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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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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가정 연간 순천부땅에 유명한 인사가 있었는데 성은 유요, 이름은 현이라고 하였다. 그는 개국공신 유기의 자손으로 사람됨이 현명하고 문장과 풍채가 일세의 추앙을 받아 나이 십오 세 때 시랑 부모의 딸을 아내로 맞아 부부의 금슬이 좋아서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소년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시랑 참지정사에 이르매 명명이 조야에 진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간신이 조정에서 국권을 제멋대로 농단하므로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려 기회를 보고 있었다. 유현은 부인 최씨와 금슬은 좋았으나 소생이 없어 근심하며 지내다가 늦게야 아들을 낳고 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부인을 잃은 그는 인생무상을 느끼며 병을 빙자하고 사직한 후 한가로운 세월을 보냈다.

그에게는 성격이 유순하고 정숙한 누이가 있었는데 선비 두홍의 아내가 되어 고생하다 늦게야 두홍이 벼슬을 하였다. 유공의 아들의 이름은 연수라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숙성하고 매우 총명하여 열 살 때 향시에 장원으로 뽑혔고 십오 세 때 장원급제하여 즉시 한림학사를 제수받았다. 유한림이 급제 후 성혼하려 하나 마땅한 규수가 없어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파라는 매파가 모든 매파들의 천거가 끝난 후 입을 열었다.

"모든 말이 공변되지 못하니 제가 바른 대로 소견을 말하겠습니다. 부귀한 곳을 구하면 엄승상댁 만한 곳이 없고 현철한 분을 구하려면 성현의 사급사댁 소저밖에 없으니 이 두 댁 가운데서 택하십시오.

"부귀는 본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고 어진 규수를 택하려고 하오. 사급사는 진실로 강직한 인물인데 그 집에 소저가 있는 줄을 몰랐소."

"사소저는 덕행과 용모가 출중합니다. 제 말씀을 못 믿으시겠다면 현 불현을 다시 알아보십시오. "

하며 돌아갔다.

유공이 두 부인과 상의하자 두 부인이 묘한 제안을 하였다.

"사람의 덕행과 성질은 필법에 나타나니 사소저의 필체를 얻어 봅시다. 우화암의 묘혜를 불러서 우화암에 기증하려던 관음찬을 사소저에게 짓도록 청탁하게 합시다.

이튿날 묘혜는 유공과 두부인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그 화상을 가지고 사급사댁으로 갔다.

"소저의 모친은 전부터 불법을 신앙하였기 때문에 묘혜를 반겨하면서 오래 보지 못하였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우리 집에 왔소."

"아시는 바와 같이 소승의 암자가 퇴락하여 금년에 정재를 얻어서 중수하느라 댁에도 와 보일 틈이 없었습니다. 이제 역사가 끝났으매 부인께 한 가지 청이 있어 왔습니다."

"불사를 위한 일이라면 어찌 시주를 아끼겠소. 빈한한 집에 재물이 없어서 크게 시주하지 못하겠지만 청이라 함은 무엇이오?"

"소승이 청하려는 것은 댁에서는 재물 시주가 아니옵고 소승에게는 금은 이상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

"궁금하니 말해 보시오."

"소승의 암자를 중수한 후에 어느 시주댁에서 관음 화상을 보내주셨는데 그림 뒤에는 제명과 찬미의 글이 없는 것이 큰 흠이니 댁의 소저가 금석같은 친필로 찬문을 지어 주십사 하고 청하러 왔습니다."

"스님의 말은 고맙소. 우리집 아이가 비록 고금시문에 통하나 이런 글을 지을 수 있을지 좌우간 시험삼아 물어 봅시다. "

(중략)

 

사씨, 이로부터 효도를 다하여 시아버지를 받들고 공순함으로써 남편을 섬기고 정성으로써 제사를 받들고 은혜로써 비복을 부리니, 규문(閨門)이 옹용(雍容)하고 화기애애하더라.

 

하루는 유공(劉公)이 우연히 병을 얻어 날마다 짙어 가니 한림 부부 밤낮으로 시탕(侍湯)하되 백약이 무효한지라. 공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줄 알고 이에 두(杜) 부인을 청하여 길이 탄식하여 가로되,

"나는 지금 죽을지니 현매(賢妹)는 너무 슬퍼말고 천만보중(千萬保重)하여 가사를 주장(主掌)하되 그릇됨이 없게 하라."

하고 또 한림의 손을 잠고 가로되,

"현부의 요조(窈窕)한 덕행은 이미 감복한 바라. 다시 무엇을 부탁하리오."

세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평복(平復)하기를 축원하더니, 차야(此夜)에 공이 엄연 별세하니 한림 부부 호천(呼天) 애통(哀痛)함이 비할 데 없고, 두 부인도 또한 못내 애통하더라. 어느덧 장일(葬日)을 당하매 영구를 뫼셔 선영(先塋)하에 안장하고, 세월이 흐르는 것 같아 삼상(三喪)을 마치고 함림이 군명(君命)을 받자와 조정에 나아가매 소인을 배척하고 몸가짐을 강직케 하니, 천자 사랑하사 벼슬을 돋우고자 하시나 승상 엄숭(嚴崇)이 꺼리어 저어하므로 여러 해가 되도록 직품(職品)이 오르지 못하더라.

유 한림의 부부 성친(成親)한 지 벌써 10년이 넘고 연기(年紀) 거의 30에 가까웠으나, 다만 한낱 자녀가 없으니 부인이 깊이 근심하여 한림을 대하여 탄식하여 가로되,

"첩이 기질이 허약하여 생산(生産)에 여망(餘望)이 없삽고, 불효삼천(不孝三千)에 무후위대(無後爲大)라 하오니 첩의 무자(無子)한 죄는 존문(尊門)에 용납치 못할 것이오나 상공(相公)의 넓으신 덕택을 입사와 지금까지 부지하옵거니와, 생각건대 상공이 누대(累代) 독신으로 유씨 종사(宗嗣)의 위태함이 급하온지라. 원컨대 상공은 첩을 괘념(掛念)치 말으시고 어진 여자를 택하여 농장지경(弄璋之慶)을 보시면 문호(門戶)의 경사(慶事) 적지 않고 첩이 또한 죄를 면할까 하나이다."

한림이 웃어 가로되,

"어찌 일시 무자함을 한탄하여 첩을 얻으리요. 첩을 얻음은 집안을 어지럽히는 근본이니, 부인은 화(禍)를 자초(自招)하려 하시느뇨. 이는 만만부당(萬萬不當)하여이다."

 

사씨 대답하여 가로되,

"재상가(宰相家)의 일처 일첩(一妻一妾)은 예전부터 있는 일이옵고, 또 첩이 비록 덕이 없사오나 시속(時俗) 부녀의 투기(妬忌)하는 것은 더러이 아는 바이오니 상공은 조금도 염려치 말으소서."

하고 가만히 매파를 불러 그럼직한 양가(良家) 여자를 구하더니, 두(杜) 부인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사씨께 가로되,

"그대 질아(姪兒)를 위하여 첩을 구한다더니 과연 그런 일이 있는가?"

사씨 대답하여 가로되,

"있나이다."

 

두 부인이 가로되,

"집안에 첩을 두는 것은 화를 취하게 하는 근본이라. 속담에 이르기를 한 말에 두 안장이 없고 한 밥그릇에 두 술이 없다 하니, 군자(君子) 비록 얻으려 하더라도 굳이 그 불가함을 간할 것이어늘 이제 화를 자초함은 어찌 함이뇨?"

사씨 가로되,

"첩이 존문에 들어온지 벌써 10년이 지났으되 아직 한낱 혈육이 없사오니 고법(古法)으로 말하오면 군자의 버린 바 되더라도 두 말을 못할지어늘 어찌 감히 첩 둠을 꺼리리까."

 

두 부인이 가로되,

"자녀를 생산함은 조만(早晩)이 없나니, 두씨 문중에도 30 뒤에 생산하여 아들 다섯을 낳은 일도 있고, 또 세상에는 40이 지난 뒤에 비로소 초산(初産)하는 이가 많나니, 그대의 나이 아직 30이 멀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지어다."

사씨 가로되,

"첩은 기질이 허약하여 생산할 가망이 없사오며 또한 도리로써 말할지라도 일처 일첩은 남자의 떳떳한 일이라. 첩이 비록 태사(太師) 같은 덕(德)은 없사오나 세속 부녀들의 투기함은 본받으려 하지 않나이다."

