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의 비극적 의미 / 우나무노
by 송화은율살과 뼈를 가지고 있는 인간
'나는 인간이요.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를 기이하다고 여기지 않을 거요' 라고 어느 고대 로마의 희극 배우는 말하였다. 그러나 나라면 차라리 이렇게 말하리라. '나는 인간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나는 결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인간적'이라는 형용사는 추상명사의 '인간성' 만큼이나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적'이거나 '인간성'이거나 단순한 형용사거나 명사화된 형용사는 어디까지나 전부 애매한 것들이고, 구체성을 띤 명사는 오직 하나뿐인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것 말이다. 살과 뼈를 가지고 있는 인간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괴로워하다가 죽는다. 죽는다는 점에 유의하시라. 그리고 사는 동안에는 먹고 마시고 놀고 자고 갈구한다. 그리고 서로 보고 듣는다. 이리하여 형제적인 우애, 참된 우애가 실현되는 것이다.
왜 내가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다른 의미로서 인간이라고 불리는 예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학적 이유가 적지 않게 있는 주어(主語)이다. 그것은 흔히 이야기하기는 날개깃이 없는 두 발 달린 인간으로서 아리스토텔리스의 이성적 인간이며, 루소의 사회계약적 인간이며, 맨체스터의 경제 인간이며, 린네의 호모 사피엔스며, 좀더 보태어 말한다면 똑바로 설 수 있는 포유동물이다. 이러한 인간은 그 어느 땅이나 그리고 어느 시대에도 속해 있지 않으며, 성(性)이나 조국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개념은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비인간(非人間)이란 말이다.
우리라고 하는 인간은 이와는 다른 인간이나, 즉 살과 뼈를 가지고 있는 인간인 것이다. 나나 독자가 다 이런 인간에 속해 있다. 저쪽에 있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땅 위에서 발을 딛고 다니는 인간들은 모두가 다 같은 종류에 속한다. 그런데 살과 뼈의 이 구체적인 인간은 모든 철학의 주어고, 또한 동시에 최대의 목적이다. 자칭 철학자라고 하는 자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알고 있는 철학사(哲學史)는 원인만 불러 일으키는 학설이 대부분이고, 정작 학설의 주창자인 철학자는 순수한 구실로서만 등장할 뿐이다. 그러니까 철학자들, 즉 철학하는 사람들의 내적인 전기(傳記)는 제2차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이 내적 전기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명백히 해두어야 될 것은 철학은 시보다는 과학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든지 특수한 과학의 최종 결과의 최대 조립으로 꾸며져 있는 철학자 학설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지속력이 무척 약하며, 또한 그 학설을 만든 철학자의 총체적인 정신적인 정신적 열망을 대표하는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더 그 생명이 짧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또 우리의 삶과 사상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필요한 과학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철학보다 더 불가사의한 것이다. 과학은 가장 객관적인 목적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의 폼을 가장 벗어난 그 어떤 것을 완수하는 것이다. 과학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경제에 관계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론가 또는 공상가라고 부르는 자들의 새로운 과학적 발명은 기계류의 발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증기 기계·전화·축음기·비행기와 같이 그 무엇을 위해 반드시 소용되는 것들이다. 가령 전화는 우리들이 먼 거리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대화하도록 해주는 데 쓸모가 있다. 그러나 이때에 있어서 '사랑하는 여인'도 쓸모가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의혹을 가져야 겠다. 한마디로 말해서 쓸모가 없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 어떤 사람이 오페라에 가기위해 전차를 탔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이 경구에 있어서 보다 더 유용한 것은 전차인가, 그렇잖으면 오페라인가?'
철학은 우리가 세계나 생에 대해 단일적이고 총체적인 하나의 개념을 형성해야 된다는 필요성에 해답을 준다. 또한 철학은 이 개념의 결과로서 어떤 내부적인 행위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표면적 행동을 유발시키는 어떤 감정을 형성해야 된다는 그 필요성에도 해답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그 결과의 개념인 대신에 그 원인이다. 그러니까 세계와 삶을 이해하는 방법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을 논하는 우리의 철학은 삶 그 자체에 관한 우리의 감정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삶이라는 것은 그 전체가 정적인 것으로서의 잠재의식의 뿌리, 아니 어쩌면 무의식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들을 낙관주의나 염세주의로 이끄는 작용은 우리의 사상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리적 또는 병리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낙관주의나 염세주의가 우리의 사상을 만들고 있다.
흔히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아직도 몹시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왜 인간을 정서적인 또는 감정이 있는 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과의 차이는 이성에서보다도 감정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나는 고양이가 웃고 울지는 못해도 도리에 맞게, 즉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비록 속으로 울고 웃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바다에 사는 게도 속으로는 이차방정식을 풀 줄 안다고 말해도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철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인 것이다.
