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사색에 대하여 / 쇼펜하워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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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에 대하여 / 쇼펜하워
  
  수량이 아무리 많더라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장서(藏書)의 효용도 의문스러우며, 수량은 보잘 것 없어도 정리가 잘 된 장서라면 훌륭한 효과를 거두는 것과 같이 지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많이 끌어모아도 스스로 사색해 낸 지식이 아니면 그 가치는 의심스러우며, 양으로는 보잘 것 없어도 몇 번이고 골똘히 사색해 낸 지식이라면 그 가치는 훨씬 크다.

  무엇인가 한 가지 일을 하고, 하나의 진리를 터득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여러 가지 지식이나 진리와 결합시키고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 수속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의 지식이 완전한 의미로 획득되고, 그 것을 자유로이 구사(驅使)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철저히 사색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알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아는 것은 이미 사색해 낸 것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책을 읽고 학문을 익힐 수는 있지만, 사색하는 일은 원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사색한다는 것은 마치 불이 공기의 유통에 따라 꺼지지 않고 타오르듯이 보존될 필요가 있다.

  이 관심은 순전히 객관적인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후자는 주로 우리들이 객관적인 문제에 부닥쳤을 때 생기지만 전자는 단지 천성적(天性的)으로 사색하는 일이 호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뇌를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사색한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 가운데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스스로 하는 사색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과,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 사이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차이가 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두뇌의 차이가 있고, 이 차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스스로 사색하는 데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읽어서 소화하는 데 능한 것이다. 이러한 선천적인 차이는 스스로 사색하느냐, 또는 독서에 의하느냐에 따라 더욱 그 차가 심해진다.

  독서는 우리가 순간적으로 갖고 있는 정신의 방향이나 기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거나 성질이 다른 사상을 마치 도장을 찍듯이 강제로 정신에 찍어 준다. 이 때 정신은 외부로부터 어느 때는 이것을, 또 어느 때는 저것은 ― 이러한 것에 대해 자신은 전혀 아무런 충동도 흥미도 갖고 있지 않더라도 ― 생각하도록 ― 사색하도록 심한 강제를 받는 셈이다. 그러나 스스로 사색하는 정신은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외계(外界) 또는 어떤 경고(警告)에 의해서 속박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독서하는 정신과는 달리 자신의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독서의 경우와 같이 어떤 특정한 사상이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것은 그 사람의 천성과 그때의 기분에 맞는 것을 사색하기 위한 소재(素材)와 기회를 제공할 따름이다 ― 그러므로 다독(多讀)은 정신의 탄력성을 몽땅 잃게 한다. 오랫동안 용수철에 무거운 짐을 매달아 놓아두면 그 탄력성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턱대고 아무것이나 닥치는대로 읽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사상을 갖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가 우둔하고 고상한 정신을 갖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의 학문을 쌓아감에 따라 점점 이 경향이 강해지고, 그들의 저작(著作)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것도 이 안이한 길을 걷기 때문이다. 그들은 푸우프가 이미 말한 대로이다.

  영원히 읽고 있을 뿐 읽혀진 적은 없었다.
  학자란 많은 책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사상가나 철학자는 인류의 눈을 뜨게 하고 그 전진을 촉진시키는 자로서 범(汎)세계적인 책을 직접 읽은 사람을 말한다.
  
  본래 자기의 근본 사상에만 진리와 생명이 깃든다. 왜냐하면 오직 그것만을 우리들은 진정한 의미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에서 얻은 남의 사상은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나 남이 벗어버린 헌옷에 불과하다. 우리들의 정신 속에 불타고 있는 사상과 책에서 읽은 남의 사상을 비교한다는 것은 마치 봄에 만발한 꽃과 화석(化石)이 되어 버린 태고(太古)의 꽃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독서는 사색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는 타인에게 사상을 유도해 내는 임무를 맡긴다. 대부분의 책은 그 지도를 받는 사람 앞에, 얼마나 많은 미로(迷路)가 있는가, 그 사람이 얼마나 엄청난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타고난 재질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 다시 말해서 자발적으로 올바르게 사색하는 사람은 올바른 길을 발견하는 나침반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서는 다만 자기의 사상의 샘이 고갈되었을 때에만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가장 훌륭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 부득이 독서를 하는 경우를 곧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책을 읽을 목적으로 생생한 자기의 사상을 추방한다면, 그것은 성스러운 정신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한 죄인은 '식물도감'을 보고 동화판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 넓은 자연으로부터 도피한 사람과 비슷하다.