두 부인이 웃어 가로되,

"태사 비록 투기하지 않는 덕이 있었으나 문왕의 편벽(偏僻)되지 아니한 은혜와 사랑에 감복하여 모든 첩(妾)들이 원망이 없었거니와, 만일 문왕 같은 덕이 없었으면 비록 태사 같은 부인(夫人)일지라도 어찌 교화(敎化)를 베풀 곳이 있었으리요. 더욱이 고금이 때가 다르고 성인과 범인(凡人)이 길이 다르거늘, 한갓 투기하지 아니함으로써 태사를 본받으려 하니 이는 헛된 이름을 탐하여 화를 면치 못할까 하노니 그대는 깊이 생각하라."

사씨 가로되,

"첩이 어지 감히 옛적 성인(聖人)을 바라리까마는 시속 부녀들이 인륜(人倫)을 모르고 질투를 일삼아 가도(家道)를 문란케 하는 이가 많음을 한탄하는 바오나, 첩이 비록 용렬하오나 어찌 이런 행실을 하리이까. 그리고 또 군자 만일 몸을 돌아보지 않고 요미(妖美)한 색에만 침혹(沈惑)하오면 첩이 정성을 다하여 간(墾)하고자 하나이다."

두 부인이 만류하지 못할 줄 짐작하고 탄식하여 가로되,

"장차 들어올 새 사람이 양순한 여자거나 또는 군자 간하는 말을 잘 들으면 그만이어니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 사나이 마음이 한번 그 쪽으로 기울어지면 다시 돌리기가 어려우리니, 그대는 이 뒤 내 말을 생각하고 뉘우침이 없게 하라."

하고 무연(憮然)함을 마지않더라.

이튼날 매파 들어와 사씨께 여쭈되,

"어느 곳에 한 여자 있사오나 아마 부인의 구하는 바에 너무나 과할 듯 하나이다."

 

사씨 가로되,

"어찌한 말이냐?"

 

매파 가로되,

"부인이 구하시는 바는 다만 부덕(婦德)이 있고 생산을 잘 하오면 그만이어늘 이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용모 자색(姿色)이 출중(出衆)하오니 부인의 뜻에 합당치 못할까 하나이다."

사씨 웃어 가로되,

"매파는 나를 맥받지 말고 자세히 말하라.

 

매파 가로되,

"그 여자의 성이 교(喬)씨요, 이름은 채란(採卵)이라 하며 하간부(何間부)에서 생장한 사람이라. 본디 벼슬하는 집 딸로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그 형의 집에 의탁해 있는데, 지금 나이 16세라. 제 스스로 말하기를,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되느니보다 공후(公侯) 부귀가(富貴家)의 첩이 되는 것이 좋다.' 하오며, 그 자색의 아름다움은 한 고을에 으뜸이요, 여공지사(女工之士)도 모를 것이 없사오니, 부인이 만일 상공을 위하여 첩을 구하실진대 이보다 나은 이가 없을까 하나이다."

사씨 크게 기뻐하여 가로되,

"본디 벼슬 다니던 사람의 딸이면 그 성행(性行)이 반드시 무지한 천인(賤人)과 다를 것이니 가장 적당하도다. 내 상공께 말해 보리라."

하고 이에 한림에게 매파의 하던 말을 전하고 데려오기를 강권(强勸)하니 한림이 가로되,

"내 첩 둠이 그리 급하지 아니하나 부인의 호의(好意)를 저버리기 어려우니 마땅히 택일(擇日)하여 데려오리라."

이에 친척을 모시고 교씨를 맞아올새, 교씨 한림과 부인께 절하고 자리에 앉으니 모두 보매 얼굴이 아름답고 거동이 경첩(輕捷)하여 해당화 한송이가 아침 이슬을 머금고 바람에 나부끼듯 하매 모두 칭찬치 아니할 이 없으되, 오직 두 부인은 기뻐하지 않더라. 이 날 밤에 교씨를 화원별당(花園別堂)에 머물게 하고 한림이 들어가 밤을 지낼새 두 정이 흡연(洽然)하더라. 이튿날 두 부인이 사씨로 더불어 말할새.

"그대 기위(旣爲) 소실 두기를 권할진대 마땅히 순직(純直)하고 근실(勤實)한 사람을 구할 것이어늘, 이렇듯 절대가인(絶代佳人)을 데려왔으니 아마 그 성품이 불량하여 다만 그대에게만 유익되지 못할 뿐 아니라 유씨 가문에 화가 있을까 두려워하노라."

 

사씨 가로되,

"옛날 위장강(衛將姜)은 고운 얼굴과 공교로운 웃음으로 착한 덕이 가득하였으니, 어찌 절대 가인이라고 다 어질지 아니하리이까?"

 

두 부인이 가로되,

"장강이 비록 어지나 자식을 두지 못하였나니."

하고 웃더라.

 

한림이 교씨의 거처하는 집 이름을 고쳐 백자당(百子當)이라 하고 시비(侍婢) 납매(臘梅)등 4,5인으로 모시게 하니 가중(家中)이 모두 교 낭자라 일컫더라.

(중략)

 

이튿날 한림이 일가 친척을 모두 청해 놓고 사씨의 전후 죄상(罪狀)을 이르고 기어코 쫓아낼 것을 말하니, 모든 사람이 본디 사씨의 친절함을 알고 모두 한림의 망령(妄靈)임을 짐작하나 모두 한림에게 먼 일가 아니면 손아래 사람이라 뉘 즐거이 고집을 부려서 한림의 뜻을 거스르리오. 그래서 모두 가로되,

"이는 한림의 생각대로 처리할 것이요 우리는 판단하지 못하겠노라."

하니 한림이 이에 비복(婢僕)을 분부하야 향촉(香燭)을 갖추어 가묘(家廟)에 분향(焚香) 배례(拜禮)하고 사씨의 죄상을 고할새 그 글에 하였으되,

"유세차(維歲次) 모년 모월 모일에 효손 한림학사 연수는 삼가 글월을 증조고(曾祖考)문현각 태학사(太學士) 문충공부군 증조비 부인 호씨, 조고 태상경 이부상서(太常卿 吏部尙書)부군 조비 부인 정시, 현고(顯考) 태자소사 예부상서(禮部尙書) 성형공부군 현비 부인 최씨의 신위(神位)에 밝게 고하나이다. 부부는 오륜(五倫)의 하나요 만복의 근원이라. 나라에서 이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바니 어찌 삼가지 아니하오리까. 슬프다, 저 사씨 처음 가문에 들어오매 숙덕(淑德)이 예법에 있어 어김이 없더니,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지 못하여 혹시 불미한 일이 있으나 대체를 돌아보아 꾸짖지 않고 도 삼년 초토(草土)를 한가지로 받들었으므로 출부(黜婦)치 않으매, 갈수록 음흉하여 모병(母病)을 칭탁(稱託)하고 본가(本家)에 가서 추행이 탄로하였으나 가문에 욕될까 하여 사실을 감추고 집안에 머물어 두었더니, 스스로 후회치 않고 그 죄 칠거(七去)에 대하니 조종 신령이 흠향(歆饗)치 아니하실 바니 향화(香火)가 끊어질까 저어하야 부득이 출거(黜去)하고, 소첩 교씨는 비록 육례(六禮)를 갖추지 못하였으나 실로 명가 자손이고 백행이 구비하야 조종의 제사를 받듦직하온지라 교씨를 봉하야 정실(正室)을 삼나이다."

하였더라. 읽기를 다하매 시비로 하여금 사씨를 이끌어 조종(祖宗)의 영위(靈位)에 나아가 사배(四拜) 하직할새, 사씨 눈물이 비 오듯 하니 모든 일가들이 문 밖에서 절하고 이별하며 모두 눈물을 흘리더라. 유모가 인아를 안고 나오니, 부인이 받아 안고 가로되,

"나를 생각지 말고 좋이 있으라. 아지 못게라, 너를 더불어 다시 만날 날이 있을는지."

하고 탄식하며 또 가로되,

"깃 없는 어린 새가 그 몸을 보존치 못한다 하니, 어미 없는 어린애가 어찌 잔명을 부지하랴. 슬프다, 차생(此生)에 미진(未盡)한 인연을 후생에나 다시 이어 모자 됨을 원하노라."

하고 눈물을 금치 못하니, 눈물이 화하야 피가 되는지라. 인하여 길이 탄식하여 가로되,

"존구(尊舅)께서 기세(棄世)하시매 따라 죽지 못하고 살아 있다가 이런 광경을 당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이에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고 교자(轎子)에 오르며 인아를 어루만져 잘있으라 하니, 인아 크게 부르짖어 모부인(母夫人)을 따라가려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더라. 사씨가 유모를 천만 번 당부하야 인아를 잘 보호하라 하고 다만 치환(置換)하나를 데리고 가니라.

이 때 가중 시비들이 교씨를 붙들어 가묘에 분향할새, 녹의홍상(綠衣紅裳)에 옥패(玉佩)소리 쟁쟁하니 천상 선녀 같은지라. 예를 마치고 가중 비복에게 하례(賀禮)하는 인사를 받을새 교씨 말하되,

"내 오늘부터 새로 집안 일을 주장하니, 너희들은 다 각각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하야 죄에 범치 말라."

