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론 / 알랭
by 송화은율행복해지는 방법
아이들에게는 반드시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것은 불행이 머리 위로 떨어질 때에 행복하게 되는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은 스토아 학파에 일임하면 된다. 그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 않고, 인생의 괴로움이 일상적인 번거로운 일인 경우에 행복하게 되는 방법이다. 첫 번째 규칙은 현재의 것이든 과거의 것이든 간에 자기의 불행을 절대로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일이다. 두통, 구토, 불쾌, 복통,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리 부드럽게 이야기한다 해도 실례라고 간주해야 한다. 부정이나 오산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나 젊은이, 또는 어른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불평이 남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비록 남들이 그런 내막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거나 위로해 주기를 원할 때에도, 결국은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슬픔은 독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사랑하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기분을 북돋아 주지는 않는다.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은 가장 깊은 감정이다.
누구나 죽기보다는 살고 싶어하는 법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며 만족해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만일 저마다 재를 앞에 놓고 불평하기보다는 장작에 불을 지핀다면, 사회는 훨씬 풍요롭게 될 것이다.
이러한 규칙이 예의바른 사회의 규칙이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거기서는 제멋대로 떠드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권태를 느꼈던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 시민계급은 교제상의 대화에서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되찾을 수 있다. 이것은 몹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가 자기의 불행을 자유롭게 떠들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더욱 우울한 권태에 빠져들 뿐이다. 그러므로 교제의 범위를 가정 밖으로 확장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는 서로가 너무 허물없이 지내고 있으므로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불평을 늘어놓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남의 마음에 드려는 생각이 있다면 아무도 그런 사소한 일을 염두에 두지는 않을 것이다.
권력을 둘러싼 책략의 즐거움은 아마도 입밖에 내면 권태로워질 많은 사소한 일들을 잊게 되는 점에 있을 것이다. 즐겨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괴로움을 맛보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음악가나 화가의 괴로움과 마찬가지로 즐거움으로 변하게 된다. 더구나 책략가들은 우선 사고한 걱정거리를 입밖에 내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원히 그 일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나는 지금 문제삼고 있는 행복해지는 방법에 또 하나, 찌푸린 날씨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이로운 충고를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지붕 이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지붕의 골을 따라 빗방울이 졸졸 흘러내린다. 공기는 씻겨서 여과된 것 같다. 구름은 마치 솜씨 좋게 뜯어 놓은 솜과 같다.
이런 식으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비는 농작물을 망쳐놓는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또한 진창으로 모든 것이 더럽혀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풀밭 이에 앉는 즐거움을 비가 앗아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모두들 당연한 불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불평하는 그 비는 집안에까지 나를 쫓아온다. 그러므로 비가 내리는 날일수록 명랑한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궂은 날에는 얼굴만이라도 활짝 개도록 해야 한다.
행복해야 할 의무
불행해지고 불만을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남이 즐겁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왕자처럼 조용히 앉아 있으면 된다. 행복을 상품처럼 흥정하려고 하는 눈초리는 모든 것에 권태의 빛을 드리운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왜냐하면 거기에는 모든 선물을 경멸하는 일종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아이들이 뜰을 만드는 것처럼 보잘것없는 재료로 행복을 만드는 교묘한 작용에 대한 시기와 분노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도망친다. 나는 경험에 의해 스스로 권태에 빠져 있는 자들의 기분을 바꿔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와 반대로 행복은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어린아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자기를 위해 남이 놀아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물론 아이들도 화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 모든 기쁨을 거절한다는 얼굴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금세 잊어버린다. 문제는 어른이다. 누구나 변함 없이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어른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행복해진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많은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투쟁이다. 그 투쟁에서 패배할 때도 있다. 불가피한 사건이나 신출내기 스토아주의자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있다. 그러나 있는 힘껏 싸운 연후가 아니면 결코 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명백한 의무일 것이다. 특히 내가 굳게 믿는 것은 행복해지려고 바라지 않으면 행복하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선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그럴 만한 여건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
행복해진다는 것이 타인에 대한 의무라는 사실은 아직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행복한 사람만이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보상이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이 공기 속에 불행과 권태와 절망 등이 잔뜩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염된 공기를 참고 견디는 정력적인 본보기, 즉 공공 생활을 정화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며, 또한 전사의 영광을 바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해지려고 맹세하는 것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다. 또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권태와 슬픔과 불행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까? 남녀를 막론하고 행복이란-여기서는 자기를 위해 획득하는 행복을 뜻하지만-가장 아름답고 기분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나는, 행복해지려고 굳게 다짐한 사람에게 대한 포상으로서 월계관을 줄 것을 제안하려고 생각한 일까지 있다. 저 모든 시체, 모든 폐허, 쓸데없는 낭비, 경계를 위한 공세 등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었으며, 또한 행복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백안시 하는 자들의 소행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는 어이가 없을 만큼 둔하고 무거운 돌덩이 같은 아이였다. 그래서 슬픔과 권태 때문에 몸이 여위고 가벼운 아이들이 내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꼬집으면서 나를 업신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주먹으로 힘껏 한 대 갈겨서 일이 끝장이 나곤 했었다. 오늘날에는 본능적으로 전투 준비를 느꼈을 때에는 결코 그 이유 같은 따지지 않는다. 사람이 무사태평한 것을 시기하는 악당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화스러운 프랑스는 평화스러운 독일과 마찬가지로 여러 개구장이들에게 놀림을 받다가 나중에는 벌컥 화를 내는 건강한 어린이와 같은 것이다.
