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 랭보(Arthur Rimbaud) / 김현 옮김
by 송화은율새벽 / 랭보(Arthur Rimbaud) / 김현 옮김
나는 여름 아침을 껴안았다.
궁전 앞에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은 죽었다. 망령들의 부대는 숲길을 떠나지 않았다. 생생하나 미지근한 숨결을 깨워 나는 걸어갔다. 보석들이 바라다보고 있었다. 날개들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신선하고도 흐릿한 빛으로 벌써 가득 찬 샛길에서의 첫번째 모험은 자기 이름을 나에게 말해 주는 꽃이었다.
나는 전나무 사이에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는 금발의 폭포를 보고 웃었다. 은빛 꼭대기에서 나는 여신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하나하나 베일을 걷어 올렸다. 길에서는 팔을 흔들어서, 평원에서는 수탉에게 그녀를 알려 주었다. 대도시에서 그녀는 종탑과 궁중 사이로 도망갔다. 거지처럼 대리석 부두를 달려가며, 나는 그녀를 쫓아갔다.
월계수 숲 가까이, 길 위에서 나는 그녀의 진한 베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거대한 육체를 조금 맛보았다 새벽과 아이는 숲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일어나자 정오(正午)였다.
요점 정리
작자 : 랭보(Arthur Rimbaud) / 김현 옮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상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감각적. 묘사적. 상징적. 동화적. 관능적.
표현 : 순진하고 순수한 분위기에 역동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음
구성 :
1연 새벽과의 우연한 만남
2연 고요한 분위기에서 깨어남
3연 모험의 시작. 꽃과 만남
4연 여신을 만남. 자연과 만남
5연 숨가쁜 추적. 자연에 대한 인식
6연 새벽의 정복과 합일(合一). 자연과 교감(交感)
7연 시간의 경과 - 정오. 자연과 대면 완료
제재 : 새벽
주제 : 순수하고 무구한 세계와의 만남. 새로운 세계의 탄생과 미지의 모험
의의 : 1873년에 발표된 랭보의 유명한 시집인 '착색 판화집'에 실린 작품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이가 원초적 순수함을 지닌 세상과 교감해 나가는 과정을 감각적인 언어로 표출하고 있다.
출전 : <착색 판화집>(1873)
내용 연구
(가)나는 여름 아침을 껴안았다. - 새벽과의 우연한 만남
(나) 궁전 앞에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은 죽었다. 망령들의 부대는 숲길을 떠나지 않았다. 생생하나 미지근한 숨결을 깨워 나는 걸어갔다. 보석들이 바라다보고 있었다. 날개들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 고요한 분위기에서 깨어남
(다) 신선하고도 흐릿한 빛으로 벌써 가득 찬 샛길에서의 첫번째 모험은 자기 이름을 나에게 말해 주는 꽃이었다. - 모험의 시작
(라) 나는 전나무 사이에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는 금발의 폭포를 보고 웃었다. 은빛 꼭대기에서 나는 여신을 알아보았다. - 여신을 만남
(마) 그리고 나는 하나하나 베일을 걷어 올렸다. 길에서는 팔을 흔들어서, 평원에서는 수탉에게 그녀를 알려 주었다. 대도시에서 그녀는 종탑과 궁중 사이로 도망갔다. 거지처럼 대리석 부두를 달려가며, 나는 그녀를 쫓아갔다. - 숨가쁜 추적
(바) 월계수 숲 가까이, 길 위에서 나는 그녀의 진한 베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거대한 육체를 조금 맛보았다 새벽과 아이는 숲 아래로 떨어졌다. - 새벽의 정복과 합일(合一)
(사) 다시 일어나자 정오(正午)였다. - 시간의 경과(正午)
나는 여름 아침을 껴안았다. : 아이가 원초적 순수 상태의 세상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궁전 앞에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 날개들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 이른 새벽에 자연 현상들을 자각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물을 처음 대하게 되는 시적 자아가 사물이 깨어나는 과정(인지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궁전', '날개', '보석'은 세상의 모습이며 '망령들의 부대'는 밤 사이에 숲을 점령한 어둠을 의미하고, '날개들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는 시적 자아가 원초적 순수 상태의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연이 깨어나는 상태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망령들의 부대 : 밤 사이에 숲을 점령하고 있었던 어둠을 의미한다.