하니, 시비 등이 영(令)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니라. 이 때 비복 등 팔구인이 모여서 교씨에게 말하여 가로되,

"사 부인이 비록 쫓겨났으나 여러 해 섬기던 바에 자못 은혜 중한지라. 부인이 허하시면 소복(小僕) 등이 한번 나아가 일별(一瞥)코자 하나이다."

교씨 가로되,

"이는 너희들의 정의(情義)라 어찌 막으리오."

 

모든 시비가 일제히 사씨를 따라가 통곡하니, 사씨 교자를 멈추고 가로되,

"너희들이 이같이 와서 나를 전송하니 감사하도다. 너희들은 힘써 새 부인을 섬기며 고인(故人)을 잊지 말라."

비복 등이 눈물을 흘리고 절하며 작별하니라.

이 때 사씨 교부(轎夫)를 분부하야 신성현으로 가지 말고 성도에 있는 시부모의 산소 아래로 향하라 하니, 교군이 청령(廳令)하고 유씨의 선영 아래 이르니라. 사씨 이에 수간 초옥(數間草屋)을 얻어 거처할새, 부모와 구고(舅姑)를 생각하며 처량한 신세를 슬퍼하야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더라.

이 때에 사공자(사公子)가 이 소문을 듣고 곧 찾아가서 눈물을 흘려 가로되,

"여자 가부(家夫)에게 용납치 못하면 마땅히 본가로 돌아와 형제 서로 의지하심이 옳거늘, 저 무인 공산(無人空山)에 홀로 계시니 도리어 불편하리로다."

 

사씨 슬퍼하여 가로되,

"내 어찌 동기의 정과 모친 영전(靈前)에 모시기를 아지 못하리오마는 내 한번 돌아가면 유씨와 아주 끊어지고 마는 것이라. 한림이 비록 급히 나를 버렸으나 내 일찍 선고(先考)에게 득죄함이 없으니 구고 묘하에서 여년(餘年)을 마침이 나의

 

소원이니 현제(賢弟)는 괴이히 알지 말라."

사공자 저저(姐姐)의 고집을 알고 돌아가 늙은 창두(蒼頭) 한 명과 비자(婢子) 양랑을 보내거늘, 사씨 가로되,

"우리 집에도 본디 노복이 얼마 안 되거늘 어지 여럿을 두리오."

하고, 늙은 창두 한 명만 두어 외정(外庭)을 맡아 보라 하고 양랑은 보낸니라. 이 곳은 유씨 종족과 노복 등이 많이 사는 데라,사씨의 옴을 보고 모두 나와 위로하며 산과 야채로써 공급하며 그 마음을 풍족케 하니, 사씨 또한 여공이 민첩하야 남의 침선방적(針線紡績)도 하며 약간 패물을 팔아 연명(延命)하여 고생으로 세월을 보내더라.

이 때에 교군(轎軍) 등이 돌아가 사씨가 유 상공의 묘하(墓下)로 감을 고하니, 교씨 생각하되,

'제 신성현으로 가지 않고 유씨 묘하에 있음은 반드시 출부(黜婦)로 자처함이 아니라.'

하고 이에 한림에게 말하되,

"사씨 더러운 이름으로 종조(宗祖)에게 득죄하였거늘 감히 유씨 묘하에 있으리오."

 

한림이 잠자코 있다가 가로되,

"제 이미 출부된 바에 거취를 제 듯대로 할지라. 하물며 묘하에 타인도 많이 사나니 저를 금하여 무엇하리오?"

하니 교씨 마음에 거리끼나 감히 어떻게 못하더라.

하루는 교씨 동청(董淸)을 보고 의논하니, 청이 가로되,

"사씨 유씨 묘하에 있고 본가(本家)로 가지 아니함은 네 가지 까닭이 있으니, 첫째는 전일에 옥지환 일을 발명(發明)코자 함이요, 둘째는 유가(儒家)의 자부(子婦)로 자처하여 후일을 바람이요, 셋째는 유가 종족에게 인정을 끼쳐 후일 도움이 되게 함이요, 넷째는 한림이 춘추(春秋)로 묘하에 다니니, 사씨 심산궁곡(深山窮谷)에서 무궁한 고초(苦草)를 당하게 하는 것을 보면 비록 철석(鐵石)이라도 전일(前日) 은혜를 생각하고 마음이 어찌 동(動)치 아니하랴."

교씨 가로되,

"그러면 사람을 보내어 죽임이 쾌(快)하리로다.

(중략)

교씨가 눈을 들어서 좌중을 보니 유연수 문중의 일족이라 벼락을 맞은 듯이 애걸하나 유상서가 교녀의 비굴한 행동에 더욱 노하여 시동에게 엄명하여 교녀의 가슴을 칼로 찢어 헤치고 심장을 꺼내라 하니 사부인이 시동을 만류시켜 부인의 권고에 감동하여 타살한 후에 동편 언덕에 잘 묻어 주었다.

임씨가 유씨 문중에 들어온 지 십년이 지나는 동안에 아들 삼 형제를 낳았는데 모두 옥골선풍이요, 천금가사였다.

또 유상서가 좌승으로 승진되고 유승상 부부는 팔십여 세를 안양하고 임씨도 복록을 누려서 사씨 부인을 모시며 안락한 세월을 보냈다.

요점 정리

지은이 : 김만중

연대 : 숙종 15 ~ 18년 간

갈래 : 국문 소설, 가정 소설, 풍간(諷諫 : 완곡한 표현으로 잘못을 고치도록 말함)소설

배경 : 중국 명나라 초기, 중국 북경 금릉 순천부

문체 : 문어체, 역어체(원본) 현대어 풀이 본문은 산문체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추보식 구성

발단

중국 명나라 세종 때 금릉 순천부에 사는 유희는 늦게야 아들 연수를 얻는다. 연수는 열다섯 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한림 학사를 제수받는다.

전개

유한림은 덕성과 재학을 겸비한 사씨와 결혼한다. 그러나 사씨가 9년이 되도록 출산을 못하자 유한림은 사씨의 권유에 의하여 교씨를 맞아들인다. 교씨는 천성이 간악한 여자로 아들을 낳자 사씨를 내쫓고 정실 부인이 되기 위해 남편에게 사씨를 참소한다.

위기

교씨가 자기 아들을 죽이고 죄를 사씨에게 뒤집어 씌우자 유한림은 사씨를 폐출시키고 교씨를 정실로 맞이한다.

절정

교씨는 문객인 동청과 간통하면서 유한림을 천자에게 참소하여 유배시키고 지방관이 된 동청과 함께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 그 때 조정은 유한림에 대한 혐의를 풀고 충신을 참소한 동청을 처형한다.

결말

정배에서 풀려난 유한림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씨를 찾아 전죄를 사과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교씨를 처형하고 사씨를 다시 정실로 맞아들인다.

제재 : 처첩간의 갈등

주제 : 처첩간의 갈등과 사씨의 고행과 권선징악

인물 :

사씨 - 현모양처로서 성품이 곱고 착한 여인의 전형.

교씨 - 위선적이며 교활하고 표독스런 악인의 전형.

유연수 - 판단력이 없고, 양반사대부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봉건적 사고방식을 지닌 전형적 인물이나 본성은 착하다.

동청 - 교씨의 정부(情夫)로써 악인의 전형

엄숭 - 유한림을 제거하는데 앞장을 서는 간신.

 

역사적 사실

사씨남정기

인물

숙종

유연수

인현왕후 - 아들 없음

사 씨 아들 - 아들 인아

희빈장씨 - 아들 균(경종)

교 씨 아들 - 아들 장주

사건 전개

희빈 장씨의 무고 - 인현 왕후 폐위 - 인현 왕후 복위

교 씨의 모해 - 사 씨 추방 - 사 씨 복권

특징 : 대화를 통해 사건을 전개하고, 갈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전체적으로 추보식 구성이나 부분적으로 역순행적 구성 방식을 사용했고, 숙종을 깨우치기 위한 일종의 목적 소설임.

의의 : 후대 가정소설의 모범이 된 작품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가 축첩 제도의 불합리성과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한 가정소설로 선악의 인물 대립관계로 작품이 이루어졌고, 까다로운 한문투의 표현을 피하고 구어체에 접근하여 속담이나 격언 등을 적절히 활용하여 우리말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음.

출전 : '해재신해계동유동찰판(해在辛亥季冬由洞札板)'을 근거로 현대어 풀이

줄거리 :

 

'사씨남정기'는 양반사대부 가문인 유한림의 가정과 서로 다른 양반사대부들의 생활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지는 사정옥과 교채란 사이의 갈등을 통해 축첩제도의 불합리성을 비판하고 있으며 동시에 양반가정의 추악한 내막을 드러내고 있다.