이해와 감상
이 프랑스의 철학자는 가장 비철학적인 학자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루앙과 파리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지낸 알랭은 체계적인 이론을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고 문예지 N·R·F에 매월 짤막한 수필을 썼다. 플라톤 칸트 데카르트 콩트 등에게서 그가 배운 것은 결코 학설이 아니었으며 대상을 살피는 능력이었다. 그 풍부한 교양과 유연한 지성은 그로 하여금 추상적 사상을 가지고 부질없는 장난을 하는 폐단을 지양케 하고 정치·경제·문학·교육 등 인간의 구체적 활동으로 정신을 돌리게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상아탑에 갇혀져 곰팡이내 나는 서적을 들추고 앉아 있는 학자가 아니라 거리에 뛰어 나와 생활을 맞이한 지성인이었다.
'행복론'은 어마어마한 철학적 저서가 아니다. 그는 구체적인 것, 일상적인 것을 소화하고 처리하는 유적인 공리공론을 배격한다. 1906년으로부터 1924년에 걸쳐 쓴 삼 편의 수필을 모아서 엮은 이 책은 우리에게 생활의 지혜를 베풀어주려는 것이다. 물론, 제1장부터 93장까지 차례차례 읽어 나감으로써 '알랭'이 펴나가는 행복의 이론을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지만, 아무데를 들쳐보아도 우리는 귀중한 권고를 얻을 수가 있다 가령, 우울할 때는 제38장의 '권태'라는 제목의 2,3페이지를 벗으로 삼고, 초조할 때는 제70의 '인내'를 충고자로 맞이하는 식으로 말이다. 책상에 앉아서 읽는 것보다는 누워서 읽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긴장을 푸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비근한 실례를 들어가면서 평이한 문장으로 꾸민 이 책은 일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스스로 행복의 길을 막는 긴장된 정신의 소유자를 위한 복음서이다. '알랭'은 이미 1912년에 자기가 고민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는데, 그 비결을 우리에게 다정스럽게 이야기해 주려고 한다. 그는 풍부한 경험과 깊은 통찰력을 가진 친절한 의사이며, 이 한 권의 책에 '정신의 보건학'이라는 별명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알랭'은 모든 자신있는 의사와 마찬가지로 괴로워하는 환자 앞에 자기의 깊은 학식을 늘어놓지 않고 병상을 정확하게 규명하려고 한다. 즉, 행복이란 무엇이냐는 식으로 직공법을 취하지 않고 행복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 왜 불행하게 느끼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려는 태도를 취한다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알랭은 과학적 합리주의자이다. 그는 아무리 복잡한 현상을 보더라도 그 근본적 이유를 단순한 곳에서 발견한다. 우선 제1장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유모가 별의 별 가정을 다 세워본다. 성격이 틀려 먹었다느니 부친을 닮아서 그렇다느니 하면서, 그러나 마침내 어린애의 몸에서 바늘 하나를 찾아내고 이것이 모든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노여움·슬픔·짜증·절망 등 그 숱한 해독적인 정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철학적 설교도 필요없고 우리의 마음속에 꽂힌 이 바늘 한 개를 가려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는 제1의 요건이다. 더구나 이 바늘은 무슨 신체적 장해에서 올 때가 많은 데 정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한없는 고민의 누각을 쌓아 올린다. 그래서 흔히들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고민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잠이 안 온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알랭'은 냉정하게 원인을 살필 것을 권고한다. 사실은 운동이 부족하니까 잠이 안 오고, 잠이 안 오니까 고민이 생겨, 심지어 인생을 비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 저녁의 30분의 운동이 염세주의자를 낙천주의자로 변신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알랭'은 자기가 몹시 싫어하는 '파스칼'을 예로 들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몸이 불편했던 파스칼은 별이 많은 것에 겁이 났다. 그런데 별들을 보고서 그가 느낀 불길한 전율은 아마도 창가에서 몸이 추웠기 때문에 왔을 것이다. 만일 건강한 시인이라면 별과 벗삼아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제4장.