신선하고도 흐릿한 빛 : 여명(黎明)을 의미한다.
신선하고도 흐릿한 빛으로 - 나에게 말해 주는 꽃이었다. : 시적 자아가 첫번째 대상과 만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나는 전나무 사이에서 - 여신을 알아보았다. : 사물을 인식하는 두 번째 과정으로 어린이와 자연이 합일 상태를 이루어 도취의 경지에 처해 있음을 환기한다.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그리고 나는 하나하나 베일을 걷어올렸다. - 나는 그녀를 쫓아갔다. : 시적 자아가 자연의 존재를 하나하나 인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적 자아는 인식된 자연을 수탉에게 알려 주고 대도시에서, 대리석 부두에서 점차로 자연을 더 인식하게 된다.
종탑 : 꼭대기에 종을 매달아 치도록 만든 탑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나'라고 지칭되어 있는 시적 화자는 '아이'이다. 이 점은 6연에서 '새벽과 아이는 숲 아래로 떨어졌다.'라는 구절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시의 제목인 '새벽'은 원초적인 순수 상태의 세상을 의미하며, 따라서 '나는 여름 아침을 껴안았다.' 라는 구절은 '아이'가 그 원초적 순수 상태의 세상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이후 시의 진행은 '아이'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과 시선으로 원초적 순수 상태의 세상과 교감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궁전', '보석', '날개', '꽃' 등의 시어들은 모두 '아이'가 이 세상의 사물을 동화적이고 신비한 모습으로 느끼고 있음을 표상한다. 그 동화적이고 신비한 세상의 모습을 4연에 이르러 다시 '여신'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신비감과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다. 그리고 6연에 이르러서는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인 '아이'가 원초적 순수 상태의 '세상'과 온전한 합일을 이루는 경지를 보여 준다. 특히 '아이'와 '세상'과의 합일의 순간을 남녀 간의 사랑으로 묘사함으로써, 순수한 세계와의 합일을 원초적 감각의 순수함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다시 일어나자 정오였다.'라고 끝맺음으로써, 순수한 자아와 원초적 순수 세계와의 교감과 합일이 상상 속의 세계나 추억 속 어린 아이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아름다운 시는 우리 모두에게 순수하고 무구한 세계와의 만남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감상 2
이 시는 미지의 세계가 밝혀지는 순간인 '새벽'을 주제로 하였는데 이 시에서 새벽은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여신의 모습이다.
(가)는 이 시 전체의 주제 연으로, 마치 승리의 외침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주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세계의 깨어남이고, 다른 하나는 시적 자아에 의한 이 광경의 목격이다.
(나)에서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세계 속을 걸어가는 시적 자아가 표현되어 있다.
(다)는 모험의 첫 단계를 말해 준다. '자기 ~ 꽃과의 대화가 가능한 어린아이의 순진하고 순수한 모습을 보여준다.
(라)의 헝클어진 머리는 폭포의 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환기시키고 시적 자아의 기쁨의 순간을 표현한 아이의 웃음은 폭포의 물소리를 환기시키는데, 이 폭포는 숲으로 쏟아지는 빛줄기를 가리킨다. 새벽은 '여신'으로 표현되었고, 관능적이면서 동시에 신성한 이미지로 볼 수 있다.
(마)에는 사라져가는 새벽을 붙잡기 위해 '숲-평원-대도시-부두'로 매우 숨가쁘게 달려가는 시적 자아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담겨 있다.
(바)는 새벽을 정복한 시적 자아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월계수숲'은 이러한 승리의 분위기에 맞게 선택된 장소이다. 여신과의 합일(合一)이라는 관능적인 이미지로 미지의 세계의 정복과 깨달음의 순간을 보여 주고 있는 이 부분은, 그러나 아직 그 정복이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또한 보여 주고 있다.