칸트의 경우를 들어보자. 18세기 말엽에서부터 19세기 초엽까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친 임마누엘 칸트를 예를 들어보자는 말이다. 이 칸트라는 인간에 철학 속에는 심장과 머리를 지닌 인간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의미 심장한 비약을 다짐하는 인간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마따나 극히 인간적인 인간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부터 '실천이성비판'으로 향해 비약을 하는 인간이다. 인간을 제대로 보지 못한 자들이 여기에서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순수이성비판'에서 붕괴시킨 것을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재건을 한다. 세밀한 분석을 통하여 신, 즉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말하는 신, 추상적인 신, 움직이지 않는 신, 이러한 신의 존재에 대한 전통적인 증명들을 관찰하고 세분한 후에 신을 다시 개조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양심의 신을, 도덕적인 질서의 신을, 루터교파들이 말하는 신으로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만이다. 칸트의 이러한 비약은 신앙에 대한 루터교파들의 개념속에서 이미 발아 상태에 놓여있다.
신에는 두 가지 유형의 신이 있다. 하나는 이성적인 신으로서, 정의상의 인간, 추상적인 인간, 즉 비인간적 인간의 밖으로부터 무한을 향해 쏘아진 발사물이다. 또 다른 신은 감정적이거나 의지적인 신으로서, 생명이 있는, 즉 구체적이고 뼈와 살이 있는 인간의 내부 속으로 무한히 쏘아지는 발사물이다.
칸트는 머리 또는 두뇌를 가지고 파괴한 것을 마음 또는 의지를 가지고 재현시켰다. 칸트의 추종자들의 증언이나 칸트 자신의 서한이나 사적인 성명 등에서 밝힌 바에 의해 우리도 잘 날고 있는 사실이지만, 백과사전과 이성이라는 여신이 석권하던 18세기 말엽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철학을 강론하고 있던 노총각, 이기주의자가 되어서 노총각이 됐는지도 모르지만 칸트라는 인간은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지 매우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어쩐 문제라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문제다. 즉 우리의 오장육부까지 파고드는 문제다. 우리자신의 개인운명의 문제다. 영혼의 불멸에 대한 문제다. 인간 칸트는 죽음에 대해 전연 체념을 하지 않았었다. 죽음에 대해 전연 체념을 하지 않았었다. 죽음에 대해 전연 체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비약을 한 것이다. 즉 불멸의 비약인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에서부터 '실천이성비판'으로 향한 비약이었다. '실천이성비판'을 조심해서 그리고 꼼꼼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칸트는 엄밀히 말해서 불멸의 영혼을 추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상명령은 어떤 도덕적인 공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런데 이 도덕적 공리는 자기 나름대로 목적론적 분야에서, 아니 그보다 더 종말론적인 분야에서 영혼의 불멸성을 요구라고 나선다. 그리하여 이 불멸을 뒷받침해주기 위해서 신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그 밖에 모든 것은 철학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의 요술 같은 속임수인 것이다.
인간 칸트는 종말론의 근본으로서 도덕을 느꼈었다, 그러니까 이 철학 교수는 용어들을 역으로 풀이했다.
어느 곳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다른 교수, 즉 윌리엄 제임스라는 사람은 '대다수'의 인간들을 위해 존재해 있는 신을 불멸의 생산자라고 말한 바 있다. 하긴 그렇다 그런데 이 '대다수'의 인간들 중에는 인간 칸트도, 인간 제임스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잇는 독자라는 인간들도 다 포함된다.
어느 날 나는 어떤 시골 사람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과 같은 가설을 내놓았다. 즉, 실제로 하늘과 땅과 우주의 의식을 다스리고 있는 신은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연유로 각자의 영혼이 전통적이고 구체적인 의미에서 불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자 내 말을 들은 그 시골 사람은 이렇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신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거죠?"
하긴 인간 칸트나 인간 제임스도 그들의 가장 깊숙한 의식의 광장에서는 그와 같은 반문을 했던 것이다. 단지 교수로서 행동할 때면 합리성하고는 그렇게도 거리가 먼 그러한 태도를 합리적으로 정당화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부조리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헤겔은 모든 합리적인 것은 진실한 것이고, 모든 진실한 것은 합리적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하나의 아주 유명한 금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독자나 나까지 포함된 많은 사람들이 헤겔의 말에 승복하지를 않고 진실한 것은, 진실로 진실한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믿고 있다. 즉, 이성은 비합리성 위에서 세워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위대한 정의자인 헤겔은 정의라는 것을 이용해서 우주를 재건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마치 포병대의 하사가 대포는 우선 구멍을 내가지고 그것을 쇠로 완전히 덮음으로써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거나 같은 이치다.
다른 사람, 즉 조지 버틀러라는 사람은 18세기초에 영국 성공회의 주교였는데, 그에 대해서 카톨릭 추기경인 뉴먼은 그가 영국 교회에서는 가장 위대한 명성의 소유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버틀러 주교는 그의 명저, '종교의 유추' 제1장 마지막인 미래의 삶을 논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함축성 있는 말을 했다.
"비록 우리의 호기심을 별로 만족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여기에서 그렇게 강조한 것을 미래의 삶에서 믿는다는 것은, 어떤 실증적 증명에 대해 해답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로 종교의 모든 목적들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에 있어서 미래의 삶에 대한 증명은 비록 그것이 실증적이라 하더라도 종교에 대한 증명은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죽음 뒤에 우리가 살려야 될 것은 무신론과 일치하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물은 무신론에 의해 우리가 현재 죽지 않고 살 아 있다는 것을 인지시킬 수 있는 것이므로, 무신론이 미래에 존재할 수 없으리라고 증명하는 것처럼 부조리한 일도 없을 것이다."