구성은 '성혼', '요망한 첩', '간악한 문객', '가화', '남정', '가운회복' 등 제목을 단 몇 개의 장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야기줄거리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의 앞부분은 '성혼'부터 '가화'까지이다.

금릉 순천부의 명 가문에 한림 학사 유연수와 아내 사정옥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10년이 지났어도 둘 사이에는 가문의 대를 이어줄 자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씨는 어느 날 남편에게 첩을 맞아들일 것을 간청한다. 유한림이

"어찌 일시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여 첩을 얻겠소. 첩이 들어오면 집안이 어지러워지는 법인데, 부인은 왜 화를 자청하시오? 천부당만부당하니 그런 생각 마시오."

라고 반대하지만 사씨는 끝내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교채란이 첩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제 스스로 늘 말하기를,

"가난한 집 선비의 아내가 되느니보다는 공후 부귀가의 첩이 되는 것이 좋다."

고 말해온 여인이다. 이때 교씨의 나이는 이팔청춘이었으나 성품이 교활하여 유한림의 비위를 잘 맞춰주었고 사씨를 섬기는 것도 극진해 보였다. 유씨 가문엔 전에 없던 기쁨과 화기가 떠도는 듯하였다. 사씨는 두말할 것도 없고 유한림도 이제 자식을 보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이며 피상적인 것이었다. 교씨는 유한림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노래와 탄금(彈琴)으로 그의 마음을 유혹하는 한편, 동청이라는 한량을 끌어들여 그와 함께 남몰래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갖가지 흉계를 꾸미다 마침내 자기 소생인 장지까지 죽이고 그 죄를 사씨에게 덮어씌운다. 간계에 속은 유한림은 십 년 세월 함께 살아온 사씨를

"천지간에 용납 못할 죄를 저지른 음부, 방자하고 음흉한……"

운운(云云)하면서 집에서 내쫓는다. 이때부터 서글프고 괴로운 사씨의 '남정'이 시작된다.

소설의 뒷부분은 '남정'부터 '가운회복'까지이다.

 

집에서 쫓겨난 사씨는 시부모 선산에서 초가집을 얻어 여생을 마치려 한다. 그러나 행방을 알아낸 교씨는 동청과 함께 또다시 흉계를 꾸며 냉진이라는 사나이를 보내어 사씨의 절개를 꺾으려 하지만 사씨가 먼저 떠났기에 실패로 돌아간다. 한편 유한림도 자신들의 죄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교씨와 동청의 모함으로 간신 엄승의 손을 빌려 '임금을 기롱한' 죄로 귀양가게 된다. 유씨가문은 마침내 파산몰락의 운명에 처해지게 된다. 그러나 곧 황제의 은사령으로 유한림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를 모함한 원수들의 행차와 마주친다. 이를 안 교씨와 동청은

"그놈이 죽어 타향 귀신이 될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오다니, 만일 다시 득의(得意)한다면 우리는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 건장한 관졸 수십 명을 뽑아 유한림의 목을 베어오면 천금의 상을 주겠노라고 한다. 쫓기던 유한림은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쪽배 한 척을 발견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하고, 그 배에는 소복단장한 부인이 그를 맞이하는데 그녀는 바로 사씨였다. 이 무렵 조정에선 전횡을 일삼던 엄승상이 처형되고 동청과 냉진도 차례로 처단된다. 교씨는 낙양땅에 도망쳐서 창루의 창기로 타락한다. 예부상서로 복위된 유연수는 사씨부인을 데리고 서울로 가던 중에 교씨를 만나 그녀를 처단한다.

전반부는 유연수 가문 내에서의 갈등을 주로 다루었고 후반부는 조정에서의 정치적인 사건의 해결을 주로 다루었다. 임진왜란 이후 양반사대부들 내에서 첩을 맞아들이는 일이 더욱 빈번해짐에 따라서 그것이 빚어내는 악덕은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작가는 이러한 축첩제도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착한 것은 승리하고 악한 것은 망한다는 궁극적인 도덕윤리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작품 줄거리만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중국 명(明)나라 때 유현(劉炫)의 아들 연수(延壽)는 15세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된다. 유한림은 그 후 숙덕(淑德)과 재학(才學)을 겸비한 사씨(謝氏)와 혼인하였으나, 9년이 지나도록 소생이 없자 교씨(喬氏)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간악하고 시기심이 많은 교씨는 간계로써 사씨부인을 모함하여 그녀를 폐출시키고 자기가 정실이 된다. 그 후 교씨는 간부(姦夫)와 밀통하며 남편인 유한림을 조정에 모함하여 유배 보내게 한 다음 재산을 가지고 간부와 도망치다가 도둑을 만나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궁지에 빠진다. 한편 유한림은 혐의가 풀려 배소에서 풀려나와 방황하는 사씨를 찾아 다시 맞아들이고 교씨와 간부를 잡아 처형한다.

창작 동기

 

이 작품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한 사건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궁녀가 이 작품을 숙종에게 읽도록 하여 숙종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의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도 중국 명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날카로운 현실 비판 의식을 가리키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교씨의 모함

사씨의 추방

사씨의 복권

장희빈의 무고

인현왕후의 폐위

인현왕후의 복위

내용 연구

<앞 부분 줄거리> 한림 학사 유연수와 아내 사정옥은 결혼 후 9년이 지났어도 자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씨는 남편에게 첩을 맞아들일 것을 간청한다. 마침내 교씨가 첩으로 들어온다. 성품이 교활한 교씨는 유한림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한림을 유혹하는 한편, 동청이라는 한량을 끌어들여 갖가지 흉계를 꾸민다. 교씨는 마침내 자기 소생인 아들까지 죽이고 그 죄를 사씨에게 덮어씌운다.

이튿날 한림이 일가친척(一家親戚)을 모두 청해[불러] 놓고 사씨의 전후 죄상(罪狀)을 이르고 기어코 쫓아낼 것을 말하니, 모든 사람이 본디 사씨의 친절함을 알고 모두 한림의 망령(妄靈)임을 짐작하나[일가친척들은 사씨를 쫓아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음] 모두 한림에게 먼 일가 아니면 손아래 사람이라 뉘 즐거이 고집을 부려서 한림의 뜻[사씨를 쫓아내는 것]을 거스르리오. 그래서 모두 가로되,

 

“이는 한림의 생각대로 처리할 것이요, 우리는 판단하지 못하겠노라.”

 

하니 한림이 이에 비복(婢僕 : 계집종과 사내종)을 분부하야 향촉(香燭 : 제사나 불공 드릴 때 쓰는 향과 초)을 갖추어 가묘(家廟)에 분향(焚香) 배례(拜禮)하고[집의 사당에 향을 피우고 예를 갖추어 절을 하고] 사씨의 죄상을 고할 새 그 글에 하였으되,

“유세차(維歲次) 모년 모월 모일에 효손 한림학사 연수는 삼가 글월을 증조고(曾祖考) 문현각 태학사(太學士) 문충공부군 증조비 부인 호씨, 조고 태상경 이부상서(太常卿 吏部尙書)부군 조비 부인 정씨, 현고(顯考) 태자소사 예부상서(禮部尙書) 성형공부군 현비 부인 최씨의 신위(神位)에 밝게 고하나이다. 부부는 오륜(五倫)의 하나요 만복의 근원이라. 나라에서 이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바니 어찌 삼가지 아니하오리까. 슬프다, 저 사씨 처음 가문에 들어오매 숙덕(淑德)이 예법에 있어 어김이 없더니,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지 못하여 혹시 불미한 일이 있으나 대체를 돌아보아 꾸짖지 않고 또 삼년 초토(草土)를 한가지로 받들었으므로 출부(黜婦)치 않으매, 갈수록 음흉하여 모병(母病)을 칭탁(稱託 : 어떠하다고 핑계를 댐)하고 본가(本家)에 가서 추행이 탄로하였으나 가문에 욕될까 하여 사실을 감추고 집안에 머물어 두었더니, 스스로 후회치 않고 그 죄 칠거(七去 : 아내를 내쫓는 이유의 일곱 가지 허물. 곧, 시부모에게 불순한 것,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 행실이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하는 것.)에 대하니 조종 신령이 흠향(歆饗 : 신명(神明)이 제물을 받음)치 아니하실 바니 향화(香火)가 끊어질까 저어[걱정]하야 부득이 출거(黜去)하고, 소첩 교씨는 비록 육례[六禮 : 혼인의 대례. 곧, 납채(納采 :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혼인을 청하는 의례)·문명(問名 : 혼인을 정한 여자의 장래 운수를 점칠 때 그 어머니의 이름을 물음.)·납길(納吉 : 신랑 집에서 혼인날을 받아 신부 집에 알리는 일.)·납폐(納幣 :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예물을 보내는 일. 또는 그 예물로 흔히 푸른 비단과 붉은 비단으로 함)·청기(請期 : 혼인할 때에 신랑집에서 택일을 하여 그 가부(可否)를 묻는 편지를 신부 집으로 보내는 일.)·친영(親迎 :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친히 맞음)]를 갖추지 못하였으나 실로 명가 자손이고 백행이 구비하야 조종의 제사를 받듦직하온지라 교씨를 봉하야 정실(正室)을 삼나이다."