그 다음으로는 항상 활동적이어야 한다. 부질없는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난감한 처지가 행복을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알랭'은 사상 자체의 효용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가이며, '소인곤거위불선' 이라는 공자의 의견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가령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경우가 그렇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한가한 사람의 생각이며 다급한 일이 생기면 곧 사라져 없어진다. 아마도 싸움터야말로 사람이 죽음에 대해서 가장 생각하지 않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삶을 충실히 꾸려 나갈수록 삶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감소된다는 역설이 태어난다 - 제37장'
이리하여 알랭은 집념과 고독을 부하고 행동이라는 고역 자체에서 행복을 찾기를 권고한다. 무엇보다도 자아를 캐보는 악습을 버려야 하며 눈을 외부로 돌릴 줄 알아야 한다. 절대로 정념의 웅변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 인간이 정념에 쏠리고 자의적 노력을 하지 않을 때에 종교와 숙명론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다. 비관적 태도는 기분의 문제이고 낙관주의는 주지의 소산이라는 그의 말은 생활의 복음서의 정신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바꾸어 말하면 불행해지기는 쉬우나 행복해지기는 어려운 것이며, 의지와 용기와 힘으로써 구체적인 장애를 하나하나 정복해 나갈 때 행복은 곧 덕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같이 '알랭'은 결코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 한 권의 책으로써 서민의 양식을 집대성해 놓았을 뿐이다. 재치있고 씹을수록 맛이 나는 그의 독특한 문장 속에는 생활인의 철학이 담뿍 담겨있다. 그것은 동시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내일 세상이 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들의 꿋꿋한 낙관주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미 세계명국어로 번역되어 만인의 반려가 된 이 책은 피로한 정신에 산뜻한 바람을 불어 넣어주고, 지친 몸에 강장제를 베풀어주려고 한다. '알랭'은 믿을 만한 의사이다.
알랭/행복론Alain;Propos surl le bonheur에서
참고 자료
알랭(1868∼1951)
프랑스의 철학자 ·평론가.
본명 平mile-Auguste Chartier. 필명은 중세(中世) 시인 Alain Chartier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노르망디의 모르타뉴 출생. 고향에서 엄격한 종교적 교육을 받았으나, 아랑송중학으로 옮긴 후 무신론적 사상으로 기울게 되었다. 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루앙, 콩도르세, 앙리 4세(世) 등 리세(고등중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작가인 A.모루아는 루앙 시절의 그의 제자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47세의 한 병졸로 참전하였다.
1906년에 《데페슈 드 루앙 D暴p泂che de Rouen》지(紙)에 《노르망디인(人)의 어록(語錄) Propos d’un Normand》을 3,098회나 연재하여, 행복 ·그리스도교 ·문학 ·미학 ·교육 ·정치 등에 관한 짧은 에세이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창시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또 그 당시 프랑스 사상계를 지배한 텐, 르낭, 생트뵈브의 결정론(決定論:d暴terminisme)을 경멸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칸트, 헤겔, 루소, 몽테뉴에 심취하여 그들의 사상을 훌륭하게 파악 ·발전시켰다.
즉, 정신 기능(機能)을 지성의 분석과 의지결정의 공동으로 포착하여, “잘 판단하는 것은 잘 행위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거기에서 인간 이성(理性)의 양식으로서의 고귀함을 평가하였다. 또한 판단의 자유야말로 권력이나 권위에 의한 인간의 부패에 대항(對抗)할 수 있는 원리임을 논술하여, 이 태도는 정치 ·예술 ·교육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가 말하는 이성은 단순히 철학 원리에 그치지 않고, 삶 전체의 근저가 되는 양식이었다. 그의 저작은 넓은 영역에 걸쳐, 철학자뿐만 아니라 문학자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주요저서에 《정신과 정열에 관한 81장 Quatre-vingt-un Chap滎tres sur l’esprit et les passions》(1917) 《예술론집 Syst憙mes des beaux-arts》(1920) 《행복론 Propos sur le bonheur》(1928) 《나의 사색의 자취 Histoire de mes pens暴es》(1936) 《종교론 Propos sur la religion》(1939) 이외에 《스탕달론(論)》 《발자크론》 등이 있다.
보조 자료
알랭(1868∼1951)은 필명이고, 본명은 에밀 사르티에(Emile Chartier). 노르망디의 모르타뉴 출생이다. 루앙 21세의 교수가 되어1906년 알랭이라는 필명으로 '루앙'지(祗)에 '한 노르망디 사람의 어록(語錄)'을 3,098회 기고 했다. 제1차 대전에 출정, '비전투원에게 주는 21어록'을 내어 애국주의자의 분격을 샀다. 복원(復員)후 파리의 앙리 4세 학교의 교수가 되어 만년에 병으로 은퇴할 때까지 교편을 잡았다. 'N·R·F'지(誌) 기고가로서 매호마다 '어록(語錄)"을 썼으며 그것이 추려져서 몇 개의 단행본으로 나왔다.
주요 저작은 '알랭 101어록' 5집, 1908년∼27 '알랭 어록' '미술어록' '행복론' '예술론집' '나의 사색의 자취' '종교론' '심정(心情)의 모험' 등이 있다. 철학자로서의 알랭은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및 은사 쥘르 라뇨(Jules Lagneau)로부터 가장 많이 배웠으며, 그것은 근본적인 것을 근본적으로 궁리해 낸다는 방향으로 활용되었고, 또 확고한 주의주의자(主意主義者)로서 판단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그의 윤리설·미학설도 거기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온건한 점진적 진보주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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