인간 칸트가 버틀러의 작품들을 읽어보았는지 안 읽어보았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하간 버틀러는 영혼의 불멸 속에서 신앙을 구하려고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틀러는 신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을 독립시켰던 것이다. 그의 '종교의 유추' 제1장은 아까 독자 여러분에게 말한바와 같이 미래의 삶에 대해 서술하였고, 제2장은 상벌에 대한 신의 다스림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선량한 영국 성공회의 주교는 마음속으로 영혼의 불멸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추론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 영국 교회의 주교는 바로 여기서 그의 추론을 출발시켰기 때문에 같은 세기말에 루터파의 철학자가 했던 그러한 비약을 할 필요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버틀러 주교는 하나의 인간상을 상징했고, 칸트 교수는 다른 인간을 상징했고, 칸트 교수는 다른 인간을 상징했던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구체적이고 단일적이고 본질적이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네 발 달린 짐승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른 인간, 즉 17세기 중엽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일생을 끝마친 포르투갈계 유태인 스피노자는 그야말로 모든 사물에 대해서 논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저서 '윤리학'제3부 명제6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각 사물은 긍정적이 되는 순간, 그의 실체를 보전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한다.' 각 사물은 긍정적이 되면, 다시 말해서 실체로 화하면 실체는 자체에 의해서 실재하고 자체에 의해 형성된다는 말이다. 같은 책 제3부 명제7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고 있다. '모든 사물이 그 실체 내에서 보전하기 위하여 기울이는 노력은 다름아니라 사물 자체에 현존하는 본질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자 여러분이여, 그대들의 본질이나 나의 본질이나 인간 버틀러의 본질이나 인간 칸트의 본질이나 그리고 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안간들의 본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죽지를 않고 계속해서 인간이 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 진력 그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 그건 그렇고 스피노자의 여덟 번째의 명제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져 있다. '사물이 자기 실체 내에서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한정된 시간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귀하나 나나 스피노자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들은 결쿠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결코 죽고 싶지 않다'는 우리들의 갈망은 현재 우리들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말이다, 안개 낀 네덜란드 땅으로 추방된 이 초라한 포르투갈계의 유태인은 결코 그 자신의 불멸성을 믿어보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모든 철학은 그의 신앙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하나의 자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딴 사람들은 손이나 팔이나 또는 가슴이 아팠지마는,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는 신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오, 가엾은 인간이여. 물론 다른 사람들도 불쌍한 인간들임에는 틀림없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하나의 사물에 불과한 것이냐? 질문이 아무리 모호하고 부조리하게 들린다 할지라도, 그런 질문을 한 사람들이 없지 않아 뭔지 하는 것이 세상이 좁구나 하고 종횡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실증주의가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또 그에 못지않게 악한 일도 많이 저질러 놓았었다. 이 나쁜 일들 중의 하나가 바로 분석인가 뭔가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사실이다. 즉 어떤 문제를 분석에 집어넣어 가루를 만듦으로써 문제의 분말을 압축시키는 것 말이다. 심리학에서는 그러한 행위가 몹시 해로웠다. 심지어 문학가로 전향하는 스콜라 철학자들, 그렇다고 시인으로 전향한 철학자들이 있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시인과 철학자는 비록 똑같은 것이 아니지만 쌍동이 형제처럼 서로 꼭 닮았으니까 말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실증적 심리 분석을 소설과 연극에 적용시켰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즉 살과 뼈가 있는 인간을 직립시켜야만 했고, 따라서 의식 상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의식은 소멸되어야만 했다. 흔히 하는 말로, 어떤 복잡한 생명이 있는 유기체의 화학적 화합물을 실험하고 시험하는 데 있어서 번번이 일어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즉 반응체는 실험하려고 하는 물체 자체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는 것은 그 구성체의 사물뿐인 것이다.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의 의식을 통하여 서로 모순되는 상태들을 나열하는 분명한 사실을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나 '나'라는 의식을 분명히 보지 못하고 말았다. 어떤 사람에게 자아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 마치 그의 육체에 대해서 물어보는 거나 마찬가지다. 자아에 대해 말할때, 그것은 분명히 구체성과 인성을 지닌 자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즉 피히테의 '나'가 아니라 피히테 자신, 다시 말해서 인간 피히테의 '나'인 것이다.
하나의 인간을 결정한다는 것은, 즉 인간에게 하나의 인간을 만들어준 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그 어떤 인간이지 다른 인간은 아니다. 즉 인간인 인간이지, 인간이 아닌 인간은 아닌 것이다는 단일성의 원리고 또한 연속성의 원리인 것이다. 단일성의 원리는 처음에는 육체 덕분에 있다가 나중에 가서 행동과 의지속에 파묻히게 된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 한 발은 앞을 해 가면서 다른 발은 뒤로 향해 가지는 않는다. 우리가 눈을 들어 무엇을 바라볼 때 한 쪽눈으로 북쪽을 바라보고 다른 한 쪽 눈으로 남쪽을 바라보지는 앟는다. 물론 이상이 있는 눈이라면 별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우리 생애에 있어서 매 순간마다 우리는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의지에 대해 우리 행위의 공 작용은 가하여진다. 비록 다음 순간에 우리가 의지를 바꾸어도 말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인간은 인간이 되면 될 수록 그의 행위는 더욱더 단일적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 생애를 의지 하나만을 가지고 추구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다. 그 의지가 무엇이든간에 말이다.