하였더라. 읽기를 다하매 시비로 하여금 사씨를 이끌어 조종(祖宗 : 시조가 되는 조상)의 영위(靈位 : 상가(喪家)에서 모시는 혼백이나 신위(神位). 위패.)에 나아가 사배(四拜) 하직할 새, 사씨 눈물이 비 오듯 하니 모든 일가들이 문 밖에서 절하고 이별하며 모두 눈물을 흘리더라. [사씨가 죄를 뒤집어 쓰고 집을 떠나게 됨]<중략>

이 때 집안 시비들이 교씨를 붙들어 가묘에 분향할 새, 녹의홍상(綠衣紅裳 : 연두저고리에 다홍치마. 곧, 젊은 여자의 곱게 치장한 옷차림.)에 옥패(玉佩 : 옥으로 만든 패물) 소리 쟁쟁하니 천상 선녀 같은지라. 예를 마치고 집안 비복에게 하례(賀禮 : 축하하는 예식)하는 인사를 받을 새 교씨 말하되,

“내 오늘부터 새로 집안일을 다스릴 터이니, 너희들은 다 각각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하야 죄를 범하지 말라.”

하니, 시비 등이 영(令)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니라. 이 때 비복 등 팔구 인이 모여서 교씨에게 말하여 가로되,

“사 부인이 비록 쫓겨났으나 여러 해 섬기던 바에 자못 은혜 중한지라. 부인이 허하시면 소복(小僕) 등이 한번 나아가 이별코자 하나이다.”

 

교씨 가로되,

“이는 너희들의 정의(情義 : 인정과 의리)라 어찌 막으리오.”

모든 시비가 일제히 사씨를 따라가 통곡하니, 사씨 교자를 멈추고 가로되,

“너희들이 이같이 와서 나를 전송하니 감사하도다. 너희들은 힘써 새 부인[교씨]을 섬기며 고인(故人 : 사씨)을 잊지 말라.”[사씨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음]

 

비복 등이 눈물을 흘리고 절하며 작별하니라.

이 때 사씨 가마꾼에게 분부하야 시부모의 산소 아래로 향하라 하니, 가마꾼이 이를 듣고 유씨의 선영 아래 이르니라.

사씨 이에 수간 초옥[數間草屋 : 몇 칸 안 되는 작은 초가(草家)]을 얻어 거처할 새, 부모와 죽은 시부모를 생각하며 처량한 신세를 슬퍼하야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더라. <중략>

이 때에 교군(轎軍 : 가마꾼) 등이 돌아가 사씨가 유 상공[한림의 아버지]의 묘하(墓下)로 감을 고하니, 교씨 생각하되,

‘제 신성현[사씨의 본가, 친정]으로 가지 않고 유씨 묘하에 있음은 반드시 출부(黜婦 : 시집으로부터 쫓겨난 여자)로 자처함이 아니라.’

하고 이에 한림에게 말하되,

“사씨 더러운 이름으로 종조(宗祖 : 조상)에게 득죄하였거늘 감히 유씨 묘하에 있으리오.” [판단력이 부족함]

 

한림이 잠자코 있다가 가로되,

“제 이미 출부된 바에 거취를 제 뜻대로 할지라. 하물며 묘하에 타인도 많이 사나니 저를 금하여 무엇하리오?”

하니 교씨 마음에 거리끼나 감히 어떻게 못 하더라.

하루는 교씨 동청(董淸 : 교씨의 정부로 악인의 전형)을 보고 의논하니, 청이 가로되,

“사씨 유씨 묘하에 있고 본가(本家)로 가지 아니함은 네 가지 까닭이 있으니, 첫째는 전일에 옥지환 일을 발명(發明)코자 함이요[죄나 잘못이 없음을 밝히고자], 둘째는 유가(儒家)의 자부(子婦 : 며느리)로 자처하여 후일을 바람이요, 셋째는 유가 종족에게 인정을 끼쳐 후일 도움이 되게 함이요, 넷째는 한림이 춘추(春秋)로 묘하에 다니니, 사씨 심산궁곡(深山窮谷 : 깊은 산속의 험한 골짜기)에서 무궁한 고초(苦楚 : 고난)를 당하게 하는 것을 보면 비록 철석(鐵石)이라도[쇠와 돌처럼 굳고 단단할지라도] 전일(前日) 은혜를 생각하고 마음이 어찌 동(動)치 아니하랴.”

 

교씨 가로되,

“그러면 사람을 보내어 죽임이 쾌(快)하리로다.” - 동청과 의논하여 사씨를 죽이려함

사씨남정기에 나오는 어휘 해설

가정 : 명나라 세종때의 연호

문장재망 : 문장과 재주

칭병불출 : 병을 핑계삼아 관리가 출근하지 않음

해고 : 고용주가 피고용주를 직책에서 떠나게 함

위망 : 위엄과 덕망

寡居 :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됨

강보 : 갓난아기를 싸는 보자기

향곡수재 : 향시. 지방에서 과거를 보아 인재를 뽑음

年幼 : 나이가 어림

포장 : 칭찬하는 표징으로 주는 휘장, 즉 훈장

성현서 : 성현들이 쓴 글

事君之道 : 임금을 섬기는 도리

공번 : 공평하다

선불선 : 착하거나 착하지 아니함

女功, 詩書 : 여자들이 하는 길쌈과 글

침음양구(沈吟良久) : 속으로 깊이 생각한지 이미 오래

관음찬 : 관음보살을 예찬하는 글

년구퇴락(年舊頹落) : 건물 등이 오래되어 헐어지고 무너짐

完畢 : 일을 마침

수환 : 수명. 목숨

장원 : 길고 멀음, 오래 삶

고금 : 옛날 일과 지금 일, 즉 책을 많이 읽어 옛 글과 지금 글과 역사를 일컬음

쇄락기이(灑落奇異) : 기분이 상쾌하고 시원하며 기이함

무익지문 : 아무런 이득도 없는 글

유도(儒道) : 유가, 즉 공자와 맹자가 주창한 유학

강작 : 강제로 글을 지음

안목(眼目) :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힘

석씨 성인 : 석가, 즉 석가모니불

주나라 때 문왕의 어머니요 아내인 태임 태사

關雎와 葛覃 : 부부간의 금슬이 좋은 것과 자손이 번성하여 은혜로 기름을 뜻하는 것으로 '시경'에 나오는 조목

협망 : 바라봄

절부 : 절개높은 부인

涕落 滄海水 : 눈물이 떨어져 바다가 됨

현미 : 현묘, 도나 기예 따위가 심원하고 미묘함

친사뇌정 : 친사돈이 되기로 굳게 약정함, 즉 결혼시킴

산문 : 절 안. 절에 들어가는 문

칭사 : 칭찬하여 사례함

풍신지화 : 풍채

진신명부 : 높은 벼슬아치의 아내

종불청 : 끝내 듣지 아니함

疎  : 성품과 됨됨이가 꼭 짜이지 못하고 헐렁하여 어설픔

謹肅敎意 : 삼가 공경하여 뜻을 받듬

유환요조 : 일정 부녀의 행동이 아리땁고 얌전함

好緣 : 좋은 인연

친영 : 친히 영접함

군자호구(君子好逑) : 군자의 좋은 짝

제회 : 모두 모임

빈객만당 : 손님이 당안에 가득함

左手右應 : 인사를 여러사람으로부터 바쁘게 받음

승순군자 : 군자(남편)의 말에 잘 따르고 이행함

傳世舊物 : 예부터 내려오는 가보

孝奉舅姑 : 효도로써 시부모를 잘 받들어 모심

사린 : 사방의 이웃

도축 : 기도하고 축원함

寸效 : 조그만 효과

쇠모지년 : 체력이나 기력 등이 점점 떨어지는 나이

호천고지 :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초상을 알림

우공 : 우애(형제간의)

시훼골입 : 어떤 일에 골몰하여 몸이 많이 상하고 뼈만 남았음

弄璋之慶 : 아들자식을 낳는 경사

소희 : 첩

속현 : 시집을 오는 것

범칠거 : 봉건시대에 여자가 범하는 칠거지악. 여기서는 후사를 끊게한 것을 일컬음

춘색 : 젊은 기운. 젊은 미색

태우 : 재상가(대부이상의 벼슬)

