리
 자용 : 마음대로 씀.
 보동 : 누구나 다 같이
 가탈 : 빼앗을 수 있음
 난탈 : 빼앗기 어려움
 가훼 : 훼손할 수 있음
 난훼 : 훼손키 어려움
 휴손 : 이지러지고 상하게 함.
 욕수 : 지키고자 함.
 수욕 : 수치와 욕됨
 이 : 끼침
 시이로 아배의 조선인 - 차명은 난탈이요 : 조선인이라는 공적 칭호의 절대성을 말한 것, 즉, 생명은 빼앗을 수 있어도 조선인이라는 칭호는 빼앗기 어렵다.
 만모 : 교만한 태도로 남을 업신 여김.
 역개여차 ; 역시 모두 이와 같음
 영길이인 : 영국인
 시기 : 여기에 기록함
 대개 차도가 아 - 하국인이든지 역개여차 : 대체로 이 도가 우리 조선인만이 홀로 그러한 것이 아니요, 천하의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또한 이와 같아.

 


 이 글은 우리 나라가 외국에 문호(門戶)를 개방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개화기에 쓰여진 수필이다. 이 시기는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열강들이 조선을 침탈하려던 시기였다. 이러한 격동과 위기의 상황에서 진정한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이 글은 보여 주고 있다.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면서, 유길준은 전권 대신들을 수행하여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이곳 저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유럽 각국을 거쳐 귀국하게 된다. '서유견문'은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유길준은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서유견문'에서 애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한편, 개화 의식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국가의 운명이 위기에 처해 가는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관과 국민관을 제시한 이 글은, 서구의 문물을 접하면서 새롭게 눈을 뜬 개화기 지식인의 생각과 고민이 잘 나타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유견문'은 유럽을 여행하면서 느낀 바를 섬세하고 진솔하게 드러낸 수필로서, 문학사적으로는 최초로 국한문 혼용체(國漢文混用體)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글은 국한문 혼용체가 개화기 이후 주도적인 문체로 자리잡는 데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서유견문(西遊見聞)  

 조선 말의 선각자 유길준 ( 兪吉濬 )이 1889년 탈고, 1895년 출판한 근대국정개혁서. 국한문혼용체로 556면. 갑오경장 기간 중인 1895년 일본의 교순사(交詢社)에서 간행. 현재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에서 펴낸 ≪ 유길준전서 ≫ (일조각, 1971)전5권 중 제1권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단순한 서구기행문이 아니라, 서구의 ‘ 근대 ’ 모습을 보고 우리의 근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를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각 부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 근대화 방략서 ’ 이라고 할 수 있다.

 

1888년 박영효가 지은 〈 조선국 내정에 관한 건백서 〉 ( ≪ 일본외교문서 ≫ 21권, 292 ∼ 311면)에서 국정개혁 구상을 밝히고 있지만 그 분량과 내용의 심도에서 ≪ 서유견문 ≫ 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 서유견문 ≫ 은 한국 최초의 체계적인 근대화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1882년 여름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으로 일본에 체류하던 중 구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이 30년만에 부강을 이룬 원인이 서구의 제도와 법규를 모방한 것이 십중팔구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에 서구의 진상을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조선정부가 구미제국과 조약을 맺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미 각국 등 바깥 세상에 대한 견식을 넓힐 목적으로 책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그의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지은 ≪ 서양사정 ≫ 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본국민의 개화 계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책을 써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 발발을 계기로 서둘러 귀국,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실제 집필은 미국 유학 후 연금 기간 중인 1887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1883년 7월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 ( 報聘使 )의 정사 민영익 ( 閔泳翊 )의 수행원으로 동행해 미국에 유학한 유길준은 1884년 갑신정변의 소식을 듣고 원래 계획했던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1885년 6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포도청에 감금되고 두 달만에 우포대장 한규설(韓奎卨)의 집에 유폐된다.

 

이는 갑신정변 후 청국이 적극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개화파를 탄압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의 재능을 아낀 고종과 한규설 등이 그를 보호 활용하기 위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1887년 가을, 민영익의 배려로 그의 별장인 취운정(지금의 가회동에 위치)으로 옮긴 유길준은 심적인 안정을 찾고 시간적 여유를 얻게되자 원고를 재정리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틈틈이 써 둔 원고 외에 각종 외국서적을 번역해 인용 또는 참고하였다. 특히 ≪ 서양사정 ≫ 과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거나 비슷한 점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이를 가장 많이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포셋(Henry Fawcett)의 ≪ 부국책 ≫ 과 휘튼(Henry Wheaton)의 ≪ 만국공법 ≫ 등도 인용한 흔적이 보인다.

