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 아우렐리우스
by 송화은율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이른 아침,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오늘도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 은혜를 모르는 사람, 거만한 사람, 남을 속이거나 중상하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이러한 악덕(惡德)은 선악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질은 아름답고 악의 본질은 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잘못 범하는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 혈통을 같이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성(理性)과 신성(神性)의 일부를 나누어 갖는다는 뜻에서 동류지(同類者)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해를 입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내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추악한 일에 빠져들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동류자들에게 화를 내거나 그들을 기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손발이나 눈시울이나 아래윗니처럼 서로 협력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며 모두 이 섭리와 관련이 있다. 만물은 그 섭리에서 흘러나오고 우주 전체의 이익도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밖의 모든 것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본성을 계속 간직하는 것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신의 섭리인 자연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자연의 한 속성(屬性)이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것은 부분적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도 변한다. 그런 원리를 이해하고 또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그에 따라 행동하라. 자연의 변화에서 만족을 찾으라. 그리하여 고뇌없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신들에게 감사하며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은 지금까지 이 우주의 작은 부분으로서 존재하여 왔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을 태어나게 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당신은 변화에 의해 생성(生成)의 원리 속으로 되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천년이나 만년이라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지금도 죽음은 다가오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아직 능력이 있을 때 선한 일을 하라.
이웃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관심을 쏟고 그 일이 정당하고 신의 뜻에 합당한가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시간과 수고를 절약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타락한 모습을 돌아봄이 없이 곧장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날아갈 뿐이다.
사후에 명성을 남기려고 연연해하는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떠한 명성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설사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그들의 기억 역시 영원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당신이 이미 죽은 후에 그들의 찬양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살아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고작해야 어떤 편의(便宜)가 제공될 뿐이다. 아무튼 당신이 후세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을 소모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연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현재를 잘못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든 아름다운 것은 결국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체에 본성이 있는 것이지 어떤 외부적 요소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찬양이 아름다움이란 본질의 일부분이 될 수는 없다. 찬양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연물, 예술 작품, 자연 현상 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그런 찬사가 필요하지 않다. 법칙이나 진리, 자비심, 겸손 등이 찬양을 받았다고 해서 더 미화되고 비난을 받았다고 해서 손상되는가? 또 금이나 상아, 자수정, 하프, 단도, 관목 등도 그러하단 말인가?
만약, 죽은 후에도 영혼이 소멸되지 않고 남는다면 대기는 어떻게 태고적부터 이 수만은 영혼들을 수용해 왔을까? 그리고 육체가 썩지 않는다면 대지는 어떻게 아득한 옛날부터 그 속에 매장된 시체들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시체들은 한동안 땅속에 머물러 있다가 이윽고 분해되어 다른 시체에 장소를 비워 주는데, 이처럼 영혼도 얼마 동안 대기 속에 머물러 있다가 변화하고 분해되어 우주의 창조적 원리에 따라 불과 같은 성질이 되었다가 이윽고 새로운 영혼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아마도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서 매장되는 시체의 숫자만큼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매일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그들의 육체에 묻히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된 동물들은 그들을 잡아먹은 동물들의 피와 공기와 물과 같은 성분으로 변하여 사라진다. 이처럼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이용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과 형상 및 형상적인 것의 원인을 구분짓는 분석법으로써 알 수 있다.
철학자 테모크리토스는 '마음의 평정을 얻고 싶다면 많은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필요한 일만 하라. 사회적 동물로서의 이성이 요구하는 일만을 이성에 따라 행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정을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휼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오는 마음의 평정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거의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시간을 즐기게 되고 반면에 근심이나 불안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이 일은 꼭 필요한 것인가?' 라고 물어 보라. 또 우리는 불필요한 행동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사상까지도 깨끗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류(萬有)로부터 주어진 자기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사람, 올바르게 행동하고 자신의 인자한 성품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런 선인의 생활이 당신에게도 적합한지 한번 시험해 보라.
당신은 저 여러 가지 일들을 본적이 있는가? 보았다면 이제는 사물의 다른쪽 면을 보라.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단순한 마음을 가져라. 누가 당신에게 피해를 주는가?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밖에 안 되니 상관하지 말라.
아우렐리우스/명상록Marcus Aurelius ; Ta eis heautond에서
이해와 감상
'명상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황제의 입장을 떠나 한 사색하는 생활인,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자신의 사상과 체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로서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스스로 인생을 올바로 살기 위하여 경계한 것, 행한 일을 반성하고 스토아적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충고한 것, 귀감이 될 만한 다른 사람의 글을 발췌한 것 등으로 그 내용이 구성되어있다.
이 글은 그때그때 체험에서 우러나온 단상(斷想)들을 바쁜 틈틈이, 즉 전시(戰時)의 진중이나 청사를 돌보는 사이에 쓴 것이며, 어릴 때부터 익혀 온 수사학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 아름다운 문장이라 평가된다.