조종향화 :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는 것

日暮客歸 : 날이 저물어 손님들이 다 돌아감

彈琴 : 거문고를 연주함

파조 : 조정의 일을 끝냄

상해 : 항상

短處 : 단점. 부족한 점. 모자란 점

언영색 : 교언영색(巧言令色).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

태후 : 아기를 잉태한 징후

악사 : 나쁜 일. 나쁜 짓

박혁기주(博奕妓酒) : 바둑과 장기와 기생과 술, 즉 잡색을 좋아함

문한 : 문필. 문장

간능 : 재간과 지능이 뛰어남

신청 : 믿어줌

동취 : 같은 취미를 가짐. 같이 더불어 있음

정적 : 감정으로 느낄수 있는 흔적

풍한의 촉상 : 감기는 찬바람에 몸이 병들음

不出口外 : 입 밖으로 내지 않음

如土 : 흙과 같음, 즉 얼굴빛이 흙빛이 될 정도로 놀램

결원 : 원한을 맺음

물시 : 보지 않음

饑荒 : 기근. 주려서 누렇게 부황이 듦

유리 :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질고(疾苦) : 병고

무뢰표박지인 : 일정한 직업없이 방황하고 불량한 짓을 하며 이리저리 다니는 사람

전세지물 :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천사만상 : 천가지 만가지로 이리저리 헤아리고 생각함

閨門 : 규중

임사 : 관리가 도임지에 가서 하는 정치

자단 : 스스로 단정지음

골경신해 : 너무 놀라 정신이 없음

간비 : 간특한 첩

슈사난속(殊死難贖) : 칼로 목베어 죽어도 속죄하기 어려움

무복 : 자백을 하지 않음

여불위 : 진시황의 친아버지. 진나라 큰 상인으로 진나라 왕자를 구해 왕이 되게 하고 자신의 애를 밴첩을 주었음. 여씨 춘추를 만들었음

석고대죄 : 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벌을 기다림

운발 : 구름같은 머리

秋官大爵 : 형조의 일을 맡은 관리에 임명함

고렴 : 보살피고 생각함

금옥지교 : 금과 옥처럼 굳고 밝은 교훈

도금 : 지금에 이르러서는

소분지 : 규모가 작은 분란

혈혈약녀 : 혈혈단신 약한 여자

구고 : 시부모

무소의 : 당나라의 측천무후

유치 : 어린아이

소장 : 전국시대의 변설가인 소진과 장의

발명 : 변명

현누 : 누설되어 알게 되면

하수(下手) : 손을 대어 사람을 죽임

투부 : 투기하는 아내

유무불관 : 있고 없고 관여치 않음

독수 : 독한 손. 남을 해치려하는 악한 손

강상대변(綱常大變) : 윤리 도덕상의 그릇된 큰 변고

黜去 : 내쫓음

衆意 : 대중의 의견. 대체적인 의견

後嗣滅絶 : 후사가 끊김

핵실 : 사실 진위를 단단히 따져 밝힘

고주 : 옛 주인

고두배송 : 머리를 조아리고 떠나보냄

행로(行路) : 가는 길

교부(轎夫) : 가마꾼. 가마 매는 사람

수식 : 겉모양을 꾸미는 몇몇 장식품

각고 : 각별한 고생

화촉지구 : 결혼할 때 쓰는 갖가지 물건

서어(齟齬) : 사물이 서로 맞지 아니함. 아래 윗니가 서로 어긋남

명부 : 저승

僞簡 : 가짜 편지

息婦 : 자식의 아내. 며느리

주중인 : 배안에 있는 사람

賤家 : 천한 집

관곡 : 간절하고 인정이 많음

요절 : 긴히 필요함(노자돈에 긴히 쓰임)

반전 : 돈, 조금의 돈

비간 : 은나라의 재상

오자서 :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오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처 원수를 갚았음. 그러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을 살려주므로 이에 자결하여 오나라가 망하는 것을 눈을 빼어 본다고 하였음

궁천지통 : 하늘에 닿을 정도의 아픔

운상무의 : 구름치마와 안개저고리. 선녀의 옷

제요. 제순 : 요임금과 순임금, 요임금의 두 딸 아황과 여영이 순임금 아내가 되었음

寒微之人 : 미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

강어 : 강에 사는 고기

效側 : 본받음

곡죽 : 굽거나 곧음

車馬 : 수레와 말

이비 : 두 왕비, 아황  여영으로 순임금이 죽자 뒤따라 상강물에 빠져 죽음

니고 : 늙은 여승

人世 : 인간세상. 사람들이 사는 세상

벅벅이 : 틀림없이 그러하리라고 짐작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

點頭 : 승낙하거나 옳다는 뜻으로 고개를 약간 끄덕끄덕함

가음 : 감나무 열매. 감

相得 : 두 사람 뜻이 서로 맞음

天地無家客 江湖有髮僧 :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는 집없는 나그네요 머리 기른 승려

품수 : 선천적으로 타고남

초제(醮祭) :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

봉번 : 마음이 산란하고 번잡함

夢  : 자다가 가위에 눌림

간의태후 : 중국에서 주로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벼슬 이름. 간의대부

論劾 : 논하여 탄핵함

쟁총 : 계집 등이 사랑받기를 서로 다툼

혹기 : 바른 길에 장애가 되는 기운

운(云) : 말하기를

고혹 : 남의 마음을 홀려 중용을 잃게 함

열람 : 책 따위를 쭉 훑어보거나 조사하여 봄

내도 : 다름

양책 : 좋은 계책

패누 : 일이나 말 등이 누설됨

신기묘산 : 신통하고도 묘한 기술과 계략

간인(姦人) : 간통하는 사람

국강 : 국가의 기강

定配 : 일정한 곳에 귀양을 보냄

水土 : 물과 땅, 즉 풍토

天殃 : 하늘이 내린 재앙

零寒 : 쌀쌀함

適客 : 귀양살이 하는 사람

상한유질 : 여러가지 풍토병

탐람 : 음식이나 재물 등을 탐냄

부세 :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

궐 : 비어 있음

대사 : 대사면. 나라의 기쁜 일이 있을 때 경축의 의미로 죄인들을 크게 풀어줌

恩赦 : 천자의 은혜로 사면됨

양구(良久) : 시간이 꽤 오래 걸림

만사유경 : 만번 죽어도 그 죄가 오히려 가벼움

오열장탄 : 크게 흐느껴 울며 길이 탄식함

입어세(立於世) : 세상에 서 있음. 살아있음

가정 : 집에서 부리는 남자 일꾼

古主 : 옛 주인

사장 : 모래밭

江魚腹食 : 강에 있는 물고기에게 먹혀 뱃속에 있음. 강에 빠져 죽음

의기자약 : 의로운 기가 있어 큰 일을 당하여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여 태연함