다음에 시간에 있어서의 연속성의 원리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내가 나인지 또는 20년 전의 내가 아닌지에 대해서는 토의해볼 필요조차도 없이 그것 자체가 한가한 토의니까 현재` 나`라는 사람은 일련의 연속적인 의식상태를 통하여 20년 전에 나의 육체 속에 들어 있던 사람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새삼 논의할 여지조차 없을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개성의 기초가 된다. 그것은 마치 전통이 한 민족의 집단적인 개성의 기초가 되는 이치와 같다. 인간은 누구나 추억 속에서, 그리고 회상을 위해 산다. 우리의 정신적인 삶은 근본에 있어서는 존속을 위한, 희망을 가지기 위한 우리 회상의 노력이며, 따라서 미래를 만들기 위한 우리 과거의 노력이다. 이 모든 것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자명한 진리다. 물론 나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자가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들 중에 수년 동안을 매일같이 만나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그의 특유한 개성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나부터도 내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걸.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지만 말이야." 어느 때인가 이 친구가 나에게 "아, 나도 모씨처럼 되어 보았으면 좋겠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옳다 됐구나 싶어 그에게 반격을 가했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걸. 자네가 딴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그 자체 말일세. 딴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현재의 자기가 되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그 되고 싶다는 사람이 가진 전부, 즉 재산이나 지식을 몽땅 소유하고 싶다는 뜻으로 나는 해석하고 있는데...... 그러나 무조건하고 딴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야. 나는 불행이 없는 딴사람이 되기보다는 불행하지만 그대로 자기대로 있는 것을 더 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네. 그러니까 불행한 사람들이란 그 불행 속에서 건강을 보전하고 있을 때는, 다시 말해서 그 존재 속에서 존속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때는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행한 존재를 더 원하고 있다는 그 말일세. 내자신의 경우를 들어 말한다면, 내가 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 감동적인 그림들보다는 지옥의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내게는 더 인상적이었네. 그러니까 그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 그림 자체를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워했단 말일세. 그것은 우리의 고행자가 말한 것처럼 존재에 대한 맹렬한 열망이었고 신성에 대한 욕구였었네."
남의 장단에, 남이 꾸며놓은 장단에 춤을 춘다는 것은 `자아'라는 것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각자는 자기의 개성을 방어한다. 그러니까 다만 어떤 변화가 자기 정신의 단일성에 편입될 수 있다거나 또는 자기 존속성에 용해될 수 있다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거나 느낄 때 그 변화를 추락할 뿐이다. 좀더 자세히 말해서 이변화가 자기 나름대로 존재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그 나머지 모든 것과 조화가 되고 합쳐질 수 있을 때, 그리고 동시에 그의 회상과 연결되어질 수 있을 때, 그 변화를 두말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개인에게나 또는 어떤 민족-어떤 의미에서는 민족도 역시 인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에게도 단일성을 해치고 그 개성을 파괴하는 변화를 요구할 수가 없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개인이나 민족도 자신을 많이, 아니 어쩌면 거의 다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도 어디까지나 존속이라는 점을 전제로 했을 때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개성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인간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병리학적인 경우에서만 볼 수가 있다. 정신병학자들이 연구하는 것같은 거말이다. 이 개성의 변화에서는 의식의 기초인 기억을 완전히 말소되고 만다. 그리고 그 가엾은 환자에게는 단지 개인-이때는 이미 인간적인 것은 소멸된다-존속의 실체로서 물리적이고 유형적인 유기체만이 남는다. 이러한 병에 걸린 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만약에 이런 병에 걸렸어도 죽은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아서 상속할 만한 것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겠다. 그건 그렇고, 이 병은 하나의 일대 변혁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로서의 변혁인 것이다.
병이라는 것은 어떤 점에 있어서 유기적인 분해다. 그것은 살아있는 육체 내에서 반역을 하고, 생명의 공동 작용을 파괴하고, 모든 요소들이 합쳐 있는 목적으로부터 다른 목적을 획책하려는 어떤 기관이나 구성 분자다. 그 목적은, 자체 내에서 생각할 때, 다시 말해서 추상적으로 논할 때, 더 숭고하고 더 고상하고 결국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다른 사람인 것이다. 물 속에서 헤엄치고 숨쉬는 것보다는 공중에서 날아다니고 호흡을 하는 것이 더 좋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날개로 변모하는 것을 원해서 그것이 실현된다면, 물고기는 물고기로서는 죽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속을 위한 과정이 없다면, 새가 되는 것으로 그 물고기는 최후를 마치고 말 것이라는 것은 거듭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어쩌면 물고기가 새를 낳을지도 모르며, 또 어떤 물고기는 새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물고기라 할지라도 그 자신 일생 동안 새 노릇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체내에서 나의 생명의 단일성과 존속을 파괴하려고 꾸준히 획책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나를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도 파괴되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민족에 있어서 모든 개인이 그 민족의 정신적인 단일성을 파괴하려고 획책한다면, 그 민족뿐만 아니라 결국에 가서 자기도 파멸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도 그의 민족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민족을 파괴하려고 든다는 것은 다른 민족이 우수해 보여서 그렇단 말인가? 암, 그야 물론이지. 비록 어떤 것이 더 좋고 더 나쁜지는 잘 몰라도 말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따져보자. 다른 민족이 더 부유한 민족이라서 그렇단 말인가? 그렇다. 더 교양 있는 민족이라서 그렇단 말인가? 그렇다. 더 행복하게 사는 민족이 돼서 그렇단 말인가? 이건 그렇다고 단정하기에는 좀 곤란한 질문이지만, 에라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두어라! 정복을 즐기는 민족은 어떤가? 비록 내 민족은 정복을 당했어도 말이다. 이암, 축하해줄 만한 일이지.
