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by 송화은율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매섭게 몰아치는 북풍은 앙상한 나무 가지를 흔들며 스치고, 밝은 달은 눈 덮인 산과 들을 차갑게 비추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의 성루(城樓)에서 긴 칼을 힘차게 짚고 서서
길게 휘파람 불며 큰 소리로 한 번 외쳐 보니 눈 앞에 감히 대적할 것이 없구나.
몰아치는 북풍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스치고, 밝은 달은 눈으로 덮인 산과 들을 비춰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 성루에서 긴 칼을 힘있게 짚고 서서
길게 휘파람 불며 큰 소리로 호통을 치니,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에 감히) 대적하는 것이 없구나.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종서(金宗瑞)
갈래 : 평시조
성격 : 의지적, 남성적, 우국적, 호기가
표현 : 대구법, 영탄법, 직설적인 표현
제재 : 일장검(一長劍)
주제 : 무인의 호방(豪放)한 기상과 기개, 우국 충정
출전 : 병와가곡집
내용 연구
삭풍(朔風) : 겨울에 부는 북풍
나모 : 나무
긋희 : 끝에
만리(萬里) 변성(邊城) :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국경의 성. 곧 육진(六鎭)
파람 : 휘파람
朔風(삭풍)은 나모 긋에 불고 明月(명월)은 눈 속에 찬듸, : 북방의 국경 주변이, 매서운 북풍이 불고 차가운 눈이 내린 가운데 매우 삼엄함을 뜻한다. 겨울밤 변방의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함.
萬里(만리) 邊城(변성)에 一長劍(일장검) 집고 셔셔, :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주변 땅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긴 칼을 짚고 서서 국경 넘어 여진 쪽을 바라보며 호방한 의지와 기개를 가다듬고 있는 장군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긴파람 - 없어라 : 무인의 호방한 기상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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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적 활동 - 사물(事物)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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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정신적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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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적 활동 -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 의식과 정서를 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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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적 활동 - 사물의 미적 형상화 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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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적 요소 |
이 시조가 지어진 당시에 국경에는 다른 민족의 침략이 자주 있어서 삭풍이 부는 한겨울에도 북쪽 변방을 지켜야 함. |
정의적 요소 |
이 시조는 변방의 상황과 관련하여 무인(武人)의 호방한 기개와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드러내고 있음. |
심미적 요소 |
이 시조의 종장에서는 거센소리를 사용하여 화자의 호방한 기상과 호응하고 있음. |
이해와 감상
조선 초 무신(武臣)에 의해 쓰여진 '변새가(邊塞歌)'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품으로, 호방한 기상과 의지가 엿보인다. 초장에서 삭풍과 차가운 명월로 변방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였고, 특히 대구를 사용하여 엄숙한 분위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었다. 중, 종장에서는 '일장검'가 '긴 파람 큰 한 소리'로 충전하는 대장부의 호방한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세종 때 북벌 정책을 펼쳐 육진(六鎭)을 개척한 무인(武人)답게 호쾌한 기상과 의지가 돋보여 '호기가(豪氣歌)'라고도 불린다.
심화 자료
김종서(金宗瑞)
1383(우왕 9)∼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할아버지는 지평 태영(台泳)이고, 아버지는 도총제(都摠制) 추(錘)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배규(裵規)의 딸이다.
〔관직 활동〕
1405년(태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해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다.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감찰로서 강원도의 답험손실(踏驗損實 : 실지 답사를 통해 수확량을 조사함)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 그에게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1419년 3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 상황을 조사했고, 같은 해 10월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1420년 윤정월에 광주판관(廣州判官) 거쳐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있으면서 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1426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 상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1427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해 황해도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1433년 좌대언(左代言)인 그에게 이부지선(吏部之選 : 이조의 인사권)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함길도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 지방에서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말을 놓아 기를 수 있는 곳의 수효를 조사해 보고하였다.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했으며, 이듬 해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柵堡)를 살펴 정했다.
1449년 8월 달달(達達, 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해 요동 지방이 소란해지자 그에 대처하기 위해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 해 소환되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左贊成兼知春秋館事)로서 ≪고려사≫를 찬진했고, 같은 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년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편찬해 올렸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이듬 해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처세와 학문 활동〕
육진 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이자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육진 개척에서 이룩한 공로가 있어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엄정하고 밝은 문인·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였다.
강직·엄정한 면모는 사헌부·사간원의 이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고제(古制)와 의례에 조예가 깊어 육진 개척의 일을 마친 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1446년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하였다.
또한,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위세가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한 위세는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해져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였다.
세종은 권제(權庶)·안지(安止) 등의 ≪고려사≫ 개수 작업이 미비한 것을 보고 1449년 김종서·정인지 (鄭麟趾) 등에게 고쳐 쓰기를 명하였다. 그 작업은 2년 후에 완성되었는데, 이 때 집필과 교열을 맡은 이들은 김종서 외에는 모두 집현전의 관료 출신들이었다.
집현전 출신이 아니면서도 당시 최고 수준의 학자·관료였던 집현전 학사와 그 출신들을 지휘해 ≪고려사≫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그의 학자적 능력을 보여주는 면이라 할 수 있다.
1451년 새로 편찬된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편년체의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자, 왕이 즉시 편찬의 착수를 명해 이듬 해에 ≪고려사절요≫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세종실록≫의 편찬 때에는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실록에는 따로 지(志)를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한 정인지의 의견을 지지해 ≪세종실록≫에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등의 전문적인 자료가 정리되어 실리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단종이 즉위한 뒤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아래서의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위세는 당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따라서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 제거되었다. 그 뒤 1678년(숙종 4)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國朝榜目, 志山文集, 增補文獻備考, 海東名臣傳,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海東雜錄, 韓國滿洲關係史의 硏究(李仁榮, 乙酉文化社, 1954), 高麗史節要解題(金庠基, 高麗史節要, 古典刊行會刊, 1960), 高麗史編纂始末(申奭鎬, 韓國史料解說集, 韓國史學會, 1964), 세종대왕(홍이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1), 高麗史解題(李基白, 高麗史, 景仁文化社, 1972), 金宗瑞(李鉉淙,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73), 東北西北界의 收復(宋炳基,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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