편의상 전체를 12권으로 나누고 있지만 일정한 기간에 어떤 주제를 놓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 논리적인 체계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 철학의 사상적 기반은 이 책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함으로 내용상으로는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체계화된 사상일수록 그 사상의 내용에 우주론, 인간론, 그리고 정치 사회론 을 모두 담고 있어야 하며, 이 게 가지는 상호 모순됨이 없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명상록'은 단편적인 철학적 수상(隨想)들을 모아놓은 것임에도 위의 세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으며, 글을 읽어 내려감에 따라 각 구절마다 이에 그의 사상적 깊이를 새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사상은 그가 평생을 두고 연구하고 고민했던 스토아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삶의 국면을 굳건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흔히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의 진수를 설명한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에픽테토스의 '어록(語錄)과 함께 고대의 양서로 손꼽히고 있다.
'명상록'은 어떤 초기 편집자에 의해 12권으로 분류되었는데, 첫째 권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뒤 섞여 있어서 각 권의 내용을 만족할 만하게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그 대략의 요점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제1권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로 배우게 된 교훈이 겸손하게 언급되어 있다. 제2권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제3권은 진정한 자유인 신에 대한 복종에 대해, 제4권은 기회의 부재에 대해, 제5권은 운명과 역할에 대해, 제6권은 내면적 삶의 절대적인 중요성에 대해, 제7권은 충동의 억제와 자기 만족의 추구에 대해, 제8권은 마음의 평정에 대해, 제9권은 자발적인 의지와 인간을 지배하는 운명에 대해, 제10권은 기인의 주변 환경과 그에 관한 성찰에 대해, 제11권은 이타주의(利他主義)에 대해, 제12권은 죽음에의 초월에 대해 씌어 있다.
제1권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터득한 것이 아니고 조상, 부모, 스승, 신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의 겸손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자기가 처한 위기, 상황, 환경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는 생활자세를 엿볼 수 있다.
제2권부터는 '명상록'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단편적인 글들이라 내용도 다소 중복되고, 또 축약된 말들이 있어서 어려운 곳도 있으나 앞에서 스토아 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을 읽었다면 아마 별 무리 없이 읽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자연, 즉 우주에 대한 견해부터 보기로 하자. 자연의 법칙인 운명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입장이듯이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고 사물과 관련이 있음을 명심하라.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본성을 계속 간직하는 것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명상록> 제2권 2장)
그리고 그는 인간이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살다 가는 덧 없는 존재라 하여, 각 권에서 명성이나 부(富) 등을 하찮은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죽은 후에 명성을 남기려고 연연해하는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떠한 명성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져버리고 만다…당신이 이미 죽은 후에 그들의 찬양은 무의미한 것이다.’(<명상록> 제4권 19장)
그는 또 죽음이란 것을 다른 사물로의 분해, 변화로 보았으며, 자연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해악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명상록 ’의 전반적인 특징을 한마디로 지적한다면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떠한 외부의 자극이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으며 평정을 누릴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라 하였다.
‘지금 당신이 외부적인 어떤 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당신의 판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명상록> 제8권 47장)
참고 자료
아우렐리우스와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에서는 ‘자연(Dbysis)’이라는 말이 잘 쓰인다. 보통 자연이라고 하면 산과 강과 대지와 짐승과 초목 등을 포함시켜서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이전의 헤라클레이토스(BC 전 535∼475)의 계통을 잇는 스토아 학파에서는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고 나서 거리로 돌아가는 근원적인 것, 또는 능산적 자연 (能産的 自然)을 의미한다. 또한 좁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자연이라든가 포도의 자연이라고 하는 경우처럼 사물의
‘본성(本性)’을 의미하기도 한다. 광의의 자연은 종교적으로 말하는 신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우주, 로고스, 운명과 동일한 개념이다.
스토아 학파는-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에서도-‘자연에 따는다’는 마을 자주 하는데 이것은 신, 또는 우주의 질서에 따르고 또는 그것에 합치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협의로는 각각의 본성에 따르고 그것을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예로 든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 곧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이성(理性)을 따르고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우주의 이성, 곧 광의의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간의 이성에 따르는 것은 우주의 이성에 따르고 자연의 본성에 따르는것이다. 자연이 대우주라면 인간은 그 일부분인 소우주이다. 이러한 스토아 사상이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주의」의 사상적 모태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다. 육체라는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되고 영혼이라고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되고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신과 공통된다. 스토아에는 영혼은 혈액에서 증발된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우주의 로고스의 한 조각이 인간에게 깃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성이 깃들어 있는 이상 인간은 다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별, 계급, 피부색깔, 국적을 넘어선 동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스토아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성이라고 한 마디로 말하지만 그 작용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론적으로 이론이성(理論理性), 도덕적으로 실천이성으로 가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가끔 이성을 헤게모니콘(지도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종교적 윤리적 색채가 농후한 후기 스토아세서 본심 또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온갖 욕망을 통제하고 지도하는 능력으로 스토아 철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외계(外界)는 모두 결정되어 있어서 불변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숙명적인 필연이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에서는 필연을 필연으로 인정하고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 외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외계는 우리의 의지 밖에 있어서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생각뿐이다. 그러나 일단 철저하게 마음과 생각을 바꾸면 외계가 변한 것과 동일한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마음의 전환은 행복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원소에의 해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나 결국은 원래의 것으로 복귀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조금도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곧 '무섭다고 하는 사념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공상을 제거한다면 죽음은 자연의 작용이다' '해체를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자연의 필연적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러한 전환을 이루면 죽음은 고통스럽거나 무서운 갓이 아니라 평범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스토아 철학은 영혼의 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원소로 해체된다고 한다.