  이따금 우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애써 스스로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것을 정리하여 겨우 만들어낸 진리나 견해가 우연히 수중에 들어온 책 속에 그대로 씌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실망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여 획득한 것은 단지 읽어서 안 거에 비해 백 배나 더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여 비로소 그 진리는 우리들 사상의 전 체계 속에 없어선 안 될 구성 부분으로 또 유기적인 구성요소로 편입되어, 그 체계와 완전하게 긴밀하게 결합되어 그 근거와 결론이 모두 이해되며,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의 색조 색채 그리고 특징을 띠게 된다. 또한 필요하다고 느낄 때 때맞추어 나타나기 때문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여 두 번 다시 사라져 버리는 일이 없다. 다음과 같은 시구는 아주 적절한 표현으로 이러한 사실을 규명해 주고 있다.

  그대가 그대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소유하려면 그것을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
  즉,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은 우선 자기의 학설을 세우고, 그런 뒤에 그것을 보충하는 다른 사람의 학설을 배우는데, 이것도 자기 학설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뿐이다. 그런데 서적 철학자는 다른 사람의 권위있는 학설에서 출발하여 다른 사람의 학설을 책 속에서 수집하여 하나의 체계를 만든다. 그 결과, 이 사상 체계는 마구 끌어모은 재료로 만든 생명없는 자동인형과 같은 것이 되는데, 그것에 비하면 자기 자신의 사색으로 만든 체계는, 이를테면 갓 태어난 산 인간과 비슷하다. 그 태어난 방식이 산 인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외계의 자극을 받아 임신한 정신에서 오랜 회임(懷妊) 기간을 거쳐 태어난 것이다.

  단지 남에게 배워서 얻은 진리는 우리에게 부착되어 있을 뿐, 그것은 마치 의수(義手) 의족(義足) 의치(義齒), 아니면 초로 만든 코, 다른 살을 이용하여 정형수술한 코 같은 것이지만, 스스로 사색하여 얻은 진리는 산 수족과 같은 것으로, 그것만이 정말로 우리 자신의 것이다. 사상가와 단순한 학자의 차이도 여기서 유래한다. 따라서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의 정신적 작품은 정확한 빛과 그림자의 배합, 부드러운 색조, 색채의 완전한 조화로 생생하게 약동하는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이지만, 이에 반하여 단순한 학자의 저작은 색채도 풍부하고 잘 배열되어 있지만, 조화가 결여된 무의미한 팔레트와 같은 것이다.
  
  독서는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독서를 계속해 가면 다른 사람의 사상이 강하게 흘러 들어온다. 그런데 빈틈이 없을 만큼 완전한 체계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언제나 정리된 사상을 스스로 창조하려고 하는 사색에 있어서 이처럼 해로운 것은 또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사상은 하나하나가 모두 남의 정신에서 싹튼 것이며, 다른 체계에 속하고 다른 색채를 띠고 있어서 스스로의 사색과 지식, 식견과 확신과 하나의 총체를 이루도록 합류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창세기의 비밀로서 나를 생각하게 하는 언어에 혼란을 일으켜 그런 것을 쌍아 넣은 정신으로부터 통찰력을 모두 빼앗아 버리고 유기적 조직의 대부분을 파괴해 버린다.

  이런 상태는 많은 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으며, 그들이 상식이나 옳은 판단, 실천상의 분별에서 무식자들에게 뒤떨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학문은 없어도 경험이나 대화, 얼마 안되는 독서로 얻은 하찮은 지식을 언제나 자기의 생각으로 삼아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일을, 규모는 광범위하지만 과학적인 사상가도 행하고 있다. 물론 사상가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며,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있지만, 그 정신은 강력하여 이 모든 것을 동화하고 잘 다루어 자기의 사상체계에 병합시킬 수 있다. 즉 끊임없이 시계(視界)를 넓히면서도 유기적인 조직을 잃지 않는 장대한 통찰력에 의하여 그 재료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사상가 자신의 사색은 파이프 오르간의 기초 저음처럼 모든 음의 사이를 누비며 끊임없이 울려 퍼지며, 결코 다른 음에 의해 지워지는 일이 없다. 그런데 단지 박식하기만 한 사람은 모든 음색의 음악 파편이 서로 난립하여 기초 저음은 들을 수 없게 된다.
  