 

≪ 서유견문 ≫ 의 원고는 1889년 늦봄에 완성되었으나 여전히 연금 상태라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1894년 갑오경장 기간 중 일본에 보빙사의 일원으로 가면서 원고를 가져가 후쿠자와가 설립한 교순사에서 발간하였다(1895년 4월25일).

 

그는 1000부의 책을 찍어 판매하지 않고 정부고관을 비롯한 당시의 유력자들에게 기증함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던 갑오개혁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홍보하는데 주력하였다.

 

전 20편으로 이루어진 ≪ 서유견문 ≫ 은 크게 서론, 본론, 결론, 그리고 보론의 네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서론은 제1 ∼ 2편으로 세계의 지리를 기술하고 있다.

 

세계의 산 · 강 · 바다의 높이나 깊이 등을 포함해 지나치게 상세하리만큼 세계의 지리를 다루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 세계는 넓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 라는 웅변으로 읽혀진다. 개화 또는 근대화의 출발은 전통의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본론은 제3편 〈 방국의 권리 〉 부터 14편 〈 상고의 대도 〉 까지 이다. 여기에서는 국제관계 · 정치체제 · 인민의 권리 · 법률 · 교육 · 상업 · 조세 · 화폐 · 군대 · 종교 · 학술 등 각 분야의 근대적 개혁의 내용을 상술하고 있다.

 

결론은 제14편 뒷부분 〈 개화의 등급 〉 이다. 여기에서는 개화의 개념과 그 방법론을 논하고 있다. 이 글은 당초에는 없었는데, 출판 직전, 갑오경장을 주도하는 시점에서 개혁의 구체적인 방법과 의지를 담아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제15편부터 제20편까지는 보론으로, 서양의 풍물을 소개하는 기행문이다. 혼례 · 장례 · 의복과 음식 · 오락 · 병원 · 교도소 · 박람회 · 증기차 등과 서양 대도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은 거의 전부 후쿠자와의 ≪ 서양사정 ≫ 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 서유견문 ≫ 에 나타난 유길준의 ‘ 근대화론 ’ 의 특징은 전통의 장점을 살리고 전통의 단점을 서구의 장점의 도입으로 보완하는 ‘ 취장보단(取長補短) ’ 과 전통과 근대의 중용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교의 오륜에 바탕한 윤리 외에는 모두 변혁의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 동도서기론 ’ 과 구분된다.

 

1896년 국왕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유길준이 일본에 망명함에 따라 ≪ 서유견문 ≫ 역시 출간된 지 10개월도 채 안되어 자유롭게 유포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서유견문 ≫ 은 시의에 합당해 쓰일만한 서적으로 인식되어 공립소학교 혹은 사립학교의 교과서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 독립신문 ≫ · ≪ 황성신문 ≫ 등에 원문 그대로 인용되거나 그 논지가 실리기도 했으며, 이승만, 안창호를 비롯한 지식인 정치가 계몽운동가들에게도 탐독됨으로써 개화사상을 보급하고 개화운동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해 한국의 문자생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기존의 한문 위주의 문자생활이 일반인들에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중국 중심의 종속관계를 유지시키는 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우리 글인 한글 사용을 장려함으로써 국민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의 자주자립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 서유견문 ≫ 에는 중국의 연호가 아닌 조선의 개국연호를 쓰고 있다. 한글 보급을 확대하려는 그의 의지는 나중에 최초의 국어문법책인 ≪ 조선문전 朝鮮文典 ≫ · ≪ 대한문전 大韓文典 ≫ (1909)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 참고문헌 ≫ 서유견문론(유영익, 한국사시민강좌 7, 일조각, 1990), 다시 읽는 서유견문(정용화, 동아시아비평 제3호, 1999), 서유견문의 종합적 검토(진단학보 89, 200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길준(兪吉濬)  

 1856(철종 7) ∼ 1914.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 · 정치가.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 서울 출신. 진사 진수(鎭壽)의 아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敬稙) 등에게 한학을 배웠다.

 

1870년(고종 7) 박규수 ( 朴珪壽 )의 문하에서 김옥균 ( 金玉均 ) · 박영효 ( 朴泳孝 ) · 서광범 ( 徐光範 ) · 김윤식 ( 金允植 ) 등 개화 청년들과 실학 사상을 배우면서, 위원(魏源)의 ≪ 해국도지 海國圖志 ≫ 와 같은 서적을 통해 해외 문물을 습득하였다.