한편 스토아에서는 자살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을 자연의 필연적 과정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으로서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면 죽는 것도 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완수하고 육체적으로 남의 폐를 끼칠 만큼 노쇠했거나 병에 걸리면 이 세상에서 떠나가라는 신의 신호로 알고 자살해야 한다. 이 경우 제멋대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닌 자살이야말로 우주의 질서, 신에 뜻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한 아타테이아 또는 아타락시아라는 말을 스토아 철학에서는 쓰고 있는데, 전자는 부동심(不動心), 무정념(無情念)이라는 뜻이고 후자는 평정(平靜)이라는 뜻이다. 외계의 사물은 본래 우주의 질서에 따라 변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외물을 뒤쫓고 있는 한 대해의 조각배처럼 번롱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음에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고 어떠한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음에 평화는 교란되지 않는다. 이 마음의 평화가 바로 인간의 행복인 것이다.
참고 자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121∼180)는 121년 로마에서 집정관 아니우스베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토니우스 황제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정치가로서의 삶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세 차례나 집정관을 지내면서 정치에 관한 식견을 넓혀 양부 안토니우스 황제를 도왔다.
그는 스토아 철학에 심취하여 나중에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 사상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명저인 명상록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161년 안토니우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는 일찍이 플라톤이 이상국가의 정치 형태로 제시했던 철인왕(哲人王)의 면모를 보여 왔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전염병 퇴치와 타락된 도덕의 회복을 위해 애쓰면서 지냈다.
그는 175년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자신의 부하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오히려 자비로서 용서해줄 기회를 잃은 것을 슬퍼할 정도로 적군까지도 사랑하려는 박애주의적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그간 재위 기간은 로마제국의 전성 시대로 일컬여지는 이른바 '5현제(賢帝) 시대'에 속하는데 96년부터 180년 사이인 이 무렵에는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 영토의 확장이 어느 시대보다 월등하였으며 아우렐리우스 역시 이전 황제들의 선정(善政)을 유지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색 혹은 명상의 황제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그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에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색의 기록이 바로 '명상록' 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 보면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재위 161~180)로 한자명으로는 안돈(安敦). 로마 출생.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 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에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 ·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 ·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 ·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스토아학파
키프로스의 제논이 스토아 포이킬레에 창설한 철학의 한 유파.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帝政)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古代)를 대표한다. 키프로스섬 태생의 개조(開祖) 제논과 그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인(人) 클레안테스, 그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섬의 파나이티오스,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강 하반(河畔)의 아파메아인 포세이도니오스,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 ‘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아파’(柱廊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古典期)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파와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고전기까지의 철학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일반화 ·통속화한 점에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기반에는 고전 철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로마시대 사람들의 저작을 제외하고는 스토아파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연구상 어려움이 있다.
애지(愛知:철학)는 논리 부문과 윤리 부문, 자연 부문으로 나뉘나,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분파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애지를 구성하는 3요소가 된다.
지혜는 ‘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지혜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에 스토아파의 특징이 있으며, 이 원리에 바탕을 두어 스토아철학은 고대철학원리의 주체적인 반성철학이 되었다.
애지(愛知)는 이러한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 ‘삶의 기술(ars vivendi)’의 연습이며, 이러한 재주를 갖는 사람이 현자(賢者)인 것이다. 그리고 현자의 지혜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충동’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병으로서의 정념(情念)이 있다. 이 정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데에 ‘활달한 삶의 흐름’이 있다. 스토아파의 현자의 이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스토익이라고 불리는 비정한 금욕주의적 심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의 유덕한 삶이란 이성을 갖춘 유한한 개개의 자연물(인간)이 자연에 의하여 부여된 그대로의 자기의 ‘운명’을 알고, 운명대로 살아감으로써 본원(本源)인 자연과 일치하는 ‘동의(同意)’의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그 자체가 이성적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귀환(自己歸還)에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모든 자연물의 근원인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과 일치한 자이며 신과 같은 자, 바로 신 그것인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존재에서의 개별성(個別性)과 전체성(全體性)의 두 계기의 강조와 양자의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스토아 철학은 고대철학 원리의 집성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철학원리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언어연구 ·논리학 ·인식론에서도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스토아 철학은 전통철학에 없었던 새로운 요소를 많이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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