(사)는 (가)와 대응을 이루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여기에서 독자는 시간이 새벽에서 정오로 이어지는 엄청난 시간상의 비약을 보이는데 이는(나)부터 (바)까지의 과정이 시적 자아로서는 시간이 멈추는 황홀한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심화 자료
랭보(Jean-Nicolas-)Arthur Rimbaud
프랑스의 시인. 베를렌, 말라르메와 함께 상징주의의 선구자로 꼽힌다. '시인이란 모든 감각의 오랜, 거대하면서도 이론적인 뒤틀림에 의해 견자(見者)가 된다.'는 이른바 '견자 시론'을 발표하였다. 삼라 만상을 객관적인 이미지로 포착하는 특성을 지닌 경향을 보이는데 대표 작품으로 "지옥에서 보낸 한철", "레 일룸미나시용"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착색 판화집> 등이 있다. 1854. 10. 20 프랑스 샤를빌~1891. 11. 10 마르세유.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모험가.
어린시절
랭보는 프랑스 북동부의 아르덴 지방에서 육군 대위와 그 지방 농부의 딸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1살 위였고, 여동생은 2명이었다. 1860년 랭보 대위는 아내와 헤어졌고, 아이들은 어머니가 키우게 되었다. 일찍부터 남다른 지적 능력을 보인 아르튀르는 8세 때부터 타고난 글재주를 보였다. 나중에 그는 샤를빌 중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그는 특히 라틴어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870년 8월에는 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시로 1등상을 받았다. 그가 처음 발표한 시는 1870년 1월 〈르뷔 푸르 투스 La Revue pour Tous〉에 실렸다.
1870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프로이센전쟁 때문에 그의 정식 교육은 막을 내렸다. 8월에 그는 파리로 달아났지만, 차표 없이 여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며칠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그의 옛날 은사가 벌금을 대신 물어주고 그를 두에로 보냈다. 두에에서 그는 국민군에 들어갔다. 10월에 그는 다시 사라져, 침략군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를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는 다시 두에에 도착하여 2주일 동안 자유와 굶주림과 거친 생활 속에서 쓴 시들을 다듬었다. 삶과 자유 속에서 느끼는 천진난만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들은 그가 처음으로 쓴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이다. 어머니의 고발로 그는 다시 경찰에 잡혔지만, 1871년 2월 그는 손목시계를 팔아 다시 파리로 가서 2주일 동안 거의 굶다시피하며 보냈다.
반항과 시적 환상
3월초에 그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에 쓴 시들을 가짜라고 내팽개치고, 삶에 대한 혐오감과 순진무구한 세계로 달아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선과 악의 투쟁의식을 표현한 거칠고 불경스러운 시를 썼다. 그의 행동도 그가 쓴 시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그는 종교와 도덕 및 온갖 종류의 규율에 대한 의식적인 반항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하루 종일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동시에 그는 신비주의 철학과 밀교(密敎) 및 마술과 연금술에 대한 책을 읽었고, 2통의 편지(1871. 5. 13, 15)에 표현된 새로운 미학을 형성했다. 특히 2번째 편지는 〈견자(見者)의 편지 Lettres du voyant〉라고 불리는데, 이 제목은 시인이란 무릇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볼 수 있고 개인의 인격에 대한 인습적 개념을 형성하는 모든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림으로써 영원한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 즉 '견자'(voyant)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1871년 8월말 랭보는 샤를빌의 한 문우의 충고에 따라 시인인 폴 베를렌에게 그의 새로운 시를 몇 편 보냈다. 그중에는 각 모음에다 다른 색깔을 부여한 소네트 〈모음 Voyelles〉도 들어 있었다. 베를렌은 이 시들의 탁월함에 깊은 인상을 받고, 랭보에게 여비를 보내어 파리로 초대했다. 갑자기 폭발한 자신감 속에서 랭보는 〈취한 배 Le Bateau ivre〉를 썼다. 이 시는 전통적인 작시법을 따르고 있지만, 깊은 정서적·영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서 언어구사의 기교가 놀랍고 상징과 은유의 선택이 대담하기 짝이 없다. 이 걸작에서 랭보는 그의 예술의 가장 높은 정점들 중 하나에 도달했다.
1871년 9월 파리에 도착한 랭보는 3개월 동안 베를렌 부부와 함께 지내면서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을 거의 다 만났지만, 거만하고 버릇없는 태도와 음탕함으로 베를렌만 제외하고 그들 모두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떠나라는 요구를 받자 술을 퍼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으며, 베를렌과 동성애 관계를 맺어 추문을 일으켰다. 1872년 3월 그는 베를렌이 아내와 화해할 수 있도록 샤를빌로 돌아갔지만, 5월에 다시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이제 그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맹세했다.