 

1881년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 ( 魚允中 )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에 참가, 우리 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이 때 일본의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사와(福澤諭吉)가 경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유정수(柳定秀)와 함께 수학하였다.

 

그는 한국 · 중국 · 일본 등 동양 삼국의 단결을 목적으로 조직된 흥아회(興亞會)에도 참가해 일본의 학자 및 정치가들과 교유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영익 ( 閔泳翊 )의 권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1883년 1월에 귀국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의 주사 ( 主事 )에 임명되어 한성판윤 박영효가 계획한 ≪ 한성순보 ≫ 발간 사업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민씨척족 세력의 견제로 신문 발간사업이 여의치 않자 주사직을 사임하였다.

그 해 7월 보빙사 ( 報聘使 )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일본 유학 때에 알게 된 생물학자이며 다윈(Darwin, C.)의 진화론을 처음으로 일본에 소개한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피바디박물관장인 모스(Morse, E.S.)의 개인지도를 받았다.

 

1884년 가을 담머[대학예비]고등학교(Governer Dummer Academy)에서 수학, 우리 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12월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1885년 12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 ·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다 하여 개화파의 일당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 한규설 ( 韓圭卨 )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고 1892년까지 그의 집과 취운정에서 연금생활을 하면서 ≪ 서유견문 西遊見聞 ≫ 을 집필, 1895년에 출판하였다.

 

국한문혼용체로 서술된 이 책에서 서양의 근대 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한국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 즉 ‘ 실상개화(實狀開化) ’ 를 주장하였다. 개화를 인간사회가 ‘ 지선극미(至善極美) ’ 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역사는 미개화 · 반개화 · 개화의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는 문명진보 사관(文明進步史觀)을 제시하였다. 그의 문명진보 사관은 종래의 상고주의 사관(尙古主義史觀)을 비판해 문명의 진보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그의 개화사상은 실학의 통상개국론(通商開國論), 중국의 양무(洋務) 및 변법론(變法論), 일본의 문명개화론, 서구의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 및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 군민공치(君民共治), ’ 즉 입헌군주제의 도입,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개화사상에 나타난 이러한 개혁론은 갑오경장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한 청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수립된 친일내각에 참여, 외아문참의겸군국기무처회의원(外衙門參議兼軍國機務處會議員) · 의정부도헌(議政府都憲) · 내각총서(內閣總書) · 내무협판(內務協辦) 등의 요직을 지내면서 갑오경장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1895년 10월에 을미사변 후 이 사건의 뒷수습을 위해 일본 공사 이노우에(井上馨)와 접촉하였다. 내부대신이 되어 단발령을 강행하여 보수적인 유림과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 俄館播遷 )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내각이 수립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한국인 청년장교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와 연결,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음모가 양국간의 외교 분규로 비화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유폐되었다. 1907년 고종이 폐위된 뒤 귀국해 흥사단 부단장, 한성부민회(漢成府民會) 회장을 역임하였다.

 

계산학교(桂山學校) ·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 등을 설립해 국민 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 · 호남철도회사 · 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해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1909년에는 국어문법서인 ≪ 대한문전 大韓文典 ≫ 을 저술, 간행하였다. 1910년에 훈일등태극대수장(勳一等太極大綬章)을 받았다.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에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국권상실 후 일제가 수여한 남작의 작위를 거부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 서유견문 ≫ · ≪ 구당시초 矩堂詩抄 ≫ · ≪ 대한문전 ≫ · ≪ 노동야학독본 勞動夜學讀本 ≫ 등이 있으며, 1971년에 유길준전서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어 ≪ 유길준전서 ≫ 전5권이 간행되었다.

 

≪ 참고문헌 ≫ 西遊見聞, 大韓季年史, 續陰晴史, 梅泉野錄, 杞溪兪氏族譜, 民衆의 親友 兪吉濬先生(開闢社編輯局, 朝鮮之偉人, 1926), 兪吉濬의 資本主義精神(洪以燮, 韓國史의 方法, 一潮閣, 1969), 美國留學 시절의 兪吉濬을 찾아서(李光麟, 新東亞, 1968), 兪吉濬의 開化思想(金泳鎬, 創作과 批評 11, 1968), 兪吉濬의 開化思想-西遊見聞을 中心으로-(李光麟, 歷史學報 75 · 76合輯, 1977), 軍國機務處 議案의 分析(柳永益, 淸日戰爭과 韓日關係, 一潮閣, 1985), 甲午更張 이전의 兪吉濬(柳永益, 翰林大學論文集 4, 1986), 現代漢城 の 風雲 と 名士(細井肇, 日韓書房, 191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체(文體)  

    언어 표현의 독특한 양상. 문장의 개인적인 성벽(性癖)이나 문장의 범주를 의미한다.