초각 : 깨달음

원찬 : 멀리 귀양보냄

저수무언(低首無言) :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음

薄田 : 메마른 밭

조종거고 : 조상들에게 받들어 고함

腹心 : 심복 부하

不仁 : 어질지 못함

사획 : 어떤 일등을 철저하게 조사함

구의 : 옛날 말의 관청, 즉 여기서는 관노비가 됨을 의미함

적몰 : 죄인의 재물을 전부 몰수함

초용 : 불러서 씀

設科 : 과거를 열어 시험을 봄

潔服後取妻 : 깨끗한 옷을 입은 후 아내를 맞음. 혼인

민 : 번민. 고민

중작 : 중요한 직책

庸愚之人 :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

行公察職 : 공무를 집행하고 직무를 보살핌

강서방백 : 강서땅의 지방 수령

절사(絶嗣) : 뒤를 이를 후손이 끊어짐

잡유(雜類) : 잡다한 무리. 잡인

상고(商賈) : 장사꾼

결복( 服) : 삼년상을 마침

예성 : 명예와 성문, 칭찬하는 소리

실혼(失魂) : 넋이 나감

맹타(猛打) : 매우 사납게 두들겨 때림

노고(老姑) : 할미

가무(歌舞) : 노래와 춤

진목(瞋目) : 두 눈을 부릅뜸

관영(貫盈) : 가득하게 함

원억 : 원통하고 억울함

宴樂 : 잔치를 베풀어 즐김

이해와 감상

사씨 남정기는 즉, 작중인물 중의 사씨부인은 인현왕후를, 유한림은 숙종을, 요첩(妖妾) 교씨는 장희빈을 각각 대비시킨 것으로, 궁녀가 이 작품을 숙종에게 읽도록 하여 회오시키고 인현왕후 민씨(閔氏)를 복위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일부 다처주의 가정 속에서의 처첩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가정 소설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어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하며, 즉 교씨와 동청 등 음모자들의 활약과 적나라한 욕망의 표출, 일방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정실 부인,그리고 그 가운데 놓인 시비들의 역할 등이 후대 가정 소설의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후대의 여성 독자층의 요구와 기호에 맞추어 처첩간의 갈등, 축첩으로 인한 가정 내 비극이 얽혀 장편 대하 소설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특히 숙종 때 장희빈(張禧嬪)사건과 유사하여, 숙종이 인현 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정비(正妃)로 세운 것을 풍자하여 숙종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지었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규경의'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제기된 이러한 지적으로 말미암아 목적 소설의 하나로 불리기도 한다. 실상 인현 왕후 폐비 사건에 김만중 집안은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숙종의 첫 왕비가 김만중의 형 김만기의 딸이었고, 조카딸 왕비가 죽은 뒤 인현 왕후가 왕비가 된 이후 계속 인현왕후 편에 서 있었던 것이다. 김만중은 처음 장희빈이 세력을 얻을 때 숙종에 간하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어 결국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김만중의 증손자인 김춘택은 인현 왕후의 복위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작품 내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다양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성격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많은 시비들과 창두. 유모 그리고 배장사꾼 등이 교씨. 동청. 냉진을 '하늘 땅에 용납 못할' 사람으로 증오하고 사씨부인의 비극적 운명을 동정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민중들의 도덕관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사씨는 집에서 쫓겨났지만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승리하고 만다는 결말 처리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유연수는 가장으로서 언뜻 보기에는 학식이 있고 사리에 밝은 사람으로 조정에서는 간신 엄승상의 박해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질적으로 수신제가를 못 이룬 무능한 양반관료에 불과하다. 그는 교씨의 흉계에 속아 사씨를 내쫓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똑같은 궁한 처지에 빠진다. 눈여겨 볼만한 인물로 유한림의 고모인 두 부인이 있다. 그녀는 유씨 가정의 어른으로서 오랜 생활체험을 통해 축첩제도의 불합리성을 깨달은 인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씨가 자진해서 첩을 맞아들인다고 했을 때,

"속담에 이르기를 한 말에 두 안장이 없고 한 밥 그릇에 두 숟가락이 없다 하더라, 지금 시속이 예전과 다르고, 성인이 아닌 범인으로서 어찌 투기가 생기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랴. 공연히 옛날의 미명(美名)을 사모하여 화근의 씨를 뿌리지 않도록 함이 좋다."

고 타이른다. 이러한 인물의 설정은 작가가 축첩제도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씨남정기》는 특히 교씨. 동청. 냉진 등 부정적 인물들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에서 매우 사실주의적이다. 동청과 냉진은 전형적인 악인이다. 그들은 모두 양반가의 자손들로 주색과 사기, 모략과 아부를 일삼는 패륜아들이다. 그들은 교씨와 한 짝이 되어 음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작품에서는 이들을 간신 엄승상과 연계시켜 놓고 그들의 성격을 사회관계 속에서 밝히고 있다.

작품은 또한 까다로운 한문투의 표현을 피하고 구어체에 접근하여 속담이나 격언 등을 적절히 이용하여 우리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은 권선징악적 관념과 봉건적인 각도에서 사씨부인의 성격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묘사한 한계를 갖고 있다. 사씨는 양반가문에서 자라났고 유씨 가문에 시집온 후에도 전통적인 유교의 윤리규범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여인이다. 그녀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자진해서 첩을 맞아들이는 것, 누명을 뒤집어쓰고 유씨 가문에서 쫓겨난 다음에도 남편의 선산에 가서 살려는 것 등이 다 '착하고 현숙한'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그녀의 이러한 판단과 처신은 유교적인 삼종지의(三從之義)를 따르는 것으로 작가 자신의 가치관이 봉건적 도덕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한계성을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사씨남정기'에 대한 후대의 논평

서포는 속언(俗言)으로 많은 소설을 지었다. 그 가운데'남정기'라 하는 것은 할 일없이 지은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패관 소설은 황탄하지 않으면 경박하고 화려한데, 백성의 도리를 돈독히 하고 세교(世敎)에 도움이 되게 할 만은 것은 오직 '남정기'뿐이다. -김춘택의<북헌집>에서-

심화 자료

김만중(金萬重)

1637(인조 15) ∼ 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 소설가.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조선조 예학 ( 禮學 )의 대가인 김장생 ( 金長生 )의 증손이다.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이다.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 ( 仁敬王后 )의 숙부이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 ( 尹斗壽 )의 4대손이다.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 방(昉)의 증손녀이고, 이조참판 지( 猩 )의 딸인 해평윤씨이다.

[생 애]

김만중은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아버지 익겸은 일찍이 정축호란(1637)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형 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며 살았다. 윤씨부인은 본래 가학(家學)이 있어 두 형제들이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궁색한 살림 중에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함에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다.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내어 손수 등사하여 교본을 만들기도 하였다.

≪ 소학 ≫ · ≪ 사략 史略 ≫ · ≪ 당률 唐律 ≫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연원 있는 부모의 가통 ( 家統 )과 어머니 윤씨의 희생적 가르침은 훗날 그의 생애와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만중은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세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료로 발을 디디기 시작하였다. 1666년에 정언 ( 正言 ). 1667년 지평 ( 持平 ) · 수찬 ( 修撰 )을 역임하였다.

1668년에는 경서교정관(經書校正官) · 교리 ( 校理 )가 되었다. 1671년에는 암행어사로 신정 ( 申晸 ) · 이계(李稽) · 조위봉 ( 趙威鳳 ) 등과 함께 경기 및 삼남지방의 진정득실(賑政得失)을 조사하기 위해 분견(分遣)된 뒤에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1674년까지 헌납 · 부수찬 · 교리 등을 지냈다.

 

1675년 동부승지 ( 同副承旨 )로 있을 때에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당했다. 30대의 득의의 시절이 점차 수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에 그의 형 만기도 2품직에 올라 있었고 그의 질녀는 세자빈에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2차 예송 ( 禮訟 )이 남인의 승리로 돌아가자, 서인은 정치권에서 몰락되는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80년(숙종 6) 남인의 허적 ( 許積 )과 윤휴(尹 頊 ) 등이 사사(賜死)된 이른바 경신대출척에 의해 서인들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는 이보다 앞서 1679년 예조참의로 관계에 복귀하였다. 1683년에는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에 사헌부의 조지겸 ( 趙持謙 ) · 오도일 ( 吳道一 ) 등이 환수(還收)의 청(請)이 있자 이를 비난하다가 체직(遞職 : 직무가 바뀜.)되었다. 3년 뒤인 1686년에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에 다시 장숙의(張淑儀)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추국(推鞠 : 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년이 지난 1688년 11월에 배소에서 풀려 나왔다.

그러나 3개월 뒤인 1689년 2월 집의 ( 執義 ) 박진규(朴鎭圭), 장령 ( 掌令 ) 이윤수(李允修) 등의 논핵(論刻)을 입어 극변(極邊)에 안치되었다가 곧 남해 ( 南海 )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같이 유배가게 된 것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의 여화(餘禍) 때문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인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로 1692년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 그의 관작이 복구되었다. 1706년에는 효행에 대하여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활동상황]

김만중의 사상과 문학은 이전의 여느 문인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년에 와서 불운한 유배생활로 일생을 끝마쳤따. 그러나 생애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상당한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득의의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총명한 재능을 타고났다.

그리고, 가문의 훌륭한 전통 등으로 인해 그의 학문도 상당한 경지를 성취하였다. 그가 종종 주희(朱熹)의 논리를 비판했다든지 아니면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든지 하는 점은 결코 위와 같은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만중의 사상의 진보성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정한 한계는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 국문가사예찬론 ’ 은 주목받아 마땅한 논설이다. 그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한문은 ‘ 타국지언(他國之言) ’ 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철 ( 鄭澈 )이 지은 〈 사미인곡 〉 등의 한글가사를 굴원(屈原)의 〈 이소 離騷 〉 에 견주었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개명적 의식(開明的意識)의 소산으로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김만중이 ‘ 국민문학론 ’ 을 제창하였다고 할 만큼 그의 문학사조상의 공로는 매우 큰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용어 사용이 적절한 것인지는 재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만중이 살던 시대는 분명 중세의 봉건질서가 붕괴된 시대는 아니었던 만큼 국민문학이라는 용어도 성립할 수 없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적어도 ‘ 국민문학론 ’ 이 제창되는 것은 조선왕조가 끝나고도 한참 뒤에나 가능할 노릇이기 때문이다.

김만중의 우리말과 우리 글에 대한 일종의 ‘ 국자의식(國字意識) ’ 은 충분히 강조될 만하다. 더구나 그가 〈 사씨남정기 〉 와 같은 국문소설을 파다하게 창작했다는 점과 관련해 보면 허균 ( 許筠 )을 잇고 조선 후기 실학파 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믿어진다.

