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새 인류의 조상 데우칼리온과 퓌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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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인류의 조상 데우칼리온과 퓌라

보이오티아 평원과 오이타 평원 사이에는 포키스라는 땅이 있다. 이 포키스 땅은, 땅이었을 시절에는 기름지기로 소문난 땅이었으나 홍수 이후로는 다른 곳이나 마찬가지로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로지 물뿐인, 말하자면 바다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 곳에는, 두 개의 봉우리는 별에 닿고 마루는 구름을 가르는 아주 높은 산이 있다. 이 산이 바로 파르나소스 산이다. 물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을 즈음 데우칼리온이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되는 퓌라는 조그만 배를 타고 이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데우칼리온은 그 많은 세상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바르고 의롭게 살아온 사람이었고 퓌라는 그 많은 세상 여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믿음이 깊은 여자였다. 데우칼리온 부부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코뤼쿠스의 요정들과 산신들과 테미스 여신에게 기도했다. 테미스 여신은 일찍이 신탁전에서 인류의 미래가 그렇게 될 것임을 예언한 적이 있는,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한 여신이었다.

 

유피테르는 물바다가 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그 많던 사내들 중에서 오직 하나, 그 많던 여자들 가운데서 오직 하나만 살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둘에게는 지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이 둘이야말로 직심(直心)스럽게 신들을 섬겨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피테르는 북풍에게 명하여 비구름을 쫓고 안개의 너울을 걷게 한 다음 하늘에서는 땅이, 땅에서는 바다가 보이게 했다. 이제 바다는 더 이상 성난 바다가 아니었다. 바다의 지배자가 파도를 구슬리고 삼지창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바다의 지배자 넵투누스는 역시 해신인 트리톤을 불렀다. 트리톤이 깊은 바다에서 솟아올랐다. 그이 어깨에는 조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넵투누스는 트리톤에게 뿔고둥 나팔을 불어 파도의 신들과 강신들에게 군호를 보내게 했다. 트리톤은 속이 빈 나팔을 들었다. 입을 대는 부분에서 앞으로 나갈수록 넓어지면서 나선형으로 배배 꼬인 나팔이었다. 트리톤이 바다 한가운데서 이 나팔을 불자 소리가 동서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두루 미쳤다. 트리톤은 다시 한번, 수염에서 떨어진 물로 흠뻑 젖은 입술에 나팔을 대고 불어, 모든 강신들에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군호를 보냈다. 이 소리는 땅과 바다를 점령하고 있던 뭇 강신들 귀에 고루 들렸다. 이 소리를 들은 파도라는 파도는 모두 돌아갈 길을 생각했다. 바다에는 다시 해변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불어났던 강물은 다시 물길로 돌아갔다. 홍수가 잡히면서 산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이 물러나자 대지가 일어섰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는 숲이 나무 꼭대기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뭇잎에는 뻘이 묻어 있엇다.

 

세상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테우칼리온은 적막에 잠긴 이 황폐한 땅, 공허한 땅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하는 아내 퓌라에게 말했다.

 

'내 아내이자 내 사촌이며, 이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퓌라여, 처음에는 혈육으로 인연을 맺더니 이윽고 혼인으로 인연을 맺은 퓌라여, 이제 이 위난이 또 한번 우리를 하나로 묶는구나. 이 넓은 땅, 해뜨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살아 있는 인간은 우리 둘뿐이다. 나머지는 바다가 앗아갔다. 우린들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막막하구나. 구름만 보아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구나. 가련한 아내여, 운명이 나를 앗아가고 그대만 남겨놓았더라면 그대 마음이 어떠하였으랴. 홀로 남아 있었더라면 두려움은 어찌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며 슬픔에 잠기면 누가 그대를 달랠 수 있었으랴. 그러나 나를 믿으라, 바다가 그대마저 앗아갔더라면 나는 그대 뒤를 따라 바다가 나까지 앗아가게 했으리라. 나에게 아비 되는 재주가 남아 있어서 자손을 퍼뜨리고 새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면 좀 좋으랴. 내게, 흙을 이겨 사람의 형상을 만들고 여기에다 숨결을 불어넣는 재주가 있다면 좀 좋으랴. 그러나 이제 인류의 운명은 우리 둘에게 달려 있다. 이것이 신들의 뜻……우리는 인류의 본으로 남은 것이다.'

 

이 말 끝에 두 사람은 서로를 부여안고 울었다. 데우칼리온 부부는 하늘의 신들께 기도하여 신들로부터 신탁을 얻어보기로 뜻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지체 없이 손에 손을 잡고 케피소스 강가로 갔다. 홍수 뒤끝이라 맑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강물은 얌전히 물길 사이를 흘러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강에서 물을 길어 머리와 옷에다 뿌리고는 테미스 여신의 신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전 지붕은 더러운 이끼와 뻘로 덮여 있었다. 제단에 향불이 켜져 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신전 계단에 엎드려 차가운 돌에 압맞추고는 이렇게 빌었다.