위의 물음들이야말로 어떤 민족을 우수한 민족이라고 입증을 하는데 있어서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민족은 내 민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인 것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나의 생명의 단일성과 존속을 파괴시키면서까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나라는 존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단순히 그것은 내 자신을 포기한다는 말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죽어도 그런 짓을 할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자신만은 내가 지켜야 된다!
어느 누가 나의 신원증명서를 나보다 더 잘 쓸 줄 안다면?……어느 누가 나의 사회적 임무를 나보다 더 잘 발휘한다면?……사실이 그렇다면 나는 어미 내가 아닌 것이다.
어떤 독자는 "나는 나이고 언제나 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너는 누구냐?" 하고 외칠는지 모른다. 그럼 여기서 거대한 인간인 오베르망(프랑스의 소설가 세낭쿠르의 서간체 소설 "오베르망"의 주인공 이름) 의 경우를 들어 대답해보기로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주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내게 있어서는 전부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나는 인간 칸트의 교리를 그 인간에게 상기시켜주고 싶다. 그런데 비단 그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이웃 사람들에게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칸트의 교리를 주지 시켜야만 되겠다. 왜냐하면 칸트의 교리는 단지 나를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투덜거리는 독자 여러분, 바로 독자 여러분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칸트의 교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즉 모든 사람을 위해서, 다시 말해서 각 개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기이한 판단은 우주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논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기이하다는 것은 특수한 것이고 따라서 우주적인 것이다.
인간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문명 전체가 인간을, 각 개인을, 각각의 '나'를 직진시킨다. 그런데 같잖게 휴머니티라고 불리는 우상은 도대체 뭐냐 말이다? 이것 때문에 인간들은, 그리고 인간들의 개체는 많은 희생을 감수하여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 이웃과 내 동포,내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한다. 이렇게 해서 끝없이 세대 연결은 이어져간다. 그러면 도대체 이 희생의 결실을 향유하는 자는 그 누구인가?
이 환상적인 희생에 대해, 다시 말해서 이 목적 없는 공헌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는 사람들 자신도 보통 삶에 대한 권리를 논한다. 그러면 이 삶에 대한 권리란 또 무엇인가? 사람들은 내게 말하기를,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나도 잘 모르는 그 무슨 사회적 목적을 실현코자 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내 형제들 그 누구나 마찬가지로 삶을 누리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밖에 더 의식하지 못한다.
그렇다! 내 눈에는 분명히 보인다. 어떤 거대한 사회적 활력소가, 어떤 강대한 문명이, 어마어마한 과학이, 어마어마한 예술이, 어마어마한 산업이, 어마어마한 도덕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내 눈에는 분명히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이 세계를 경이적인 산업의 사실들로, 대공장들로, 길들로, 박물관들로, 도서관들로 가득 채울 때,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의 발 밑에 떨어진다는 사실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서 있느냐 말이다! 인간이 과학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과학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지 그저 아리숭하기만 하다.
아까 그 독자는 다시 이렇게 외칠 것이다. "어렵쇼! 그렇게 어리벙벙한 얼굴만 하지 말고 어디 신보고 이 세계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대답할 거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이고 인간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은 신과 마찬가지의 대답을 해야될 게 아니겠오?"
하긴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다. 인간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은 그렇게 대답해야만 된다. 만약에 개미도 이런 것을 의식하고 또 자신을 의식하는 인성을 가졌다면 아마 신은 개미를 위해서 세계를 만들었다고 아주 멋진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는 의식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각개의 의식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우주 전체에 해당되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몹시 훌륭한 분의 말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런데 영혼이라니? 생명에 관한 것은 아닌 모양이로구나. 생명, 이것에 관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생명은 영혼속에서 덜 창조되면 될수록, 다시 말해서 그의 의식적이고 인간적이고 구체적인 불멸성에서 덜 창조되면 될수록 떠돌이 신세와 같은 일시적인 그 가엾은 생명의 가치는 더욱더 과장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전쟁에 대항하는 극히 여성적이고 과장된 감정이 발생한다. 그렇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원치는 않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내 알바 아니다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는 자는 결국 그것을 잃은 것이다'라고 복음서에는 씌어져 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을, 그 불멸의 영혼을 구하려고 하는 자는 그 영혼을 잃을 것이다'고 씌어져 있지는 않다. 우리가 그것을 그렇다고 생각하든, 또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든 하여튼 이 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그런데 객관주의를 정의하는 모든 자들은 어떤 인간이 자기의 자아를, 즉 자기의 인간적인 의식을 확인함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인간을 확인하고, 진정한 휴머니즘-휴머니즘은 인간에 딸린 사물들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것이다-을 확인하고, 그리고 인간을 확인함에 있어서 의식을 확인한다는 사실에 시선을 주지 않는다. 아니, 시선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유일한 의식은 바로 인간의 의식이니까 말이다.