이 시기에(1871. 9~1872. 7) 랭보는 운문으로 된 마지막 시를 썼는데, 이 작품은 기법의 자유분방함과 독창성에서 뚜렷한 진보를 보이고 있다. 이때 그는 베를렌이 걸작이라고 격찬한 〈영혼의 사냥 La Chasse spirituelle〉이라는 작품도 썼지만 이 작품의 원고는 베를렌과 랭보가 영국에 갔을 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부 비평가들은 초월적인 산문시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도 이 창조적인 시기에 쓴 작품으로 보고 있지만, 랭보 자신은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어떤 시에도 날짜를 적지 않았다.
1872년 7월 베를렌은 아내를 버리고 랭보와 함께 런던으로 도망쳐 소호에서 살았다. 랭보는 이곳에서 〈일뤼미나시옹〉의 일부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지내러 집으로 돌아갔지만, 1873년 1월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랭보의 동정을 사기 위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연극을 했다. 4월에 랭보는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머물고 있는 샤를빌 근처의 로슈에 있는 농장으로 가서 스스로 "이교도의 책, 또는 흑인의 책"이라고 부른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국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이라는 작품이 되었다. 1개월 뒤, 그 근처에 머물고 있던 베를렌은 랭보를 설득하여 함께 런던으로 갔다. 랭보는 베를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거기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고, 이 죄의식 때문에 베를렌을 가학적일 만큼 잔인하게 다루다가도 금방 그것을 뉘우치고 다정하게 대하곤 했다. 두 사람은 자주 말다툼을 벌였고, 마침내 7월초 베를렌은 랭보와 다툰 뒤 그를 버리고 벨기에로 가버렸다. 그러나 아내와 화해하는 데 실패한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랭보를 불러온 다음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그래도 랭보가 떠나려고 하자 베를렌은 랭보에게 총을 쏘아 손목에 상처를 입히고, 다시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다. 베를렌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나중에 재판에서 2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랭보는 곧 로슈로 돌아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정신이 지옥에 떨어지고 예술과 사랑에서 실패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1873년 가을 벨기에에서 인쇄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파리에서 호평을 받지 못한 데다 인쇄업자에게 돈을 줄 수도 없게 되자, 그는 인쇄된 책을 모두 포기하고 원고와 서류들을 샤를빌에서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책을 여러 권 묶은 꾸러미가 1901년에 벨기에의 장서가인 레옹 로소에게 발견되었는데, 그는 이 사실을 1915년에야 공표했다.
1874년 2월 랭보는 난폭하고 자유분방한 시인 제르맹 누보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잡역을 하여 번 쥐꼬리만한 돈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랭보는 이때에도 〈일뤼미나시옹〉의 일부를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보는 6월에 파리로 돌아갔고, 랭보는 병에 걸렸거나 가난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었던 것 같다. 7월말에 그는 버크셔 주 레딩에 있는 합승마차 매표소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집으로 간 뒤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랭보는 1875년초에 베를렌을 마지막으로 만났고, 이 만남도 역시 격렬한 말다툼으로 끝났다. 랭보가 베를렌에게 〈일뤼미나시옹〉 원고를 준 것은 아마 이때였을 것이다.