 

「신들의 마음이 신심있는 자들의 기도로 움직이고 부드러워진다면, 신들의 분노가 이로써 가라앉는다면, 일러주소서, 테미스 여신이시여, 어찌하면 인류가 절멸한 이 땅의 이 재난을 수습할 수 있을는지요. 자비로우신 여신이시여, 환란을 당한 저희들을 도와주소서……」

 

여신은 이들을 가엾게 보고 속삭이는 소리에다 뜻을 맡겼다. 여신이 맡긴 뜻은 이러했다.

 

「내 신전에서 나가 너희 머리를 가리고 의복의 띠를 푼 연후에 너희들 크신 어머니의 뼈를 어깨 너머로 던지거라」

여신께서 속삭이는 소리에 맡긴 뜻을 듣고도 두 사람은 어찌할 줄을 몰라 망연자실 한동안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것은 퓌라였다. 퓌라는 여신의 뜻을 따를 수 없노라고 말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여신의 용서를 빌었다. 휘라는, 뼈를 홀대하여 어머니의 신성에 누를 기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참으로 엉뚱하고도 애매한 이 여신의 뜻을 새기려고 묵상했다. 얼마 후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이 다음과 같은 말로, 겁에 질려 있는 에피메테우스의 딸을 달랬다.

 

「신의 뜻은 무류하신 법, 죄업 쌓을 말씀은 아니 하실 것이다. 내 짐작이 그르지 않다면, 여신의 뜻이 이르시는 어머니는 곧 대지일 것이요, 어머니의 뼈는 곧 돌이 아닐는지……우리에게, 여신께서는 어깨너머로 돌을 던지라고 하신 것일 게야」

티탄의 딸에게는 지아비의 짐작이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티탄의 딸은 실낱 같은 희망에 기댈 수가 없었다. 두 사람에게 하늘의 뜻이 그만큼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에멜무지삼아 좇아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은 여신이 맡긴 뜻이 이른 대로, 산을 내려가면서 옷으로 머리를 가리고 띠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다음 돌을 주워 어깨너머로 던져보았다. 옛 전승이 이를 증언하지 않았더라면 이로써 일어난 일을 믿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어깨 너머로 던져진 돌은 금방 그 딱딱한 본성을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말랑말랑해지자 돌은 일정한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변하면서 돌은 시시각각으로 커졌다. 돌은 커지면 커질수록 점점 더 인간의 모습을 닮아갔다. 그러나 아직은 또렷하게 인간의 모습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정질(定質)이 갓 끝났을 뿐, 마무리는 아직 되지 않은 대리석상, 혹은 미완성 석상 같았다. 잠시 뒤 습기가 있는 부분, 돌 중에서도 눅눅한 흙이 묻은 부분은 살이 되기 시작했고 딱딱한 부분은 뼈가 되기 시작했다. 돌의 결은 이름이 같은 베인으로 변했다. 시간이 좀더 흐르자, 은혜로워라, 신들의 뜻이여, 지아비가 던진 돌은 남자의 형상을 얻었고 지어미가 던진 돌은 여자의 형상을 얻었다. 우리가 힘드는 일도 수나롭게 해내는 강인한 족속인 까닭은 이로써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가 우리의 근원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므로.

심화 자료

테미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로, 티탄 신족(神族)의 한 사람. 제우스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호라이(계절의 여신들)와 모이라이(운명의 여신)의 어머니가 되었으며, 프로메테우스의 어머니라는 설도 있다. 어머니인 가이아로부터 예언술을 이어받아 델포이에 신탁소(神託所)를 가지고 있으며, 예언의 신 아폴론에게도 그녀가 예언술을 전수하였다. 테미스는 ‘율법’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제우스의 아내 노릇을 그만둔 뒤에도 그와 함께 정의와 질서를 주관하였다.

트리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해신(海神)으로, 역시 해신인 포세이돈과 정령(精靈) 암피트리테의 아들.

인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소라고둥의 명수이다. 바다가 잔잔할 때는 물위로 나와 소라고둥을 불어댔다. 아마 동양에서 생겨난 그리스 이전의 신인 듯하며, 시대가 지나면서 복수(複數)형인 트리토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전설에서는 모두 부차적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고 바다의 풍경화 등 예술의 장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내 아내이자 내 사촌

데우칼리온의 아버지 프로메테우스와 퓌라의 아버지 에피메테우스는 형제간이다. 따라서 이 둘은 부부간이자 사촌간이기도 하다.

흙을 이겨 사람의 형상을 만들고 여기에다 숨결을 불어넣는

이 데우칼리온의 아버지 프로메테우스는 이렇게 해서 인간을 창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티탄의 딸 : 에피메테우스가 티탄에 속하니까, 그 딸인 퓌라를 말한다.

돌의 결 : 베인

베인 : 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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