  독서로 일생을 보내고 여러 가지 책에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여행 안내서를 몇 권 읽고서 어느 지방에 정통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과 다름없다. 이런 사람은 많은 것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 결국 그 나라의 사정에 대해 정리된 지식, 즉 명확한 기초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이와는 반대로 사색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은 문제의 고장을 진정한 의미로 알 수 있으며, 그 지방의 사정에 대해서도 정리된 지식을 가질 수 있고, 또한 내집처럼 정통할 수가 있다.
  
  평범한 서적 철학자와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역사가와 목격자의 관계와 같다. 사색하는 사람은 사물에 대해서 직접 파악한 바를 말한다. 따라서 자기 나름대로 사색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상가들 간에는 근본적 공통점이 있다. 그 차이는 단지 입장이 다른 데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입장이 다르지 않을 경우에는 그들은 모두 똑같은 말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오직 객관적으로 파악한 것 이외에는 말로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만든 여러 가지 명제(命題)가 역설적인 것처럼 생각되어 늘 주저하면서 대중에게 공포하였는데, 후에 똑같은 명제가 위대한 고인(古人)들의 저서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 일이 가끔 있다.

  이에 반하여 여러 사람의 말과 의견, 나아가서는 그것에 타인이 가한 반론 따위를 보고하는 것이 서적 철학자의 일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비교하고 고찰하고 비판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이 점에서 그는 비판적 방법을 무기로 삼는 역사가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라이프니쯔가 한때나마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었던 시대가 있었느냐 하는 따위의 연구를 시도하게 된다. 호소사가(好事家)를 위해 이런 종류의 명백한 실례로 헤르바르트의 <도덕 및 자연법의 분석적 해명>과 <자유에 대한 서한>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이 자신에게 부과한 많은 노력을 알면 누구든지 깜짝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사물 그 자체를 안중에 둘 생각이라면 조금만 스스로 생각하면 곧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색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생각하는 일은 그렇지 못하다. 즉 사상과 인간은 같은 것으로서, 임의로 불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외적 동기와 내적 기분, 긴장이 잘 합쳐져 조화를 이루면 자연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사색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좀처럼 이렇게 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개인적 이해문제를 생각해 보면 해명이 된다. 무언가 그와 같은 사건으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될 때, 멋대로 시간을 택하여, 앉아서 여러 가지 이유를 숙고하고 이제는 결심이 설 것인가 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각이 좀처럼 집중되지 않고 다른 쪽으로 빗나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럴 때면 억지로 생각해 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기분이 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뜻하지 않게 되풀이하여 생각하는 데 적합한 기분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리고 다른 시기에 다른 기분으로 문제를 생각하면 그 사건에 다른 빛을 던져 주기도 한다. 이렇게 성과는 나무의 열매가 성숙하는 것처럼 점차적으로 성숙한다. 왜냐하면 사색이란 단번에 가능한 것이 아니고 단계적으로 나누어 할 필요가 잇다. 이렇게 하면 이전에 지나쳐 버린 것을 알게 되고, 사태를 확실하게 직시할 수 있으며 문제도 훨씬 수월해 보이고 혐오감도 사라지게 된다.

  이론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역시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독서에 이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독서는 정신에 생각하는 재료를 보급해 주긴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스스로 생각하는 대용품으로 언제나 우리가 가는 행방과는 달리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하여 생각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너무 많이 읽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정신이 대용품에 길이 들어 생각하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이 닦아 준 길을 잊어버려, 그 발자취를 다듬을 분 자기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면 아무 일도 안 되기 때문이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책을 읽는 데에 정신이 팔려 현실 세계를 직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독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스스로 생각하는 동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것은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사색하는 정신에게는 자연스러운 대상이며, 아주 쉽게 정신을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과 서적 철학자는 이미 말하는 솜씨만으로도 쉽게 식별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즉 사상가의 특징은 진지하고 직접적 근원적이며 그 사상이나 표현, 모든 것에 독창성이 있다. 그러나 서적 철학자는 모든 것이 재탕이며, 개념도 남의 것을 그대로 받아 옮기는 것이고 잡동사니를 사 모은 꼴이며, 복사한 것에 다시 복사한 것처럼 희미하고 확실하지 못하다. 그리고 틀에 박힌 진부한 문구와 당세에 통용되는 유행어로 된 문체는 자기들 스스로 주조(鑄造)한 화폐가 없어서 외국 화폐만을 통용하고 있는 작은 나라와 비슷하다.

  1) 포우프 : Pope, Alexander(1688∼1744). 영국의 시인.
  2) 라이프니쯔 :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정치가.
  3) 헤르바르트 : Herbart, Johann Friedrich(1776∼1842). 독일의 철학자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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