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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론 / 미끼 기요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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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론 / 미끼 기요시(三木淸)


만일 독서의 정신이란 말을 할 수 있다면 독서의 정신은 대화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신이란 것은 그 일의 순수한 형태, 본질적인 자세라는 뜻이다. 정신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방법이기도 하다. 독서는 대화의 방법에 의해야 한다. 그런데 대화의 정신은 또 철학의 정신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그리고 플라톤이 대화를 철학의 형식으로 삼은 것은 철학적 정신의 근원적인 발현이었다. 그 이후 모든 창조적인 철학은 소크라테스적 혹은 플라톤적대화로 제각기 돌아가는 것이다, 대화는 철학적 생명 운동의 근본적 형태이다. 여기에서 다시 독서의 순수한 모습은 철학적이라고 할 수가 있으리라.

그런데 이 철학의 정신은 과학의 정신과 별로 다른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런 것 같고, 본질을 살펴보아도 그렇다. 철학적 정신은 과학적 정신의 근원적인 형태이고 혹은 그 도식이다. 소크라테스적 대화란 무엇이냐, 결코 끝나는 일이 없는 탐구이다.

그리고 과학이란 이것 이외의 다른 무엇이겠는가. 따라서, 독서의 정신은 과학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도대체 독서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어떤 서적을 만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마치 대화가 어떤 인간을 만남으로써 시작되는 것처럼 독서는 하나의 해후이다. 사실 누구나 자기의 독서 경력을 되돌아보면 틀림없이 독서가 제각기 해후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칠 것이다. 적어도 자기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독서는 항상 해후이었다. <중략>

우리는 우연히 어느 서적과 마주치고 그리고 읽기 시작한다. 그 책을 우리는 서점의 신간 서적의 줄에서 찾아 낼 때도 있다. 혹은 그것을 헌 책의 퇴적 속에서 발견할 때도 있다. 혹은 그것을 도서관의 카드 속에서 만날 때도 있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시장이나 거리나 체육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대화를 시작한 것 같이, 우리는 우연히 마주친 책을 잡고 읽기 시작한다. 물론 계획적인 독서란 것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필요한 독서이다.

그러나 계획적인 독서는 독서의 정신에서 보면 차리리 제2적인 것―뒤에서 나는 독서의 제2의 형식으로서 이것을 이야기할 참이다―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독서의 즐거움은 계획적인 독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느 쪽이든 중요한 일은 계획적인 독서도 그 근원에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항상 해후라는 사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계획적인 독서는 교사나 누구에게 지시된 대로 읽는 독서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의 교사라는 사실은 이미 하나의 해후가 아닌가. 또, 계획적인 독서는 무슨 책에 추천되고 있는 문헌을 읽는 독서이다. 그런데 그 처음 한 권의 책을 내가 보았다는 것은 이미 해후가 아닌가. 다시 자기 자신이 계획을 세워서 독서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가 안내로 삼는 것은 연구라든가 도서관 같은 곳의 카탈로그이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그런 책을 발견한다는 것도 벌써 하나의 해후가 아닌가. 이것은 모든 서적이 우리 인간이나 한 가지로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책과 마주친다는 것은 인간과 마주친다는 것과 똑같은 기쁨이 있다. 독서의 기쁨은 이런 해후의 기쁨이다. 그런데 모든 역사적 사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이 독서에 있어서의 해후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해후란 말은 한편으로 어느 필연성을 의미해야 한다. 전혀 우연히 마주친 것 같지만 그것이 역시 필연이었다고 끄덕일 수 있는 것이 해후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한 외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필연성이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사이에는 해후가 있었다. 괴테와 쉴러 사이에도 해후가 있었다. 독서에 있어서도 똑같이, 혹은 스승으로서의 혹은 친구로서의 책에 대한 해후가 있을 것이다. 일생 이런 해후를 경험하지 못한 자는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결국 아무것도 안 읽은 것과 똑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우리는 이런 해후를 경험할 수 있을까. 스스로 구함으로서이다. 구하는 것이 없는 자는 마주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가량 마주친다 해도 그것임을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무엇인가를 구하면서 독서하는 자만이 그런 해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는 구할 것인가. 구한다고 할 때는 이미 무언가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미 그것에 무언가 만난 일이 있어야 한다. 이리하여 이미 탐구 이전에 해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플라톤의 아나무네시스설[想起說]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상기도 하나의 해후이다.) 그러나 인식은 상기라고 하는 플라톤에 있어서 거기(인식)에 이르기까지는 긴 탐구의 대화가 있다.

해후는 대화를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필연적인 조건으로 삼는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아무하고나 붙들고 서서 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말없이 그를 지나가게 한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간단한 인사만 하고 지나갈 것이다. 우리가 마주치는 책 가운데에도 이런 종류의 것이 많다. 제각기의 책은 그것이 마땅히 다루어져야 하는 대로 다루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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