 

〔의미〕

문체는 흔히 영어의 ‘ style ’ , 독어의 ‘ Stil ’ , 프랑스어의 ‘ style ’ 등 서구어의 번역어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러한 서구어는 라틴어 ‘ stilus ’ 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본래 ‘ 쓰는 기구 ’ · ‘ 첨필(尖筆) ’ 을 의미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 ‘ stilus ’ 는 일찍이 ‘ 글을 쓰는 법 ’ 에 응용되었고, 그뒤 글이나 말로 ‘ 자신의 특징을 표현하는 방법 ’ 또는 이때 나타나는 사람의 특징으로 그 의미가 일반화하였다. 그 뒤 이 단어는 더 많은 의미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 style ’ 을 ‘ 문체 ’ 라 번역할 경우는 ‘ 짓기 작문법 ’ 의 뜻으로 한정된다. 우리의 경우 문체의 의미는 이보다 넓은 뜻으로 ‘ 글의 체재 ’ , ‘ 문장의 양식 ’ , ‘ 한문의 형식 ’ 의 뜻을 지닌다.

 

문체는 일찍이 고대 수사학에서 설득의 기법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문체는 내용과 별개의 것으로 규범성을 지녔다. 근세에 접어들어서는 개성적인 표현이 강조되면서 “ 문체는 그 사람이다. ” 라는 잠언이 대두되게 되었으며, 내용과 표현방법의 구별이 부정되고 작품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원리는 비문학적 발화(非文學的發話)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일사상(一思想) 일형식(一形式)의 순일치론(純一致論)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이러한 일치론과는 달리 같은 정보를 전하면서 언어구조가 다른 데 주목하게 되고, 이를 문체의 차이라 보게 되었다. 변형생성론자들이 동일한 의미기저인 심층구조(深層構造)에서 어떤 변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문법형태가 생성되고, 이것이 문체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보는 것도 이러한 것이다.

 

언어활동이란 사회적인 언어(langue)를 바탕으로 개성적인 언(言, parole:언어심리에 잠재된 기억 즉 저장된 언어가 발음 작용을 통해 외면적으로 실현된 것)에 의하여 수행되는 것이다. 이는 공통분모인 규범에서 어느 정도 일탈된 작자의 성격에 따라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언어활동에는 문체가 나타나게 된다.

 

〔분류방법〕

문체의 분류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크게 유형적 문체와 개성적 문체의 둘로 나눌 수 있다. 또, 쓰이는 언어에 따라 문어체(文語體)와 구어체(口語體)로 나누기도 한다. 유형적 문체는 어떤 특수한 표현형태로, 다른 많은 표현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관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기재형식에 따라 : 한문체 · 서기체(誓記體) · 이두체 · 향찰체 · 구결체 · 국문체 등. ② 어휘 · 어법에 따라 : 문어체 · 구어체, 또는 국문체 · 국한문혼용체 · 한문체 등, 또는 동사적 문체(verbal style) · 명사적 문체(nominal style) 등, 또는 ‘ 이다 ’ 체 · ‘ 습니다 ’ 체 등. ③ 수사에 따라 : 산문체 · 운문체 등, 또는 문장호흡의 장단에 따른 간결체와 만연체, 문장표현의 강유(剛柔)에 따른 강건체와 우유체, 문장수식의 다과에 따른 화려체와 건조체 등. ④ 기술방식에 따라 : 묘사체 · 설명체 · 논증체 · 서사체 등. ⑤ 글의 장르에 따라 : 가사체 · 악장체 · 역어체 · 내간체 또는 논설문체 · 수필문체 · 소설체 등.

이와는 달리 기로(Guiraud,P.)는 표현의 범위, 표현수단의 범위, 표현의 성질, 표현의 원천, 표현의 양상에 따라 문체가 구별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적 문체와는 달리 유형화하기 어려운 작자 특유의 개성적인 문체가 있다. 이것은 공통분모에서 벗어난 “ 문체는 그 사람이다. ” 라는 언(parole)의 표현을 의미한다.

 

≪ 참고문헌 ≫ 문체론의 이론과 실제(朴甲洙, 세운문화사, 1977), La Stylistique(Guiraud,P.,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57), Style in the French Nov-el(Ullmann,S., Oxford, Basil Blackwell, 1964), Linguistics and Style(Spencer,J, ed., London, Oxford Univ.Press, 196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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