세계는 의식을 위해 있다. 좀더 적절하게 표현할 것 같으면, 이 '위하여'라는, 즉 목적의 개념은, 아니 개념이라는 표현보다 더 나은 '감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자. 그러니까 이 목적론적인 감정은 바로 의식이 있는 곳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의식과 목적은 근본적으로 같다 하겠다.
태양이 의식을 가졌다면 틀림없이 세상 사람들을 비춰주기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이렇게 생각하는 의식을 가질 것이다. 즉 세상 사람들을 비춰줌으로써 즐거움을 느끼고 사는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참으로 그럴듯한 생각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벌리는 이 모든 비극적인 전투는 내가 앞서 독자들에게 말한 바 있는 그 불멸에 대한 비약을 인간 칸트로 하여금 하게 한 불멸의 대한 그 불멸의 열망은, 결국 이러한 모든 것은 의식을 위한 전투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철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만약에 의식이 두 개의 영원한 암흑 사이에 있는 하나의 번갯불이라면, 그러니까 사실이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저주스러운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어떤 때에는 끝이 없는 생명을 갈망하면서,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이 생명이 주어진 만큼 가치가 없다고 말하면서 중언부언 지껄이는 모든 말 속에서 어떤 모순의 밑바닥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모순이라니? 암, 여부가 있는 말인가? 그러나 내 마음은 그것을 인정하지만 내 머리는 그것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따지나마나 그것은 하나의 엄연한 모순이다. 어느 누구가 복음서에 나오는 이러한 말을 기억하지 않을까보냐! "하느님, 저는 믿사옵니다. 저의 불신에 도움을 주소서." 물론 이것도 모순이다. 우리는 단지 모순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순에 의해 생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삶은 하나의 비극이다. 따라서 비극은 승리도 희망도 없는 하나의 비극일 따름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비극은 하나의 모순인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보시다시피 정서적인 가치를 논하는 데 있어서, 정성적인 가치 앞에서는 이성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어디까지나 이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천성적으로나 또는 재치를 부리느라고 아는 체하는 사람들을 단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좋은 예가 하나 있다. 즉 어떤 분이 한창 젊은 나이에 있는 아들을 갑자기 잃고 난 아버지에게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내게는 퍽 인상적으로 들렸다. "인내심을 가지고 참게나. 우리 모두가 조만간 죽는 인생이 아닌가?" 그 아버지가 이 무례한 말에 화를 낸다고 해서 독자여러분께서는 그 가엾은 아버지를 나무랄 수가 있을까? 왜냐하면 그 말은 어디까지나 무례한 인사로 들려질 때가 없지 않아 있다. 예들 들어 보자. "자네와 같은 사고 방식을 가지려면 내 두뇌로부터 지혜만 빼버리면 되겠네." 그러나 누구나 이런 명언은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뺨을 맞고도 남을 테니까 말이다.
실제에 있어서 두뇌로밖에 또는 사고를 하기 위한 특수한 어떤 다른 기관으로 밖에 사고를 하지 않는 것처럼 애써 남에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 반면에 딴 사람들은 모든 육체와, 모든 영혼과 피와 골수와 심장과 폐와 복부와 생명을 가지고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에든지 그저 정의만을 내리려고 한다. 즉 직업적으로 사고만 하려고 든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직업적'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아는가? 독자여러분께서는 직업의 분화로 인한 산물이 그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여기에 직업적인 권투선수가 하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가장 효과 있는 방법에 의해 펀치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서 펀치를 사용하는 데 온 힘을 집중시킬 수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링에 올라서기가 무섭게 그의 행동이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을 획득하기 위하여 필요 적절한 근육을 마음껏 움직여 상대방을 녹다운 시켜버렸다고 하자. 그러나 프로가 아닌 자가 한 대 멋지게 상대방에게 펀치를 먹었다고 할 때, 그것은 프로 권투선수의 그것만큼 객관적이고 즉각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가 아닌 자는 그야말로 온몸으로 시합을 진행시킬 것이므로 활력만은 프로 권투선수보다 더 많이 발산시킬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프로 권투선수의 펀치를 단순히 권투선수의 펀치라고 말한다면, 프로 아닌 자의 펀치는 인간의 펀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서커스의 역사나, 장터에서 묘기를 보여주는 역기자들은 실은 건강한 몸들이 아닌 것이다. 상대방을 보기 좋게 쓰러뜨리거나, 무지무지하게 중량이 나가는 역기를 조금도 힘 안 들이고 번쩍 들지만, 그러나 실제 에 있어서는 폐결핵이나 소화불량증으로 죽고 만다.