여행가와 무역상
1875~76년에 랭보는 독일어·아랍어·힌두스타니어·러시아어를 배우고 세상을 구경하러 떠났다. 1879년 6월까지 그는 걸어서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서인도 제도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에 입대했다가 탈영했고, 독일 서커스단과 함께 스칸디나비아로 갔고, 이집트를 방문했으며, 키프로스 섬에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매번 병에 걸리거나 다른 어려움을 만나 고통을 겪었다. 1879년 겨울 내내 장티푸스와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방랑생활을 그만두고 장래계획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봄에 키프로스 섬으로 돌아간 그는 건축업자의 현장감독으로 취직했지만, 곧 그 일을 그만두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아덴에서 커피 무역상에게 고용되어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에 들어갔다. 이 탐험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프랑스 지리학회 회보(1884. 2)에 실려 약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885년 10월 랭보는 저금을 털어 셰와(에티오피아의 일부)의 왕인 메넬리크 2세에게 무기를 팔기 위한 원정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메넬리크 2세는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인 요한네스 4세와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88년 중엽에야 겨우 기반을 잡는 데 성공했고, 요한네스 4세가 이듬해 3월에 살해당하고 메넬리크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에는 총포 밀수로 얻는 수입이 계속 줄어들었다. 에티오피아에 있는 동안 그는 가장 가난한 원주민만큼 소박하게 살면서, 언젠가는 은퇴하여 느긋하게 살 수 있는 돈을 모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는 인색했지만 남에게는 드러나지 않게 너그러웠고, 그가 원주민 여인과 함께 살던 작은 집은 에티오피아에 사는 유럽인들의 집합 장소가 되었다. 그는 외국어를 배우는 데 타고난 재주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에티오피아인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정직성과 성실함으로 추장들의 신뢰까지 얻었으며, 특히 메넬리크의 조카인 하레르 총독은 그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가 이 시기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애정과 지적인 친구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 있다. 1891년 봄 그는 신부감을 찾기 위해 고국에 가서 휴가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해외에서 살고 있던 이 시기에 그는 프랑스에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베를렌은 〈저주받은 시인들 Les Poetes maudits〉(1884)에서 그에 대해 썼고, 그의 시를 발췌하여 발표했다. 이 시들은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지만 랭보한테서는 소식이 없었다. 랭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에게서 답장도 받지 못한 베를렌은 1886년 상징파의 정기간행물인 〈보그 La Vogue〉에 〈일뤼미나시옹〉이라는 제목의 산문시와 여러 편의 운문시를 '고(故) 아르튀르 랭보'의 작품으로 발표했다. 랭보가 이런 발표에 대해 알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저주받은 시인들〉이 출판된 뒤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1885년 8월에 그는 학교 동창생인 폴 부르드한테서 편지 1통을 받았는데, 부르드는 전위파 시인들 사이에서 그의 시(특히 소네트인 〈모음〉)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1890년 7월에 한 평론지가 보낸 편지(프랑스로 돌아와 새로운 문학운동을 이끌어보라고 권유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가 그의 서류 틈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가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답장을 보내지는 않은 것 같다.
1891년 2월 오른쪽 무릎에 종양이 생겨, 4월초에 하레르를 떠날 때는 해안까지 1주일 걸리는 길을 줄곧 들것에 실려 가야만 했다. 아덴에서 받은 치료는 실패했고 그는 프랑스로 송환되었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직후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어머니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거의 위안이 되지 못했고, 그는 여동생 이자벨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좌절감과 절망을 쏟아놓았다. 7월에 로슈로 돌아갔을 때 그를 돌보아준 사람은 이자벨이었다.
그는 여전히 결혼하여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건강은 계속 나빠질 뿐이었다. 1891년 8월 그는 마르세유로 악몽 같은 여행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를 따라간 이자벨은 오빠의 병이 나을 가망이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러나 랭보는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견뎌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이자벨은 그를 설득하여 신부에게 고해를 하게 했다. 신부와 나눈 이 대화는 그에게 새로운 평화를 가져다 주고, 소년 시절의 시적인 상상력을 다시 일깨워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견자'가 되어, 여동생의 말에 따르면 〈일뤼미나시옹〉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보다 훨씬 더 깊이있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근거는 여동생 이자벨의 말일 뿐이고, 이자벨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히 랭보가 에티오피아에서 쓴 편지를 몇 군데 교정했다는 점에서 이미 믿을 수 없는 증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가
랭보보다 더 열렬한 연구대상이 되거나 근대 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시인도 드물다. 그가 독창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작품은 산문시 〈일뤼미나시옹〉인데, 이 시의 형식은 그의 생략법과 난해한 문체를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는 선배 시인들과는 달리 산문시에서 일화를 이야기하고 서술하는 내용이나 심지어는 묘사적인 내용까지도 모조리 제거해버렸고, 낱말에서 사전적 의미나 논리적 내용을 박탈함으로써 상징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에타 담'(etat d'ame:영혼의 상태)이라는 정신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거의 마술적인 힘을 시에 부여했다. 그는 또한 잠재의식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어린시절의 감각 속에 얼마나 풍부한 시의 재료가 숨어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의 글은 아직도 문명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질 자체에 대한 오늘날의 반감과 혐오감을 강렬히 표현하고 있다. En. Starkie 글 | 金碩禧 참조집필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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