김만중은 시가와 소설에 대해서 상당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김만중은 소설의 통속성에 대하여 진수(陳壽)의 ≪ 삼국지 ≫ 나 사마광(司馬光)의 ≪ 통감 通鑑 ≫ , 그리고 나관중(羅貫中)의 〈 삼국지연의 三國誌演義 〉 를 서로 구별하여 통속소설에 대한 예술적 기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김만중은 한시 시학의 표준으로 고악부(古樂府)와 ≪ 문선 文選 ≫ 의 시를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율시 ( 律詩 ) 이전의 시를 배울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 점은 주희의 학시관(學詩觀)과 상통하면서도 인간의 정감과 행동을 중요시하는 연정설(緣情說)을 시의 본질로 본 것으로 특징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363수에 이르는 그의 시편들의 주조를 형성하는 단서로 작용하였다.

김만중의 많은 시들에서 그리움의 정서가 자주 표출되고 있는 점은 그의 생애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고시 계열의 작품을 애송하였던 것과도 맥이 닿고 있다. 장편시인 〈 단천절부시 端川節婦詩 〉 는 그의 주정적(主情的) 시가관(詩歌觀)에서 지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그 밖에 그의 소설이나 시가에서 많은 인물이 여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도 흥미있는 현상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낭만주의적 정감의 전달 대상으로 선택된 것 같다.

국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주로 〈 구운몽 〉 · 〈 사씨남정기 〉 등과 같은 소설이었다. 그러다가 근년에 들어와서 그의 시가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

 

김만중은 비교적 다른 인물보다 많은 연구논문들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새롭게 고찰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의 생애를 완벽하게 재구성해 보는 문제와 소설과 시가 사이의 관계, 또는 그의 사상의 진보성과 한계 등에 대한 정밀한 탐색이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방면에서의 축적된 연구성과 위에 김만중과 그의 문학이 문학사적 전망 속에서 보다 뚜렷한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를 기대한다.

≪ 참고문헌 ≫ 西浦文集, 西浦漫筆, 金萬重(李明九,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7), 九雲夢硏究(丁奎福, 高麗大學校出版部, 1976), 西浦小說硏究(金戊祚, 螢雪出版社, 1976), 西浦家門行狀(宋百憲, 형설출판사, 1982), 金萬重硏究(丁奎福, 새문社, 1984), 西浦年譜(金炳國 외 번역, 서울대학교출판부, 1992), 金萬重文學硏究(丁奎福 外, 국학자료원, 1992), 金萬重論(朴晟義, 思潮 2 思潮社, 1958), 金萬重硏究(金茂祚, 동아논총 5, 동아대학교, 1969), 西浦의 漢詩考(金戊祚, 又軒丁仲煥博士回甲紀念論集, 1974), 西浦評論硏究(金周漢, 嶺南語文學 3, 1976), 金萬重論(丁奎福, 한국문학작가론, 螢雪出版社, 1977), 西浦漢詩硏究(趙鍾業, 語文硏究 9, 1976), 金萬重(趙東一, 韓國文學思想史試論, 지식산업사, 1979), 西浦漫筆에 나타난 批評의 特性(崔信浩, 韓國學報 25, 一志社, 1981), 西浦의 생애와 한문학에 대한 재조명(尹浩鎭, 민족문화 10, 민족문화추진회, 1984).

구운몽

조선 후기에 김만중 ( 金萬重 )이 지은 고전소설. 4책본 · 3책본 · 2책본 · 1책본이 있다. 국문본으로 목판본(경판) · 필사본 · 활자본이 있고, 김춘택 ( 金春澤 )의 한역본이 있다. ‘ 남정기(南征記) ’ · ‘ 사씨전(謝氏傳) ’ 은 이 작품의 다른 이름이다.

명나라 가정(嘉靖)연간 금릉 순천부에 사는 유현(劉炫)이라는 명신은 늦게야 아들 연수 ( 延壽 )를 얻는다. 유공의 부인 최씨는 연수를 낳고 세상을 떠난다.

연수는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에 제수되었나,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10년을 더 수학하고 나서 관직에 나아가겠다고 한다. 천자는 특별히 본직(本職)을 띠고 6년 동안의 여가를 준다.

유한림은 덕성과 재학(才學)을 겸비한 사씨와 혼인한다. 사씨는 유한림과의 금슬은 좋으나 9년이 되어도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이에 사씨는 남편에게 새로이 여자를 얻기를 권한다. 유한림은 거절하다가 사씨가 여러 번 권해오니 마지못해 교씨(喬氏)를 맞아들인다.

교씨는 천성이 간악하고 질투와 시기심이 강한 여자로, 겉으로는 사씨를 존경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증오한다. 그러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출산하고는 자기가 정실이 되려고 마음먹고, 문객 동청(董淸)과 모의하여 남편 유한림에게 온갖 모함을 한다.

유한림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교씨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죽이고 죄를 사씨에게 뒤집어씌우니, 사씨를 폐출시키고 교씨를 정실로 맞이한다. 교씨의 간악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문객 동청과 간통하면서 유한림의 전재산을 탈취해 도망가서 살기로 약속하고, 유한림을 천자에게 참소하여 유배시키는 데 성공한다.

유한림을 고발한 공으로 지방관이 된 동청은 교씨와 함께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등 갖은 악행을 저지른다. 이때, 조정에서는 유한림에 대한 혐의를 풀어 소환하고, 충신을 참소한 동청을 처형하기로 한다.

유배를 당한 유한림은 비로소 교씨와 동청의 간계에 속은 줄 알고 지난날의 죄를 뉘우친다.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유한림은 사방으로 탐문하여 사씨의 행방을 찾는다.

한편, 남편 유한림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사씨는 산사에서 나와 남편을 찾으러 나선다. 사씨와 유한림은 도중에서 해후한다. 유한림은 사씨에게 지난날의 죄를 사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간악한 교씨와 동청을 잡아 처형하고 사씨를 다시 정실로 맞이한다.

이 작품은 숙종이 인현왕후 ( 仁顯王后 )를 폐출하고 장희빈 ( 張禧嬪 )을 중전으로 책봉한 사건에 대하여 숙종의 미혹됨을 깨닫게 하여 모든 것을 원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권선징악의 수법을 고도로 원용하여 쓴 폭로 · 풍간(諷諫)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작가 김만중이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는 일반적으로 쟁총(爭寵)으로 보고 있으나, 오히려 덕(德)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성혼 과정에서 매파가 사소저의 미색을 칭찬하자 유현은 덕을 강조하여 말했고, 또 사부인이 남편 유한림에게 소실을 얻도록 주선해주는 것은 부덕(婦德)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교씨의 간교로 인해 시가에서 쫓겨난 사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부모의 산소에서 지내는 것은 끝까지 덕을 실행해보려는 강인한 의지의 발로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쟁총형의 가정소설이라기보다는, 인간에 있어서의 덕성을 강조함으로써 민비 폐출의 부당성을 풍간하기 위한 풍간소설이다.

인물구성을 보면, 사부인은 고매한 인덕의 소유자로 설정해놓은 반면, 첩은 간교한 여인으로 등장시켜 악녀를 선녀에 대립시킴으로써 여자주인공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다. 유한림의 숙모인 두부인은 선악을 판단하는 사리 판별자로서 기능하며, 또한 다가올 일을 암시하는 복선의 기교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소설의 구성면에 있어서는, 다른 고전소설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사건전개에 큰 구실을 한다. 사부인이 시부모 묘하에 쫓겨나 있을 무렵 두부인의 위조편지를 받고, 비몽사몽간에 최부인이 꿈에 나타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여승 묘혜가 사부인과 상봉하여 사부인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도 역시 꿈의 계시에 의해서였다. 유연수의 중병을 고치는 일, 위기에서 구출되는 일 등 모두가 현몽의 덕분이다. 이처럼 꿈을 지나치게 과용한 것이 이 작품의 구성상의 흠이라 하겠으며 이는 또한 실감을 크게 감퇴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사실상의 배경은 숙종의 인현왕후 폐출사건에 있으나 소설 내용상의 배경은 중국 명나라 시대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날카로운 저항의식을 가리기 위함일 것이다.

이 소설은 이러한 목적의식 때문에 인물의 배치나 사건의 전개에 어떤 한계를 주어 작품의 문학성이 위축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나, 김만중의 작가적 능력은 이를 훌륭히 극복하여 작품적 성과를 크게 발휘하고 있다.

≪ 참고문헌 ≫ 사씨남정기(板刻本 古小說全集 4권, 延世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1973), 사씨남정기(舊活字本 古小說全集 4권, 仁川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3), 謝氏南征記硏究(禹快濟, 崇田語文學 1, 崇田大學校, 1972), 謝氏南征記硏究(金鉉龍, 建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76), 謝氏南征記의 反省的 考察(李元洙, 文學과 言語 3, 文學과 言語硏究會, 198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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