철학자가 만약에 인간적이 아니라면 그는 이미 철학자가 아닌 것이다, 그저 단순히 아는 체하는 자일 뿐이다. 다시 말해 서 인간의 모형물일 뿐이다. 과학이나 물리학이나 기하학이나 그 어떤 학문이든지 연마를 하면 극히 제한적이면서 매우 좁은 영역 속에 갇힌 세분화된 학문으로 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철학은 시나 마찬가지로 완성된 작품이고 완전히 체계로 연결된 학문이다. 만약에 그렇지가 않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사이비 철학일 것이고 또한 위조 학문일 것이다.
지식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목적이 있는 법이다. 알기 위해 알려고 한다는 것은 누가 뭐라고 말하든가에 원칙적으로 매우 침울한 요구 사항이다.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또는 우리들의 나머지 지식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 어떤 것을 배우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매우 이론에만 치우친 감이 있어 보이는 학설까지도, 다시 말해서 지적이 필요성-즉각적으로 적용이 되지 못하는 학설까지도, 어떤 지적인 필요성-역시 필요성은 있는 것이다-이나 사고하는데 있어서 경제적인 이성이나 의식의 단일성이나 연속성의 원칙에 효과적인 반응을 보여준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은 기타 다른 지식들 속에서도 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포옹해야만 그 존재가 가능한 철학은 다른 외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은 우리 문명에 대해서, 그리고 삶과 우주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철학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문제는 지적인 필요성과 융합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모순에 직면하는지 어디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말한다면 어떤 통치자가 어떤 때, 비록 불분명한 방법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물들의, 특히 인간들의 첫 번째 원칙과 최종 목적에 대해서, 특히 인간들의 첫 번째 이유와 최종목적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다.
이 최대의 걱정은 단순히 합리적 또는 이성적일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유하는 것만 가지고는 춘분하지가 않다. 우리의 문명에 감지해야만 한다. 같은 인간들을 지휘하려는 자가 초자연적인 사물들을 조심없이 다룬다고 말하거나 선언한다면, 이미 그는 그들을 지휘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것은 더 이상 논의할 여지조차 없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해결책은 강구해야되지 않을까? 해결책이라니?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단 말인가?
만약에 나의 경우라면, 결코 그러한 민족의 지도자에게 마음을 주면서 기꺼이 승복을 하지는 않겠다. 즉 한 민족을 지도함에 있어서 인간들을, 살과 뼈의 인간들을, 태어나고 괴로워하고 죽어야만 되는 인간들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는 지도자를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 인간들은 그들 자신에 있어서는 그들이 단지 수단뿐만 아니라 목적도 된다. 그러니까 이 인간들은 그들 자신들로서의 그들이지 결코 타인들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할 것 같으면, 인간들의 한 세대가 다음에 오는 세대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비록 이 희생 당하는 세대가 아직 감정을 못 느껴도 말이다. 더 자세히 말해서, 이 희생 당하는 세대가 기억력이나 이름이나 또는 그들 자신에 대해 아무런 느낌을 못 가져도 말이다.
인간이 자기 후손의 장래를 바라보며 산다거나 자기의 업적이나 우주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헛된 노고다. 이러한 짓은 어리석은 감정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만이 기꺼워할 노릇이다. 그렇더라도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두뇌가 더 우수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소위 위대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어리석은 감정의 소유자일 수가 있고, 게다가 정신박약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몇 가지 경우를 들어보자.
재능은 있지만 감정이 어리석은 자들은 흔히 말하기를, 모르는 일에 깊이 빠지려 할 때는 자극이나 충동에 대해서 계속해서 발길질을 해야한다는 것은 소용없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다리 하나를 절단 수술을 받아야 될 사람에게 아무리 수술 받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그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느끼는데,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체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위선자 바로 그 사람이다.
어떤 아는 체하는 친구가 솔론(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 그리스 7현인의 사람)이 아들 하나를 잃고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도대체 왜 우는 거지? 아무리 울어야 소용이 없는 일인데……" 하고 그야말로 별미 적은 소리를 하니, 그 현인이 대답하기를 "바로 그것일세. 내가 우는 것은 아무리 울어도 소용이 없으니까 우는 거란 말일세" 하더란다. 물론 우는 것도 약간은 소용이 된다.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니까 말이다. 그러나 솔론이 그 무례한 친구에게 대답한 말에는 깊은 뜻이 들어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거리에 뛰쳐나가서, 우리의 고통을 다시 말해서 단일성을 가진 우리의 공통적인 고통을 탁 털어놓은 하소연한 후에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면서 하늘을 바라보면 소리 높여 신을 부른다면은 일들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다. 비록 신이 우리의 고함소리를 듣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일 것만은 틀림없다 할 것이다. 성전안에도 가장 신성한 곳은 모두들 공동으로 가서 울음을 터뜨리는 곳이다. 운세레(〈시편〉 51편 다윗의 시) 야말로 철학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본다. 페스트를 치료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페스트에 걸려 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면서 울어야 된다. 그렇다!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지식인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 까닭은 솔론에게 물어볼지어다!
이 세상에는 삶 자체와 만유를 품은 모든 개념, 즉 다소간 틀에 잡혀있고, 다소간 의식할수 있는 철학 전체가 뒤에 딸린 그 어떤 것이 있다. 이것을 명명할 만한 별다른 이름이 없으니 우선 아쉬운 대로 ‘삶을 비극적 감정’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감정은 비단 개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가질 수도 있고, 또 실제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감정은 관념에서 발생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관념을 결정짓는다. 비록 나중에 가서 이 관념이 그 감정에 대해 반작용을 가할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반작용은 그 감정을 더욱더 확인시켜줄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우발적인 병, 예를 들어 소화불량에서 오는 경우도 있는 것이고, 또 어떤 때는 체질적으로 생기는 수도 있다 하겠다.
그러니까 앞으로 보면 알겠지만, 건강한 사람이니 건강치 못한 사람이니 하고 논한다는 자체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건강에 대한 표준적인 개념이 없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아무도 이때까지 인간이 천성적으로 명랑 쾌활해야 된다는 것을 증명하지를 못하였으니 말이다. 허나 그뿐인가.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당나귀나 개에 비해서 이미 병자의 몸인 것이다. 의식은 하나의 병이기 때문이다.
살과 뼈의 인간들 중에서 삶의 비극적 감정을 지닌 사람들의 전형적인 사례를 볼 수가 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사람들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파스칼, 루소, 칼뱅, 오버만, 톰슨, 레오파르디, 비니, 르노, 클라이스트, 아미엘, 켄탈, 키에르케고르 등 과학보다는 지식을 머리에 더 넣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의 어떤 사람이 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하여서나, 또는 어쩌면 권력자들이나 상사들의 눈에 들기 위하여 그의 태도를 정하는 자가 있었다는 것을 믿는 자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의도를 탐색하는 인간처럼 소심하고 가련한 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질적으로 생각하는 자야말로 곧 악마’인 것이다. 내가 여기에다가 굳이 프랑스 격언을 사용하는 까닭은 시시한 격언을 사용하는 까닭은 시시한 격언을 인쇄하지 않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말해서 가장 정열적이지만 그러나 어쩌면 조잡하다 할 수 있는 스페인 격언을 인쇄하지 않기 위해서다. 민족들 중에서도 삶의 비극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시작부터 이 일에 착수하기로 하자.
우나무노/생(生)비극적 의미 Unamuno Y jugo, Miguel de ; Del sentimiento tragico de la vida en los hombress y en los pueblos에서
참고 자료
우나무노(1864~1936)
에스파냐의 철학자 ·시인 ·소설가.
북부의 항구도시 빌바오 출생. 1891년에 살라망카대학의 그리스어 및 문학교수가 되었으며, 그 이후 이른바 ‘1898년대의 작가’의 지도적 중심 인물로서 문학 ·사상 양면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하여, ‘남유럽의 키르케고르’라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01년 이 대학의 총장이 되었으며, 한때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에 의해 추방당하기도 하였으나, 그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다시 대학으로 복귀하였다. ‘뼈와 살’을 겸비한 개인이야말로 참다운 살아있는 실재라고 주장하고, 신앙과 이성 그리고 생활과 사상의 배반 ·대립속에서 생의 비극을 간파하였으며, 이의 상징으로서 돈키호테를 논하였다.
주요저서로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생애 Vida de Don Quijote y Sancho》(1905) 《생의 비극적 감정 Del sentimiento tr怖gico de la vida》(1912) 이외에 소설로서 《안개 La Niebela》(1914) 《아벨 산체스 Abel S怖nchez, una historia de pasi袍n》(1917) 《세 모범소설 Tre novelas ejemplares》(1920)과 시 《벨라스케스의 그리스도상 El Cristo de Vel怖squez》(1920) 등이 있는데, 모두 실존적인 생의 문제를 테마로 하였다. 한편 수많은 에세이에서 끊임없이 ‘에스파냐는 무엇이냐’고 물으며, 조국의 지적 부흥을 외쳤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면 미겔 데 우나무노(1864~1936)는 스페인의 공업 도시 빌바오에서 중류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중학생 시절부터 철학 서적을 탐독하여 칸트, 헤겔, 데카르트에 심취 하였다. 열여섯 살 되던 해에 마드리드 국립대학 철문학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고, 20세에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그의 천재적인 재질을 인정받은 것은 논문 '바스크 언어에 관한 연구'였다. 1891년에 실라망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콘셉숀 리사라가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우나무노의 충실한 반려자였다. 1901년 우나무노는 살라망카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우나무노는 연합군측을 두둔하면서 독일을 맹렬히 공박하였고 이와 같은 이유로 총장직을 물러났다. 우나무노는 전생애를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굳건히 지키고 행동으로 보이기도 조금도 주저치 않았던 열성자였다.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모든 사람들이 영생 (永生)에 대해 불안해 하면서 열망하는 것, 즉 '생명과 그 후'였다.
철학자였던 우나무노는 '국수주의에 관하여' '동키호테와 산조의 삶' '나의 종교와 기타 논문집' '그리스도교국의 고뇌' 등의 철학서를 저술했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핵심적인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그 공통적인 주제를 구체적인 인간이 불멸성에 대해 품고 있는 열망과 스페인에 대해 느끼고 있는 그의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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